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반사실적 가설의 오류

과거에 다른 상황이었더라면 발생했을 수도 있는 일이나 미래에일어날 수 있는 일을 빈약한 입증하에 주장하는 논증, 또는 가설적 주장을 마치 사실의 진술인 것처럼 취급하는 논증. - P147

실재하지 않는 사건에 관한 주장은 경험적 증거를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실재하지 않는 사건에 관한 주장에서 이른바 ‘증거‘ 라고 제시되는 것은 무엇이든 상상의 산물로 간주해야 한다. - P147

 하지만 그런 가설은 추측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매우 불확실하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그런 가설은 기껏해야 ‘그럴듯한 이야기‘일 뿐이다. - P147

 내 판단으로는, 실현되지 않은 가설적 사건에 관한 주장은타당한 증거에 의해 입증되지 않았거나 그 추측의 성격이 승인할 수없는 것이라면 오류다. 그렇다면 반사실적 가설은 약한 가설일 경우또는 사실의 진술로 취급될 경우에 오류를 범한다. - P147

그러나 일어난 일이 일어나지 않았거나 일어나지 않은 일이 일어났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 P148

예 1 아무런 증거도 제시되어 있지 않은 다음과 같은 반사실적 가설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만일 당신이 달팽이 요리를 한 번만 맛보았다면, 달팽이 요리를 좋아했을 것이다." "만일 내가 고등학교 때 빈둥거리지 않았다면, 대학에 진학했을 것이다." "만일 내가 지난 밤에 그에게 가지 않았다면, 그를 살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내가 백핸드를 조금만 더 연습했더라면, 그 테니스경기에서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통상 충분한 증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승인할 만한 가치가 없다. 그러한 가설들을 승인하는 데 필요한 훌륭한 증거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위의 예들에는 그런 이유들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 - P148

예 3 어떤 역사학 교수마저도 이 오류를 범했다고 한다. "만일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공하지 않고 두 ‘전선‘을 개방했더라면, 나치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을 것이다.". - P148

오류 바로잡기.

상상력을 발휘해서 만든 가설은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과거를 이해하는 데 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가설을 공격하거나 상상력을 발휘하지 말라고 권하고 싶은 생각은조금도 없다. 하지만 여러분이 의심스러운 반사실적 주장에 접했을 경우, 그 주장이 추측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상대방이 승인하거나 인정하도록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 P149

입증되지 않은 가설적 주장을 바로잡는 한 가지 효과적인 방법은 상대방에게 증거 없는 주장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나는 그 주장에 찬성하는 당신의 증거를 알지 못하므로 뭐라고말할 수 없습니다." 아마 상대방은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의무감을느끼고 당신에게 증거를 제시하려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적어도 건설적인 방향으로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다. - P149

28. 명칭을 근거로 추리하는 오류

가치 판단이나 사실 확인을 위해 사물에 붙인 낱말이나 어구, 즉 명칭을 근거로 삼아 그 명칭이 붙어 있는 대상에 관하여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가정하는 논증. - P153

이 오류는 광고주들이 일반 소비자가 범해 줬으면 하고 바라는 오류다. 따라서 광고주는 그러한 잘못된 추리를 더욱 부추기는 방식으로광고한다. ‘고탄성 골프공‘ 이라는 이름의 골프공 제조업자는 주말 골퍼들이 단지 그 명칭만을 근거로 그 공을 사용하면 자기의 타구가 멀리 날아가리라고 추리해 주기를 바란다. - P153

 ‘세계 최고의 커피‘ 라는 제품명을 보았을 때, 누가 커피를 끊고 싶겠는가! 가치 판단이나 사실 기술을 위한 명칭이 우리의 기호를 자극할 수도 있고 특정한 주장을 검토해 보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킬수도 있다. 하지만 조사해 보지도 않고서, 그 명칭이 붙어 있는 대상이 어떠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 P153

이런 잘못된 논증에는 문제의 주장을 입증하는 증거가 전혀 제시되어 있지 않다. 논증자는 상대방이 단지 명칭만을 근거로 그 명칭이 표현하는 주장과 동일한 주장을 추리해 주기를 바란다.  - P153

예 2 "서울대학교는 훌륭한 대학교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 대학요람에 최고의 교수진을 갖춘 훌륭한 인문과학 대학이 있다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는 실제로 훌륭한 대학일 수 있겠지만, 오로지 요람에 쓰여 있는 것만을 근거로 그것을 정당하게 추리할 수는 없다. - P154

오류 바로잡기 앞에서 명칭이나 간판만을 근거로 무언가를 추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기는 지리산국립공원 입구입니다"와 같은 가치 중립적인 간판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을 필요가 없다. - P154

 요컨대 모든 간판을 의심할 필요는없겠지만 광고주의 꼬임이나 편견, 무지에 희생되지는 말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가치 판단과 관련된 표현을 대했을 경우, 명칭 이외의 근거를 확보할 때까지 판단을 보류하라는 것이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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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가 절대로 쓰지 않겠다고 나 자신과 약속했던 바로 그책이다. 아내에게도 똑같은 약속을 했었다. 2005년 7월, 3년 동안 조현병에 시달리던 작은아들 케빈이 스물한번째 생일을 일주일 앞두고 우리 집 지하실에서 스스로 목을 맨 뒤 10년 동안 나는 그 약속을지켜왔다.  - P9

뒤이은 5년은 ‘치유‘ (사실은 적응)라는 지옥과도 같은 과정이 달갑지 않은 멸균 작업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병이 다시 우리 가족을 강타했다. 살아남은 큰아들 딘에게 조현병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 P9

딘은 병이 가져온 최악의 영향을 끈질기게 극복해냈고, 내가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온전한 정신으로 지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가족에게 닥친 이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타격을 두 번째로 경험하면서, 내가 이 주제를 건드려서는 안 될 이유의 목록은 더욱 길어졌다. - P10

 미시건의 한 음악학교에 기타를 공부하러 가 있던 시절, 작은아들 케빈이 봄 댄스파티에서 함께한 데이트 상대와 찍은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온 적이 있다. 난생처음 갖게 된 흰 야회복 재킷을 입은 모습이었다.  - P10

그러니 사생활은 내가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사항이었고, 나는 그이유만으로도 이미 더 할 말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이유들, 더 강력한 이유들이 있었다. - P11

게다가 생각해보면, 솔직히 누가 조현병에 관한 책을 읽고 싶어하겠는가?
나라면 읽고 싶지 않을 것이다. - P11

그러나 톨스토이를 흉내 내어 말하자면, "나는 조현병에 관심이 없을지 몰라도, 조현병은 나에게 관심이 있었다". 알고 보니 조현병은 파워스 집안에 유독 관심이 많았고, 내가 아무리 무관심하려 해도 그 사실이 바뀔 것 같지 않았다. - P11

조현병schizophrenia. 만성적이고 치료가 안 되는 뇌의 질병, 그 원인은 부분적으로는 유전적 돌연변이에, 또 부분적으로는 외적 경험, 다시 말해 ‘환경적 경험에 있다(적어도 오늘날 신경과학자들은 그렇게 믿고 있는데, 사실 조현병에 관한 한 확립된 진실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직 없다). 조현병은 인간의 정신질환 가운데 가장 큰 두려움을 자아내는 병으로, 100명 중 평균 한 사람 이상에게 나타난다. - P12

조현병은 재앙 같은 병이긴 해도 여러 가지 범주, 저마다 다른 지속 기간을 지니고 다양한 병세를 포괄하는 많은 정신질환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세계보건기구는 전 세계 인구 중 4분의 1은 살아가는 동안 모종의 정신질환을 경험한다고 추정한다.  - P12

여러 가지 파괴적인 정신질환 중에서도 조현병은 정신의 이성적처리 과정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정신건강에서 조현병이 차지하는 위치는 육체건강에서 암이 차지하는 위치와 같다. 즉,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약탈자이자 여간해서는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다. - P13

 정신질환이 급작스럽게 발병했을 때, 특히 병상과 시설 부족 때문에 치료가 지연되는 일이 다반사임을 감안할 때, 정신질환자를 환자 본인의 의사에 반해 억지로 붙잡아둬야 하는가(즉, ‘비자의 개입을 해야 하는가)를 둘러싼 주장들이었다. - P13

버몬트주와 몇몇 다른 주에서는 ‘비자의‘ 환자들을 응급실에 둘 수는 있지만, 치료를 허가하는 법원 명령이 없으면 의사가 약물을 투여할 수 없다. 버몬트주의 일부 환자들은 정신증이 발병한 채로 법정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두세 달씩 기다리기도 한다. - P14

정신증 상태의 환자들이 사실상 합리적 의사결정을 할 수 없음을감안하면, 언뜻 보기에는 신속한 ‘비자의 치료가 가장 이의의 여지가적은 조치로 여겨질 수 있다. - P14

그들이 비자의 치료를 반대하는 또 한가지 이유는 약물 자체를 향한 불신이다. 항정신병 약antipsychotic drugs들은 1950년대 이후 계속 진화해왔지만 본질적으로 실험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때로는 환자를 안정시키기보다 오히려 해를 입히기도 하며, 효과적인 약이라 해도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 P14

게다가 널리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거대 제약업계가 개개인에 맞춘 꼼꼼한 치료는 뒷전으로 미루고 환자의 상태가 양호한지 심각한지, 심지어 약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도 고려하지 않은 채 마치 만병통치약인 양 처방하고 보는 의사들과 정신과 의사들에게 금전적 이득을 안겨온 것도 사실이다. - P14

버몬트주 의회는 봄 내내 그 법안을 두고 토론했고, 6월에는 주지사가 몇 가지 타협안을 반영한 법안에 서명하여 법으로 만들었다.
내가 이 공청회와 법안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 법의 장단점을 다시 논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그 사건이 나에게 촉발한 깨달음을 전하고 싶을 뿐이다. - P15

 위원회 회의실의 반짝반짝 윤을 낸 기다란 책상 앞에 불편한 자세로 줄지어 앉아 간간이 목청을 가다듬던 그들 대부분은 버몬트 사람들의 유니폼과도 같은 평범한 청바지나 청치마에 플란넬 셔츠 차림이었고, 거의가 머리도 빗지 않은 데다 남자들은 수염도 다듬지 않은 모습이었다.  - P15

그들의 절실한 존재감이 그 방 안에서 눈앞에 구현된 그들의 모습이 내 존재를 뒤흔들었다. 그들이 출석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보여준 심오하고 근본적인 인간성 때문이었다. - P16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내밀하고 절절한 방식으로 정신질환을 목격했던 내가, 울었던 내가, 미동도 할 수 없었던 내가, 뒤흔들린 인간의 정신이 지어낼 수 있는 가장 정교하고 사악하리만치 ‘달콤한‘
꿈, 그러니까 케빈이 살아 있지만 다시는 기타를 치지 않겠다고 버티는 반복적인 그 꿈을 포함하여 온갖 꿈들로 채워진 수년을 견뎌온 내가, 하고많은 사람 중에 다름 아닌 그런 내가 정신질환자들이 구체적인 육체의 형태로 내 앞에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다니. - P16

몬트필리어 공청회가 끝나고 겨우 3주가 지났을 무렵, 나는 소환영장에 의해 공개된 일련의 이메일을 채운 섬뜩한 내용에 아연실색했다.  - P16

신병동 관리 부실 의혹으로 뉴스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한 환자가굶어 죽었고, 몇몇 환자는 다른 환자들과 의사들에게 성폭행을 당했으며 그중 임신이 된 경우가 최소한 한 건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3월 27일에 쓴 이메일에서 워커는 스캔들이 자신의 선거운동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며, "내가 이 일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합니다. 이건 절차 문제일 뿐 정책 문제는 아니니까"라고 썼다. - P17

나는 책을 쓰지 않겠다던 결심을 재고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 주제에 대해 침묵해왔던 10년이 자기 방조에 빠지는 것을 막는 길이라 정당화해왔던 바로 그 침묵이 사실은 자기 방조였음을 깨달았기때문이다.  - P17

나에게는 그들이 이제 소리 내어 자신들의 의견을 말하겠다고, 무관심과 부인의 목소리, "미친 사람한테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고 말하는 목소리에 반박하겠다고 결심한 듯 보였다. - P18

선하고 양심적이며 없어서는 안 될 그 모든 사람들, 그리고 서글플 정도로 수적으로 열세인 사람들. - P18

정신질환이라는 다층적이고 복잡한 주제를 다루는 이 일에서, 나는 나보다 훨씬 훌륭한 자격을 지닌 수백 명의 저술가들이 걸어갔던 길을 따라 밟아나간다. - P18

이 책으로 내가 이루려는 목표는 정신질환에 관해 이미 존재하는중요한 저서의 목록을 대체하거나 반박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순하고 자명하며 도덕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진실을 더욱 강력히 알리고 싶을 뿐이다. - P19

그럼에도 결국, 나는 이 책이 쓰이지 않으면 안 되는 책들 가운데하나라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다른 저술가들과 분별 있는 독자들이 이를 이해해주리라.) - P19

그런 책은 공허한 책이 될 것이라는 진실, 그 주제에 관해 이미 출판되어 있는(또는 이미 절판된 여러 좋은 해설서들이 있으니, 잘해봐야 있으나 마나 한 비슷한 책을 한 권 더하는 일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쓸모없는 책이 될 수도 있었다. - P20

하나는 조현병 나라에 사는 동료 시민을 납득시키는 일이다. 그들의 고난이 끔찍하기는 하지만 혼자만 유일하게 겪는 일이 아니며, 부끄러워할 일이나 숨어 살아야 할 이유도 아니라고. - P20

또 하나는 ‘미친 사람‘을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그 병의 희생자들이 모두 위험하거나 나약하거나 부도덕한 존재가 아니며, 어떤 식으로든 한 개인으로서 온전한 인간성을 인정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일이다. - P20

마지막으로 이 책 《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는 이들을 대신하여,
스스로 점잖은 사회라 감히 자처하는 모든 사회를 향해 그 병에 맞서 싸울 것을 요구한다. - P21

여러분이 이 책을 즐기지 않기를 바란다. 여러분이 이 책으로 인해 상처 입기를 바란다. 이 책을 쓰면서 내가 상처 입었던 것처럼, 상처 입어 행동하기를, 개입하기를 바란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에만,
더 이상 일어날 필요가 없을 때까지 계속 일어날 때에만, 우리는 딘과 케빈이, 정신증으로 고통받는 그들의 모든 형제와 자매가 구원받기를, 그들이 견딘 고통이 완전히 헛된 것은 아니었기를 감히 희망해볼 수 있을 것이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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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프텔에 추천으로 이 소설 원작인 동명의 애니메이션이 올라왔다.
옛날엔 라노벨이 7,000원이었다.




"이봐요, 이봐, 이봐, 세이지 씨! 오늘도 왔다고요! 세상에, 문을 안 열어두셨네요! 이래선 제가 못 들어가잖아요!"
경보경보. 집에 스토커가 들이닥쳐 아까부터 내 방문을 쿵쿵두들기고 있다. 인터폰은 장식인줄 아나.
"열쇠가 잠겨 있다고요! 혹시 주무시는 건가요! 어머나, 남자가 잘 때 방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네요!" - P15

경계경계. 이 자식, 내 뒤를 살그머니 밟은 후 매일같이 찾아오고 있다. 아무리 집에 돌아가라고 해도 들은 척도 않는다. 지금 고함치고 있는 소리도 족히 2천 번은 들었다. - P16

습격 이후 세 시간. 그 여자도 집에 돌아갔거니 생각한 나는 아파트 밑의 편의점에 다녀오기로 했다. 치약과 주간지를 손에 드는 사이에도 엽기녀의 얼굴이 뇌리를 스친다. - P16

저런 엽기녀는 아무리 귀여워도 사양이다. 애인이 없어 환장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나로서는 털끝만큼도 흥미가 없다. 나에게는 이미 그녀가 있으니까. - P16

그런 여자와 매일 얼굴을 맞댈 정도라면 차라리 가지 말아버릴까. 아, 그래, 나에게는 그녀가 있으니까. 그런 여자와는 달리차분하고 무척 어여쁜 그녀가 그녀만 있어준다면 고등학교 따윈 안 가도 돼. 누나네 회사에 알바든 뭐든 좋으니까 써달라고 하곤 다녀볼까. - P17

나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봤구나?"
"아, 저기 전, 그게..…."
그녀의 얼굴에 자리 잡은 것은 평소와는 180도 다른 불안과공포로 가득한 표정. - P18

나는 그녀의 표정을 완전한 절망으로 덧칠하기 위하여 한 번더 목소리를 내뱉었다.
"됐어." - P19

"누나, 그 여자 말고, 그녀 말인데."
"역시 네가 데리고 온 거구나… 괜찮아. 그것도 나에게 맡겨둬. 알겠지? 괜찮아. 내가 있는 한 넌 절대 무서운 일은 안 당할 테니까... 하물며 경찰 따위에게 널 넘기다니 어림없지. 그러니까 안심해." - P19

내가 악당이 되어서 경찰에게 잡히기라도 했다간 그녀가 외로워질 테니 그 길만은 피해야 한다.
부하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벽에 묻은 피를 닦는 광경을 보면서 나는 푹 퍼진라면을 조용히 위에 쑤셔넣었다.
아아, 이 라면 맛없어.
이것은 몹시 뒤틀린 이야기.
뒤틀린 사랑의 이야기. - P20

 남자는 흡사 악몽 속이라도 헤매는 심정으로 등 뒤로 덮쳐오는 공포의 근원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그림자 하나가 서 있었다. 말 그대로 그것은 명백한 ‘그림자‘ 였다.
온몸을 까만 슈트로 감쌌는데 쓸데없는 문양이나 엠블럼 같은것이 전혀 없었기에, 그렇지 않아도 까만 복장을 한층 더 진한잉크 속에 담근 듯한 인상을 주었다. 주차장의 형광등을 반사하고 있는 부분만이 겨우 그곳에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해준다. - P28

더욱 이상한 점은 목 위의 부분으로 그곳에는 기묘한 디자인의 헬멧이 얹혀 있다. 칠흑으로 물든 목 아랫부분에 비해 어쩐지 예술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형태지만, 그럼에도 희한하게별다른 위화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고급차의 미러 글라스마냥 까만 페이스커버는 형광등 불빛을 일그러지게 반사할 뿐 헬멧 안의 모습은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 P28

남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존재는 완전히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여느 때처럼 지하주차장에 모여 가벼운 작업을 하고돌아간다. ‘상품‘을 납입처에 가져다주고 새로운 ‘상품‘을 입수한다. 단지 그것뿐이다. 평소와 무엇 하나 다를 게 없다.  - P29

우선 표현 그대로 오토바이가 소리도 없이 지나갔다는 점.
타이어가 스치는 소리까지는 모른다 해도, 당연히 나야 할 엔진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던 것이다. 엔진을 끄고 관성만으로 가로질렀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다면 그 직전에라도 엔진 소리가들렸어야만 하는데 아무도 그런 소리를 듣지 못했다.
더욱이 오토바이는 운전자를 포함한 전체가 칠흑으로 칠해져있었고, 엔진과 샤프트는 물론, 타이어 휠마저도 새까맸다. - P29

헤드라이트는 없고 본래 번호판이 있어야 할 부분에는 그저 검은철판이 매달려 있을 뿐이다. 가로등과 달빛을 반사하는 부분을보고서야 겨우 그 물체가 이륜차 같다는 것을 알 정도였다. - P30

으스스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공포를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동료가 당했다고 분노하는 자도 없었다. 그 집단은어디까지나 작업상으로만 연결되어 있을뿐, 동료의식을 가진자 따위는 누구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 P30

"......."
우지직.
기분 나쁜 소리. 너무너무 기분 나쁜 소리가 났다. 그것은 단순한 불쾌감을 넘어서 어떠한 ‘위험‘을 본능에 호소하는 소리였다. - P31

내리는 동작은 분명히 보였다. 허나 내리는 동작을 취한다는것은 직전까지 다리를 높이 쳐들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시력이좋은 몇 명은 또 다른 사실도 알아차렸다.
땅에 닿은 부츠 바닥에 파카 차림의 사내가 쓰고 있던 안경이걸려 있다는 것을. 그러한 정보들 덕에 그들은 즉시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 P31

"방금・・・ . 어떤 자세? 어, 어라? 아니... 어떻게 한 거야...?"
혼란에 빠진 남자의 곁을 지나 작업동료 두 사람이 노성을 올리며 오토바이로 다가갔다.
"아, 이봐." - P32

동료 한 사람이 스턴건을 ‘그림자‘에게 들이댔다.
-어라, 가죽점퍼에 전기가 통하던가?
남자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그림자‘의 몸이 흠칫 떨렸다. 보아하니 전기는 통하는 모양이군. 이젠 끝났어. - P33

시종 바르르 떠는 ‘그림자‘ 와는 반대로 경봉 사나이는 몸을 단한 번 격렬하게 떨고서는 날아가듯 땅에 나뒹굴었다.
"이 자식.…."
스턴건 사내는 ‘그림자‘ 의 손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고서 손 안의 스턴건 스위치를 허겁지겁껐다. 허나 결국 사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그림자‘ 의 손목은 그의 목을 세게 틀어쥐었다. - P33

자신이 아무것도 못하는 사이에 코지를 포함하여 여섯 명 중 넷이나 당하고 말았다. 한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는 그에게 조금씩 공포를 안겨주기 시작했으니까. - P34

품속에서 대형 나이프를 꺼내든 갓 형은 ‘그림자‘ 쪽으로 성큼다가서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말을 걸었다.
"뭘 얼마나 배웠는지는 몰라도…. 찌르면 죽겠지." - P34

"게다가 좀 배웠어봤자 맨손으로 얼마나 어어어?"
도발 섞인 그 말은 ‘그림자‘ 의 행동 때문에 별안간 끊겼다.
‘그림자‘는 상반신을 앞으로 숙여 눈앞에 나뒹구는 두 개의 물건을 주워들었다. 조금 전까지 양아치의 작업동료가 들고 있던 특수경봉과 스턴건이다. - P34

"어・・・ 말도 안 돼. 어라? 이상하지 않아? 격투기로 오는 거 아녔어?"
장난스러운 내용이긴 했으나 입에서 새어나오는 음성은 얼핏듣기에도 불안한 기색으로 가득했다. 진즉에 네명이서 다구리쳐버릴걸. 이런 생각이 들었으나 이제 와서 물러설 수도 없는노릇. - P35

"비겁하게시리 ! 나는 나이프 한 자루란 말이다. 새끼야! 창피하지도 않냐!"
억지스러운 질문에도 시종 말이 없는 채 ‘그림자‘는 리더를 향해 조용히 시선을 던졌다. - P36

‘그림자‘는 양아치와 리더의 앞에서 기묘한 동작을 해 보였다.
모처럼 손에 든 스턴건을 오토바이 좌석 위에 놓아버린 것이다. - P37

양아치는 그렇게 판단했으나 다음 순간 ‘그림자‘가 특수경봉을 양 손으로 쥐더니~ーーー.
그대로 꾸불텅 휘어버렸다. - P37

어쨌거나 ‘그림자‘로서는 모처럼 획득한 무기를 스스로 포기한 셈이었으나-양아치들은 더 큰 위화감에 사로잡힌 덕분에점차로 현실감각이 엷어졌다. - P38

"뭐야, 저건.…. 으름장인가?"
리더는 휘어진 경봉을 보며 여전히 농담을 내뱉었으나 ㅡ 입안으로 들어온 땀 한 방울을 그대로 삼켜버렸다. - P38

그 광경을 근처에서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그림자‘는 이쪽을향해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결국은 맨손이냐.그 배짱만큼은 높이 사주지." - P38

약 3미터. 두 발짝만 더 가면 나이프가 닿을 거리다.
-갓 형은 찌를 땐 찌르는 사람이야.
그 사실을 아는 양아치는 리더를 도우려고 쇠파이프를 들고뒤를 따랐다. - P39

그는 동료가 내뿜는 살의에서 승산을 점치고는 그 역시 쇠파이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허나 다음 순간 그들의 승산은 살의와 함께 날아가버렸다.
‘그림자‘가 등 뒤로 팔을 돌리나 했더니 다음 순간 ‘검은 몸의일부가 부풀어올랐다‘. - P39

붓을 담근 양동이 안의 물처럼 공기 중에 검은 ‘물결‘이 기분 나쁠 만큼 선명하게 퍼져나가더니 이윽고 움직임을 멈추고는-의미 있는 칠흑을 만들어내려 했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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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생들은 몇 가지 이유로 염 교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첫째는 연수원 정교수도 아닌 그가 너무 잘난데다가 그 사실을 감출 만큼 겸손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그의 강의가 실무 분야를 건너뛰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 P20

"판례를 훔쳐보며 승소가능성을 점치는 변호사처럼 하찮은직업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교수는 태연히 수강생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안그런가? 강의실에는 찬바람이 돌았다. - P20

 책장을 되넘겨보는 소리도 들린다. 왜냐하면 교수가 백 년 전에 세상을 뜬 법학자들의 논문 몇 편을 언급하고또 입맛에 맞는 소수의견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나는 그가 ‘유효 소송 전략‘이라 칠판에 적고 강의를 시작한 것까지 기억한다. - P21

"여기 혹시 졸업하고 공부 계속하려고 하는 사람 있나?"
강의실은 조용했다. 두번째줄에 앉은 박시환이 성급하게고개를 내리깔았다. 교수는 놓치지 않고 그를 지목했다.
"박시환이 자네 교수 해봐." - P21

박시환은 법률 서비스의 질적 저하를막기 위해서는 연수원 입학 정원을 200명으로 감축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좋지 못한 녀석이다. 그가 좋지 못한 녀석인 이유는 194 등으로 입학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 P22

10년 전 고등학교 운동장에 묻었어야 할 그 이야기가 앞으로 몇 십 년이나 더 주인을 따라다니며 증오와 경멸을 퍼뜨리게 될지 모를일이다. - P22

"중훈이. 자넨 어떤가?"
(중략)
이 강의실에서 당장 법대 교수를 한 명을 선거로 뽑아야 한다면 나는 저 친구에게 표를 줄 생각이다.
"죄송합니다. 전 김앤장에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의 저의는 ‘되어 있다‘는 부분에 잠복해 있는 거겠지."
"아닙니다."
"그러니까 김앤장이 온갖 수단을 써서 자네를 징병할 것이고 자네는 그 부름을 피할 수 없다는 말로 들리는데." - P23

"평생 거기 있을 텐가? 10년 후에는?"
"아마 개업해 있지 않을까요?"
"법정이라면 그런 대답이 바로 위증이야. 자네가 기어들어가는 곳은 높이고, 자넨 잘릴 때까진 거기서 못 벗어나 내가장담하지. 자네는 결국 환갑 때까지 집보다 회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돼 있어." - P23

 인간이 법을 만든다. 바로 법학자가 대한민국의 법을 만든다. 물론 자기 손으로 만드는 건 아니다. 헌법이 정한 대로 그건 입법부인 국회의 역할이다. 하지만 국회의 얼치기들이 법에 대해 뭘 알겠는가.
그들이 법안 발의를 위해 법대에 전화를 돌리는 정도의 수고만 해줘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 P24

비유는 명쾌했고, 염만수 자신이 법학자긴 해도 설득력이있었다. 원생들의 표정은 한결 같았다. - P24

교수는 진짜 독설을 최후를 위해 남겨 뒀다.
"비겁한 사람들이 많아. 자네들은 법학자의 분비물을 핥을뿐이면서 변론문서에는 별별 과시적인 문장을 다 집어넣게 될거야. 제발 문법은 좀 틀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 P25

그럼 아직 변호사란 직업을 증오하진 않는다는 이야깁니까? 의왼데요. 물론 그렇게 말해볼 기회는 없었다.
"나한테 취업상담 받을 생각은 마. 강의중에 한 말은 다 잊고 그냥 개업이라도 해. 잘할 것 같은데 그래."
교수는 내 어깨를 두드리고 갈 길을 갔다. - P26

교수는 무거운 구둣발소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벽에 매달린 채용공고들만이 곧 떨어질 가을 잎사귀처럼 내 눈앞을 맴돌며흔들렸다. - P27

대법원 근처에는 맥주집이 많지 않다. 그 이유가 대법관들의 주류 취향과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대법관은 고작열네 명밖에 안 되니까. - P27

"국선전담변호인을 신청해보려고."
"그거 좋다. 하지만 거기도 경쟁률이 장난 아닐 거다. 법원이직접 변호사한테 사건을 물어다주는 세상이 오다니. 이게 바로 내 사무장의 성경에 쓰인 세상의 종말이로구나."
"되도 다가 아냐. 전담 변호인한텐 법원에서 사무실을 제공해주지 않아 어차피 개업해야 돼. 나한텐 돈 대신 빚이 있잖아." - P29

"오늘 연수원에서 염만수도 같은 얘길 하더라."
"염만수가 연수원을 나간다고?"
"작년부터 강사로, 지성, 변화와 편집증적인 도덕성의 상징.
연수원의 숭배와 증오를 독점해버렸어." - P30

"지금은 재야 변호사들한테 종교적인 존재이지만, 또 한 번법학의 세대가 바뀔땐 가장 완강하게 보수적인 인사가 되어저항할 거다. 염만수가 이룩한 법체계의 관성을 바꿔야 할 때얼마나 큰 출혈이 있을지 우린 생각해봐야 돼." - P31

법의 수명은 법학자의 수명보다 짧다. 시대의 수명은 법의 수명보다 짧다. 살아 있는 법학자의 숙명이었다. - P31

"대리운전 불러 음주운전이잖아. 형은 변호사야."
대석은 대답했다.
"이럴 때 쓰라는 말을 예전에 배웠는데, 아, 맞아. 나 하나쯤이야......." - P32

"운전하고 싶어서 그런다. 이제 곧 내 차가 아니니까."
"명의가 집사람 앞으로 돼 있어. 원래 돈도 그 사람이 냈고,
나, 이혼한다." - P32

난 그 여자가 일하는 병원의 응급실에서 매일 무슨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지 몰라. 왜 그 여자만 매일 새벽까지 거길 지켜야하는지도 모르고. 하지만 응급실을 떠올리면 그때부터는 다른 상상을 할 필요가 없거든. 대화를 하라고? 했지. 그럼. 그여자는 내가 맡은 노동법 위반 관련 사건을 모조리 비웃으면서 말하는 거야. 그곳 의사들은 주당 100시간 근무 사수를 위한 투쟁을 하고 있다더군. - P33

한쪽에는 엄연한 사실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엄연한 사법형식이 있었다.
_미셸 드 몽테뉴, 「수상록」


• 2의 2, 국선전담변호인 인용구 - P34

처음엔 그것들을 차별없이 책상 서랍에 모아 두었다. 한 달이 지나고 나서는 새 명함이 많아지면 옛 명함들을 내버렸다. 차별없이 버렸다. 그래도여전히 명함이 너무 많았다. 그중 단 한 장도 특별하지 않았다. - P35

"그제 검찰이 철거민 한 명을 구속기소했어요. 내가 온 목적은 피고인의 국선변호인 선임을 돕는 겁니다."
"변호사가 변호사의 선임을 돕는다니 그게 무슨 뜻이죠?"
"우리 로펌은 시민단체 두 곳을 법률 지원하고 있어요. 그중한 곳에선 지역 철거민에 대한 지원업무를 맡고 있어서 복대리비슷한 게 성립하게 됐어요. 하지만 우리 펌과 시민단체 사이법률지원 협약에는 소송 대리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요. 내역할은.....…." - P36

"그렇군요 사건에 대해 얘기해주실 순 있겠죠."
"아현동 철거 현장에서 철거민 한 명과 경찰 한 명이 죽은사건 압니까?"
들어본 것 같습니다." - P36

"아들이 죽었다면서요. 경찰도 기소됐습니까?"
"아니. 그 아들을 폭행한 건 현장 철거용역업체 직원이라더군요."
"현장 철거용역업체는 또 뭡니까? 그럼 피고인은 왜 경찰을 죽인 거죠?" - P37

"자세한 건 이쪽으로 전화해서 들어보세요. 철거민들을 지원하는 민생살림이라는 시민단체입니다. 사무국장과 대화해봐요. 이름이 김・・・・・… 뭐라더라. 거기 쓰여 있어요. 국선변호사김...
라고 하면 아주 기뻐할 겁니다. 그럼, 이만 나오지 않아도 됩니다." - P37

 변호사는 언제라도 수감자를 접견할 수 있다. 짙푸른색 재소복을 입고 건너편에 앉은 남자는 40대 후반으로 보였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은 때가 이른 골 깊은주름에 뒤덮였고,
깍지를 낀 두 손이 무릎 위에 얌전히 떨어져 있었다.  - P38

"저는 국선변호사입니다."
"압니다."
"대리인을 통해 들었지만 본인의 의사를 한 번 더 확인하겠습니다. 형식적으로요. 국선변호사 선임을 원합니까?"
"전 무죄를 원합니다."
"박재호 씨, 유죄판결이 떨어지기 전까지 박재호 씨는 무죄입니다. 그 권리는 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 P38

"누가 박재호 씨 아들을 죽였습니까?"
"경찰들이."
"그 광경을 직접 목격했습니까?"
"목격하다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여기 있지 않을 거요." - P39

"그곳에 변호사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거 봐요, 그건 경찰들이 늘 하는 말이에요. 진압은 경찰이하지만 사고는 그저 일어나지. 처음도 아니오. 용역이라고? 난그 새끼들을 반년 넘게 봐왔어. 내 아들을 죽인 건 경찰이 맞아요." - P39

"검찰은 진압경찰을 전원 무혐의 처리했습니다."
"죽일 놈들 다 한통속이야. 그럼 검찰을 고소하시오."
"전 국선전담변호사입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제가 맡은 건박재호 씨의 혐의에 대한 변호고요. 사망한 경찰을 폭행한 건박재호 씨가 맞나요?"
"그 죽일 놈들을 고소하시오."
그 죽일 놈들.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 P40

그는 같은 말을 했다. 그 죽일 놈들을 고소하시오. 남자의이마에는 주름이 더 깊고 단단해졌다. 대화는 다툼으로 변질될 조짐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피고인에게 불가능하다고대답하거나, 기소편의주의를 운운하며 검사의 직무 판단과 면책범위에 대해 설명해주는 걸로 충분치가 않다. 아무 쓸데없는 짓이다.  - P40

"제 생각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검사를 고소하길 원하신다면 제가 아닌 다른 변호사를 찾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남자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 P41

어쨌든 모든 피고인들이 조금씩은 거짓말을 한다. 만약 박재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면경찰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엄청난 거짓말이 된다. - P41

"경찰이 내 아들을 죽였어요. 검찰은 그놈들한테 죄가 없다고 하고, 근데 정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겁니까? 정말 검사를 고소하는 게 안 됩니까?"
남자의 눈시울이 붉었다. 그가 운다고 해도 듣기 편하게 말해줄 수는 없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 P42

사무국장은 서울시의 뉴타운 개발사업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 사건이 일어난 아현동 지구의 시공기업인 오성건설에 대해 이야기했다. - P43

그는 내가 사건을 맡아줘서 얼마나기쁘고 고마운지 모른다고 했다. 이름을 밝히진 않았지만 자기도 법대 출신이라고 했다. 내 명함에도 출신 대학이 적혀 있지 않다. 그건 별로 말할 거리가 못된다. 우리의 차이는 나는사법고시에 붙었고, 그는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 차이로 그의 삶은 나보다 더 정의롭고, 더 비루해졌다.  - P43

법정형량을 공소장 부본에 포함된 활자의 개수로나눈다. 검사의 손끝에서 탄생한 활자 하나가 지탱하는 형량의 무게는 어느 정도일까? 각각의 접속사와 대명사들이 갖는구속력은? 공소장은 응당 무거워야 할 만큼 무거운 적이 없었다. 딱 필요한 만큼만 무거웠다. 그것은 언제나 낱장과 낱장의종이들이었다. 속박당하는 자의 삶만큼 구체적이지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내가 검사가 될 수 없었던 이유라고 생각했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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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산 책, 좋은 책? 난해한 책?
내용은 좋았지만 너무 옛날 티가 많이 나서 완독을 못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까지 문학연구자로서의 내가 가장 관심깊게공부했던 것은「상징」과「카타르시스」였다. 이 두가지 테마에 대한 연구는 우리나라에서 불모지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 P7

그리고 문학의 실제적 효용가치는 도덕적 순치(致)에 있는 게 아니라 본능적 욕구의 상상적 대리배설에 있다고 믿어 카타르시스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 P7

나는 문학의 사상성 문제보다는 문학이 우리 심신(心身)에 미치는 보다 실제적인 효용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말하자면 문학(또는 예술)을 보다 정직하게 향수할 때 얻어지는 구체적인 재미나 쾌감의 문제와, 정신과 육체에 골고루 미치는 실질적 치료 효과의 문제에 천착했던 것이다. - P8

우리나라 문화계는 도무지 자유로운 개성과 돌출적 「변화」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아직도 양반주의나 훈민주의(訓民主義)의 문학관이 당연시되고 있고, 독창적 광기나 솔직한 노출은 「모난 돌」이 되어 정을 맞고 있다. 보다 민중적인 대중문화와「하수도 문화」에 대해 턱없는 멸시와 탄압은 그런 수구적 봉건윤리에 기인한 문화적 후진성에서 비롯된다. - P9

이 책은 17년이라는 긴 기간에 거쳐 집필되고 수정된 것이다.  - P10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나를 보고 "서구 퇴폐문화의 무분별한 추종자"라고 비난하는 것만은 참기 어려웠다. 내 세계관과 문학사상의 바탕은오히려 동양의 음양사상이나 <주역(周易)〉, 또는 한방의학 이론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프로이트의 이론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지만, 나는 그의 학설 역시 우리의 전통사상으로 재조명하여 재해석하려고 애썼다. - P11

프로이트나 미셀 푸코 또는 바타이유 등의 서구 사상가들에게는 그들이 아무리 야한 주장을 했더라도 깜빡 죽으면서, 내가 성에 대해 조금 야한 주장이라도 펼치면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며 매도와 조소의 시선을 보내는 게 나로서는 못내 서운하였다. - P11

「정화(purifica-tion)」또는「배설 (purgation)」을 의미하는 말인 카타르시스」는, 비극 또는 문학이 독자에게 주는 직접적인 효용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져 지금까지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 P17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플라톤과는 반대로, 이성적인 생활의 혼란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감정을 적절히 표출시키고 배설시켜야만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 P18

실상 카타르시스는 의학적인 뜻이 더욱 강한 말로서, 우리 몸 안에 축적되어 있는 찌꺼기 (예컨대 숙변[宿便]같은 것)을 사하(下)시켜 병을 치료한다는의미를 가지고 있다. - P19

카타르시스를 피타고라스 학파는「의술을 통한 육체의 정화」라는 말로 사용했고, 히포크라테스는「고통스러운 요소의 제거」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 P19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제8권 「음악론」에서,
음악의 선율에는 논리적인 것과 행동적인 것, 그리고 열광적인 것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하고, 음악이 주는 이익은 교육적인 관점과 카타르시스의 관점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 P20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음악이든 연극이든 모든 예술이 주는 효용을 우선 의학적인 의미의 카타르시스 효과에 있다고 보고, 거기에 부수적으로 교육적, 종교적 효과가 곁들여진다고 본 것 같다. - P20

그런데도 지금까지 카타르시스의 의미에 대해 여러 가지 구구한 설명이 시도된 것은, 서양인들이 플라톤적 세계관, 즉 이성을 감성보다 우월한 것으로보는 이성주의적 세계관을 고수해 왔기 때문이다. - P21

이러한 이성우월주의적 세계관 때문에 카타르시스를 단지 억압된 욕구의 대리적 배설로만 보지 않으려고 하는 갖가지 시도가 이루어졌다. - P21

문학 특히 비극은 단지 무섭고 슬픈 느낌을 자아내는것을 목적으로 하는 양식이 아니라, 보다 심각하고 의미심장한 인식의 체험을 마련해 주기 위한 양식이라는 주장이다. - P22

낭만주의 시대에는 교훈주의를 약간 벗어나 카타르시스를 「신비로운 쾌감」을 얻는 효과로 보게 된다. - P22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카타르시스 해석은 대체로두 가지 측면, 즉 「배설을 통한 심리적 쾌감」과 「작품을 통해서 얻어내는 지혜, 또는 도덕적 순화나 새로운 인식의 체험」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볼수 있다. 심미적 측면의 해석도 있으나 이것 역시「쾌감」의 측면에 귀속된다. - P23

하지만 이러한 설명들이 과연 모든 예술 수용행위의 본질을 시원하게 규명해 줄 수 있는 것일까? 
- P23

 또 인간의 욕망 가운데 가장 큰 욕망은 역시 성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비극은 과연 성욕까지도 대리적으로 해소시켜 줄 수있는 것일까? - P24

연민과 공포를 비극 또는 모든 문학작품의 가장중요한 감동의 요소로 인정한다면, 결국 우리는 비극 속의 끔찍한 장면을 보면서 사디즘적 쾌감을 느끼는 것이 된다. 그 반대로 사디즘이라는 도착심리(倒錯心理)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극을 보고 쾌감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연극 속의 비참한상황으로부터 소격(疏隔) 돼 있어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모면되었다고 느낄 때 얻어지는 일종의 「안도감」을 맛보는 것이 된다. - P24

그래서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의 본질적 의미와 효용을 밝히는 데 있어, 좀더 융통성있게 넓은 의미로 카타르시스를 수용하려고 한다. - P25

사실 요즘에 와서는 「카타르시스」가 거의 일상어로 굳어져 버린 감마저 든다. 흔히 쓰이는 「스트레스를 푼다」는 의미와 비슷하게 카타르시스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고, (후략) - P25

그럼 먼저, 카타르시스의 일차적 의미라고 할 수있는 「배설」의 측면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사람의육체적 신진대사는 먹는 것과 배설하는 것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먹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짜는 것」은 그보다는 덜 중요하게, 아니면 훨씬 더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사실상 먹는 것보다는 「싸는 것」이 더 중요하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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