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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슬럼버 (특별판) - 영화 <골든슬럼버> 원작 소설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2월
평점 :
품절
살면서 추행 당한 적이 몇 번 있는데 눈으로 본 희롱은 빼고 몸으로 겪은 처음은 중학생 때였다. 몇 학년 때였는지는 기억에 없고 오늘 이상으로 날씨가 좋은 봄이었다. 분식집에서 어묵을 사먹고 친구 주려고 어묵 몇 개를 든 채 룰루랄라 걸어가는데 남자가 내 가슴을 만지고 튀었다. 그래서 내가 어쨌느냐면 어리둥절하게 서있다가 그 자리에서 친구 줄 어묵을 내가 먹고 독서실에 가서 수다를 떨고 웃고 공부하다 해 떨어지고 집으로 왔다. 엄마한테도 아무 얘기하지 않은 채 집에서도 내도록 평시와 같았다. 그런 내가 스스로도 이상해서 혼란스러웠고 그 때의 반응은 이후에 겪었던 추행 때와도 완전히 달라서 지금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화조차 나지 않았다니. 물론 처음만 그랬지만. 그런데 골든 슬럼버의 주인공 아오야기가 꼭 그 때의 나와 같았다.
아오야기는 자신에게 닥친 일이 얼떨떨하다. 대학 동기 모리타가 자신에게 수면제를 먹인 일이나 친구의 차에서 잠든 사이 총리의 암살범이 된 일이. 일말의 양심으로 도망가라고 말해준 모리타의 차가 폭발하고 경찰이 무기도 들지 않은 자신에게 곧장 발포를 하는 영문 모를 일들이. 자꾸만 이게 현실이 맞나? 당황스럽기만 한 것이다. 꿈꾸는 것 같고 뭐가 뭔지 모르겠고 불안은 한데 아오야기가 소화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들이라 화조차 나지 않는다. 그냥 얼른 오늘 하루가 끝나서 잠이나 잤으면 싶은 그런 심정, 방금 전까지 쫓기고 있었으면서도 오해겠지 실수겠지 착오가 있는거겠지 하며 아무런 위기감이 생기지 않는 상태이다. 그러니 집으로 가는 것이다. 아오야기는 택시를 타고 집에 간다. 집에 올라가기 전에 평상시랑 똑같이 우편물을 확인한다. 엘리베이터를 탄다. 엘리베이터 안에 자신 외에 두 명의 남성이 있지만 신경쓰지 않는다. 자신에게 총까지 쏜 경찰들이 당연히 집에 먼저 와있을거라는 예상은 아예 머릿속에 없다.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태다. 그런 사람도 있다. 누구나 나를 때리는 상대에게 반사적으로 방어하고 곧장 화를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바보 같지만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그럴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골든 슬럼버의 초반부는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읽어야 수월하다. 아오야기가 내내로 현실을 망각하니까. 총리 암살범, 도망자라는 명패를 달게 된 자신의 위치를 계속계속 망각하니까. 독자 입장에선 많이 답답할 수 있다. 액션은 있지만 아오야기가 히어로 스타일은 아니므로 속이 뻥 뚫리는 식의 대탈주는 그려지지 않는다. 머리가 엄청나게 좋은 지능형 도피자도 아니니만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의 카타르시스와도 거리다 멀다. 반전으로 약자가 어퍼컷을 날려 상대를 KO 시키는 호쾌함도 없다. 그럼 무슨 재미로 완독했냐구?
사람
"상대는 형의 말을 믿는 사람인가요?"
"몰라. 하지만 이제 남은 무기는 사람을 믿는 것뿐이야." (p289)
아오야기는 다름아닌 총리 암살범이다. 그렇게 언론을 타고 있다. 그러나 가족과 친구들이 그를 믿어준다. 우연처럼 다가온 사람들에게서도 목숨 같은 정보와 기회들을 얻는다. 배경은 현실인데 인연은 소설 같다. 대학시절의 추억들, 그 시절 아무 의미 없이 나누었던 무익한 말들과 소재가 징검다리가 되어 그를 살린다. 숨박꼭질 하듯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오늘의 우리 시대가 고스란히 반영된 것만 같은 현실에의 공감
"이름도 못 밝히는 너희 정의의 사도들, 정말로 마사하루가 범인이라고 믿는다면 걸어봐. 돈이 아니야, 뭐든 자신의 인생에서 소중한 것을 걸라고. 너희는 지금 그만한 짓을 하고 있으니까. 우리 인생을 기세만으로 뭉개버릴 작정 아니야? 잘 들어, 이게 네놈들 일이란 건 인정하지. 일이란 그런 거니까. 하지만 자신의 일이 남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면 그만한 각오는 있어야지. 버스기사도, 빌딩 건축가도, 요리사도 말이야, 다들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가며 한다고. 왜냐하면 남의 인생이 걸려 있으니까. 각오를 하란 말이다." (p450)
쏟아지는 정보 속에 사실만을 취합할 자신이 없어서 요즘의 나는 뉴스를 잘 보지 않는다. 진실과 무관하게 기세만으로 누군가의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더는 목격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크다. 공정한 언론과 여론의 힘을 믿었다가 믿지 못했다가를 아마 평생토록 반복하겠지.
이런 현실에도 웃음을 짓게 만드는 이사카 코타로식 로망
"엄마가, 이거 찍어주래요."
아이는 말하더니 멍하니 서 있는 아오야기의 왼쪽 손등에 들고 있던 도장을 찍는다.
앙증맞은 꽃 모양에, 한복판에 참 잘했어요'라는 글씨가 보인다. (525)
우리 인생에 더는 잘했어요는 있어도 참 잘했어요는 없을 것 같다는 히쿠치의 말에 공감한다. 그러나 성장하지 못했더라도 좋지 않은 방향으로 변했더라도 잘했어요 뿐인 인생마저 모두 잃고 엘리베이터 한켠에서 고개를 숙이는 인생에라도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게 되는 하루쯤은 있겠지. 참 잘했어 아오야기. 살아남은 그대가 대견하다. 도장 그까짓, 나도 하나 팔까??
마지막으로, 아니 내 리뷰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아오야기 아버지의 신년 축시를 전한다.
이 한 문장에 함축된 감동은 책을 읽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인데 나는 정말 펑펑 울었다.
"치한은 죽어라." (p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