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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 이후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자신이 믿고 있는 진실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는다. 인간의 우월성에 대한 관념이나 유일신에 대한 관념 같은, 오랜 세월 동안 일종의 도그마로서 작용해 온 이론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인류는 언어와 문자, 도구 등을 이용하여 문명을 발전시켜 왔고 이러한 인간이 지구상의 다른 종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화 되어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철학자 존 그레이는 이 책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원제 Straw Dogs: Thoughts on Humans and Other Animals)>에서 그러한 인간 종 중심주의(Anthropocentrism)에 반기를 들고 직설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어찌 보면 꽤 불편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원제의 '지푸라기 개 Straw Dogs'는 노자의 도덕경에 등장한 개념으로 고대 중국인들이 제사를 지낼 때 신에게 바치기 위해 만든 희생물이다. 제사가 끝날 때까지는 최고의 예우를 받았지만 제사가 끝나면 내팽개져쳤다. 저자는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인간의 오만과 편견이 지구를 위협하고 있고 인간이 스스로를 자정하지 않으면 지구가 자정 능력으로 인간을 '지푸라기 개'처럼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인간 종 중심주의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한편, 서구 문명의 핵심에 자리한 휴머니즘과 '진보에 대한 확신'의 약점에 대해서 파헤친다. 

지금까지 과학과 철학, 종교와 도덕에서는 인간은 동물과 달리 주어진 본성을 초월하여 자신이 가진 것을 통제함으로서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일종의 진보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발상 자체가 위선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가이아 가설을 창조한 러브록은 지구를 자기 조절이 가능한 거대한 생명체로 보고 있고, 그래서 인간의 삶이라고 해서 세균의 삶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지구 전체에 파종성 질환을 퍼뜨리는 병리조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는 것이, 인간 때문에 지구의 환경이 오염되고 자원이 고갈되고 있으며 다른 동식물 종들이 하나씩 멸종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전개될 미래는 인류의 멸망, 지구의 파괴, 지구의 만성적 감염(지금과 같은 형태로 근근히 사는 것), 공존(인류와 지구가 서로 도와가며 사는) 의 4가지 시나리오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식으로 앞으로도 살아간다면 전쟁이나 기아, 질병 등으로 암울한 미래가 찾아올 것이고, 그러면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는 '진보에 대한 확신' 역시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저자는 도덕에 대해서도 희망적인 입장을 갖지 않는다. 비정상적인 상황에 직면하면 도덕이라는 가치를 실현할 수 없는 예들을 들고, 도덕을 정상적인 상황에서만 적용되는 것으로 정의해 버린다. 사실 인간이 극한 상황에 몰리면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폭력이나 살인, 심지어는 식인까지도 하지 않는가. 물론 모든 인간이 다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도덕도 예의도 최소한의 조건이 갖춰졌을 때만 지켜진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인간들이 왜 만물의 영장이며 특별한 존재인가, 그러한 인간 중심의 철학은 일종의 기만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면 우리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행동하는 인간에서 관상(Contemplation, 觀想)하는 인간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놀이하는 인간(호모 루덴스)이 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의 마지막 문단이 참 인상깊다. '동물들은 삶의 목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기모순적이게도, 인간이라는 동물은 삶의 목적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그냥 바라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삶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일까?' 이 문장들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들을 압축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둥바둥 애쓰며 살기보다 그저 바라보며 성찰하고 지금을 누리며 사는 것, 확실히 매력적이다. 이 책을 읽으며 여러 학자들의 이론들을 짧게나마 접해볼 수 있었던 것과 꽤 어려운 내용인데도 마치 에세이나 독서 노트처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게 쓰여진 점이 꽤 마음에 들었다. 때로는 가벼운 책보다 이런 무거운 내용의 책이 참 끌린다. 사실 읽으며 시니컬한 느낌에 좀 불편하기도 했지만 기존의 권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러한 주장들이 많이 나와야 일종의 균형이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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