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가 달라졌네! 둘 다 1씩 떨어졌다. 아니, 이런 잠깐만. 나는 토가에서 스톱워치를 꺼낸다(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 중에서도 일류는 늘 토가 안에 스톱워치를 넣고 다녔다).  - P68

66초
‘측정 속도‘는 66초당 1씩 떨어지고 있다. 재빨리 계산해 보니, 그 말은... 15m/s²이라는 뜻이다. 내가 앞서 계산했던 것과 동일한 ‘중력‘가속도다. - P68

표시된 숫자는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상대적인 속도만 표시될 뿐이다. 그러니까 이제 내가 던질 질문은 하나다. 내가 태양을 향해서 가는 것일까, 태양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일까. - P69

나는 헤일메리(절망적인 상황에서 아주 낮은 성공률을 바라보고 적진 깊숙이 내지르는 롱 패스를 뜻하는 미식축구 용어, 버저가 울리는 순간에 득점할 것을 노리고 먼 거리에서 던지는 슛을 뜻하는 농구 용어이기도 하다-옮긴이) 호에 타고 있다.
이 정보로 뭘 어째야 할지는 모르겠다. - P70

푸른 띠 안에는 검은 원이 있다. 검은 원 안에는 무언가를 상징하는 듯한 작은 세 개의 원이 있고, 각각 가운데에 점이 찍힌 노란 원, 흰 십자가가 들어간 파란 원, 소문자가 들어간 작은 노란 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 P70

두 사람을 기억하게 되면 마음이 아플 테니까 두뇌가 그들을 기억하지 않으려는 걸지도 모른다. 잘 모르겠다. 나는 과학선생이지 외상 심리학자가 아니니까.
나는 눈을 깨끗이 닦아낸다. 지금은 그 기억을 너무 열심히 들여다보기에 아직 이를지도 모르겠다. - P71

(전략).

"실험실 전체가 아르곤 가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스트라트가 말했다. "공기 배관이 꼬이거나 방호복이 찢기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아르곤 가스를 흡입하면...."
"질식하는 줄도 모르고 숨이 막혀 죽겠죠. 네, 알겠습니다." - P74

"저는 그 샘플이 살아 있는지 그레이스 박사님이 알아내 주기를 바랍니다. 만일 살아 있다면 어떤 식으로 활동하는지도요."
(중략).
"그걸 알아내기까지 수천 명의 과학자들이 200년 동안 노력해야 했어요!"
"뭐・・・ 그럼 그것보다 빨리 해보세요." - P75

"아무것도요. 제가 알아낸 바로는 이 점들이 그냥 엑스레이를 흡수해버립니다. 엑스레이가 들어갔다가 다시는 나오지 않아요. 아무것도나오지 않습니다. 아주 이상한 일이에요. 그렇게 할 수 있는 물질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 P77

 "하지만 이것들은 태양에서도 사니까요 최소한 얼마 동안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열에 대한 저항력이 높은것도 말이 되는 것 같네요."
"태양에서 산다고요?" 스트라트가 말했다. "그러니까 생명체라는건가요?" - P77

"뭐, 이것들은 움직입니다. 현미경으로도 잘 보이고요. 그것만으로 이 점들이 살아 있다는 증명이 되는 건 아니죠. 무생물도 정전하든, 자기장이든, 뭐로든 늘 움직이니까요. 하지만 다른 걸 하나 발견했어요. 그게 이상한 건데, 그 점을 생각하면 모든 게 맞아 떨어져요." - P78

"네. 그래서 제가 이것들이 생명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말했다. "이 점들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우리가 모르는 어떤 방식으로 저장했다가 추진력으로 활용합니다. 그건 단순히 물리적이거나 화학적인 과정이 아니에요. 복잡하고 방향성도 있죠. 진화 과정을 거친 존재가 분명합니다." - P79

"이것들이 왜 금성으로 이동하는 거죠?" 스트라트가 물었다. "번식은 어떻게 하고?"
"좋은 질문인데요. 저로서는 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녀석들이 단세포로 이루어져 자극 반응의 형태로만 활동하는 생명체라면, 아마 체세포분열을 통해 번식할 겁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니까 세포가 반으로 쪼개져서 두 개의 새로운 세포가 된다는...." - P80

나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어원을 애써 떠올렸다. "아스트로파지[별을뜻하는 아스트로(astro)와 세균을 숙주세포로 하는 바이러스를 의미하는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의 합성어 - 옮긴이]‘라고 부르면 될 것 같네요" - P81

나는 확대된 태양 영상이 떠 있는 모니터를 힐끗 본다. (중략).
자아아암깐.... 맞는 속도로 움직이는 것 같지가 않은데, 나는 스톱워치를 확인한다. 나는 겨우 10분 정도 공상에 잠겨 있었을 뿐이다. 흑점은 아주 조금만 움직였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화면의 절반 정도를 이동했다. 움직였어야 하는 거리보다 훨씬 멀리까지 - P81

태양의 자전 속도보다 열 배 넘게 빠르다.
내가 보고 있는 저 별은... 저 별은 우리 태양이 아니다.
나는 다른 태양계에 와 있다. - P82

04

(전략).
나는 ‘아스트로파지‘ 패널을 자세히 살펴본다.

잔량: 20,906kg
소비 속도: 6.056g/s

이 숫자들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것은 그 아래에 있는 도표다. - P84

연료 구역은 아홉 개의 작은 원통들로 나뉘어 있다. 나는 호기심에그중 하나를 건드려 보는데, 그러자 그 연료통에 관한 화면이 표시된다. ‘아스트로파지: 0.000kg‘라고 적혀 있다. ‘버리기‘라는 버튼도 있다.
뭐,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이것들이 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버리기‘라는 이름이 붙은 버튼은 전혀 건드리고 싶지 않다.
보이는 것만큼 극적인 효과를 낳는 버튼은 아닐지도 모른다.  - P85

스핀 드라이브라・・・ 스핀 드라이브. 나는 눈을 감고 그에 관해 떠올려 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대로 기억을 불러낼 수가 없다. - P86

나는 도면을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어째서 2만 킬로그램의 아스트로파지가 이 우주선에 실려 있는 걸까? 한 가지 강하게 의심되는 가설이 있다. 아스트로파지가 연료라는 가설. - P86

아, 그리고 사방에 온도가 표시되어 있다. 온도가 중요한 요소인 것같다. 선체를 따라서 몇 미터마다 수치가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수치에 ‘96.415℃‘라고 적혀 있다. - P87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른 실험도 해봤습니다. 극소량의 물방울을 가져다가 그 안에 아스트로파지를 집어넣었어요. 몇 시간후에는 물방울 전체의 온도가 96.415도가 되었습니다. 아스트로지가물을 가열한 거죠. 열에너지가 아스트로파지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결론은요?" 스트라트가 물었다.
나는 머리를 긁으려 했지만 비닐 방호복이 방해가 됐다. (중략).
"온혈 미생물이다?" 스트라트가 말했다. - P88

"박사님도 진짜 과학자가 맞잖아요. 게다가 어느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 빠르게 진전을 보이고 있고요, 박사님이 혼자 잘 하고있는데 위험을 무릅쓰는 건 의미가 없어요."
(중략).
"또한, 수많은 치명적 질환에는 2주간의 잠복기가 있습니다."
"저 봐, 결국 그거네." - P90

나는 실험 장비를 뒤진 끝에 필요한 물건을 찾아냈다. 나노 주사기였다. 희귀하고 비싼 물건이었지만, 이 실험실에는 있었다. 기본적으로이것은 매우 작은 바늘이었다. 미생물을 찌르는 데 쓸 수 있을 만큼 작고 뾰족한 바늘. 이 녀석을 쓰면 살아 있는 세포에서 미토콘드리아를채취할 수 있었다. - P91

내가 구멍을 뚫자마자 세포 전체가 투명해졌다. 더는 아무 특징 없는 검은 점이 아니라, 세포 기관 등 나 같은 미생물학자가 보고 싶어 하는모든 것이 들어 있는 세포가 되었다. 스위치를 탁 켜는 것만 같았다.
그러더니 아스트로파지는 죽어버렸다. 찢어진 세포벽이 죽더니 완전히 풀어졌다. - P92

"아뇨!" 내가 말했다. "뭐, 맞긴 맞아요 하지만 아주 과학적인 막대기를 가지고 아주 과학적으로 찔렀습니다."
"막대기로 찔러봐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리기까지 이틀이 걸리신 거네요"
"당신 진짜... 조용히 하세요."
나는 바늘을 분광계로 가져가 아스트로파지 진액을 받침대에 올려놓았다. 그런 다음 나는 분광계의 시료실을 봉인하고 열띤 분석을 시작했다. - P93

"물이에요. 아스트로파지는 대부분 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스트라트의 입이 쩍 벌어졌다. "어떻게요? 태양 표면에 존재하는 물질에 어떻게 물이 들어 있을 수 있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 외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내부 온도를 96.415도로 유지하기 때문일 겁니다." - P94

하지만 대체 여기 있는 사람이 나인 이유는 뭘까? 내가 한 일이라고는 평생 가져온 신념이 틀렸다는 걸 증명한 것뿐이었는데.
그 부분은 나중에 기억날 것 같다. 일단 지금은 저게 무슨 별인지 알고 싶다. 왜 우리가 이곳으로 사람을 보낼 우주선을 만들었는지도. - P94

실험실에는 온갖 도구가 있었다. 이걸 비틀어 열 만한 납작 드라이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아니면...
"어이 컴퓨터! 이 판을 열어줘."
(중략).
"음... 비품실로 들어가는 입구를 열어줘."
"비품실을 개방합니다." 컴퓨터가 말한다. - P95

통제실의 도면에서 봤듯, 창고는 약 1미터 높이이며 부드러운 용기들로 꽉꽉 차 있다. 안으로 들어가려고만 해도 그런 짐을 한 무더기는치워야 할 것이다. 굳이 들어가야겠다면 말이지만, 아마 언젠가는 들어가야겠지. 솔직히 말해, 좀 폐소공포증이 생기려 한다. 주택 밑에 파놓은 방공호 같다. - P96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당연히 안다. 야오 사령관. 그는 우리의 리더였다. 이제는 그의 얼굴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 P97

나는 다른 제복을 꺼낸다. 사령관의 제복보다 훨씬 작다. (중략). 러시아 항공우주국 로스코스모스의 상징이다. 이름은 ‘HJIHOXHHA‘라고 적혀있다. 이것 역시 로고에서 봤던 이름이다. 이건 ‘일류키나‘의 제복이다. - P97

그런 다음, 나는 세상을 떠난 동료들에게 옷을 입히는 우울한 작업을 시작한다. 깡마르고 건조한 그들의 시신에 입히니 작업복은 터무니없이 커 보인다. 양말도 신겨준다. 안 될 것도 없잖아? 이건 우리의 제복이다. 우주 여행자에게는 제복을 입고 묻힐 자격이 있다. - P98

"올레샤 일류키나." 나는 그렇게 말한다. (중략). 하지만 최소한 그녀의 이름만큼은 기억난다. "당신의 몸을 별들에게 맡깁니다." 적당한 말인 것 같다. (중략).
다음으로 나는 야오 사령관을 에어로크로 운반한다. (중략). "야오 리지에" 나는 그렇게 말한다. 그의 이름이 어째서 온전히 기억나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 순간 떠올랐다. "당신의 몸을 별들에게 맡깁니다." - P99

(전략).

나는 실험실에 고립되어 있었기에 대통령이 연설을 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나는 바로 어제 스트라트를 위해 그 단어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그 짧은 사이에 그 단어가 스트라트에게서 대통령에게로, 다시 언론으로까지 퍼져나가다니. 우와.
"음, 그래, 아스트로파지. 그게 태양에서 자라고 있어. 아니면 태양근처에서든지, 확실히는 모른단다." - P101

"너희들도 기후변화에 대해서 알지? 우리가 배출한 이산화탄소가 환경에 어떤 식으로 엄청난 문제들을 일으켰는지 말이야."
"우리 아빠는 지구온난화가 사기래요." 터모라가 말했다. - P101

"기후학자들은 앞으로 30년 안에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해"
바로 그렇게, 모든 아이들이 안심했다.
"30년이요?" 트랭이 웃었다. "엄청 나중이네!"
"그렇게까지 먼 미래는 아닌데..." 내가 말했다. 하지만 열두 살, 열세 살짜리 아이들에게는 30년이 100만 년이나 마찬가지였다. - P103

나는 서둘러 운전했다. 지나칠 만큼 빠르게. 빨간불도 그냥 지나갔다. 사람들을 칠 뻔했다. 나는 원래 그런 일을 절대로 하지 않지만, 그날만은 달랐다. 그날은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끼익 소리를 내며 실험실 주차장으로 들어가 이상한 각도로 차를 대놨다.
미군 두 명이 빌딩 문 앞에 서 있었다. (중략).
"막아야 되나?" 한 병사가 다른 병사에게 물었다. 나는 답이 뭐든 관심 없었다. - P104

스트라트는 팔에 태블릿을 꼈다. "박사님 꿈이 실현될 예정이거든요. 저는 아스트로파지를 나눠서 전 세계의 서로 다른 실험실 서른 곳에 보낼 생각입니다. 세른(CERN, 순수과학을 연구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이1954년에 공동 설립한 가속기 연구소로, 세계 최대 입자가속기 연구소 중 하나-옮긴이)부터 CIA 생화학 무기 실험실까지 전부 말이죠."
"CIA에 생화학 무기 실험실이 있어요...?" 나는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이 작업을 좀 더 진행하고 싶습니다." - P105

"아뇨, 다 못했습니다. 알아내야 할 게 훨씬 더 많아요."
"당연히 그렇죠." 스트라트가 말했다. "그걸 알아내는 작업을 시작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실험실이 서른 군데 있고요."
내가 앞으로 나섰다. "아스트로파지를 일부라도 여기 남겨 주세요. 조금 더 연구하게 해주십시오." - P105

스트라트는 태블릿을 가리켰다. "이 실험실들은 전부 국가 단위의 거대한 실험실입니다만 각자 대여섯 개의 세포를 받을 겁니다. 그게다예요. 그 정도로 아스트로파지가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그 173개의 세포들이야말로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이에요. 우리가 그 세포들을 분석한 결과가 인류의 생존을 결정하게 됩니다." - P106

"지금도 제가 외계 생명체에 대한 이론적 모형을 만드는 데에 경력을 다 바친 미생물학자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거의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는 기술을 가진, 쓸모 있는 자원이에요." - P106

스트라트는 한 걸음 물러나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내 말을 곱씹으며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다음 다시 나를 보았다. "셋이요. 아스트로지 세 개를 받으세요." - P107

지구가 곤경에 빠져 있다. 태양이 아스트로파지에 감염됐다. 나는 우주선을 타고 다른 태양계에 와 있다. 이 우주선을 만드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고, 우주선의 승조원들은 국제적으로 모집된 사람들이었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항성계를 넘나드는 임무다.  - P108

나는 더 많은 정보를 찾아 화면들을 뒤진다. 대부분의 화면은 우주선에서 볼 법한 것들이다. 생명 유지 장치, 항법 장치, 뭐 그런 것들. 어떤 화면에는 ‘딱정벌레‘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다음 화면에는…….
잠깐 딱정벌레라고?
그래, 이게 무엇과 어떻게 관련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우주선에 딱정벌레가 있다면 알아봐야겠다. 그런 것이야말로 알아봐야 할 문제다. - P108

나는 임의로 ‘존‘이라는 딱정벌레를 골라 자세히 살펴본다.
존은 곤충이 아니다. 우주선이 틀림없다. - P109

잠깐... 이 탐사선이 존재하는 의미가 5테라바이트의 저장 공간이라면?
문득 어떤 깨달음이 든다.
"이런, 너무한걸." 내가 말한다.
(중략). 다른 별로 우주선을 보내는 데에는 아마 터무니없는 양의 연료가 필요했을 테니까. 그 우주선을 다른 별로 보냈다가 다시 데려오는 데에는 그 열 배는 되는 연료가 필요할 것이다. - P109

나는 기억을 되살리려고 ‘아스트로지‘ 창을 확인한다.

잔량: 20,862kg
소비 속도: 6.043g/s

소비 속도가 전에는 초당 6.045 그램이었다. 그러니까 약간 줄어든셈이다. 그리고 연료의 양도 줄어들었다. - P110

저게 무슨 별인지는 모르지만, 태양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다른 어떤 별에서든 1.5g의 중력가속도로 겨우 40일 안에 지구에도착할 방법은 전혀 없다. 아마 지구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몇 년이 걸렸을 것이다. - P110

아무튼 이 모든 것의 의미는 한 가지뿐이다. 헤일메리호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왕복이 아니라 편도다. 이 딱정벌레들은 내가 지구로 정보를 보낼 방법일 것이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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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는 마저리와 나를 앞으로 불러냈다. 마저리와 빌리는 훌쩍거리기 시작했고 판사는 측은하게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법봉으로 나무 받침을 세 번 치고 나서 우리 아들을 풀어주었다. 이보다 더 종교적일 수가있을까? - P192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빌리는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수치심과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반쯤 왔을 때 내가 침묵을 깬다.
"빌리, 이제 곧 경찰이 수색영장을 들고 들이닥칠 거야."
(중략).
"미해결 절도 사건까지 한 번에 처리하려는 거지. 네가 과거에도 그 가게를 털러 들어간 적이 있었다는 증거를 찾으려는 거야." - P193

"빌리, 우리가 다 처리했어. 아버지가 다 처리하셨다고."
그제야 이해가 됐는지 아이는 더 부끄러워했다. - P193

"그걸 사주실 형편이 못 됐다는 거 알아요‘
아이가 말했다. (중략).
그건 틀린 말이 아니다. 그걸 사줄 형편이 못 된다는 것. (중략).
"무사히 지나갈거야, 빌리, 금세 잊힐 거고."
나는 말했다.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굳게 닫힌 입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 P194

무뚝뚝한 경관들이 집 안 구석구석을 수색하는 동안 우리는 거실에서 묵묵히 기다린다. 물론 그들은 아무 소득도 올리지 못한다. 그들이 원한다는 내 사무실에 보관된 이력서 폴더도 기꺼이 내줄 용의가 있다. 그게 그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 P195

갑자기 매사추세츠의 에드워드 릭스가 떠오른다. 나이 든 교수와 눈이 맞아 문제를 일으켰던 그의 딸, 주니도 황당한 오해는 나로 하여금 그 아이의 어머니까지 죽이게 했다. (중략).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주니도 피해자였다. 아버지가 실직만되지 않았어도 주니는 나이 든 교수와 엮이지 않았을 것이다. - P196

24

6월 1일 일요일, 저녁을 먹은 식구들이 거실에 모여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동안 나는 슬그머니 사무실로 들어간다. 다시 작전을 세워야 할 때가온 것이다. 더 이상의 지체는 곤란하다. - P197

나는 대학 시절 ‘정리‘에 대해 배웠다. 항상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내게 역사는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일 뿐이었다. 실제로 성적도 좋았고, 그 덕분에 평균 점수도 많이 끌어올릴 수 있었다. - P198

정리 2. (땅에서) 삼림, 낡은 집, 거주자 등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개척하는 것


역사가 승리자들에 의해 쓰였다는 증거 중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 생각해보라. 쉼표가 하나 빠졌더라면 ‘거주자‘는 ‘등‘에 포함됐을 것이다. - P198

25

(전략).
"다 끝났어요."
아내가 속삭인다. (중략).
물론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 또 다른 남자, 그 자식, 남자 친구. 그와의 관계가 끝났다는 뜻이다. 더 이상의 부정함은 없을 거라는 얘기. - P200

내가 생각해도 완벽한 뒤처리였다. 하지만 몇 년 전이었다면 이런 방법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직장에 다니며 정상적이고 변화 없는 인생을살고 있었을 때, 그 당시, 그러니까 내가 해고를 당하기 전까지 나는 무척 수동적인 사람이었다. 특히 이런 일에 대해서는 더 그랬다.  - P201

북쪽으로 3킬로미터쯤 더 올라가면 작은 주차장이 나온다. 소나무로 덮인산과 골짜기의 황홀한 풍경을 감상하기 좋은 곳이다. 서쪽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는 작은 마을들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나는 그곳에 차를 세우고 루거를 레인코트 밑으로 밀어 넣는다. 다시 지도를 펼쳐들고 작전을 짜보지만 소용이 없다. - P203

(전략).
그렇게 1.5킬로미터쯤 더 내려가자 오른쪽으로 샛길이 나타난다. 나는방향을 틀어 스캔틱 리버 가를 벗어난다. 작은 동네로 들어서니 가장 먼저 ‘막다른길‘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앞뒤로는 차가 없다. - P204

나는 걸음을 멈춘다. 과연 이게 좋은 아이디어인가? 여기서 길이라도잃으면 어쩌지? - P206

사슴이라면 별 문제없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맞닥뜨리고 싶지 않다. 블랙스톤이 피살된 시간 전후로 현장 인근의 숲속을 배회했던 수상한 남자로 찍히면 곤란하다.
알돌. 나는 잽싸게 그 뒤로 몸을 숨긴다. 날카로운 소음이 다시 들려온다. 나는 최대한 몸을 낮추고 오솔길을 흘끔 내다본다.  - P206

아내 그의 아내다. 우편물을 확인하던 바로 그 여자. 그녀는 여전히 같은 모자와 카디건, 그리고 코르덴 바지 차림이다. 그녀는 혼자 걷고 있다.
한 손에는 곤봉처럼 생긴 두꺼운 지팡이가 쥐어져 있다. 그녀는 지나는 나무들을 지팡이로 딱딱 두드린다.
오 뱀을 쫓으려는 거였군. 그녀는 뱀을 겁내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거슬리는 소리를 내면 뱀이 도망친다고 귀띔해준 모양이다. 딱딱. 그녀는계속 빠르게 다가온다. - P207

수영장과 잔디밭 너머로는 커다란 집이 우뚝 서 있다. 아래층은 돌로, 위층은 흰색 물막이 판자로 둘러져 있다. 지붕창도 몇 개 보인다. 골목에서 봤던 집이 맞다. 아직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 P208

4시. 해가 서쪽의 높은 언덕들 너머로 사라지니 공기는 점점 차가워진다. (중략).
그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도 마찬가지다. 이곳에서는 그들의 사유 차도도 내려다보인다. 그들은 하루 종일 차를 쓰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블랙스톤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그의 차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 P209

26

어제 상담에서 마저리가 말했다.
"버크가 해고당했을 때 난 그걸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인생엔 아무 문제가 없었죠. 원하는 모든 걸 가질 수 있었고, 생계를 위해 바둥거려본 적이 없었어요. 서로에게 자신을 증명해 보일 필요도 없었고요. (후략)." - P211

퀸란이 나를 돌아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상대의 말을 잘들어주는 사람이다. 퀸란 그가 말했다.
"이젠 자신을 좀 녹여볼 생각이 있습니까, 버크? 벽을 허물어버릴 생각이 있나요?"
"내가 그래 왔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냥 무너져 내리지 않으려고 나 자신을 꼭 붙들고 있었을 뿐이에요"
나는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 P216

"우리 모두가 병적으로 의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마저리."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죠 흑인 남자에게 상담을 받는 기분이 어떻습니까?
지금 날 놀리고 있는 건가요? 둘이 차에서 내 흉을 보며 웃진 않습니까?"
그가 말했다.
"우린 뭘 보고도 웃지 않아요." - P217

물론 나는 앞으로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얘기하지 못했다. 우리가 상담에서 무엇을 하든 별 영향은 없을 테니까 이제 남은 건 두통의 이력서, 그리고 업튼 레이프 팰런뿐이다. 이제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마저리의 말을 들으니 기분이 나아지긴 했다. 아내를 잃고 싶지않다. 빌리를 감옥으로 보내고 싶지 않은 만큼. 더 이상 상황이 악화되는것은 확실히 막아야 한다. - P218

어쨌든 이제는 그 문제의 남자의 신원이 확인됐다. 제임스 할스테드, 항상 제임스로 부른다. 절대 짐으로 줄여 부르지 않는다. 은행 임원 출신의 메르세데스 세일즈맨, 이제는 모든 게 밝혀졌지만 상관없다. - P219

27

(전략).
어제 내가 재교육에 대해 했던 말이 떠오른다. 허튼소리가 아니라 꽤진지하게 했던 말이다. 지금까지 내 가족을 챙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지만 그 과정에서 마저리가 겪었을 정신적 고통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시해왔다. - P220

재훈련 그것은 회사의 퇴직 패키지의 일부였다. 그들이 얘기하는 재훈련은 비참하고, 부적절하게 들렸다. - P221

11시 15분. 그녀가 나타난다. 같은 모자에 같은 카디건, 같은 코르덴 바지 차림이다. 달라진 건 블라우스뿐이다. - P222

그는 안에 있나? 한번 들어가볼까?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30분 정도의 여유가 있다. 적어도 지난번에는 그랬다. 언제까지나 여기서 이렇게 기다릴 수만은 없다. 내가 무슨 레프리콘 (장난을 좋아하는 아일랜드의 작은 요정)도 아니고 - P223

그는 외출을 한 것이다.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에버릿 다인스처럼 카운터 점원으로 일하나? 자동차 딜러로 일하는 건 아닐까? 어떻게 찾지? 어떻게 하면 그를 찾아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지? - P224

식당을 가로지르는 그녀의 둔탁한 발소리가 들려온다. 이쪽으로 오는걸까? 아니면 반대쪽으로?
반대쪽이다. 작은 거실과 현관 홀을 지나 화장실로 향하고 있다. 역시기운차게 산책을 했으니 방광도 자극을 받았겠지. 그래서 오늘은 풀코스를 돌지 못했던 거야. 그녀가 화장실 문을 닫는다.  - P225

28

(전략). 아무튼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내가 감시한 지난 이틀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는 직접 나서서 어떻게 된 상황인지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준략). 나는 블랙스톤의 이력서를 통해 알아낸 번호로 전화를 건다. 두 번째 신호음이 가고 그녀가 응답한다.
"블랙스톤의 집입니다." - P227

나는 말한다.
"개럿 블랙스톤 씨를 부탁드립니다."
(중략).
"제지회사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와 통화를 할수 있을까요?"
(중략).
나는 말한다.
"거기로 연락해봐도 되겠습니까?"
그가 어디서 일하는지 알아내야 한다.
"글쎄요."
그녀가 말한다. 남편의 옛 동료를 불쾌하게 만들 생각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 P228

오늘 그를 죽여버리겠어. 한 시간 안에 죽여버릴 거야! 수화기를 쥔 손에서 쥐가 난다.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나는 말한다.
"다시 제지회사에 취직이 된 건가요?"
"네! 윌리스&켄덜이에요. 아시는 곳인가요?"
순간 안도의 물결이 밀려든다.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다. 나는 말한다.
"통조림 라벨!" - P229

그를 죽여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잘됐어. 아주 잘됐어. 나는 보야저에 시동을 걸고 유턴을 한다. 얼굴에서는 환한 미소가 가실 줄 모른다.
집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흥분도 서서히 가라앉는다. 이제 두 명 남았다. - P229

29

토요일 아침. 나는 사무실에 들어와 있다. 파일 서랍에서 마지막 이력서를 꺼내고, 지도를 펼치려는데 마저리가 문을 두드린다. 나는 지도로 이력서를 덮어놓는다.
(중략).
"버크, 경찰이 왔어요 당신과 할 얘기가 있대요. 형사예요."
공포가 내 식도를 꽉 막는다. (중략).
"그런 것 같진 않아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버크 그는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 P230

"버튼 형사입니다. 주 검찰국 수사과 소속이죠 이렇게 불쑥 찾아와 저송합니다. 제가 중요한 볼일을 방해하진 않았습니까?"
(중략).
"혹시 허버트 에벌리를 아십니까?"
날 용의자로 찍은 모양이군. 하긴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이고 무사할 거라 믿은 내가 어리석었지. 하지만 어쩌겠나. 일단은 모르는 척 능청을 떨어야지. - P232

 그는 여전히 수첩을 쥐고 있다.
"며칠 전 윌리스&켄덜이라는 제지회사의 인사 담당자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중략).
"그 후로 연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제가 뽑히지 않은 모양이죠."
나는 말한다.
"2차 면접을 위해 연락을 받은 사람은 총 네 명이었습니다. 그중 두 명은 살해됐고요. 둘 다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 P233

"그들의 옛 동료가 범인이었습니까?"
나는 말한다.
"그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수사 결과는 그렇습니다. 그들이 같은 자리를 노리고 이력서를 넣었다는 것 말고는 두사람을 엮을 연결고리가 없습니다."
버튼이 말한다. - P234

"저희도 회사의 연락을 받았기 때문에 수사를 시작한 겁니다. 구체적으로 뭘 찾아야 하는지를 몰라서 그냥 떠오르는 모든 걸 다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지 업계 사람들이 총출동하는 무역 박람회라든지......" - P235

첫 번째와 네 번째 이력서의 주인공. 내가 총알을 박아 넣기 전의 온전한 얼굴이다.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엄청난 슬픔이 밀려든다. 눈도 따가워진다. 미안한 마음을 숨길 수 없다.  - P236

사진을 돌려주며 나는 말한다.
"이 사람들을 만난 기억이 없습니다."
(중략). 수첩은 다시 그의 재킷 안주머니로 사라진다.
이게 다야? 다 끝난거야? 난 여전히 자유의 몸인 거야? 잡힌 것도 아니고, 용의자도 아닌 거야? 나는 말한다. - P237

30

나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다. 버튼은 돌아갔고, 나는 마저리에게 그가 나를 찾아온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두 살인 사건에 대한 마저리와의 대화가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기는 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 P239

같은 총. 내가 어리석었다. 그리고 굉장히 운이 좋았다. 그들이 두 사건을 이렇게 연결 지을 줄은 몰랐다. (윌리스&켄덜의 인사 담당자가 참견하지 않았으면 영영 밝혀지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었을까?  - P239

마지막 표적에게도 이 총을 쓸 수 없게 됐다.
그럼 어쩐다? 더 이상 루거를 쓸 수 없게 됐으니. 내게는 또 다른 총이없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새 총을 구할 수 있는 방법도 모른다. 범죄자들이야 식은 죽 먹기이겠지만 나는 그들 세상에 살지 않는다.  - P240

31

"현재 아내." 그 안에는 숨은 뜻이 많다. 비정한 해병대 출신. 그가 지금껏 몇 명의 아내를 지쳐 떨어져 나가게 했는지 궁금하다.
여자보다 고용주에게 더 충실한 타입인 모양이다. 제대 직후 그는 오크크레스트에 입사했고, 최근에 해고당할 때까지 그곳에서만 근무해왔다.
조금만 더 버텼으면 연금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1년 반쯤? - P243

뒤에서 호크 엑스먼의 집으로 접근하는 건 불가능하다. 리버 가는 완전히 노출된 곳이고, 긴 굽이 주변에는 집도 많다. 공용 주차장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엑스먼의 집 주변에는 비어 있는 듯해 보이는 집이나 매물 표지판이 하나도 없다. 강변 쪽 작은 집들은 육체 노동자들의 여름 별장이보인다. (중략).
해병대 출신 엑스먼은 나머지 표적들보다 접근이 까다롭다. - P246

하지만 일단 그를 찾는 게 급선무다. 신원을 확인한 후에는 그를 미행하며 기회를 노려야 한다.
몇 시간 후에 귀가할까? 어디서 임시직 한자리를 찾아낸 걸까? 다른 제지회사에 채용된 건 아닐까? 그렇다면 더 이상 나와 경합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인데, 과연 두 번 연속으로 그런 행운을 누릴 수 있을까?
하지만 대체 어떤 직장이기에 오전 11시 30분에서 정오 사이에 집을 나서는 거지? - P247

32

(전략).
"퀸란 씨, 우린 잘리기 5개월 전부터 전문가들에게 이력서 작성법과 면접을 위해 옷 입는 법 따위를 배웠습니다. 그들은 해고된 후 재정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었고,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말로 우릴 격려하려 했습니다. 어떻게든 우리 기분을 풀어주려 무던히 노력했죠. 그런데 이젠 당신이 그걸 하고 있군요." - P251

"당신에겐 이게 어떤 의미입니까, 데보레 씨?"
"나 자신 외엔 믿을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마저리를 돌아보았다.
(중략).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버크 당신에겐 내가 있잖아요." - P254

상담이 끝난 후에도 퀸란은 그 후로 5분 동안 내가 마저 주절댈 수 있도록 잠자코 있어주었다. 그는 사무실을 나서는 우리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를 이해해보려 애쓰는 것 같았다.
이해하려 하지 마십시오, 퀸란씨. - P255

33

(전략).
이력서. 그걸 이용해볼까? 나는 『페이퍼맨』에 광고를 싣고 이력서를 접수했다. 그중 쓸 만한 것들을 추려내고, 거기 적힌 주소를 이용해 일을 벌여왔다. 딱 거기까지였다. 그 광고 자체를 써먹어볼 수는 없을까?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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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의 동기에 관한 설명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인물이 어떤 결정을 내린 ‘까닭‘을 해명해주는 정보를 전달해야 할 때도 있다. 작품의 주요 서사에 드러나지 않는 과거의 트라우마나 인물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변화시킨 경험 같은 전사가 있을 때 이러한 설명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 P73

어떤 인물의 전사가 작가의 머릿속에 있다고 해서 독자도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미스터리한 인물은 독자의 호기심을자극할 수 있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스네이프의 전사는 독자가 이 작품의 서사를 이해하는 데 진정으로 필요한 순간이 됐을 때, 즉 마지막 권에 이르러서야 밝혀진다.  - P73

한편 인물을 더욱 친근하게도, 흥미롭게도 만들지 못하는 백스토리는 작품에 실어도 서사적으로 아무런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어설픈 설명으로 끝날 공상이 크다. - P73

작가가 넣고 싶은 설명

(전략). 이야기는 내가 원하는 대로 써야 한다. 반드시 독자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가는 정보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나에게 몹시 중요한 내용이라면 어떻게든 집어넣을 방법을 찾아라. - P74

독자의 해석 욕구를 자극하라


독자는 작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예리하다. 잘 쓴 설명은 갈등과 환경에 대한 묘사를 통해 넌지시 이야기를 전달한다. 독자는 어느 정당의 다른 정당들에 대한 프로파간다 하나만 봐도 여러 정파가 복잡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 P74

설명은 타이밍


흥미와 공감대, 무엇을 얻고 싶은가

(전략). 인물의 전사를 밝힐지 여부가 중요한 것은 맞지만, 그에 따라 흥미 또는 공감대 둘 중 한 가지를 선택하고 다른 한 가지를 포기하게 되는것은 아니다. - P75

한편 시점 인물의 경우 대개 이야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가 나오는데,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중략). 전사 설명을 이야기 초반에 싣는 것이 해당 인물에 대한 독자의 감정 이입을 이끌어내는 데 유용한 기법이며, 그것이야말로 대다수 작가가 자신의 주인공에게 벌어지기 바라는 일이기 때문이다.  - P76

반전은 언제나 효과가 있다

설명을 인상적으로 만들 수 있는 더없이 효과적인 방법으로는 반전이 있다. 설명 ‘앞‘에 반전을 넣어도 되고, 설명 ‘뒤‘에 반전을 넣어도 좋다. - P76

좀 더 미묘한 반전을 만들고 싶다면 인물이 착오를 하게 하면 된다. (중략). 이를 입증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관객이 믿도록 유도됐던 정보는 거짓으로 판명되고 옳은 정보는 더욱 기억에 남는다. - P77

첫 장에 ‘올인‘할 필요는 없다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역사와 인물들에 관한 설정을 보기 좋게 나열하며 성대한 설명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 쉽다. 그리고 톨킨이 《반지의 제왕 1: 반지원정대》를 샤이어 전체 역사를 개관하며 시작하는 등 위대한 작가들이 그렇게 하기도 했지만 최근에 나오는 작품들은 설명적 구절로 시작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 P78

이유는 비교적 명확한데, 관심이 가는 맥락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독자가 작중 세계나 사회에 주의를 쏟거나 마법체계를 기억하기가 버겁기 때문이다.  - P78

바쁜 작가를 위한 n줄 요약


2

주인공과 설명 사이에 장애물과 미스터리를 배치하면 독자와 주인공 둘 다 답을 얻고 싶어 할 것이고, 따라서 설명이 한층 보상처럼 느껴지게 된다.

3

‘교황이 수영을 하는 동안 전략의 목표는 독자가 설명에 집중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이 전략을 실현하는 데는 맥락상 인물 창조에 기여하는 대목, 충격적인 작중 환경에 대한 묘사, 또는 갈등과 관련된 극적 장면에 설명을 삽입하는 방법이 있다. - P80

7

설명 전후에 반전을 넣으면 설명의 내용을 독자가 기억하기 쉬워진다. - P81

4장

복선 심기에도
기술이 있다


복선은 이야기의 구성 요소라기보다 이야기를 짜는 데 필요한 도구에 가깝다. 복선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야 없지만, 복선을 어디에 넣어야 하는지, 복선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 P85

복선을 제시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지만, 여기서는 가장 흔히 사용되는 예비 장면, 이례적 서술, 체호프의 총, 상징주의, 이례적 행동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 P86

예비 장면 보여주기


‘예비 장면‘이란 뒤에 나올 훨씬 더 중요한 순간의 작은 버전이 이야기 초반에 나타나는 것이다. - P86

이례적 서술로 궁금증 유발하기


‘이례적 서술‘이란 보통은 조명되지 않는 대상을 특별히 서술해 부각하고, 보통 때보다 자세히 그리는 것을 말한다.  - P86

자. 다른 대상들은 보통 잇따라 열거되는 반면, 이례적 대상은하나의 독자적 문장이나 단락을 통해 다루며 대비를 이룬다. 이례적 서술을 다른 대상들이 열거된 구절에 가까이 배치할수록 대비는 더욱 선명해진다.  - P87

총을 보여줬다면 반드시 쏴라


‘체호프의 총‘은 아마도 가장 중요하고 자주 사용되는 복선의 유형일 것이다. 이는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가 "1막에서 벽에 총이 걸려 있다면, 3막에서 반드시 그 총을 쏴야 한다"라는 말을 통해 제시한 법칙이다. - P88

체호프의 총은 특히 게임 매체에서 굉장히 흔히 사용된다. 플레이어는 특정 아이템 또는 능력을 손에 넣지만, 게임이 훨씬 많이 진행되기 전까지는 그다지 그 아이템과 능력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 P89

상징주의, 은은하거나 은밀하거나


아나킨이 ‘제다이 훈련을 받는 값을 치르려면 팔이랑 다리까지 내놔야겠다‘라고 말하는 것에서부터 이슬람교 경전 코란의 비유로 가득한 구절들에 이르기까지, 복선의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다. 예비 장면과 체호프의 총은 비교적 독자가 알아차리기 쉽지만, 상징주의는 훨씬 감지하기가 어렵다. - P90

상징을 이용하는 복선의 한층 효과적인 형태 중 하나로는모티프가 있는데, 이때 상징은 대체로 이야기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반복 덕분에 상징이 눈에 띄고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 P91

물론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예언, 환영, 꿈 등, 판타지 장르에서 복선을 마련하기 위해 즐겨 사용되는 장치들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장치들은 복선은 복선이지만, 알아차리기가 훨씬 더 쉽다. 예언의 중대성을 의심하는 인물이 거의 없을뿐더러 설령 누군가 의심하더라도 독자는 절대 의심하지 않는다.  - P91

인물이 안 하던 짓을 한다면?


‘이례적 행동‘이란 인물이 앞서 보인 자신의 성격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독자가 그 이유를 궁금해하게 만든다. - P92

특히 미스터리한 전개가 요구되는 작품에서 인물의 이례적 행동 장치가 자주 발견되는데, 어떤 인물의 특정 행동 양상이 나중에 미스터리가 폭로된 후에야 해명되는 식이다. - P93

그 밖의 도구들

간단한 어구를 통해 복선을 그리는 방법도 있다. (중략).
한편 인물들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터무니없을 정도로 걱정하거나 농담을 하게 하는 방법도 있다. (중략). 둘 다 독자나 시청자가 작품을 한 번 더 볼 때라야 알아차릴 수 있는 굉장히 영리한 표현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 P93

복선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

서사 구조 강조


복선을 활용하면 무엇보다 작품의 특정 극적 줄거리를 독자가 눈치채도록 강조할 수 있다.  - P94

크리스토퍼 놀런의 <다크 나이트>를 보면 영화가 시작되는부분에서 하비 덴트의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영웅으로 죽거나, 계속 살아서 악당이 되거나."

(전략). 하지만 이 대사를 중심으로 이야기의 긴장이 고조되리라 기대할 것이다.  - P94

어조 변화

복선을 통해 이야기의 후반에서 어조를 변화시키기 위한초석을 깔아놓을 수도 있다. 《해리 포터와 불의 잔》 초반에는 다음의 대사가 나온다.

얼굴을 가린 손가락 아래 이마의 번개 모양 흉터가 타들어 가듯 아팠다. 꼭 누군가 뜨거운 철사로 피부를 짓누른 것 같았다.

이 장면은 퀴디치 월드컵과 함께 즐겁고 들뜬 분위기로 시작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먹는 자들의 공격과 함께 훨씬 어두운 어조로 급변하는 이야기를 암시하는 예비 장면이다. - P95

어조가 난데없이 극적으로 변화하면 독자는 당황한다. 물론 반전까지 독자가 예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반전은 어조의 변화와 함께할 때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 - P96

만족스러운 보상

어떤 사건을 복선으로 암시해야 잘 쓴 이야기가 될 수 있는가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본질적으로 복선이란 단순히 독자에게 정보를 전달하고자 넣는 구절이 아니다. (중략), 복선은 오로지 예상치 못한 사건을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 P96

또 중요한 사건일수록 이야기 전체에 걸쳐 복선을 깔아둬야 한다는 의미도 된다. - P97

바쁜 작가를 위한 n줄 요약

(전략).

4

복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다양하지만, 어조 변화든 반전이든 인물의 변화든 클라이맥스에서 나올 문제의 해결이든, 예상치 못한 사건을 그럴듯하게 만드는 데 우선 기여해야 한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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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2 더하기 2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들으니 왠지 짜증이 난다. 피곤하다. 나는 다시 잠에 빠져든다.
(중략). 컴퓨터다. 컴퓨터가 나를 귀찮게 군다. 이젠 더 짜증이 난다. - P10

실험을 해볼 시간이다. 인사나 한번 해볼까.
"안는쎄오?" 내가 말한다.
"틀렸습니다. 2 더하기 2는 무엇입니까?"
무슨 일이지? 알아보고 싶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다. - P10

두 눈이 감겨 있는 것 같다.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뜨기만 하면 되니까. 눈을 뜨려 노력해 보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 P11

LED 조명이 나를 내리쬐고 있다. (중략).
"느... 에에... 엣" 내가 말한다. 이 정도면 될까?
"틀렸습니다. 2 더하기 2는 무엇입니까?" - P12

나는 산소마스크를 끼고 있다. 마스크는 얼굴에 단단히 매여 있으며, 내 머리 뒤쪽으로 돌아가는 호스와 연결되어 있다.
일어날 수 있을까?
아니. 하지만 고개는 약간 움직일 수 있다. 내 몸을 내려다본다. - P12

(전략).
"틀렸습니다. 8의 세제곱근은 무엇입니까?"
하지만 난 틀리지 않았다. 그냥 컴퓨터가 얼마나 똑똑하지 알고 싶었을 뿐. 답은, 그리 똑똑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중략).
나는 후속 질문을 기다리지만 컴퓨터는 만족한 듯하다.
피곤하다. 나는 다시 잠들고 만다. - P13

손가락들을 움직여 본다. 손가락은 내 지시대로 씰룩거린다. 좋다. 이젠 뭔가 될 것 같다.
"손 움직임이 감지되었습니다." 컴퓨터가 말한다. "가만히 계십시오."
(중략).
남은 관은 딱 세 개다. 팔에 꽂힌 링거 줄, 엉덩이로 들어간 관 그리고 소변줄. 특히 뒤의 두 가지는 꼭 제거해 줬으면 하는 시그니처 아이템 같은 것이었지만, 뭐 괜찮다. - P14

나는 침대에 두 손바닥을 대고 밀어본다. 상체가 일으켜진다. 내가 정말 일어나고 있다! (중략). 침대가 아니라 딱딱한 해먹이라고 해야 할까. 기괴하다. - P15

"전신 동작이 감지되었습니다." 컴퓨터가 말한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중략).
그제야 문득 드는 생각은,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내가 뭘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 P16

나는 다시 깨어난다. 로봇 팔 하나가 내 얼굴에 닿아 있다. 무슨 짓이야?
(중략).
"의식이 감지되었습니다." 컴퓨터가 말한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중략).
나는 백인 남성이고, 영어를 쓴다. 어디 찍어보자. "조⋯⋯존?"
"틀렸습니다. 세 번째 시도.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 P17

그리고 소변줄이 뽑히면서 상처가 났다. 바닥에 작은 핏줄기가 그어져 있다. 저 빨갛고 가느다란 선은... - P18

(전략).

방금 건 대체 뭐였지?
갑자기 그 모든 게 기억났다. 그 장면은, 아무 경고도 없이 머릿속에떠올랐다.
나 자신에 대해 알게 된 건 별로 없었다. 나는 샌프란시스코에 산다.
그건 기억이 난다. 아침 식사를 챙겨먹는 것도 좋아한다. 그리고 예전에는 천문학계에 발을 담그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 P21

이제는 동료 환자들을 살펴볼 차례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 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혼자는 아니다. 근데 저 사람들이 죽어 있네. - P21

 핼러윈 장식처럼 보이지. 두 사람 다 나와 친한 사이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혹시 친했다면, 그 사실이 기억나지 않았으면 좋겠고,
(중략). 아무리 여기가 격리 구역이라 해도 죽은 사람은 치워줘야 하지 않을까? 뭐가 잘못됐는지는 모르지만 단단히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 P22

혹시 저 해치까지 갈 수 있을까?
나는 한 걸음을 디뎌본다. 그리고 또 한 걸음. 그런 다음 바닥에 주저앉는다.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나는 쉬어야 한다.
이렇게 근육이 잘 발달돼 있는데 왜 이토록 힘이 없는 걸까? 아니,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면 애초에 왜 근육이 탄탄한 걸까? - P22

나는 머리를 더듬어본다. 혹도, 흉터도, 붕대도 없다. 신체의 나머지 부분도 꽤 멀쩡해 보인다. 멀쩡한 것 이상이다. 나는 근육맨이다.
꾸벅꾸벅 졸고 싶지만 참는다.
다시 시도해 볼 때다. 나는 바닥을 짚고 일어난다. 웨이트트레이닝이라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더 쉽다. 내 몸은 점점 회복되고 있다(그런 거였으면 좋겠다). - P23

나는 결국 사다리에 다다른다. 나는 앞으로 휘청하며 사다리의 가로대를 잡는다. (중략).
10피트짜리 사다리라니.
생각이 영국식 단위로 떠오른다. 이게 한 가지 실마리다. 나는 아마 미국인일 것이다. 영국인이거나 캐나다인일지도 모른다. 캐나다인들은 짧은 거리를 잴 때 피트와 인치를 사용하니까. - P23

나 자신에게 묻는다. LA부터 뉴욕까지의 거리는? 당장 떠오르는 대답은 3,000마일이라는 것이다. 캐나다 사람이라면 킬로미터를 썼을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영국인이거나 미국인이다. 아니면 라이베리아 출신이든지.
라이베리아에서 영국식 단위를 쓴다는 건 아는데 내 이름은 모르다니 짜증나네. - P24

"드십시오"
내 가슴에 치약 튜브가 놓여 있다.
(중략).
나는 튜브를 들어올린다. 흰색이고 검은 글자가 적혀 있다. ‘1일차, 1식.‘
(중략).
나는 뚜껑을 돌려 연다. 뭔가 맛있는 냄새가 난다. (중략).
세상에 끝내준다! 너무 맛있다! 진하지만 너무 느끼하지는 않은 그레이비 소스 같다. 나는 내용물을 입에 직접 더 짜 넣고 맛을 본다. 장담하는데, 섹스보다 이게 나을 거다. - P25

(전략).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난 의사인가? - P26

"자체 보행이 감지되었습니다." 컴퓨터가 말한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혼수에서 깨어난 혼수투스 황제다. 짐의 앞에 무릎을 꿇으라."
"틀렸습니다."
이제는 사다리 위에 뭐가 있는지 확인할 차례다. - P27

나는 새로운 공간으로 손을 뻗고 바닥 위로 몸을 끌어올린다. 내가 들어가자마자 탁 하며 불이 들어온다. 아마 컴퓨터가 한 일이겠지.
그 공간은 내가 떠나온 공간과 크기도, 모양도 같아 보인다. 이번에도 둥근 방이다.
보아하니 실험대처럼 생긴 커다란 탁자 하나가 바닥에 설치돼 있다. 근처에는 실험실용 의자가 세 개 있다. - P28

나는 장비가 잘 갖추어진 실험실에 있다. 대체 언제부터 격리 병동의 환자들을 실험실에 들어가게 해줬다고? 게다가 여기는 의학 실험실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대체 무슨 쌍쌍바 같은 상황이람?
쌍쌍바라고? 진짜? 난 어린 자식이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욕을 절대 안 쓰는 독실한 신자이든지. - P28

나는 벽을 따라 놓여 있는 더 큰 장비들을 살펴본다. 주사형 전자현미경, 서브밀리미터 3D프린터, 11축 밀링머신(커터를 회전시켜 공작물을절삭하는 공작 기계-옮긴이), 레이저 간섭 관측기, 1세제곱미터짜리 진공실.. 나는 이 모든 것의 정체를 알고 있다. 사용 방법까지도나, 과학자구나! 이제야 좀 알겠네. 내가 과학을 써야 할 시간인 거야 좋아, 천재 두뇌씨. 뭐라도 생각해 보라고! - P29

나는 사다리의 가로대에 불편하게 자세를 잡고 해치 손잡이를 밀어본다. 꿈쩍도 안 한다.
"해치의 잠금을 해제하려면 이름을 말하세요." 컴퓨터가 말한다. - P29

나는 근처의 시험관을 잡고 허공에 던져본다. 시험관은 당연히 위로올라갔다가 내려온다. 하지만 왠지 신경에 거슬린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물체가 떨어지는 모습이 왠지 거슬린다. 이유를 알고 싶다.
뭘 가지고 알아보면 될까? 나는 실험실 하나를 통째로 가지고 있고, 그 실험실을 사용할 줄 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건?  - P31

일종의 ‘배터리 내장형‘ 장난감 같은 것이다. 주인이 최초로 사용하기 전에 배터리가 닳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작은 플라스틱 조각을 넣어두는 방식. 좋다. 이건 신상 중의 신상 스톱워치다. 그것뿐만 아니라이 실험실의 모든 것이 신상으로 보인다.  - P32

숫자를 계산해 보고 얻은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방은 중력이 너무 크다. 원래 지구의 중력가속도는 9.8m/s²이어야 하는데, 이 방의 중력가속도는 15m/s²이다. 낙하하는 물체가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너무 빨리 떨어지니까 - P33

내가 있는 곳은 지구가 아니다. - P33

02

좋다, 심호흡하시고.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는 말자. 그래, 중력이 너무 높다.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말이 되는‘ 답을 생각해 내자. - P34

대체 병실과 실험실이 들어 있는 커다란 원심분리기를 왜 만든단 말인가? 모르겠다. 그게 가능하긴 한 일인가? 그 원심분리기는 반경이 얼마나 돼야 하나? 얼마나 빠르게 돌아야 하나? - P34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컴퓨터가 묻는다.
나는 이불 토가를 내려다본다. "나는 진자를 연구하는 위대한 철학자 진자누스다!"
"틀렸습니다."
나는 천장 근처의 로봇 팔 중 하나에 진자를 매단다. 잠깐은 팔이 가만히 있어주면 좋겠다. - P36

내게는 펜이 있지만 종이는 없다. 괜찮다. 벽이 있으니까. ‘벽에 낙서를 휘갈기는 미친 죄수‘ 같은 행동을 수없이 반복한 후, 나는 답을 얻는다. - P37

그러니까 나는 원심분리기 안에 있는 게 아니다. 지구에 있는 것도아니고다른 행성일까? 하지만 태양계에 이렇게까지 중력이 큰 행성이나 위성, 소행성은 없다. - P38

(전략).
나는 눈을 깜빡인다. 또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게 사실이었을까? 아니면 허무맹랑한 멸망 이론에 정신이 팔린사람과 이야기하던 기억이 아무렇게나 떠올랐을 뿐일까?
아니, 기억은 진짜다. 그 생각만 해도 겁이 난다. 갑작스러운 공포가 아니다. 머릿속 한편에 지정석을 차지하고 있는, 익숙하고 편안한 공포다. 나는 오랫동안 그 공포를 느껴왔다. - P42

모든 것이 맞아 들어가기 시작한다. 우리는 아픈 게 아니었다. 우리는 가사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이 침대들은 영화에 나오는 마법 같은 ‘냉동실‘이 아니었다. - P44

뭘 먹을 기분은 아니지만 튜브를 보자마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중략).
나는 튜브를 열어 질척거리는 것을 입에 짜 넣는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맛있다. 채소 맛이조금 들어간 닭고기 같다. (중략).
"물?" 나는 입에 음식을 가득 문 채 우물우물 말한다.
천장판이 다시 열린다. (중략). 반짝이는 통에 적힌 글자는 ‘생수‘다. 나는 뚜껑을 돌려 연다. 아니나 다를까, 안에는 물이 들어 있다. - P45

"변기?" 내가 말한다.
벽의 판이 휙 돌아가며 금속으로 된 변기 겸용 의자가 나온다. 변기는 바로 그 벽에 붙어 있다. 교도소의 변기처럼. 나는 변기를 더 자세히 살펴본다. 버튼이며 이것저것 달려 있다. 변기의 둥근 부분에 진공파이프가 있는 것 같다. 중력이 있는 상태에서 쓸 수 있도록 개조한 무중력용 변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 P46

(전략).

"각도 이상." 컴퓨터가 말한다.
‘젠장!" 내가 말한다. "거의 알아냈다고! 내가 누군지 거의 기억해냈단 말이야!"
"각도 이상." 컴퓨터가 다시 말한다.
나는 책상다리를 풀고 일어선다. - P51

나는 애들을 좋아한다. 흠, 그냥 느낌이지만 나는 애들이 좋다. 애들은 멋지다. 같이 어울리는 것도 재미있다.
그러니까 나는 30대의 남성으로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아이는 없지만 아이들을 아주 많이 좋아한다. 마음에 안 들지만 내 생각엔 선생님이구나! 나는 학교 선생님이야! 이제 기억난다!
이런 세상에 내가 선생이라니. - P53

(전략).
"라일랜드 그레이스?" 웬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든다. 그녀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여성은 40대 중반으로 보였으며, 좋은 맞춤 정장을 입고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어, 맞는데요." 내가 말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 P57

"무기명 비밀투표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설명하자면 복잡합니다. 그레이스 씨가 쓰신 과학 논문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만." - P58

스트라트는 서류 가방에서 파일을 하나 꺼냈다.
그녀는 파일을 펼치더니 첫 번째 페이지를 읽었다. "물 기반 이론에 관한 분석과 진화 모델 예측에 관한 재평가." 스트라트가 눈을 들고 나를 보았다. "그레이스 씨가 이 논문을 쓰셨죠?" - P58

스트라트는 파일을 다시 서류 가방에 집어넣었다. "아크라이트 탐사선과 페트로바선에 대해서는 아실 것 같은데요."
"모르면 무척 형편없는 과학 선생이겠죠."
"그 ‘점‘들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스트라트가 물었다. - P60

(전략)
"이건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스트라트가 내 등에 대고 말했다.
"제가 보기엔 선택 사항입니다만!" 나는 작별의 뜻으로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떴다.
그래, 뭐. 선택 사항이 아니었다.
아파트로 돌아갔는데, 우리 집 현관에 이르기도 전에 잘 차려입은남성 네 명이 나를 둘러쌌다. 그들은 내게 FBI 배지를 보여주고,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던 검은 SUV 세 대 중 한 대에 나를 몰아넣었다. - P61

스트라트가 말을 이었다. "외계 생물 추정학은 작은 분야입니다.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전 세계에 겨우 500명 정도밖에 없죠. 그리고 옥스퍼드 교수들부터 도쿄대 연구자들에 이르기까지 제가 이야기를나눠 본 모든 과학자들은, 박사님이 갑자기 학계를 떠나지만 않았더라면 이 분야의 지도자가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 P63

나는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러시아, 캐나다, 미국이 전부 당신 지시에 따른다는 겁니까?"
"네. 토 달지 않고 따릅니다."
"이거 전부 장난입니까?"
"새로운 실험실에 익숙해지세요, 그레이스 박사님. 저는 다른 처리할 일이 있어서"
스트라트는 다른 말없이 문밖으로 나갔다. - P64

지난번과 똑같이, 내가 손잡이에 손을 대자마자 컴퓨터가 말한다.
"해치의 잠금을 해제하려면, 이름을 말하세요."
"라일랜드 그레이스." 나는 우쭐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라일랜드 그레이스 박사" - P65

나는 빨간색 경계선이 깜빡이는 화면을 발견한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그쪽으로 몸을 숙인다.

각도 이상: 상대적 이동 오류
예상 속도: 11,423kps
측정 속도: 11,872kps
상태: 경로 자동 수정 중. 추가 조치 불필요 - P66

흠, 초속 1만 1,872킬로미터라.
속도란 상대적인 것이다. 두 사물을 비교하는 게 아니라면 속도라는개념은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고속도로의 자동차는 땅에 비교했을 때 시속 70마일로 운동하는 것이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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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가능성 없는 무모한 시도였지만, 도널드는 그러고싶은 마음이 들었다. (중략).
비행기가 착륙하자 그는 중서부의 여름밤 속으로 걸어 나와 외딴 푸에블로 공항으로 향했다. (중략).
그녀의 아버지는 아직 살아 있었다. 하먼 홈스 판사 힐사이드 Hillside 3194번. - P27

가는 길에 도널드는 아까 전화로 나눈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공항에 있다‘는 말만으로도, 자신이 여전히 상류 중산층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었다. 낸시가 집에 혼자 있다는 사실은, 혹시 그녀가 친구도 없고 그저 나이만 들어버린 매력 없는여자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 P29

"기퍼드 부인?"
(중략).
"도널드, 정말 너구나. 우리 둘 다 많이 변했네. 정말 반가워!"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며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오랜 세월‘이라는 말도 오갔다. - P30

"하이볼 마실래?" 그녀가 물었다. "안돼? 날 술꾼이라고 생각하진 말아줘. 그냥 좀 울적한 밤이라서 그래. 남편이 오늘 올 줄 알았는데, 이틀 더 늦어진다고 전보가 왔거든. 도널드,
남편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아주 매력적이고, 너랑 분위기도 비슷해. 생김새도 닮았고."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뉴욕에 남편이 관심 있어 하는 여자가 있는 것 같아. 잘 모르겠어." - P31

도널드가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 썰매 타던 날이었다. 그는 짚이 깔린 썰매 구석에 앉아, 차가운 하얀 별을 올려다보며 웃는 그녀의 차가운 뺨에 입을 맞췄다. - P33

"네가?" 그가 외쳤다. "약국에서 나찼던 거 기억 안나? 혀까지 내밀면서 약 올렸잖아."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전혀 기억 안나. 내 기억엔 네가 나를 찼던 것 같은데." 그녀의 손이 위로라도 하듯 가볍게 그의 팔에 닿았다. "위층에 오랫동안 꺼내보지 않은 사진 앨범이 있어. 가져올게." - P34

도널드는 너무 많은 의미가 담긴 하지만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이는 말을 꺼냈다.
"우리가 다시 사랑에 빠지기라도 하면 큰일 날까?" - P36

"네가 도널드 바워스잖아!" 그녀가 소리쳤다. 목소리가 다소 높아졌다. "아니야. 난・・・ 도널드 플랜트야."
"전화로 말했잖아." - P37

낸시는 방 건너편에서 말했다.
"이 얘긴 절대 입 밖에 내지 마, 이런 이야기는 어떻게든 소문이 나는 법이니까." - P38

공항으로 가는 길, 도널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야 완전히 제정신으로 돌아왔지만, 방금 겪은 일을 도무지 이해할수가 없었다.  - P39

도널드 역시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의 몇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인생의 후반부란 결국, 불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버려가는 긴 여정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 경험도 그리대수롭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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