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생들은 몇 가지 이유로 염 교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첫째는 연수원 정교수도 아닌 그가 너무 잘난데다가 그 사실을 감출 만큼 겸손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그의 강의가 실무 분야를 건너뛰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 P20

"판례를 훔쳐보며 승소가능성을 점치는 변호사처럼 하찮은직업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교수는 태연히 수강생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안그런가? 강의실에는 찬바람이 돌았다. - P20

 책장을 되넘겨보는 소리도 들린다. 왜냐하면 교수가 백 년 전에 세상을 뜬 법학자들의 논문 몇 편을 언급하고또 입맛에 맞는 소수의견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나는 그가 ‘유효 소송 전략‘이라 칠판에 적고 강의를 시작한 것까지 기억한다. - P21

"여기 혹시 졸업하고 공부 계속하려고 하는 사람 있나?"
강의실은 조용했다. 두번째줄에 앉은 박시환이 성급하게고개를 내리깔았다. 교수는 놓치지 않고 그를 지목했다.
"박시환이 자네 교수 해봐." - P21

박시환은 법률 서비스의 질적 저하를막기 위해서는 연수원 입학 정원을 200명으로 감축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좋지 못한 녀석이다. 그가 좋지 못한 녀석인 이유는 194 등으로 입학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 P22

10년 전 고등학교 운동장에 묻었어야 할 그 이야기가 앞으로 몇 십 년이나 더 주인을 따라다니며 증오와 경멸을 퍼뜨리게 될지 모를일이다. - P22

"중훈이. 자넨 어떤가?"
(중략)
이 강의실에서 당장 법대 교수를 한 명을 선거로 뽑아야 한다면 나는 저 친구에게 표를 줄 생각이다.
"죄송합니다. 전 김앤장에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의 저의는 ‘되어 있다‘는 부분에 잠복해 있는 거겠지."
"아닙니다."
"그러니까 김앤장이 온갖 수단을 써서 자네를 징병할 것이고 자네는 그 부름을 피할 수 없다는 말로 들리는데." - P23

"평생 거기 있을 텐가? 10년 후에는?"
"아마 개업해 있지 않을까요?"
"법정이라면 그런 대답이 바로 위증이야. 자네가 기어들어가는 곳은 높이고, 자넨 잘릴 때까진 거기서 못 벗어나 내가장담하지. 자네는 결국 환갑 때까지 집보다 회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돼 있어." - P23

 인간이 법을 만든다. 바로 법학자가 대한민국의 법을 만든다. 물론 자기 손으로 만드는 건 아니다. 헌법이 정한 대로 그건 입법부인 국회의 역할이다. 하지만 국회의 얼치기들이 법에 대해 뭘 알겠는가.
그들이 법안 발의를 위해 법대에 전화를 돌리는 정도의 수고만 해줘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 P24

비유는 명쾌했고, 염만수 자신이 법학자긴 해도 설득력이있었다. 원생들의 표정은 한결 같았다. - P24

교수는 진짜 독설을 최후를 위해 남겨 뒀다.
"비겁한 사람들이 많아. 자네들은 법학자의 분비물을 핥을뿐이면서 변론문서에는 별별 과시적인 문장을 다 집어넣게 될거야. 제발 문법은 좀 틀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 P25

그럼 아직 변호사란 직업을 증오하진 않는다는 이야깁니까? 의왼데요. 물론 그렇게 말해볼 기회는 없었다.
"나한테 취업상담 받을 생각은 마. 강의중에 한 말은 다 잊고 그냥 개업이라도 해. 잘할 것 같은데 그래."
교수는 내 어깨를 두드리고 갈 길을 갔다. - P26

교수는 무거운 구둣발소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벽에 매달린 채용공고들만이 곧 떨어질 가을 잎사귀처럼 내 눈앞을 맴돌며흔들렸다. - P27

대법원 근처에는 맥주집이 많지 않다. 그 이유가 대법관들의 주류 취향과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대법관은 고작열네 명밖에 안 되니까. - P27

"국선전담변호인을 신청해보려고."
"그거 좋다. 하지만 거기도 경쟁률이 장난 아닐 거다. 법원이직접 변호사한테 사건을 물어다주는 세상이 오다니. 이게 바로 내 사무장의 성경에 쓰인 세상의 종말이로구나."
"되도 다가 아냐. 전담 변호인한텐 법원에서 사무실을 제공해주지 않아 어차피 개업해야 돼. 나한텐 돈 대신 빚이 있잖아." - P29

"오늘 연수원에서 염만수도 같은 얘길 하더라."
"염만수가 연수원을 나간다고?"
"작년부터 강사로, 지성, 변화와 편집증적인 도덕성의 상징.
연수원의 숭배와 증오를 독점해버렸어." - P30

"지금은 재야 변호사들한테 종교적인 존재이지만, 또 한 번법학의 세대가 바뀔땐 가장 완강하게 보수적인 인사가 되어저항할 거다. 염만수가 이룩한 법체계의 관성을 바꿔야 할 때얼마나 큰 출혈이 있을지 우린 생각해봐야 돼." - P31

법의 수명은 법학자의 수명보다 짧다. 시대의 수명은 법의 수명보다 짧다. 살아 있는 법학자의 숙명이었다. - P31

"대리운전 불러 음주운전이잖아. 형은 변호사야."
대석은 대답했다.
"이럴 때 쓰라는 말을 예전에 배웠는데, 아, 맞아. 나 하나쯤이야......." - P32

"운전하고 싶어서 그런다. 이제 곧 내 차가 아니니까."
"명의가 집사람 앞으로 돼 있어. 원래 돈도 그 사람이 냈고,
나, 이혼한다." - P32

난 그 여자가 일하는 병원의 응급실에서 매일 무슨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지 몰라. 왜 그 여자만 매일 새벽까지 거길 지켜야하는지도 모르고. 하지만 응급실을 떠올리면 그때부터는 다른 상상을 할 필요가 없거든. 대화를 하라고? 했지. 그럼. 그여자는 내가 맡은 노동법 위반 관련 사건을 모조리 비웃으면서 말하는 거야. 그곳 의사들은 주당 100시간 근무 사수를 위한 투쟁을 하고 있다더군. - P33

한쪽에는 엄연한 사실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엄연한 사법형식이 있었다.
_미셸 드 몽테뉴, 「수상록」


• 2의 2, 국선전담변호인 인용구 - P34

처음엔 그것들을 차별없이 책상 서랍에 모아 두었다. 한 달이 지나고 나서는 새 명함이 많아지면 옛 명함들을 내버렸다. 차별없이 버렸다. 그래도여전히 명함이 너무 많았다. 그중 단 한 장도 특별하지 않았다. - P35

"그제 검찰이 철거민 한 명을 구속기소했어요. 내가 온 목적은 피고인의 국선변호인 선임을 돕는 겁니다."
"변호사가 변호사의 선임을 돕는다니 그게 무슨 뜻이죠?"
"우리 로펌은 시민단체 두 곳을 법률 지원하고 있어요. 그중한 곳에선 지역 철거민에 대한 지원업무를 맡고 있어서 복대리비슷한 게 성립하게 됐어요. 하지만 우리 펌과 시민단체 사이법률지원 협약에는 소송 대리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요. 내역할은.....…." - P36

"그렇군요 사건에 대해 얘기해주실 순 있겠죠."
"아현동 철거 현장에서 철거민 한 명과 경찰 한 명이 죽은사건 압니까?"
들어본 것 같습니다." - P36

"아들이 죽었다면서요. 경찰도 기소됐습니까?"
"아니. 그 아들을 폭행한 건 현장 철거용역업체 직원이라더군요."
"현장 철거용역업체는 또 뭡니까? 그럼 피고인은 왜 경찰을 죽인 거죠?" - P37

"자세한 건 이쪽으로 전화해서 들어보세요. 철거민들을 지원하는 민생살림이라는 시민단체입니다. 사무국장과 대화해봐요. 이름이 김・・・・・… 뭐라더라. 거기 쓰여 있어요. 국선변호사김...
라고 하면 아주 기뻐할 겁니다. 그럼, 이만 나오지 않아도 됩니다." - P37

 변호사는 언제라도 수감자를 접견할 수 있다. 짙푸른색 재소복을 입고 건너편에 앉은 남자는 40대 후반으로 보였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은 때가 이른 골 깊은주름에 뒤덮였고,
깍지를 낀 두 손이 무릎 위에 얌전히 떨어져 있었다.  - P38

"저는 국선변호사입니다."
"압니다."
"대리인을 통해 들었지만 본인의 의사를 한 번 더 확인하겠습니다. 형식적으로요. 국선변호사 선임을 원합니까?"
"전 무죄를 원합니다."
"박재호 씨, 유죄판결이 떨어지기 전까지 박재호 씨는 무죄입니다. 그 권리는 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 P38

"누가 박재호 씨 아들을 죽였습니까?"
"경찰들이."
"그 광경을 직접 목격했습니까?"
"목격하다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여기 있지 않을 거요." - P39

"그곳에 변호사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거 봐요, 그건 경찰들이 늘 하는 말이에요. 진압은 경찰이하지만 사고는 그저 일어나지. 처음도 아니오. 용역이라고? 난그 새끼들을 반년 넘게 봐왔어. 내 아들을 죽인 건 경찰이 맞아요." - P39

"검찰은 진압경찰을 전원 무혐의 처리했습니다."
"죽일 놈들 다 한통속이야. 그럼 검찰을 고소하시오."
"전 국선전담변호사입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제가 맡은 건박재호 씨의 혐의에 대한 변호고요. 사망한 경찰을 폭행한 건박재호 씨가 맞나요?"
"그 죽일 놈들을 고소하시오."
그 죽일 놈들.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 P40

그는 같은 말을 했다. 그 죽일 놈들을 고소하시오. 남자의이마에는 주름이 더 깊고 단단해졌다. 대화는 다툼으로 변질될 조짐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피고인에게 불가능하다고대답하거나, 기소편의주의를 운운하며 검사의 직무 판단과 면책범위에 대해 설명해주는 걸로 충분치가 않다. 아무 쓸데없는 짓이다.  - P40

"제 생각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검사를 고소하길 원하신다면 제가 아닌 다른 변호사를 찾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남자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 P41

어쨌든 모든 피고인들이 조금씩은 거짓말을 한다. 만약 박재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면경찰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엄청난 거짓말이 된다. - P41

"경찰이 내 아들을 죽였어요. 검찰은 그놈들한테 죄가 없다고 하고, 근데 정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겁니까? 정말 검사를 고소하는 게 안 됩니까?"
남자의 눈시울이 붉었다. 그가 운다고 해도 듣기 편하게 말해줄 수는 없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 P42

사무국장은 서울시의 뉴타운 개발사업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 사건이 일어난 아현동 지구의 시공기업인 오성건설에 대해 이야기했다. - P43

그는 내가 사건을 맡아줘서 얼마나기쁘고 고마운지 모른다고 했다. 이름을 밝히진 않았지만 자기도 법대 출신이라고 했다. 내 명함에도 출신 대학이 적혀 있지 않다. 그건 별로 말할 거리가 못된다. 우리의 차이는 나는사법고시에 붙었고, 그는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 차이로 그의 삶은 나보다 더 정의롭고, 더 비루해졌다.  - P43

법정형량을 공소장 부본에 포함된 활자의 개수로나눈다. 검사의 손끝에서 탄생한 활자 하나가 지탱하는 형량의 무게는 어느 정도일까? 각각의 접속사와 대명사들이 갖는구속력은? 공소장은 응당 무거워야 할 만큼 무거운 적이 없었다. 딱 필요한 만큼만 무거웠다. 그것은 언제나 낱장과 낱장의종이들이었다. 속박당하는 자의 삶만큼 구체적이지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내가 검사가 될 수 없었던 이유라고 생각했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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