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의 이란-콘트라 스캔들은 세계사의 과거 수 세기 동안 흔히 사용된 쿠데타 방식이 아닌 합법적 선거로 선출된 공모자가 시민의 권리를 침해한 음모였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음모론자들이 품어온 우려가 구체화된 사례다. - P67

2010년대에는 2016년 대통령 선거 준비 기간의 광기로는 충분치 않다는 듯이 선거 기간과 트럼프 당선 후 기이한 음모론이 속속 등장했는데, 그중 하나는 트럼프의 유세 현장에서 지지자 중 일부가 ‘Q‘와 ‘QAnon‘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다는 음모론이다. - P68

또한 이런 음모론은 2016년 ‘피자게이트Pizzagate‘ 음모론으로 이어졌는데, 이 음모론의 주창자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힐러리가 피자 가게에서 아동 성매매 사업을 하고 있다는 황당한 주장을 펼쳤다. 터무니없는 소리 같지만 피자게이트 음모론을 믿은 한 젊은남자가 변태 행위를 척결하겠다며 AR-15 소총으로 한 레스토랑 가게를 난사했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지만 음모론적 망상의 힘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 P69

거짓은 진보를 가로막을 수 없다

탈진실 시대의 진실스러움에 대한 진실

마이클 셔머 Michael Shermer


어휘는 생각을 구체화한다. 따라서 사전학자들은 어휘의 용법과 의미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추적한다. 그 속에는 문화적 동향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 P151

2017년 1월 22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후, 그의 선임고문인 켈리앤 콘웨이 Kellyanne Conway는 NBC <밋 더 프레스Meetthe Press>에 출연해 백악관 대변인 션 스파이서 Sean Spicer가 취임식관람객 규모에 대해 잘못된 진술을 한 것을 옹호하며 ‘대안적 사실‘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후략).³ - P151

3 Interview with Kellyanne Conway. January 22, 2017. NBC Meet the Press. https://nbcnews.to/2wjC7bB - P164

그해 독일의 언어학자들은 대안적 사실을 ‘올해의 비언어‘로뽑았다. 이후 ‘가짜뉴스fake news‘라는 용어는 한 해 동안 사용량이 365퍼센트 증가하며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다. - P152

우리는 정말로 진실스러움, 가짜뉴스, 대안적 사실로 대변되는 탈진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가? - P152

하버드대학교의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스켑틱> 21호에 기고한 글 ‘탈진실을 넘어 사실의 세계를 향하여‘에서 왜 그렇지 않은지 설명한다. (중략). "우리는 탈진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라는 문장은 참인가? 만일 그렇다면 이 말은 진실일 수 없다." 다시 말해 당신이 이 말이 참이라고 주장한다면 당신은 논증을 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당신이 이말이 참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기 위해 고심한다는 뜻이고, 따라서 우리는 탈진실의 세계에 속해 있지 않다는 뜻이다.  - P152

정치적 프로파간다로서의 탈진실은 분명 진실이 이용(또는 오용)되는 한 가지 방법으로 핑커와 나 또한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매킨타이어는 핑커(그리고 그 외 다른 사람들)의 탈진실에 대한 주장을 (1) 진리는 중요하지 않으며, (2) 진정으로 진리를 신경 쓰는 사람은 더 이상 아무도 없고, (3) 아무도 진리를 찾을 수 없으며, (4)이 시대가 정말로 탈진실의 시대라면 우리는 그냥 다 포기하는 편이 낫다는 주장으로 일축하며 핑커가 허수아비 때리기를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 P154

 한나 아렌트가 썼듯이 어떤 사람들은 분명 사실과 허구,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중략). 그러나 사람들이 실재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 정말로 사실인가? 이들은 다른 정치적 노선을 지지하고자 사실을 왜곡해서 보고 있는 건 아닐까? - P154

언론인인 캐머로타는 범죄율의 장기적인 감소에 주목하고 있지만, 정치인인 깅리치는 사람들이 범죄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에 호소하여 지지자를 결집하려 한다. 깅리치는 시카고 · 볼티모어 · 워싱턴 등 최근 범죄율이 치솟은 도시들의 통계를 인용했고, 이 수치가 사실임을 캐머로타도 인정했다. 두 사람이 인용한 통계는 모두 사실이며, 따라서 최근에 등장한 탈진실스러움의 사례로는 볼 수 없다.  - P156

그보다는 1940년대 이후 등장한 추억의 ‘스핀 닥터**‘가 탈진실스러움에 더 가까운 사례다.


** 정부의 입장과 정책을 국민들에게 설명하는 대국민 언론 담당자. 어떤 사안에대해 정부에 자의적으로 유리한 해석을 내리는 사람을 이르기도 한다. - P156

탈진실이란 개념조차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옥스퍼드 사전》은 탈진실이란 단어의 연대를 199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P157

즉 탈진실스러움이란 별로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소셜미디어를 통해 가용성 편향이 최대치로 증폭됨에 따라 2016년 ‘탈진실‘이란 단어는 그 이용 빈도가 이전 해에 비해 2000퍼센트 급증했고 《옥스퍼드 사전》이 선정한 올해의 단어가 되었다. 《옥스퍼드 사전》은 이 단어를 "여론의 형성에 있어서 감정이나 개인적인 신념에 대한 호소보다 객관적 사실의 영향력이 더 낮은 상황을나타내거나 그와 관련된 단어"로 규정했다. - P159

사전 편집자들이 탈진실 언어가 급증했다고 염려하고 정치 전문가들은 진실의 종말을 고하며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공화국이라고 선언하는 오늘날, 사상의 인터넷은 비이성의비자유주의자들에 대항하기 위한 도구로서 ‘실시간 사실 확인‘을이용해왔다. 정치인들이 연설 중 낡고 오래된 스핀 닥터 기술을 이용해 진실을 이용하려 들면 팩트체커들이 그 연설에서 오류와 거짓말을 추적하고 진실, 대부분 진실, 반쯤 진실, 대부분 거짓, 순거짓말 중에서 등급을 매긴다. - P160

인지과학자 위고 메르시에Hugo Mercier는 2020년 저서 《어제 태어나지 않았다Not Born Yesterday》에서 제이슨 브레넌Jason Brennan의 《민주주의에 반대한다Against Democracy》를 인용하며 "인간은 속기 쉽고 인간의 뇌는 진실을 추구하도록 배선되어 있지 않으며 지나치게 권위에 의존하고 획일적인 의견에 굴복한다는 생각에 반하는 증거"가 무수히 많다고 말했다. - P160

 메르시에가 말하듯이 "기본적으로 우리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접하면 그것에 저항하는 태도를 취한다. 다른 적절한 단서가 없을 때 그 아이디어가 우리의 선입견이나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의도와 맞지 않으면 우리는 그 아이디어를 거부한다. 인간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신중히 지속된 신뢰, 명확히 입증된 전문성 그리고 건전한 논증이 필요하다."²¹ - P161

21 Mercier, Hugo. 2020. Not Born Yesterday: The Science of Who We Trust and WhatWe Believe.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57, 270-271. Quotes fromrennan are in: Brennan, Jason. 2019. Against Democracy, Princeton, NJ: PrincetonUniversity Press, 8. - P165

메르시에는 왜 잘 속는 동물은 진화할 수 없었는지를 보이며책을 시작한다. - P161

메르시에는 히틀러와 관련해서도 대부분의 독일인이 나치 이념과 나치 정권이 제시한 대부분의 강령을 수용한 것은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를 제시한다. - P162

사람들은 흔히 "어떻게 그토록 많은 지적이고 교양 있는 고학력의 독일인이 나치가 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정답은 "대부분은 아니다"이다. 소련이나 북한과는 달리 나치 정권은 ‘다원적 무지pluralistic ignorance‘ 위에 세워졌다. 다원적 무지란 어떤 사안에 대해자기 자신은 그것을 믿지 않지만 집단 내 다른 구성원이 그것을 신뢰할 것이라는 믿음을 말한다.  - P163

과학자는 어떻게 가설을 만드는가

전주홍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생리학교실


과학에서 가설의 중요성은 이미 여러 과학철학자가 지적한 바 있다. 칼 포퍼 Karl Popper는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에서 시험할 가설이 없다면 자연을 적절하게 관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 P177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과학자에게 가설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어딘가 불편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대개 과학자들은 개별 가설들의 타당성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가설 그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고민해볼 일이 잘 없기 때문이다. - P177

무엇을 설명하려 하는가

가설은 과학 연구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가설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연구 목적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과학 연구는 측정결과를 바탕으로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의생명과학에서 말하는 설명은 법칙보다는 기계론 혹은 기전mechanism에 근거한다.² - P178

2 Bechtel & Abrahamsen. Explanation: a mechanist alternative. Stud Hist Philos Biol Biomed Sci. (2005) 36, 421-441 - P194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은 용어나 개념을 정의하는문제는 대개 철학의 영역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⁵ 실험실에서는 가설, 설명, 기전, 인과관계, 환원주의라는 개념이 서로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지만 이 개념들을 명료하게 정의하고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 P178

5 Machamer et al. Thinking about mechanisms. Phil. Sci. (2000) 67, 1-25; CraverCF, Darden L. Mechanisms in biology. Introduction. Stud Hist Philos Biol BiomedSci. (2005) 36, 233-244: Allen GE. Mechanism, vitalism and organicism in latenineteenth and twentieth-century biology: the importance of historical context. Stud Hist Philos Biol Biomed Sci. (2005) 36, 261-283; Nicholson DJ. The concept of - P194

학술지에 투고한 논문이 거절될 때 흔히 접하는 심사 의견 중의 하나가 "기계론적이지 않고 너무 기술적descriptive이다"라는 것이다.⁷ - P178

7 기술적인 것과 기계론적인 것을 구분하는 뚜렷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나 학술지 편집진도 이런 용어의 개념을 명료하게 정의하여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맥락적 이해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의생명과학에서 물리적 정체나 실체를 밝혔던 연구는 대부분 기술적인데, 이는 세포막의 조성이단백질과 지질로 구성되었거나 염색체가 핵산과 단백질로 구성되었음을 밝힌 연구를 떠올리면 금방 이해될 것이다.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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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음모론을 믿는가

마이클 셔머 Michael Shermer


2019년 3월 15일 금요일, 한 오스트레일리아 남성이 총 다섯 자루를 들고 크라이스트처치 지역의 이슬람 사원 두 곳에 들이닥쳤다. (중략).
테러범 브렌던 해리슨 탤런트Brenton Harrison Tarrant의 선언문 또한 백인 우월주의 음모론으로 채워져 있는데 "출산율이 문제다"라는 문장을 세 번이나 반복하며 시작한다. (후략). - P59

사람들은 왜 음모론을 믿는가


그렇다면 음모conspiracy란 무엇이며 음모론conspiracy theory 과는 어떻게 다를까? 나는 음모를 ‘둘 이상의 사람이 비도덕적 또는 불법적으로 남들을 이용하거나 해치기 위해 비밀리에 행하는 모의나 행동‘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음모를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음모에 대한 구조화된 믿음‘으로 정의하는 음모론과 구분한다. 음모 이론가 또는 음모론자는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가능한 음모에 대해 음모론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 P62

음모론은 누가 믿는 걸까? 정치학자이자 음모론 연구자인 조지프 우신스키 Joseph Uscinski와 조지프 패런트Joseph Parent에 따르면 음모론자는 "성별, 나이, 인종, 소득, 정치적 성향, 교육 수준, 직업상의 지위와 별로 관계가 없다." - P63

인종은 대체로 음모론 신봉에 대한 예측 변수가 아니지만, 인종에 따라 받아들이는 음모론의 종류는 대체로 다르다. (중략).
반면 교육은 음모론적 사고를 약화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는 사람의 42퍼센트는 음모론을 믿는 성향이 강한 반면, 석사 학위 소지자는 전체의 22퍼센트만이 음모론을 믿는다. - P63

인지 편향과 불안한 감정


이와 더불어 음모론을 믿는 또 다른 요인으로 세 가지 인지 편향을 들 수 있다. 첫 번째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으로 현재 자신의 믿음을 지지하는 증거만 받아들이고 그와 반대되는 증거는 무시하거나 재해석하는 경향이다. (중략). 두 번째는 사후과잉확신편향hindsight bias으로 이미 일어난 결과에 설명을 짜 맞추는 경향을 말한다. (중략). 세 번째는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로 동시에 모순된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나타나는 정신적 긴장이다. (후략). - P64

환경을 통제하거나 지배할 수 있다는 감정은 불안을 줄이지만, 반대로 통제력을 잃을 수 있다는 걱정은 불안과 음모론적 망상에 불을 지필 수 있다.  - P65

사실로 밝혀진 음모들

연구자들이 대체로 무시해왔지만 사람들이 음모론을 믿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종종 음모가 사실로 밝혀진다는 점이다. 음모론자들은 진실인 음모론도 적지 않으므로 실제로 음모의 희생자가 되기 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편이 낫다고 본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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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민주주의의
한계

미국 대통령 선거 몇 주 전에 서로 다른 형태의 포퓰리스트 저항세력이 단일한 기치 아래 뭉쳤다. ‘미국 대통령 선거의 마지막 국면에서 무장 민병대 집단이 음모론자 및 백신 거부자 집단과 연합했다. 이들은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사기라고 주장하며, 선거일을 앞두고 말썽을 빚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다. 반정부와 반反과학을 선동하는 주동자들은 주말에 가장 큰 규모의 민병대 집단 중 하나의 설립자와 합류하여 힘을 합쳤다.‘*

* 「미 민병대가 선거를 앞두고 음모론자들과 손을 잡다. US militias forge allianceswith conspiracy theorists ahead of election", theguardian.com>, 2020년 10월 14일. - P143

(전략).

이런 관점에서 보면 폭력으로의 비약은 정말 손쉽게 일어난다. 2020년 10월, FBI는 우익 민병대 집단이 미시건 주지사 휘트머Gretchen Whitmer를 납치해서 위스콘신에 있는 보안 장소로 데려가려고 계획했다고 폭로했다. 거기서 휘트머는 ‘반역죄‘로 일종의 ‘인민재판‘을 받게 될 터였다. 민병대 집단에 따르면 휘트머는 주지 - P145

새로운 포퓰리스트 우파는 수십 년 전에 분명 극좌파 ‘테러리스트‘ 집단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절차들을 접수하고 있다. 물론 이는 두 ‘극단‘이 어떤 식으로든 일치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 P146

트럼프 자신은 여기서 양면적인 게임을 벌이고 있다. 폭력 사태와 음모론을 선동하는 급진 우파 집단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트럼프는 이 집단의 일반적인 애국적 태도를 칭찬하면서 문제적 측면과는 형식적으로 기꺼이 거리를 두고자 했다. 이 거리두기는 물론 공허하며, 순전히 수사적 태도다. - P147

게다가 이런 추세는 미국에서만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유럽 언론을 장식하는 표제 기사를 그냥 한 번 훑어보기만 해도 된다. - P148

 좀 더 일반적 차원에서 의회민주주의 개념에 내재한 모종의 긴장도 눈에 띈다. 민주주의는 두 가지 사항을 뜻한다. ‘인민의 권력‘(다수의 실질적 의지가 국가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선거 메커니즘 자체에 관한 신뢰다. - P148

(전략). 이 두 가지 차원이 조화를 이루지 못할때 문제가 생겨나며, 좌파와 우파는 모두 종종 인민의 실질적 의지가 선거의 형식성에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P149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비중립성은 위기나 무관심의 순간. 대중이 실질적으로 원하거나 생각하는 것을 민주적 시스템이 반영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드러낼 때 선명하게 감지된다.  - P150

요컨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위기는 십 년이 훨씬 넘게 지속된 것이고,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은 그 위기를 어느 한도 이상으로 폭발시켰을 뿐이다. 그래서 해결책은 분명 모든 소수 의견을 좀더 포괄하는, 모종의 더 ‘진정한‘ 민주주의‘에 있지 않다. - P151

직접적 폭력은 대체로 혁명적이기보다 보수적이며, 좀 더 근본적 변화의 위협에 맞선 반작용이다. 하나의 시스템이 위기를 맞으면 자체의 규칙을 어기기 시작한다.  - P152

한나 아렌트는 일반적으로 폭력적 분출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자체의 모순들로 인해 이미 수명이 다한 사회에서 새로운 사회를 낳기 위한산통이라고 말했다. - P152

 하지만 폭력이라는 ‘산통‘ 없이는 권력의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이양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이고 싶다. - P152

그렇지만 오늘날 이 긴장을 야기한 주체는 우파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오늘날 좌파의 임무는 오카시오-코르테스Alexandria Ocasio-Cortez가 지적했듯,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구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 P153

(전략). 트럼프와 그가 남긴 유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과제는 (그가 2024년에 귀환할 가능성을 열어두면서)그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념을 죽이는 일이다. 그래서 그를 그의 모든 쓸모없는 허영과 비일관성과 함께 낱낱이 드러내는일이다. - P154

 다시 한번 헤겔적 비유를 들자면, 그의 이념을 죽이는 일은 그를 자신의 이념으로 이끄는 일, 다시 말해 그를 내재적으로 파괴하는 일을 뜻한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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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냥 보러 나왔어요."
흑인 여자 하나가 말했다. 또 다른 흑인 여자는 울기 시작했다. (중략).
"아니 저 여자를 위해 눈물을 흘려? 저 여자가 언제 우리를 위해울어준 적이 있어? 어디 말해 봐!"
나도 이제 고개를 돌렸다. 우리 집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하늘은 황혼이 지는 것같이 노랗고 빨간색으로 물들었다. 다시는 쿨리브리를 볼 수 없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모 - P62

"이모, 서랍 속에서 리본으로 묶인 내 땋은 머리를 찾아냈어요. 처음에는 뱀인 줄 알았어요."
"네 머리칼을 잘라야 했단다. 네가 계속 아팠어. 그러나 이젠 나와 함께 있으니 안전해. 내가 우리는 모두 안전하리라고 말했었지? 침대에서 몸조리를 해야 한다. 왜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니? 네 머리는 잘 자랄 거다. 더 길게, 그리고 숱도 더 많아질 거야." - P63

"피에르는 죽었지요?"
"피에르는 여기로 오는 도중에 죽었단다. 가엾은 녀석."
‘그 전에 죽었어요.‘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 피곤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 P64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날이었다. 나는 크리스토핀과 함께 가겠다고 졸랐다. 내 몸이 아직 성치 못한 때문인지 어른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허락했다. 마차를 타고 가는 도중 멍하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던 내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 P65

 어머니가 나를 어찌나 꼭 껴안으시던지나는 숨을 쉴 수도 없었다. ‘이건 내 엄마가 아니야.‘ ‘아니야, 엄마가 맞아. 틀림없는 내 엄마야.‘ 어머니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셨고, 그러고는 또 문 쪽을 바라보셨다. 나는 감히 "피에르는 죽었어요." 라고 말할 수 없어 고개만 가로저었다. - P66

수녀원으로 가는 날 나는 코라 이모를 꽉 껴안고 놓지 못했다. 인생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그 인생에 죽어라고 매달리듯이 나는 그날 이모에게 죽어라고 매달렸다. - P66

"저 미친 계집애를 좀 보라지. 네 엄마처럼 너도 미쳤지? 네 이모가 너를 왜 수녀원에 보내는지 알아? 너를 집에 두기가 무서운거야. 수녀님들이 너를 수녀원에 가두어두라고 보내는 거란다. 네 엄마는 미쳐서 신발도 양말도 안 신고, 게다가 속바지도 안 입고돌아다닌다며? 네 양아빠를 죽이려 했고 네가 시골집으로 찾아갔을 때는 너도 죽이려고 했다더라. 네 엄마 눈도 네 눈도 유령의 눈이야. 왜 나를 똑바로 못 보는 건데?"
괴상하게 생긴 남자아이가 말했다. - P68

나의적 빨강머리 소년이 담장을 따라 저쪽으로 뛰어가는 게 보였다. (중략). 단지 초인종만 정신없이 눌러댔다.
드디어 수녀원 대문이 열렸고, 흑인 수녀님이 고개를 내미셨다. 그러나 수녀님은 기분이 상하신 모양이었다.
"초인종을 그렇게 눌러대서는 안 된다. 나도 벨 소리를 들으면최대한 빨리 달려오는 거란다."
나는 등 뒤로 육중한 수녀원의 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을 수있었다. - P69

"무슨 일이니? 왜 우는 거야? 무슨 일이 생긴 거니?"
그러나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수녀님이 내게 우유 한 잔을 가져다주셔서 마시려 했지만 목이 메어 넘어가지 않았다. - P70

"우리가 저스틴 원장 수녀님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라임주스 원장님이라고 해. 별로 머리가 좋은 분은 아닌 것 같아. 너도 알게 될 거야." - P71

(전략).
저스틴 원장님은 단조로운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테오필루스, 여기 제가 장미를 한 송이 가져왔어요. 당신은 믿지 않는 그리스도, 나의 영원한 배우자의 정원에 피어 있던 꽃이에요. 테오필루스는 침대 곁에 둔 장미가 전혀 시들지 않는 것을보고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 P72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모욕하는 것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모욕하는 것과 같아요. 그들이 바로 주님께서 선택하신 분들이시니까요."
원장님은 지나가는 말처럼 아주 형식적으로 이 말씀을 하시고는 질서정연한 삶과 정조관념으로 주제를 바꾸셨다 - P73

이제 크리스토핀도 우리를 떠나 아들과 살고 있기 때문에 어머니의 근황에 대해 말해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 P75

모든 것은 밝음 아니면 어둠으로 나뉘어 있었다. 수도원의 벽들, 정원에 피어난 꽃들의 선명한 색깔들, 수녀님들의 흰 제의. 이런 것들이 모두 밝음에 속한다면, 수녀님들이 쓰신 베일, 허리로부터 길게 늘어뜨린 묵주 끝의 십자가, 나무의 그림자, 이것들은 모두 어둠이다.  - P77

기도를 하다가 신기한 생각이 떠올랐다. 기독교에서는 왜 죄가되는 것이 그리도 많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또 죄가 아닌가? - P77

내가 수녀원에 살던 약 십팔 개월 동안 메이슨 씨가 가끔 나를보러 오셨다. 그는 먼저 원장 수녀님과 면담을 했고, 나는 저녁을 먹으러 가거나 친지를 방문하기 위해 옷을 차려입은 후 응접실에서 기다렸다. (중략).
마지막으로 나를 보러 오셨을 때는 무언가가 좀 달랐다. 나는 응접실로 들어서자마자 변화를 금세 알아차렸다. - P78

"거기 말고, 당분간은 자메이카에서 같이 살자. 나하고 네 이모하고, 코라 이모가 드디어 고향으로 온단다. 영국에서 한 번 더 겨울을 지냈다가는 죽을 거라고 하더라. 그리고 리처드도 함께 살자. 일생 동안 수녀원에서 숨어 살래?"
‘그러면 왜 안 되는 거지?‘ 나는 생각했다. - P78

우리가 수녀원 대문을 막 빠져나가려고 할 때 메이슨 씨는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내가 영국 친구 몇 명에게 다음 겨울은 자메이카에서 보내자고 말해 놨다. 너도 심심치 않고 좋을 것 같아서."
"여기로 올까요?"
나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한 명은 분명히 와. 그건 확실해."
메이슨 씨의 웃는 모습 때문이었을까, 나는 혼란과 슬픔. 그리고 상실감에 목이 메었다. - P79

그들은 안전하다. 수녀원 ‘밖‘의 세상이 어떠한지 그들이 무얼 알겠는가?
내가 두 번째 꿈을 꾼 것은 바로 이때였다. - P80

이제 마리 오거스틴 수녀님이 나를 기숙사의 침실에서 데리고나오신다. 내게 어디 아프냐고 물으시고, 다른 친구들이 자고 있으니 방해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아직도 몸을 벌벌 떨면서 혹 수녀님이 나를 그 신비한 커튼 뒤 당신의 침대로 데려가시려는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착각이다. - P81

이제 어머니와 나의 꿈이 한데 섞이고 있었다.
어머니가 나닥나닥 기운 옷을 입고 빌린 말을 탄 채 돌을 깐 길위에서 내게 손을 흔들고 계신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 나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중략).
"너는 그런 인생의 수수께끼에 관심을 두지 마라. 악마가 왜 아직도 활개를 치고 있는지 누가 알겠니. 아무도 모른단다." - P82

제2장

그랑부아



그래, 이제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전진과 후퇴*도, 의심도 주저도, 좋든 나쁘든 간에, 어쨌든 모든 것은 끝이 난 거다. 

* ‘로체스터의 서술로 시작하는 2장은 ‘성의 정치학‘ 안에서 발생하는 남녀의 갈등은 물론, 제국과 식민지, 흑인과 백인, 자연과 문화, 자연신앙과 기독교, 본능의발산과 절제 등 양극을 이루는 가치관들이 대립하는 장이다. ‘전진과 후퇴‘는 전투 용어로서 그 갈등의 심각성을 예고한다고 할 수 있다. - P85

옆으로 기울어 슬픈 모습을 한 야자나무며 해안 자갈밭 위로 끌어올려진 고기잡이배들, 삐뚤빼뚤하게 늘어선 흰 오두막집들을 바라보며 나는 이 동네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매서커 (대학살)라고 해요."
"여기서 노예들이 학살을 당한 모양이지?"
"네? 아니에요."
충격을 받은 목소리다.
"노예라니요. 절대 아니에요. 아주 옛날에 일어난 일인가 봐요.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요." - P86

"카로구나."
앙투아네트가 말했다.
"맞아, 카로, 캐롤라인이야."
앙투아네트가 손을 흔들자 그 여인도 손을 흔들었다. 꽃무늬가 화려한 밝은 색 옷에다 머리에는 줄무늬 수건을 매고 금귀고리를 단 이 늙은 인간은 야하고 품위 없어 보였다.
"옷이 젖지 않겠소?"
내가 말했다.
"아니요. 비가 그쳐가는데요. 뭐" - P87

(전략).
그는 자기의 이름이 영 불(젊은 황소)이며, 나이는 스물일곱이라고 말해 주었다. 또 다른 짐꾼의 이름은 에밀이고,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했다.
"몇 살이냐고 저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영불이 슬쩍 말했다. 에밀이 확실하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열네 살인가? 네, 맞아요. 열네 살이에요."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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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그런데 우리는 열네 살에 무엇을 믿었던 걸까요? 우리의 우정과 형제애, 우리 나라와 우리의 독립이었습니다. 우리는 만일 부름을 받는다면 피로 맺어진 의형제들과 조국을 위해 우리 자신을 희생할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우리가 어떤 식으로 부름을 받게 되고 무엇이 될지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 P68

 설사 사정상 우리가 죽음으로 형제애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다 해도, 나는 만과 내가 당연히 대가를 치르리라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 P68

3장


(전략). 내가 ‘우리가 나 우리에게‘라고 말할 때,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물으셨습니다. 파견된 스파이로서 첩보 활동의 대상인 남쪽 군인들이나 철수자들을 나 자신과 동일시하는 순간들에 그렇게 불렀던 겁니다. 그 사람들, 나의 적들을 ‘그들‘이라고 불러야하지 않을까요? - P70

독신 생활은 ‘잡종 새끼‘로 사는 데서 비롯된 뜻밖의 혜택들 중 하나였습니다. 나는 대부분의 가족들에게 그리 대단한 신랑감으로여겨지지 않았으니까요. 혼혈 혈통의 딸이 있는 가족들조차 나를 환영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대개 딸 자신이 순수 혈통인 누군가와 결혼해 사회적 신분 이동이라는 엘리베이터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려고 미친 듯 날뛰었기 때문입니다. - P71

나는 직업 매춘부들의 전문가 기질에 변치 않는 존경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정행위를 변호사들보다 더 솔직하게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시간 단위로 청구서를 발행하기는 피차일반인데 말입니다. - P72

(전략). 하지만 수도와 교외 도시들에 있는 매춘부들의 70~80퍼센트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중략). 대부분은 열아홉 살 먹은 미군 병사의 음모에 붙은 진드기처럼 살며 달리 생계를 꾸릴 수단이 없는 가난하고 글도 모르는 시골 아가씨들이었습니다. 이런 미군 병사는 바지가 물가 상승을 유발할 지폐 한 뭉치로 불룩하고, 젊은 뇌는 아시아 국가에 오는 수없이 많은 서양 남자들을 괴롭히는 황열병*으로 부푼 채 놀랍고 기쁘게도 젖가슴이 녹색으로 물들어 있는 이 세계**에서 최소한 여성에 관해서는 자신이 더 이상 클라크 켄트가 아니라 슈퍼맨임을 깨달았습니다.


* 진짜 황열병이 아니라 중의적으로 동양 여성에 대한 욕망을 의미하는표현.
** 달러 지폐가 녹색임을 빗댄 표현. - P73

여러 해 동안 수영장은 내내 미국인 전용 구역이었습니다. 다른 나라 백인들과 국제 통제 및 감독위원회(ICCS)의 인도네시아인들, 이란인들, 헝가리인들, 폴란드인들을 위한 출입도 있었지요. 우리 나라에는 두문자어들이 득시글거렸습니다. "똥을 제어할 수는 없어(I Can‘t Control Shit)."라고도 알려진 ICCS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 P78

(전략). 활주로 어딘가에서 다시 한번 폭발이 일어나 흥분을 극도로 고조시켰습니다. 남자들, 여자들, 그리고 아이들이 훨씬 더 새된 소리로 아옹거리듯 아우성쳤습니다. 선회하던 비행기가 문에서 불길이 아니라 오로지 암흑만 내다보이는 각도로 갑작스럽게 멈춰서 버리자 한 남자가 악을 쓰며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게 될 거야! - P85

여행 가방들은 잊혀 버렸고, 남아 있는 엔진 두 개에서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나오는 후류*에 어린아이들은 발을 딛고 서 있기 힘들 지경이었고 어른들도 휘청거릴 정도였습니다.


* 비행기가 작동할 때 프로펠러 뒤쪽에 생기는 바람 - P86

나는 그의 증오를 살 만했습니다.  - P87

(전략). 이 대목에서 나는 좌우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마땅한 대가를 치렀을 깔끔한 집을 가리켰습니다. 회벽에는 도마뱀 붙이 몇 마리와 장식품 몇 개가 군데군데 붙어있었습니다. 시계, 달력, 중국풍 족자, 그리고 전성기의, 즉 자신이 대통령이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라고 믿는다는 이유로 암살되기 이전의 옹오딘지엠*의 컬러사진 등등이요. 


* 1954년 미국의 지원으로 총리가 되었으며 1956년 국민투표로 공화국을 선포하고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해 지주층과 군경 세력을 기반으로 강력한 반공정치를 펼쳤으나 독재와 부패 등의 이유로 민심을 잃고, 1963년 부하 장군들이 일으킨 쿠테타로 처형되었다. - P88

(전략). 그러니 제발 제 후원자가 요청하는 호의에 대한 작은 감사 표시를 당신께 전할 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중략) 하지만 차관보가 맞다고 대답했을 때, 나는 남아 있는 현금 4000달러가 든 봉투를 꺼내 보여 주었는데, 그가 관대하다면 비자 두 장을 얻기에는 충분한 액수였습니다. - P89

하지만 관료에게 종이는 절대 그냥 종이가 아니었습니다. 중에는생명이었죠! 차관보는 그 순간 자기 종이를 가져간다는 이유로 나를 증오했고 이 순간에도 나를 증오했지만,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콘크리트 칸막이에서 웅크리고 있을 때 내가 괴로웠던 건 또시 비참하게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 P90

카튜샤 로켓탄이 하나씩 혹은 일제히 계속 날아오고 있는 동안, 비행기가 곧게 뻗은 활주로를 목표로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을 때, 장군과 탑재물 관리 책임자는 경사로에 서서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전력질주를 하고 있어서, 폐가 뻣뻣하게 죄어드는 듯했습니다. - P94

비행기가 활주로를 따라 질주하기 시작하자, 장군은 나를 내 무릎 부위까지 잡아당긴 다음 짐칸으로 질질 끌고 갔고, 뒤에서 경사로가 올라갔습니다. (중략). 문가에 M-16을들고 서 있던 승무원이 재빨리 세 발을 연달아 발포했습니다. - P95

4장

우리가 괌에 착륙한 직후에 녹색 구급차가 시신들을 실어 가기 위해 도착했습니다. 나는 덕을 들것에 내려놓았습니다.  - P96

 우리는 트럭에 실려 아산 기지*로 가는 내내 눈물을 흘렸는데, 장군 덕에 늦게 온 다른 사람들에게 할당된 텐트에 비해서는 아주 쾌적한 막사를 얻었습니다. 

*미국령 괌의 서부 해안가 마을에 위치한 미 해병대 기지. 1975년 4월에서 11월까지 남베트남 난민들을 위한 난민 수용소로 사용되었다. - P96

나는 장군의 가족과 막사 안의 백여 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헬리콥터들이 사이공의 지붕들 위로 내려앉고 난민들을 항공모함 갑판으로 철수시키는 수치스러운 영상들을 보았습니다. 이튿날, 공산당 군대의 탱크들이 대통령궁의 정문을 박살내고 들어간 후 군인들이 대통령궁 지붕 위로 민족해방전선**의 깃발을 올렸습니다.


** 베트남민족해방전선. 1959년 설립된 남베트남의 반정부 게릴라 정치단체. - P97

모든 종류의 학대를 감내하도록 훈련 받은 병사들 사이에서 격려라는 비료를 뿌리기란 무척 쉬운 일이었지만, 난민들은 대부분 민간인들이라는 점을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겁니다. - P98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린의 피로 얼룩이 지는 바람에 운 좋게도 군복을 입고 있지 않았습니다. 군복을 벗고 배낭에 있던 마드라스 셔츠와 치노 바지로 갈아입었지만, 장군은 비행장에서 자기 짐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여전히 옷깃에 별을 달고 있었습니다. - P98

노파가 슬리퍼로 장군의 턱을 후려쳤고, 그녀 뒤에서, 반대편에서, 우리 뒤에서, 젊었든 늙었든, 튼튼하든 허약하든, 여자들이 신발과 슬리퍼, 우산과 지팡이, 햇빛 차단용 모자와 원뿔형 모자를 들고나섰습니다. 내 아들은 어디 있어? 내 아버지는 어디 있지? 내 오빠는 어디 있어? - P99

 어차피 이 숙녀들은 악을 쓰며 욕설을 퍼붓기를 선호하며 귀담아 듣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장군과 나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여자들을 헤치고 나아가 몸으로 그를 감싸고 더 많은구타와 침 덩어리들을 받아 내다가 마침내 그를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 P100

장군님-
입 닥쳐! 장군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만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결코 다시는 이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이 일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 P101

(전략). 이번에는 진짜 창문이 있고 진짜 좌석이 배정된 여객기를 타고서요. 우리에겐 또 다른 난민 수용소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곳의 한층 수준 높은 생활 편의 시설은 우리가 이미 아메리칸 드림으로 불리는 사회적, 경제적 신분 상승으로 이익을 얻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괌에서 대부분의 난민들이 해병대원들이 급하게 세운 텐트에서 지냈던 데 반하여 여기에는 우리 모두에게 막사가 있었습니다. - P102

그리운 고모님. 나는 그녀가 내 당고모인 양 편지를 썼습니다. 이렇게 오랜만에 고모님께 전하는 편지의 첫 문장부터 끔찍한 일을 알려드려야만 한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후략). - P103

(전략). 하지만 이 와중에 좋은 소식도 있어. 그가 호주머니에서 오려낸 신문지 한 장을 꺼내서 내게 건넸습니다. 그 친구 기억하나? 권총으로 자살했어. 신문 쪼가리를 만지작거리며 내가 물었습니다. 그게좋은 소식입니까? 그는 영웅이었어. 장군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 P104

내가 말했습니다. 진정한 영웅이지요. 그에게는 아내와 많은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몇 명인지 기억해 낼 수는 없었지만요. 나는 그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습니다. 철수 대상으로 그의 이름을 고려하기는 했지만, 결국 제외해 버렸습니다. - P105

공산주의자들이 뭘 하는지 감시하는 일에, 그들이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감시하고 있기 십상인데 그거나 매한가지지. 그 점에 대해 뭐라도 생각해 본 거 있나?
그들이 어떤 식으로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요?
바로 그거야. 동조자들. 우리 장교들 틈에 낀 스파이들 고정간첩들 말이야. - P106

정말로 우리 쪽 사람들 중 하나가 스파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제 내 몸에서 땀을 흘리지 않는 유일한 부위는 눈알뿐이었습니다. 군 정보부는 어떻습니까? 아니면 작전참모들은요? - P106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내가 당황스러운 척하며 말했습니다. 장군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려고 내 담뱃값을 건넨 다음, 내가 느낀 공포와 떨림과 식은땀 따위는 빼고 우리 대화의 요점을 당고모께 전하기 위해 막사로 돌아왔습니다. - P107

장군과 부인 역시 한때 장군의 상담역이었던 미국인 대령의 처형에게 신원보증을 받아 결국은 로스앤젤레스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빌라 대신 로스앤젤레스의 조금 후진 지역, 도시의 침체된 중심부인 할리우드 인근 지역에서 목조 단독 주택을 빌렸습니다. - P109

내일은 학과장 비서나 학과장과 공식 대면을 요구하는 학생들을막는 제1방어선 역할이었는데, 일부 학생들은 이전에 한 번도 만난적이 없는데도 나를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 P110

. 맨 처음에 나는 베트남 공화국 육군의 보병 장교였고, 장군이 대령이었을 때 그를보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 그가 장군이 되고 다소 군기를 잡을 필요가 있던 경찰을 책임지게 되었을 때 나도 함께 자리를 옮겼습니다. 전투를 목격했고, 하물며 공안부와 연관되어 있었다는 것은, 이때만해도 대부분의 대학 캠퍼스에서 말하기 힘든 민감한 주제였습니다. - P111

. 그 당시 나는 학생들의 꾸밈없는 정치적 열정을 질투했습니다. 나는 베트남 공화국에서 온 선량한 시민 역할을 하기 위해 자신의 열정을 깊숙이 감춰야만 했으니까요. - P111

내가 최저 임금을 받으며 해내는 온갖 잡다한 업무에는 모조 다이아몬드가 박힌 뿔테 안경을 쓴 미즈소피아 모리라는 비서를 돕는 일뿐 아니라, 전화를 받고, 교수의 원고를 타자기로 치고, 서류를 철하여 정리하고, 책들을 가져오는 일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중략). 설상가상으로, 미즈 모리는 나를 좋아하는 것같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아무도 죽인 적이 없다는 걸 알게 돼서 기뻐요. 우리가 만난지 오래지 않아 그녀가 말했습니다. - P112

(전략). 하지만 지금 나에게 미국의자선이 필요한 이유가 애초에 내가 미국의 원조를 받은 수혜자였기때문일까, 하고 궁금해 할 수밖에 없는 운 나쁜 사람들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 P113

교수들 가운데 우리 나라에 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학과장은 우리 문화와 언어에 관한 긴 토론에 나를 즐겨끌어들였습니다. - P114

맞습니다. 그렇지요. 최저 임금이라도 꼭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내가 말했습니다. - P115

(전략), 그는 심지어 우리 모임 중 한 번을 내게 키플링의 주장을 확인해 보기 위한 숙제를 내면서 마친 적도 있었습니다. 나는 종이 한 장을 가져다가 세로로 반을 접었습니다. 맨 위에, 왼쪽에는 동양, 오른쪽에는 서양이라고 적은 다음 내 동양적인 특징들과 서양적인 특징들을 적어 나가야 했습니다. - P116

이튿날 이 과제를 보여 주자.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주 좋아! 멋진 시작이야. 자네는 착실한 학생이로군. 동양인들이 다 그렇듯이. (중략). 그런데 문제점이 하나 있어. 얼마나 많은 동양적인 특성들이 서양적인특성들과 정반대로 대립하고 있는지 보이나? 서양에서는, 유감스럽게도 많은 동양적인 특성들이 부정적인 색채를 띠지. 이것이 동양 혈통의 미국인들이 겪는 심각한 정체성 문제들을 초래해. - P117

나는 교수가 친절하게 대하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웃음을 참고 진지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제가요?
그래. 자네! 자네는 동양과 서양의 공생 관계를 구체적으로 나타내 둘에서 하나가 나올 가능성 말이야. 우리가 서양인의 신체적 특징을 자네와 분리해 생각하지 않듯이 동양인의 신체적 특징 또한 자네와 분리해 생각할 수 없지.  - P118

그래, 자네! 자네의 동양적인 본능을 견제하기 위해 자네는 미국인들이 나면서부터 배워 온 무의식적인 행동들을 부단히 연마해야만해.
저도 제 자신을 더 이상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음과 양 같은건가요?
바로 그거야! - P119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식료품점에 잠시 들러서 흰 빵, 살라미 소시지, 플라스틱 병에 든 보드카 1리터, 옥수수 전분, 요오드를 샀습니다. 감정적으로는 쌀 전분을 더 선호했겠지만, 옥수수 전분이 구하기가 더 쉬웠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물건들을 치워 두고, 내 분열된 자아가 적힌 종이를 냉장고에 붙였습니다. - P120

 아마 내 생활 형편과 다소 연관이 있었을 겁니다. 내 집은 1층에 위치한, 배꼽 먼지* 특유의 냄새가 구석구석 배어 있고 음침한 침실 한 개짜리 아파트였습니다. 

* 입고 있는 옷의 섬유 직물이 체모에 쏠리면서 생기는 조그만 보풀들이 배꼽 안쪽에 모여 형성되는 먼지 덩어리의 일종. - P120

나는 드러누워서 우리가 군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취침하는 거라고 상상했습니다. 아동용 2단 침대를 살 만한 장소라고는 차이나타운 근처의 번지르르한 가구점들의 아동 코너밖에 없었고, 이 가게들은 멕시코인들이나 멕시코인들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감독하는 곳이었음에도 말입니다.  - P122

 다음날, 본이 목사의 교회를 청소하기 위해 몇 시간 동안 나가 있을 때, 편지에 바르면 일련의 숫자들이 자줏빛으로 나타나게 해줄 요오드 용액을 만들 예정이었습니다. 그 숫자들은 만이 너무나도교묘하게 선택한 암호책이자, 이미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 되어 있던 리처드 헤드의 『아시아의 공산주의와 동양적인 파괴 방식』의 페이지와 행과 단어를 가리켰습니다.  - P123

당고모께도 말씀드렸듯이, 만일 함께 지낼 수만 있었다면 우리는 어지간한 크기의 자급자족적 공동체, 즉 미국이라는 정치적 통일체의 엉덩이에 난 뾰루지 같은 집단을 만들 수 있었을 겁니다. - P125

우리 문화의 주요 요리 재료들을 어떻게든 마련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중국인들의 시장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우리의 음식은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중국적인 색채를 띠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굴욕적이고 혹독한 채찍질 같은 시련을겪는 동안 새콤달콤한 맛에 관한 애매한 기억들만 남긴 또 한 번의 타격이었습니다. - P126

하지만 우리는 집주인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감정을 마음속에만 담아둔 채, 꺼끌꺼끌한 소파며 따끔따끔한 카펫에서 서로바싹 다가앉거나, (후략). - P127

우리는 냄비로 토사(土)를 걸러내듯 나쁜 소식을 치워 버린후, 사금을 가려내듯, (중략), 즉 사이공 함락 이후 어느 나라도 들여보내주려 하지 않는 데다가 친구인 미국의 유명 영화배우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녀의 절박한 전화에 응답해 주지 않아서 이공항에서 저 공항으로 전 세계를 빙빙 돌다가 마침내 마지막 동전으로 미국 여배우 티피 헤드런과 연락이 닿아 헤드런이 비행기에 태워할리우드로 데려간 유명 영화배우의 이야기를 채취했습니다. 그렇게해서 우리는 슬픔에 잠겨 스스로를 닦고 희망으로 스스로를 헹궜던것입니다. 우리는 들려오는 거의 모든 소문을 믿었음에도, 우리 나라가 패망했다는 사실만은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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