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나는 나라에 있는 집에서 그런대로 고민하며 지냈다.
다음에 어떤 소설을 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라 생활에서 보통내하루는 참으로 담담하다. - P9

그러나 쓰지 못할 때 나는 사회적으로 무나 다름없다. 길바닥에 뒹구는 돌멩이보다 못하다. 글이 써지지 않는 나날이하도 오래 이어지는 바람에 나는 종종 로빈슨 크루소의 처지를생각하곤 했다. - P9

났다. 책상 앞에 앉아 있기도 싫어진 나는 자고 일어나도 자리를 개지 않고 드러누워 『고전 라쿠고』를 읽고 요재지이를 읽고 『기담이문 사전』읽으며 지냈다. 그것을도 거의 다 읽고 나서 마지막으로 붙든 거대한 작품이 『천일야화』였다.
그러나 인생은 정말이지 무슨 일이 있을지 알 수 없다. - P10

이것이 소위 액자식 구성의 바깥 이야기로, 천일야화』에 담긴 방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셰에라자드가 왕에게 들려주는 식이다. 셰에라자드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또 이야기하기도 하는 터라 이를테면 이야기의 마트료시카 같은 상황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 P11

제1권의 첫머리에서, 언니와 함께 왕을 모시게 된 동생 두냐자드가 미리 의논한 대로 언니에게 자기 전에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다.
그러면 셰에라자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 당연한 소임으로서 기꺼이 이야기해드리지요. 훌륭하시고 고상하신 왕께서 허락해주신다면!" - P11

애초에 『천일야화』는 동양과 서양에 양다리를 걸치고 가짜사본과 자의적인 번역이 뒤섞인, 마치 그 자체가 이야기인 듯한 기기묘묘한 성립의 역사를 지닌다. - P12

이런 풍경을 어디선가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멍하니 있으려니 이런저런 이미지가 떠올랐다. 소년 시절 가족과 함께 갔던캠프의 추억과 더불어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로버트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 쥘 베른의 『신비의 섬』도 그러나 막상 중요한 것 하나가 생각나지 않았다. - P15

나는 숟가락을 손에 든 채 생각에 잠겼다.
‘수수께끼의 책‘이라는 말이 내 머릿속을 따끔따끔 찔렀다.
내가 ‘열대‘라고 중얼거리자 아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열대요?"
"그래! ‘열대야. 생각났어."
내가 교토에서 살았던 학창 시절, 우연히 오카자키 근처의 헌책방에서 발견한 소설책, 1982년 출판, 작가는 사야마 쇼이치라는 인물이었다. 천일야화가 수수께끼의 책이라면 『열대』또한 수수께끼의 책이다. - P15

기타시라카와에 있던 다다미 넉장 반 크기의 집은 벽 하나전체가 책장이라, 나는 서점과 헌책방을 돌며 조금씩 책을 사모았다.
책장이라는 것은 자신이 읽은 책, 읽고 있는 책, 가까운 시일내로 읽을 책, 언젠가 읽을 책, 언젠가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라믿고 싶은 책, 언젠가 읽을 수 있게 된다면 ‘후회 없는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책… 그런 책의 집합체요, 그곳에는 과거와 미래, 꿈과 희망, 작은 허영심이 뒤섞여 있다. - P16

그곳에서 사야마 쇼이치의 『열대』를 발견했다.
입구 옆에 놓인 ‘100 엔 균일‘ 상자를 들여다보는데 그 책이눈에 띄었다. 왜 사고 싶었을까. 고풍스러운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값은 100엔이었고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나는 『열대』를 산 뒤 자전거를 타고 오카자키 간교칸으로갔다. - P17

너와 관계없는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
그리하지 않으면 너는 원치 않는 것을 듣게 되리라.

수수께끼 같은 문장으로 『열대』는 시작됐다.
어떤 이야기인지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 P18

아무튼 어째 잘 알 수 없는 소설이다.
이야기는 한 젊은이가 남양의 어느 외딴 섬 바닷가에 표류하는 데서 시작한다. 배가 난파된 것 같은데 젊은이는 기억을잃어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곳에 있는지, 이 섬이 어디인지 아무것도 모른다. 이윽고 날이 밝아오는 모래사장을 걷기 시작한젊은이는 아름다운 후미와 잔교를 발견하고 ‘사야마 쇼이치‘라는 이름의 남자를 만난다. - P18

나는 간교칸 로비에서 『열대』를 4분의 1정도 읽었다. 낡은책장에 인쇄된 흐릿한 활자와 시원한 냉방, 한산한 로비가 지금도 기억난다.
이윽고 나는 정신이 들어 책을 덮었다.
‘묘하게 끌리는 책이군. 아껴서 읽자.‘
『열대』를 배낭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 P19

그로부터 며칠 동안 나는 『열대』를 조금씩 읽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군도, ‘창조의 마술‘로 해역을 지배하는 마왕, 마술의 비밀을 노리는 ‘학파의 남자‘, 바다 위를 달리는 2량 열차, 전쟁을 암시하는 포대와 지하 감옥의 죄수, 바다건너 도서실에 드나드는 마왕의 딸………
‘이 이야기는 대체 어떤 결말일까.‘ - P19

이상하게도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읽는 속도가 느려졌다.
아는 궤변론부 부원에게서 들은 제논의 역설, 즉 ‘아킬레스와 거북이‘를 종종 연상했다. - P19

어쨌거나 반 정도 읽은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열대』와의 이별은 갑작스레 찾아왔다.
백중 연휴가 지나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분명히 머리맡에두었을 『열대』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해 방 안을 찾아봐도 없었다. 아르바이트하고 돌아와 한 번 더 찾아봤지만 역시 찾지 못했다. 어쩌면 가지고 나갔다가 어딘가에 두고 왔을지도 모른다. - P20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로부터 16년이 흘렀다. 그동안 헌책방을 돌아다니고 고서시장을 헤매고 도서관을 찾아가고 인터넷을 뒤져봤지만, 『열대』에 대한 단서를 찾지 못했다. 2003년 나는 소설가로 데뷔해 이윽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국립 국회도서관에 취직했다. - P20

일주일 지난 8월 초, 나는 도쿄로 갔다.
그날은 볼일 몇 가지를 처리한 뒤 국회도서관에서 함께 근무했던 옛 동료를 만날 계획이었다. 도서관을 퇴직하고 2011년 가을에 도쿄 센다기를 떠나 고향 나라로 돌아온 뒤로 벌써 7년이 지났다. - P21

다음 작품을 둘러싼 고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한 만남인데,
나는 마감에 대한 증오심에 이성을 잃은 상황이니 이대로 논의를 계속한 의미가 없는 것은 명백했다. - P22

"그 소설에 대해 조사해 봤는데요."
"………어떻습니까?"
"제목이 같은 책은 있었어요. 그렇지만 모리미 씨가 말씀하셨던 작품은 못 찾았거든요. 아는 소설가나 편집자한테도 물어봤는데 사야마 쇼이치라는 소설가는 아무도 모르던데요. 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 P23

"그래서 『열대』는 어떤 소설이었는데요?"
"그게 참 설명하기 쉽지 않습니다. 애초에 끝까지 읽지도 못했고 말이죠."
"헉, 진짜요?"
"네, 진짜로. 이것도 이상한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 P24

"다음 작품으로 『열대』에 관해 쓰는 건 어떨까요?"
".....그렇지만 『열대』를 다 읽지 못했는데요."
"그러니까 환상의 소설에 관한 소설인 거예요."
나는 살짝 구미가 당겨 생각해봤다. 아닌 게 아니라 ‘환상의소설‘이라는 아이디어는 소설가라면 한 번은 써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제재를 고르면 소설을 읽는 것, 쓰는 것에 대해 이래저래 망상할 수 있을 것이다.

런천에서 나오자 야스쿠니 거리에는 쪽빛 어스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거리의 불빛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건물 사이로 부는 바람은 의외로 시원했다.
"이 다음 일정은 어떻게 되세요?"
"수수께끼 독서 모임에 간딥니다."
"어머나, 재미있겠는데요."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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