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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게으름뱅이의 모험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추지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6월
평점 :
1. 이끼에 파묻힌 지장보살처럼
인생이 막 시작한 초등학교 여름방학 같았으면 좋겠다. 날마다 쉬는 날, 방학이 끝난다는 게 믿기지 않을만큼 엄청나게 길었던 한 달, 주말따위 요일따위 신경도 쓰지 않았던 낙원의 날들. 그러나 어른이 되고 보니 주말만 기다리며 평일을 보내고 그런 주말을 네 번 돌리고 나면 한달이 되고 그것을 열두번 반복하면 일년이 지나가버리는 한심한 세월을 직통으로 맞아버렸다. 고와다는 생각한다. 주말 이틀을 여름방학처럼 보내자. 자고 자고 또 자면서 꿈 속에서 외할아버지 댁도 갔다가 아름다운 여성이 수영복을 입고 있는 바다에도 갔다가 기차여행도 떠났다가. 하여튼 뭐든지 다 꿈속에서. 아니면 영화. 또 아니면 책 속에서. 현실에서의 모험따윈 귀찮으니까! 구르지 않는 돌이 될테다, 이끼 낀 돌이 되어 부드러워지자!!는 고와다의 격언(?)에 격하게 감동하며 나도 고와다와 같이 이끼에 파묻힌 지장보살처럼 이불 속에 파묻힌다. 뻘뻘 땀을 흘리면서도 꼭 이불을 덮고 자는 나처럼 고와다도 이불 속을 좋아한다. 지루한 것도 좋아한다. 모험없는 소소한 일상을 전혀 실증내는 법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의 앞에 폼포코(너구리) 가면의 괴인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의 일상은 소설로 쓰기 미안할 정도로 심심했을 것이다. (그가 주말마다 작성하는 아내가 생기면 하고 싶은 일 목록으로 300 페이지를 채울 순 없잖은가 ㅋㅋㅋ)
2. 2001년 우주국수, 길 잃은 주말 탐정과 잠자는 국수집의 주인공, 기타 변태들의 병맛 대잔치
폼포코 가면의 괴인은 선량한 영웅이다. 배트맨처럼 삐까뻔쩍한 배트카를 타고 다니지도 않고 슈퍼맨처럼 검은 망토는 둘렀을지언정 하늘을 날지도 못하지만 어쨌든 그는 교토의 영웅이다. 물에 빠진 강아지를 구해주고 길 잃은 아이를 찾아주고 불에 타버릴 뻔한 도색잡지를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등으로 신문에 날만한 각종 착한 일을 해냈다. 그런 영웅이 어쩐 일인지 저 게으름뱅이 고와다를 후계로 생각하며 납치에 운동장 포박까지 해버리는 상황에 다다르는데. 그러나 후계를 이어 폼포코 2대를 만들려는 야심차지만 조용한 계획을 세운 그와는 달리 어쩐 일로 온동네 사람들이 모두 다함께 폼포코 가면을 잡으려는 획책을 벌이기 시작한다. 그것도 아주 시끌벅적하게. 처음 야심을 드러낸 것은 국수의 달인 쓰다!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돌아 아득히 먼 은하계 저편을 향하는 우주국수의 야심찬 지도자가 폼포코 가면을 잡으려 들었던 것!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뒤에는 온세상 사람들의 불행을 꿈꾸는 남자 대학생들의 모임 대일본침전단이 있었고 그 뒤에는 각종 야동야설의 섭렵하며 수집 중인 규방조사단이 있었고 그 뒤에는 또 그 뒤에는.. 이라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으니 (쓰고 보니 더욱 병맛!!) 폼포코 가면은 당황한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나는 사랑받는 영웅인데 왜 나를 핍박하는가!!
주말에만 탐정하는 길치 여대생 다마가와, 탐정은 탐정인데 세상 게으른 우라모토, 고와다와는 달리 주말 특히 토요일을 알차게 보내려는 충실파 온다 선배와 모모키, 대머리가 반짝반짝한 색안경의 고토 소장, 주인공인데 백여 페이지 잠만 자는 고와다, 게으름 피우고 싶다는 내면의 목소리와 매일 같이 싸우는 폼포코 가면이 다함께 벌이는 토요일의 나태한 모험. 주인공이니까 노력해야 해 주인공이니까 성실해야 해 라는 편견을 야심차게 깨부시는 이들과의 토요일 밤의 판타지로 한껏 즐거우시길. 그리고 그들이 맞이하는 일요일 아침으로 위로받으시기를.
특히 우리 게으름뱅이파들은 꼭꼭꼭 읽으십시오.
이 녀석 진짜 게으르잖아. 나 같네?? 하고 한 줄 한 줄 공감하며 읽으실 겁니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