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연은 만지와 엄마를 피해 급히 상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 문 앞으로 만지와 엄마가 지나갔다. 화연은 두 사람에게서 천지의 아우라, 혹은 그것과 비슷한 기운을 느꼈다. 둘임에도 셋인 것 같은, 그중 하나는 문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 P34

화연은 천지와의 기억이 유쾌하지 않았다. 천지는 남 주자니 싫고 가지자니 더 싫은, 그런 친구였다. 친구, 그만하고 싶었다. - P35

화연은 화장실에서 나와 보신각으로 들어갔다.
"엄마, 나 이만 원만, 친구 생일인데, 아침에 말 못 했어."
화연 엄마는 금고에서 돈을 꺼내주었다.
"나도 내가 내 딸이었으면 좋겠네. 허구헌 날 친구 생일이라고달래, 어디 놀러 간다고 달래, 안 주문 안 되겄지야?" - P35

우박 섞인 비

MP3플레이어. 천지가 듣는 노래는 항상 다섯 곡을 넘지 않았다. (중략). 그런데 느닷없이 MP3플레이어를 사달라고 떼를 쓴 것이다. - P36

"공부하고 싶은 기분은 몇 개야?"
"없어. 수영이면 수영, 태권도면 태권도, 뭐 그렇게 능력껏 키워줘야지. 타고난 공부 유전자가 좋은 애들하고 같은 조건에서 공부하는 거, 불공평해."
"학교가 무슨 태릉선수촌이야?" - P37

공기청정기는 있는데, 왜 마음청정기는 없을까?


뽑아낸 구구단 뒤에 써 있었다. 글씨체로 보아 4학년 때 쓴 건 아닌 듯했다. 어림잡아 6학년 아니면 최근일 것이다. - P37

만지는 기어이 서랍장을 널빤지 위에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균형 잡기가 힘드네. 아, 아저씨. 냉장고 옆에 유리판 세워뒀거든요? 책상 유린데, 좀 들어주세요. 엄마, 그것도 버려야지?"
"우리가 한 번 더 오면 돼."
"제가 가지고 오겠습니다."
오대오가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넌 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함부로 집에 들어가라고 해!" - P40

좁은 아파트 복도를 지나 주차장으로 나오자 오대오가 만지 옆으로 왔다.
"아저씨 이름, 추상박이에요, 추상박이에요?"
"추상박. 설마 한국에서 미국식으로 말할까."
"무슨 이름이 앞뒤가 다 성 같어..…………." - P41

"영감님, 전에 나한테는 이 서랍만 한 거 오천 원 받았잖아요."
실랑이를 하던 엄마 얼굴이 굳었다.
"그것 봐요, 아줌마. 내 맘대로 받는 게 아니라니까. 다 정해져있어요."
엄마는 임 씨에게 육천 원을 내밀었다.
"가자, 만지야. 아저씨는 꼭 이천원 환불받으셔요!" - P42

집으로 돌아온 화연은 안절부절못했다. 천지네가 보란 듯이 같은 아파트로 이사를 와버린 것이다. 천지가 있다 해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천지가 없는 천지네 식구들은 더욱 달갑지 않았다. - P43

천지는 8에서 10등 사이를 오가며 고른 성적을 유지했다. 사실 그 정도로는 아이들에게 성적으로 강한 인상을 주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겉으로는 건성건성 공부하는 것처럼 행동해서 맘잡고 공부하면 1, 2등도 문제없을 거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교과서보다 소설책을 더 많이 읽는 아이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런 책 재미있냐?"
"필독서로 찍히면 재미없어지니까, 미리 읽어두는 거야." - P44

 천지는 충동적으로 자살할 아이가 아니다. 긴 시간을 고민했을 것이다. 만지는 이 사회가 널 죽였다. 식의 거창하고 고상한 변명을 동생에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남들이야 이 망할 사회를 교양있게 통탄하며 천지를 비운의 아이로 본다 할지라도, 자신은 동생의 죽음을 막지 못한 미련한 언니였다.  - P46

"하긴. 나 김화연 초등학교 동창이랑 같은 학원 다니는데, 말 들어보니까 끝내주더라. 생일날 천지만 다른 애들보다 늦게 불러서,
다 먹고 찌꺼기만 남았을 때 오게 했단다."
"김화연, 진짜 재수 없다."
아이들 말을 듣고 있던 미라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오래된이야기가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다니. - P47

"야, 야, 김화연 온다."
화연이 교실로 들어왔다. 창가에 모여 있던 아이들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마치 방금 전까지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급조한 웃음은 소리만 클 뿐 공명이 매우 낮았다. (중략).
"나는 가서 숙제나 해야겠다."
"맞다. 숙제 있지."
화연은 아이들의 어색한 행동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 P48

벌써 청소는 마무리 단계였다. 화연은 초조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만지가 내내 신경 쓰였다. 만지가 ‘왜?‘라는 원인 규명성의문을 품고 있다면, 화연은 ‘내가 뭘?‘이라는 회피성 의문을 품고 있었다. 천지가 싫었다. 그래서 험담도 했고 골탕도 먹였다. - P49

"네가, 천지 아빠 자살했다고 했지?"
미라가 화연 옆에서 의자를 내리며 물었다.
쿵!
너무 놀란 화연은 미라를 볼 수조차 없었다. - P49

"어머, 내가 3시라고 썼니? 미안해."
역시 황당한 제스처를 취했던 화연.
"괜찮아, 생일 축하해."
"엄마, 이제 왔는데, 짜장면 하나만 해줘."
(중략). 베스트 프렌드라던천지에게만 시간을 잘못 써줬다? 왜? 화연의 부모님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배달하는 음식 중에는 탕수육도 꽤 되었다. - P51

아이들에게서 지난날의 흔적이 들춰지고 있었다. 맞장구치며 함께 떠들던 아이들은 이제 증인이 됐고 폭로자가 되었다. 화연은 자신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음을 깨달았다.
‘사실대로 말하자………….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니잖아.‘ - P52

"저랑 선물 교환하기로 해서 그랬을 거예요. 근데 최신형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싸구려 사주기로 한 건데……………."
"선물 교환?"
"우리 생일이 비슷하잖아요. 그래서 나는 천지한테 디카 사주고,
천지는 나한테 엠피 사주기로 했어요."
"쪼그만 것들이 무슨 디카하고 엠피냐!"
"인터넷 보면 이만 원도 안 하는 거 많다니까요." - P53

"넌 왜 좋은 걸로 사주려고 했는데?"
"천지한테 잘못한 게 많거든요. 중학생 됐으니까 다 잊고 새로 시작하고 싶었어요. 게다가 천지는 생일 파티도 안 하잖아요. 그래서 선물이라도 좋은 걸로 해주고 싶었어요."
생일 파티. 천지뿐 아니라 만지도 한 적 없다. 엄마가 퇴근하면서 들고 오는 케이크와 얼마간의 용돈이면 충분했다.  - P54

천지의 죽음은 학교 측에서도 매우 난감한 사안이었다. 자칫하면 대외적으로 고질적인 학교 폭력이나 왕따 문제를 안고 있는 학교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농후했다. 천지가 죽은 장소가 어디였든학교에 적을 둔 학생이니 빠르게 진상 조사를 벌여야 했다. 그리고학교 측과는 별개로 천지의 담임선생님도 신속하게 움직였다. - P57

천지의 장례식에 다녀온 다음 날, 선생님은 화연을 조용히 불렀다.
(중략).
"천지가 단짝이라고 하고 다녔어요. 저는 다른 애들하고 똑같이대했는데, 천지는 자기한테만 그러는 줄로 알았나 봐요. 전 사실, 천지 좀 부담스러웠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피하기도 했는데, 눈치를 못 채더라고요." - P58

"그랬구나. 근데, 너 수경이랑 친하지 않니?"
순간 화연의 볼 근육이 단단히 굳었다.
(중략).
"어쩌면 그때 천지하고 수경이가 친해졌을 수도 있겠다. 그치?"
"그건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은 순간 흔들린 화연의 눈동자를 주시했다. - P59

선생님은 교실 문을 열고 수경을 바라보았다.
수경은 교실로 들어와 3분단 맨 앞자리에 털썩 앉았다.
"네가 왜 천지 체육복을 가지고 있니?"
"빌렸어요."
"언제?"
"......1학기 때요."
"1학기? 근데 왜 이제 가져왔어?"
수경은 어깨에 힘이 쑥 빠졌다. 눈빛에 드러나는 멸시와 무시. - P60

"전 체육복밖에 안 빌렸는데요."
"그랬겠지. 넌 체육복 하나만 생각하면 됐겠지만, 빌려주는 천지는 여러 가지가 떠올랐겠지. 만약에 안 빌려주면, 만약에 안 빌려주면!"
"김화연이 나랑 이천지 체격이 비슷하니까, 걔한테 빌리면 될 거라고 해서 빌린 거예요!" - P61

수경은 자신을 하찮게 바라보는 선생님을 짧게 노려보고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씨발년이 왜 죽어서는…………….‘
수경은 종례시간에 화연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천지 자살했다. 담임은 사고라고 하는데, 집에서 무슨 사고?

순간 1학기 때 빌린 체육복이 생각났다. 그래서 종례가 끝나자마자 얼른 3반으로 달려왔다. - P62

선생님은 그런 수경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야기 중에 자신도 모르게 손이 나갈 것 같아 얼마나 주먹을 꼭 쥐었는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날 정도였다. 잘못했다가는 언젠가 아이들이 말한초짜 선생님의 통과의례를 치를 뻔했다.
1학기 초에 대대적으로 교내폭력방지 캠페인 교육이 있었다.
"흔들리지 마세요. 스스로 문제아라고 낙인찍지도 마세요. 나는언제든지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 P63

아이들의 글을 정리해보면 대략 이렇다. 초짜 선생님이 항상 미소담뿍 담은 얼굴로 아이들을 대하다 보면, 꼭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는 아이가 생기게 마련이다. 대차게 노는 아이라면 선생님도 은근 겁을 먹거나 꼴통 취급을 해서 참아버리는데, 꼭 노는 것도 아니고 안 노는 것도 아닌 삐리리한 것들이 갑자기 성질을 부린다는 것이다. - P64

노는 아이들에게도 급이 있는데, 보스급, 양아치급, 똘마니급, 날라리급으로 나뉜다. - P65

이렇게 아주 사소한 일로 선생님이 정신줄을 놓고 마는 일을 두고, 아이들은 초짜 선생님의 통과의례, 즉 신고식이라고 했다. 신고식을 거치면 비로소 대한민국의 정식 선생님이 되어, 앞으로 계속 때리는 선생님이 되든 무관심으로 초지일관하는 선생님이 되든 한다는 것이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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