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프리즘, 한국/문학의 별세계에서
황호덕
1.
1961년 4월 12일, 가가린은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인류 역사상 최초로 우주에 나간 인간이 되었다. 이 경이적인 사건에 대해 모리스 블랑쇼는 "중력으로 상징되는 공동의 인간 조건을 벗어나 누군가가 거기에 있었다"고, "어떤 장소를 벗어나 일시적 유토피아로 인도될 수도 있었다고 적었다. - P5
그런데 낭패스럽게도 가가린은 지구를 향해 너무 많은 말을 늘어놓았다. 우주와 러시아를 잇는 끊임없는 말이야말로 우주와 예전의 ‘장소‘를 이어 주는 유일한 연결고리였기 때문이다. 러시아인들은 이 모험을 땅으로 끌어내려 정치신화로 개진함으로써 러시아땅에 더 강하게 주박되었다. - P6
인간, 신, 동물의 분할에 근거한 정치학에 근본적인 타자인 기계가 등장하자 인간의 상상력과 서사는 커다란 전화를 경험하게 된다. ‘말하는 필멸의 동물 인간‘이 불멸과 영원, 공간적 무한과 시간적 무한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 P6
도나 헤러웨이는 우리 시대, 새로운 신화의 시대인 20세기 후반 이후 "우리는 모두 키메라(chimera)로, 이론과 공정을 통해 합성된 기계와 유기체의 잡종, 곧 사이보그다. 사이보그는 우리의 존재론이며, 정치는 여기서 시작된다"라고 말한 바 있다. - P6
요컨대 SF는 장소와 과학, 인간·동물·기계, 자본과 정치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장르이다. 장소(topia)와 유토피아(u-topia) 사이, 과학기술과 상상력 사이, 사이보그와 자본 사이에 있는 이 장르의 논제들을 다루는 이 책의 부제를 "테크놀로지의 지정학과 자본"이라 한 이유이다. - P7
2.
SF, 혹은 과학소설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는 과학이나 소설, 나아가 양자의 변용과 그 파장을 함께 정의하는 복잡한 술어를 필요로 한다. 우선 그 용어부터 영어권의 사이파이(Sci-Fi), 일본의 로컬화된 명칭인 ‘공상과학소설‘, 프랑스의 씨앙스-픽시옹(Science-fiction 혹은roman de science-fiction) 등의 용어 등이 서로 다른 경로로 유입되어 토착화되어 왔기에 여기서는 일단 SF라 잠칭해 해두고 싶다. - P7
보드리야르는 고전적 SF는 팽창하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라고 정의한 바 있다. 19세기와 20세기의 탐험과 식민화와 그 공범자인 우주탐험 이야기⁴ 속에서 되풀이되는 장르일 수 있다는 것이다.
4) 장 보드리야르, 하태환 옮김, 『시뮬라시옹』, 민음사, 1992, 200쪽. - P8
한편 SF에 대한 현대적 정의는 구구할 정도로 다양하지만, 특정한 과학적 요소의 외삽(外揷)을 통해 ‘세계를 탈구조화하고 독자들에게 완전히 해명되지 않는 미지의 현상에 접해 그 공백을 채우는 인지적과정에 참여토록 하는 장르로 정의할 수 있겠다.⁷
7) 위 정의는 다음의 책의 진술을 필자 나름대로 재정의해 본 것이다. 이수진, 『사이언스픽션, 인간과 기술의 가능성』, 커뮤니케이션북스, 2017, 16-17쪽, - P8
물론 SF와 인접 장르들의 경계가 그렇게 명확한 것은 아니다. 과학소설은 과학의 잠재성 안에서 펼쳐지는 상상이며, 현재와 미래의 단절은 어쨌든 상위의 질서나 법칙에 의해 증명되거나 봉합된다. 하지만 판타지는 실재와는 다른 논리에 의해 움직이며 중세나 상상의 어느곳과 같은 마법적 공간과 유령적, 초월적 존재를 전제한다. - P9
요컨대 SF란 ‘인지적 낯설게 하기‘를 통해 미지의 이상적 환경, 새로운 종족이나 집단, (국가)상태, 다른 지능을 찾아내려는 희망들에 의해 그 짜임을 만들어 온 장르인 것이다. - P9
그렇다고는 하나, 실은 서사의 유희가 촉발하는 장르 간 혼합들이 이 경계들을 종종 무력화시켜 왔다. 나아가 퀑탱 메이야수는 법칙과소설(허구)의 이율배반을 지적하며, 모종의 가능성의 총체를 현존하는 법칙으로는 재구성할 수 없는 무한성(transfinite, 超限性)이 SF 장르에 계속 관여해왔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과학소설‘은 실은 ‘과학 밖 소설‘(ESF, Extro-Science Fiction)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 P10
3.
SF에 대한 희망과 가치절하는 사실 연원이 깊은 것이다. SF는 꿈꾸는 자의 장르로서 전체적 유토피아에 관한 미래소설로서 이해되어 왔다. 보다 나은 내일이 하나의 전체적 구조로서 상상되고 묘사되는 장르, SF는 유토피아 이야기라는 연원이 오래된 장르에 과학 혁명의 성과가 외삽되어 실재성을 배가해온 ‘현대‘의 장르이다. - P10
SF는 개인의 무의식의 원환상이 꿈, 가치관, 행동, 언어의 자유연상과 같은 단편적이고 증후적인 ‘텍스트‘에 의해 재구축되도록 한다. 물론 실재하는 SF 소설에서 서사의 결말을 짓는 일반적 방법은 흔히 우주를 파괴하는 원자 폭발, 어떤 미래의 전체주의 세계국가라는 정태적 이미지들을 오가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한계가 가장 확실하게 각인된 장소이기도 하다.¹² - P11
반면 현재와는 다른 미래의 상상력 쪽이 아니라 현재와 같은 미래라는 쪽에 거는 비평들도 있다. 1949년 SF 문학의 절정기에 제출된 미래소설 비판에서 에른스트 블로흐는 일련의 과학소설들을 "시민주의적 유토피아라 규정한 바 있다. "경제적 사항을 유치하게 누더기 깁듯이 부분적으로 치유한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인데, 그런 의미에서 블로흐에게 SF란 "개량주의 내지는 시민주의적 유토피아의 취약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르였다. - P12
보드리야르는 SF가 다른 상상, 없는 것의 있을 수 있음(U-topia)이 아니라 현실의 증폭 패러다임에 가깝다고 말한다. SF란 에너지와 힘, 기계에 의한 물질화, 생산력 시스템 속에 세워진 생산주의자의 시뮬라크르인데, 이제 SF는 이론과 장르 양쪽에서 종말에 근접했다는 것이다. - P12
"SF는 아주 흔히 생산의 실제 세계를 과도하게, 그러나 결코 질적으로 다르게가 아니게, 투영한 것일 따름이다. 기술적인 혹은 에너지적인 연장들, 속도들과 힘들은 n의 힘으로 넘어간다. 우리 시대 SF 장르는 폭발(explosion)하는 장르가 아니라 내폭(implosion)하는 장르이다.¹⁵ - P13
4.
SF는 한국문학의 ‘주류적‘ 장르는 아니었다. 주변적 장르이기만 했던가 하면, SF와 과학운동의 관계, 또 당대 문학의 지각 변동을 생각하면 담론 차원에서는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겠다. - P13
어쨌든 ‘소설‘이 성숙 혹은 형성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었다면, SF는 미성숙한 자들의 아동 독물(讀物)이거나 소설 밖의 이야기 혹은 소설 전의 서시시로서 ‘공상‘ 혹은 ‘환상‘과 뒤얽힌 것들로 이미지화되어 왔는지도 모른다. - P14
(전략). 어쩌면 탈마법화와 교양의 장르였던 한국 근대소설에서 SF는 마법적이거나 제국적인 것으로서 의식적으로 기피되어 온 것일 수도 있겠다. - P15
‘제2부 한국과 동아시아 SF의 기원들‘에는 한국에서의 SF의 수용과정을 보여주는 글들을 실었다. 이지용의 글을 통해 SF 수용사의 대개를 검토했다. 1920년대 과학 담론의 인기 소재 중 하나였던 화성에대한 담론과 그 문학적 형태들을 최장락이 정리하였다. - P16
시로시 빅토리아는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의 『붉은 별』과 예브게니 자마찐의『우리들』의 창작 배경을 이루는 러시아 코스미즘 등의 사상사적 변동을 기반으로 사회주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번역되어 수용되는과정을 살폈다. - P16
‘제3부 정치적 분할과 SF‘에는 해방 후 분단 무의식이 과학에 표상한 세계들과 당대 SF의 재난적 상상력을 검토한 글들을 배치했다. 김민선의 글은 북의 김동섭과 남의 한낙원의 우주탐험 서사를 대조하며열전후의 ‘냉전적 상상력을 검토한다. - P17
5.
이 책에 실린 글들은 크게 두 경로로 완성되어 갔다. 우선 2021년 12월 <SF와 지정학적 미학>이라는 주제로 열린 ‘제2회 성균 국제 문화연구 연례 포럼‘에서의 발표들을 발전시켜 정리한 글들과 이 포럼과 관련된 필자들의 글을 별도의 청탁을 통해 갈무리했다. - P18
한국의 SF와 그에 얽히거나 거기서 확장 가능한 주제들을 묶은 책을 구상하고, 또 제목을 생각하면서 아놀드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관한 아도르노의 비평을 떠올렸다. 문화비평 에세이집인 아도르노의 『프리즘: 문화비평과 사회』는 카프카의 성에서 쇤베르크와 바흐의 음악에 이르기까지, 또 슈펭글러와 초시대적 유행에서 재즈에 걸친 다양한 주제들이 당대의 (대중)문화적 자장에서 포착한다. - P18
‘SF 프리즘‘ 과학, 미래, 자본, 정치가 소설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며 펼쳐내는 빛의 산란을 살펴보는 일. 필자들의 글들을 갈무리하며다루어진 글들의 변폭도 그러하거니와, 어쩌면 SF야말로 우리에게그런 프리즘을 요구하는 주제라 생각했다. 우리의 책이 충분히 초점화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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