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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평점 :
작가 김훈, 그는 2004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화장>에서의 담담한 서술로 나의 기억에 남아 있다. 하지만 그의 신작 <흑산>을 사실은 읽고 싶지 않았다. 김훈 작가를 특별히 싫어해서가 아니다. <흑산>은 조선에서 천주교를 박해했던 역사를 소재로 삼고 있는데, 천주교 신자인 나는 박해 당시의 일들을 이론적으로는 당연히 알고 있지만 그것을 굳이 그의 치밀한 묘사로 접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너무 괴로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얄궂게도 그것은 내 손에 들어왔고, 읽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책의 처음에서 끝까지 한 번도 눈을 떼지 못하고 읽었다.
이 책은 18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황사영 백서'사건이 터지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미 훨씬 전에 예수회 사제 바오로 미키와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했지만, 조선에서는 아직 사제가 나오기 전이었기 때문에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잠입하여 선교 활동을 했던 때다. 천주교 박해의 역사에서 비교적 초창기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야기는 정약전이 귀양길을 떠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형제인 정약종, 정약용 등과 함께 잡혀가서 고문을 당했으나, 동생 약종은 끝내 배교를 거부하여 처형당하고 배교한 약전은 목숨을 건지고 흑산도로 유배된다. 그의 형 정약현의 사위가 황사영인데, 그는 열여섯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정조로부터 친히 격려를 받은 수재였다. 그의 처숙부인 약전, 약종, 약용은 총명하고 마음이 맑은 그에게 은밀히 천주교 교리를 가르쳐 주었고, 황사영 부부는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교리대로, 그는 노비 육손이에게도 인간답게 대해 주고 결국 면천(免賤)해서 종의 신세를 벗어나게 한다.
반면 삼대 선왕인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는 어린 임금 순조가 보위에 오르자 대왕대비로 섭정을 하게 된다. 오십여 년을 대궐에서 혼자 산 대비에게는 소생이 없었기 때문에 권세에 대한 욕망으로 천주교를 꼬투리 삼아 남인을 박해한다. 또한 천주교가 기존의 가부장적 질서와 유교식 제사 등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것을 지배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정순왕후가 불러들인 피바람은 수없이 많은 백성들을 참살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녀가 천주교도를 더 많이, 빨리 잡아들이라는 교서를 내릴 때마다 각 관아에서는 혹독한 고문과 처형이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신자 공동체 내에 밀정(密偵)을 투입하기도 하는데 이 책에 등장하는 박차돌이라는 인물도 그런 밀정 중 하나로, 원래 포도청 비장이었으나 젓갈장수로 위장해서 천주교 신자인척 하며 신자 공동체와 교류하고 결국 신자들이 숨어있는 곳을 관아에 밀고하여 많은 신자들을 잡혀가게 한다.
또한 황사영에게 물건을 전해주러 온 마부 마노리 역시, 함께 밥을 먹고 집에서 재워주는 등 자신을 처음으로 천한 노비가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 대해주는 황사영에게 감복하고 그의 집에 머물며 천주교 교리를 듣게 된다. 그리고 사신을 수행해서 북경에 가면 천주당 안으로 들어가서 서양 어른을 만나라고 황사영은 그에게 부탁한다. 그리고 그것은, 마노리의 인생을 바꿔 놓는다. 훗날 그는 마부로써 사신 행렬을 따라 북경에 가고, 천주당에서 서양인 주교를 만나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성모님의 그림과 중국 은화를 받게 된다. 결국 조선에 와서 그 은화가 빌미가 되어, 그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발각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실신하며 황사영이 박해를 피해 배론에 숨어 있는 것을 발설하게 된다. 결국 황사영은 잡히게 되고, 숨어 있던 토굴 안에서 하얀 비단에 쓴 밀서는 압수되어 포도대장의 손을 거쳐 대비의 손에 들어간다. 대비는 그것을 읽고 곡기를 끊고 몸져 누워 "패륜이 극악하여 이미 교화할 수 없다. 나는 무섭다. 때를 가리지 말고 처단해서 국법을 보이라."는 명을 내린다. 그리하여 황사영과 마노리는 처형당하고, 이것이 바로 유명한 '황사영 백서'사건이다. 당시 신자들이 숨어 살던 배론은 지금은 성지가 되어, 많은 신자들이 방문하고 있다.
한편 정약전은 언제 유배에서 풀려날지 기약 없는 나날을 보내며, 술을 마시거나 섬에서 유일하게 글을 아는 소년 창대를 불러 말상대를 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창대는 물고기를 들여다보며 세상을 바라보는 것으로 작은 섬의 답담함을 이겨낸다. 약전 역시 느끼고 있는 답답함이었다. 육지에서도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져 있었고, 급기야는 사람들이 자신이 살던 곳을 버리고 유리걸식하다 굶어죽는 지경에까지 와 있었는데 흑산도도 상황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이 섬에까지 관리들의 수탈은 손을 뻗쳐서, 소나무 등의 징발령이 내리면 섬사람들은 그 신역에 동원되었고 고등어나 청어 등은 그 머릿수까지 하나하나 헤아려 세금을 매겼다. 창대의 아버지가 그러한 수탈을 견디다 못해 물에 빠져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몰래 흑산을 빠져나간 후, 창대는 섬에 남아 정약전과 함께 바다의 물고기와 여러 생물들을 연구한다. 정약전은 흑산도의 글자 흑은, 여기가 유배지라는 것을 끊임없이 깨우치는 너무 캄캄하고 무서운 글자이므로, 이 섬을 앞으로 흐리고 어둡고 깊다는 뜻을 가진 玆자를 써서 자산이라 부르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죽을 때까지 그 섬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섬에서 물고기들을 조사, 연구하고 쓴 책이 바로 한국 최초의 어류학 서적인 '자산어보(玆山魚譜)'다. 이렇게 역사적 사실들이 하나씩 맞아떨어지는 것도 은근히 흥미롭다.
또한 마포나루에서 국밥장사를 하며 일종의 거점 역할을 하던 강사녀, 상궁이었다가 기침병으로 궐 밖으로 나온 나이든 동정녀인 길갈녀, 소작농의 처 오동희, 노비의 딸로 태어나 상전들에게 성적인 학대를 당하고 도망친 아리 등, 여교우들의 활약 역시 훌륭하다. 하지만 평온한 생활도 잠시뿐, 그들이 모여 살며 신앙생활을 하던 수유리 집을 밀정 박차돌의 밀고로 관헌들이 급습하고 그들은 모두 배교를 거부하고 황사영 등과 함께 처형당한다. 이 책은,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황사영의 죽음을 몇 년 후에야 알게 되고, 섬에서 만나 살림을 차린 여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고, 포구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서당을 지어 동네 아이들 몇 명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희망적인 느낌의 결말이다. 물론 역사상으로는 이 책의 배경이 되었던 신유박해 이후에도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 등 계속해서 피바람이 불고 이는 19세기까지도 이어진다.
배교해서 살아남는 것과 순교하는 것, 이 사이의 간극은 너무나도 커 보인다. 그 갈림길에서 고뇌하지 않을 자 누가 있으랴. 작가 김훈은 인터뷰에서 "매에 못 이겨 배교한 자들이 단순히 지옥에 갔다고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들도 지금 하느님의 품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소설 속에서 순교를 예찬하지도, 배교를 비판하거나 변명하지도 않았다. 다만 소설에 대해 설명하며 그 잔인한 매를 끝까지 견디라고만 강요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일종의 야만적인 행위라고 덧붙인다. 또한 "삶은 중요한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배교이거나 순교이거나 모든 인간의 삶은 경건하고 소중한 것입니다."라고 그는 말한다(가톨릭신문 2011년 12월 11일자, 20페이지에서 발췌). 어쩌면 이것이, 작가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가장 주된 내용이 아닐까.
자세한 묘사가 없이 건조하게 사실만을 기술한 역사서 등과 달리 소설 <흑산>은 꽤 디테일한, 그래서 너무나도 잔혹하게 느껴지는 묘사들과 꽤 자주 마주치게 된다. 약전 형제가 배교를 종용당하며 곤장을 맞는 장면부터, 나는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형틀에 묶이고 곤장을 맞으면, 몇 대 만에 금방 살점이 튀고 똥물까지 쏟아낸다고 한다. 엉치뼈가 부서지고 장독이 올라 죽는 일도 흔했다. 이런 장면이 수도 없이 등장한다. 사극 등에서 흔히 볼수 있는 주리를 트는 형벌 역시, 몇 번 주리를 틀리면 정강이뼈가 밖으로 튀어나오고 다리가 거의 몸과 떨어져 나올 지경이 된다는 것을 <흑산>에서 읽으며, 처형 전에 사형수의 양쪽 귀에 화살을 꽂는데, 이 화살이 뇌 속까지 박혔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계속 식은땀을 흘리며, 급기야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특별히 잔혹한 장면이나 묘사에 약한 편은 아니다. 오히려 잔혹하고 끔찍한 장면들이 수도 없이 등장하는 소설이나 영화 등에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 있는 편이다.
내가 이것을 읽으며 심하게 괴로웠던 것은, 이 책의 등장인물들에게 내 자신을 강하게 이입시킨 결과가 아닐까 싶다. 지금은 원한다면 매일이라도 미사에 참례하고 영성체를 할 수 있는, 다행히도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시대지만 만약 신앙 선조들처럼 박해 등으로 인해 배교할 위기에 처한다면 나는 결연히 순교의 월계관을 택하겠노라고 오랫동안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마치 하느님께서 "네가 이런 상황에 놓인다면 너도 이들처럼 할 수 있느냐?"라고 질문하시는 것 같았고, 저렇게 혹독한 고문을 당하더라도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지킬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네!"라고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 나는 너무나도 약하다. 용덕이 부족한 것이다. 또한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깊은 믿음의 삶을 살아온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순교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며 많은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흑산>을 읽는 것은 내게 있어서 순교의 간접체험이자 마음을 찢는 통회의 시간이었다.
하느님, 나의 제사는 통회의 정신
하느님은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낮추 아니 보시나이다.
(시편 5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