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나는 나라에 있는 집에서 그런대로 고민하며 지냈다.다음에 어떤 소설을 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나라 생활에서 보통내하루는 참으로 담담하다. - P9
그러나 쓰지 못할 때 나는 사회적으로 무나 다름없다. 길바닥에 뒹구는 돌멩이보다 못하다. 글이 써지지 않는 나날이하도 오래 이어지는 바람에 나는 종종 로빈슨 크루소의 처지를생각하곤 했다. - P9
났다. 책상 앞에 앉아 있기도 싫어진 나는 자고 일어나도 자리를 개지 않고 드러누워 『고전 라쿠고』를 읽고 요재지이를 읽고 『기담이문 사전』읽으며 지냈다. 그것을도 거의 다 읽고 나서 마지막으로 붙든 거대한 작품이 『천일야화』였다.그러나 인생은 정말이지 무슨 일이 있을지 알 수 없다. - P10
이것이 소위 액자식 구성의 바깥 이야기로, 천일야화』에 담긴 방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셰에라자드가 왕에게 들려주는 식이다. 셰에라자드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또 이야기하기도 하는 터라 이를테면 이야기의 마트료시카 같은 상황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 P11
제1권의 첫머리에서, 언니와 함께 왕을 모시게 된 동생 두냐자드가 미리 의논한 대로 언니에게 자기 전에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다.그러면 셰에라자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제 당연한 소임으로서 기꺼이 이야기해드리지요. 훌륭하시고 고상하신 왕께서 허락해주신다면!" - P11
애초에 『천일야화』는 동양과 서양에 양다리를 걸치고 가짜사본과 자의적인 번역이 뒤섞인, 마치 그 자체가 이야기인 듯한 기기묘묘한 성립의 역사를 지닌다. - P12
이런 풍경을 어디선가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멍하니 있으려니 이런저런 이미지가 떠올랐다. 소년 시절 가족과 함께 갔던캠프의 추억과 더불어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로버트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 쥘 베른의 『신비의 섬』도 그러나 막상 중요한 것 하나가 생각나지 않았다. - P15
나는 숟가락을 손에 든 채 생각에 잠겼다.‘수수께끼의 책‘이라는 말이 내 머릿속을 따끔따끔 찔렀다.내가 ‘열대‘라고 중얼거리자 아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열대요?""그래! ‘열대야. 생각났어."내가 교토에서 살았던 학창 시절, 우연히 오카자키 근처의 헌책방에서 발견한 소설책, 1982년 출판, 작가는 사야마 쇼이치라는 인물이었다. 천일야화가 수수께끼의 책이라면 『열대』또한 수수께끼의 책이다. - P15
기타시라카와에 있던 다다미 넉장 반 크기의 집은 벽 하나전체가 책장이라, 나는 서점과 헌책방을 돌며 조금씩 책을 사모았다.책장이라는 것은 자신이 읽은 책, 읽고 있는 책, 가까운 시일내로 읽을 책, 언젠가 읽을 책, 언젠가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라믿고 싶은 책, 언젠가 읽을 수 있게 된다면 ‘후회 없는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책… 그런 책의 집합체요, 그곳에는 과거와 미래, 꿈과 희망, 작은 허영심이 뒤섞여 있다. - P16
그곳에서 사야마 쇼이치의 『열대』를 발견했다.입구 옆에 놓인 ‘100 엔 균일‘ 상자를 들여다보는데 그 책이눈에 띄었다. 왜 사고 싶었을까. 고풍스러운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값은 100엔이었고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나는 『열대』를 산 뒤 자전거를 타고 오카자키 간교칸으로갔다. - P17
너와 관계없는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그리하지 않으면 너는 원치 않는 것을 듣게 되리라.수수께끼 같은 문장으로 『열대』는 시작됐다.어떤 이야기인지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 P18
아무튼 어째 잘 알 수 없는 소설이다.이야기는 한 젊은이가 남양의 어느 외딴 섬 바닷가에 표류하는 데서 시작한다. 배가 난파된 것 같은데 젊은이는 기억을잃어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곳에 있는지, 이 섬이 어디인지 아무것도 모른다. 이윽고 날이 밝아오는 모래사장을 걷기 시작한젊은이는 아름다운 후미와 잔교를 발견하고 ‘사야마 쇼이치‘라는 이름의 남자를 만난다. - P18
나는 간교칸 로비에서 『열대』를 4분의 1정도 읽었다. 낡은책장에 인쇄된 흐릿한 활자와 시원한 냉방, 한산한 로비가 지금도 기억난다.이윽고 나는 정신이 들어 책을 덮었다.‘묘하게 끌리는 책이군. 아껴서 읽자.‘『열대』를 배낭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 P19
그로부터 며칠 동안 나는 『열대』를 조금씩 읽었다.눈에 보이지 않는 군도, ‘창조의 마술‘로 해역을 지배하는 마왕, 마술의 비밀을 노리는 ‘학파의 남자‘, 바다 위를 달리는 2량 열차, 전쟁을 암시하는 포대와 지하 감옥의 죄수, 바다건너 도서실에 드나드는 마왕의 딸………‘이 이야기는 대체 어떤 결말일까.‘ - P19
이상하게도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읽는 속도가 느려졌다.아는 궤변론부 부원에게서 들은 제논의 역설, 즉 ‘아킬레스와 거북이‘를 종종 연상했다. - P19
어쨌거나 반 정도 읽은 것은 확실하다.그러나 『열대』와의 이별은 갑작스레 찾아왔다.백중 연휴가 지나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분명히 머리맡에두었을 『열대』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해 방 안을 찾아봐도 없었다. 아르바이트하고 돌아와 한 번 더 찾아봤지만 역시 찾지 못했다. 어쩌면 가지고 나갔다가 어딘가에 두고 왔을지도 모른다. - P20
그렇게 생각했다.정말이지 아무것도 몰랐다.그로부터 16년이 흘렀다. 그동안 헌책방을 돌아다니고 고서시장을 헤매고 도서관을 찾아가고 인터넷을 뒤져봤지만, 『열대』에 대한 단서를 찾지 못했다. 2003년 나는 소설가로 데뷔해 이윽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국립 국회도서관에 취직했다. - P20
일주일 지난 8월 초, 나는 도쿄로 갔다.그날은 볼일 몇 가지를 처리한 뒤 국회도서관에서 함께 근무했던 옛 동료를 만날 계획이었다. 도서관을 퇴직하고 2011년 가을에 도쿄 센다기를 떠나 고향 나라로 돌아온 뒤로 벌써 7년이 지났다. - P21
다음 작품을 둘러싼 고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한 만남인데,나는 마감에 대한 증오심에 이성을 잃은 상황이니 이대로 논의를 계속한 의미가 없는 것은 명백했다. - P22
"그 소설에 대해 조사해 봤는데요.""………어떻습니까?""제목이 같은 책은 있었어요. 그렇지만 모리미 씨가 말씀하셨던 작품은 못 찾았거든요. 아는 소설가나 편집자한테도 물어봤는데 사야마 쇼이치라는 소설가는 아무도 모르던데요. 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 P23
"그래서 『열대』는 어떤 소설이었는데요?""그게 참 설명하기 쉽지 않습니다. 애초에 끝까지 읽지도 못했고 말이죠.""헉, 진짜요?""네, 진짜로. 이것도 이상한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 P24
"다음 작품으로 『열대』에 관해 쓰는 건 어떨까요?"".....그렇지만 『열대』를 다 읽지 못했는데요.""그러니까 환상의 소설에 관한 소설인 거예요."나는 살짝 구미가 당겨 생각해봤다. 아닌 게 아니라 ‘환상의소설‘이라는 아이디어는 소설가라면 한 번은 써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제재를 고르면 소설을 읽는 것, 쓰는 것에 대해 이래저래 망상할 수 있을 것이다.
런천에서 나오자 야스쿠니 거리에는 쪽빛 어스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거리의 불빛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건물 사이로 부는 바람은 의외로 시원했다."이 다음 일정은 어떻게 되세요?""수수께끼 독서 모임에 간딥니다.""어머나, 재미있겠는데요." - P25
유희는 마사로를 바닥에 내려놓고 마사로의 걸음걸이에 맞춰나란히 걸었다. 회사 AI의 권고에 따라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보기에는 꽤 잰걸음이었지만 다리가 짧아서 맞추기가 쉽지않은 속도였다. - P29
"여기 공사할 때는 지금보다 사람이 많았어. 학자니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니, 공사하고는 상관없는 사람들도 와 있었고,웃긴 화가가 있었는데, 스타일이 이상했어. 변신 로봇 화풍이라고 해야 하나. 뭘 그려도 변신 로봇으로 그리는 거야. (후략)" - P30
숙소 앞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생각난 듯 유희가 말했다."가만있어 봐. 그림을 사러 왔다는 건 성공했다는 말이잖아,그 수요곡선 수호자 프로젝트.""성공했지! 존엄한 마사로님이 으스스한 동네나 찾아다니다 끝난 건 아니니까." - P31
마사로는 한참 신이 나서 떠들었다. 좋아하는 주제를 만난 모양이었다. 유희는 그 질문을 한 것을 조금 후회했다."소장님의 다음 연구 목표는 즐거움을 정복하는 거였어. 인간감정 지도에서 행복, 기쁨, 즐거움, 만족, 존경 같은 긍정적인 감정이 주로 분포하는 영역에 도달하는 거." - P31
"로봇 내면에서 ‘에포트(effort)‘로 분류되고 측정되던 정신 작용을 확 줄여버린 거야. 애 말이야, 애 애를 덜 쓰게 된 거지. 그래야 해방되는 감정들이 있거든." - P32
"그래서 그다음은? 실험에 성공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유희가 열반의 다음 단계에 대한 갈망을 담아 캐물었다."시장경제의 줄넘기에 쏙 들어갈 수 있게 되지. 줄에 안 걸리고 자연스럽게 스르르" - P32
"저기, 그 표정은 뭐지? 오징어같이 생긴 로봇이 드디어 벽에레이저 광선을 쏴대는구나 하는 눈인데? 진정하고 자세히 봐봐. 내가 벽에 비춘 그림."유희가 천천히 다가서며 물었다."이게 뭔데?""바코드, QR 코드, 홀로그램 신용카드, 글로벌 지급 보증 시스템 거래 인증 코드 생성기, 뭐 그런 것들 잔뜩." - P33
그로부터 세 시간 뒤에 심해도시 전체에 경보음이 울렸다. 회사 AI가 예고한 대로 도시가 수면 쪽으로 천천히 올라간다는 신호였다. 수심이 얕아지면 수압도 낮아지므로 균열이 생긴 심해도시의 껍데기를 보존하기에 유리했다. - P34
유희는 마음속에 있는 해탈의 스위치를 더듬었다.마음이 슬쩍 그쪽으로 움직였다. 다행히 아직 그렇게까지 멀어져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천국으로 떠나는 아주 가까운 여행. 유희의 마음이 다시 무한한 기쁨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 P34
‘놓치고 싶지 않은데, 이 느낌?하지만 곧 현실 세계로 돌아와야 했다. 퇴거 전에 정리할 일이 아직 남아 있었으므로, 잠수함에 탈 때까지는 현실에 한 발을 걸쳐두어야 했다. - P35
"내가 깨운 거구나. 미안"마사로가 또 사과했다. 유희는 속으로 흠칫 놀랐다. 이 로봇은 어떻게 매번 정확하게 알아보는 걸까? 나도 이런 건 태어나 처음 겪는데. - P35
"7년 전에 보던 그림. 아까 저쪽으로 고래상어가 지나갔거든.그 그림 말인데, 아직 여기 어디에 있을 거야. 사람들 다 빠져나간 뒤에 나 혼자 남아서 보던 거니까. 그 뒤로 여기 들어왔다가 뭍으로 나간 사람 아직 없지?""없지. 공사 중단된 뒤로는 우리가 처음 들어왔는데 아직 안나갔으니까.""보고 싶어 찾아보자." - P36
"어디에 넣어놨는지 알 것 같아. 자재 창고 지하 저장고에 있을 거야. 창고 정리할 때 회사 AI가 너무 큰 물건은 지하에 갖다놓으라고 지시한 기억이 나.""그 애송이 인공지능? 그럼 뭔가 이상한데."마사로가 말했다. - P37
"왜? 누가 유인하는데?"유희가 물었다."왜냐면, 세상을 구해버릴까봐? 그리고 ‘누가‘ 부분은, 공급곡선 종사자들은 대체로 나 싫어해. 개미가 베짱이 싫어하듯이.그런데 자의식이 있는 기계의 절대다수는 공급곡선 쪽에 종사하고 있어서." - P37
"나도 몰라. 미끼가 보이면 덥석 물게 돼 있으니까 그렇겠지뭐. 공포 체험을 하도 해서 그럴지도. 그런데 전에도 지금이랑 똑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는 것 같아. 나, 기능이 워낙 인간적이라, 웬만한 기억은 덮어쓰기해서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래 감이야, 감." - P38
크고래 떼가 지나가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 때 유희가 마사로에게 말했다."여기 떠나면 저 광경 다시는 못 볼 거야. 잘 저장해놔.""나는 아마 이번에도 밖으로 못 나갈걸."마사로가 경쾌한 걸음으로 창고 쪽으로 걸어갔다. 유희는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피식 웃었다. - P39
사실상 유희 혼자 끙끙대며 그림을 문밖으로 꺼내는데 회사 AI에게서 연락이 왔다. 실사팀이 가지고 들어온 물건이 아니면 외부반출이 불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 P39
왜 보냈는지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일방적인 통지 형식이어서 회신할 필요는 없었다. 하나 마나 한 소리이기도 했다. - P39
예상보다 훨씬 큰 그림이었다. 마사로가 그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손을 앞으로 모은 모양이 꼭 그래보였다. 유희는 감탄하는 로봇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P40
유희가 먼저 입을 뗐다."흠, 나는 전혀 못 알아보겠는데."마사로가 진지하게 대꾸했다."알아보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야, 마음으로 보고 있으면 왠지 막 웃기지 않아?"마사로가 손으로 가슴을 퉁퉁 두드렸다. - P41
예전에 읽었던 책. 아야츠키 유키토 작가의 연작 ‘관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이지만 읽은 것은 꽤 나중이었다. 트릭에 초첨을 맞우면 꽤 난해하다는 생각도 들고, 본명보단 별명으로 이야기를 하긴 하지만, 정확히 뭔지 모를, 그런 느낌에서인지 살인자와 탐정을 제외하곤 인형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다른 관 작품들보다는 호감이 있다, 첫 작품이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동명의 애니메이션 원작인 ‘어나더‘를 보고 난 이후에 이름을 기억하게 된 작가다. 서술트릭이 자주 나오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안개는 여전히 창백하게 소용돌이치며 끈질기게 휘감겨와 현실감을 흐리게 한다. 가와미나미는 현실감이 흐려지는 것에 대한 저항은 거의 포기했다. 하지만 최소한의 주의마저 게을리 할 수는 없다. - P24
이 내 몸은 나의 이 의식은 내 존재는 내 시간은 나의 이……….………… 느닷없이 주위 풍경이 변했다.이대로 영원히 내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들게 만들었던 안개의 밀도가 문득 옅어진다. - P25
어깨와 팔 근육에서 힘이 쑥 빠졌다. 정신과 연동된 육체가 강요했던 긴장이 스스로 느꼈던 것보다 훨씬 컸던 모양이다.・・・・・…좀 쉴까?담배를 피우고 싶다. 목도 마르다. - P25
셔츠 가슴에 달린 주머니에는 몇 개비 남지 않은 담뱃갑.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나서 한 개비 빼어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깊이 들이마신 담배연기는 머리가 핑 돌 정도로 맛있다. 내뿜은 연기가 안개 속으로 흩어졌다. - P26
그와 동시에....작년 여름 이후로는 처음인가?가와미나미는 문득 생각한다.작년 여름, 7월 초의 일이었다.나이는 위지만 친구처럼 지내는 담당 작가 시시야가도미鹿谷門美와 함께 가와미나미는 홋카이도로 날아갔다. 생물학자인 아모 다쓰야지박사의 의뢰로 예전에 나카무라 세이지가 설계했다는 ‘흑묘관‘을 찾기 위해서였다. - P27
똑같이 짙은 안개라도 보는 장소나 상황에 따라 이렇게 느낌이 달라지는 걸까? - 이런 당연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도대체 왜일까?바뀐 것은 장소와 상황만이 아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 자신이 지난 여름과 지금은 크게 변해 버렸으니까. - P27
시시야의 목소리가 당장에라도 옆에서 들려올 것 같았다. 우연히 알게 된 지 이럭저럭 6년째가 된다. 5년 6개월 전에 만났을 때부터 그는 가와미나미란 성을 계속 ‘코난‘ 이라고 불렀다. - P28
내가 지금 이렇게 혼자서 암흑관으로 가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히 그 사람은 이렇게 주의를 줄 게 틀림없겠지만.-자네나 나나 세이지의 저택과는 계속 묘한 인연이 있으니까 말이야. 섣불리 접근하지 않은 게 나을 걸세. 혹시라도 접근한다면 그만한 각오가 필요해. 불길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나 해야 할까? 자칫하면 또 무슨 사건에 휘말리지 않을 거라고는 단정할 수 없단 말이야. - P28
그리고 반쯤은 자기를 타이르듯이 중얼거렸다."괜찮을 겁니다. 그냥 단순히 구경만 하러 갈 뿐 ・・・・・… 그뿐이니까요."짧아진 담배를 땅바닥에 버리고, 검은 워킹 슈즈의 발끝으로 밟아껐다. - P29
·나카무라 세이지. 오이타 현 동쪽 바다에 떠 있는 츠노시마란 작은 섬에서 살다가 거기서 죽어간 사나이 여러 개의 이상한 건물들을 설계한 것으로 알려진, 일종의 천재라는 느낌이 드는 건축가. - P30
나카무라 치오리는 열아홉 살에 뜻하지 않은 사고로 세상을 떴다.9개월 뒤, 츠노시마 섬의 청옥부에는 큰불이 나 완전히 불타버렸다.부인 가즈에, 저택의 일꾼들과 함께 세이지는 세상을 떴다. 향년 46세, 지금으로부터 딱 6년 전, 1985년 9월의 일이었다. - P30
도메키토게 고개의 아우성을 뒤로 하고 차는 구불구불 이어진 산길을 간다.안개는 완전히 걷히고 시야도 트였지만 하늘은 푸르지 않다. 조금전의 짙은 안개가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버린 듯이 어둡고 창백한 구름이 드리워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의 움직임이 묘하게 느리게 느껴졌다. 흔들리는 나뭇잎이 이상하게 색 바랜 빛깔로 보였다. - P31
그때도 말하자면 똑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던 것을 기억한다. 2년 전-1989년 7월 말.희담사에 입사해 바로 배치된 월간 《CHAOS》의 ‘특별기획‘ . 그 취재 현장인 가마쿠라의 ‘시계관‘으로 가던 길이었다.교외를 달리는 택시 안에서 가와미나미는 그것을 느꼈다. 한적한주택가를 빠져나가 몇 번째인가 모퉁이를 돌았을 때, 커다란 가시나무 숲이 양쪽 옆을 에워쌌다. 그때 -.경계선을 넘어섰다. - P32
그로부터 사흘간 일어났던 그야말로 ‘악몽‘ 같은 연속 살인………….-시간은 끝이 나고- 성당에 일곱 가지 색이 비치고그랬다. 이것은 시계관의 첫 주인이었던 고가古峨정계사의 전회장, 고가 미치노리남겼던 ‘예언의 시. - P32
예를 들면 오카야마 산속의 주차관 - 묵직한 3연속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고성 같은 저택. 희대의 환상화가 후지누마 잇세이가 그린 모든 작품이 수집되어 있는 그 저택에서 무서운 폭풍이 불던 날 밤에 일어났던 불가사의한 참극. 그리고 고반도숲 속에 세워진 ‘미로‘ 그리스 신화의 미노스 궁전을 모티브로 만든 지하의 미로 저택. 원로작가 미야가키 요타로宮郎의막대한 유산을 둘러싸고, 전체가 밀실이 되어버린 그 저택 안에서 벌어졌던 기괴한 연속 살인극. - P33
그런 피비린내 나는 사건과는 결코 연관되고 싶지 않다. 절대로 그런 체험을 또다시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러한 저택들에 대해 지금 묘한 그리움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 P34
무섭다. 처참하다, 끔찍하다 슬프다, 화가 난다………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로 가득한 할 수만 있다면 마음 깊숙한밑바닥에 봉인해버리고 싶은 기억일 텐데.어째서일까? - P34
일상 세계에서는 지극히 일반적인, 아주 흔한 형태의 죽음. 모든이의 일상 뒤에 늘 딱 달라붙어 있는 죽음. 세이지의 관‘에서 보았던끔찍한 죽음과는 전혀 다르다. 드문 일도 아니고, 극적이지도 않다.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현대인답다고도 할 수 있는 죽음이 이토록 이토록······ - P35
마음에 새겨져 아무래도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 몇 가지 있다. 다음은.......······ 6월 3일, 월요일.오후 4시 8분이라는 시각까지 가와미나미는 또렷하게 기억하고있다. - P40
작년 11월 2백 년간의 잠에서 깨어난 후겐다케 산 그 산꼭대기에형성된 거대한 용암 돔이 무너지면서 전에 없는 대규모 화산재가 흘러내려 산기슭의 기타가미코바北???와 미나미가미코바와南???라는 두 마을을 휩쓸었다고 한다. 마침현장에 있던 매스컴 관계자와화산 연구자 등 수많은 사람들이 행방불명되어 생존 가능성은 거의없었고, 그밖에도 수많은 중경상자가 나왔다………….병원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6시경이었던가? - P40
"가엾게도."TV에서 시선을 돌리며 어머니가 중얼거렸다. 슬픔을 더 표현하고싶지만 그럴 힘이 없다는 듯, 억양이 없는 목소리였다."다들 불쌍하구나… 사람이나, 마을이나, 나무나, 산이나.""대체 언제까지 계속될까?"이모는 오히려 좀 과장한 듯 느껴지는 억양으로 말했다. - P41
입가로 가져간 오른손이 산소마스크를 옆으로 밀었다. 가와미나미가 원래대로 되돌리려하자 어머니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그리고"죽여다오."힘없이 숨을 쉬며 알아듣기 힘든 말투였지만 어머니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 P44
가와미나미의 마음속에 있던 그런 생각들이 둑이 터진 듯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꽉 쥔 주먹이 싸늘하게 마비되었다. 무너져버릴 것같은 아픈 가슴 때문에 숨도 제대로 들이쉴 수 없었다.어째서 이렇게 하면서까지. 어째서 이렇게 해서까지. 어째서・・・・・아아, 그렇다. 이런 생각은 물론 어머니가 가장 절실할 것이다. - P45
그 뒤의 기억은 왠지 조각조각이고 비틀거리며 뛰쳐나온 어둑어둑한 복도 뒤를 돌아보는 간호사들의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휠체어의 노인. 계단을 달려 내려가던 유난히 컸던 발소리,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창밖에서 들려오고, 로비를 오가는 수많은 낯선 얼굴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안내방송의 중성적인 목소리. 누군가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고 있다. 종합 접수창구앞의 긴 의자에 노란 옷을 입은 어린 여자아이가 오도카니 앉아 있고.... - P46
여기서 언론의 과잉반응에 대하여 언급해야겠다. 《차이퉁》지뿐만 아니라 다른 신문들까지도 실제로 한 저널리스트의 피살 사건을 특별히 더 나쁜, 특히 경악스럽고, 거의 장엄하기까지한, 그러니까 종교 의식적인 살해와 같은 수준으로 다루고 있기때문이다. - P15
왜냐하면 블룸같이 영리하고 거의 냉정하다고 할 정도의 사람이 왜 살인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는지, 왜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낸 결정적인 순간에 권총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방아쇠를 당기기까지 했는지의 문제를 앞으로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 P16
어쨌거나 카타리나 블룸은 5년 동안 시가 총액 10만 마르크짜리 아파트에 현금 6만 마르크를 투자했는데, 현재 경미한 금고형으로 복역 중인 그녀의 오빠가 표현했듯이 "손에 꽉 쥔 것을 먼지 털듯 털어 내게" 생겼다. - P16
그는 "자기 직업의 희생자"가 아니라, 아마도 질투극의희생자였기 때문이었을까? 아랍 족장의 복장과 권총(08구경)은증거 보관실에 있고, 이 권총의 출처를 아는 사람은 블로르나뿐이다. - P17
문제의 나흘 중 처음 며칠에 대해서는 블룸의 행적에 관한 조사가 잘 되어 갔지만, 일요일에 와서 꽉 막혀버렸다. - P17
그녀는 그날 저녁 그녀의 대모이자 친구이며 가장 신뢰하는 엘제 볼터스하임의 집에서 열리는 작은 댄스파티에 초대받아 무척 기쁘다고, 오랫동안 춤출 기회가 없었다면서 블로르나 부부에게 좋아라 하며 전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 블로르나 부인이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생략) - P17
조사에서 금방 드러났듯이, 수요일 오후 카타리나는 히페르츠 부부 집에서 두 시간 더 일을 했다. 이따금 그 집에서 부르면가서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히페르츠 부부 역시 카니발 기간동안 이 도시를 떠나 렘고에 있는 딸에게 가기 때문에, 카타리나는 이 노부부를 자신의 폴크스바겐으로 역까지 모셔다 드렸다. 엄청난 주차난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고집을 부려, 그들을 플랫폼까지 전송하고 짐을 들어다 주었다. - P18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저녁 7시 25분에 볼터스하임 부인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모습을 나타냈기 때문이다.그것도 그곳까지 자동차가 아니라 전철을 타고 왔다. 그녀는 베두인 여자로도, 안달루시아 여자로도 분장하지 않았고 그저 머리에 빨간 카네이션을 꽂고 빨간 스타킹과 구두를 신었으며, 벌꿀 빛깔의 중국 하남산 실크로 된 블라우스를 목까지 여미고, 같은 색깔의 평범한 트위드 스커트를 입었다. - P18
그녀가 볼터스하임의 집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수사는쉬워졌다. 카타리나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지만, 저녁 7시 25분부터 그녀는 경찰의 감시 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 P19
하흐 검사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에르빈 바이츠메네 수사과장이 블룸이 괴텐과 함께 볼터스하임의집을 떠나는 순간부터 볼터스하임과 블룸의 집 전화를 도청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추문에 가까운 법조계 내부 소문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 덕분이기 때문이다. - P19
분명히 괴텐은 카타리나의 집에서 전화를 하지 않았다. 아무튼 하흐는 그것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다. 확실한 것은, 카타리나의 아파트가 철저하게 감시되었다는 점이다. - P20
그녀는 전혀 놀라지 않았고, "의기양양하지는 않아도" 태연해 보였다는 점에서 의심을 받았다. 그녀는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마거리트 꽃문양이 수놓인 초록색면 목욕 가운만 걸치고 있었다. 괴텐이 어디 있느냐는 바이츠메네 수사과장의 질문에 블룸은 그가 언제 아파트를 떠났는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 P20
블로르나와 그의 부인은 카타리나 블룸이 성적인 면에서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고 거의 결벽에 가깝다고 진술하고 있기 때문에, 확실하게 잡았다고 생각한 괴텐이 사라져서 아주 화가 나 있던 바이츠메네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질문을 던졌을 가능성에 대해 여기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 P21
만일 바이츠메네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면, 그 순간부터 그와 카타리나 사이에는 어떤 종류의 신뢰감도 생길 수 없었다고 단정할 수 있다. - P21
그래서 아주 매력적인 블룸이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싱크대에 기대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런 음탕한 생각이 그 자신의 뇌리를 스쳐지나갔을 수도 있고, 그가 기꺼이 이런 질문을 던지거나 혹은 그렇게 거칠게 표현된 행위를 기꺼이 그녀와 해 보고 싶어 했을 수도 있다. - P22
경찰은 카타리나가 핸드백을 들고 가는 것을 허락했다. 구속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잠옷, 화장품 케이스, 읽을거리를 가져갈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녀의 집에서 발견된 책은 연애소설 네 권, 탐정소설세권, 나폴레옹과 크리스티나 스웨덴 여왕의 전기가 전부였다. - P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