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흉악범의 사형은
당연한 수순?

법원 판결로 본 사형제도 논란

2004년 20여 명의 노인 여성이 희생된 유영철 연쇄살인사건, 2009년 경기 서남부 부녀자 연쇄살인사건, 2012년 무고한 여성을 잔인하게 살해한오원춘 살인사건, 2014년 총기 난사로 군인 5명이 피살된 임병장 살인사건, 2016년 여성 혐오 범죄 논란을 불러온 서울 강남역 인근 살해사건, 2017년 ‘어금니 아빠‘ 이영학살인사건. - P332

 그뿐 아니다. 1997년 이후사형이 한차례도 집행되지 않은 현실을 지적하면서 "이번 기회에 사형을집행해야한다는 목소리도 등장한다.
그렇다면 법원에서 흉악범에 대한 판결은 어떻게 날까? - P332

보성 어부 살인사건. 임병장 사건 등 사형선고

사례 1 저녁 8시 강원도의 전방 부대 안에서 적막을 깨고 난데없는 수류탄 폭발음과 총성이 들렸다. 전역 3개월을 앞둔 병장A씨가 초소에 수류탄을 던지고 부대원들을향해 소총으로 무차별 난사한 것이었다. 평소 인격장애가 있던 A씨는 부대원들이자신을 무시하고 따돌림한다고 생각해 이 같은 일을 저질렀다. 사망자 5명, 부상자 7명, 희생자 중에는 A씨를 평소 ‘형‘이라 부르며 따르던 후임병들도 있었다. - P333

사례 4 동네 선후배 사이인 D씨 등 4명은 돈이 필요해 범죄를 모의했다. 먼저 그들은 한동네에 사는 여인이 남편의 교통사고 사망보험금을 받은 사실을 알아내고 납치를감행했다. D씨 등은 다시 피해자의 딸을 인질로 잡아놓고 돈 1억 원을 찾아오게했다. 돈을 손에 쥔 그들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모녀를 차례로 살해했다. 범행은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D씨 등은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이복동생이 말을 잘 듣지않는다는 이유로 목을 졸라 살해했다. 살해 후에는 가족에게 협박 전화를 걸어 돈을 요구하는 대범함까지 보였다. - P334

모두 법원이 사형을 선고한 사건들이다. 위의 사례 중 A씨· B씨· C씨는 사형이 확정됐고, D씨는 상급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받았다. 법원은
"사형이 극히 예외적인 형벌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범행에 대한 책임의 정도와 죄형의 균형, 사회방위 및 범죄의 일반 예방적 견지에서 피고인을 이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취지로 사형을 선고했다. - P334

이른바 ‘임병장 살인사건‘
으로 알려진 A씨 재판에서 사형을 확정한 2016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문을 보자.

"사형선고 여부를 결정함에 있어서는 범인의 연령, 직업과 경력, 성행, 지능, 교육정도 성장과정, 가족관계, 전과의 유무, 피해자와의 관계, 범행의 동기, 사전계획의 유무, 준비의 정도, 수단과 방법, 잔인하고 포악한 정도, 결과의 중대성, 피해자의 수와 피해감정, 범행 후의 심정과 태도, 반성과 가책의 유무, 피해회복의 정도, 재범의 우려 등 양형의 조건이 되는 모든 사항을 철저히 심리하여야 하고, 그런 심리를 거쳐 사형의 선고가 정당화될 수 있는 사정이 밝혀진 경우에 한하여 비로소 사형을 선고할 수 있다."(대법원 2016. 2. 19. 선고 2015도12980 전원합의체판결)

다소 장황하고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한마디로 사형은 한번 선고하면 돌이킬 수 없는 형벌이니 심사숙고하란뜻이다. 이 판결에서 13명의 대법관중 4명은 소수의견을 통해 A씨의 사형선고에 의문을 제기했다.  - P335

"악을 악으로 갚을 수 없는 일"... 고심 끝 무기징역 선고

흉악살인범에 대해 법원이 고심 끝에 무기징역을 선고한 경우도 있다. (중략)
법원은 판결문에서 "함부로 남의 생을 접어버린 피고인들의 행위는 인간이 행사할 수 없는 신의 권력을 탐한 것으로 도저히 허용될 수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법률이 인간의 생명을 영구히 박탈하는 사형을과할수 있는 권한을 판사에게 허여했다 하여 함부로 피고인들을 재단할수는 없고, 피해자 유족들이 악을 악으로 갚을 수 없는 일이라며 종신형에 처하여줄것을 원하고 있다"면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 P336

법원 ‘사형판결‘ 선고도 감소 추세

판결을 통해 볼 때 법원은 대체로 사형제가 극히 예외적이나마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생명을 박탈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1997년을 끝으로 사형 집행이 중단되면서, 사형선고가 상당히 감소했고 무기징역 선고 비율이 높아진 것도 최근의 판결 경향이다.  - P337

2014년 이후 사라졌던 사형판결이 다시 등장한건 2018년이다. 이른바
‘어금니 아빠‘로 불리던 이영학이 중학생 딸의 친구를 유괴한 후 엽기적으로 살해한 사건에서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의 범행으로 볼 때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사형이라는 극형의 선택은 불가피하다"고 판결했다(이영학은 2심과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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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오리 레이코의 과거를 알아볼 필요가 있었어요. 그 여자의 과거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으니까요. 문신은 그걸 알려주는 단서가 될 거로 생각했죠." - P226

그런 이유뿐이었나, 하고 내심 낙담하면서도 오카베는 혹시나 해서 신주쿠 역 뒤편의 맨션 이름을 메모했다. 그렇게 두 톱모델에게 두 가지 색깔의 나비 문신을 해준 사람을 찾아갔다.
미국인이지만 일본어를 잘하니까 괜찮다, 라고 미리 들었던 대로 벨을 누르자 얼굴을 내민 금발의 남자는 훌륭한 일본어를 구사하며 질문에 답해주었다. - P227

"거짓말로 휴가까지 냈는데 별다른 수확은 없었어요. 다만한 가지 재미있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지난 9월 말에 어떤 젊은 여자가 미오리 레이코의 가슴 사진을 들고 와서 똑같은 문신을똑같은 자리에 해달라고 했다는 거예요. 모델 레이코를 정말 좋아하는 팬이라면서."
"젊은 여자가?" - P228

"그 과도에 찔린 여자가 문신사를 찾아온 여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건가?"
"네,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오리 레이코와는 다르게 그 여자는 말이 많은 편이었다.
다음 달 초에 볼일이 있어 미국에 갈 거라면서 현지 얘기를 꼬치꼬치 물었다고 한다.  - P228

"이를테면 레이코가 어릴 때 가난하게 자라서 지금도 빵에아무것도 안 바르고 먹는다, 라고 웬만해서는 알지 못할 얘기들을 했다는 게 이상해요. 미오리 레이코와 뭔가 특별한 관계였던게 아닌가 싶은데…."
전화 협박자와 밀고자 외에 또 한 명, 사건의 이면에서 수수께끼의 베일에 감싸인 여자가 나타난 것이다. - P229

"자살로 볼 수는 없을까요?" - P230

12장 누군가 誰か

"자네를 이런 번잡스러운 일에 끌어들여서 미안하네.."
점원이 가기를 기다려 눈앞의 사사하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설마 내가 자네에게 부탁한 전화를 받고 사와모리가 자살까지 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 P232

사와모리가 유서에 고백한 사건 날 밤의 행동은 하나하나그날 밤 그 자신이 한 행동이었다. 사사하라에게 죄를 덮어 씌우기로 결심한 것도, 레이코가 담요를 찾으러 잠깐 침실에 갔을 때 지문이 남지 않도록 손수건을 꺼내 독이 든 술잔과 레이코가 마시던 술잔을 바꿔치기한 것도 똑같았다. - P232

그날 밤 사와모리가 그 맨션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레이코와 그의 대화와 행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했고, 알지도 못하는 그를 감싸주려고 자신이 한 짓이라는 거짓 유서를 남긴 채 죽어갔다. 라는 게 아니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 P233

어제 아침에 마가키 기미코가 그의 전화에 이상한 반응을보였던 게 떠올랐다.
"모레 밤 11시에 다시 이 번호로 전화하세요. 어떤 얘기든받아줄 테니까."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가키 기미코도 범인인것이다. 똑같은 큰 착각 아래 그도 사와모리도 마가키 기미코도 살인범이 되었던 것이다. - P234

성형수술이 알려질 우려 때문에 숨긴 것도 있었겠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뭔가 더 중요한 비밀이 있었던게 아닐까. - P234

이름 옆에 숫자와 알파벳이 있었다. 이시가미 요시코의 이름에는 ‘4-B‘라고 적혀 있었다. 무슨 표시냐고 물어보니 기숙사방 번호이고, 2인 1실이니까 또 한 명 같은 번호를 가진 아이가있을 거라는 대답이었다.
같은 페이지의 조금 아래쪽에 또 하나의 ‘4-B‘가 눈에 띄었다. ‘가와다 기요코‘라는 이름으로, 기숙사에 들어온 건 이시가미 요시코와 같은 시기였지만, 이쪽도 기숙사를 나간 날짜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 P236

"이름까지는 몰라도 얼굴이야 대부분 기억하죠. 같이 찍은사진을 짚어주면 누군지 알 거예요."
사감의 말에 그는 앨범을 들춰보았다. 젊은 여자들이 사감을 둘러싸고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중략)
역시 앨범의 중간쯤에서 문제의 얼굴을 찾아냈다. 오년전뉴욕의 병원에서 그 여자가 의사에게 내민 초상화와 똑같은 얼굴이다.  - P237

"이 아이라면 기억이 나요. 옆에 조금 더 예쁘장한 아이가있죠? 약간 시건방진 데가 있는 이 여자애와 같은 방을 썼어요.
아마 한 삼 년쯤 있었을 텐데 좀 음울한 느낌이었어요. 그러다 남자 친구가 생긴 모양이에요, 누군지는 모르지만. 휴일이면 예쁘게 차려입고 신이 나서 뛰어나가곤 했거든." - P237

남자 친구가 생겨 신이 나서 뛰어나가곤 했다는 말을 듣고는 레이코가 어느 날 밤, 모래시계의 모래를 그의 등에 쏟았을 때가 생각났다. 흠칫해서 등 뒤를 돌아보자 레이코는 조금 쓸쓸한듯 중얼거렸었다.
"똑같은 얼굴을 하네?"
그와 똑같이 흠칫 놀란 표정으로 돌아본 그 남자 친구와 레이코는 어쩌면 평범한 가운데 나름대로 행복한 일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 P238

도쿄로 돌아와 항상 가던 카페의 텔레비전으로 사사하라의 석방 뉴스를 보았다. 석방되자마자 가장 먼저 자신에게 연락할 터였지만 그와 마주하는 것을 한 시간이라도 뒤로 미루려고 오랜 시간 카페에서 뭉그적거리다가 밤 10시가 되어서야 겨우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집에 돌아와 우선 이케지마 리사에게 전화했지만 부재중이었다. - P239

기타가와 준은 결국 조용히 침묵해버렸고, 이나키 요헤이는 헉하고 경악하는 목소리를 냈다. 다카기 후미코는 파르르 떨며 "나는 그런 거 몰라!"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다가 큰 착각을 깨닫고 사와모리 에이지로도, 나도, 그리고 어쩌면 마가키 기미코도 범인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착각이었다면 더 많은 레이코 살해범이 있는지도 모른다.  - P240

사사하라가 음식 접시에서 얼굴을 들고 테이블 너머로 그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며 말했다.
"어제 누군가 경찰에 밀고 편지를 보낸 모양이야. 범인은내가 아니라 여섯 명 중 한 사람이라는 내용이야. 거기 적힌 여섯명의 이름이 내가 자네에게 알려준 것과 완전히 똑같았어. 설마자네가 그 밀고 편지를 보낸 건 아니지?"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경찰에 보낸 적은 없다. - P241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오늘 아침 그가 깨달은 ‘큰 착각‘은 아무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왜냐면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미오리 레이코의 얼굴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 외에도 미오리 레이코를 살해한 범인이 있다. - P240

어젯밤에는 범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진범은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막상 현실이 되고 보니 한여자를 여러 사람이 완전히 똑같은 방법으로 살해했다는 것은진짜 구역질이 날 만큼 오싹하고 끔찍한 일이었다... - P241


그렇게 직원이 내준 잔돈을 상의 호주머니에 넣었을 때 였다.
"이봐, 이게 떨어졌어."
사사하라가 작은 쪽지를 내밀었다.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낼 때, 바닥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 쪽지는 오늘 아침에 집을나오는 길에 적어온 메모였다. ‘가와구치 시, 세이에이 기숙사,
이시가미 요시코‘라는 세 가지를 급히 갈겨썼다. - P243

어젯밤에 이케지마 리사에게 전화한 것은 경찰에게 자신이 사사하라를 구하기 위해 범인을 찾고 있다는 게 알려져 용의선상에서 제외되는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전화하는 목적은 다르다. 조간신문으로 사와모리의 유서를 확인하기전까지는 어차피 망상에 빠진 얘기라서 경찰이 깨끗이 무시할거라고 생각했다. - P244

우선 이케지마 리사와 접촉해 그녀도 미오리 레이코를 죽인한 명이 아닌지, 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몇 번을 시도해도 상대는 수화기를 들지 않았다. 그는 포기하고 다음으로 다카기 후미코의 자택 전화번호를 눌렀다. 어젯밤 그의 전화에 다카기 후미코도 특이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 P244

하마노가 수화기를 향해 뭔가 얘기하는 것을 그는 전화박스에서 3미터쯤 떨어진 길모퉁이 뒤쪽에 몸을 숨기고 오로지 시선만 날카롭게 벼린 채 지켜보았다. 하마노는 아주 중요한 것을 그에게 감추고 있다. 그런 눈치를 챈 것은 조금 전 레스토랑 계산대 앞에서 하마노의 호주머니에서 떨어진 한 장의 쪽지를 봤을때부터였다. - P245

누구와 전화 통화를 하는 건가. 어쩌면 그 용의자 목록 중의 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대체 왜?
하마노는 유리 전화박스 안에서도 얼굴을 코트 깃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를 응시하는 눈빛이 점점 더 초점이 좁혀지고 어둡게 벼려져 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 P246

"나, 사실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사 개월 전의 그 차가운 목소리가 되살아나 얼어붙은 밤바람과 함께 그의 귀를 때렸을 때, 드디어 하마노가 수화기를 내려놓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수화기를 다시 들고 하마노는 또 번호판을 꾹꾹 눌렀지만 중간에 마음이 바뀌었는지 수화기를 내려놓고 전화박스에서 나왔다.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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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의 연구 중 하나는 외부에서 적용된 잡음이 확률공명을 통해 작동한다는 사실을 최초로 입증하기도 했다. 그는 주걱철갑상어(paddlefish)로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이 어류는 코에 있는 전기감각기 (electrosensor)로 먹잇감인 플랑크톤이 내는 희미한 전기적 신호를 감지해서 먹이를 찾는다.  - P238

잡음 수준이 중간대일 때 최적의 수행성과가 나오는 것은 확률 공명의 특징 중 하나다. 잡음이 너무 작으면 신호가 역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잡음이 너무 심하면 신호가 잡음에 묻혀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잡음-이득 관계 그래프를 그려보면 U를 거꾸로 뒤집은모양이 나온다. - P238

하지만 생물 시스템이 내부적으로 발생시킨 잡음을 이용한다는 개념에는 아직 의문이 남아 있다. 그중 하나가 초파리의 국소신경세포에서 발생하는 잡음이 진정한 잡음인가 하는 점이다.  - P239

잡음은 엄격한 수학적 정의를 가지고 있는데, 복잡한 생물학적 시스템에서 잡음처럼 보이는 것들은 보통 다른 어디선가 새어나오는 신호로 판명되는 경우가 많다. "그 ‘잡음‘의 원천을 가져다가그것이 잡음의 통계학적 발자국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코스코의 말이다. - P240

부자키는 포유류에서 뇌의 활성을 조절하는 잡음 비슷한 신호가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미에센뷔크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거기에 특화된 잡음 발생 회로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대신 그는 뇌 전체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하는 신경 활동을 지목한다. - P240

자발적 활성이 신경세포 네트워크로 퍼져나가 초당 약 40회 정도의 속도로 신경 흥분이 동기화되는 과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일례로 소위 감마파(gamma wave)라 불리는 뇌파는 서로 다른 인지 과정을 한데 묶어 지각(perception)을 만들어내는방법이라 제안되고 있다.
부자키는 유입되는 희미한 신호가 이런 자발적 활성파의 등에 올라타 역치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말한다. - P241

과연 자연선택이 무작위 잡음 발생기를 장착한 뇌를 만들어 낸것인지, 아니면 그저 다른 신경 신호를 빌려다가 잡음으로 사용하는 능력을 갖춘 뇌를 만들어낸 것인지 밝히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어느 쪽이 맞든 초파리의 뇌는 약간의 디더 없이는 기능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마 우리의 뇌도 디더를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 P241

3
우연과 수학
기이하기 짝이 없는 우연의 수학

우연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그것을 정량화하거나, 생물학 표본의 집합처럼 취급해서 분류할 수 있을까? 우연은 서로 다른 강도로 찾아오나? 이 장은 행운과 우연의 과학과 수학을 다루지만 그렇다고 마냥 숫자만 언급하지는 않는다. - P129

내가 아는 우연, 내가 모르는 우연

지금쯤은 당신도 눈치 챘겠지만 인간의 뇌는 패턴을 기가 막히게 잘 찾아낸다. 이것은 과학의 주춧돌이 되어준 능력 중 하나다.
우리는 어떤 패턴을 알아차리고 나면 그것을 수학적으로 정확하게밝히려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수학을 이용해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려고 한다. - P130

약 한 세기 전만 해도 모든 것이 간단해 보였고, 세상은 행성의 궤도, 밀물과 썰물 같은 자연현상처럼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과 오솔길에 떨어진 우박의 패턴같이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으로 나뉘었다. - P130

하지만 1870년 아돌프 케틀레(Adolphe Quetelet)의 발견으로 질서(order)와 혼돈(chaos)을 나누고 있던 벽에최초의 균열이 생긴다. 무작위인 사건에도 통계적인 패턴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 P131

날씨는 진정 무작위적인 현상일까? 아니면 어떤 패턴이 있을까? 주사위는 정말 무작위로 수를만들어내는 것일까, 아니면 사실은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것일까? 물리학자들은 아주 작은 세계를 연구하는 과학인 양자역학에서 무작위성을 그 절대적인 기반으로 삼았다. - P131

 만약 내가 ‘공정한 동전던지기를 해서 6번 연속 앞면이 나왔다고 해도 7번째 던지기에서앞면이나 뒷면이 나올 확률은 여전히 똑같다. 반대로 한 계의 과거가 미래에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경우 그 계는 질서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다음 날 해가 뜨는 시간을 몇 분의 1초 단위로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고, 매일 아침마다 그 예측은 맞아떨어진다. 따라서 동전 던지기는 무작위적이지만 일출은 그렇지 않다. - P132

일출의 패턴은 지구 궤도의 규칙적인 기하학에서 기원한다. 무작위 동전 던지기에서 나타나는 통계적 패턴은 훨씬 당혹스럽다.
공정한 동전으로 던지기를 오랫동안 하면 앞면과 뒷면이 비슷한 빈도로 나온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입증할 수 있다.  - P132

동전을 얇은 원형의 원잔으로 모형화할 수 있다. 만약 원잔을 수직으로 던져 올릴 때 그 속도와 회전속도를 알 수 있다면, 동전이바닥에 떨어져 멈출 때까지 몇 바퀴나 돌지 정확히 계산할 수 있다. 원반이 바닥에 닿았다가 튀어 오르면 계산이 더 어려워지기는하겠지만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다. 던져 올린 동전은 고전역학계(classical mechanical system)인 것이다. - P133

당신이 동전을 던져 올린순간 그 동전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다(바람이나 지나가는 고양이, 기타외부 요인은 무시하자). 하지만 당신은 동전의 속도나 회전속도를 모르기 때문에 그 필연적인 운명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다. - P133

주사위도 마찬가지다. 주사위 역시 역학적인 행동을 나타내고 결정론적인 운동방정식의 지배를 받는 튀어 오르는 정육면체로 모형화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초기 운동을 충분히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충분히 빠른 속도로 계산을 할 수 있다면 정확한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 P133

카오스는 무작위성과는 다르다. 하지만 모든 측정에 따라오는 정확성의 한계 때문에 예측이 불가능하다. 무작위 계에서는 과거가 미래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반면 카오스계에서는 과거가 미래에 영향을 미치기는 한다. - P134

진정한 카오스계에서는 이런 오류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주사위의 모서리가 바로 이런 기하급수적인 발산(divergence)을 야기한다. 수학적으로 완벽한 정육면체가 편평한 탁자에 부딪혀 튀어 오를 때는 이런 모서리 때문에 카오스적인 행동이 나타난다. - P135

여기에 답하기 위해 물리학에서 무작위 모형이 처음 큰 성공을거둔 예를 살펴보자. 바로 통계역학이다. 이 이론은 기체의 물리학인 열역학을 뒷받침하는 근거다. - P135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은 분자를 작고 단단한 구체로 모형화해서 서로 튕겨 나가는 분자들이 기체 법칙이나 다른 것들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최초로 탐구한 사람이다. 그의 이론에서는 압력, 부피, 온도 같은 고전적 변수들이 내재적인 무작위성을 가정하는 통계적 평균으로서 나타났다. 이런 가정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 P136

하지만 볼츠만은 모든 구체의 정확한 경로를 일일이 추적하는 대신 구체들의 위치와 속도가 어느 특정 방향으로 왜곡되지 않는 통계적 패턴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했다. - P136

통계역학은 엄청나게 많은 구체의 결정론적인 운동을 평균 같은 통계적 측정치로 표현한다. 바꿔 말하면 거시 수준에서 결정론적 모형을 정당화하기 위해 미시 수준에서의 무작위 모형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정당한 일일까? - P136

그렇다. 당시에 볼츠만 자신은 몰랐지만 이것은 정당한 방법이다. 그는 사실상 2가지 주장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나는 구체들의 운동이 카오스적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카오스가 잘 정의된 평균 상태를 만들어내는 특별한 종류라는 것이다. 이런 개념으로부터 에르고드 이론(ergodic theory)이라는 수학의 한 분야가 통째로 생겨났고, 수학자들이 이룬 발전 덕분에 볼츠만의 ‘가설‘은 이제 ‘정리‘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 P137

그럼 기체는 실제로 무작위적인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일까? 이것은 모두 당신의 관점에 달려 있다. 어떤 측면은 통계적으로 모형화하는 것이 가장 좋고, 또 어떤 측면은 결정론적으로 모형화하는것이 가장 좋다. 하나의 정답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맥락에 따라 다르다. 이것은 전혀 특이한 상황이 아니다. - P137

그렇다면 진정으로 무작위적인 것은 없다는 말인가? 양자세계의 뿌리를 이해하기 전에는 확실하게 얘기할 수 없다. 양자역학의 일반적인 해석에서는 아원자 수준까지 파고들어가 보면 우주는 진정으로, 그리고 환원불가능한 방식으로 무작위적이라고 주장한다.  - P138

이런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는 수학적 논증은 분명히 존재한다.
1964년에 존 벨(John Bell)은 양자역학이 무작위적인지, 숨은 변수에 지배되고 있는지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숨은 변수란 사실상 우리가 아직 어떻게 관찰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양자적 속성을 말하는 것이다.  - P138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벨의 연구에 기초한 실험을 통해 양자계는 무작위성이, 그리고 ‘원격작용(action at a distance)‘이라는 이상한현상이 지배한다는 것이 확인됐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들은 양자론에서 무작위성이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고 인정하고자 하는 열망이 너무 강한 나머지 더 이상의 문제제기를 무시해버리는 경향이있다. 이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 P139

(전략), 핵심은 수학적 정리 (mathematicaltheorem)에는 가정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벨은 자신의 주된가정은 명확하게 밝혔지만 그의 정리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일부암묵적인 가정도 끼어들었다. 이 점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벨연구의 실험 버전에는 허점도 있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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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나는 하얀 피부에 검고 큰 눈동자의 인형을 갖고 있었다. 엄마도 없고 자매도 없었기 때문에 너무 외로워서 항상 그 인형을 마주하고 놀았다. 인형은 긴 속눈썹이 달린 눈을 떴다 감았다 했다. 감으면 조용히 잠든 것 같고, 뜨고 있으면 까만눈동자가 어딘지 쓸쓸해 보였다. 나는 이런저런 얘기를 인형에게 들려주었고 인형도 내게 이런저런 말을 해주었다.  - P193

인형이 가장 좋아하는 노란색 레이스 옷을 입히고 다정하게 품에 안고 긴 머리칼을 한 올 한 올 쓰다듬으며 나는 엉엉 울면서 애원했다.
"얘, 제발 부탁이야, 뭔가 말 좀 해봐."
하지만 인형은 두 번 다시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다. - P193

오 년 전 마가키 선생의 패션쇼에서 처음 그 애를 만났을때, 곧바로 어린 시절의 그 인형이 떠올랐다. 긴 속눈썹도, 까맣고 쓸쓸해 보이는 동그란 눈동자도, 이따금 미소 짓는 것 외에는 항상 백지처럼 마음을 닫고 있는 무표정도 완전히 꼭 닮았다. - P194

반년쯤 뒤에 더는 참을 수 없어서 어느 패션쇼 무대가 파한 뒤에 슬쩍 말을 붙였다.
"우리, 친구할래?"
"응, 좋아." 그 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용히 내 집에 따라왔다. "한숨 자게 해줄래? 어젯밤에 거의 잠을 못 잤어."
그렇게 말하고 그 애는 내 무릎을 베개 삼아 눈을 감았다.
그 애가 잠든 동안 나는 내내 그 긴 머리를 쓰다듬었다. - P194

"우리 친하게 지내자. 넌 나의 인형이야."
그렇게 속삭이자 그 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슴을 드러내 붉은 나비 문신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친구가 된 징표로 너도 나비 문신을 하는 건 어때?"
그때도 그 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검은 나비가 좋은데." - P194

우리가 침실에서 은밀히 어울린다는 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톱 모델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미워한다고 자기들 좋을 대로 소문을 퍼뜨렸다. 오히려 나는 그 애를 지나칠 만큼 사랑했다. 그애가 르네 마르탱의 패션쇼에 나가 세계적으로도 이름을 떨치고 내 인기를 뛰어넘었을 때도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네고내 품에 그 애의 얼굴을 안고 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 P195

"너도 웨딩드레스 잘 어울려. 이다음에 마가키 선생에게 꼭입혀달라고 내가 부탁해볼게."
어린 시절의 그 인형은 훨씬 더 무모한 떼를 썼다. 달에 데려가 달라느니 너희 아버지가 너무 싫으니까 흠씬 패주라느니..
침대 위에서 노닐 때, 그 애의 왼편 젖가슴의 나비가 높아진 심장 소리를 빨아들여 살갗에서 불쑥 떠올라 훨훨 날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좋았다.  - P196

그러면 그 애도 긴 속눈썹을 떴다 감았다 하면서 온갖 억지를 부려 나를 난처하게 만들곤 했다.
"이 신문기사, 공개해도 돼?"
올 2월 말, 오래 전 신문 기사의 스크랩을 불쑥 내게 들이밀었을 때, 또다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는구나 하고 어이없어 했을 뿐 그리 귀담아듣지 않았다. - P197

신문 기사는 내가 어릴 때 살던 연립주택에서 방화 사건이 일어났고 범인으로 우리 아버지가 체포되었다는 내용이다. 그사건으로 연립 한 동의 반절쯤이 불에 탔고 어린애 한 명과 한창 나이의 회사원 한 명이 숨졌다.  - P197

 나는 고아원에 보내졌고 그 뒤로 한 번도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다.
"어떻게 그 기사를 찾아냈어?"
나는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물었다.
"십칠 년 전의 신문쯤은 어디서든 구할 수 있어." - P197

 하지만 그 애는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이 펄쩍 물러서더니 내 뺨을 찰싹 내리쳤다.
"그 더러운 손, 치워! 여태까지 네가 원하는 대로 몸을 맡긴것은 너의 더러운 손에 나도 똑같이 더러워지면 업계에서 버텨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이제 이런 곳은 견딜 수가 없어. 왜 빙글빙글 웃어? 너를 증오한다니까? 너도 나를 엉망으로 망가뜨린 인간이야. 오늘부터 그 앙갚음으로 너도 엉망진창으로 망가뜨려 줄 거야." - P198

"신문 기사만으로 내 아버지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지?"
그러자 그 애는 핸드백에서 다른 종이를 꺼내 한 장의 사진과 함께 내게 툭 던졌다.
"흥신소에 의뢰해서 네가 살던 고아원을 조사해달라고 했어. 사진도 있어."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이 모여 사는 고아원이다. 거기서 찍은 사진들은 그곳을 나올 때, 기억에서 깨끗이 지워버렸는데…. - P198

"네가 얘기해준 본명도 가짜였어. 열여섯 살에 고아원을 나온 뒤로 단 한 번도 간 적이 없다면서? 하지만 고아원 선생님이 잡지에서 모델로 활약하는 네 모습을 보고 꼭 한번 만나고 싶다던데?"
조사 보고서의 메마른 글씨로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한 가지 과거가 적혀 있었다. 아니, 단 한 사람에게 말했었다. 그 애였다.  - P199

. 그렇듯 동정심을 보여주었던 그 애가 설마 사 년 뒤에 협박자로 표변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네가 신문 기사며 흥신소 조사 보고서를 진짜로 주간지기자에게 보내겠다면 나도 지난 팔 개월 동안 네가 나를 협박했다는 거, 세상에 까발려줄게." - P199

"너도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곤란한 일이 있을 텐데?"
4월이었던가, 내가 그렇게 쏘아붙인 적이 있었다.
(중략)
"내일까지 백만 엔 준비해. 내가 입 다물어줬잖아, 싫다고는 못할걸? 돈을 못 주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 얘기, 주간지에 알릴 거야."
혼자 주워섬기더니 뭔가 이상했는지 갑자기 말투가 달라졌다. - P200

게다가 사람들에게 알리고싶지 않은 과거의 비밀일 터였다.
"그 전화만이 아니야. 언젠가 톱 모델 둘이 똑같이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과거가 있는 게 너무 우습다고 했지? 하지만 가족이 모두 화재로 죽었다는 얘기라면 굳이 숨길 필요가없잖아, 다들 가엾게 생각해서 오히려 인기가 올라갈 텐데, 너,
뭔가 더 큰 비밀이 있지? 나보다 훨씬 더, 사람들에게 알려지면곤란한 과거가 있지?"
"그래, 협박당했어. 하지만 그 여자가 원하는 건 돈뿐이니까 나는 전혀 두렵지 않아." - P201

"내가 원하는 건 돈이 아냐. 너의 파멸이지."
그 말과 함께 다른 때보다 더 거친 손길로 20만 엔의 돈을찢어발겼다.
"너를 파멸시킬 거야. 나는 모두 다 잃었어. 그러니까 너한테서도 모든 걸 빼앗을 거야." - P201

"나를 죽여. 나를 죽여…."
그 아이도 똑같은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를 죽여..."
두 개의 술잔을 바꿔놓으면서 내 귀는 단지 인형의 목소리만 듣고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인형은 머리칼을 쥐어뜯기고 한쪽 눈이 일그러지고 얼굴이 뭉개진 채 침대 위에 내던져져 있었다. 아니, 인형이 아니라 그 애였다. - P202

돌연 차임벨이 울렸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베갯머리의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경찰입니다. 밤늦게 죄송하지만, 잠깐 물어볼게 있어서..."
경찰이라고? 조금 전 전화한 남자가 경찰에 신고한 걸까.
하지만 괜찮다. 그런 어이없는 얘기, 당연히 거짓말이다. - P203

추운 듯 싸구려 코트 깃을 세우고 어깨를 웅크린 것이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본 형사를 그대로 닮았다.
"이케지마 리사 씨지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두 형사는 현관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실은 오늘 저녁에 이상한 편지가 경찰서에 도착했어요."
그렇게 말을 꺼냈다.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는 편지에 미오리 레이코를 살해한 자는 이케지마 리사라고 적혀 있었다, (후략). - P203

"하지만 편지에 당신이 미오리 레이코에게 협박을 당했다고 적혀 있던데요."
"주간지마다 내가 레이코와 항상 경쟁하고 시샘한다는 기사가 실렸지만, 실은 진짜 친한 사이였어요. 왜 협박이니 뭐니 하는 말이 나오는지 모르겠군요" - P204

"알리바이 조사인가요?"
그녀는 번거롭다는 듯이 되묻고 집 안에서 스케줄 수첩을가져왔다.
"어디 보자, 12일부터 14일까지는 일이 없어서 여기 집에서 뒹굴뒹굴하며 보냈네요. 15일과 16일에는 규슈 여행을 했어요. 15일 점심때 비행기로 도쿄를 떠났다가 16일 밤늦게 돌아왔죠. 사진작가 기타가와 준 선생님과 동행했으니까 그 쪽에 물어보시면 알 거예요." - P204

(전략), 12일과 13일 이틀 동안에도 그랬다고 대답했다.
"근데 왜 그 이틀 동안이죠? 신문에는 사망 추정 일시가 언제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나왔어요. 그러면 15일이나 16일밤일 수도 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미오리 레이코는 15일 아침에 파리로 떠날 예정이었기 때문에..." - P205

문을 닫아걸면서 대체 누가 그런 밀고 편지를 경찰에 보냈을지 생각해보았다. 아까 전화했던 그 남자인가. 하지만 어떻게 레이코가 나를 협박한 것을 알고 있을까. 2월 말부터 둘이 만날 때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특히 주의했던 것이다. - P206

 경찰에서는 자살한 사와모리 에이지로를 진범이라고 단정했다. 그녀가 레이코를 죽인 것은 경찰에서는 결코알 수 없다. 그녀의 소녀 시절을 빨갛게 불태웠던 옛날 얘기도주간지 기자가 알아낼 일은 영원히 없다……

. 그런데 그 이유를 이제야 겨우 알 것 같았다. 나비가 아니라 불꽃 모양을 평생의 낙인으로 가슴에 남겨두고 싶었던 것이다.
레이코를 사랑했기 때문에 죽였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레이코의 협박이 두려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 P207

아버지가 범죄자라는 것 따위, 알려져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애의 목소리는 항상 그다음 말을 거침없이 내뱉을 것만 같았다.
"불을 지른 건 너희 아버지가 아니야! 너희 아버지는 진짜범인을 감춰준 것뿐이었어!"
거울에 비친 오른편 젖가슴의 나비 모양 불꽃은 금세라도활활 타올라 그녀의 몸을 삼켜버릴 것 같았다. - P208

11장 경찰 警察

12월 2일 밤, 사와모리 에이지로의 자살 현장에서 돌아온지세 시간 만에 아사이는 책상 위에서 한 통의 봉투를 발견했다.
겉에 경찰서 이름과 ‘형사과장님께‘라고 적혀 있었다. 아침 일찍배달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세이조 경찰서 관할의 자살 사건 현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아사이는 다시 사사하라를 취조했다.  - P210

언론사 기자들에게는 "사와모리 에이지로의 유서 내용은신빙성이 높다. 따라서 사건을 재검토하고자 한다"라는 설명으로 대충 둘러댔다. 하지만 경찰 윗선에는 사사하라 노부오를 체포한 건 잘못이었다고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210

그리고 여섯 명의 남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케지마 리사, 사와모리 에이지로, 마가키 기미코, 기타가와 준, 이나키 요헤이, 다카기 후미코.
편지를 단순한 장난으로 묵살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그중한 명인 젊은 사장 사와모리 에이지로의 유서에는 미오리 레이코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저 어림짐작으로 넘겨짚었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 P211

경찰에 편지를 보낸 뒤에 오늘 아침에는 직접 사와모리에게 전화했다, 라는 가능성도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유서 내용만 봐서는 사와모리에게 전화한 인물은 사건 당일 밤에 우연히 현장 부근에 있었던 것뿐일 거예요. 이 편지를 보낸 자는 조금 더 사건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 같네요. 피해자가 사와모리를 협박했다는 건 장본인 외에는 알 수 없잖아요.
근데 그걸 알고 있어요.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 P211

"다만 이 여섯 명의 이름을 보니 생각나는군요. 약혼한 무렵에 레이코가 내게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을 죽이고 싶을만큼 미워하는 사람이 일곱 명이라고 했어요. 그중 여섯 명이 이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면 일곱 번째 사람은?"
"실은 일곱 번째 사람에 대해서는 레이코가 입을 딱 다물었어요. 아마 남자인 것 같긴 한데. 어쩌면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이 그 일곱 번째 남자인지도 모르겠네요." - P212

편지에는 ‘진범은 여섯 명 중 한 명이다‘라고 분명하게 단정하고 여섯 명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 제7의 인물이 있다면 그자가 자신을 지키려고 이런 밀고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 P212

아니, 사사하라도 실제로 뭔가를 알고서 이런 말을 하는 게아닐지도 모른다.
사와모리가 레이코 살해를 고백하고 자살했다는 소식을전했을 때, 사사하라는 뜻밖에도 한순간 못 믿겠다는 표정을 보였다. 부정하듯이 머리까지 가로저었다. 사와모리가 그런 고백을 하고 죽은 게 그에게는 예상 밖의 일이었던 것이다. - P213

어요?"
았다.
"당신, 혹시 사와모리가 범인이 아니라는 확증이라도 있그러자 그는 당황한 기색으로 어물어물 말끝을 흐렸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그러더니 갑자기 홱 바뀌어 유서를 긍정하는 말을 늘어놓
"네, 범인은 역시 사와모리겠네요. 레이코가 생전에 그에대해 자주 얘기했습니다. 자신의 사업을 위해서라면 태연히 살인도 저지를 사람이라고." - P214

세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 의문이 머릿속 한 귀퉁이에서 계속 맴돌았다. 사와모리의 자살 소식에 사사하라가 크게 동요하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사건에는 조금 더 깊은 속사정이 있는지도 모른다.  - P214

"내일 아침에 다시 한번 취조한 다음에 고려해보겠습니다.
사와모리가 진범이라고 해도 그가 사용한 독약은 당신이 가져간 것이었어요. 미오리 레이코의 맨션에서 자살할 생각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하셨지만, 그게 거짓이고 조금이라도 살의가 있었다면 실제로 일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법률적으로 문제가 됩니다."
"그보다 미오리 레이코의 사체는 어떻게 되지요?" - P215

"아뇨, 아무도 없을 겁니다. 혈육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어서 자신은 죽을 때도 혼자라고 레이코가 자주 말했으니까요. 그너에게 큰 배신을 당하긴 했지만 그렇게 딱하게 죽었으니 최소한 내 손으로 장례식은 치러주고 싶군요. (중략)." - P215

전원이 탐문 수사를 나간 뒤, 아사이는 혼자 창가에 앉아컴컴한 겨울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징계처분보다사건 자체의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중 하나는 미오리 레이코라는 여자의 신원이었다. 계속수사를 진행했지만 아직까지 오 년 전 데뷔하기 이전에 대한 것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얼굴의 미세한 부분까지 성형을 했다는 건 알아냈지만, 그녀의 과거는 원래 얼굴과 마찬가지로 수수께끼에 감싸여 있었다. - P216

또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정확한날짜와 시각이다. 사와모리 에이지로의 유서에도 ‘11월의 그날 밤‘이라고만 적혀 있고, 사사하라도 13일인지 14일인지 정확하게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더욱더 마음에 걸리는 건 그 두 가지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 발동해온 형사의 직감에 뭔가가 몹시 거치적거리는것이다. 용의자 체포와 그것을 뒤엎는 진범의 자살... 그러나 사와모리가 스스로 방아쇠를 당긴 엽총의 폭발음만으로는 사건이 해결되지 않는다. - P216

예상은 했었지만, 네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미오리 레이코에게서 협박당한 사실이 없다고 부정했다. 허식의 세계에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부정했다고 해도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다. - P217

밀고장에 이름이 적힌 여섯 명 중에 다카기 후미코라는 인물만은 경찰서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연예 주간지에 전화해보니 그녀는 인기 가수 여러 명이 소속된 전국 톱클래스의 레코드회사에서 디렉터로 일하는 여자라고 알려주었다.  - P217

"밀고장에 나온 대로 미오리 레이코가 여섯 명 전부를 협박했을 수도 있어요."
오니시의 의견이었다. 아사이는 사사하라가 얘기했던 일곱 번째의 남자가 다시 어두운 그림자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금까지 별다른 말 없이 다른 형사들의 보고며 의견을 듣고 있던오카베가 문득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째서 네 명 모두 가장 중요한 13일과 14일 밤의 알리바이는 없고, 오히려 15일 밤만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는 걸까요..." - P218

"맞아, 내가 만난 사진작가 기타가와 준도 13일 밤에는 신주쿠 뒤쪽의 처음 들어간 바에서 술을 마셨다는 불확실한 얘기뿐이고 14일 밤의 알리바이는 아예 없었어요. 혼자 암실에 틀어박혀 일했다는데 그건 증인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15일 밤에 대해서는 이케지마 리사와 규슈에 갔고 나가사키 호텔 바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고 확실한 알리바이를 대더라고요."
15일 아침 일찍 갑작스럽게 이케지마 리사가 전화로 규슈에 가자고 했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운젠에서 나가사키까지 돌아보자는 그녀의 제안에 기타가와는 망설임 없이 응했다고 한다. - P219

"13일과 14일 밤의 행적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더니 15일밤에 나가사키 호텔에 숙박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갑자기 태도가 바뀌어서 세세하게 얘기해주더라고요. 호텔 직원과 바텐더 중에 자신과 이케지마 리사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이 있으니까 그쪽에 물어보면 안다고까지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레이코 씨가 15일아침에 파리로 떠날 예정이었으니까 사건이 일어난 건 그 이전,
즉 13일이나 14일 밤인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죠. 그랬더니 그때까지 냉정하던 기타가와가 약간 안색이 달라지면서 그걸 어떻게 아느냐, 레이코는 변덕이 심해서 그 전에도 여러 번 외국 여행을 당일에 취소한 적이 있다. 이번에도 갑작스레 마음이 바뀌어15일 밤에도 도쿄에 있었을지 모른다, 라고 하는 거예요."
"이케지마 리사도 완전히 똑같은 진술을 했어." - P220

이나키는 13일 밤에는 9시까지 파티에 참석했지만, 그다음 날인 14일은 종일 제삼자가 증언해줄 만한 알리바이가 없었다. 그런데 15일 얘기가 나오자 저녁때부터 다음 날 아침 10시까지 모델 세 명,
조수 다섯 명과 함께 철야로 작업을 했다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다카기 후미코도 마찬가지여서 13일과 14일 밤의 알리바이는 애매한데 15일 밤에는 5시에 회사를 나와 마치다 시에사는 고등학교 동창을 찾아가 밤새 얘기를 나눴다고 했다. 협박이라는 말에 얼굴이 새파래졌던 다카기 후미코도 15일 밤의 알리바이에는 자신감을 되찾은 듯 열을 내어 얘기했다는 것이다. - P220

그리고 다음 날, 사사하라 노부오는 석방되었다.
사와모리의 유서는 이제 결정적인 것이 되어서 경찰은 그를 범인으로 단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사하라가 레이코의 맨션에 청산가리를 지니고 간 것에 대해 살의가 있었는지 아닌지 확실하게 밝혀내지 못한 채, 자살을 위해서였다는 그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분위기였다. - P221

아사이의 마지막 임무는 그날 4시, 정문 앞에 몰려든 보도진을 피해 뒷문으로 몰래 사사하라를 차에 태워 내보내는 것이었다. 차가 떠나기 직전, 사사하라는 지난 이틀 동안 부쩍 핼쑥해진 얼굴을 묘하게 무표정으로 유지한 채 아사이를 향해 목례를 건넸다. - P222

사사하라는 자택이 아니라 아사이가 예약해준 긴자 뒤편의 작은 비즈니스호텔에 은신하기로 했다. 그는 우선 지난 삼일간의 신문을 구해달라고 프런트에 부탁했다.  - P222

7시가 되자 그는 요요기에 있는 하마노의 오피스텔에 연락했지만 아직 집에 오지 않았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음성을 바꿔 병원에도 연락해봤는데 교환 여직원이 하마노는어제부터 삼일 동안 휴가를 냈다고 알려주었다.
그로부터 세 시간을 계속 시도한 끝에 10시에 드디어 콜 사인이 통화 중으로 넘어가서 하마노가 집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귀가하자마자 어딘가에 전화를 한 것이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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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해졌다. 도대체 그는 어떻게 생활하는 것일까? 옷은 어떻게 입고, 화장실에는 어떻게 가고, 목욕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나는 부엌으로 그의 아내를 따라가 그가 어떻게 옷을 갈아입는지 등을 물어보았다.
"식사할 때랑 비슷해요. 늘 두는 장소에 제가 남편의 옷을 갖다둡니다. 그러면 노래를 흥얼거리며 혼자 별다른 어려움 없이 갈아입어요. 하지만 뭔가 방해를 받아 맥이 끊기면 완전히 아무것도 못하게 되죠. (후략)" - P40

"그래요. 그이는 노래뿐 아니라 그림도 잘 그렸어요. 학교에서해마다 그림을 전시할 정도로요."
나는 그 그림들을 흥미롭게 둘러보았다. 그것들은 그림을 그린 시간순으로 걸려 있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모두 생생한 느낌이 살아 있는 사실적인 그림이었다. 게다가 아주 세밀하고 구체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생생함도 사실성도 구체성도 떨어져갔다. 훨씬더 추상적으로 변해간 것이다. 아니 기하학적이고 입체파적이기까지했다.  - P41

그녀는 "어머나, 의사 선생님. 그림 볼 줄 모르시네요! 선생님은
‘예술적인 발전‘을 보지 못하시나요? 처음에는 사실주의였다가 나중에는 거기서 벗어나 추상적인 비구상 그림으로 발전했잖아요." 하고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차마가련한 P부인에게 그런말은 할 수 없었다). 그의 그림은 분명 사실주의에서 비구상으로, 다시 추상으로 바뀌어갔지만, 발전한 것은 화가 자신이 아니라 그의 병세였다. - P41

그렇지만 부인이 한 말에도 일리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의 병세와 그의 창작력이 투쟁하는 모습도 어느 정도는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그 둘 사이의 융합도 보였다. - P42

우리는 커다란 음악실로 돌아왔다. 뵈젠도르퍼가 한가운데 있었고 P선생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지막 남은 과자를 먹고 있었다.
(중략)
"저로서는 어디가 잘못된 건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제가 보기에 좋은 점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훌륭한 음악가이고 음악은 선생님의 삶 그 자체입니다. 만약 제가 처방을 내린다면, 음악 속에 파묻혀서 생활하시라고 하고 싶습니다. 이제까지 음악이 선생님 생활의 중심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지내시라고 말입니다." - P42

그는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대신 음악에 맞춰행동할 수 있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동작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면의 음악이 멈추면 그는 당황해서 행동을 딱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외부 세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그의 아내에게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는 학생이 얌전히 앉아 있으면 누가누군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미지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학생이 몸을 움직이면 "너 칼이구나.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지." 하며 금방누군지 알아맞히곤 했다는 것이다. - P43

뒷 이야기

(전략). 선생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이 ‘보는‘ 능력즉 관계를 짓는 능력이었다(그의 판단력은 그 밖의 영역에서는 정상적이며 동시에 빠르기까지 했다). 시각정보의 부족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시각정보를 처리하는 데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까?  - P44

. 시각의 기본틀 즉 시각정보의 처리나 통합 능력에 생긴 결함을 원인으로 돌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본 매크래는 이를 암묵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추상적 경향‘을 거론한 골드슈타인은 공공연하게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추상적 태도라는 것은 ‘범주화‘를 인정하는 것인데, 이것은 P선생의 경우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 P44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신경학이나 심리학은 모든 것을 다 말하지만, ‘판단‘에 대해서만큼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판단력의 결함(P선생처럼 특수한 영역의 장애도, 그리고 더 일반적인 장애인 코르사코프 증후군 즉 이마엽 증후군의 증세를 보이는 환자들의 경우에도 그렇다.
<정체성의 문제>와 <예, 신부님, 예, 간호사님> 참조)이야말로 수많은 신경심리학적 장애의 핵심 가운데 하나이다. - P44

그러나 철학적인(예를 들면 칸트적인) 의미에서나 혹은 경험론적·진화론적인 의미에서 볼 때 판단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능력 중에서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동물의 경우 아니 인간의 경우라도 ‘추상적 경향 없이 살수는 있지만, 판단 능력이 없다면 당장 사멸하고 말 것이다.
판단은 고등한 생활이나 정신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능임에도, 고전적인(계량적인) 신경학에서는 무시되거나 잘못 해석되어왔다. - P45

따라서 판단과 느낌을 배제한다면, 우리는 선생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컴퓨터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느낌과 판단이라는 개인적인 것을 인지과학에서 배제한다면, 그 역시 P선생과 똑같은결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 P45

나로서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P선생의 예후를 계속 관찰해 더 실제적인 병리학적 연구를 진행하지못한 일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로 남았다. - P46

P선생과 같은 이상한 증상을 보이는 환자를 대할 때면 우리는그러한 경우가 ‘독특하고 유례없는 경우가 아닐까 하고 걱정한다. 그래서 우연히 1956년에 나온 《브레인》지를 읽다가 P선생과 이상할 정도로 똑같은 사례를 발견했을 때, 아주 큰 흥미로움과 반가움을 느꼈다. 아니 일종의 안도감까지 느껴졌다. 이 학술지에 실린 사례는 신경정신학적으로나 현상학적으로나 P선생과 비슷한 아니 거의 똑같은 증세를 보인 환자에 관한 것이었다.  - P46

*이 책을 쓰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시각인식불능증에 관한 문헌, 특히 사람의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는 병에 대한 사례 보고는 얼마든지 많다. 특히, 최근에 이와 같은 시각인식불능증 환자에 대한 지극히 상세한 연구(1979년)를 발표한 앤드루 커테츠 박사를 만날 수 있어서 나는 무척 기뻤다. 커테츠 박사가 해준 말 중에는 다음과 같은 예가 있었다. 얼굴인식불능증세가 점점 심해진 어떤 농부는 결국 자기가 기르던 소나 말의 얼굴까지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연사박물관의 안내원이었던 또다른 환자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유인원의 입체모형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P의 경우나 매크래와 트롤의 환자 경우와 같이 상대가 특히 살아 있는 생물체일 경우에 터무니없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 P47

(전략)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P선생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기도 했지만, 매크래의 환자는 자기 아내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아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시각적으로 눈에 잘 띄는 뭔가 특징적인 것이 필요했다. 그것도 눈에 확 띄는 뭔가가. 예컨대 커다란 모자 같은 것‘ 말이다. - P49

침대에서 떨어진 남자

오래전에 내가 의대생이었을 때, 한 간호사가 매우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해서 내게 아주 기묘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새로 환자가 입원했어요. 오늘 아침에요. 젊은 남자인데, 사람.
도 좋고 아주 멀쩡해 보였어요. 그래요. 몇 분 전에 낮잠에서 깨기 전까지만 해도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 흥분해 있는 것이 아주 이상해요. 전혀 딴 사람 같아요. 어찌 된 영문인지 침대에서 떨어져 바닥에 퍼질러앉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침대로 올라가라고 해도 막무가내예요. 얼른 오셔서 제발 무슨 일인지 좀 알아봐주세요." - P104

"전 오늘 아침에 몇 가지 검사를 받으려고 병원에 왔습니다.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신경과 의사들이 내 왼쪽 다리가 둔한 것 같다며 나더러 입원하라고 했어요. 그래요, 의사들은 내 다리가 ‘둔하다‘고했어요. 하루 종일 기분도 좋았고 저녁에는 잠까지 곤하게 잤어요. 그런데 침대에서 몸을 좀 뒤척거렸더니 ‘누군가의 발‘이 있는 거예요. 잘린 다리 말이에요. 얼마나 무서웠다고요! 어찌나 놀랐는지 구역질까지나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어요.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전략)" - P106

"이렇게 소름끼치고 무시무시한 것을 본 적이 있나요? 이건 방금 죽은 시체에서 나온 거예요! 정말 소름끼치는 일이에요! 소름끼쳐요! 이놈이 나한테 달라붙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는 양손으로 있는 힘껏 다리를 움켜쥐고 몸에서 떼어내려고 애쓰다가 안 되자 이번에는 미친 듯이 때려댔다.
"진정하세요. 진정하라고요! 다리를 그렇게 때려대면 안돼요."
"왜 안되죠?"
"당신 다리니까요. 당신 다리라는걸 모르는 거예요?" - P107

내 표정을 보고 그는 내가 아주 진지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엄청난 공포에 휩싸였다.
"이게 내 다리라고요? 설마 내가 내 다리도 못 알아본다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그래요. 자기 다리는 누구나 다 알아보죠. 자기 다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죠. 놀리고 있는 건 바로 당신 아닌가요?" - P107

이번에는 나도 그만큼이나 당황해서 물었다.
"뭐로 보이느냐고요?"
그는 내 말을 천천히 따라했다.
"뭐로 보이는지 말해드리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요. 어떻게 이런 것이 내 몸에 달라붙어 있는 거죠? 어디서 굴러먹다온 녀석인지 모르겠다고요."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극도의 공포 때문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 P108

뒷이야기

(전략)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그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밤에 잠에서 깰 때마다 침대 속에 털이 덥수룩하게 나 있는 사람의 다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도 죽어서 싸늘하게 식은다리라는 겁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합니다. 그래서 그는 성한 팔과 다리로 그것을 침대 밖으로 밀쳐냈고,
그러면 자기 몸도 함께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편마비 증상이 있는 팔다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환자의아주 흥미로운 예입니다. 그렇다면 원래 다리는 침대 속에 그대로 있었냐‘고 묻자 그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기분 나쁘기 짝이 없는 그 낯선 다리에 신경이 온통 곤두서 있었던 겁니다. - P109

2부

이 병을 치료하고 싶은지 아닌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병이라는 것은 알지만병 덕분에 기분이 좋으니까 말입니다. 나는 그런 기분이 좋았어요.
그리고 지금도 좋아요. 그런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요.
그 덕분에 이십 년 동안 느끼지 못했던 원기를 느끼고 기운까지 팔팔하니말이에요. 우습지요. 이게 모두 큐피드 덕분이라니 말이에요. - P153

신경학에서는 ‘결손‘이라는 개념을 즐겨 사용한다. ‘결손‘은 어떠한 기능장애에 대해서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신경학 용어이다.
기능은 정상 아니면 비정상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이다. - P155

그러면 결손의 반대 상태인 기능의 과잉이나 잉여의 경우는 어떨까? 신경학에는 이것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러한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기능이나 기능 체계는 기능하든지 기능하지 않든지 둘중 하나이다. 신경학적으로는 이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 - P155

 해부학과 병리학에서도 비대와 기형, 기형종과 같은 말을 사용하며 그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나 생리학에는 그런말이 없다. 기형종이나 조증에 해당하는 과잉을 가리키는 말이 없는것이다.  - P156

고전적인 ‘잭슨파 신경학에서는 과잉으로 인한 이러한 장애를전혀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소위 ‘해방‘과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기능의 과잉 혹은 팽창이 있지만 그런 것도 고려에 넣지 않는다. 휴링스 잭슨 자신은 분명히 ‘초양성‘ 정신 상태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러나 그의 언급은 오히려 이례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 P156

과잉을 고려하기 시작한 신경학자가 등장한 것은 지극히 최근의일이다. 루리야가 쓴 두 권의 임상기록은 그 점에서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산산히 부서진 세계의 남자》는 상실에 대해서,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과잉에 대해 논했기 때문이다. - P156

나의 책 《깨어남》은 엘도파를 투여하기 전의 놀라운 결핍 상태(운동불능증, 무의지증, 무력증, 무반응증 등)와 엘도파 투여 후의 무서운 과잉 상태(운동과다증, 과다의지중, 과다수축 등) 사이의 균형을 잘 이룬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깨어남》에서는 기능을 가리키는 용어와 개념과는 별도로 새로운 용어와 개념이 나온다. 예를 들면 충동, 의지, 역동론, 에너지 등이다. - P157

루리야의 과다기억증 환자나 엘도파의 투여로 과도하게 고양되고 활기를 띤 내 환자에게서는 섬뜩할 정도로(광기에 가까울정도로) 증대된 쾌활함이 관찰된다. 이 지경에 이르면 단순한 과잉의 차원을 넘어선다. 증식이라거나 기질적 다산성의 문제인 것이다.  - P157

기억상실증과 인식불능증의 병례에 접했을 때, 우리는 단지 어떤 기능이나 능력이 손상되었을 거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기억항진과 인식력항진 환자의 경우에는 기억력과 인식능력이 태어나면서부터 늘 활발하고 생산적이다. - P157

 우리는 과잉의 병례와 마주침으로써 새롭고 중요한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는 한 ‘인간의 정신생활에 대해서 연구를 시작할 수 없다.
전통적인 신경학은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분석하고 결함에 중점을 둔나머지, 실제 생활을 고려하지 않았다. 실생활이야말로 모든 대뇌 기능의 궁극적 표현이다.  - P158

고양 상태란, 단순히 건강하고 충실하고 만족스러운 기분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극히 불안하고 도를 지나친 상태가 되기도한다. 이 때문에 기행과 추악한 행위를 초래하는 일도 있다. 지나치게 흥분한 환자는 통합과 억제를 잃은 상태, 어떤 종류의 ‘과잉‘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충동과 이미지와 의지에 압도되는 상태이며 생리적인 광폭성에 사로잡힌(혹은 내몰린) 상태인 것이다. - P158

겉보기에는 건강하지만 사실은 병에 걸린 상태라면 그것은 하나의 패러독스다. 이것은 스스로 건강하고 행복하다고 여기며 멋진 기분으로 살아가다가 병의 싹이 숨어 있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는 것과 같다. 따라서 가공의 괴물이나 자연이 보여주는 속임수 혹은 재미있는 패러독스의 하나라 할 수 있다. - P159

전부터 나는 이러한 아이러니에 커다란 흥미를 느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전에도 말한 바 있다. 《편두통》에서 나는 발작의 전조 혹은발작의 시작을 알리는 항진상태에 대해서 말했다. 그리고 조지 엘리엇을 예로 들어 ‘위험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다‘는 것은 그녀에게 때때로발작의 전조였다고 썼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위험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다‘는 표현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이 표현이야말로 바로 지나치게 건강하다‘라는 말 속에 숨은 양면성과 역설을 나타내고 있다. - P159

이렇게 해서 환자는 ‘몸 상태가 좋은‘ 것에 대해서는 불평하지 않지만 몸 상태가 지나치게 좋은 것에 대해서는 의심스러운 감정을 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깨어남》의 핵심적이고 잔혹한 주제이다. 도저히 알 수없는 어떤 깊은 곳에 결함이 있어서 몇십 년이나 지독하게 고생한 환자가 기적처럼 갑자기 좋아진다. - P160

레너드 L의 경우도 그랬다. 그도 충실한상태를 지나 과잉상태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처음에 그는 상태를 신의 ‘은‘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건강하고 활력이 가득 찬 상태는 윤택을 넘어 도를 넘은 상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조화와 안락을 느끼는 가운데 무난하게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했던 그는 이윽고 그렇지 않음을 느꼈다. 지나치고 도가 넘쳐 오히려부담스럽다는 의식이 들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조각조각 분해되고 폭발해서 산산이 부서지는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 P160

 어떤 투렛 증후군 환자는 이렇게 말했다.
"에너지가 너무 과한 것 같아요. 너무도 활기차고, 힘도 넘쳐요.
너무도.... 열병에 걸린 것 같은 에너지, 그러니까 뭔가 병적인 특출함이라고 할까요."
‘위험하리만치 좋은 몸 상태‘와 ‘병적인 특출함‘, 그것은 기만적인 행복감이다. 그 밑에는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다. - P161

이런 무시무시한 상태에 대해 <익살꾼 턱 레이>에 나오는 레이는 "나는 턱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는 정신이 과도하게 비대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집어삼킬지도 모르는 ‘투렛토마‘로 갈 수도 있다. 다행히 그는 자아도 강했고 투렛 증후군의 증세도 비교적 가벼웠기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까지될 위험성은 없었다.  - P161

큐피트병

90세의 쾌활한 할머니 나타샤 K가 우리 병원에 찾아온 것은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할머니는 88번째 생일을 맞은 지 얼마 되지않아서 어떤 ‘변화‘를 깨달았다고 한다. 우리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중략)
"얼마나 신이 나는지 몰라요. 전보다 훨씬 건강해지고 힘이 넘치는 느낌이 드니까요. 도로 젊어졌나봐요. 젊은 남자들에게도 관심이 생기고요. 그래요, 정말 살맛나는 기분이 든답니다." - P179

"스스로는 어떤 기분이 드셨어요?"
"깜짝 놀랐지요. 얼마나 감격했던지,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는전혀 의심하지도 않았지요. 하지만 이제 저도 의심스러워요. 제 자신을 타이르기도 하지요. ‘나타샤, 너는 여든아홉 살이야. 그런데도 벌써일 년이나 이런 상태가 계속되고 있잖아? 원래 소극적인 성격이던 네가 이렇게 제멋대로 굴다니.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나이에 난데없이이렇게 무작정 행복하다는게 말이나 되는 걸까?‘ 이렇게 무작정 행복해도 되는 건지 생각하다 보니 모든 게 달리 보이기 시작했어요. (후략)." - P180

"아니요. 마음의 병이 아니라 몸이 안 좋아요. 몸속에, 머릿속에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 것 같아요. 그래서 기분이 붕 떠버린 거예요.
전 알아냈답니다. 입에 담기도 꺼림칙하지만 이건 큐피드병이에요!"
"큐피드병이라고요?"
순간 머리가 멍해진 나는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런 말은 들어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P180

만일 초기 감염이 완치되지 않고 증상만 완화되었다면 특이하게 긴 잠복기를 거쳐 신경매독이 발병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다. 내가 전에 진료했던 환자 한 명은 살바르산으로 자가치료를 했지만 50년 넘게 지나서 신경매독의 하나인 척수매독이 발병했다.
그러나 70년이나 되는 잠복기는 들어본 적이 없고, 환자자신이그토록 냉정하게 뇌매독이 아니냐고 물은 적도 없었다.
"놀랍네요" - P181

노부인은 기운이 넘치는 듯이 몸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큐피드병에 걸린 것 같아요. 그래서 의사 선생님을 찾아왔어요. 더 심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남들한테 손가락질을 받을 테니까요. 하지만 치료 받는 것도 손가락질 받는 것 만큼이나 싫어요. 이렇게 넘치는 기운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정말로 살아 있었던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까요. 더도 덜도 말고 지금 이 상태가 계속되도록 해주실수는 없나요?" - P182

우리는 페니실린을 투여하기로 했다. 페니실린은 스피로헤타균을 죽이기는 하지만 큐피드병 즉 일단 생긴 뇌의 변화나 탈억제 상태를 되돌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K부인은 두 가지 희망을 모두 이루었다. 생각과 충동에 얽매임 없이 적당한 탈억제 상태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도 자제심도 잃지 않고 대뇌피질이 더는 손상될 염려도 없이 말이다. - P182

뒷이야기

아주 최근에, 그러니까 1985년 1월에 진찰한 또다른 환자(미겔O)와 관련하여 나는 똑같은 딜레마와 아이러니에 직면한 적이 있었다. 미겔 O.는 ‘조병‘이라는 진단으로 주립병원에 입원했지만 사실은 신경매독에 의한 흥분 상태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 P182

처음에 만났을 때 그는 아주 흥분된 상태였다. 내가 어떤 단순한 형태를 그려 보이며(그림 A) 이것을 그리라고 말하자 그는 단숨에 입체도형을 그렸다(적어도 나에게는 입체도형으로 보였다). 그러더니 그것을뚜껑이 열린 상자라고 설명하면서(그림 B) 그 속에 과일을 그려 넣으려고했다. 상상력이 흥분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그는 원래의 그림에 있던 동그라미와 가위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 P183

그러자 그는 충동적으로,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원래의 형태를 마름모꼴로 바꾸고 거기에 출하나를 연결하더니 끝에 사내아이를 그렸다(그림 C). 그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사내아이가 연을 날리고 있어요. 연이 하늘에서 펄럭이고 있단 말이에요." - P184

그는 이번에는 정확하면서도 평범하게, 원래의형태보다 조금 작게 그렸다(할돌 때문에 작은 글자증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림(그림 D)에는 앞의 두 그림과 같은 재미와 동적인 움직임도 없었고 상상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전에는 정말 생생하게 보였는데 치료를 받고 나니 모든 게 죽은 듯이 보여요." - P185

이러한 그림은 투렛 증후군에서도 상당히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원래의 형태와 생각이 지나친 장식으로 인해 보이지않게 되는 것이다. 암페타민 중독 상태에서 그리는 소위 스피드 아트speed-art (각성제의 영향하에서 그리는 그림-옮긴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상상력이 눈을 떠 점점 활발해지다가 마침내 끝없는 과잉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 P186

바로 이러한 역설이 《깨어남>의 주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투렛증후군 환자 또한 이러한 역설적인 ‘각성 상태‘를 향한 유혹을 느낀다<<익살꾼 턱 레이> <투렛 증후군에 사로잡힌 여자> 참조). 또한 코카인과 같은 마약을 복용했을 때 나타나는 특수한 불안정 상태도 의심할 바 없이 이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코카인은 엘도파나 투렛 증후군과 같이 뇌 속의 도파민을 증가시킨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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