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대장, 하우스 매니저는 어셔에게 생글생글하고 활기차면서 친절한 전형적인 이미지를 요구했다. 왜였을까. 그는 공연계의 올리브영을 꿈꿨던 걸까. - P67

그 외에도 몇 가지 지적이 있었다. 손님 말고 고객님이라고해라, 다나까를 쓰지 말고 해요를 해라, 구부정하게 서지 말고 몸을 펴라 등등.  - P68

우리 어셔들의 주적은 종종 출몰하는 진상이었다. 왜 지금 입장이 안 되느냐며 징징대는 지각한 인간과, 잠깐 화장실 다녀온 건데 왜 당장 재입장이 안 되느냐며 징징대는 인간으로 이루어진 로비 진상 듀오가 하나. - P69

그중에 가장 강력한 것은 역시 주차장 진상 솔로였다. 그 공연장은 주차가 완전히 불가능한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공연 관계자를 위한 조그마한 주차장을 갖고 있었다. 후문 쪽의 숨겨진 언덕배기 도로 어딘가에 흥미롭게 위치한 것이었는데, 그렇게 숨겨진 곳까지 찾아 올라오는 운전자는 실제 관계자, 해맑은 길치, 미친 진상 셋 중 하나였다.  - P70

주차장의 미친 진상. 그들은 숨겨진 언덕배기 도로로 들어올 정도로 호기심이 많고 촉이 좋은 나, 그냥 지나칠 법한 주차장을 찾아낼 정도로 관찰력과 눈썰미가 좋은 나, 이런 주차의 행운을 만날 정도로 운 좋은 나,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며 살아온 융통성 있는 나, 나, 나라는 썩은 매미 껍질을 겹으로 휘감은 진정한 광인들이었다. - P71

 감히 자신이 피같은 세금을 꼬박꼬박 내는 땅에 싸구려 주차 차단봉 따위를설치하여 고귀한 자신이 모처럼 행차한 고오급 문화 이벤트를 정시에 누릴 권리를 박탈하는 서울시에 대한 분노를 표하는 것이었다. (중략) 그날 가장 불운한 어셔가 주차장을 맡는 이유였다. - P71

역시 인간은 글러 먹었으며 이 지구의 희망은 결국 냥님과 개님뿐이라는 생각도 굳어졌지만, 어이없게도 나는 최장수 어셔가 될 때까지 거기에서 오래오래 일했다. - P72

물론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풀타임 취업에 계속해서 실패하고 있었다. 그 무렵 내가 갖고 다니던 랩탑 하드 속 강제자아 성찰 폴더에는, 작성일 내림차순으로 정렬된 자기소개서가 200개 가까이 들어 있었다. - P71

「원신」이 매출 2조 원을 달성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석 달이다. 그 석 달은 평범한 학생들이 한 학기를 무사히 마치며가뿐하게 독후감과 페이퍼를 제출한 다음, 우리의 전혜린과 아니 에르노를 서둘러 중고 서점에 처분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뭐라고요? 재고 초과로 매입 불가라고요?  - P86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게 맞다. 그건훌륭한 일이다. 정말로 복된 일이다. 크게 복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게 불가능한 사람도 있는 거라서. - P86

나는 주어진 운명에 맞서 뭔가를 개척할 만큼 특별하고 고집 세고 체력 좋은 자, 그러니까 영웅이 아니었고, 아니며, 아마 앞으로도 아닐 것이다.  - P87

엑시트에 성공한 한 유명 스타트업의 일화 하나가 사내에떠돌기 시작했다. (중략).
어느 날 우연히 직원과 대표가 엘리베이터에 단둘이 타게되었다. 둘은 인사를 나누었다. 대표가 직원에게 당신은 무슨팀이냐고 물었다. 직원은 자기 소속을 말했다. 그런데 대표는그 팀이 무엇을 하는 팀인지 바로 떠올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날로 해당 팀이 해체되었다. - P87

계절이 몇 번 바뀐 뒤, 조직개편의 유탄을 제대로 맞고 나의 월드 팀은 흐지부지 정리되었다. 애초에 대표의 우주 정복힙스터 놀이를 위해 만들어진 팀에 가까웠던 터라 예견된 일이기는 했다. - P88

이참에 퇴사를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당연히 들었으나, 키코게임즈 월드 팀에 얼떨결에 들어와서 버텼던 것과 정확히 같은 이유로, 그 시절에도 버티는 것 외에는 딱히 수가 없었다. - P89

그렇게 팀을 옮기기 전 온갖 걱정으로 머리가 어지럽던 때였다. 옥상에서 오랜만에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팀장님이 자기도 한 대 달라며 따라 올라오셨다.
어, 팀장님도 담배 피우셨나요.
아이 생기기 전에는 저 엄청 헤비스모커였어요.
아, 그러셨어요오?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 P90

미세먼지와 황사가 몰려와 우리의 시야를 반쯤 가린 날이었다. 신도시 특유의 구획된 도로 풍경이 저 아래로 펼쳐져있었다. 눈으로 보기에 시원하고 자동차를 타고 지나갈 때에도 편리하지만, 막상 걷는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장소에 가기위해서 툭툭 인색하게 억지로 놓은 횡단보도를 찾아 한없이빙빙 돌아야 하는...... 속 터지는 바둑판 신도시. - P92

한없이 관대한 나의 팀장님. 가망 없는 나를 데리고 역시가망 없는 「프린세스 메이커」를 플레이 중이셨던 나의 친절한 팀장님
...………저 게임 진짜 못해요, 팀장님은 아시잖아요.
게임 잘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에요. 즐기면 됐어요. - P94

동생의 닌텐도로 「동물의 숲」을 하며 3D에 대한 최소한의 감을 얻었고,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를 다시 하며 그럭저럭 전후좌우로 (물론 어디에선가 잠복 중인 두통에게 잡아먹히지 않도록 천천히, 되도록 안단테 안단티노 사이로 잘 움직일 수도 있게 되었다. 거기에 옆자리 중국 직원이 강력하게 추천한 「원신」을 하며 넓고 자유로운 맵이 주는 특유의 열린 맛도 살짝본 상태였다. - P95

그동안 괜찮은 게임을 몇 가지 만나기는 했다. 나쁘지 않았던 「커피 토크」를 시작으로 은근히 가슴 찡했던 「플로렌스」와, 아름다운 음악 속에 여행하는 기분을 살짝 느꼈던 「저니」와 「압주」, 섬세함에 한없이 감탄한 「동물의 숲」 등등. - P96

천만 단위, 억 단위 사람들이 동시에 좋아하는 일이 사실게임 말고 또 없거든요. 여기 아니면..... 영화판 정도? 그 외에는 진짜 없을걸? 그러니까 그거 배울 때까지 여기 있어요.
애써서 바라본 팀장님의 눈동자가 아주 또렷했다. 그걸 보는데, 아주 쑥스럽고, 왠지 슬펐다. - P98

세상에서 스몰토크보다 더 어색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맨투맨으로 칭찬 듣기일 것이다. 칭찬이란 왜 이렇게까지 민망하고 어색한 것일까? 팀장님은 나를 어떻게 믿고 이렇게 좋게봐 주시는 걸까? - P98

팀장님
네?
감사합니다.
뭐가요, 이렇게 팀이 산산조각인데요, 하하하.
그거는………… 뭐. 그냥...... 그냥 그렇게 된 거잖아요.
......이 업계가 그렇죠. 사람 참 잘 자르고, 근데 또 사람뽑을 때는 죄다 인맥으로 뽑고? 유라 님도 관리 잘해요. 내추천인 거니까? 하하하. - P99

빈 책상이 아주 황량했다. 신규 입사자용 웰컴 키트 화분흙이 돌처럼 굳어 있었다. 이름 모를 식물은 말라 죽은 지 오래였다. 누군지 모를 다음 자리 주인을 위해 먼지를 닦으면서, 극장장 아저씨의 책-소용돌이 방과 남산 앞 주차장 초소를 생각했다. - P100

S↓ 근로계약서,
가슴,
미소녀의 추억

(전략)

담당 직무 및 근로 장소
1. 담당 직무: 프로젝트 기획 (M직군)
2. 근로 장소: 경기도 성남시 판교로 399 (삼평동, 키코 빌딩)


근로시간 및 휴게 시간
1. ‘을‘의 근로시간: 10:00 ~ 19:00 (휴게 시간 한 시간 포함, 주 5일 근무)
2. 업무상 필요에 의하여 연장/휴일/야간 근로를 하고자 할경우, 사전에 회사의 승인을 얻어야만 한다.


(후략) - P106

회의실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다들 해결되지 않은 무엇을 품은 채, 구부정하게 서서 스마트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공용 화장실 앞에 늘어선 줄 같았다. - P108

근로계약서에 정독할 시간은 없었으나, 어쨌든 내가 각서까지 써서 올리는 ‘을‘이라는 것은 아주 확실했다. 당신들은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나요? 묻고 싶었으나 그건 월급일 테고, 주영인이 기계적인 목소리로 업무상 비밀유지를 계속 강조하는 것에 아, 예예...... 대충 대답하며 시키는 대로 구석구석 사인을 했다. - P108

그리하여, 팀이 바뀌었다. 팀장도, 팀원도 바뀌었고, 하는일도 바뀌었고, 사무실도 바뀌었고, 그대로인 것은 오직 나, 조유라뿐.
새 팀장 서은수의 첫인상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 P109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게 맞다. 그건훌륭한 일이다. 정말로 복된 일이다. 크게 복된 일이다. 그럼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했을까.
고등학생 때까지 내가 좋아했던 것은 수학, 확률과 통계.
몇 가지 조건으로 우연을 정교하게 깎아 낸 사건들이 서로만나고 겹치고 삼키는 것을 0.7밀리미터 샤프 펜슬로 발라내고 발라내다가 마지막에 리미트를 걸던 재미. - P113

얼마 후, 팀장은 나를 은근하게 불렀다.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그 뒤에 무시가 어른어른한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흥미롭지만 열등한 동물이나 몬스터를 보는듯한 표정이었달까. - P115

팀장은 몇 가지 자료를 건네주었다. 자신이 아끼던 일 잘하는 직원들의 포트폴리오 일부라고 했다. 개인정보가 포함된 민감한 부분을 편집하려다가, 자기가 너무 바빠 나를 믿고그냥 보여 주겠다고 했다.
다들 이 정도는 준비하고 공부하고 들어와서 현업 하거든요. 유라 님. 특수한 상황인 거 본인이 제일 잘 알지요? 유라님도 빨리 따라가 주세요. 이현 팀장님 생각해서라도? - P115

내가 일단 놀란 것은 게임 회사 입사를 위해 사람들이 온갖 교육기관을 전전했다는 사실이었다. (중략). ‘게임학과‘라는 단어를 한번에 못 알아들어서 어버버했던 기억도 났다.  - P116

 웬만한 입시학원들은 먹고살 길이 애매한 운동권들이 차린 것이 시작이었다던데. 도대체 이 많은 게임 어쩌고들은 누가 시작한 것일까? 설마 퇴사자들 농사를 짓고 호프집을 연다던? - P116

노오력을 통해 고난과 시련을이겨 내고 꿈을 이루었다고 착각하)며, 미래로 전진하는 중이라고 믿는 행복감으로 가득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슬퍼졌다. 이 노오력의 사람들을 불과 2~3년 안에 기운 없는 최소 스펙 마니아로 만들어 퇴사시키는 이곳은 도대체 무엇일까. - P117

내가 ‘게임 조작이 다소 서툰 사람‘이라고 써 놓으면 팀장이 ‘게임 재능이 부재한 플레이어‘라고 바꿔 놓는 업계인 것을. - P118

하늘에서 떨어지는 우유병과 꿀물 병을 제때 터치해 침대위 미소녀에게 먹이는 게임이라니. 어딘가 찝찝했다. 차라리 때리고 부수는 게임이 낫지 않나 싶었다. 스페셜 H모드가 뭔지 궁금했지만 포털 검색으로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 P122

밥상을 물리고 동생이 평화롭게 예능을 보는 동안 나는 옆에서 휴대폰을 들고 H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헤맸다. 성인 인증 너머의 H세상은 생각보다 넓고, 예상보다 어두우며, 상상이상으로 더러웠다. 먼지처럼 많은 변태 게임들과 변태들. - P123

근데...... 이게 어쨌든 아무리 야해 봤자 픽셀이잖아
당연하지.
근데 이걸 보고 흥분을 한단 말이야? 모니터 앞에서......
아우, 언니. 뭘 그렇게 복잡하게 그래. 헨타이가 헨타이지.
그날은 꿈도 이상했다. - P124

팀장은 예상 외로 정색을 했다.
(중략).

아니...... 음...... 아트 예시도 좀 보기 그렇고요. 기획자가누군지는 몰라도요. 그 H모드라는 것도 좀 퀄리티 떨어지는느낌이고요......

횡설수설하는 내 앞에서 팀장은 인상을 쓰고 안경을 벗어꼼꼼하게 닦아 쓰면서 말했다.

유라님? 지엽적인 거에 갇히면 안 되죠. 시스템을 보라고 준건데요. 그리고 그 정도 포폴...... 어디서 볼 수 없을 텐데요. - P125

자리로 돌아온 나는 문제의 기획서를 끝까지 읽어 보았다. 하지만, 읽을수록 불쾌했다. 그 게임은 어떻게 보아도 야게임이 맞았다. 심지어 H모드를 오픈하면 꿀물과 우유 대신 수상한 약이 등장했다. 시스템이 어떻든, 레벨 디자인이 얼마나 잘됐든 결국 헨타이 게임이었다. - P125

이후, 미움의 작은 포자 위에 사건의 빗방울이 하나씩 둘씩 내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문제는 핫키 팀의 인터뷰 요청 건 때문에 발생했다. 그들이 나를 데리고 인터뷰를 해 키코 피플 페이지에 올리겠다고 나선 거였다. 지저스. 그건 안 될 일이었다. - P126

. 오, 생각만 해도 오글거려 참을 수 없었다. 다양성 1답게갑자기 예술적 활력과 인문학적 감수성 어쩌고를 발휘해 주기를 바란 모양인데, 왜 이럴때만 다 죽어 가는 인문학에 연지곤지 찍고 싸구려 털부채 들려 급조한 예술 기술 통합콜라보 어쩌고 무대로 내보내려 드는 건지 아주 환장할 노릇이었다. - P128

내가 너무 완강하게 거부 의사를 밝히자 중간에 낀 팀장은 매우 난처해했다. 팀장은 엄청난 예스맨이었기 때문이다. 팀장은 입사 이래 위에서 내려온 것을 거절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그는 사내 모든 팀장들이 암묵적으로 오버해서 쓰는 팀 활동비를 풍성하게 남기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 P129

그러니까, 다시 아침. 영원히 아침.
늦잠과 버스 연착과 망할 날씨의 트리플 콤보가 쏟아지는 날.
나는 루프 소재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여러분의 일상이 루프물 아니던가요.  - P130

어쨌든 그러든 말든 인트라넷과 메일과 메신저를 차례로 확인한다………… 공지 게시판에 제발 보안 좀 지키라며 으르렁거리는 글이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온다………… 늘 비슷한 내용이라 언젠가부터 읽어 보지도 않고 스크롤을 내려 버린다……… 왜 키코 인간들은 그렇게 커뮤니티며 SNS에 게임 정보를 흘리지 못해서 안달인 것인지 그 심리를 이해할 수 없다 - P132

물론 나 외에도 키코 스타일의 게임을 모르며, 못 하고, 안한다는 이미지를 가진 직원들도 있기는 있었다. 그럴 때 어떻게 하면 좋았을까? - P134

사실 처음에는 그 히메컷 무리가 나 같은 사람들일 거라고 착각했다. 정말로 게임을 모르고, 정말로 못 하는 사람들. 하지만 아니었다. 그 사람들은 게임을 진짜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 진짜 못 하는 게 아니라, 못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 P135

오메가 팀 근무 극초반에는, 그런 멍청함에도 일 앞에서 나의 얄팍한 자아를 버리지 못해 헤맸다.
감히 ‘창의적 아이디어 같은 것을 어떻게든 내놓아 보려고노력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팀장의 코털-수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길게 삐져나온-을 건드릴 수밖에 없었다. - P136

우리 친애하는 성격 파탄자 스티브 잡스 아저씨가살면서 크게 잘못한 게 두 가지 있다면, 직관이라는 단어를 유행시킨 것과 성격 파탄에 면죄부 크림을 살살 올린 특별한 이미지를 코팅해 놓은 것이다. - P137

난리를 쳐서 인터뷰를 거절한 이후 대놓고 삐쳐 버린 팀장과 점점 더 애매한 관계가 되어 가던 어느 날, 더욱 이상한 취급을 받게 될 각오를 하고 팀장에게 왜 모든 게임의 디폴트가전투인가요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팀장은 인간의 기본 심리에 대한 본인만의 말도 안 되는 개똥철학을 말보로 레드의쩐내와 함께 전파하다가 점점 구겨지는 내 표정을 보고 이야기를 한 단어로 정리했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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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프리즘, 한국/문학의 별세계에서


황호덕



1.

1961년 4월 12일, 가가린은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인류 역사상 최초로 우주에 나간 인간이 되었다. 이 경이적인 사건에 대해 모리스 블랑쇼는 "중력으로 상징되는 공동의 인간 조건을 벗어나 누군가가 거기에 있었다"고, "어떤 장소를 벗어나 일시적 유토피아로 인도될 수도 있었다고 적었다. - P5

그런데 낭패스럽게도 가가린은 지구를 향해 너무 많은 말을 늘어놓았다. 우주와 러시아를 잇는 끊임없는 말이야말로 우주와 예전의 ‘장소‘를 이어 주는 유일한 연결고리였기 때문이다. 러시아인들은 이 모험을 땅으로 끌어내려 정치신화로 개진함으로써 러시아땅에 더 강하게 주박되었다. - P6

인간, 신, 동물의 분할에 근거한 정치학에 근본적인 타자인 기계가 등장하자 인간의 상상력과 서사는 커다란 전화를 경험하게 된다. ‘말하는 필멸의 동물 인간‘이 불멸과 영원, 공간적 무한과 시간적 무한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 P6

도나 헤러웨이는 우리 시대, 새로운 신화의 시대인 20세기 후반 이후 "우리는 모두 키메라(chimera)로, 이론과 공정을 통해 합성된 기계와 유기체의 잡종, 곧 사이보그다. 사이보그는 우리의 존재론이며, 정치는 여기서 시작된다"라고 말한 바 있다. - P6

요컨대 SF는 장소와 과학, 인간·동물·기계, 자본과 정치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장르이다. 장소(topia)와 유토피아(u-topia) 사이, 과학기술과 상상력 사이, 사이보그와 자본 사이에 있는 이 장르의 논제들을 다루는 이 책의 부제를 "테크놀로지의 지정학과 자본"이라 한 이유이다. - P7

2.


SF, 혹은 과학소설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는 과학이나 소설, 나아가 양자의 변용과 그 파장을 함께 정의하는 복잡한 술어를 필요로 한다. 우선 그 용어부터 영어권의 사이파이(Sci-Fi), 일본의 로컬화된 명칭인 ‘공상과학소설‘, 프랑스의 씨앙스-픽시옹(Science-fiction 혹은roman de science-fiction) 등의 용어 등이 서로 다른 경로로 유입되어 토착화되어 왔기에 여기서는 일단 SF라 잠칭해 해두고 싶다. - P7

보드리야르는 고전적 SF는 팽창하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라고 정의한 바 있다. 19세기와 20세기의 탐험과 식민화와 그 공범자인 우주탐험 이야기⁴ 속에서 되풀이되는 장르일 수 있다는 것이다.


4) 장 보드리야르, 하태환 옮김, 『시뮬라시옹』, 민음사, 1992, 200쪽. - P8

한편 SF에 대한 현대적 정의는 구구할 정도로 다양하지만, 특정한 과학적 요소의 외삽(外揷)을 통해 ‘세계를 탈구조화하고 독자들에게 완전히 해명되지 않는 미지의 현상에 접해 그 공백을 채우는 인지적과정에 참여토록 하는 장르로 정의할 수 있겠다.⁷



7) 위 정의는 다음의 책의 진술을 필자 나름대로 재정의해 본 것이다. 이수진, 『사이언스픽션, 인간과 기술의 가능성』, 커뮤니케이션북스, 2017, 16-17쪽, - P8

물론 SF와 인접 장르들의 경계가 그렇게 명확한 것은 아니다. 과학소설은 과학의 잠재성 안에서 펼쳐지는 상상이며, 현재와 미래의 단절은 어쨌든 상위의 질서나 법칙에 의해 증명되거나 봉합된다. 하지만 판타지는 실재와는 다른 논리에 의해 움직이며 중세나 상상의 어느곳과 같은 마법적 공간과 유령적, 초월적 존재를 전제한다. - P9

요컨대 SF란 ‘인지적 낯설게 하기‘를 통해 미지의 이상적 환경, 새로운 종족이나 집단, (국가)상태, 다른 지능을 찾아내려는 희망들에 의해 그 짜임을 만들어 온 장르인 것이다. - P9

그렇다고는 하나, 실은 서사의 유희가 촉발하는 장르 간 혼합들이 이 경계들을 종종 무력화시켜 왔다. 나아가 퀑탱 메이야수는 법칙과소설(허구)의 이율배반을 지적하며, 모종의 가능성의 총체를 현존하는 법칙으로는 재구성할 수 없는 무한성(transfinite, 超限性)이 SF 장르에 계속 관여해왔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과학소설‘은 실은 ‘과학 밖 소설‘(ESF, Extro-Science Fiction)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 P10

3.

SF에 대한 희망과 가치절하는 사실 연원이 깊은 것이다. SF는 꿈꾸는 자의 장르로서 전체적 유토피아에 관한 미래소설로서 이해되어 왔다. 보다 나은 내일이 하나의 전체적 구조로서 상상되고 묘사되는 장르, SF는 유토피아 이야기라는 연원이 오래된 장르에 과학 혁명의 성과가 외삽되어 실재성을 배가해온 ‘현대‘의 장르이다. - P10

SF는 개인의 무의식의 원환상이 꿈, 가치관, 행동, 언어의 자유연상과 같은 단편적이고 증후적인 ‘텍스트‘에 의해 재구축되도록 한다. 물론 실재하는 SF 소설에서 서사의 결말을 짓는 일반적 방법은 흔히 우주를 파괴하는 원자 폭발, 어떤 미래의 전체주의 세계국가라는 정태적 이미지들을 오가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한계가 가장 확실하게 각인된 장소이기도 하다.¹² - P11

반면 현재와는 다른 미래의 상상력 쪽이 아니라 현재와 같은 미래라는 쪽에 거는 비평들도 있다. 1949년 SF 문학의 절정기에 제출된 미래소설 비판에서 에른스트 블로흐는 일련의 과학소설들을 "시민주의적 유토피아라 규정한 바 있다. "경제적 사항을 유치하게 누더기 깁듯이 부분적으로 치유한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인데, 그런 의미에서 블로흐에게 SF란 "개량주의 내지는 시민주의적 유토피아의 취약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르였다. - P12

보드리야르는 SF가 다른 상상, 없는 것의 있을 수 있음(U-topia)이 아니라 현실의 증폭 패러다임에 가깝다고 말한다. SF란 에너지와 힘,
기계에 의한 물질화, 생산력 시스템 속에 세워진 생산주의자의 시뮬라크르인데, 이제 SF는 이론과 장르 양쪽에서 종말에 근접했다는 것이다. - P12

"SF는 아주 흔히 생산의 실제 세계를 과도하게, 그러나 결코 질적으로 다르게가 아니게, 투영한 것일 따름이다. 기술적인 혹은 에너지적인 연장들, 속도들과 힘들은 n의 힘으로 넘어간다. 우리 시대 SF 장르는 폭발(explosion)하는 장르가 아니라 내폭(implosion)하는 장르이다.¹⁵ - P13

4.

SF는 한국문학의 ‘주류적‘ 장르는 아니었다. 주변적 장르이기만 했던가 하면, SF와 과학운동의 관계, 또 당대 문학의 지각 변동을 생각하면 담론 차원에서는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겠다. - P13

어쨌든 ‘소설‘이 성숙 혹은 형성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었다면, SF는 미성숙한 자들의 아동 독물(讀物)이거나 소설 밖의 이야기 혹은 소설 전의 서시시로서 ‘공상‘ 혹은 ‘환상‘과 뒤얽힌 것들로 이미지화되어 왔는지도 모른다. - P14

(전략). 어쩌면 탈마법화와 교양의 장르였던 한국 근대소설에서 SF는 마법적이거나 제국적인 것으로서 의식적으로 기피되어 온 것일 수도 있겠다. - P15

‘제2부 한국과 동아시아 SF의 기원들‘에는 한국에서의 SF의 수용과정을 보여주는 글들을 실었다. 이지용의 글을 통해 SF 수용사의 대개를 검토했다. 1920년대 과학 담론의 인기 소재 중 하나였던 화성에대한 담론과 그 문학적 형태들을 최장락이 정리하였다. - P16

시로시 빅토리아는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의 『붉은 별』과 예브게니 자마찐의『우리들』의 창작 배경을 이루는 러시아 코스미즘 등의 사상사적 변동을 기반으로 사회주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번역되어 수용되는과정을 살폈다. - P16

‘제3부 정치적 분할과 SF‘에는 해방 후 분단 무의식이 과학에 표상한 세계들과 당대 SF의 재난적 상상력을 검토한 글들을 배치했다. 김민선의 글은 북의 김동섭과 남의 한낙원의 우주탐험 서사를 대조하며열전후의 ‘냉전적 상상력을 검토한다.  - P17

5.

이 책에 실린 글들은 크게 두 경로로 완성되어 갔다. 우선 2021년 12월 <SF와 지정학적 미학>이라는 주제로 열린 ‘제2회 성균 국제 문화연구 연례 포럼‘에서의 발표들을 발전시켜 정리한 글들과 이 포럼과 관련된 필자들의 글을 별도의 청탁을 통해 갈무리했다. - P18

한국의 SF와 그에 얽히거나 거기서 확장 가능한 주제들을 묶은 책을 구상하고, 또 제목을 생각하면서 아놀드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관한 아도르노의 비평을 떠올렸다. 문화비평 에세이집인 아도르노의 『프리즘: 문화비평과 사회』는 카프카의 성에서 쇤베르크와 바흐의 음악에 이르기까지, 또 슈펭글러와 초시대적 유행에서 재즈에 걸친 다양한 주제들이 당대의 (대중)문화적 자장에서 포착한다. - P18

‘SF 프리즘‘ 과학, 미래, 자본, 정치가 소설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며 펼쳐내는 빛의 산란을 살펴보는 일. 필자들의 글들을 갈무리하며다루어진 글들의 변폭도 그러하거니와, 어쩌면 SF야말로 우리에게그런 프리즘을 요구하는 주제라 생각했다. 우리의 책이 충분히 초점화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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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요점 정리


• 2010년부터 2015년까지 미국 십대의 사회생활은 대체로 소셜 미디어, 온라인 비디오게임, 그 밖의 인터넷 기반 활동에 접근할 수 있는 스마트폰으로 옮겨갔다. - P76

• 고통의 증가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국과 캐나다를 비롯해주요 영어권 국가들과 북유럽 5개국에서도 거의 같은 시기에 십대들 사이에 동일한 패턴이 나타났다. 2012년 이후에 학교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비율이 서구권에서 증가했다. 다른 지역의 데이터는 많지 않으며, 이곳들에서 나타나는 패턴은 덜 분명하다.⁶¹ - P76

61. 우리는 국제적인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으며, 잭 라우시는 전 세계 각지의 정신 건강추세를 탐구한 일련의 서브스택 게시물을 작성하고 있다. 이러한 게시물들로 연결되는 링크는 이 장의 온라인 부록에서 찾을 수 있다. - P446

스마트폰 기반 아동기는 정확하게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아동의발달을 방해하고 정신 질환을 초래하거나 악화시킬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아동기가 무엇이며, 건강한 어른으로 발달하기 위해 아동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 P77

2장

아동기에 아동이 해야 하는 일

(전략).
이 사고 실험은 동료 연구자인 토비어스 로즈-스톡웰 Tobias Rose-Stockwell과 그의 경이로운 저서 『분노 기계 Outrage Machine』에서 빌려왔다 - P81

 2007년에 십대와 사춘기 직전의 많은 아동은 휴대폰에 짧은 문자를 입력하느라 바빴지만, 그 당시에 문자 메시지를입력하는 작업은 무척 번거로웠다(소문자를 입력하려면 7 키를 네 번 눌러야 할 정도로). 문자는 대부분 한 번에 한 사람에게만 보낼 수 있었고, 대개 기본 휴대폰을 사용해 직접 만나는 방법을 논의했다. - P82

성장이 느린 인간의 긴 아동기

사람에게는 기묘한 특징이 한 가지 있다. 아이는 빠르게 성장하다가그다음에는 느리게 성장하고, 다시 빠르게 성장한다. 사람의 성장 곡선을 침팬지의 성장 곡선과 비교해보면, 침팬지는 생식을 할 수 있는성적 성숙 단계에 이를 때까지 꾸준히 일정한 속도로 성장한다는 걸알 수 있다.² - P83

2장 아동기에 아동이 해야하는 일


2. Walker et al. (2006). - P446

(전략). 세상을 확바꾸어놓은 우리의 힘은 서로에게서 배우는 능력과 조상과 공동체가축적한 공통의 지식 풀pool을 활용하는 능력에서 나왔다. 침팬지는이런 능력이 거의 없다.⁴ 사람의 아동기가 늘어난 것은 아이에게 학습할 시간을 많이 주기 위해서였다.
최대한 많이 배우기 위한 진화의 경쟁 때문에 사춘기에 최대한 빨리 도달하는 것은 적응에 불리했다.  - P84

4. 먹이를 모으거나 처리하는 기술이 공동체 내에서 전달되는 침팬지 ‘문화‘ 사례를 보여주는 기록이 일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문화적 학습은 침팬지 학습의 주요 형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으면 Tomasello (1994, pp.301~307)를 참고하라 - P446

하지만 진화는 학습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단순히 아동기를 연장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학습을 쉽고 즐겁게 만들도록 강하게 자극하는 세 가지 동기도 우리에게 심었다. 자유 놀이와 조율과 사회학습을 위한 동기가 바로 그것이다. - P84

자유놀이

놀이는 아동기에 아이가 하는 일인데,⁵ 어린 포유류는 모두 동일한작업에 몰두한다. 그것은 열심히, 그리고 자주 놀면서 뇌의 회로를 연결하고 완성하는 과정이다. 어린 쥐, 원숭이, 사람을 대상으로 실시한수백 건의 연구에서 어린 포유류는 놀길 원하고, 놀 필요가 있으며,
놀이를 박탈당하면 사회적, 인지적, 정서적 손상을 입는다는 결과가 나왔다.⁶ - P85

5. 이 말은 위대한 발달심리학자 장 피아제Jean Piaget가 했거나, 어린이를 자유 놀이에 몰입하게 하자는 교육 운동의 창시자 마리아 몬테소리Maria Montessori가 했다고 흔히 이야기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두 사람이 이런 표현을 쓴 흔적은 어디서도 발견되지않는다. 다만, 이 표현의 두 사람의 철학과 일맥상통하긴 한다.
6. 피터 그레이의 연구, 특히 Gray et al.(2023)을 참고하라. 또한 나의 리뷰 문서 FreePlay and Mental Health: A Collaborative Review, www.anxiousgeneration.com/reviews도 참고하라. - P447

그레이는 ‘자유 놀이 free play‘를 활동 자체와 분명히 구별된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활동이 아니라, 참여자들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지휘하며 그 자체를 위해 하는 활동으로 정의한다.⁸ - P86

8. Gray (2011, p. 444). - P447

자유 놀이의 중요한 특징 하나는 일반적으로 실수의 비용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점이다. 누구나 처음에는 다 서툴며, 누구나 매일 실수를 저지른다. 초등학생은 시행착오를 통해, 그리고 친구로부터 직접적인 피드백을 받으면서 중학교의 더 큰 사회적 복잡성에 대응할준비를 서서히 해나간다. - P87

내가 ‘놀이 기반 아동기‘를 ‘스마트폰 기반 아동기‘와 대비하면서이 책의 중심 용어로 선택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놀이 기반 아동기는 아이가 자유 시간 중 상당 부분을 현실 세계에서 친구들과 함께노는 데 쓰는 시기를 말한다. - P87

노동 기반 아동기는 산업 혁명 시절에 관행처럼 광범위하게 퍼졌는데, 1959년에 유엔 아동 권리 선언이 놀이를 기본적인 인권으로 명시한 것은 이 때문이다. "어린이에게 놀이와 레크리에이션을 즐길 기회를 완전히 제공해야 하며, 그것은 교육과 동일한 목적을 향해 추진되어야 한다."¹¹ - P88

11. principle 7. Child Rights International Network. (1959, November 20). UN decla-archive,crin.org/en/library/legal-database/ra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1959),
un-declaration-rights-child-1959.html. - P447

따라서 일부 청소년이 홀로 앉아 유튜브 영상을 보거나 인스타그램이나 틱톡, 그 밖의 앱에서 끝없는 게시물을 훑어보면서 깨어 있는시간 중 대부분을 휴대폰(그리고 그 밖의 화면)에 쓰기 시작한다면 어떤 문제가 생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 P88

설령 이 사이트들의 콘텐츠를 효과적으로 필터링해 명백히 해로운 내용을 제거할 수 있다 하더라도, 중독성이 강하게 설계된 이 플랫폼들은 현실 세계의 대면 놀이에 쓸 시간을 감소시킨다. 놀이 시간의 감소는 너무나도 심각해서 어린이의 손에 쥐어진 스마트폰과 태블릿은 경험 차단제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이다. - P88

젊은이가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자유 놀이와 비슷한 면이 별로 없다. 사실, 소셜 미디어에서 게시물을 올리고댓글을 다는 것은 피터 그레이의 정의와 정반대되는 행동이다. 플랫폼에서의 삶은 젊은이를 항상 자신이 선택한 각 사진과 영상, 댓글,
이모티콘의 사회적 결과를 미리 생각하면서 자신의 브랜드 관리자가 되도록 강요한다. - P89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이 기본 휴대폰에서 스마트폰으로 옮겨간 바로 그 시기(2010년대 초반)에 친구들과 자유롭게 보내는 시간이 급감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림 2.1은 "거의 매일" 친구들을 만난다고 대답한 미국 학생 (8학년, 10학년, 12학년이 섞인)의 비율을 보여준다. - P90

12. 2018년에 질문의 표현이 바뀌었기 때문에 후속 데이터는 사용할 수 없다. 학생들에게 얼마나 자주 친구들과 사적으로 만나는가?"에 대한 응답을 다섯 가지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고르게 했다. 선택지에는 "전혀"에서부터 거의 매일까지 포함돼 있었다. 더 자세한 탐구는 Twenge. Spitzberg & Campbell (2019)를 참고하라.

13. 연구 주석: 모니터링 더 퓨처(MTF) 조사 데이터를 바탕으로 잭 라우시와 내가 만든그래프들(그림 2.1과 같은)이 이 책 곳곳에 실려 있다. 모니터링 더 퓨처 조사는 매년8학년 10학년, 12학년을 대상으로 다양한 태도와 행동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다. 나는 미국의 십대에게 일어나는 일을 가장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을 제시하기 위해 대개 세 학년의 평균을 취한 그래프를 보여준다. 그리고 거의 항상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데이터를 각각 따로 제시한다. 모니터링 더 퓨처는 1976년에 12학년의 데이터를 수집하기 시작했지만, 8학년 10학년의 데이터 수집은 1991년에야 시작했고, 나중에 가서야 일부 변수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주간 소셜 네트워크 사용은 2013년에 추가되었다. 가끔 나는 역사적 관점을 1970년대로 확대하기 위해 12막년의 데이터만 보여줄 것이다. 2021년까지의 데이터가 있는 경우에도 나는 대다수그래프를 2019년에서 의도적으로 끝냈는데, 코로나19 팬데믹이 응답률을 크게 높여 아동기 대재편 (2010-2015년) 동안에 일어난 일에 대한 주요 메시지를 왜곡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2020년과 2021년에는 표본 크기가 훨씬 줄어들어 데이터의 신뢰성을 떨어뜨렸다. 모든 그래프는 권장된 가중치를 적용하고 2년간을 하나의 구간으로 합친 (2018년 2019년 데이터를 합쳐서 평균을 내는 식으로 데이터를 보여준다. 그렇게 한 이유는 1년을 단위로 그래프를 작성하면 종종 갑자기 크게 치솟는 구간이 나타나, 그 바탕을 이루는 추세를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에 두 해씩 묶어서 그래프로 나타내면 곡선을 반반하게 하는 효과가 있어서 추세를 드러내는 데유리한 이점이 있다. 하지만 완전한 데이터를 제시하기 위해 다른 버전의 그래프들(1년 단위로 나타낸 그래프와 2021년까지의 데이터를 추가한 그래프)도 온라인 부록에 올려놓았다. 본문에서 12학년의 데이터만 제시한 그래프들의 경우에는, 더 낮은 학년의 데이터가 있다면 세 학년의 데이터를 모두 나타낸 그래프를 부록에 올려놓았다.
모니터링 더 퓨처 데이터와 이 책에서 사용한 그 밖의 모든 데이터는 github.com/AfterBabel에서 다운로드받을 수 있다. - P447

조율

아이가 주변 세계와 연결을 맺으려면 움직임과 감정을 다른 사람과 조율attunement 하고 동기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팔과 다리를 제대로 제어하기 전부터 이미 아이는 차례를 번갈아 바꾸고 감정을 공유하는 게임을 하면서 어른과 관계를 맺는다. (중략).¹⁵
스마트폰은 이러한 필수적인 대면 상호 작용을 방해할 수 있다. 퓨연구 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부모 중 17%는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 스마트폰 때문에 자주 한눈을 판다고 보고했고, 52%는 가끔 한눈을 판다고 보고했다.¹⁶ - P91

15. Cohn & Tronick (1987); Beebe et al. (2010); Wass et al.(2020).
16. Auxier et al.(2020, July 28). - P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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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LHC는 가동 초기에 힉스 보손이라는 입자를발견했다. 힉스 보손의 존재는 1960년대부터 예측되었다. 동료들과 나는 10억 달러짜리 프로젝트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결과를 확인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해주리라 기대했다. - P22

천체물리학 분야 연구자들의 사정은 더 나쁘다. 그들은 1930년대에 은하단 galaxy cluster 이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로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훨씬 큰 질량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P22

 천체물리학자들은 암흑물질이 빛을 흡수하거나 방출하지 않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종류의 입자라고 믿는다. 그들은 새로운 자연법칙과 확인되지 않은 이론들을 생각해냈고, 이를 지침으로 삼아 그들의 아이디어를 실험하기 위한검출기를 제작했다. (1980년대부터 10여 팀의 실험물리학자들이 가상의 암흑물질 입자를 사냥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 그 입자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새로운 이론은 여전히 확인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우주론도 암울한 처지에 놓인 것 같다. 우주론을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은 우주의 팽창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려애쓰고 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 P23

우리는 새로운 자연법칙을 찾아내기 위해 어마어마한 노력을 기울였고, 그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30년이 넘도록 물리학의 기반은 전선되지 못하고 있다. - P24

물리학의 기반은 현재 우리가 아는 한 그보다 더 간단한 것으로부터파생될 수 없는, 이론의 구성요소이다. 이 밑바닥에서 우리가 현재 손에쥐고 있는 것은 공간과 시간, 25개의 입자고, 이 요소들 사이의 관계는이 요소들의 행동을 기술하는 방정식을 통해 서로 얽혀 있다. - P24

수학으로 만들어진

물리학의 이론들은 수학으로 구성된다. 우리가수학을 사용하는 이유는 미분기하학이나 등급 리 대수 graded Lie algebra를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수학을 사용하는 이유는 우리가 바보이기 때문이다. - P25

물리학에서 수학이 거둔 성공은 어마어마했다. 그 성공 때문에 기준은 더욱 엄격해졌다. 오늘날 우리가 세우는 이론들은 (수학적 관계 또는정의로서의) 가정들과 이러한 수학을 현실의 관측 대상과 연결시키는 해석이 결합한 것이다. - P26

그러나 물리학은 수학이 아니다. - P26

이미 성공을 거둔 이론들의 성과가 새 이론에서 재현됨을 입증하는것은 대단히 어렵다. 새 이론에서는 예전 이론과 완전히 다른 수학의 틀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이론이 기존 관측 내용에대해 동일하게 예측한다는 점을 보여주려면, 새 이론을 달리 표현할 적절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 P27

물리학이 갈망해온 것


과학 이론은 언제나 논리적 일관성을 요구하지만, 수학적 모델링이 모든 분야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엄격함과 맞지 않는 데이터를 다룰 때, 언어를 엄격하게 사용하면 앞뒤가 맞지 않게 된다. - P28

이 정확성 때문에 물리학은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지만, 그래서 어렵기도 하다. (중략). 수학 때문에 물리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진짜 어려운 문제는 정확한 수학을 찾는 것이다. - P29

앞서 말한 대로, 우리는 이 세상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아내기위해 탐사하던 중 25개의 기본 입자를 발견했다. 초대칭은 이미 알려진 입자들, 그 밖의 몇몇 입자의 짝꿍 입자를 예측하며 기본 입자 컬렉션을 완성시킨다. 초대칭 입자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초대칭적 완성은 상당한 매력이 있다. - P31

(전략). 다시 말해 알려진 보손들은 모두 페르미온 짝꿍을 가져야 하고, 알려진 페르미온들도 모두 보손 짝꿍을 가져야 한다. 이 짝꿍입자들, 즉 초대칭 입자들은 각각 보손과 페르미온 그룹에 속해 있다는 점 외에는 완전히 동일해야 한다.
발견된 입자들 가운데 이런 식으로 짝지어지는 것은 없다. 우리가 내린 결론은 현재 알려진 입자 중에는 초대칭 입자가 없고, 새로운 입자들이 어딘가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 P32

페르미연구소의 물리학자 댄 후퍼는 이런 글을 남겼다. "초대칭 입자를 찾기 위해 수백 명의 물리학자가 숱한 실험을 하며 노력했지만, 초대칭 입자는 한 번도 관측된 적도, 검출된 적도 없다.
이런 사실도 자연이 초대칭 상태로 형성된다고 열렬히 믿는 이론물리학자들을 단념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초대칭 너머의 아이디어들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우아해서 도저히 우리 우주의 일부가 아니라고 할수가 없다. 초대칭이론들은 무수히 많은 문제를 해결해주면서 이 세상에 자연스럽게 들어맞는다. 이런 신실한 신자들에게 초대칭 입자는 무조건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² - P33

1장 물리학의 숨은 규칙


2 Hooper D. 2008. Nature‘s blueprint, New York: Harper Collins. - P372

지난 몇 년간 새로운 것이 LHC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중론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잔 프란치스코 주디체가 도입한 척도를 기준으로 따졌을 때, 입자물리에 존재하는 최고의 설명인 표준모형standard model 이 부자연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움을 측정하는 주디체의 수학 공식은 아주 크거나 아주 작은 수들을 포함한 이론은 아름답지 않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이 믿음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앞으로 자세히 살펴보겠다. - P35

덧차원이 LHC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자연스러움이었다. 알카니-하메드와 동료들은 현재세 사람의 이름 첫 글자를 따 ADD 모형이라고 부르는 가설을 발표한 논문에서 "자연스러움의 기준에서 볼 때 덧차원으로 넘어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 규모는 테라전자볼트(TeV)를 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논문은 지금까지 5000회 이상 인용되었고, 물리학계에서 가장 많이인용된 논문 중 하나다.



• 에너지 단위 eV는 전자볼트electron volt의 약자이다. TeV는 1012eV다. LHC는 최대 14TeV까지 가동될 수 있다. 따라서 LHC는 TeV 규모로 테스트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 P36

간단히 말해서


· 물리학자들은 수학을 아주 많이 사용하고, 수학이 잘 맞아떨어지면 진심으로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물리학은 수학이 아니고, 이론을 개발하려면 데이터를 안내자로 삼아야 한다.

•물리학계에는 수십 년 동안 새로운 데이터가 나오지 않은 분야도있다.

•실험에서 지침을 얻지 못하면 이론물리학자들은 미적 기준을 사용한다.

ㆍ 그 기준이 잘 맞지 않으면 이론물리학자들은 혼란에 빠진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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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참여할 의향이 있다면 왜 지금 바로 공산당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오?」 어느 천치 같은 젊은이가 이렇게 썼다. 과거에 자주 참여했다가는 더 자주 물러서곤 했던 한 대작가(大作家)는 자신의 그런 행적을 잊어버리고는 내게 말했다. 「가장 나쁜 예술가는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예술가요. 소련의 화가들을 보시오 」¹


1) 《현대 Les Temps modernes》지(誌)가 1945년 10월에 창간되고, 거기에 실린 사르트르의 창간사가 정치적 참여의 이념을 내걸자, 좌우익에서 일제히 비판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중의 하나로 여기에서 말하는 〈대작가) 앙드레 지드는 그 창간사를 <야만을 향한 길>이라고 혹평하고 소련의 어용 예술이 상기된다고 했다. - P9

1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다. 우리는 회화와 조각과 음악도〈역시 참여시키려는>것이 아니다. 적어도 같은 방법으로 참여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 P11

. 메를로퐁티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잘 지적하고 있는것처럼, 의미가 전혀 배어 있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순수한 성질이나 감각이란 없다. - P12

지금까지 우리가 예술적 창조의 요소(要)들 자체를 두고 한 이야기는 그 요소들의 결합에 관해서도 똑같이 할 수 있다. 화가는 그의 캔버스에 기호를 그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을 창조하려는 것이다.²


2) exister를 편의상 <존재하다>로, ére를 <있다>로 번역했다. 전자는 초월과 생성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고, 후자는 그것 자체로서 고정되어 있는존재의 양태를 가리킨다. 달리 말하면, 각각 대자적(對自的), 즉자적(卽自的) 양상을 뜻한다. - P13

작가라면 독자를 인도(引)할 수 있다. 작가는 오막살이 한채를 묘사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거기에서 사회적 부정의 상징을 보게 하고 독자의 분노를 자아낼 수 있을 것이다. - P15

 그렇지만 그 그림은 우리가 결코 완전히는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무엇을, 우리가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못다 표현할 그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P16

이와 반대로 작가가 다루는 것은 의미이다. 그러나 구별이필요하다. 왜냐하면 기호의 왕국은 산문이며, 시(詩)는 회화, 조각, 음악과 같은 편이기 때문이다.  - P17

시 역시 산문과 같이 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런 생각을 하겠는가? 그러나 시는 산문과 똑같은방식으로 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시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보다는 차라리 시는 말을 섬긴다고 하고 싶다. 시인은 언어를 이용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 P17

. 헤겔식(式)으로 말하면, 그 경우 본질적인 것이된 사물 앞에서 이름은 비본질적인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시인은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지만 침묵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문제가 다르다. 시인은 말들을 괴상하게 결합해서 언어를 파괴하려고 해왔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 P18

그러나 화가가 색채에, 음악가가 소리에 주목하듯, 시인이말에 주목한다고 해서, 그가 보기에 말의 모든 의미가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다. 사실, 말에 언어적 통일성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의미밖에 없다. - P19

시인에게는 언어는 외적(外的) 세계의 구조이다. 이에 반해서말을 사용하는 사람은 언어적 상황 속에 처해 있고 말에 의해서 포위되어 있다. - P19

이렇듯 말을 세계의 모습의 <기호>로 사용할 줄 모르는 시인은 말에서 그런 모습 중의 하나의 <이미지>를 찾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가령 버드나무나 물푸레나무와 닮았다고 해서 시인이 선택한 언어적 이미지는 반드시 우리가 그런 대상을 지칭하는데 사용하는 말은 아니다. - P20

. 요컨대 시인에게는 언어가 온통 세계의 거울인 것이다. 그러자 말의 내적 구조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가 생긴다. 말의 음색, 장단, 남녀성(男女性)을 가리는 어미(語尾), 그 시각적인 양상 따위가 말의 육안(肉)을 이루고, 이 육안은 의미를 표현한다기보다도 표상(表象)>하는 것이다. - P20

금세기 초에 폭발한 언어의 위기는 시의 위기였다. 사회적, 역사적 요인이 어떤 것이었든 간에, 그 위기는 언어를 면대하여 작가가 일으킨 비인격화(非人)의 충격으로 나타났다.⁹


9)이 언어의 위기에 관해서는 뒤에서 (368-370쪽) 더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또한 주네론(論) Saint Genet, comédien ou martyr』에서도, 부르주아지가 순치한 언어의 의미를 타파하려는 시인들의 투쟁에 관해서 자세히이야기하고 있다(311쪽 이하). - P22

이제 작가는 이화감을 느끼면서(그것은 매우 풍요로운 이화감이었지만), 언어를 대했다. 언어는 이미 그의 소유물이 아니었고, 또한 그 자신의 본질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야릇한 거울에는 하늘과 땅과 그 자신의 삶이 반영되어 있었다. 마침내 언어는 사물들 그 자체가 되었다. - P23

예컨대 다음의 희한한 시구(詩句)를 보라.

오오 계절이여! 오오 성(城)이여!
흠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¹²

여기에서는 누가 질문을 받는 것도 질문을 하는 것도 아니다. 시인은 그 자리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물음은 대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아니 차라리 물음이 그 자체의 대답이라고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가짜 물음일까?



12) 랭보의 『지옥의 한 계절 Une Saison enenfer』에 나오는 시구이다. - P25

그러나 시인이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 과연 산문작가 역시참여의 피안에 설 수 있다는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들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는 것인가? 하기야 산문작가는 글을 쓰고 시인도 쓴다. 그러나 쓴다는 이 쌍방의 행위 사이에는 글씨를 쓰는 손의 움직임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 P27

 작가란 <발언을 하는 사람parleur>이다. 그는 지시하고 설명하고 명령하고 거절하고 질문하고 탄원하고 모욕하고 설득하고 암시한다. - P27

산문이라는 기술(技術)의 행사는 담론(談論)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 소재는 당연히 의미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말들은 애초에 대상이 아니라 대상의 지시자이다.  - P28

산문은 무엇보다도 정신의 한 가지 태도이다. 발레리 Valéry식으로 말하자면, 햇빛이 유리를 거쳐 통과하듯이,¹⁷  말이 우리의 시선을 스쳐서 지나갈 때에 산문이 있는 것이다.


17) 원문에는 comme le verre (passe) au travers du soleil(유리가 햇빛을 통과하듯이)로 되어 있으나, comme le soleil (passe) au travers du verre(햇빛이 유리를 통과하듯이)라고 뒤집어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 P28

이렇듯 산문이 어떤 기도를 위한 탁월한 도구 이외의 다른것이 아니라면, 말을 초월적인 입장에서 관조(觀照)할 수 있는것은 오직 시인의 경우뿐이라면, 우리는 산문가에 대해서 우선다음과 같이 물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당신은 무슨 목적으로글을 쓰는가? 당신은 어떤 기도로 나선 것인가? 그리고 그 기도는 어떤 이유에서 글쓰기라는 수단을 필요로 하는 것인가?」 - P29

더구나 기도의 제2차적 기능인 <언어적 계기>만을 따로생각해 볼 때, 문체 지상주의자들이 저지르는 중대한 과오는, 말이 사물들의 표면에서 살랑거리는 미풍과도 같아서, 사물들을 살며시 스칠 뿐, 결코 그것에 무슨 변화를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그리고 화자(話)란 오직 자신의 무해한 관조를 말로써 요약하는 순수한 <증인>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  - P30

인간이란 그의 앞에서는 어떤 것도, 심지어 신(神)조차도불편부당성을 지킬 수 없는 그러한 존재이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어떤 신비주의자들이 잘 본 바와 같이, 신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상황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또한 상황을 바꾸지 않고서는 상황을 볼 수조차 없는 존재이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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