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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 측 증인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1년 10월
평점 :
일본 추리소설을 읽는 것은 내게 유일한 인생의 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다른 장르의 책들도 즐겨 읽긴 하지만, 순문학이나 인문,사회과학쪽의 두껍고 무거운 책을 읽을 때보다는 훨씬 더 릴랙스한 마음이 된다. 과연 이 미스테리의 전말은 무엇일지 스스로 추리해나가는 과정도 흥미롭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나 트릭 등을 만나면 작가한테 한 방 먹은 기분이 들지만 너무 쉽게 결말이 예측되는 것보다는 당연히 한 방 먹는 쪽이 멋진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얼마 전에 읽은 고이즈미 기미코의 <변호 측 증인(원제 弁護側の証人)이 그랬다. 읽기 전에는 제목 때문인지 법정물의 느낌이 강했기 때문에, 법률용어 등이 난무하고 꽤나 골치아픈 내용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1963년에 출간되었다가 절판되고 2009년에야 복간된 '전설의 명작'이라는 평판과, <달과 게>의 미치오 슈스케, <살육에 이르는 병>의 아비코 다케마루, <십각관의 살인>의 아야츠지 유키토, <통곡>의 누쿠이 도쿠로 등 추리소설계의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일제히 격찬했다고 하는 이야기에, 그렇다면 퀄리티는 당연히 보장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기대되는 마음으로 이 책을 만났다.
이 책의 서장은, 면회실의 철망 너머로 짧은 입맞춤을 하는 남편과 아내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이미 사형이 선고되었지만 진범에 대한 증거를 이제야 잡았다며 한 번 더 부딪쳐 보겠다는 아내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며 체념의 상태에 있는 남편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은 남편을 구하려는 아내의 순수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다음 장부터 사건 이후의 이야기와 사건 전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진행된다. 고아에 스트립 댄서였던 나미코는 클럽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재벌가의 방탕한 아들 야시마 스기히코와 불같은 사랑에 빠져 만난 지 두 달만에 결혼에 골인한다. 하지만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을 정도로 두 사람 사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시아버지와 시누이와 한 집에 살게 되고, 고용인들조차도 그녀에게 거리륻 두려 하는 등 불편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시누이인 라쿠코와 그녀의 남편 히다, 그리고 먼 친척뻘 아가씨 미사코, 그리고 야시마 집안의 주치의인 다케가와 의사와 유기 변호사 등과 저녁 만찬을 갖게 된다. 남편 스기히코가 일도 안 하고 엄청난 돈을 탕진하는 사람이라는 시누이의 험담, 결혼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야시마 노인이 아들에게 회사에서 나가라고 했다는 이야기, 날 내쫓으려고 들면 아버지를 죽이고 말겠다는 스기히코의 이야기, 만약 그 노인을 죽인다면 유산을 적당히 나누고 의사와 변호사에게도 입막음을 하자는 이야기 등, 결코 유쾌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듣다가, 나미코는 실신하고 만다. 다케가와 박사의 진찰 결과 임신이라는 소식에, 남편은 아버지에게 가서 그 이야기를 하겠다고, 그러면 당신을 쫓아내지 않을 거라고 별채로 간다. 한편 잠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그녀는, 옆 침대에 남편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본다. 세수하고 씻으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 태어날 애가 스기히코 애가 맞는지도 확실하지 않다는 시누이의 말을 우연히 엿듣고 그녀는 이 애는 스기히코의 애가 분명하다고 말씀드리려 별채로 가서 시아버지를 만나려 하지만, 그녀가 본 것은 머리를 맞아 살해당한 시아버지의 시신이었다. 남편이 노인을 죽였을 것이라 생각한 나미코는 남편을 보호하기 위하여 흉기와 별채 열쇠 등의 지문을 닦는 등 증거를 없앤다.
그리고 경찰이 와서 현장을 조사하고 증거물을 수집하고, 저택에 있었던 모든 사람의 알리바이와 동기를 조사한다. 그리고 결국 오기타 경위는 야시마 류노스케 살해의 용의자를 체포하고, 그 순간 그녀는 두 번째로 실신한다. 여기까지가 사건에 대한 이야기다. 결국 존속살인으로 사형 판결을 받게 되고, 나미코는 남편을 위해, 절친한 친구 에다가 소개시켜 준 괴짜 변호사 세이케를 만나고 사건을 담당했던 오기타 경위에게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바탕으로 다시 한 번 수사를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한다. "아내는……아내란 원래 남편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법이라고 단정하고 그걸로 끝인 걸까요?(p.94)" 남편을 감싸기 위해 했던 증거 인멸이나 말하지 않고 숨긴 내용 등이, 오히려 상황에 불리하게 작용했다고 질책하면서도, 경위는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리고 그는 무고한 사람이 사형에 처해지는 일을 막기 위하여 나미코를 돕기로 한다. "만약 제가 말씀드린 게 전부 진실로 입증되면…….남편은……목숨은 건질 수 있을까요?" (중략) "그렇게까지 남편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까?"(p.226~227)
그리고 나서 바로 이어지는 이 소설의 11장은, 정말이지 대단하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여기서 결말 따위를 밝혀버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작가의 트릭에 속지 않으려고 애쓰던 나도 어느새인가 속아 있었다. 아니, 속았다기보다는 내 마음대로 전체적인 그림을 그렇게 보았던 것이다. 작가는 그저 밑그림만 그렸을 뿐이고, 거기에 색을 입히고 해석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미치오 슈스케는 작품 해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작가가 완벽하게 그려낸 후지산 그림자를 진짜 후지산이라고 믿고 호수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말았다. 그리고는 정신이 들어보니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던 것이다. 물속에서 경악에 눈을 크게 뜬 채 거품만 부글부글 내뱉는 우리 눈앞을, 그때까지 봐온 여러 장면이 전혀 다른 표정을 띠고 흘러간다.(p.286)' 아주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세이케 변호사가 했던 어떤 말이 꽤나 결정적인 힌트였는데, 왜 나는 그것을 그냥 흘려들은 것일까. 아직 나는 내공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이 작품이 어떤 점에서 훌륭한 것인지도, 책을 끝까지 다 읽은 지금은 이해할 것 같다. 이 작품의 묘미는, 작가의 그 기막힌 밑그림이다. 나 역시 미치오 슈스케나 그 외의 작가들처럼, 이 <변호 측 증인>에 기립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다. 역시 추리물은, 이 맛으로 읽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