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비의 기념품 코너 옆에 작은 책꽂이가 있었다. 마음대로 가져가도 되지만 대신 자기가 다 읽은 책을 두고가는 시스템인 듯했다. 마침 다 읽은 문고본이 있어서 그것을 책꽂이에 두고 한 권을 고르기로 했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책과 함께 긴 가을밤을 보내는 것도 근사한 일이다. - P58
"그냥 평범한 책이었는데요. 문고본보다 조금 긴 사이즈표지에 기하학무늬가 그려져 있고……… 한 10년 전에 나온 것일 법한 심플한 디자인이었습니다. 그 자태가 그때 제 기분과딱 맞더군요" "운명의 만남인가요?" - P58
이윽고 머리맡에 책을 두고 잠이 들었다. 나머지는 집에 갈 때 신칸센에서 읽을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아침이 되니까 책이 사라지고 없는 겁니다." ・・・・・・ 사라져요? 어떻게요?" - P58
"그걸 알 수 없단 말이죠. 하지만 분실한 건 어쩔 수 없으니까 도쿄로 돌아온 다음 찾아봐야지 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헌책방과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제가 읽은 소설을 찾을수가 없는 겁니다." - P59
이케우치 씨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든 노트를 쓰다듬었다. "지금도 저는 그 책을 찾고 있습니다." "어지간히 재미있는 소설이었나 봐요." "사야마 쇼이치의 『열대』라는 소설이랍니다." 작가 이름과 제목을 들었을 때 어느 벤치에 앉아 책을 펴들고 있었던 기억이 갑자기 시라이시 씨의 머리를 스쳤다. "그거 저 읽어본 것 같은데…………." - P59
"아바레야 책방?" ""날뛰는 밤‘이라고 쓰고 ‘아라비야‘라고 읽지." 주인은 가슴을 펴면서 말했다. "이것저것 재미있는 책이 많아." 여행지에서 책을 사는 것도 추억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책꽂이에 늘어선 책등을 훑어봤다.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제목들이었다. "서점 포장마차는 처음 봤어요." - P61
이야기를 듣던 이케우치 씨는 "그렇군요"라며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소설의 결말은 어떻게 됐습니까?" "글쎄요, 어땠더라…………" 시라이시 씨는 기억을 되살리려 애썼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서두뿐. 한없이 모호한 기억만 남아 있었다. - P62
"...………아뇨,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열대』가 원래 그렇습니다." 무슨 뜻일까, 하고 시라이시 씨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 P62
시라이시 씨는 턱을 괴고 계산대에 앉아 『열대』를 생각했다. 맨 처음 떠오른 이미지는 새벽 바다를 달리는 열차였다. 모래사장에 서서 열차를 망연히 바라보는 젊은이. 그게 주인공이었다. 그는 기억을 송두리째 잃고 남양의 섬으로 흘러들어 왔다. 그 섬에서 그가 맨 처음 만난 인물이 ‘사야마 쇼이치‘다. 뜻밖에 작가 이름이 나온 탓에 그것만은 똑똑히 기억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단편적인 기억밖에 나지 않았다. - P62
계속해서 허탕을 치는 사이에 그녀는 점점 화가 났다. 의미심장한 복선을 깔아놓고 회수하지 않다니 이케우치 씨도 무책임하다. 애를 태워 관심을 끌려는 작전일까. 자신은 이케우치씨의 덫에 걸린 걸까.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에둘러 유혹하는 사람이 존재할 리 없다. 어느새 그녀는 『열대』 생각을 하고 있었다. - P63
"실은 부탁드릴게 있습니다. 내일 오후 저희 독서 모임에 참가해 주실 수 없을까요? 아마 메리 찻집에서 보신 적이 있을텐데………." "그거 독서 모임이었어요?" "저희는 ‘학파‘라고 부르죠." "...·학파? 어째 굉장한데요." - P64
"단편적인 기억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시라이시 씨는 입을 다물고 짙은 노란색 노트를 쳐다봤다. 찻집에서 본 수수께끼의 모임이 뇌리에 떠올랐다. 베레모씨, 말라깽이 군, 마담. 수수께끼의 소설 『열대』를 둘러싼 독서모임이었나. 멤버들 사이에 공통점을 발견할 수 없을 만도 했다. 더없이 수상쩍은데 설마 영검한 단지를 강매하는 것은 아니겠지. - P65
그녀가 들어섰을 때 학파 멤버들은 이미 구석 테이블에 모여 있었다. 이케우치 씨는 진지한 표정으로 노트 페이지를 넘기고, 베레모 씨는 버터를 바른 토스트를 조금조금 먹고, 말라깽이 군은 일심불란하게 안경을 닦고 있었다. - P65
무척 기이한 분위기였다. 그녀는 ‘역시 괜히 왔다‘ 하고 생각했다. 이케우치 씨가 정신을 차린 듯 그녀를 소개했다. "이분은 시라이시 씨입니다. 이 건물 철도 모형 상점에서 일하시죠." 그 뒤 학파 멤버들이 자기소개를 했다. - P66
이 특이한 모임은 원래 지요 씨와 이케우치 씨의 만남에서시작됐다고 했다. 본격적으로 『열대』에 관해 조사하기 시작한그들은 이윽고 『열대』를 읽은 신조 군과 나카쓰가와 씨를 만나게 됐다. 네 사람이 모였을 때 나카쓰가와 씨가 이 모임에 ‘학파‘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 P66
이케우치 씨의 말에 시라이시 씨는 띄엄띄엄 이야기했다. 『열대』의 첫머리, 기억을 잃고 남양의 섬에 표류한 젊은이는 그 섬에 사는 사야마 쇼이치라는 인물에게 구조된다. 사야마에따르면 섬 주위는 마왕이 지배하는 해역이라고 한다. 마왕은 ‘창조의 마술‘로 섬들을 마음대로 만들거나 없앨 수 있다. 사야마는 마술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학파‘라는 조직이 이 해역에 보낸 밀정이다. 이윽고 주인공은 사야마 쇼이치와 함께 마왕이 지배하는 군도로 쳐들어간다. 그러나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부분은 거기까지였다. - P67
이윽고 신조 군은 낙심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야, ‘무풍대‘까지도 못 갔잖아." "......‘무풍대‘가 뭐죠?" "그건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이케우치 씨는 시라이시 씨에게 말한 다음 다른 멤버들을달래듯 말했다. - P67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할게요."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시라이시 씨는 머뭇머뭇 손을 들었다. "질문 좀 해도 될까요? 혹시 다른 분들도 끝까지 못읽으셨나요?" "그렇습니다. 아무도 결말을 몰라요." 나카쓰가와 씨가 말했다. "네? 그런 우연이 있어요?" "있지 뭡니까." - P68
신조 군이 중얼거리자 나카쓰가와 씨가 히죽히죽 웃었다. "신조 군은 탐정 소년이지만 벌써 1년 가까이 어물어물하고 있으니 명 추리를 기대하기는 이미 틀렸죠. 이 아가씨도 별로 믿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만." - P68
"그럼 인양 작업에 관해 설명합시다." 나카쓰가와 씨가 가방에서 둥글게 만 종이를 꺼내 테이블위에 폈다. A4 용지를 이어 붙여 만든 연표 같은 것이었다. 학파가 설립된 뒤 그들은 기억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열대』의 편린들을 모아 이 종이에 적었다고 했다. - P69
시라이시 씨는 흥분했다. 그래, 자신이 읽은 『열대』는 이런 이야기였다. 하여간 괴상야릇한 이야기. 그러나 뒤로 갈수록 점점 메모는 혼란을 띠어 분기와 공백과 물음표가 많아졌다. - P69
시라이시 씨는 그 편린들을 가리켰다. "이 다음부터는 지리멸렬한데요…………." "그 부근이 아까 말이 나왔던 무풍대입니다." 이케우치 씨가말했다. "보십시오. 중반까지는 저희의 기억을 조합해서 『열대』의 전개를 꽤 극명하게 밝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그 전략이 통하지 않는 겁니다. 어째서인지 저희 기억도 점점 불분명해진단 말이죠. 아무리 거듭 검토해도 편린을 올바르게 나열할 수 없어요. 이야기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혼돈의 영역을 저희는 무풍대라고 부르는 겁니다." - P70
시라이시 씨는 테이블 위에 펼쳐진 종이를 응시했다. 한번 더 처음부터 『열대』의 이야기 전개를 살펴봤다. 기억을 잃은 주인공, 남방 섬의 관측소, 사야마 쇼이치라는학파의 남자, 마왕이 지배하는 해역, 지하 감옥의 죄수, 도서실을 드나드는 마왕의 딸, 마왕과의 대면 그리고 북방 유배, 그 부근부터 그녀의 기억도 모호해졌다. 그러나 기억을 뒤지던 그때 갑자기 하나의 정경이 떠올랐다. - P71
그녀는 용기를 내말해봤다. "여기엔 ‘사막의 궁전‘이 없네요." "사막의 궁전?" 학파 멤버들은 마주봤다. "어떤 전개였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그런 장면이 있었어요. 모래 언덕으로 둘러싸인 광대한 황무지 한복판에 궁전이 있거든요. 주인공은 누군가를 만나러 그 궁전을 찾아가요." - P71
이케우치 씨가 서둘러 볼펜을 꺼내 무대에 ‘사막의 궁전‘ 이라 쓰고는 시라이시 씨에게 미소 지었다. "이게 ‘인양 작업‘입니다." 이케우치 씨는 말했다. "여기서부터 시작합시다." - P72
다음 모임은 1월 말에 열리는 모양이다. 헤어질 때 이케우치 씨는 말했다. "뭔가 생각나는 게 있으면 노트에 적어두시면 좋습니다." "글쿠나." "네?" "그런 속셈으로 노트를 주셨군요." - P72
머리에 문득 떠오른 편린을 기록하다 보면 또 새로운 것이 생각났다. 일련번호를 붙인 편린들이 쌓일수록 예전에 자신이 읽은 『열대』가 차츰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기억이 되살아나면 되살아날수록 『열대』는 더욱 수수께끼처럼 느껴졌다. - P73
이케우치 씨의 기억과 일치하는 것도 일치하지 않는 것도있었다. 하지만 끈기 있게 편린을 맞춰가다 보면 무풍대를 통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1월 말이 기다려지네요." 시라이시 씨가 말하자 이케우치 씨는 "글쎄요"라며 미소 지었다. - P73
"학파 사람들은 다들 『열대』의 수수께끼에 매료돼서 모였습니다. 실마리가 될 정보를 공유하기로 약속했죠. 하지만 강제는 아니고 강제하고 싶어도 강제할 수가 없어요. 나카쓰가와씨도 지요 씨도 신조 군도 자기만의 ‘비장의 카드‘를 갖고 있습니다. 제가 느끼기엔 그렇습니다. 다들 『열대』를 독차지하고 싶은 거겠죠." - P74
지요 씨는 시라이시 씨를 응시했다. "꽤열심히 이야기 나누고 있죠? 두 사람이 반칙할 생각이라고 신조 군이 말하던데요." (중략( "다들 따로 속셈이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이케우치 씨도 예외는 아니에요. 신사적으로 보이지만 그 사람도 『열대』의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서 애가 탄다고요. 우리는 일치단결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아요. 친목 클럽이 아니니까요." - P75
어안이 벙벙한 시라이시 씨에게 "그럼 잘 있어요"라고 말하고는 안경을 끼고 우아하게 손을 흔들며 밖으로나갔다. 시라이시 씨는 흡사 우주인이 시비를 걸어온 것 같은기분으로 망연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만 봤다. "이케우치 씨 예상이 맞았네." - P76
그런데 이케우치 씨는 지요 씨의 접근에 흥미진진해했다. "역시 그렇게 됐군요. 이거 재미있어졌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 무례해요." "원래 자기 길을 가는 분이거든요." "그래도 그렇지….…." - P76
"학창 시절까지는 교토에서 지내다가 그 뒤 도쿄와 외국을왔다 갔다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 직장의 고객이시라 만나게됐죠. 파트너인 우미노 씨는 건축사무소를 경영하신답니다." "....…… 영 마음이 안 내키는데요." "당신도 비장의 카드를 손에 넣게 될지도 몰라요.‘ "전 비장의 카드 같은 거 필요 없다니까요." - P77
시라이시 씨는 삼촌이 준 철도 시계를 꺼냈다. 바늘은 오후1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자세를 바로 하고 옷의주름을 펴고 신발이 지저분하지 않은지 점검했다. 다른 사람집을 방문하는 것은 오랜만인 데다 지요 씨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꼭 면접 보러 갈 때처럼 배가 무지근해졌다. - P78
시라이시 씨는 지시 받은 대로 걸어갔다. 그러고 보니 이케우치 씨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정말 잠복중일까, 전화해 볼까 하고 잠깐 생각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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