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적 비극 이론은 고대 그리스 연극에 심하게 의존하지만그 작품 몇 가지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중략). 보수적 이론에서 그런 질서는 우리에게 의미라는 위안을 주며, 그것이 침해되는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것이 얼마나 난공불락인지 보여 주려는 것이다. - P24

우리는 실패와 황폐로부터 가치를 뽑아낼 수 있기 때문에 희망이 있지만, 그렇다고 어떤 눈을 반짝이는 낙관주의로 기울지는않는다.²¹ 따라서 비관주의자와 진보주의자는 둘 다 허를 찔린다. 기계적 유물론자와 맞서 인간의 고귀함을 긍정하지만, 유토피아적 몽상가에게는 인간 유한성을 일깨운다. - P25

21.이 둘의 차이에 관해서는 Terry Eagleton, Hope without Optimism(London and New Haven, CT, 2015), 특히 1장을 보라. - P250

전통적 관점에서 비극적 예술은 신화, 섭리, 또 신들이라는 부담스러운 존재를 상실한 세계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언제 유령이 되느냐 하는 것은 논란이 있는 문제다. 마크 트웨인과는 달리 비극은 하나가 아니라 일련의 한 무더기의 때 이른 사망 기사의 주인공이었다.*


*마크 트웨인이 죽기 전에 그에 대한 사망 기사가 잘못 보도된 적이 있다. - P27

. 비극적 드라마는 그런 중대한 쟁점으로부터 윤리와 심리로 방향을 틀었는데, 이런 쇠퇴는 이미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서부터 나타났다. (중략).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운명이라는 관념이 고대비극의 핵심이라고 보는데, 근대에는 설득력 있는 등가물이 있을수 없다고 생각한다.²⁷ - P28

27.
Sigmund Freud, The Interpretation of Dreams, The Standard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vol. 4, ed. James Strachey (London, 1953-1974), p. 262. - P250

알베르 카뮈는 현대에 질서와 제약에 대한 감각을 잃은 것이 비극적 정신에는 치명적인데, 비극은 개인이 힘의 한계를 잔인한 방식으로 깨닫지 않고는 번창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³¹ - P29

32. Agnes Heller and Ferenc Feher, The Grandeur and Twilight ofRadical Universalism (London, 1991), p. 311. - P251

조지 스타이너는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 양쪽 모두 비극의 쇠퇴에 관여했다고 비난한다. "비극적 주인공에게 보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천국이 있는 신학이 조금이라도 닿으면 치명적인 결과가 생긴다." 그는 그렇게 선언한다.³⁴ - P30

34. Steiner, The Death of Tragedy, p. 129. - P251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는 사실 비극적 신조이지만 그것은 역사의 참담한 종말을 상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불의한 세계가 자신의 구속에 바쳐야 할 어마어마한 대가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신약」은 비극적이지만 영웅적 문서가아니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 하층 출신 주인공의 지저분한 죽음에는 전혀 고귀한 것도 교훈이 되는 것도 없다. - P31

예수의 부활한 몸은 여전히 상처 자국이 남아 있으며자신의 고문과 수모라는 사실을 무효로 만들 수 없다. 하느님도 과거는 바꿀 수 없다. - P31

마르크스의 경우 "그가 비극 개념 전체를 거부했다"³⁶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그가 잉글랜드 베틀 직조공의 파멸에 경악하고 이것을 대단히 비극적인 과정으로 보았다는 사실, 또 자본주의가 모든 구멍에서 피를 뚝뚝 떨어뜨리며 등장한다는 그의언급을 간과하고 있다. - P32

36. Miriam Leonard, Tragic Modernities (Cambridge, MA and London, 2015), p. 10. - P251

비극이 고대 그리스인보다 오래 살아남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무엇보다도 무슨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만일 소포클레스와 체호프가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비극적이라면 연속성의 문제는 복잡해진다.  - P36

발터 베냐민은 『독일 비극적 드라마의 기원』에서 비극의 역사적 특수성을 주장하면서 오직 고대 그리스 비극만이 진정으로 그런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비극의 철학은 역사를 벗겨 내는 담론으로, 완전히 다른 역사적 조건을 무시하고 비극을 일반화된 일군의 정서들로 환원한다고 불평한다.  - P37

 버나드 윌리엄스Bernard Williams 또한 비극이 고대 그리스에 특수한것이라고 보지만, 우리의 근대 윤리 개념도 인간 삶에 대한 그 비전에 근접한다고 주장한다.⁴⁶ - P38

46. Bernard Williams, Shame and Necessity(Berkeley, CA, 1993), pp.16-17 - P251

비극에 대해 실재론적 관점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드라마 형식으로서 비극은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비극은 인간 조건의 현실을 포착하기는 하지만 이제는 예술적이고 역사적인 조건들이 무대에서 그것을 재현하는 데 우호적이지 않다. - P38

우리가 비극적이라고 부르는 모든 텍스트가 실제로 하나의 특징, 즉 어떤 종류의 고통이나 역경을 공유하는 것에는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여기까지는 실재론자들이 옳다. - P39

실패와 좌절이라는 일상적 의미에서 비극은 실로 보편적이다. 아무리 유토피아적인 사회질서라 해도 치명적 부상, 꺾인 욕망, 끝난 관계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 P39

 아마 우리는 비극을 넘어서는 삶을 바란다는 말을 하기 전에 망설일 텐데, 그것은 그런 삶을 얻는 매우 확실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가치에 대한 감각을 잃는 것이 될 터이기 때문이다. - P40

비극의 죽음은 때때로 그리스 비극의 죽음을 가리키는 약호가 될수 있다. 이 예술을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연극과 동일시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다른 역사적 상황에서 잉태된 비극과 만날 때 그 종말을 선언하는 경향이 있다. - P42

. 우리는 신, 신화, 운명, 고귀한 태생의 주인공, 고양의 정신, 신령한 느낌이 비극에 필수적이라는 말을 아주 자주 들었지만, 보통 그 이유까지 들은 적은 없다. - P42

근대성은 비극을 망치기는커녕 생명을 새로 연장해 주었다고할 수 있다. 우선 잠재적인 비극적 주인공의 대오를 한없이 부풀려놓았다. 민주주의 시대에는 누구라도 거리에서 뽑아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팍팍한 장소에 갖다 놓기만 하면 후보가 될 가능성이 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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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억맘

베트남의 생선장. 피쉬 소스라고도 불린다. 멸치 등의 작은 생선을 소금에 절여 발효시켜서 나온 웃국을 사용한다. 제조사에 따라 염도나 맛이 다르므로 사용하기전에 맛을 보고 조절하여 사용하는 것이좋다. - P13

카피르 라임 잎

카피르 라임 나무의 잎으로 진한 감귤 향과 톡 쏘는 상큼한 향이 나는 동남아시아의 향신료, 태국어로는 ‘바이 마끄릇‘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는 생으로 사용하며, 생으로 사용할 때는 가운데에 두꺼운 줄기를 제거하고 나서 다져서 쓴다. 말린 잎은생잎에 비해 그 향미가 떨어지므로, 말린상태로 사용할 경우 생잎을 쓸 때보다 양을 두 배 정도로 늘리고 사용 전에 미지근한 물에 담가두었다 활용하는 것이 좋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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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과학자의 난제


나는 새로운 자연법칙들을 만들어낸다. 그것이내가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이다. 나는 입자물리학 이론을 개선하는 데 몸담은 전 세계 1만 명가량의 연구자 중 하나다. 우리는 지식의 사원의 지하실 바닥을 파내려가 기반을 더듬는다. - P17

이론물리학 분야에서 20여 년을 보낸 지금, 내가 아는 사람 대부분은 누구도 보지 못한 것들을 연구하면서 경력을 쌓고 있다. - P17

숨은 규칙은 우리에게 고약한 짓을 했다. 우리가 새로운 자연법칙들을 제안하더라도 그 법칙은 모두 확인되지 못한 상태로 남겨졌다. 그리고 내 직업이 위기에 처하는 걸 목격하는 동안, 나는 개인적인 위기 상황에 맞닥뜨렸다. - P18

내가 물리학에 빠져든 이유는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또 수학이 물리학을 잘 설명해주기 때문이었다. 나는 수학의 명료함과 모호하지 않은 증명 과정, 자연을 서술하는 탁월한 표현력을 좋아했다. - P19

LHC는 극한의 집합체다. 과냉각 자석과 초고진공, 실험이 진행되는동안 1초마다 전자책 수천 권 분량의 3기가바이트 데이터를 기록하는컴퓨터 클러스터까지 보유하고 있다. LHC 프로젝트는 수천 명의 과학자를 한데 불러 모으고, 수십억 달러의 첨단 기술을 집약해 수십 년 동안 연구를 진행했다. 이 연구의 목적은 단 하나인데, 우리가 무엇으로만들어졌는지를 알아내겠다는 것이다. - P20

잔의 연구는 기존 이론의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을 지닌 새로운 입자물리 이론들을 개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중략).¹
"물리학 이론의 아름다움은 사회적 견해가 아니에요. 이론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각은 틀림없이 뇌에 내장되어 있습니다. 무엇인가 내면의 코드를 건드리는 거죠. 아름다운 이론과 마주치면, 예술 작품 앞에섰을 때와 똑같은 감정적 반응을 경험하게 됩니다." - P21

1장 물리학의 숨은 규칙


1 Barbieri R, Giudice GF. 1988. "Upper boundsonsupersymmetricparticle masses," Nucl. Phys. B. 306:63.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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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연은 만지와 엄마를 피해 급히 상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 문 앞으로 만지와 엄마가 지나갔다. 화연은 두 사람에게서 천지의 아우라, 혹은 그것과 비슷한 기운을 느꼈다. 둘임에도 셋인 것 같은, 그중 하나는 문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 P34

화연은 천지와의 기억이 유쾌하지 않았다. 천지는 남 주자니 싫고 가지자니 더 싫은, 그런 친구였다. 친구, 그만하고 싶었다. - P35

화연은 화장실에서 나와 보신각으로 들어갔다.
"엄마, 나 이만 원만, 친구 생일인데, 아침에 말 못 했어."
화연 엄마는 금고에서 돈을 꺼내주었다.
"나도 내가 내 딸이었으면 좋겠네. 허구헌 날 친구 생일이라고달래, 어디 놀러 간다고 달래, 안 주문 안 되겄지야?" - P35

우박 섞인 비

MP3플레이어. 천지가 듣는 노래는 항상 다섯 곡을 넘지 않았다. (중략). 그런데 느닷없이 MP3플레이어를 사달라고 떼를 쓴 것이다. - P36

"공부하고 싶은 기분은 몇 개야?"
"없어. 수영이면 수영, 태권도면 태권도, 뭐 그렇게 능력껏 키워줘야지. 타고난 공부 유전자가 좋은 애들하고 같은 조건에서 공부하는 거, 불공평해."
"학교가 무슨 태릉선수촌이야?" - P37

공기청정기는 있는데, 왜 마음청정기는 없을까?


뽑아낸 구구단 뒤에 써 있었다. 글씨체로 보아 4학년 때 쓴 건 아닌 듯했다. 어림잡아 6학년 아니면 최근일 것이다. - P37

만지는 기어이 서랍장을 널빤지 위에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균형 잡기가 힘드네. 아, 아저씨. 냉장고 옆에 유리판 세워뒀거든요? 책상 유린데, 좀 들어주세요. 엄마, 그것도 버려야지?"
"우리가 한 번 더 오면 돼."
"제가 가지고 오겠습니다."
오대오가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넌 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함부로 집에 들어가라고 해!" - P40

좁은 아파트 복도를 지나 주차장으로 나오자 오대오가 만지 옆으로 왔다.
"아저씨 이름, 추상박이에요, 추상박이에요?"
"추상박. 설마 한국에서 미국식으로 말할까."
"무슨 이름이 앞뒤가 다 성 같어..…………." - P41

"영감님, 전에 나한테는 이 서랍만 한 거 오천 원 받았잖아요."
실랑이를 하던 엄마 얼굴이 굳었다.
"그것 봐요, 아줌마. 내 맘대로 받는 게 아니라니까. 다 정해져있어요."
엄마는 임 씨에게 육천 원을 내밀었다.
"가자, 만지야. 아저씨는 꼭 이천원 환불받으셔요!" - P42

집으로 돌아온 화연은 안절부절못했다. 천지네가 보란 듯이 같은 아파트로 이사를 와버린 것이다. 천지가 있다 해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천지가 없는 천지네 식구들은 더욱 달갑지 않았다. - P43

천지는 8에서 10등 사이를 오가며 고른 성적을 유지했다. 사실 그 정도로는 아이들에게 성적으로 강한 인상을 주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겉으로는 건성건성 공부하는 것처럼 행동해서 맘잡고 공부하면 1, 2등도 문제없을 거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교과서보다 소설책을 더 많이 읽는 아이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런 책 재미있냐?"
"필독서로 찍히면 재미없어지니까, 미리 읽어두는 거야." - P44

 천지는 충동적으로 자살할 아이가 아니다. 긴 시간을 고민했을 것이다. 만지는 이 사회가 널 죽였다. 식의 거창하고 고상한 변명을 동생에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남들이야 이 망할 사회를 교양있게 통탄하며 천지를 비운의 아이로 본다 할지라도, 자신은 동생의 죽음을 막지 못한 미련한 언니였다.  - P46

"하긴. 나 김화연 초등학교 동창이랑 같은 학원 다니는데, 말 들어보니까 끝내주더라. 생일날 천지만 다른 애들보다 늦게 불러서,
다 먹고 찌꺼기만 남았을 때 오게 했단다."
"김화연, 진짜 재수 없다."
아이들 말을 듣고 있던 미라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오래된이야기가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다니. - P47

"야, 야, 김화연 온다."
화연이 교실로 들어왔다. 창가에 모여 있던 아이들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마치 방금 전까지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급조한 웃음은 소리만 클 뿐 공명이 매우 낮았다. (중략).
"나는 가서 숙제나 해야겠다."
"맞다. 숙제 있지."
화연은 아이들의 어색한 행동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 P48

벌써 청소는 마무리 단계였다. 화연은 초조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만지가 내내 신경 쓰였다. 만지가 ‘왜?‘라는 원인 규명성의문을 품고 있다면, 화연은 ‘내가 뭘?‘이라는 회피성 의문을 품고 있었다. 천지가 싫었다. 그래서 험담도 했고 골탕도 먹였다. - P49

"네가, 천지 아빠 자살했다고 했지?"
미라가 화연 옆에서 의자를 내리며 물었다.
쿵!
너무 놀란 화연은 미라를 볼 수조차 없었다. - P49

"어머, 내가 3시라고 썼니? 미안해."
역시 황당한 제스처를 취했던 화연.
"괜찮아, 생일 축하해."
"엄마, 이제 왔는데, 짜장면 하나만 해줘."
(중략). 베스트 프렌드라던천지에게만 시간을 잘못 써줬다? 왜? 화연의 부모님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배달하는 음식 중에는 탕수육도 꽤 되었다. - P51

아이들에게서 지난날의 흔적이 들춰지고 있었다. 맞장구치며 함께 떠들던 아이들은 이제 증인이 됐고 폭로자가 되었다. 화연은 자신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음을 깨달았다.
‘사실대로 말하자………….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니잖아.‘ - P52

"저랑 선물 교환하기로 해서 그랬을 거예요. 근데 최신형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싸구려 사주기로 한 건데……………."
"선물 교환?"
"우리 생일이 비슷하잖아요. 그래서 나는 천지한테 디카 사주고,
천지는 나한테 엠피 사주기로 했어요."
"쪼그만 것들이 무슨 디카하고 엠피냐!"
"인터넷 보면 이만 원도 안 하는 거 많다니까요." - P53

"넌 왜 좋은 걸로 사주려고 했는데?"
"천지한테 잘못한 게 많거든요. 중학생 됐으니까 다 잊고 새로 시작하고 싶었어요. 게다가 천지는 생일 파티도 안 하잖아요. 그래서 선물이라도 좋은 걸로 해주고 싶었어요."
생일 파티. 천지뿐 아니라 만지도 한 적 없다. 엄마가 퇴근하면서 들고 오는 케이크와 얼마간의 용돈이면 충분했다.  - P54

천지의 죽음은 학교 측에서도 매우 난감한 사안이었다. 자칫하면 대외적으로 고질적인 학교 폭력이나 왕따 문제를 안고 있는 학교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농후했다. 천지가 죽은 장소가 어디였든학교에 적을 둔 학생이니 빠르게 진상 조사를 벌여야 했다. 그리고학교 측과는 별개로 천지의 담임선생님도 신속하게 움직였다. - P57

천지의 장례식에 다녀온 다음 날, 선생님은 화연을 조용히 불렀다.
(중략).
"천지가 단짝이라고 하고 다녔어요. 저는 다른 애들하고 똑같이대했는데, 천지는 자기한테만 그러는 줄로 알았나 봐요. 전 사실, 천지 좀 부담스러웠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피하기도 했는데, 눈치를 못 채더라고요." - P58

"그랬구나. 근데, 너 수경이랑 친하지 않니?"
순간 화연의 볼 근육이 단단히 굳었다.
(중략).
"어쩌면 그때 천지하고 수경이가 친해졌을 수도 있겠다. 그치?"
"그건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은 순간 흔들린 화연의 눈동자를 주시했다. - P59

선생님은 교실 문을 열고 수경을 바라보았다.
수경은 교실로 들어와 3분단 맨 앞자리에 털썩 앉았다.
"네가 왜 천지 체육복을 가지고 있니?"
"빌렸어요."
"언제?"
"......1학기 때요."
"1학기? 근데 왜 이제 가져왔어?"
수경은 어깨에 힘이 쑥 빠졌다. 눈빛에 드러나는 멸시와 무시. - P60

"전 체육복밖에 안 빌렸는데요."
"그랬겠지. 넌 체육복 하나만 생각하면 됐겠지만, 빌려주는 천지는 여러 가지가 떠올랐겠지. 만약에 안 빌려주면, 만약에 안 빌려주면!"
"김화연이 나랑 이천지 체격이 비슷하니까, 걔한테 빌리면 될 거라고 해서 빌린 거예요!" - P61

수경은 자신을 하찮게 바라보는 선생님을 짧게 노려보고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씨발년이 왜 죽어서는…………….‘
수경은 종례시간에 화연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천지 자살했다. 담임은 사고라고 하는데, 집에서 무슨 사고?

순간 1학기 때 빌린 체육복이 생각났다. 그래서 종례가 끝나자마자 얼른 3반으로 달려왔다. - P62

선생님은 그런 수경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야기 중에 자신도 모르게 손이 나갈 것 같아 얼마나 주먹을 꼭 쥐었는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날 정도였다. 잘못했다가는 언젠가 아이들이 말한초짜 선생님의 통과의례를 치를 뻔했다.
1학기 초에 대대적으로 교내폭력방지 캠페인 교육이 있었다.
"흔들리지 마세요. 스스로 문제아라고 낙인찍지도 마세요. 나는언제든지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 P63

아이들의 글을 정리해보면 대략 이렇다. 초짜 선생님이 항상 미소담뿍 담은 얼굴로 아이들을 대하다 보면, 꼭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는 아이가 생기게 마련이다. 대차게 노는 아이라면 선생님도 은근 겁을 먹거나 꼴통 취급을 해서 참아버리는데, 꼭 노는 것도 아니고 안 노는 것도 아닌 삐리리한 것들이 갑자기 성질을 부린다는 것이다. - P64

노는 아이들에게도 급이 있는데, 보스급, 양아치급, 똘마니급, 날라리급으로 나뉜다. - P65

이렇게 아주 사소한 일로 선생님이 정신줄을 놓고 마는 일을 두고, 아이들은 초짜 선생님의 통과의례, 즉 신고식이라고 했다. 신고식을 거치면 비로소 대한민국의 정식 선생님이 되어, 앞으로 계속 때리는 선생님이 되든 무관심으로 초지일관하는 선생님이 되든 한다는 것이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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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 직업이 없어서 끝냈냐? 요즘은 아예 사회가 알아서 실업자 백만 명 시대 어쩌구, 취업할 곳이 없네 하면서 떠들어주니까,
아주 지가 살판나서 묻어가고 자빠졌네. 너는 원래 일하기 싫어하는 놈 아냐! 옛날 그대로 나타나서 앞으로 믿어달라니. 어머나, 미친 새끼. 너 같은 새끼 때문에 정말 일하고 싶어도 못 하는 사람들까지 욕먹는 거야!" - P24

‘동영상 나오는 완전 최신형으로 사주려고 했어. 너 이렇게 가는거 아냐.......
엄마는 사진 속 천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작년 천지의 생일날 천지가 사진관에서 찍자고 우겨서 찍은 사진이다. 이미지 사진이라고, 남들도 다 찍는다고 했다. - P25

자식을 잃고 흘리는 어미의 눈물은 배 속 창자를 후비고 눈을 찌르며 나오는 눈물이다. 쉽게 위로할 수 없고, 쉽게 위로 받을 수도없는, 한 깊은 눈물이다. 만지는 엄마의 눈물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없었지만, 지금은 엄마를 혼자 두는 게 나을 것 같아 자리를 피해주었다. - P26

동사무소에서 받아 온 스티커를 붙여 가구며 이것저것 꽤 버렸는데도, 아홉 평짜리 아파트에 부린 살림은 여전히 많아 보였다. - P27

"엄마야!"
엄마가 베란다에서 튀어나와 널브러져 있는 세간들을 허들 뛰기로 넘어 아파트 복도로 달려 나갔다. (중략).
"왜 그래 뭐야?"
"상자 안에 새끼 쥐가 득실득실해. 스윽 들추는데, 아오, 이따만한 쥐가 확 튀어나오잖아. 난 몰라."
"아이, 징그러. 어떡하지?" - P28

"비명 소리가 들리던데요."
"베란다에 쥐 떼가 있어요. 119에 신고한다고 잡아주진 않겠죠?"
만지는 매우 성의 없는, 대답을 이미 담고 있는 질문을 했다.
"제가 잡아보겠습니다."
오대오의 말에 엄마는 짐짓 환한 얼굴로 빗자루를 내밀었고, 만지는 그래도 이 남자 제법이라는 표정으로 쓰레기봉투를 내밀었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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