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오리 레이코의 과거를 알아볼 필요가 있었어요. 그 여자의 과거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으니까요. 문신은 그걸 알려주는 단서가 될 거로 생각했죠." - P226

그런 이유뿐이었나, 하고 내심 낙담하면서도 오카베는 혹시나 해서 신주쿠 역 뒤편의 맨션 이름을 메모했다. 그렇게 두 톱모델에게 두 가지 색깔의 나비 문신을 해준 사람을 찾아갔다.
미국인이지만 일본어를 잘하니까 괜찮다, 라고 미리 들었던 대로 벨을 누르자 얼굴을 내민 금발의 남자는 훌륭한 일본어를 구사하며 질문에 답해주었다. - P227

"거짓말로 휴가까지 냈는데 별다른 수확은 없었어요. 다만한 가지 재미있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지난 9월 말에 어떤 젊은 여자가 미오리 레이코의 가슴 사진을 들고 와서 똑같은 문신을똑같은 자리에 해달라고 했다는 거예요. 모델 레이코를 정말 좋아하는 팬이라면서."
"젊은 여자가?" - P228

"그 과도에 찔린 여자가 문신사를 찾아온 여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건가?"
"네,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오리 레이코와는 다르게 그 여자는 말이 많은 편이었다.
다음 달 초에 볼일이 있어 미국에 갈 거라면서 현지 얘기를 꼬치꼬치 물었다고 한다.  - P228

"이를테면 레이코가 어릴 때 가난하게 자라서 지금도 빵에아무것도 안 바르고 먹는다, 라고 웬만해서는 알지 못할 얘기들을 했다는 게 이상해요. 미오리 레이코와 뭔가 특별한 관계였던게 아닌가 싶은데…."
전화 협박자와 밀고자 외에 또 한 명, 사건의 이면에서 수수께끼의 베일에 감싸인 여자가 나타난 것이다. - P229

"자살로 볼 수는 없을까요?" - P230

12장 누군가 誰か

"자네를 이런 번잡스러운 일에 끌어들여서 미안하네.."
점원이 가기를 기다려 눈앞의 사사하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설마 내가 자네에게 부탁한 전화를 받고 사와모리가 자살까지 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 P232

사와모리가 유서에 고백한 사건 날 밤의 행동은 하나하나그날 밤 그 자신이 한 행동이었다. 사사하라에게 죄를 덮어 씌우기로 결심한 것도, 레이코가 담요를 찾으러 잠깐 침실에 갔을 때 지문이 남지 않도록 손수건을 꺼내 독이 든 술잔과 레이코가 마시던 술잔을 바꿔치기한 것도 똑같았다. - P232

그날 밤 사와모리가 그 맨션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레이코와 그의 대화와 행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했고, 알지도 못하는 그를 감싸주려고 자신이 한 짓이라는 거짓 유서를 남긴 채 죽어갔다. 라는 게 아니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 P233

어제 아침에 마가키 기미코가 그의 전화에 이상한 반응을보였던 게 떠올랐다.
"모레 밤 11시에 다시 이 번호로 전화하세요. 어떤 얘기든받아줄 테니까."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가키 기미코도 범인인것이다. 똑같은 큰 착각 아래 그도 사와모리도 마가키 기미코도 살인범이 되었던 것이다. - P234

성형수술이 알려질 우려 때문에 숨긴 것도 있었겠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뭔가 더 중요한 비밀이 있었던게 아닐까. - P234

이름 옆에 숫자와 알파벳이 있었다. 이시가미 요시코의 이름에는 ‘4-B‘라고 적혀 있었다. 무슨 표시냐고 물어보니 기숙사방 번호이고, 2인 1실이니까 또 한 명 같은 번호를 가진 아이가있을 거라는 대답이었다.
같은 페이지의 조금 아래쪽에 또 하나의 ‘4-B‘가 눈에 띄었다. ‘가와다 기요코‘라는 이름으로, 기숙사에 들어온 건 이시가미 요시코와 같은 시기였지만, 이쪽도 기숙사를 나간 날짜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 P236

"이름까지는 몰라도 얼굴이야 대부분 기억하죠. 같이 찍은사진을 짚어주면 누군지 알 거예요."
사감의 말에 그는 앨범을 들춰보았다. 젊은 여자들이 사감을 둘러싸고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중략)
역시 앨범의 중간쯤에서 문제의 얼굴을 찾아냈다. 오년전뉴욕의 병원에서 그 여자가 의사에게 내민 초상화와 똑같은 얼굴이다.  - P237

"이 아이라면 기억이 나요. 옆에 조금 더 예쁘장한 아이가있죠? 약간 시건방진 데가 있는 이 여자애와 같은 방을 썼어요.
아마 한 삼 년쯤 있었을 텐데 좀 음울한 느낌이었어요. 그러다 남자 친구가 생긴 모양이에요, 누군지는 모르지만. 휴일이면 예쁘게 차려입고 신이 나서 뛰어나가곤 했거든." - P237

남자 친구가 생겨 신이 나서 뛰어나가곤 했다는 말을 듣고는 레이코가 어느 날 밤, 모래시계의 모래를 그의 등에 쏟았을 때가 생각났다. 흠칫해서 등 뒤를 돌아보자 레이코는 조금 쓸쓸한듯 중얼거렸었다.
"똑같은 얼굴을 하네?"
그와 똑같이 흠칫 놀란 표정으로 돌아본 그 남자 친구와 레이코는 어쩌면 평범한 가운데 나름대로 행복한 일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 P238

도쿄로 돌아와 항상 가던 카페의 텔레비전으로 사사하라의 석방 뉴스를 보았다. 석방되자마자 가장 먼저 자신에게 연락할 터였지만 그와 마주하는 것을 한 시간이라도 뒤로 미루려고 오랜 시간 카페에서 뭉그적거리다가 밤 10시가 되어서야 겨우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집에 돌아와 우선 이케지마 리사에게 전화했지만 부재중이었다. - P239

기타가와 준은 결국 조용히 침묵해버렸고, 이나키 요헤이는 헉하고 경악하는 목소리를 냈다. 다카기 후미코는 파르르 떨며 "나는 그런 거 몰라!"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다가 큰 착각을 깨닫고 사와모리 에이지로도, 나도, 그리고 어쩌면 마가키 기미코도 범인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착각이었다면 더 많은 레이코 살해범이 있는지도 모른다.  - P240

사사하라가 음식 접시에서 얼굴을 들고 테이블 너머로 그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며 말했다.
"어제 누군가 경찰에 밀고 편지를 보낸 모양이야. 범인은내가 아니라 여섯 명 중 한 사람이라는 내용이야. 거기 적힌 여섯명의 이름이 내가 자네에게 알려준 것과 완전히 똑같았어. 설마자네가 그 밀고 편지를 보낸 건 아니지?"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경찰에 보낸 적은 없다. - P241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오늘 아침 그가 깨달은 ‘큰 착각‘은 아무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왜냐면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미오리 레이코의 얼굴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 외에도 미오리 레이코를 살해한 범인이 있다. - P240

어젯밤에는 범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진범은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막상 현실이 되고 보니 한여자를 여러 사람이 완전히 똑같은 방법으로 살해했다는 것은진짜 구역질이 날 만큼 오싹하고 끔찍한 일이었다... - P241


그렇게 직원이 내준 잔돈을 상의 호주머니에 넣었을 때 였다.
"이봐, 이게 떨어졌어."
사사하라가 작은 쪽지를 내밀었다.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낼 때, 바닥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 쪽지는 오늘 아침에 집을나오는 길에 적어온 메모였다. ‘가와구치 시, 세이에이 기숙사,
이시가미 요시코‘라는 세 가지를 급히 갈겨썼다. - P243

어젯밤에 이케지마 리사에게 전화한 것은 경찰에게 자신이 사사하라를 구하기 위해 범인을 찾고 있다는 게 알려져 용의선상에서 제외되는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전화하는 목적은 다르다. 조간신문으로 사와모리의 유서를 확인하기전까지는 어차피 망상에 빠진 얘기라서 경찰이 깨끗이 무시할거라고 생각했다. - P244

우선 이케지마 리사와 접촉해 그녀도 미오리 레이코를 죽인한 명이 아닌지, 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몇 번을 시도해도 상대는 수화기를 들지 않았다. 그는 포기하고 다음으로 다카기 후미코의 자택 전화번호를 눌렀다. 어젯밤 그의 전화에 다카기 후미코도 특이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 P244

하마노가 수화기를 향해 뭔가 얘기하는 것을 그는 전화박스에서 3미터쯤 떨어진 길모퉁이 뒤쪽에 몸을 숨기고 오로지 시선만 날카롭게 벼린 채 지켜보았다. 하마노는 아주 중요한 것을 그에게 감추고 있다. 그런 눈치를 챈 것은 조금 전 레스토랑 계산대 앞에서 하마노의 호주머니에서 떨어진 한 장의 쪽지를 봤을때부터였다. - P245

누구와 전화 통화를 하는 건가. 어쩌면 그 용의자 목록 중의 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대체 왜?
하마노는 유리 전화박스 안에서도 얼굴을 코트 깃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를 응시하는 눈빛이 점점 더 초점이 좁혀지고 어둡게 벼려져 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 P246

"나, 사실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사 개월 전의 그 차가운 목소리가 되살아나 얼어붙은 밤바람과 함께 그의 귀를 때렸을 때, 드디어 하마노가 수화기를 내려놓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수화기를 다시 들고 하마노는 또 번호판을 꾹꾹 눌렀지만 중간에 마음이 바뀌었는지 수화기를 내려놓고 전화박스에서 나왔다. - P2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