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는 여전히 창백하게 소용돌이치며 끈질기게 휘감겨와 현실감을 흐리게 한다. 가와미나미는 현실감이 흐려지는 것에 대한 저항은 거의 포기했다. 하지만 최소한의 주의마저 게을리 할 수는 없다. - P24
이 내 몸은 나의 이 의식은 내 존재는 내 시간은 나의 이………. ………… 느닷없이 주위 풍경이 변했다. 이대로 영원히 내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들게 만들었던 안개의 밀도가 문득 옅어진다. - P25
어깨와 팔 근육에서 힘이 쑥 빠졌다. 정신과 연동된 육체가 강요했던 긴장이 스스로 느꼈던 것보다 훨씬 컸던 모양이다. ・・・・・…좀 쉴까? 담배를 피우고 싶다. 목도 마르다. - P25
셔츠 가슴에 달린 주머니에는 몇 개비 남지 않은 담뱃갑.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나서 한 개비 빼어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깊이 들이마신 담배연기는 머리가 핑 돌 정도로 맛있다. 내뿜은 연기가 안개 속으로 흩어졌다. - P26
그와 동시에.... 작년 여름 이후로는 처음인가? 가와미나미는 문득 생각한다. 작년 여름, 7월 초의 일이었다. 나이는 위지만 친구처럼 지내는 담당 작가 시시야가도미鹿谷門美와 함께 가와미나미는 홋카이도로 날아갔다. 생물학자인 아모 다쓰야지박사의 의뢰로 예전에 나카무라 세이지가 설계했다는 ‘흑묘관‘을 찾기 위해서였다. - P27
똑같이 짙은 안개라도 보는 장소나 상황에 따라 이렇게 느낌이 달라지는 걸까? - 이런 당연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도대체 왜일까? 바뀐 것은 장소와 상황만이 아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 자신이 지난 여름과 지금은 크게 변해 버렸으니까. - P27
시시야의 목소리가 당장에라도 옆에서 들려올 것 같았다. 우연히 알게 된 지 이럭저럭 6년째가 된다. 5년 6개월 전에 만났을 때부터 그는 가와미나미란 성을 계속 ‘코난‘ 이라고 불렀다. - P28
내가 지금 이렇게 혼자서 암흑관으로 가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히 그 사람은 이렇게 주의를 줄 게 틀림없겠지만. -자네나 나나 세이지의 저택과는 계속 묘한 인연이 있으니까 말이야. 섣불리 접근하지 않은 게 나을 걸세. 혹시라도 접근한다면 그만한 각오가 필요해. 불길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나 해야 할까? 자칫하면 또 무슨 사건에 휘말리지 않을 거라고는 단정할 수 없단 말이야. - P28
그리고 반쯤은 자기를 타이르듯이 중얼거렸다. "괜찮을 겁니다. 그냥 단순히 구경만 하러 갈 뿐 ・・・・・… 그뿐이니까요." 짧아진 담배를 땅바닥에 버리고, 검은 워킹 슈즈의 발끝으로 밟아껐다. - P29
·나카무라 세이지. 오이타 현 동쪽 바다에 떠 있는 츠노시마란 작은 섬에서 살다가 거기서 죽어간 사나이 여러 개의 이상한 건물들을 설계한 것으로 알려진, 일종의 천재라는 느낌이 드는 건축가. - P30
나카무라 치오리는 열아홉 살에 뜻하지 않은 사고로 세상을 떴다. 9개월 뒤, 츠노시마 섬의 청옥부에는 큰불이 나 완전히 불타버렸다. 부인 가즈에, 저택의 일꾼들과 함께 세이지는 세상을 떴다. 향년 46세, 지금으로부터 딱 6년 전, 1985년 9월의 일이었다. - P30
도메키토게 고개의 아우성을 뒤로 하고 차는 구불구불 이어진 산길을 간다. 안개는 완전히 걷히고 시야도 트였지만 하늘은 푸르지 않다. 조금전의 짙은 안개가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버린 듯이 어둡고 창백한 구름이 드리워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의 움직임이 묘하게 느리게 느껴졌다. 흔들리는 나뭇잎이 이상하게 색 바랜 빛깔로 보였다. - P31
그때도 말하자면 똑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던 것을 기억한다. 2년 전-1989년 7월 말. 희담사에 입사해 바로 배치된 월간 《CHAOS》의 ‘특별기획‘ . 그 취재 현장인 가마쿠라의 ‘시계관‘으로 가던 길이었다. 교외를 달리는 택시 안에서 가와미나미는 그것을 느꼈다. 한적한주택가를 빠져나가 몇 번째인가 모퉁이를 돌았을 때, 커다란 가시나무 숲이 양쪽 옆을 에워쌌다. 그때 -. 경계선을 넘어섰다. - P32
그로부터 사흘간 일어났던 그야말로 ‘악몽‘ 같은 연속 살인………….
-시간은 끝이 나고 - 성당에 일곱 가지 색이 비치고
그랬다. 이것은 시계관의 첫 주인이었던 고가古峨정계사의 전회장, 고가 미치노리남겼던 ‘예언의 시. - P32
예를 들면 오카야마 산속의 주차관 - 묵직한 3연속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고성 같은 저택. 희대의 환상화가 후지누마 잇세이가 그린 모든 작품이 수집되어 있는 그 저택에서 무서운 폭풍이 불던 날 밤에 일어났던 불가사의한 참극. 그리고 고반도숲 속에 세워진 ‘미로‘ 그리스 신화의 미노스 궁전을 모티브로 만든 지하의 미로 저택. 원로작가 미야가키 요타로宮郎의막대한 유산을 둘러싸고, 전체가 밀실이 되어버린 그 저택 안에서 벌어졌던 기괴한 연속 살인극. - P33
그런 피비린내 나는 사건과는 결코 연관되고 싶지 않다. 절대로 그런 체험을 또다시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러한 저택들에 대해 지금 묘한 그리움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 P34
무섭다. 처참하다, 끔찍하다 슬프다, 화가 난다………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로 가득한 할 수만 있다면 마음 깊숙한밑바닥에 봉인해버리고 싶은 기억일 텐데. 어째서일까? - P34
일상 세계에서는 지극히 일반적인, 아주 흔한 형태의 죽음. 모든이의 일상 뒤에 늘 딱 달라붙어 있는 죽음. 세이지의 관‘에서 보았던끔찍한 죽음과는 전혀 다르다. 드문 일도 아니고, 극적이지도 않다.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현대인답다고도 할 수 있는 죽음이 이토록 이토록······ - P35
마음에 새겨져 아무래도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 몇 가지 있다. 다음은....... ······ 6월 3일, 월요일. 오후 4시 8분이라는 시각까지 가와미나미는 또렷하게 기억하고있다. - P40
작년 11월 2백 년간의 잠에서 깨어난 후겐다케 산 그 산꼭대기에형성된 거대한 용암 돔이 무너지면서 전에 없는 대규모 화산재가 흘러내려 산기슭의 기타가미코바北???와 미나미가미코바와南???라는 두 마을을 휩쓸었다고 한다. 마침현장에 있던 매스컴 관계자와화산 연구자 등 수많은 사람들이 행방불명되어 생존 가능성은 거의없었고, 그밖에도 수많은 중경상자가 나왔다…………. 병원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6시경이었던가? - P40
"가엾게도." TV에서 시선을 돌리며 어머니가 중얼거렸다. 슬픔을 더 표현하고싶지만 그럴 힘이 없다는 듯, 억양이 없는 목소리였다. "다들 불쌍하구나… 사람이나, 마을이나, 나무나, 산이나." "대체 언제까지 계속될까?" 이모는 오히려 좀 과장한 듯 느껴지는 억양으로 말했다. - P41
입가로 가져간 오른손이 산소마스크를 옆으로 밀었다. 가와미나미가 원래대로 되돌리려하자 어머니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그리고 "죽여다오." 힘없이 숨을 쉬며 알아듣기 힘든 말투였지만 어머니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 P44
가와미나미의 마음속에 있던 그런 생각들이 둑이 터진 듯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꽉 쥔 주먹이 싸늘하게 마비되었다. 무너져버릴 것같은 아픈 가슴 때문에 숨도 제대로 들이쉴 수 없었다. 어째서 이렇게 하면서까지. 어째서 이렇게 해서까지. 어째서・・・・・아아, 그렇다. 이런 생각은 물론 어머니가 가장 절실할 것이다. - P45
그 뒤의 기억은 왠지 조각조각이고 비틀거리며 뛰쳐나온 어둑어둑한 복도 뒤를 돌아보는 간호사들의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휠체어의 노인. 계단을 달려 내려가던 유난히 컸던 발소리,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창밖에서 들려오고, 로비를 오가는 수많은 낯선 얼굴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안내방송의 중성적인 목소리. 누군가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고 있다. 종합 접수창구앞의 긴 의자에 노란 옷을 입은 어린 여자아이가 오도카니 앉아 있고....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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