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참여할 의향이 있다면 왜 지금 바로 공산당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오?」 어느 천치 같은 젊은이가 이렇게 썼다. 과거에 자주 참여했다가는 더 자주 물러서곤 했던 한 대작가(大作家)는 자신의 그런 행적을 잊어버리고는 내게 말했다. 「가장 나쁜 예술가는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예술가요. 소련의 화가들을 보시오 」¹
1) 《현대 Les Temps modernes》지(誌)가 1945년 10월에 창간되고, 거기에 실린 사르트르의 창간사가 정치적 참여의 이념을 내걸자, 좌우익에서 일제히 비판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중의 하나로 여기에서 말하는 〈대작가) 앙드레 지드는 그 창간사를 <야만을 향한 길>이라고 혹평하고 소련의 어용 예술이 상기된다고 했다. - P9
1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다. 우리는 회화와 조각과 음악도〈역시 참여시키려는>것이 아니다. 적어도 같은 방법으로 참여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 P11
. 메를로퐁티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잘 지적하고 있는것처럼, 의미가 전혀 배어 있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순수한 성질이나 감각이란 없다. - P12
지금까지 우리가 예술적 창조의 요소(要)들 자체를 두고 한 이야기는 그 요소들의 결합에 관해서도 똑같이 할 수 있다. 화가는 그의 캔버스에 기호를 그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을 창조하려는 것이다.²
2) exister를 편의상 <존재하다>로, ére를 <있다>로 번역했다. 전자는 초월과 생성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고, 후자는 그것 자체로서 고정되어 있는존재의 양태를 가리킨다. 달리 말하면, 각각 대자적(對自的), 즉자적(卽自的) 양상을 뜻한다. - P13
작가라면 독자를 인도(引)할 수 있다. 작가는 오막살이 한채를 묘사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거기에서 사회적 부정의 상징을 보게 하고 독자의 분노를 자아낼 수 있을 것이다. - P15
그렇지만 그 그림은 우리가 결코 완전히는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무엇을, 우리가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못다 표현할 그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P16
이와 반대로 작가가 다루는 것은 의미이다. 그러나 구별이필요하다. 왜냐하면 기호의 왕국은 산문이며, 시(詩)는 회화, 조각, 음악과 같은 편이기 때문이다. - P17
시 역시 산문과 같이 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런 생각을 하겠는가? 그러나 시는 산문과 똑같은방식으로 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시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보다는 차라리 시는 말을 섬긴다고 하고 싶다. 시인은 언어를 이용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 P17
. 헤겔식(式)으로 말하면, 그 경우 본질적인 것이된 사물 앞에서 이름은 비본질적인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시인은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지만 침묵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문제가 다르다. 시인은 말들을 괴상하게 결합해서 언어를 파괴하려고 해왔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 P18
그러나 화가가 색채에, 음악가가 소리에 주목하듯, 시인이말에 주목한다고 해서, 그가 보기에 말의 모든 의미가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다. 사실, 말에 언어적 통일성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의미밖에 없다. - P19
시인에게는 언어는 외적(外的) 세계의 구조이다. 이에 반해서말을 사용하는 사람은 언어적 상황 속에 처해 있고 말에 의해서 포위되어 있다. - P19
이렇듯 말을 세계의 모습의 <기호>로 사용할 줄 모르는 시인은 말에서 그런 모습 중의 하나의 <이미지>를 찾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가령 버드나무나 물푸레나무와 닮았다고 해서 시인이 선택한 언어적 이미지는 반드시 우리가 그런 대상을 지칭하는데 사용하는 말은 아니다. - P20
. 요컨대 시인에게는 언어가 온통 세계의 거울인 것이다. 그러자 말의 내적 구조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가 생긴다. 말의 음색, 장단, 남녀성(男女性)을 가리는 어미(語尾), 그 시각적인 양상 따위가 말의 육안(肉)을 이루고, 이 육안은 의미를 표현한다기보다도 표상(表象)>하는 것이다. - P20
금세기 초에 폭발한 언어의 위기는 시의 위기였다. 사회적, 역사적 요인이 어떤 것이었든 간에, 그 위기는 언어를 면대하여 작가가 일으킨 비인격화(非人)의 충격으로 나타났다.⁹
9)이 언어의 위기에 관해서는 뒤에서 (368-370쪽) 더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또한 주네론(論) Saint Genet, comédien ou martyr』에서도, 부르주아지가 순치한 언어의 의미를 타파하려는 시인들의 투쟁에 관해서 자세히이야기하고 있다(311쪽 이하). - P22
이제 작가는 이화감을 느끼면서(그것은 매우 풍요로운 이화감이었지만), 언어를 대했다. 언어는 이미 그의 소유물이 아니었고, 또한 그 자신의 본질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야릇한 거울에는 하늘과 땅과 그 자신의 삶이 반영되어 있었다. 마침내 언어는 사물들 그 자체가 되었다. - P23
예컨대 다음의 희한한 시구(詩句)를 보라.
오오 계절이여! 오오 성(城)이여! 흠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¹²
여기에서는 누가 질문을 받는 것도 질문을 하는 것도 아니다. 시인은 그 자리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물음은 대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아니 차라리 물음이 그 자체의 대답이라고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가짜 물음일까?
12) 랭보의 『지옥의 한 계절 Une Saison enenfer』에 나오는 시구이다. - P25
그러나 시인이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 과연 산문작가 역시참여의 피안에 설 수 있다는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들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는 것인가? 하기야 산문작가는 글을 쓰고 시인도 쓴다. 그러나 쓴다는 이 쌍방의 행위 사이에는 글씨를 쓰는 손의 움직임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 P27
작가란 <발언을 하는 사람parleur>이다. 그는 지시하고 설명하고 명령하고 거절하고 질문하고 탄원하고 모욕하고 설득하고 암시한다. - P27
산문이라는 기술(技術)의 행사는 담론(談論)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 소재는 당연히 의미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말들은 애초에 대상이 아니라 대상의 지시자이다. - P28
산문은 무엇보다도 정신의 한 가지 태도이다. 발레리 Valéry식으로 말하자면, 햇빛이 유리를 거쳐 통과하듯이,¹⁷ 말이 우리의 시선을 스쳐서 지나갈 때에 산문이 있는 것이다.
17) 원문에는 comme le verre (passe) au travers du soleil(유리가 햇빛을 통과하듯이)로 되어 있으나, comme le soleil (passe) au travers du verre(햇빛이 유리를 통과하듯이)라고 뒤집어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 P28
이렇듯 산문이 어떤 기도를 위한 탁월한 도구 이외의 다른것이 아니라면, 말을 초월적인 입장에서 관조(觀照)할 수 있는것은 오직 시인의 경우뿐이라면, 우리는 산문가에 대해서 우선다음과 같이 물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당신은 무슨 목적으로글을 쓰는가? 당신은 어떤 기도로 나선 것인가? 그리고 그 기도는 어떤 이유에서 글쓰기라는 수단을 필요로 하는 것인가?」 - P29
더구나 기도의 제2차적 기능인 <언어적 계기>만을 따로생각해 볼 때, 문체 지상주의자들이 저지르는 중대한 과오는, 말이 사물들의 표면에서 살랑거리는 미풍과도 같아서, 사물들을 살며시 스칠 뿐, 결코 그것에 무슨 변화를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그리고 화자(話)란 오직 자신의 무해한 관조를 말로써 요약하는 순수한 <증인>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 - P30
인간이란 그의 앞에서는 어떤 것도, 심지어 신(神)조차도불편부당성을 지킬 수 없는 그러한 존재이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어떤 신비주의자들이 잘 본 바와 같이, 신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상황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또한 상황을 바꾸지 않고서는 상황을 볼 수조차 없는 존재이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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