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을 좋아합니다 - 초록 지붕 집부터 오건디 드레스까지, 내 마음속 앤을 담은 그림 에세이
다카야나기 사치코 지음, 김경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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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 앤을 좋아합니다."

앤 덕후들을 흐뭇하게 만드는 제목의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젊은 작가님인 줄 알았는데 어라라(라고 일본 번역 책에 자주 보이는 감탄사를 써봤습니다 ㅋㅋ)

1941년생, 나이가 지긋한 분이십니다.

20대부터 빨간 머리 앤 시리즈의 삽화를 그리셨구요.

이후로도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여러 작품들과 함께했다고 해요.

이 책은 95년도에 보성출판사에서 "빨간 머리 앤 노트" 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는데

자그마치 10년의 시간을 훌쩍 넘어 위즈덤하우스에서 재출간이 됐답니다.

도대체 무슨 매력이길래? 라는 호기심이 무척 컸는데 책이 정말정말 예뻐요 ♡

어떤 책들은 책 앞머리에 붙여놓은 빨강머리 앤이라는 제목이 다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책은 팬이 보기에도 차마 앤이 다했다고 말하기 힘든 류의 정성이 느껴집니다.

겉표지에 숨겨져 있지만 사철누드제본이라 쫙쫙 펴지는 책 속 매 페이지마다 소녀소녀한 그림들이 잔뜩있거든요!

그 그림들이 온통 앤이고 다이애나라서 좋아요.

한 컷 빠짐없이 다 내가 아는 이야기 다 내가 아는 풍경이라 좋은 그런 거.

실제로 함께였던 적은 없지만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상상하고 굴려가며 익숙해진 세계를 발견하는 기쁨.

세상 모든 덕후들은 알고 공감할 즐거움 맞지요?

초록지붕 집, 앤이 좋아했던 나무와 꽃, 우우병을 담가두는 시내, 산사나무 꽃으로 만든 화관,

입학했을 때 또 등교 거부 후 다시 학교에 갔을 때 친구들이 나누어준 선물,

사과과수원과 단풍나무 길, 반짝이는 호수, 오건디 드레스와 퍼프소매.

새록새록 앤을 떠올리게 만드는 삽화와 앤의 정답고 따뜻한 말들.

몽고메리에게는 요정나라로 가는 여권이 있었다는데요.

제게는 이 책이 앤의 나라로 가는 여권만 같습니다.

앤이 곁에 있는데 다른 요정이 필요한가 싶어 몽고메리의 여권이 부럽지 않을 정도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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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작은 농장 일기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부윤아 옮김 / 지금이책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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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와라 히로시, 작가님의 글을 딱 한번 읽은 적이 있다.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 2016년 나오키상 수상작이었다.

잔잔하고 소소한데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어서 좋은 기억으로 남은 책,

그런 소설을 쓴 작가님의 첫 에세이집이란다.

그것도 텃밭을 가꾸는 일상을 주제로 하고 있는 책.

호기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기와라 히로시의 지극히 작은 농장은 대문 열고 들어가서 딱 3초면 도착한다.

장모님 댁에서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처가살이 중인지라 욕심껏 농장을 키울 수가 없다.

사실 그걸 가꿀 능력도 안되시는 듯 하며 본인도 본인의 한계를 매우 실감하고 계신다 ㅋㅋㅋ

작가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심어 재배했던 작물은 감자였다.

1964년 동경 올림픽이 열렸던 초등학교 2학년 즈음이었을까?

소년은 매년 봄이 되면 엄마 몰래 감자 한 알을 슬쩍해 마당에 감자를 심었다.

오늘 나올까 내일 나올까?

싹이 돋으면 그 이파리가 예뻐서 감자에도 꽃이 필 때는 감자꽃의 존재 자체에 놀라서

수확기가 다가오면 다섯 배 열 배는 늘어날 감자 갯수를 상상하는 일이 즐거워서

소년은 매년 기대를 저버리는 수확량에도 불구하고 감자 심기를 지속했다.

아마도 69년 닐 암스트롱이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했던 중학생 즈음엔 그런 흥분도 시들해진 모양이지만 말이다.

2008년, 마이니치 신문에 이 글을 연재하던 때엔 다시금 농장주로써 의기백배해있던 시기.

그의 농장에는 무, 순무, 누에콩, 가을가지가 심어졌다.

봄, 여름을 제치고 가을, 겨울에 연재된 에세이 속 수확량은 정말로 볼품없다.

농담이 아니다, 진짜로 뭐가 없다, 우리 엄마 텃밭 수확량도 이보다는 많을텐데.

오늘도 퇴비비료영양제뭐시기를 주문하라고 링크를 보내셨는데 깜빡하고 있었네, 내일해야지;;

그러나 풋내기 농사꾼은 약간 억울도 한 것이다.

애초에 농장의 전성기는 이 계절이 아니라굿!

2008년 빵구났던 수확량은 연재 코너 담당자가 부탁하지도 않은! 본인이 직접 그린!! 재미난 삽화로 메꿨고

2017년 연재분을 묶어 에세이집을 출간하기로 했을 때엔 작심하고 봄여름 농장일지를 새로 썼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2008년과 더불어 17년도 대흉작.

오이는 흰가루병으로 씨가 마르고 안그래도 알이 작던 수박은 그에 전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재미만큼은 알알이 맺혀 독자의 마음에서 퐁실퐁실 터졌으니 글쓰는 농부님은 부디 안심하시기를 ㅎㅎㅎ

아참. 생각지도 못한 독서 얘기도 잠깐 등장.

작가님 평생에 읽은 소설이 다해서 책장 두 개 분량이란다.

책 읽는 속도가 엄청 느려서 한 권 잡으면 삼 개월 내내 읽어도 다 못 읽으신다고.

에피소드에 등장한 책은 무려!! 100 페이지를 조금 넘겼을 뿐.

재미있어도 집중하고 읽어도 작가님과 완독은 너무나 먼 친구 사이 같았다;;

본인의 에세이를 대여섯시간 남짓에 읽는 독자를 보고 서운해 하시면 어쩌지?

하여튼 재미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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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으로 읽는 중국사 - 중국을 만든 음식, 중국을 바꾼 음식
윤덕노 지음 / 더난출판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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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역사책은 싫은데 그 역사가 음식과 얽히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음식을 글로 그림으로 만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기 때문이다. 음식은 소재일 뿐 실상은 "음식이 만든 중국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윤덕노 작가, 작가가 초대한 만찬을 펼치며 독자인 나는 군침 삼킬 준비를 한다. 배가 아니라 머리를 든든하게 살 찌우는 이야기, 중국사라는 제목에도 퍽퍽하지 않은 재미난 맛으로 배를 불리는 살가운 책을 예감하면서.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요리하는 것과 같다." 후세에 주석을 달기를, 생선을 요리할 때 자주 뒤집으면 살이 부서지듯이 나라를 다스릴 때 번거롭게 굴면 백성이 흩어지니, 생선 요리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같다고 했다. (p13)』 시작부터 신기하다. 고대 중국에서는 재상 자리에 요리사를 뽑았다고 한다. 아니 요리사가 재상이 되었다고 한다. 선후 관계가 뭐든 알고 보니 재상(宰相)이라는 한자의 어원 자체가 요리사라는 뜻이란다. 집안일을 총괄하는 사람, 주방을 도맡아서 관리하는 사람, 더불어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제사 후에 고루고루 음식을 나누는 사람. 그리하여 능히 한 나라의 기틀을 다지거나 앞일을 도모할 수 있는 사람. 황당하다. 근데 판타지가 아니다. 실제로 상나라와 주나라의 역사에 이름 올린 요리사 출신 재상이 많다고 한다. 사람 고기를 못먹어 봤다는 환공에게 자식을 죽여 음식을 해 올렸다는 역아를 보면 요리사라고 다 정치를 잘했던 것은 아닌 것 같지만 말이다.


『"진흙만큼이나 값이 싼 oooo, 부자는 먹지 않고 가난한 사람은 먹을 줄 모른다"(p99)』 송나라 문인 소동파의 시 구절이다. 여기서 퀴즈. oooo에 들어갈 식재료가 뭘까? 힌트 1. 육류다. 힌트 2. 최근자 신문에 따르면 중국인이 세계 소비량의 30프로를 차지하며 소비국 1위를 달리고 있단다. 힌트 3. 얼마전 치사율 100프로의 바이러스 전염병이 퍼져 중국 내에서만 약 2억 마리가 도살되거나 살처분 당했다. 모두 눈치 챘겠지만 정답은 돼지고기다. 잠깐 묵념. 중국 돼지들에게 심심한 유감을 전한다. 믿기지 않게도 돼지고기를 그 어떤 육류보다 사랑하는 중국인들이 돼지고기를 천대하던 시절이 있었다. 오죽하면 명나라 이전까지는 임금님 수랏상에 올라간 적이 없을 정도다. 그 어마어마한 괄시를 뚫고 돼지가 명실상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게 된데는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 주원장의 힘이 컸다. 귀족들이 소비하던 양고기가 입에 덜 맞았던게지. 그의 명령으로 임금님 밥상에도 돼지가 오르기 시작한다. 고관대작들도 너나할 것 없이 돼지에 달려든다. 돼지가 육식문화의 최강자가 된다. 돼지고기의 발음과 황제의 성이 같은 발음인 게 문제가 되어 돼지를 잡거나 먹는 게 금지됐던 황당한 에피소드도 역사에 기록을 남겼다. 다시 한번 유감이다.


사치 금지 품목 소주, 황제들이 아침마다 먹는 제비집 수프, 왕은 사식 고위관직은 이식 평민은 먹고 싶을 때마다! 법으로도 정해졌던 밥 먹는 횟수, 귤 한 상자면 떼부자이던 시절 후손을 위해 천그루 귤나무를 심은 단양태수 이형, 실크로드에서 만들어진 두부, 우유의 몸종이었던 차가 아편전쟁을 일으키기까지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친숙한 식재료에 입맛을 다시고 흥미진진함으로 배가 그득 차는 얘기가 자그마치 32개다. 중국의 식탁 위에 응집한 중국의 역사를 읽는 기대이상의 맛. 눈으로 읽으며 맛보는 역사의 맛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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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마시고 자라
김인숙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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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마시고 자라>

제목도 표지도 힐링 에세이 같은 느낌이지만 실제 장르는 힐링 로맨스, 그 중에서도 코미디다.

77, 88, 99 사이즈의 동갑내기 친구들 보민, 이숙, 강옥의 러브러브 대작전이 바야흐로 무르익는 서른 둘.

시험에 낙방하며 장기 미취업자에 이름을 올린 보민은 셋 중 가장 날씬한 체구로도 열등감은 최고조를 달린다.

보상처럼 깎고 다음은 사진으로 시작한 랜선 연애.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나는 사랑이라고 보민은 강력하게 주장한다.

알바 뛰는 가게에 기습 방문한 남친이 코 앞의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을 때

보민은 안도와 좌절 중 어느 쪽으로 더 마음이 기울었을까?

무지개빛 전신성형으로 다시 태어나면 바닥 친 자존감도 반짝반짝 회복이 될까?

먹방 프로그램 식탐미인의 메인 작가 이숙, 88년에 태어나 이날 입때껏 연애 한번 못해본 모태솔로다.

새로 들어온 말끔날씬한 피디, 잘난 남자가 나를 왜 좋아해? 싶으면서도 자꾸만 눈이 가고

이 새끼가 누굴 놀리나 화가 나다가도 쿵쾅쿵쾅 뛰는 가슴 가눌 길이 없다.

신입 사랑꾼 이숙이 연애의 환상, 조급함, 줄다리기 속에서 흑역사의 도장을 쾅쾅 찍어갈 때

독자는 차라리 눈을 감고팠다.

내가 저지른 일도 아닌데 왜 내가 부끄럽고 창피하고 오글오글 한 것인가!!

드라마라면 소리를 콱 죽이고 얼른 장면이 지나가길 기다릴텐데 글자는 죽일 수도 없으니.

이숙아 그러지마! 야 그거 아니야!! 임마 진정하라고!!! 만 죽도록 외쳤다.

셋 중에 가장 새콤달콤한 사랑을 한다. 만세 ♡

사람들은 뚠뚠하면 다 성격 좋고 마음이 너른 줄 아는데 네들 맘대로 한데 묶지마라.

성공한 사업가 강옥으로 말할 것 같으면 팩트폭행으로 친구 가슴에 스크래치 내는 게 일상에

연하들만 쏙쏙 공략하며 남친을 밥 먹듯 갈아치우는 바람둥이에다

이제는 애인 두고 바람도 피는 스릴 넘치는 막 사는 인생의 대표주자다.

넘치는 돈 앞에 사랑, 까짓 얼마야? 얼마면 돼?

몸이 무겁다고 마음까지 무거워야 할 이유가 있어?

우리 제발 가볍게 좀 살자!! 고 주장하다가 진짜로 훅!!! 날아갈 뻔한 인생이지만

돈 있으니 괜찮아. 극복 가능하다규!!

"30대 싱글 여성에게 필요한 건 나를 이해해주는 단 한 사람, 속 깊은 동성친구다."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강윤정 작가님의 말에도 불구하고

종종 사랑을 배부르게 포식하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런 날 뜨겁게, 속 시원하게, 매콤하게 읽으면 좋을 로맨스 소설 <먹고 마시고 자라>

주말이 곧이다.

<먹.마.자>와 함께 기분 좋게 먹고 마시고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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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
윤성희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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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의 어린 딸을 잃은 아버지의 이야기. 어린이날에 읽는 <첫문장>은 뒷맛이 참 시고 아린 소설이었다.

근식의 별거 없는 이력 중에 그래도 독특함을 꼽자면 어린 시절 네 번이나 죽을 뻔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리 위에서 구름 구경을 하다 떨어져 죽을 뻔한 처음엔 고작 아홉살이었는데도 자살이란 오해를 받았다. 새아버지 밑에서, 의붓 형제들과 함께 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리라 어른들이 저마다의 오해로 떠들어대는 말에 변명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오해해 주어 좋기도 했던 것 같다. 냇가에서 뱃놀이를 하다 떠내려오는 수박을 끌어 안고 구사일생한 적도 있었다. 중학생 때는 학년이 바뀐 걸 까먹고 2층을 1층이라고 착각해 창 밖으로 뛰어내린 적도 있다. 네 번째로 죽을 뻔 했을 땐 공장에 근무하다 생일 케이크를 사러간 때였다. 운동화 끈이 풀려 잠깐 묶는다고 앉은 사이 코 앞으로 간판이 떨어졌다. 그 후로 취업에서 대학 진학으로 진로를 바꾸었고 아내를 만났고 결혼을 했고 딸을 낳았다. 죽음을 이겨낸 다음의 삶은 꼭 좁은 모퉁이를 비집고 나간 다음처럼 숨통이 트이곤 했다. 그러나 딸의 인생은 그렇지 못했다. 죽음이 빗겨가기만 했던 근수와는 달리 딸은, 아마도, 곧장 죽음을 대면한 모양이다. 단 한번의 미수도 없이. 예스를 답할 땐 캭!!을 노를 답할 땐 개실망!을 외쳐 버릇없다고 엄마한테 혼나던 딸도 버릇없는 딸을 을러 혼내키던 아내도 이제 더는 근식의 곁에 없다. 죽음과 이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조카의 결혼식을 치르고 하룻밤 누나집에서 묵고 나온 근식은 계획없이 터미널 여행을 시작한다. 아니 터미널 방황이라고 해야 옳을까. 직장에서 해고되어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으니까.. 그냥.. 또 그냥.. 누나한테 변명하자면 이런 얘기를 하게 될텐데 근식은 누나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원주, 횡성, 춘천, 경주, 거제, 통영, 김해, 군산, 부여, 인천, 순천, 여수를 도는 내내 꺼진 휴대폰을 충전하지도 않는다. 쭈욱 연락을 못했으니 가족들은 또다시 동생의 자살을 걱정하고 있을지도.

그러나... 걱정 마세요. 잘 먹는다곤 할 수 없지만 끼니는 거르지 않고 세 끼 챙겨 먹고 있습니다. 잠귀신이 붙은 듯 잠도 많이 자구요. 오며가며 사람들과 얘기도 많이 나눠요. 두 번쯤 아이를 구한 적도 있습니다. 어쩌면 딸의 자서전이 될 글의 첫문장을 찾아낸 것도 같아요. 빙글빙글 출구를 찾지 못한 로타리를 돌고 있지만 지금 이곳은 오거리. 당장 길을 찾지 못한대도 빠져나갈 길이 다섯개는 됩니다. 예전과 다름없이 살아 돌아가겠습니다... 통화가 됐다면 근수는 이렇게 얘기하지 않았을런지.

좋은 날이니까..불행을 상상하고 싶진 않아서.. 오래 비워졌던 집에서 곰팡이가 쓴 냄비를 버리고 냉장고를 비우고 집을 청소하고 휴대폰을 충전하고 김근식을 박근식으로 바꾸는 개명신청서를 접수하고 누나와 매형에게 혼이 나고 그러다 어쩌면 아내와 통화하고 앵두나무를 보러 다시금 터미널로 향할지 모를 근식을 상상하며 책을 덮는다. 김근식을 덮고 박근식으로 시작하는 인생의 첫문장을 써내려갈 남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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