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는 마사로를 바닥에 내려놓고 마사로의 걸음걸이에 맞춰나란히 걸었다. 회사 AI의 권고에 따라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보기에는 꽤 잰걸음이었지만 다리가 짧아서 맞추기가 쉽지않은 속도였다. - P29

"여기 공사할 때는 지금보다 사람이 많았어. 학자니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니, 공사하고는 상관없는 사람들도 와 있었고,
웃긴 화가가 있었는데, 스타일이 이상했어. 변신 로봇 화풍이라고 해야 하나. 뭘 그려도 변신 로봇으로 그리는 거야. (후략)" - P30

숙소 앞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생각난 듯 유희가 말했다.
"가만있어 봐. 그림을 사러 왔다는 건 성공했다는 말이잖아,
그 수요곡선 수호자 프로젝트."
"성공했지! 존엄한 마사로님이 으스스한 동네나 찾아다니다 끝난 건 아니니까." - P31

마사로는 한참 신이 나서 떠들었다. 좋아하는 주제를 만난 모양이었다. 유희는 그 질문을 한 것을 조금 후회했다.
"소장님의 다음 연구 목표는 즐거움을 정복하는 거였어. 인간감정 지도에서 행복, 기쁨, 즐거움, 만족, 존경 같은 긍정적인 감정이 주로 분포하는 영역에 도달하는 거." - P31

"로봇 내면에서 ‘에포트(effort)‘로 분류되고 측정되던 정신 작용을 확 줄여버린 거야. 애 말이야, 애 애를 덜 쓰게 된 거지. 그래야 해방되는 감정들이 있거든." - P32

"그래서 그다음은? 실험에 성공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
유희가 열반의 다음 단계에 대한 갈망을 담아 캐물었다.
"시장경제의 줄넘기에 쏙 들어갈 수 있게 되지. 줄에 안 걸리고 자연스럽게 스르르" - P32

"저기, 그 표정은 뭐지? 오징어같이 생긴 로봇이 드디어 벽에레이저 광선을 쏴대는구나 하는 눈인데? 진정하고 자세히 봐봐. 내가 벽에 비춘 그림."
유희가 천천히 다가서며 물었다.
"이게 뭔데?"
"바코드, QR 코드, 홀로그램 신용카드, 글로벌 지급 보증 시스템 거래 인증 코드 생성기, 뭐 그런 것들 잔뜩." - P33

그로부터 세 시간 뒤에 심해도시 전체에 경보음이 울렸다. 회사 AI가 예고한 대로 도시가 수면 쪽으로 천천히 올라간다는 신호였다. 수심이 얕아지면 수압도 낮아지므로 균열이 생긴 심해도시의 껍데기를 보존하기에 유리했다. - P34

유희는 마음속에 있는 해탈의 스위치를 더듬었다.
마음이 슬쩍 그쪽으로 움직였다. 다행히 아직 그렇게까지 멀어져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천국으로 떠나는 아주 가까운 여행. 유희의 마음이 다시 무한한 기쁨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 P34

‘놓치고 싶지 않은데, 이 느낌?
하지만 곧 현실 세계로 돌아와야 했다. 퇴거 전에 정리할 일이 아직 남아 있었으므로, 잠수함에 탈 때까지는 현실에 한 발을 걸쳐두어야 했다. - P35

"내가 깨운 거구나. 미안"
마사로가 또 사과했다. 유희는 속으로 흠칫 놀랐다. 이 로봇은 어떻게 매번 정확하게 알아보는 걸까? 나도 이런 건 태어나 처음 겪는데. - P35

"7년 전에 보던 그림. 아까 저쪽으로 고래상어가 지나갔거든.
그 그림 말인데, 아직 여기 어디에 있을 거야. 사람들 다 빠져나간 뒤에 나 혼자 남아서 보던 거니까. 그 뒤로 여기 들어왔다가 뭍으로 나간 사람 아직 없지?"
"없지. 공사 중단된 뒤로는 우리가 처음 들어왔는데 아직 안나갔으니까."
"보고 싶어 찾아보자." - P36

"어디에 넣어놨는지 알 것 같아. 자재 창고 지하 저장고에 있을 거야. 창고 정리할 때 회사 AI가 너무 큰 물건은 지하에 갖다놓으라고 지시한 기억이 나."
"그 애송이 인공지능? 그럼 뭔가 이상한데."
마사로가 말했다. - P37

"왜? 누가 유인하는데?"
유희가 물었다.
"왜냐면, 세상을 구해버릴까봐? 그리고 ‘누가‘ 부분은, 공급곡선 종사자들은 대체로 나 싫어해. 개미가 베짱이 싫어하듯이.
그런데 자의식이 있는 기계의 절대다수는 공급곡선 쪽에 종사하고 있어서." - P37

"나도 몰라. 미끼가 보이면 덥석 물게 돼 있으니까 그렇겠지뭐. 공포 체험을 하도 해서 그럴지도. 그런데 전에도 지금이랑 똑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는 것 같아. 나, 기능이 워낙 인간적이라, 웬만한 기억은 덮어쓰기해서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래 감이야, 감." - P38

크고래 떼가 지나가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 때 유희가 마사로에게 말했다.
"여기 떠나면 저 광경 다시는 못 볼 거야. 잘 저장해놔."
"나는 아마 이번에도 밖으로 못 나갈걸."
마사로가 경쾌한 걸음으로 창고 쪽으로 걸어갔다. 유희는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피식 웃었다. - P39

사실상 유희 혼자 끙끙대며 그림을 문밖으로 꺼내는데 회사 AI에게서 연락이 왔다. 실사팀이 가지고 들어온 물건이 아니면 외부반출이 불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 P39

 왜 보냈는지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일방적인 통지 형식이어서 회신할 필요는 없었다. 하나 마나 한 소리이기도 했다.  - P39

예상보다 훨씬 큰 그림이었다. 마사로가 그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손을 앞으로 모은 모양이 꼭 그래보였다. 유희는 감탄하는 로봇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P40

유희가 먼저 입을 뗐다.
"흠, 나는 전혀 못 알아보겠는데."
마사로가 진지하게 대꾸했다.
"알아보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야, 마음으로 보고 있으면 왠지 막 웃기지 않아?"
마사로가 손으로 가슴을 퉁퉁 두드렸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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