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왔어요. 엘리베이터 타고 10층으로 올라와요. 1015호예요. 그냥 들어오면 돼요. 정면으로 쭉 들어와요."
시라이시 씨는 그나저나 참 번거롭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도 집에 올 때마다 이런 절차를 거칠까. 어이가 없었다. ‘꼭 무슨 의식 같네.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으로 올라가니 살풍경한 복도가 이어졌다. - P80

‘어디서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는데.
『열대』의 첫머리에 가까운 장면이었다. 남양의 섬에 표류한 주인공은 사야마 쇼이치라는 남자의 안내를 받아 밀림 속에 있는 기이한 건물로 간다. ‘관측소‘라고 불리는 그 건물은 사야마쇼이치를 그 섬에 파견했다는 수수께끼 조직인 ‘학파‘가 세웠다. - P81

베란다에 작은 원형테이블 하나가 보였다.
메리 셀레스트호에 얽힌 해양 기담처럼 테이블 위에는 아직도김이 오르는 하얀 커피잔과 눈에 익은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열대』였다.
시라이시 씨는 망연자실해서 멈춰 섰다.
"어서 와요, 시라이시 씨.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요." - P81

"왜 의자가 이렇게 많은 건가요?"
"사람에게는 저마다 앉아야 할 의자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미소 지었다. "이건 『열대』에 나온 대사지만요."
시라이시 씨는 머뭇머뭇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왜 그걸 골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밝은 주황색 천으로 앉는 자리를 감싼작은 원형 스툴이었다. - P82

시라이시 씨는 머뭇머뭇 말했다.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면 어떨까요?"
"어머, 이것도 본론이에요."
・・・・・・ 그런가요?"
"세상만사가 『열대』와 관계있답니다."
지요 씨는 수수깨끼 같은 미소를 지었다. - P84

유리문으로 비쳐드는 햇빛 속에 그녀가 책을 폈다.
"너와 관계없는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 그리하지 않으면 너는 원치 않는 것을 듣게 되리라."
그게 『열대』의 첫머리라는 것은 시라이시 씨도 기억하고 있었다. - P84

표지는 확실히 눈에 익었다. 붉은색과 파란색의 기하학무늬,
‘사야마 쇼이치‘ ‘열대‘라고 적힌 무뚝뚝한 글자. 빈말이라도 세련된 장정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30년도 더 된 책일 텐데 꼭 제본소에서 막 빠져나온 것처럼 새것이었다. 불길한 예감을 안고 책을 펴자 모든 페이지가 백지였다.
‘가짜잖아요. 너무한데요. 저를 놀리셨군요."
지요 씨는 즐겁게 웃었다. - P85

지요 씨는 책을 내밀었다.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언젠가 쓸모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더니 지요 씨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을 놀리려고 초대한 건 아니에요. 개인적인 인양 작업을 도와주었으면 해요." - P85

"나한테뿐 아니라 당신한테도 비장의 카드가 될 거니까요.
다른 분들은 모르는 것 같던데 사막의 궁전은 아주 중요한 장면이거든요. 왜냐하면 무풍대를 지나서 있으니까. 그게 무슨의미인지는 알겠죠?"
"무풍대를 통과할 수 있다는 뜻인가요?"
"그건 해봐야 알 수 있겠죠. 나랑 당신 기억을 엮어서 그 장면을 재현해 봐야 해요. 그래서 당신을 초대한 거예요." - P86

시라이시 씨는 휑뎅그렁한 황야에 서 있었다. 황무지를 둘러싸듯 커다란 모래 언덕이 있고 하늘은 눈이 시릴 만큼 파랗다.
옆에서 지요 씨가 어쩐지 다른 천체에 착륙한 느낌이라며 덧붙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문장을 읽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기억의 조각들을 주워 모으며 수수께끼 같은 황야를 뇌리에 그려갔다. 시라이시 씨는 "이게 진짜 인양 작업이군요" 하고 중얼거렸다. - P86

"봐요, 『천일야화』가 나왔죠?" 지요 씨가 말했다. "모든 게『열대』와 관계있어요."
"저도 조금은 알아요. 알라딘, 알리바바, 신드바드."
"그건 원래 『천일야화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나카쓰가와 씨한테 물어봐요. 자세히 알고 있으니까."
"전 그 사람이 불편해서요."
"안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 P87

폭풍 생각은 하면 안 된다고 지요 씨가 말했다.
언제나 폭풍에 가로막혀 그 이상 못 나갔다고 했다.
"이 궁전에 사는 사람은 누구죠? 생각해 봐요."
그러나 구름이 늘어나 맑은 하늘을 덮더니 굵은 빗방울이궁전 지붕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런 이미지가 멋대로 부풀어상상의 세계를 뒤덮으려 했다.
"폭풍 생각을 하면 안 돼요." - P88

"보름달의 마녀."
시라이시 씨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떴다.
"그 궁전에 사는 건 보름달의 마녀예요."
두 사람 모두 꿈나라에서 단숨에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 P88

"보름달의 마녀." 지요 씨는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이만 끝내죠"
"네? 벌써 끝이에요?" 시라이시 씨는 당황했다.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요."
아닌 게 아니라 ‘보름달의 마녀‘라는 말을 생각해 낼 수 있었지만, 그게 『열대』라는 소설에서 어떤 존재였는지, 궁전이 무엇인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 P89

지요 씨는 딱하다는 듯 말했다. "학파 분들에게 전해 주세요. 난 오늘부로 학파를 그만두겠어요. 당신도 언젠가 진실을 깨닫게 될 거예요. 당신들이 읽은 『열대』는 가짜예요."
"・・・・・…가짜라고요?"
"내 『열대』만이 진짜랍니다."
몇 분 뒤 시라이시 씨는 아파트에서 나와 멍하니 서 있었다. - P89

적당한 찻집에 들어가 시라이시 씨가 가짜 『열대』를 테이블에 꺼내놓자 이케우치 씨는 앗, 하고 작게 소리치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꼼짝도 하지 않고 『열대』를 응시했다. 시라이시 씨는 자신도 똑같이 속아놓고 이케우치 씨가 워낙 순순히 속아 넘어가 주는 바람에 기쁜 반면 딱한 마음도 들었다.
"가짜예요, 이거." 시라이시 씨는 단박에 책을 폈다. "저도 지요 씨한테 속았지 뭐예요." - P90

하리마 고개의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전화 통화로 주고받은말, 의자와 소파가 흩어져 있는 기묘한 방, 베란다에 놓여 있던가짜 『열대』, 지요 씨의 어린 시절 추억, ‘사막의 궁전‘ 인양 작업 그리고 ‘보름달의 마녀‘,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인데도 벌써 현실감이 엷어져 먼 옛날 일을 이야기하는 기분이 들었다. - P90

이케우치 씨는 가짜 『열대』를 집어 들고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지요 씨가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모르겠단 말이죠. ‘당신들이 읽은 『열대』는 가짜예요. 내 『열대』만이 진짜랍니다."
"비유적인 표현일지도 모르죠. 시라이시 씨가 말했다. - P91

"지요 씨만이 진짜『열대』를 읽었고 우리가 읽은 『열대』는 전부 가짜였다는 겁니다. 흥미로운 가설 같지 않습니까?"
이케우치 씨는 노트를 펴고 백지에 선 하나를 그었다. - P91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무풍대의 수수께끼가 풀린단 말이죠 우리가 각각 다른 『열대』를 읽었다면 기억하는 조각이 일치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하나의 흐름으로재구성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처음부터 별개의 이야기니까요."  - P92

"그렇지만 『열대』는 사본이 아닌데요. 출판물이잖아요?"
"하지만 나카쓰가와 씨조차도 실물을 입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특수한 출판물이고 세상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는 건 전부 작가인 사야마 쇼이치가 꾸민 걸지도 몰라요. 한 권 한 권이 다 다른, 세상에 한 권뿐인 『열대』인 겁니다." - P92

한 달 만에 학파 사람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본 시라이시 씨는 문득 웃음이 났다.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확실히 『열대』에 얽힌 수수께끼는 흥미롭지만『열대』는 한 편의 소설에 불과하다. ‘학파니 뭐니 해도 요는 평범한 독서 모임 아닌가. - P93

"그 뒤 지요 씨께 몇 번 전화를 해봤습니다만 연락이 안 됩니다."
이케우치 씨가 말했다.
"지요 씨는 반칙을 할 생각인가 보군요."
"반칙이라뇨?"
"뻔하죠. 『열대』를 손에 넣는 겁니다."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일까. 그날 이야기해 본 인상으로는 지요 씨가 원하는 것이 그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P94

"우리는 이렇게 모여 1년도 더 넘게 『열대』에 관해 조사를벌여 왔습니다. 그동안 진전이 거의 없었습니다. 중대한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죠. 그런데 당신이 오자마자 꽤나 큰 발전이있군요."
"제가 뭔가 더 숨기는 게 있다는 말씀인가요?" - P94

"여러분, 좀 냉정을 되찾으시는 게 어떨까요? 『열대』는 그냥소설이에요.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을 만났으니까 수수께끼를 즐기면 되는 거예요. 전 아는 걸 전부 말했어요. 그런데 의심하신다면 전 두 번 다시 여기 오지 않겠습니다."
이윽고 이케우치 씨가 "맞는 말씀입니다"라고 동조했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는 『열대』에 홀렸습니다. 정상이 아니에요." - P95

나카쓰가와 씨가 인양 작업 일람표를 펼쳤다.
지요 씨가 한 말을 믿는다면 사막의 궁전은 무풍대를 지나서 나온다. 이케우치 씨는 이야기의 후반에 펼쳐진 공백에 ‘사막의 궁전‘이라고 썼다. 화살표를 그리고 ‘보름달의 마녀?‘라고덧붙였다. 그러나 그 이름을 기억하는 학파 멤버는 없었다.
나카쓰가와 씨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그건 ‘마왕‘ 하고 다른 인물입니까?" - P95

마왕은 『열대』에 등장하는 마술사다. ‘창조의 마술‘로 섬들을 만들어 내고 주인공이 표류한 해역을 지배한다. - P95

이케우치 씨는 머뭇머뭇 지난번 내놓았던 가설을 설명했다.
자신들이 읽은 사야마 쇼이치의 『열대』는 전부 내용이 각기 다른 책이었다는 가설이다.
나카쓰가와 씨는 뜻밖에 흥미가 동한 듯했다.
"재미있는 가설이군요. 현실적이진 않지만 저는 좋은데요." - P96

"애초에 왜 끝까지 읽은 사람이 없는 걸까요?"
"지난번에는 나카쓰가와 씨가 우연이라고 하셨는데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우리는 다들 『열대』를끝까지 읽으려고 했습니다. 도중에 그만둔 게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책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렇디만 보세요, 책은 물체 아닙니까? 확고하게 그곳에 있는 겁니다. ‘읽는 도중에 사라지는 책‘은 만들 수 없어요. 무슨 마술도 아니고." - P97

(전략)
"방금 그 이야기를 듣고 하나 생각난 게 있는데요."
"뭡니까, 탐정 군."
"물리적인 독이 아니라도 되지 않을까요. 전 언어학이 전공인데, 언어 자체라기보다 언어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심이 있어서 전부터 최면이나 자기 암시에 관해 여러모로 조사해왔거든요. 그래서 생각났는데, 말하자면 열대에 언어적인 독이 있었다면 어떨까요?" - P99

이케우치 씨의 질문에도 신조 군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만약 『열대』의 목적이 암시에 있는 거라면 이야기 자체는중요하지 않아요. 서두 부분은 우리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썼습니다. 그건 먹잇감을 유인하기 위한 덫이죠. ‘언어적인독‘이 있는 건 그 다음이에요. 거기까지 유인하고 나면 이야기의 맥락 같은 긴 필요 없거든요. 중반 이후 우리 기억이 일치하지 않는 것도, 일관된 이야기를 찾지 못하는 것도 애초에 그런게 없기 때문이에요. 무풍대는 언어적인 독을 감춘 장소에 불과한 거죠." - P100

신조 군은 문득 소파에 몸을 파묻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죠. 시라이시 씨말처럼 『열대』는 그냥 소설이거든요.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푹 빠져 있는 걸까요. 꼭 저주 같잖아요." - P100

시라이시 씨가 두 번째로 참가한 학파 모임은 멤버들이 각각 『열대』에 관한 황당무계한 가설만 제시하고 끝났다. 그러나 결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학파 멤버 전원이 『열대』에 홀려 있다는 것만은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꼭 저주 같잖아요.
신조 군이 한 말이 마음에 남아 있었다. - P101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편 뒤 지요 씨가 준 가짜 『열대』를 생각했다. 학파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는데 꺼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뭐, 상관없다. 어차피 가짜인데.
‘좀 더 냉정해져야지‘
학과 내에서만 『열대』이야기를 하는 게 문제다. 시라이시씨는 학창 시절 친구에게 전화를 해봤다.
"야호, 오랜만이네. 웬일이야?"
친구 모스키를 드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나는 듯했다. - P103

"그렇지만 재미있겠는데. 좀 조사해 볼게." 친구는 말했다.
"다음에 같이 밥 먹자."
그때부터 시라이시 씨는 앓아누워 그다음 주까지 일어나지못했다. 병원 검사 결과 유행성 독감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열이 유달리 내리지 않아 화장실에 가기도 힘겨울 정도였다. 감기에 걸리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 P104

고열에 시달렸던 사흘 동안 그녀는 『열대』와 관련된 꿈을 종종 꾸었다.
하나같이 단편적이고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여 있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남양의 섬이 나왔다가, 찻집 메리에서 열린 모임이 나왔다가, 하리마 고개의 아파트가 나왔다가 했다. 열 때문에 정신이 몽롱한 데다 커튼 친 방에 몸져누워 있다보니 자칫하면 자신이 어디 있는 건지 알 수 없어지곤 했다. 사막의 궁전도 꿈에 등장했다. 모래에 파묻힌 텅 빈 궁전을 홀로 끝없이 방황하는 꿈이었는데, 꼭 진짜 기억처럼 현실감이 느껴졌다. - P104

 금요일에야 만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점심 지나 뜻밖에 이케우치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중략)
"………이케우치 씨, 무슨 일 있으세요?"
"금요일 밤에 교토로 갑니다." 이케우치 씨는 말했다. "낮에 모형 상점에 찾아뵐 수 없는데 저녁에 식사를 같이 할 수 없을까요? 교토로 가기 전에 『열대』에 관해 꼭 드릴 말씀이 있거든요.‘ 시라이시 씨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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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공백의 시간


구름이 하늘을 가득 뒤덮었다. 아까는 달빛도 비쳤는데 이제 별빛하나 보이지 않는다.
겐지가 손전등으로 탑을 비췄다.
몇 단인가 되는 계단이 앞에 있는 탑 입구의 두 짝 문이 보였다. 이문이나 그 위에 튀어나온 짧은 처마나 주위의 벽도 온통 밤의 어둠속으로 녹아들 것만 같은 검은색뿐이다. - P112

 나는 머릿속으로 그 모양을 그려보았다. 서로 같은 각도로 만나는 같은 길이를 지닌 열 개의 변. 하나의 내각은 144 도라는 계산이나온다. 서양식 탑에서 뜻밖에 자주 볼 수 있는 육각형이나 팔각형보다 당연히 훨씬 원에 가까운 도형이다. - P113

겐지는 말을 잇지 않고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내내 탑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불쑥 나를 쳐다보았다.
"줄리앙 니콜로디라는 이름을 아나?"
겐지가 내게 물었다.
나는 허를 찔린 기분으로, "글쎄요"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P115

힐끔 나를 쳐다보고, 겐지는 탑 입구로 발길을 옮겼다. 나는 서둘러그 뒤를 따랐다. 땅바닥에서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 검은 문 앞에 섰다.
"늘 자물쇠가 걸려 있다고 츠루코 씨에게 말했죠."
"응, 그럴 텐데."
겐지는 문 손잡이 부근을 비췄다.
"어? 아하, 이렇게 된 건가?"
자물쇠가 풀려 있나 보죠?"
"- 망가졌어." - P116

2

서늘한 습기를 머금은 짙은 어둠을 손전등 불빛으로 더듬었다.
지저분한 벽, 먼지투성이인 바닥,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판자 조각과 막대기 조각들………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내부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를 제대로 관찰하기 위해서는 손에든 손전등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 P117

탑의 꼭대기 층은 3층이었다.
다 올라가자 겐지는 바로 옆의 벽에 손전등 불빛을 향하더니 "좋았어" 라고 중얼거렸다.
"다행이군. 초가 남아 있네"
겐지가 라이터를 켜고 초에 불을 붙였다. 불꽃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시야를 좁히고 있던 어둠이 천천히 옅어져갔다. - P118

대충 설명하자면 정십각형의 바닥면 전체가 두 부분으로 나뉘어있었다. 우리가 서 있는 계단 언저리의 한 부분과 나머지 부분. 다만칸막이벽이 전면 목조 창살로 되어있어, 이 위치에서도 방전체의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 층이 툭 트인 공간으로 되어 있었다.
"이건"
나는 겐지를 바라보았다.
"마치 무슨・・・・・…."
마치 감옥 같다고 느꼈다. 창살로 나뉜 맞은편 쪽이 감옥 안, 이쪽이 바깥. - P119

"이 방은 대체 뭐하는?"
"뭐하는 방으로 보이나?"
겐지가 되물었다.
"아까 뭔가 이야기하려고 했잖아?"
"아, 그건."
"감옥 같다고?"
"예."
겐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깊은 숨을 들이쉬고 토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맞았네." - P120

"누구를 여기에?"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겐지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비밀이야. 그건 우라도 가문의 비밀. 그걸 알게 되면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걸." - P120

겐지는 몸을 돌려 방 안쪽으로 갔다. 손전등 불빛에 활짝 열려 있는 창문이 보였다.
"여기는 창문이 네 개 있어. 그 중에 발코니가 있는 것은 분명히 이것 하나뿐이지."
바닥에서 어른 키 높이까지가 창인 그것은 두 짝짜리 덧창이었다.
하지만 안쪽에 유리 창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 비를 막는 문 역할을 하는 판자문이 붙어 있었다. 발코니로 나가서야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상하다면 이상한 모습이었다. - P122

"이 아래로군. 틀림없어."
그러면서 겐지는 난간에서 떨어져 발코니 바닥을 살피기 시작했다.
"발자국 같은 게 있으면 좋을 텐데………… 으음, 지금은 확실치 않군. 탑 안에는 남아 있는데."
"발자국이? 그래요?"
"아니, 눈치 채지 못했나? 하긴 이렇게 어두우니 할 수 없겠지."
당연한 이야기이기는 했다. 오래 사람이 출입하지 않은, 따라서 물론 청소도 하지 않았을 건물이다.  - P123

"이런 걸 발견했어."
그렇게 말하며 겐지는 왼손을 내밀었다. 나는 들고 있던 손전등 불빛으로 겐지의 손을 비췄다.
" - 시계?"
"그래. 회중시계야. 은으로 된 줄이 달려 있군." - P123

"문자판 유리는 무사한데, 바늘은 멈춰있네. 떨어지면서 망가진건가? - 여섯 시 반 지진이 일어났던 시각이지? 딱 들어맞는군."
"맞습니다."
"어?"
"뭔가, 또?"
"뒷면에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건・・・・・…."
겐지는 오른손의 손전등을 고쳐 쥐면서 왼손에 든 시계를 얼굴 앞으로 들어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 P124

"TE, 라고 되어 있네."
"TE...… 이니셜일까요?"
"그렇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겐지는 회중시계를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이 시계가 그 정년 물건이란 건 일단 틀림없을 거야. 그리고 이T-E라는 이니셜. 이게 그 친구 이름 머리글자일 가능성도 매우 높고,
어쨌든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겨우 발견되었군." - P124

내가 우라도 겐지와 처음 만난 것은 올 봄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이야기하면 지금으로부터 5개월 전- 4월 하순의 어느 날 밤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건물들, 특히 오래된 서양식 건물들을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는 학교를 여러 날 쉴 때면 여기저기 여행을 하며 곳곳의 많은 건축물을 보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다행히도 고등학생 주제에 어쩌고 하며 그런 행동을 뭐라 하는 사람은 내 주변에 없었다.
물론 저 녀석은 좀 이상한 녀석이니까‘ 하는 생각이 주위 사람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날은 기타구北区 니시가하라西ヶ原에 있는 옛 후루카와 남작의 저택을 보러갈 생각이었다. 유명한 영국인 건축가 조셔 콘 JosiahCondler(1852~1920). 일본 건축 초창기에 크게 기여한 건축가가 지은 북방 고딕 양식을 갖춘 중후한 석조 서양식 저택이었다. 이 저택에 대해서는 이미알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한번도 가볼 기회가 없었다. - P126

...... 여기까지다. 내 기억이 또렷한 것은.
그 뒤의 일에 관해서는 분명히 내가 한 행동이고 체험일 텐데 무엇하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끊어진 기억.
공백의 시간 머릿속에 남은 그 다음 기억은 병원의 약 냄새 나는 침대에 누운나를 낯선 사람들이 둘러서서 지켜보는 장면이다. - P126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머리에 둔한 통증을 느꼈지만 움직이는 것 자체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 나는 대체 누굴까?
초조한 의문이 옅은 안개가 깔린 듯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왜 내가 여기서 이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화요일 - 4월 22일 아침의 일이었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우라도 겐지와의 첫 만남이었지만, 겐지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 P128

그때, 또는 그 뒤에 겐지의 입을 통해 들은 객관적인 정보로 파악할 수 있었던 ‘사실‘은 이러했다.
일요일 밤 7시 30분경, 나는 고이시카와식물원 옆에 있었다.
옛 후루카와 지태에서 거기까지, 상당한 거리를 똑바로 남쪽으로내려왔다는 이야기다. 빗속을 걸어온 것인지, 아니면 무슨 교통수단을 이용해 이동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센다기에 있는 하숙집으로가지 않고 왜 그런 곳에 있었던 걸까? 물론 이유가 있어서 한 행동이었을 테지만 그 까닭을 나는 알지 못한다. - P128

겐지는 깜짝 놀라 나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내 반응은 뜻밖이었다고 한다. 도랑에 얼굴을 처박고 엎어져 있을 뿐,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넘어질 때 머리 어딘가를 세게 부딪힌 모양이었다.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응급조치를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사실을 겐지는 바로 깨달았다.  - P129

그렇게 병원으로 옮겨진 나는 그 병원에서 신속한 치료와 검사를 받았다.
치료 과정의 비교적 초기 단계에서 나는 일단 의식만은 쉽게 되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사실도, 그때 의사나 겐지로부터 들었던 설명들도,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의식은 돌아왔지만, 어쩌다 사고를 당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였다. - P130

"교통사고 같은 것을 당했을 때, 사고를 당하기 어느 정도 전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뒤의 기억이 사라져버리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닙니다."
담당 의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렇지만 학생의 경우에는 사고 발생 이후는 물론이고 - 당신 자신의 과거에 관한 기억 대부분을 현재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건 꽤 드문 증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지니고 있던 스케치북이나 가방은 모두 겐지가 병원까지 갖다주었다. - P130

"일시적인 기억상실 상태. 몸에 이상은 보이지 않으니, 굳이 이야기하자면 심인성, 또는 쇼크에 의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됩니까?"
담당의사의 견해는 낙관적이었다.
"너무 심하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문득 모든 것이 기억날 때가 올 겁니다. 지나치게 초조해하지 말고, 일단 천천히 요양을 하도록 하죠." - P131

다. 이렇게 되새겨보면 그날 그 병실에서 겐지와 만났던 그때부터 나는 내내 자신이 그때까지 살아왔던 현실과는 미묘하게 괴리된 묘하게 실체감이 옅은 세계 속을 계속 방황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구마모토 산속에 있는, 암흑관이라 불리는 이 기묘한 저택을 방문하고 있는 것도 분명히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 P132

4

‘십각탑‘ 을 나와 우리는 바로 섬의 문으로 향했다. 겐지가 선착장을 살펴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청년이 어떻게 이 섬으로 건너왔는지, 역시 신경 쓰이지 않나?"
나무들 사이로 난 오솔길을 잰걸음으로 걸으며 겐지는 그 이유를설명했다. - P132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정보인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겐지는 그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실제로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엄청난 양의 커다란 자연석으로 단단하게 쌓아올린 이높은 ‘성벽‘. 아무리 풍부한 자금이 있었다 해도, 아무것도 없는 곳에이런 것을 처음부터 쌓을 생각은 어지간해서는 하지 못할 테니까. - P133

"당시에 이 집에 들어와 살던 일꾼의 아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일이지만 말이야. 아이가 헤엄치다가 빠진 것을 어머니가 구해내려다 그만 두 사람 다."
나는 계속 물이 찰랑거리는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겐지가 말을 이었다. - P134

긴 돌계단을 내려와 기슭에 있는 잔교로 걸어가고 있었다. 겐지는나와의 대화를 중단하고 손전등 불빛을 그쪽으로 비쳤다. 겐지는 당연히 그 문제의 배가 거기 떠 있는 광경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 - 없군."
잔교에서 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 - P134

"배 말고 뭔가 섬으로 건너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건가요?"
"그래, 있네."
겐지는 대답을 하다가 "어?" 하며 눈썹을 찡그렸다. 오른손에 든 손전등을 고쳐 들더니 잔교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츄야, 저기." - P135

겐지는 잔교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수면으로 불빛을 비추고 있었다. 깊은 어둠의 틈새에 이상하게 출렁이는 물결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힘없이 흔들리는 검은 그림자.
-배다.
"어째서 저기에…..…."
"저 배를 섬까지 타고 온 다음에 제대로 로프에 묶어두지 않았던거로군. 그래서 떠내려간 거야."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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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 이론 -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자연과학선집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지음, 장헌영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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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을 써야지 생각을 하며 빈 백지를 보면 뭘 써야할 지 모르겠다.
예전에 쓴 것들은 그저 종이에만 새겨졌을 뿐, 어디로 이동된 적 없다. 옮기기도 귀찮다.

과학책은 요 근래 완독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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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의 기념품 코너 옆에 작은 책꽂이가 있었다.
마음대로 가져가도 되지만 대신 자기가 다 읽은 책을 두고가는 시스템인 듯했다. 마침 다 읽은 문고본이 있어서 그것을 책꽂이에 두고 한 권을 고르기로 했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책과 함께 긴 가을밤을 보내는 것도 근사한 일이다. - P58

"그냥 평범한 책이었는데요. 문고본보다 조금 긴 사이즈표지에 기하학무늬가 그려져 있고……… 한 10년 전에 나온 것일 법한 심플한 디자인이었습니다. 그 자태가 그때 제 기분과딱 맞더군요"
"운명의 만남인가요?" - P58

 이윽고 머리맡에 책을 두고 잠이 들었다.
나머지는 집에 갈 때 신칸센에서 읽을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아침이 되니까 책이 사라지고 없는 겁니다."
・・・・・・ 사라져요? 어떻게요?" - P58

"그걸 알 수 없단 말이죠. 하지만 분실한 건 어쩔 수 없으니까 도쿄로 돌아온 다음 찾아봐야지 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헌책방과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제가 읽은 소설을 찾을수가 없는 겁니다." - P59

이케우치 씨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든 노트를 쓰다듬었다.
"지금도 저는 그 책을 찾고 있습니다."
"어지간히 재미있는 소설이었나 봐요."
"사야마 쇼이치의 『열대』라는 소설이랍니다."
작가 이름과 제목을 들었을 때 어느 벤치에 앉아 책을 펴들고 있었던 기억이 갑자기 시라이시 씨의 머리를 스쳤다.
"그거 저 읽어본 것 같은데…………." - P59

"아바레야 책방?"
""날뛰는 밤‘이라고 쓰고 ‘아라비야‘라고 읽지." 주인은 가슴을 펴면서 말했다. "이것저것 재미있는 책이 많아."
여행지에서 책을 사는 것도 추억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책꽂이에 늘어선 책등을 훑어봤다.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제목들이었다.
"서점 포장마차는 처음 봤어요." - P61

이야기를 듣던 이케우치 씨는 "그렇군요"라며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소설의 결말은 어떻게 됐습니까?"
"글쎄요, 어땠더라…………"
시라이시 씨는 기억을 되살리려 애썼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서두뿐. 한없이 모호한 기억만 남아 있었다. - P62

"...………아뇨,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열대』가 원래 그렇습니다."
무슨 뜻일까, 하고 시라이시 씨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 P62

시라이시 씨는 턱을 괴고 계산대에 앉아 『열대』를 생각했다.
맨 처음 떠오른 이미지는 새벽 바다를 달리는 열차였다. 모래사장에 서서 열차를 망연히 바라보는 젊은이. 그게 주인공이었다. 그는 기억을 송두리째 잃고 남양의 섬으로 흘러들어 왔다. 그 섬에서 그가 맨 처음 만난 인물이 ‘사야마 쇼이치‘다. 뜻밖에 작가 이름이 나온 탓에 그것만은 똑똑히 기억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단편적인 기억밖에 나지 않았다. - P62

계속해서 허탕을 치는 사이에 그녀는 점점 화가 났다. 의미심장한 복선을 깔아놓고 회수하지 않다니 이케우치 씨도 무책임하다. 애를 태워 관심을 끌려는 작전일까. 자신은 이케우치씨의 덫에 걸린 걸까.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에둘러 유혹하는 사람이 존재할 리 없다.
어느새 그녀는 『열대』 생각을 하고 있었다. - P63

"실은 부탁드릴게 있습니다. 내일 오후 저희 독서 모임에 참가해 주실 수 없을까요? 아마 메리 찻집에서 보신 적이 있을텐데………."
"그거 독서 모임이었어요?"
"저희는 ‘학파‘라고 부르죠."
"...·학파? 어째 굉장한데요." - P64

"단편적인 기억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시라이시 씨는 입을 다물고 짙은 노란색 노트를 쳐다봤다.
찻집에서 본 수수께끼의 모임이 뇌리에 떠올랐다. 베레모씨, 말라깽이 군, 마담. 수수께끼의 소설 『열대』를 둘러싼 독서모임이었나. 멤버들 사이에 공통점을 발견할 수 없을 만도 했다. 더없이 수상쩍은데 설마 영검한 단지를 강매하는 것은 아니겠지. - P65

그녀가 들어섰을 때 학파 멤버들은 이미 구석 테이블에 모여 있었다. 이케우치 씨는 진지한 표정으로 노트 페이지를 넘기고, 베레모 씨는 버터를 바른 토스트를 조금조금 먹고, 말라깽이 군은 일심불란하게 안경을 닦고 있었다. - P65

무척 기이한 분위기였다. 그녀는 ‘역시 괜히 왔다‘ 하고 생각했다.
이케우치 씨가 정신을 차린 듯 그녀를 소개했다. 
"이분은 시라이시 씨입니다. 이 건물 철도 모형 상점에서 일하시죠."
그 뒤 학파 멤버들이 자기소개를 했다. - P66

이 특이한 모임은 원래 지요 씨와 이케우치 씨의 만남에서시작됐다고 했다. 본격적으로 『열대』에 관해 조사하기 시작한그들은 이윽고 『열대』를 읽은 신조 군과 나카쓰가와 씨를 만나게 됐다. 네 사람이 모였을 때 나카쓰가와 씨가 이 모임에 ‘학파‘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 P66

이케우치 씨의 말에 시라이시 씨는 띄엄띄엄 이야기했다.
『열대』의 첫머리, 기억을 잃고 남양의 섬에 표류한 젊은이는 그 섬에 사는 사야마 쇼이치라는 인물에게 구조된다. 사야마에따르면 섬 주위는 마왕이 지배하는 해역이라고 한다. 마왕은
‘창조의 마술‘로 섬들을 마음대로 만들거나 없앨 수 있다. 사야마는 마술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학파‘라는 조직이 이 해역에 보낸 밀정이다. 이윽고 주인공은 사야마 쇼이치와 함께 마왕이 지배하는 군도로 쳐들어간다.
그러나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부분은 거기까지였다. - P67

이윽고 신조 군은 낙심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야, ‘무풍대‘까지도 못 갔잖아."
"......‘무풍대‘가 뭐죠?"
"그건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이케우치 씨는 시라이시 씨에게 말한 다음 다른 멤버들을달래듯 말했다. - P67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할게요."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시라이시 씨는 머뭇머뭇 손을 들었다. "질문 좀 해도 될까요? 혹시 다른 분들도 끝까지 못읽으셨나요?"
"그렇습니다. 아무도 결말을 몰라요." 나카쓰가와 씨가 말했다.
"네? 그런 우연이 있어요?"
"있지 뭡니까." - P68

신조 군이 중얼거리자 나카쓰가와 씨가 히죽히죽 웃었다.
"신조 군은 탐정 소년이지만 벌써 1년 가까이 어물어물하고 있으니 명 추리를 기대하기는 이미 틀렸죠. 이 아가씨도 별로 믿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만." - P68

"그럼 인양 작업에 관해 설명합시다."
나카쓰가와 씨가 가방에서 둥글게 만 종이를 꺼내 테이블위에 폈다.
A4 용지를 이어 붙여 만든 연표 같은 것이었다. 학파가 설립된 뒤 그들은 기억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열대』의 편린들을 모아 이 종이에 적었다고 했다. - P69

시라이시 씨는 흥분했다. 그래, 자신이 읽은 『열대』는 이런 이야기였다. 하여간 괴상야릇한 이야기.
그러나 뒤로 갈수록 점점 메모는 혼란을 띠어 분기와 공백과 물음표가 많아졌다. - P69

시라이시 씨는 그 편린들을 가리켰다.
"이 다음부터는 지리멸렬한데요…………."
"그 부근이 아까 말이 나왔던 무풍대입니다." 이케우치 씨가말했다. "보십시오. 중반까지는 저희의 기억을 조합해서 『열대』의 전개를 꽤 극명하게 밝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그 전략이 통하지 않는 겁니다. 어째서인지 저희 기억도 점점 불분명해진단 말이죠. 아무리 거듭 검토해도 편린을 올바르게 나열할 수 없어요. 이야기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혼돈의 영역을 저희는 무풍대라고 부르는 겁니다." - P70

시라이시 씨는 테이블 위에 펼쳐진 종이를 응시했다.
한번 더 처음부터 『열대』의 이야기 전개를 살펴봤다.
기억을 잃은 주인공, 남방 섬의 관측소, 사야마 쇼이치라는학파의 남자, 마왕이 지배하는 해역, 지하 감옥의 죄수, 도서실을 드나드는 마왕의 딸, 마왕과의 대면 그리고 북방 유배, 그 부근부터 그녀의 기억도 모호해졌다.
그러나 기억을 뒤지던 그때 갑자기 하나의 정경이 떠올랐다. - P71

그녀는 용기를 내말해봤다.
"여기엔 ‘사막의 궁전‘이 없네요."
"사막의 궁전?"
학파 멤버들은 마주봤다.
"어떤 전개였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그런 장면이 있었어요.
모래 언덕으로 둘러싸인 광대한 황무지 한복판에 궁전이 있거든요. 주인공은 누군가를 만나러 그 궁전을 찾아가요." - P71

이케우치 씨가 서둘러 볼펜을 꺼내 무대에 ‘사막의 궁전‘
이라 쓰고는 시라이시 씨에게 미소 지었다.
"이게 ‘인양 작업‘입니다."
이케우치 씨는 말했다.
"여기서부터 시작합시다." - P72

다음 모임은 1월 말에 열리는 모양이다.
헤어질 때 이케우치 씨는 말했다.
"뭔가 생각나는 게 있으면 노트에 적어두시면 좋습니다."
"글쿠나."
"네?"
"그런 속셈으로 노트를 주셨군요." - P72

머리에 문득 떠오른 편린을 기록하다 보면 또 새로운 것이 생각났다. 일련번호를 붙인 편린들이 쌓일수록 예전에 자신이 읽은 『열대』가 차츰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기억이 되살아나면 되살아날수록 『열대』는 더욱 수수께끼처럼 느껴졌다. - P73

이케우치 씨의 기억과 일치하는 것도 일치하지 않는 것도있었다. 하지만 끈기 있게 편린을 맞춰가다 보면 무풍대를 통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1월 말이 기다려지네요."
시라이시 씨가 말하자 이케우치 씨는 "글쎄요"라며 미소 지었다. - P73

"학파 사람들은 다들 『열대』의 수수께끼에 매료돼서 모였습니다. 실마리가 될 정보를 공유하기로 약속했죠. 하지만 강제는 아니고 강제하고 싶어도 강제할 수가 없어요. 나카쓰가와씨도 지요 씨도 신조 군도 자기만의 ‘비장의 카드‘를 갖고 있습니다. 제가 느끼기엔 그렇습니다. 다들 『열대』를 독차지하고 싶은 거겠죠." - P74

지요 씨는 시라이시 씨를 응시했다. "꽤열심히 이야기 나누고 있죠? 두 사람이 반칙할 생각이라고 신조 군이 말하던데요."
(중략(
"다들 따로 속셈이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이케우치 씨도 예외는 아니에요. 신사적으로 보이지만 그 사람도 『열대』의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서 애가 탄다고요. 우리는 일치단결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아요. 친목 클럽이 아니니까요." - P75

 어안이 벙벙한 시라이시 씨에게 "그럼 잘 있어요"라고 말하고는 안경을 끼고 우아하게 손을 흔들며 밖으로나갔다. 시라이시 씨는 흡사 우주인이 시비를 걸어온 것 같은기분으로 망연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만 봤다.
"이케우치 씨 예상이 맞았네." - P76

그런데 이케우치 씨는 지요 씨의 접근에 흥미진진해했다.
"역시 그렇게 됐군요. 이거 재미있어졌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 무례해요."
"원래 자기 길을 가는 분이거든요."
"그래도 그렇지….…." - P76

"학창 시절까지는 교토에서 지내다가 그 뒤 도쿄와 외국을왔다 갔다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 직장의 고객이시라 만나게됐죠. 파트너인 우미노 씨는 건축사무소를 경영하신답니다."
"....…… 영 마음이 안 내키는데요."
"당신도 비장의 카드를 손에 넣게 될지도 몰라요.‘
"전 비장의 카드 같은 거 필요 없다니까요." - P77

시라이시 씨는 삼촌이 준 철도 시계를 꺼냈다. 바늘은 오후1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자세를 바로 하고 옷의주름을 펴고 신발이 지저분하지 않은지 점검했다. 다른 사람집을 방문하는 것은 오랜만인 데다 지요 씨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꼭 면접 보러 갈 때처럼 배가 무지근해졌다. - P78

시라이시 씨는 지시 받은 대로 걸어갔다.
그러고 보니 이케우치 씨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정말 잠복중일까, 전화해 볼까 하고 잠깐 생각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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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3일 - 낮과 밤이 거의 같은 길이가 되는 그날, 해질녘이었다.
‘암흑관‘이란 별명을 지닌 우라도 가문의 저택에 있는 한 방에서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택은 호수의 작은 섬을 통째로 집터로 삼아, 대략 네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 P78

그저 오래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듣던 대로 분명히 매우 이상하게지어진 건물이기도 했다.
검은 지붕에 검은 벽, 검은 문에 검은 창이었다. 온통 검은 외관은 누가 보더라도 이상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 P78

시각은 오후 6시20분을 넘어서려 하고 있었다. 간유리를 끼운 안쪽에 있는 올렸다 내렸다 하는 문과 바깥쪽의 검은 덧문을 모두 열어놓은 창밖에서는 떠도는 어둠의 농도가 시시각각 짙어지고 있었다.
저녁놀이 물드는 야릇하게 어두운 풍경 속에, 울창한 정원수의 검은그림자 너머로 더욱 새카맣게 보이는 탑 그림자가 보였다. - P79

뭔가 희읍스름한 것이 움직였다.
어, 하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뭘까? 저기 누군가 사람이 있는 걸까?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실내를 둘러보았다. - P79

벽이나 바닥, 천장까지도 역시 모두 검은색으로 칠해진 방이다. 그래서 중앙에 놓인 카펫의 매우 탁한 붉은색이 섬뜩할 정도로 선명해보인다.
가죽 안락의자에 조용히 앉아, 우라도 겐지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검은 구두에 검은 바지, 검은 셔츠, 검고 얇은 카디건. 이 저택의 기본 색에 맞춘 듯이 온통 검은색 차림이었다. - P79

(전략) 될 수 있으면 그러지 말아달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젠 나도 귀에 익어, 아예 그 시인처럼 검은 중절모를 즐겨 쓰기까지 한다.
"여기서 저쪽 탑이 보이는군요."
"아아, 십각탑‘ 말이군. 흥미가 있다면 내일 내가 안내해주지."
"탑 위에 지금 누군가가."
"뭐?"라며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고, 겐지는 피우던 담배를 손가락사이에 끼운 채로 일어섰다.
"이상하군. 거긴 분명히・・・・" - P80

겐지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단을 밟는 둔탁한 발소리가 다가온다. 그때 그것을 가로막기라도 하듯이 갑자기.
낮은 땅울림 같은 소리가 난다…… 싶었더니 ‘쿵!‘ 하는 묵직한 소리와 충격. 나는 창틀을 잡고 얼른 자세를 낮췄다. "또?"라고 겐지가등 뒤에서 소리쳤다. 오늘 벌써 두 번째 지진이다. - P80

자세를 낮춘 채로 얼른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분명히 보았다. 검은 탑의 발코니에서 땅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그 사람의그림자를앗, 하는 외마디 소리가 내 입에서 새어나왔다. 바로 그때 난로 위에 있던 탁상시계가 반응을 쳤다. 영롱한 음색으로, 오후 6시 반.
희미해지는 종소리의 여운과 함께, 이윽고 땅의 흔들림도 잦아들었다. - P81

겐지는 실내를 쭉 둘러보면서 반쯤 안도했다는 표현일까, 약간 장난스럽게 두 팔을 펼쳐보였다. 홀쭉한 그의 몸에 걸친 헐렁한 검은카디건, 앞단추를 채우지 않아 옷의 앞뒤 폭이 들어 올린 팔의 넓이만큼 좌우로 펼쳐져 마치 박쥐 날개처럼 보였다.
"집은 그래도 무사한 모양이군. 다행일세." - P82

겐지는 담배를 집어들고, 카펫의 불에 탄 부분을 구두 바닥으로 짓밟았다.
"이 저택은 옛날부터 불과 궁합이 맞지 않는 것 같군. 예전에도 몇번인가 불이 났었다네. ‘북관‘ 같은 건물은 완전히 타버려서 통째로다시 지었지. 내가 어렸을 때의 일일세." - P82

"아참, 그러고 보니 십각탑에 사람이 있다고?"
"떨어졌습니다."
"뭐?"
"그 사람이 탑에서 떨어지는 걸 방금 제 눈으로 봤습니다."
"정말인가?"
"비명도 들린 것 같고요. 발코니에 나와 있었는데 지진이 나서, 그때"
"균형을 잃고 떨어져버렸다?" - P83

현관홀로 내려가는 넓은 계단이 꺾어지는 부분에 있는 층계참에서 마르고 키가 큰, 검은 양장 차림의 여성과 마주쳤다. 내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마중 나왔던 사람으로, 겐지는 ‘츠루코鶴子 씨‘ 라고 불렀다. 우라도 집안에서 일하는 고용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 P83

우리가 계단을 달려 내려가는 것을 보고 츠루코는 우뚝 멈춰 섰다.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눈치 채고, "겐지 도련님" 하며 의아한 표정으로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겐지가 아무 대꾸도 없이 옆을 지나치려 하자 그녀는 더욱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겐지 도련님?"
"탑 열쇠 어디 있나?" - P84

희미한 별빛에 의지해 검게 솟은 ‘십각탑‘ 을 올려다보았다. 건물안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은 없다. 정면 입구에 문이 보였지만, 그것은닫혀 있었다. ‘내내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고 하는 그 문이 신경 쓰이는지, 겐지는 우선 그리로 달려가려다 생각을 바꾼 듯이 바로 걸음을멈췄다.
"저쪽인가?"
중얼거리며 왼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동관‘ 쪽 방향이었다. - P85

"누구...아니, 신타愼太로구나."
반소매 셔츠에 잔바지 차림의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었다.
"뭐하는 게냐, 이런데서?"
(중략)
"저기."
왼손을 들어 지금 자기가 나온 나무 뒤편을 가리켰다.
"누워 있어, 누가."
"누워 있어?"
"모르는 사람 저기……."
"거기 누가 있는 거로구나."
겐지가 큰 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다가가자 소년은 심하게 몸을 떨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쁜 장난을 치다가 야단을 맞기라도 한듯한 반응이었다. - P87

오른손은 여전히 주머니에 찌른 채로 소년은 뛰어 사라져갔다. 우리가 온 길과 반대 방향-저택의 뒷마당 쪽일까?-으로.
"누굽니까. 지금 저 애는?"
겐지에게 물었다.
"시노부 씨 아들일세." - P87

"거실에 차를 가져왔던 사람 있잖아. 하토리 시노부羽鳥しのぶ라고.
지금 저 애는 그 사람 아들인데, 이름이 신타지."
말을 끊고, 겐지는 검지로 자기 관자놀이 부근을 살짝 찔렀다.
"약간 지능에 문제가 있네."
"저 애가, 왜?"
"아.… 아니, 그보단 저쪽이 먼저지." - P88

3

명치까지 오는 키의 진달래 정원수가 잔뜩 심어진 그 바로 앞ㅡ.
무성한 잡초에 파묻히듯 엎드린 봄이 달빛을 받아 뿌옇게 보았다.
전체적인 복장이나 체격, 머리 길이로 미루어 여자는 아니었다. 남자였고, 그리고 젊다. - P88

"누구죠? 이 사람은?"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겐지는 구부리고 있던 윗몸을 일으켜,
사방을 둘러보더니 머리 위로 시선을 향하며 "아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렇군. 아마......"
그때 "겐지 도련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단풍나무 뒤에서 들려왔다. 손전등을 가지러 갔던 츠루코가 온 모양이었다. - P89

"이 분이, 탑 위에서?"
"그런 모양이군.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아. 그리 크게 다치지는 않은것 같은데."
손전등을 켜면서 겐지는 다시 땅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츠루코 씨, 도와줘. 일단 뒤집어야겠어." - P89

받아든 손전등의 빛을 누워 있는 남자의 얼굴에 비쳤다. 역시 젊은남자였다. 겐지와 비슷한 또래의 나이. 이십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눈은 감고 있었다. 뺨과 콧등에 진흙 같은 것이 지저분하게 묻어있지만, 심하게 일그러진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피가 묻어있는 것 같았지만, 이렇다 할 큰 외상은 없는 모양이었다. - P90

겐지가 청년의 상태를 살피고 있는 동안, 츠루코는 재빨리 셔츠 단추를 풀고, 바지 벨트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녀 또한 이런 조치에는 익숙해보였다.
여기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겠군."
이윽고 겐지가 말했다.
"골절도 없는 모양이야. 움직여도 괜찮겠지. 일단 집안으로 옮겨야겠네." - P91

청년이 입은 옅은 회색 재킷은 얼굴과 마찬가지로 여기저기 심하게 지저분했다. 바지도 마찬가지였다. 겐지와 호흡을 맞춰 몸을 들어올렸다. 천천히 이동을 시작하면서 나는 청년의 왼손에 손수건이 둘러져 있다는 것을 보았다. 탑에서 떨어지기 전에 이미 부상을 당했는지, 그 흰 손수건에는 검붉은 피가 배어 있었다.
"저어, 겐지 선배." - P91

청년을 들고 ‘동관‘의 현관으로 돌아오는 도중, 나는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물어보았다.
"이 사람은 누구죠?"
"나도 궁금하군."
걸음을 옮기면서 겐지가 힘없이 대답했다.
"모르는 얼굴일세. 적어도 이 저택 안에 이런 사람은 살지 않지." - P92

아아・・・・・・ 이것은.
- 나는 대체 누굴까?
5개월 전의 봄날, 그것은 내가 품은 의문이었다. 내가 나 자신에게 묻던.
- 어째서 나는 여기서 이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왜이 섬에 들어왔고, 저 탑 위에 올라갔을까? 빨리 정신을차려 설명해주면 속 시원할텐데."
달이 다시 구름 속으로 숨어버렸다. - P93

 타고 왔던 차를 거기 세우고, 우리는 호숫가의잔교로 내려섰다.
섬으로 건너올 때는 엔진이 달린 소형 보트를 탔다. 그 배를 운전해 준 사람은 히루야마 다케오蛭山丈男라는 일꾼이었다. - P94

그때까지 담과 정원수에 가려 조금씩밖에 보이지 않던 이 저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낮은 회색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저택은 처음에는 그림자처럼보였다. - P94

물론 그것은 ‘그림자‘가 아니라, 확실한 실체로 거기 있었다. 검은벽, 검은 창, 검은 지붕, 검은 굴뚝, 검은.………….
"과연 이상한 저택이군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대답했다.
"특히 저 벽이 그렇군요."
"벽? -흐음."
"판자도 돌도 아닙니다." - P95

 딱딱한 비늘로 덮여 있는 파충류의 피부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이상한 모습이었다.
"건축 공법으로는 해삼벽 같은 겁니까?"
"해삼벽?"
흙을 쌓아올리는 벽 같은 데 사용하는 방법이죠. 본 적 없습니까?
평평한 벽돌을 붙이고 그 이음매를 메우는 부분은 희게 돋움처리를 한" - P96

날카로운 턱을 쓰다듬으며 겐지는 의미심장하게 슬쩍 웃음을 지었다.
"어느 건물이나 넓이에 비하면 창문이 적고, 게다가 대개 덧창이나 비를 막는 창으로 막혀 있지. 낮에도 안은 어둡네. 그야말로 암흑관이지."
"이상한 저택이군요. 정말로."
"그렇지.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내게는 이게 당연하지만 말일세.
이 집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이해한 것은 나름대로 나이를 먹고 난 뒤였네."
겐지가 수다스럽게 말했지만 얼굴에 드러나는 피로의 기색은 숨기지 못했다. - P97

"그렇지만 이렇게 외진 곳에 이런 저택을 짓다니."
"상식을 벗어났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겠죠." - P97

겐지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내 눈은 저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저택의 전체적인 모습에서 받은 충격은 이미 옅어져, 이젠 흥미가 오히려 더 구체적인 건물의 모양새 쪽으로 옮겨가 있었다.
"키메라로군요." - P98

"이 저택이 지어진 시기가 분명히 메이지 시대 후반기라고 하셨죠?"
"그럴 걸세. 동관과 서관은."
"개화기 때 일본 각지에서 서양식을 모방한 건물이 지어졌죠. 집을 짓는 사람들이 모양새를 흉내 내 서양식 집을 지으려 했는데, 당연히 서양 스타일과 일본 스타일이 묘하게 뒤섞인 것이 되어버린 겁니다." - P98

"서양 스타일을 모방한 건축이란 게 일종의 경멸의 뜻이 담긴 표현이었다고 하더군요. 일본의 목수들이 고민해서 지은 어중간한 서양식 저택. 그 뒤에 나오는 ‘일본식과 서양식 절충형‘ 건축물도 일종의열등 콤플렉스를 담은 표현이겠죠. 하지만 저는 적어도 초기의 서양식을 모방한 건물들이 싫지 않아요." - P99

개화기에 지어진 이런 건물들은 대개 묘하게 밝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앞으로 일본은 세계를 향해 진출한다. 이 나라의 이 도시가 세계의 중심이 된다. 라고 하는 넘치는 의지가 표현된 밝고 편안한 분위기가 그 특징이다. 하지만 이 저택은 그반대다.
눈앞에 있는 이 건물은 어떤가?
그런 밝은 분위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오로지 검고, 어둡고, 안쪽을 향해 닫혀 있다. 그런 인상을 강하게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건물은 이 키메라는 도대체 어떤 의도로 여기 지어진 것일까? - P100

5
‘십각탑‘ 에서 떨어진 정체불명의 청년을 안고 겐지와 나는 ‘동관으로 돌아왔다. - P101

이 저택을 처음 방문해 이 현관홀에 들어선 사람은 대부분 먼저 그바닥의 무늬에 눈길이 갈 것이다. 바깥 벽면과 마찬가지로 검은 평기와가 여기도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둑판 모양으로 깔린 네모난평기와 이음매를 메우는 부분도 역시 검다. 더군다나 벽은 검은 칠을한 판자에 그 이음매도 검게 칠해져 있다. - P102

"호흡이나 맥박에는 큰 문제가 없으니 별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중요한 것은 머리에 어느 정도 충격을 받았느냐"
"노구치 선생님이라는 분은?"
"우리 주치의, 2주에 한 번 꼴로 구마모토 시내에서 왕진을 와 대개 이틀이나 사흘 정도 묵고 가네. 아버지의 어린 시절 친구이기도하고 말이야. 아마 어제부터 와 있었을 거야.………." - P103

얼굴에 묻은 진흙과 핏자국을 지우고 보니, 눈을 감고 있는 청년의표정은 뜻밖에 편안했다. 흰 피부에 상당히 점잖은 얼굴이라는 것을알 수 있었다. 나이는 역시 스물대여섯 정도일까?
"대체 누굴까?"
청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겐지가 중얼거렸다.
"신원을 알 수 있는 게 뭔가・・・・・・ 윗옷을 벗기는 게 좋겠군. 도와줘.
츄야." - P104

"방 네 개가 연속해서 있어."
겐지가 가르쳐주었다.
"이 건물의 남쪽 단층 부분이 모두 이 사랑방이야. 전부 열어두면운동회를 해도 될 걸세."
"예."
우리집도 그 지방에서는 제법 유지로 통한다. 집에는 일가친척들이 모이기 위한 큼직한 사랑방이 있지만, 이 정도로 넓은 방은 아니다. - P106

 저 사람이 노구치 선생인가?
180센티미터 정도의 키다. 체격이 좋다기보다는 한마디로 ‘거한 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맥주통 같은 그 체형에는 흰 가운보다 목욕 가운이 훨씬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 P106

 이윽고 겐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탑에서 떨어졌다고 들었네만."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단 나뭇가지에 걸렸다가 그 다음에 땅바닥에."
"대충 살펴봤는데, 골절이나 큰 외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호흡도 맥박도 또렷하지만 의식은 없는 것 같고요. 추락 쇼크 때문인 것 같습니다."
"머리에 다친 상처는?"
"커다란 혹이 후두부 윗부분에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왼손을 손수건으로 감싸고 있더군요. 추락하기 전에 난 상처인 모양입니다." - P107

겐지는 방에 들어와서 있던 츠루코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는 사람인가?"
"아뇨. 저도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 P108

6

(중략)
"그 선생님, 살짝 술 냄새가 나던데요."
목소리를 죽여 말하자, 겐지는 시원스럽게 생긴 눈에 살짝 웃음을지으며 말했다.
"여기 오면 늘 마시지. 저 정도면 반쯤 알코올 중독일 테니까. 술을전혀 마시지 않았을 때보다 오히려 컨디션이 더 좋을걸." - P108

겐지가 가벼운 말투로 불렀다. 시노부는 홀에 들어서기 바로 직전에 멈춰서더니, 우리 얼굴을 고개를 숙인 채로 눈만 들어 쳐다보며꾸백 인사를 했다.
"아까 지진 때는 괜찮았나?"
겐지가 물었다.
"예, 그건."
약간 박자가 느린 대답이었다.
"건물이 어디 무너지거나 하지는 않았고?"
"예."
역시 박자가 늦은 대답이었다. - P109

"아까 밖에서 신타를 만났어."
시노부는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이때는 바로 반응이 나왔다.
"그 애가 무슨 나쁜 짓이라도?"
"아니,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탑에서 떨어진 사람이 있는데, 신타가 그걸 제일 먼저 발견한 모양이더군."
"어두워지면 밖에 나가지 말라고 이야기해두었는데, 죄송합니다.
"신경 쓸 거 없다니까. 오히려 발견해줘서 고맙지." - P110

자 하며 겐지가 내게 내민 담배의 이름은 ‘피스‘, 약간 머뭇거리고나서 담배를 받아 입에 무니 겐지가 라이터 불을 빌려주었다. 처음피우는 이 필터 없는 담배의 연기는 내게 자극이 너무 심해 한 모금을 빼니 목이 무척 아팠다. - P111

"- 어디를?"
되묻자 겐지는 바지 주머니에서 손전등을 꺼내며 대답했다.
"다시 십각탑으로 탑 안을 한번 살펴보고 싶어서."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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