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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절제 사회 - 유혹 과잉 시대 어떻게 욕망에 대항할 것인가
대니얼 액스트 지음, 구계원 옮김 / 민음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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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논어 안연편에 극기복례(克己復禮)란 말이 있다. 공자의 제자 안연이 인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가 “나를 이기고 예에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 하루만 나를 이겨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온다.”고 대답했다고 하는데서 나온 말이다. 자신을 이기는 것, 바로 절제를 나타내는 말이다. 2천년 전 현인들도 자신을 이기는 것이 어렵고 중요하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유명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개인적인 문제에서 사회문제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담배, 비만, 자살, 도박 등에서 자제력의 모습을 찾아내고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현대 심리학 실험까지 자제력에 대한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가장 먼저 저자는 기술의 발전을 자제력을 시험하는 유혹으로 꼽았다.

 

 기술 혁신으로 인해 식품의 가격이 가파르게 하락함으로써 사람들이 예전보다 훨씬 더 잘 먹게 됨에 따라 비만의 문제가 야기되고, 신용카드와 인터넷의 발달은 더 이상 쇼핑을 미루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기술의 발달로 인해 삶의 속도가 빨라지자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만 큰 보람을 얻을 수 있는 일에는 노력을 덜 하게 되는 경향이 팽배해졌다고 진단한다. 게다가 죄책감을 느끼며 누리는 대표적인 즐거움 즉, 미루기에 대해서도 전형적인 자기 절제의 실패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미루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욕망을 극복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저자는 “100퍼센트 자발적인 행동은 아니라 할지라도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지도록 한다면 우리는 충동에 무릎 꿇기보다 의식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추구할 가능성이 더 크다. (p. 25)”고 하면서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신뢰, 그런 미래를 그려 볼 수 있는 상상력, 선호하는 행동을 추구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할 수 있는 현명함이 필요하다고 한다. 신뢰, 상상력, 현명함은 자제력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삶 전반에 필요한 덕목일 것 같지만 말이다.

 

 자기 절제의 화신인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트로이의 영웅 오디세우스, 자기 절제에 큰 획을 그은 프로이트 등 자기 절제에 관한 이야기가 적지 않지만 특히 인상 깊은 대목은 마지막 절의 ‘의지 근육 만들기’ 부분이었다. 현인들의 일화도 흥미로웠지만 사실 정작 필요한 것은 지금 내가 써볼 수 있는 그러한 지침서였기 때문이다. 그 일부분을 옮겨보면 이렇다.

 

“의지력은 근육과도 같다. 장기적으로는 단단하게 키울 수 있지만, 단기적으로는 금방 지쳐 버리고 만다. 수차례의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자제력에 부담이 가해질 때 우리는 유혹에 저항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 몽테뉴가 영혼에 대해 말했듯이, 자제력을 발휘할 때에는 ‘휴식과 조절이 필요하다. 지나치게 오래 긴장 상태를 유지하면 이상해지고 만다.’(p. 356)”

 

 저녁 후식으로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 세상 근심을 뿜어낼 수 있는 담배 한 모금, 기분 좋게 마시는 술 한 잔, 적당히 눈치를 보며 잽싸게 하는 한 번의 클릭 등 대부분의 선택은 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은 계속 쌓이기 마련이며 결과적으로 인지하는 순간에는 일이 커져 있을지도 모른다. 책에서 경고한대로 우리 주위에는 훨씬 강하게 유혹하는 쾌락이 등장했고, 단기적인 즐거움에 대한 문화적, 현실적 장벽이 전보다 훨씬 낮아졌기 때문이다.

 

 마시멜로 실험을 비롯한 다양한 심리학 실험부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 자신의 경험담까지 많은 사례로 인해서 자기 절제에 관해서 두텁게 이야기 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극기, 참선 등 동양의 자제력에 대한 사례도 덧붙였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고대 그리스에 대해서만 너무 편중되어 있음이 조금 아쉬웠다.

 

 자기 절제, 분명 쉽지 않은 일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지금 당장 그렇게 한다고 해도 바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하지만, 장기적인 즐거움을 오랫동안 누리기 위해서는 자제력이 꼭 필요하므로 로마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인용해본다.

 

 "무언가 외부적인 요소로 고통받는다면, 이때 고통은 그 요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에 대한 당신의 추정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당장이라도 바꿀 수 있는 힘을 지녔다. (p.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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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 둘러보기 - 10주년 기념 개정판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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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생겨난 이유는 많지만 그 중 한 가지는 이것 일 것 이다. 살아가면서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닥치면 주위에 도움을 구하게 되고, 그 일이 거대하다면 신의 보살핌을 구하게 된다. 신의 보살핌을 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종교이다. 세계 곳곳의 다양한 인류만큼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다양한 종교가 어느 순간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가장 유명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을 비롯해 구(舊)유고슬라비아의 해체, 나이지리아의 이슬람교와 기독교간의 분쟁, 불교와 힌두교간의 스리랑카 분쟁 등 나와는 믿음이 다르니 배척해도 된다는 식의 분쟁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렇듯 자타의 구분이 쉬우니 어쩌면 분쟁의 씨앗이 되기에는 인종과 더불어 가장 쉬울지도 모르겠다.

 

 대학에서 종교학의 강의를 하고 있는 저자는 종교를 가진 이들도 의외로 자신이 믿는 종교이외에는 잘 모르고 있는 현실을 느끼고는 『세계종교 둘러보기』를 썼다고 한다. ‘둘러보기’란 말의 뉘앙스에도 알 수 있듯이 주요 종교의 자세한 설명 보다 세계의 다양한 종교를 소개하고 그 종교들의 창시배경, 경전, 주된 가르침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힌두교부터 시작하여 불교, 자이나교, 신도, 유대교 등 모든 종교는 아니지만 다양한 종교를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주위 대부분 불교와 그리스도교이기에 그 외의 종교는 사실상 접해볼 수가 없어 그저 세계사 시간에 배운 이름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창시자가 없다는 힌두교와 유대교, 그리스도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조로아스터교, ‘복종하는 사람’이라는 무슬림들의 이슬람교, 우리나라에서 발생된 우리 고유의 종교라는 동학의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특히, 니체의 대표작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주인공으로 묘사된 조로아스터가 창시했다는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 조로아스터교의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 아기 예수를 찾아 왔다는 ‘동방 박사들’이 바로 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이었고, 천사장, 사탄, 육체 부활, 심판 등의 개념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 그리고 다양한 신이 공존하는 고대에 유일신의 개념을 선언한 것 등은 다른 부분보다 짧게 편성된 조로아스터교 부분에서 배울 수 있었다.

 

 이슬람교의 부분도 재미있었다. 창시자 무함마드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계시를 읊고 읽은 것이 『꾸란』이고, 9·11 테러이후 부정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진 성전(聖戰)이라는 뜻으로 번역되는 지하드는 본디 하느님의 길에 힘씀이라는 뜻이고, 무엇이나 하느님을 위해 일한다면 지하드가 된다(p.313)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게다가 9·11 테러이후 발발한 갈등이 많은 정치적, 경제적인 요소도 얽혀 있지만, 자기만 진리와 정의를 독점하고 있다는 이슬람 근본주의자와 유대교 및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자들의 갈등이라고 정의한 부분도 인상 깊었다.

 

 저자가 강의한 ‘종교학 개론’을 엮어 만들었다는 『세계종교 둘러보기』는 많은 종교를 다루고 있지만, 내용을 대강 추려서 서술한다는 개론답게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관련 종교의 많은 사진들이 같이 실려 있어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글과 상상으로는 관련 종교의 상징, 신, 건축물 같은 것들은 도저히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서양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저자의 특성으로 인해 동양의 많은 종교가 어떻게 서양권에 소개되어 있는지도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불교의 선(禪)이 ‘Zen’이 된 사연, ‘Confucianism'이 어떻게 유교로 번역되고 있는지도 소개하고 있다.

 

 

 비록 간단하지만 세계종교를 둘러보고 난 느낌은 종교가 언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벨탑으로 인해 언어가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제쳐두고서라도 다양한 생활환경으로 인해 언어가 분화되고 새로운 환경으로 인해 신조어가 생겨나듯이 종교도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환경에 맞는 종교를 믿어왔고, 지금은 정보통신 및 교통의 발달로 많은 부분이 서로 섞이고 서양종교, 동양종교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들어가는 말에 실려 있는 금장태 교수의 말이 이 책의 존재 이유 및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어 인용해 본다.

 “다른 종교를 거짓된 것으로 배척하는 독선적인 태도는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것일 뿐만 아니라, 자기 종교의 진리도 편협하게 이해하는 것으로 성숙한 종교 의식이라 할 수 없다. … 남을 억누르고 자기남이 승자로 군림하겠다는 패권주의의 상극 논리는 지난 시대의 낡은 사고다. 이제는 함께 어울려 살면서 서로 돕고 서로 성장하는 공동체 의식의 상생 논리가 요구된다.” (p.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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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심하지만 뇌는 비웃는다
데이비드 디살보 지음, 이은진 옮김 / 모멘텀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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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뇌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보다 밝혀지지 않는 것이 더 많기에 뇌는 아직 미지의 세계라고들 말한다. 수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해도 아직 밝혀지지 않는 부분이 많은 뇌를 보유하고 있기에 지구상의 수많은 생물들 중 단연 인류가 가장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높은 지적능력과 다양한 사회적 성취 등은 현대를 살고 있는 인류를 대표하는 말들이지만, 가끔 자신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는 자책하고 후회하는 일을 하는 것도 우리들이다.

 

 자신을 심리학자도, 신경과학자도 정신과 의사도 아니며, 책이나 다른 매체를 이용해 치료사 행세를 할 생각도 없다고 소개한 저자는 과학은 우리 자신과 이 세상을 둘러싼 난제들을 해결하도록 도와주는 최상의 도구라며 인지과학에 대한 많은 연구와 실험들을 소개하며 실생활과 연관된 뇌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많은 실험 데이터를 인용하고 있긴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조금 불편한 책이다. 그가 설명하는 뇌는 ‘불확실한 것을 싫어하고 확실한 것을 좇으며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정보 조각을 연결해 패턴을 파악하기 때문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도 하며, 감정이나 환경에 휘둘리는 판단을 하는 등’ 불안전하다. 영장류의 최고봉에 서있는 인류에게는 받아들이기 쉽지는 않은 결론이기는 하다. 이렇듯 저자는 뇌가 발전적일 것이고, 치밀하며, 성실하기도 하고, 주도적이며, 스마트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나하나 깨뜨려버린다.

 

 하지만 빠른 다리도 날카로운 이빨도, 심지어는 맹독도 가지지 못한 인류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뇌는 불확실한 것을 피하고 가장 안전한 것을 추구하도록 진화했을 것이다. 언젠가 진취적이고 모험적인 이들로 인해 역사가 크게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랫동안 살아남은 이들은 조심성이 많고 위험을 회피하는 성향이 강한 이들이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소위 ‘High Risk, High Return'이란 말을 하기도 한다. 그것이 경제와 같이 돈이나 재화와 같은 것이라면 문제가 다르겠지만, 생존과 관련된 일이라면 리스크는 곧 생명이 된다. 그래서 모험적이면 역사의 한 페이지에 큰 획을 그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와 비례해서 생명을 위협받을 가능성도 크다는 것이다. 어떤 생물체를 막론하고 제1의 목표는 종족보존이기에 우리 뇌는 이렇게 진화하지 않았을까?

 

 뇌는 우리 몸의 총에너지 약 20%를 쓴다고 한다. 피를 분배하지도 않고, 호흡을 하거나 근육을 움직이지도 않지만 이렇게 많은 에너지를 쓰는 것이다. 비록 생각하는 것만큼 발전적이지도, 치밀하지도 않지만 인류가 이렇게까지 발전을 해온 것은 바로 두뇌의 힘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름길을 좋아하고, 군데군데 구멍이 난 기억을 자의적으로 상상해서 메꾼다는 것 등 뇌의 기능을 조금 알 수 있게 된다면 생활에 도움이 하등 되지 않는 멍청한 일을 저지르고 매번 후회하는 일은 조금 줄어들 것이다. “내가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뇌가 그렇게 생겨먹었으니까.”라는 핑계 아닌 핑계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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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서른에는 노자를 만나라 - 시인 장석주가 전하는 1만 년을 써도 좋은 지혜
장석주 지음 / 예담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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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능을 마치고 뭔가 고상한 책을 보고 싶은 마음에 며칠을 고민하다 『도덕경』을 택한 적이 있다. 부끄럽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것을 읽고 고민하는 것이 고상해 보였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그때도 『도덕경』의 오의도 내용도 모른다고 하는 쪽이 맞지만 그래도 『도덕경』을 선택한 것이 가끔은 기특해질 때도 있다. 장석주 시인도 사십대가 되어서야 『노자』와 『장자』를 곁에 두고 읽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멀리 유학을 가있는 아들에게 나날의 일들과 감회, 먹고사는 일의 고단함과 보람, 자연의 변화,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마음의 무늬 그라고 사람 사는 도리에 대해 속내 드러낸 얘기를 나누고자 『노자』의 구절을 빌려 이 글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p. 12)

 

 책의 표지에는 ‘시인의 눈으로 들여다보고 아비의 마음으로 풀어낸 『노자』’라는 문구가 있다. 다방면의 독서가이자 당대의 해석자임이 틀림없는 장석주 시인이기에 시인의 눈으로 들여다보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그보다는 글의 구석구석 아들을 향한 마음이 더 느껴져 아비의 마음으로 풀어냈다는 쪽이 더 책과 가까워 보였다.

 

 먼저 질풍노도의 시기를 맞았고, 도서관에서 긴 사유의 시간을 보내고, 책을 읽고, 책을 엮고, 책을 만든 그가 십여 년 전 호숫가에 집을 짓고 살아가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오롯이 아들에게 일려주고 있다. 노자의 지혜를 풀어주는 것은 물론이고 아들이 읽었으면 좋을 책들을 권하고, 묵상, 단식 심지어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빈둥거리기도 권하면서 참된 행복을 찾으라고 말한다.

 

 근 일 년 동안 아들에게 쓴 메일을 정리한 것이기에 글 속에서 묻어나는 세월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도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예전에 읽은『도덕경』도 그러했듯이 어렵고 말이 안 되는 듯 되는 그런 글들을 먼저 고민을 해보고 인생을 살아본 선생님과 아버지처럼 일러주는 가르침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장석주 시인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그렇듯 자식에게 좋은 것을 하나 더 알려주려고 하는 그런 따스함도 함께 말이다.

 

 이『아들아, 서른에는 노자를 만나라』를 읽었다고 해서 노자를 온전히 만났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책의 말미에 『노자』의 전문이 실려 있기는 하지만, ‘물 흐르듯 살라’, ‘잘 굴러가면 바퀴 자국이 남지 않는다’라는 제목에서 말해주 듯 『노자』의 주요구절과 그에 맞는 개인적인 체험 및 지혜를 일러주는 형식이다. 노자를 만나기 위한 워밍업은 충분히 될 것이다. 게다가 세상의 다른 지혜도 덤(?)으로 알려주고 있느니 다른 독서를 불러일으키는 소위 키북(key book)이 되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언젠가 다산 정약용선생이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쓴 편지를 읽은 적이 있다. 아들에게 당부하는 글로 빼곡히 적힌 그 서찰에서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마라는 구절이 인상 깊었는데, 당대의 대학자도 유배지에서 자식의 공부를 걱정할 만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비의 심정은 동일해보였다. 그런 상황과는 조금 다르지만 멀리 떨어진 아들을 그리며 쓴 글이기에 아직은 아들로만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는 더 따뜻하게 다가오는 글이었다.

 

 힘들게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아들, 딸들이 아비의 심정으로 일러두는 저자의 글에서 위로를 받았으면 한다.

 ‘인생은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일까? 하나의 해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개의 길이 있을 것이다. 그 길이 어떤 길이든 타고난 너 자신, 즉 너의 본성과 직관이 가리키는 길을 따르도록 해라. 아울러 항상 존재의 기쁨과 살아 있다는 기쁨을 오롯이 받아들이도록 해야. 몸과 마음을 소박하고 고요한 데 두되, 작은 기쁨들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마라.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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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제대로 화내고 싶다 - 철학자들이 알려주는 화의 잠재력
오가와 히토시 지음, 이서연 옮김 / 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애플북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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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에서는 화란 '몹시 못마땅하거나 언짢아서 나는 성'으로 나타내고 있다. 못마땅, 언짢음이란 어휘에서 드러나듯이 화란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 주위에 화에 관한 서적들은 화를 풀어내거나 화를 다스리는 법에 관한 책이 대부분이다. 대게 화를 참거나, 화를 풀기 보다는 많은 이들이 화를 내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화를 참거나 화를 풀기 전에 화가 나기 마련인데 화를 어떻게 내는지에 대해서는 잘 다루진 않는다. 주위에서도 화는 잘 다스리거나 참는 것이 좋다는 소리는 들어봤지 화가 나면 화를 제대로 내라는 소린 못 들어봤으니 말이다. 오죽 했으면 우리네 정서를 가리키는 말이 ‘한’이고 ‘화병’이란 병이 있었을까?

 

 일본도 화에 대해서는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공공철학을 전공한 저자는 ‘일본사회는 지나치게 폐쇄적이고 보수적이라는 문제가 있다.’는 미국의 역사학자의 말을 인용하여 일본인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수용되기 바라는 욕구는 강하면서 반대로 다른 사람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로 인하여 화를 내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분노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감정이므로 당연히 자연체계 안에 포함된다. 따라서 누군가가 인간에게서 그 감정을 빼앗는다면 생태계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셈이 된다. 즉,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 자연에 돌연변이가 생겨나듯 사회에도 돌연변이가 생겨나게 된다.(p.27)’며 화는 자연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에 화를 잘 배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이성으로써 자신을 조절하는 선택을 자유라고 부른 칸트의 견해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화를 내면 진정한 승인을 획득하게 된다는 견해,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존 질서에 맞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유목민’이라는 개념들은 소개하면서 화를 철학적으로 접근한다. 그러면서 화를 참는 법에 국한된 종교적인 견해, 특히 불교의 관점을 비판하고 있다.

 

 시쳇말로 ‘꼭지가 돈다’, ‘뚜껑이 열린다’는 모두 화를 내는 모습을 묘사한 말이다. 이렇듯 화를 내는 모습은 이성을 잃고 날뛰는 모습을 생각하기가 쉽다. 그래서 화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화를 저자는 감정이 드러나는지와 문제 해결로 이어지는지의 2가지 지표에 근거하여 화를 구분하면서 감정을 드러내지만 문제 해결이 안 되는 ‘자폭형’ 화를 지양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실무형’화를 내는 것이 좋다며, 화를 내는 것도 의문의 발견, 문제의 제기, 의견의 제시, 논의의 진행, 결론의 정리 방법으로 화를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요컨대 무턱대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닌 불합리한 상황을 논리적으로 풀어나가라는 것이다. 게다가 불합리하고 모순된 현실을 개선하는 에너지가 바로 화라는 감정이므로 화의 에너지는 인간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힘 같은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한 많은 철학자들의 화에 대한 견해 및 철학자의 소개는 인상적이었지만, 일본인 저자의 특성상 자국의 현실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하고 예시를 든 것이 많아 이런 부분의 이질감은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참고 다스리는 화에서 내는 그것도 제대로 내는 화의 본질적인 부분을 다룬 점에서는 기존의 서적과는 다른 참신한 「이제는 제대로 화내고 싶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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