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대장, 하우스 매니저는 어셔에게 생글생글하고 활기차면서 친절한 전형적인 이미지를 요구했다. 왜였을까. 그는 공연계의 올리브영을 꿈꿨던 걸까. - P67
그 외에도 몇 가지 지적이 있었다. 손님 말고 고객님이라고해라, 다나까를 쓰지 말고 해요를 해라, 구부정하게 서지 말고 몸을 펴라 등등. - P68
우리 어셔들의 주적은 종종 출몰하는 진상이었다. 왜 지금 입장이 안 되느냐며 징징대는 지각한 인간과, 잠깐 화장실 다녀온 건데 왜 당장 재입장이 안 되느냐며 징징대는 인간으로 이루어진 로비 진상 듀오가 하나. - P69
그중에 가장 강력한 것은 역시 주차장 진상 솔로였다. 그 공연장은 주차가 완전히 불가능한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공연 관계자를 위한 조그마한 주차장을 갖고 있었다. 후문 쪽의 숨겨진 언덕배기 도로 어딘가에 흥미롭게 위치한 것이었는데, 그렇게 숨겨진 곳까지 찾아 올라오는 운전자는 실제 관계자, 해맑은 길치, 미친 진상 셋 중 하나였다. - P70
주차장의 미친 진상. 그들은 숨겨진 언덕배기 도로로 들어올 정도로 호기심이 많고 촉이 좋은 나, 그냥 지나칠 법한 주차장을 찾아낼 정도로 관찰력과 눈썰미가 좋은 나, 이런 주차의 행운을 만날 정도로 운 좋은 나,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며 살아온 융통성 있는 나, 나, 나라는 썩은 매미 껍질을 겹으로 휘감은 진정한 광인들이었다. - P71
감히 자신이 피같은 세금을 꼬박꼬박 내는 땅에 싸구려 주차 차단봉 따위를설치하여 고귀한 자신이 모처럼 행차한 고오급 문화 이벤트를 정시에 누릴 권리를 박탈하는 서울시에 대한 분노를 표하는 것이었다. (중략) 그날 가장 불운한 어셔가 주차장을 맡는 이유였다. - P71
역시 인간은 글러 먹었으며 이 지구의 희망은 결국 냥님과 개님뿐이라는 생각도 굳어졌지만, 어이없게도 나는 최장수 어셔가 될 때까지 거기에서 오래오래 일했다. - P72
물론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풀타임 취업에 계속해서 실패하고 있었다. 그 무렵 내가 갖고 다니던 랩탑 하드 속 강제자아 성찰 폴더에는, 작성일 내림차순으로 정렬된 자기소개서가 200개 가까이 들어 있었다. - P71
「원신」이 매출 2조 원을 달성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석 달이다. 그 석 달은 평범한 학생들이 한 학기를 무사히 마치며가뿐하게 독후감과 페이퍼를 제출한 다음, 우리의 전혜린과 아니 에르노를 서둘러 중고 서점에 처분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뭐라고요? 재고 초과로 매입 불가라고요? - P86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게 맞다. 그건훌륭한 일이다. 정말로 복된 일이다. 크게 복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게 불가능한 사람도 있는 거라서. - P86
나는 주어진 운명에 맞서 뭔가를 개척할 만큼 특별하고 고집 세고 체력 좋은 자, 그러니까 영웅이 아니었고, 아니며, 아마 앞으로도 아닐 것이다. - P87
엑시트에 성공한 한 유명 스타트업의 일화 하나가 사내에떠돌기 시작했다. (중략). 어느 날 우연히 직원과 대표가 엘리베이터에 단둘이 타게되었다. 둘은 인사를 나누었다. 대표가 직원에게 당신은 무슨팀이냐고 물었다. 직원은 자기 소속을 말했다. 그런데 대표는그 팀이 무엇을 하는 팀인지 바로 떠올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날로 해당 팀이 해체되었다. - P87
계절이 몇 번 바뀐 뒤, 조직개편의 유탄을 제대로 맞고 나의 월드 팀은 흐지부지 정리되었다. 애초에 대표의 우주 정복힙스터 놀이를 위해 만들어진 팀에 가까웠던 터라 예견된 일이기는 했다. - P88
이참에 퇴사를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당연히 들었으나, 키코게임즈 월드 팀에 얼떨결에 들어와서 버텼던 것과 정확히 같은 이유로, 그 시절에도 버티는 것 외에는 딱히 수가 없었다. - P89
그렇게 팀을 옮기기 전 온갖 걱정으로 머리가 어지럽던 때였다. 옥상에서 오랜만에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팀장님이 자기도 한 대 달라며 따라 올라오셨다. 어, 팀장님도 담배 피우셨나요. 아이 생기기 전에는 저 엄청 헤비스모커였어요. 아, 그러셨어요오?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 P90
미세먼지와 황사가 몰려와 우리의 시야를 반쯤 가린 날이었다. 신도시 특유의 구획된 도로 풍경이 저 아래로 펼쳐져있었다. 눈으로 보기에 시원하고 자동차를 타고 지나갈 때에도 편리하지만, 막상 걷는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장소에 가기위해서 툭툭 인색하게 억지로 놓은 횡단보도를 찾아 한없이빙빙 돌아야 하는...... 속 터지는 바둑판 신도시. - P92
한없이 관대한 나의 팀장님. 가망 없는 나를 데리고 역시가망 없는 「프린세스 메이커」를 플레이 중이셨던 나의 친절한 팀장님 ...………저 게임 진짜 못해요, 팀장님은 아시잖아요. 게임 잘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에요. 즐기면 됐어요. - P94
동생의 닌텐도로 「동물의 숲」을 하며 3D에 대한 최소한의 감을 얻었고,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를 다시 하며 그럭저럭 전후좌우로 (물론 어디에선가 잠복 중인 두통에게 잡아먹히지 않도록 천천히, 되도록 안단테 안단티노 사이로 잘 움직일 수도 있게 되었다. 거기에 옆자리 중국 직원이 강력하게 추천한 「원신」을 하며 넓고 자유로운 맵이 주는 특유의 열린 맛도 살짝본 상태였다. - P95
그동안 괜찮은 게임을 몇 가지 만나기는 했다. 나쁘지 않았던 「커피 토크」를 시작으로 은근히 가슴 찡했던 「플로렌스」와, 아름다운 음악 속에 여행하는 기분을 살짝 느꼈던 「저니」와 「압주」, 섬세함에 한없이 감탄한 「동물의 숲」 등등. - P96
천만 단위, 억 단위 사람들이 동시에 좋아하는 일이 사실게임 말고 또 없거든요. 여기 아니면..... 영화판 정도? 그 외에는 진짜 없을걸? 그러니까 그거 배울 때까지 여기 있어요. 애써서 바라본 팀장님의 눈동자가 아주 또렷했다. 그걸 보는데, 아주 쑥스럽고, 왠지 슬펐다. - P98
세상에서 스몰토크보다 더 어색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맨투맨으로 칭찬 듣기일 것이다. 칭찬이란 왜 이렇게까지 민망하고 어색한 것일까? 팀장님은 나를 어떻게 믿고 이렇게 좋게봐 주시는 걸까? - P98
팀장님 네? 감사합니다. 뭐가요, 이렇게 팀이 산산조각인데요, 하하하. 그거는………… 뭐. 그냥...... 그냥 그렇게 된 거잖아요. ......이 업계가 그렇죠. 사람 참 잘 자르고, 근데 또 사람뽑을 때는 죄다 인맥으로 뽑고? 유라 님도 관리 잘해요. 내추천인 거니까? 하하하. - P99
빈 책상이 아주 황량했다. 신규 입사자용 웰컴 키트 화분흙이 돌처럼 굳어 있었다. 이름 모를 식물은 말라 죽은 지 오래였다. 누군지 모를 다음 자리 주인을 위해 먼지를 닦으면서, 극장장 아저씨의 책-소용돌이 방과 남산 앞 주차장 초소를 생각했다. - P100
S↓ 근로계약서, 가슴, 미소녀의 추억
(전략)
담당 직무 및 근로 장소 1. 담당 직무: 프로젝트 기획 (M직군) 2. 근로 장소: 경기도 성남시 판교로 399 (삼평동, 키코 빌딩)
근로시간 및 휴게 시간 1. ‘을‘의 근로시간: 10:00 ~ 19:00 (휴게 시간 한 시간 포함, 주 5일 근무) 2. 업무상 필요에 의하여 연장/휴일/야간 근로를 하고자 할경우, 사전에 회사의 승인을 얻어야만 한다.
(후략) - P106
회의실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다들 해결되지 않은 무엇을 품은 채, 구부정하게 서서 스마트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공용 화장실 앞에 늘어선 줄 같았다. - P108
근로계약서에 정독할 시간은 없었으나, 어쨌든 내가 각서까지 써서 올리는 ‘을‘이라는 것은 아주 확실했다. 당신들은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나요? 묻고 싶었으나 그건 월급일 테고, 주영인이 기계적인 목소리로 업무상 비밀유지를 계속 강조하는 것에 아, 예예...... 대충 대답하며 시키는 대로 구석구석 사인을 했다. - P108
그리하여, 팀이 바뀌었다. 팀장도, 팀원도 바뀌었고, 하는일도 바뀌었고, 사무실도 바뀌었고, 그대로인 것은 오직 나, 조유라뿐. 새 팀장 서은수의 첫인상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 P109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게 맞다. 그건훌륭한 일이다. 정말로 복된 일이다. 크게 복된 일이다. 그럼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했을까. 고등학생 때까지 내가 좋아했던 것은 수학, 확률과 통계. 몇 가지 조건으로 우연을 정교하게 깎아 낸 사건들이 서로만나고 겹치고 삼키는 것을 0.7밀리미터 샤프 펜슬로 발라내고 발라내다가 마지막에 리미트를 걸던 재미. - P113
얼마 후, 팀장은 나를 은근하게 불렀다.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그 뒤에 무시가 어른어른한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흥미롭지만 열등한 동물이나 몬스터를 보는듯한 표정이었달까. - P115
팀장은 몇 가지 자료를 건네주었다. 자신이 아끼던 일 잘하는 직원들의 포트폴리오 일부라고 했다. 개인정보가 포함된 민감한 부분을 편집하려다가, 자기가 너무 바빠 나를 믿고그냥 보여 주겠다고 했다. 다들 이 정도는 준비하고 공부하고 들어와서 현업 하거든요. 유라 님. 특수한 상황인 거 본인이 제일 잘 알지요? 유라님도 빨리 따라가 주세요. 이현 팀장님 생각해서라도? - P115
내가 일단 놀란 것은 게임 회사 입사를 위해 사람들이 온갖 교육기관을 전전했다는 사실이었다. (중략). ‘게임학과‘라는 단어를 한번에 못 알아들어서 어버버했던 기억도 났다. - P116
웬만한 입시학원들은 먹고살 길이 애매한 운동권들이 차린 것이 시작이었다던데. 도대체 이 많은 게임 어쩌고들은 누가 시작한 것일까? 설마 퇴사자들 농사를 짓고 호프집을 연다던? - P116
노오력을 통해 고난과 시련을이겨 내고 꿈을 이루었다고 착각하)며, 미래로 전진하는 중이라고 믿는 행복감으로 가득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슬퍼졌다. 이 노오력의 사람들을 불과 2~3년 안에 기운 없는 최소 스펙 마니아로 만들어 퇴사시키는 이곳은 도대체 무엇일까. - P117
내가 ‘게임 조작이 다소 서툰 사람‘이라고 써 놓으면 팀장이 ‘게임 재능이 부재한 플레이어‘라고 바꿔 놓는 업계인 것을. - P118
하늘에서 떨어지는 우유병과 꿀물 병을 제때 터치해 침대위 미소녀에게 먹이는 게임이라니. 어딘가 찝찝했다. 차라리 때리고 부수는 게임이 낫지 않나 싶었다. 스페셜 H모드가 뭔지 궁금했지만 포털 검색으로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 P122
밥상을 물리고 동생이 평화롭게 예능을 보는 동안 나는 옆에서 휴대폰을 들고 H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헤맸다. 성인 인증 너머의 H세상은 생각보다 넓고, 예상보다 어두우며, 상상이상으로 더러웠다. 먼지처럼 많은 변태 게임들과 변태들. - P123
근데...... 이게 어쨌든 아무리 야해 봤자 픽셀이잖아 당연하지. 근데 이걸 보고 흥분을 한단 말이야? 모니터 앞에서...... 아우, 언니. 뭘 그렇게 복잡하게 그래. 헨타이가 헨타이지. 그날은 꿈도 이상했다. - P124
팀장은 예상 외로 정색을 했다. (중략).
아니...... 음...... 아트 예시도 좀 보기 그렇고요. 기획자가누군지는 몰라도요. 그 H모드라는 것도 좀 퀄리티 떨어지는느낌이고요......
횡설수설하는 내 앞에서 팀장은 인상을 쓰고 안경을 벗어꼼꼼하게 닦아 쓰면서 말했다.
유라님? 지엽적인 거에 갇히면 안 되죠. 시스템을 보라고 준건데요. 그리고 그 정도 포폴...... 어디서 볼 수 없을 텐데요. - P125
자리로 돌아온 나는 문제의 기획서를 끝까지 읽어 보았다. 하지만, 읽을수록 불쾌했다. 그 게임은 어떻게 보아도 야게임이 맞았다. 심지어 H모드를 오픈하면 꿀물과 우유 대신 수상한 약이 등장했다. 시스템이 어떻든, 레벨 디자인이 얼마나 잘됐든 결국 헨타이 게임이었다. - P125
이후, 미움의 작은 포자 위에 사건의 빗방울이 하나씩 둘씩 내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문제는 핫키 팀의 인터뷰 요청 건 때문에 발생했다. 그들이 나를 데리고 인터뷰를 해 키코 피플 페이지에 올리겠다고 나선 거였다. 지저스. 그건 안 될 일이었다. - P126
. 오, 생각만 해도 오글거려 참을 수 없었다. 다양성 1답게갑자기 예술적 활력과 인문학적 감수성 어쩌고를 발휘해 주기를 바란 모양인데, 왜 이럴때만 다 죽어 가는 인문학에 연지곤지 찍고 싸구려 털부채 들려 급조한 예술 기술 통합콜라보 어쩌고 무대로 내보내려 드는 건지 아주 환장할 노릇이었다. - P128
내가 너무 완강하게 거부 의사를 밝히자 중간에 낀 팀장은 매우 난처해했다. 팀장은 엄청난 예스맨이었기 때문이다. 팀장은 입사 이래 위에서 내려온 것을 거절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그는 사내 모든 팀장들이 암묵적으로 오버해서 쓰는 팀 활동비를 풍성하게 남기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 P129
그러니까, 다시 아침. 영원히 아침. 늦잠과 버스 연착과 망할 날씨의 트리플 콤보가 쏟아지는 날. 나는 루프 소재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여러분의 일상이 루프물 아니던가요. - P130
어쨌든 그러든 말든 인트라넷과 메일과 메신저를 차례로 확인한다………… 공지 게시판에 제발 보안 좀 지키라며 으르렁거리는 글이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온다………… 늘 비슷한 내용이라 언젠가부터 읽어 보지도 않고 스크롤을 내려 버린다……… 왜 키코 인간들은 그렇게 커뮤니티며 SNS에 게임 정보를 흘리지 못해서 안달인 것인지 그 심리를 이해할 수 없다 - P132
물론 나 외에도 키코 스타일의 게임을 모르며, 못 하고, 안한다는 이미지를 가진 직원들도 있기는 있었다. 그럴 때 어떻게 하면 좋았을까? - P134
사실 처음에는 그 히메컷 무리가 나 같은 사람들일 거라고 착각했다. 정말로 게임을 모르고, 정말로 못 하는 사람들. 하지만 아니었다. 그 사람들은 게임을 진짜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 진짜 못 하는 게 아니라, 못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 P135
오메가 팀 근무 극초반에는, 그런 멍청함에도 일 앞에서 나의 얄팍한 자아를 버리지 못해 헤맸다. 감히 ‘창의적 아이디어 같은 것을 어떻게든 내놓아 보려고노력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팀장의 코털-수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길게 삐져나온-을 건드릴 수밖에 없었다. - P136
우리 친애하는 성격 파탄자 스티브 잡스 아저씨가살면서 크게 잘못한 게 두 가지 있다면, 직관이라는 단어를 유행시킨 것과 성격 파탄에 면죄부 크림을 살살 올린 특별한 이미지를 코팅해 놓은 것이다. - P137
난리를 쳐서 인터뷰를 거절한 이후 대놓고 삐쳐 버린 팀장과 점점 더 애매한 관계가 되어 가던 어느 날, 더욱 이상한 취급을 받게 될 각오를 하고 팀장에게 왜 모든 게임의 디폴트가전투인가요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팀장은 인간의 기본 심리에 대한 본인만의 말도 안 되는 개똥철학을 말보로 레드의쩐내와 함께 전파하다가 점점 구겨지는 내 표정을 보고 이야기를 한 단어로 정리했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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