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나는 하얀 피부에 검고 큰 눈동자의 인형을 갖고 있었다. 엄마도 없고 자매도 없었기 때문에 너무 외로워서 항상 그 인형을 마주하고 놀았다. 인형은 긴 속눈썹이 달린 눈을 떴다 감았다 했다. 감으면 조용히 잠든 것 같고, 뜨고 있으면 까만눈동자가 어딘지 쓸쓸해 보였다. 나는 이런저런 얘기를 인형에게 들려주었고 인형도 내게 이런저런 말을 해주었다.  - P193

인형이 가장 좋아하는 노란색 레이스 옷을 입히고 다정하게 품에 안고 긴 머리칼을 한 올 한 올 쓰다듬으며 나는 엉엉 울면서 애원했다.
"얘, 제발 부탁이야, 뭔가 말 좀 해봐."
하지만 인형은 두 번 다시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다. - P193

오 년 전 마가키 선생의 패션쇼에서 처음 그 애를 만났을때, 곧바로 어린 시절의 그 인형이 떠올랐다. 긴 속눈썹도, 까맣고 쓸쓸해 보이는 동그란 눈동자도, 이따금 미소 짓는 것 외에는 항상 백지처럼 마음을 닫고 있는 무표정도 완전히 꼭 닮았다. - P194

반년쯤 뒤에 더는 참을 수 없어서 어느 패션쇼 무대가 파한 뒤에 슬쩍 말을 붙였다.
"우리, 친구할래?"
"응, 좋아." 그 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용히 내 집에 따라왔다. "한숨 자게 해줄래? 어젯밤에 거의 잠을 못 잤어."
그렇게 말하고 그 애는 내 무릎을 베개 삼아 눈을 감았다.
그 애가 잠든 동안 나는 내내 그 긴 머리를 쓰다듬었다. - P194

"우리 친하게 지내자. 넌 나의 인형이야."
그렇게 속삭이자 그 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슴을 드러내 붉은 나비 문신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친구가 된 징표로 너도 나비 문신을 하는 건 어때?"
그때도 그 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검은 나비가 좋은데." - P194

우리가 침실에서 은밀히 어울린다는 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톱 모델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미워한다고 자기들 좋을 대로 소문을 퍼뜨렸다. 오히려 나는 그 애를 지나칠 만큼 사랑했다. 그애가 르네 마르탱의 패션쇼에 나가 세계적으로도 이름을 떨치고 내 인기를 뛰어넘었을 때도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네고내 품에 그 애의 얼굴을 안고 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 P195

"너도 웨딩드레스 잘 어울려. 이다음에 마가키 선생에게 꼭입혀달라고 내가 부탁해볼게."
어린 시절의 그 인형은 훨씬 더 무모한 떼를 썼다. 달에 데려가 달라느니 너희 아버지가 너무 싫으니까 흠씬 패주라느니..
침대 위에서 노닐 때, 그 애의 왼편 젖가슴의 나비가 높아진 심장 소리를 빨아들여 살갗에서 불쑥 떠올라 훨훨 날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좋았다.  - P196

그러면 그 애도 긴 속눈썹을 떴다 감았다 하면서 온갖 억지를 부려 나를 난처하게 만들곤 했다.
"이 신문기사, 공개해도 돼?"
올 2월 말, 오래 전 신문 기사의 스크랩을 불쑥 내게 들이밀었을 때, 또다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는구나 하고 어이없어 했을 뿐 그리 귀담아듣지 않았다. - P197

신문 기사는 내가 어릴 때 살던 연립주택에서 방화 사건이 일어났고 범인으로 우리 아버지가 체포되었다는 내용이다. 그사건으로 연립 한 동의 반절쯤이 불에 탔고 어린애 한 명과 한창 나이의 회사원 한 명이 숨졌다.  - P197

 나는 고아원에 보내졌고 그 뒤로 한 번도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다.
"어떻게 그 기사를 찾아냈어?"
나는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물었다.
"십칠 년 전의 신문쯤은 어디서든 구할 수 있어." - P197

 하지만 그 애는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이 펄쩍 물러서더니 내 뺨을 찰싹 내리쳤다.
"그 더러운 손, 치워! 여태까지 네가 원하는 대로 몸을 맡긴것은 너의 더러운 손에 나도 똑같이 더러워지면 업계에서 버텨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이제 이런 곳은 견딜 수가 없어. 왜 빙글빙글 웃어? 너를 증오한다니까? 너도 나를 엉망으로 망가뜨린 인간이야. 오늘부터 그 앙갚음으로 너도 엉망진창으로 망가뜨려 줄 거야." - P198

"신문 기사만으로 내 아버지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지?"
그러자 그 애는 핸드백에서 다른 종이를 꺼내 한 장의 사진과 함께 내게 툭 던졌다.
"흥신소에 의뢰해서 네가 살던 고아원을 조사해달라고 했어. 사진도 있어."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이 모여 사는 고아원이다. 거기서 찍은 사진들은 그곳을 나올 때, 기억에서 깨끗이 지워버렸는데…. - P198

"네가 얘기해준 본명도 가짜였어. 열여섯 살에 고아원을 나온 뒤로 단 한 번도 간 적이 없다면서? 하지만 고아원 선생님이 잡지에서 모델로 활약하는 네 모습을 보고 꼭 한번 만나고 싶다던데?"
조사 보고서의 메마른 글씨로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한 가지 과거가 적혀 있었다. 아니, 단 한 사람에게 말했었다. 그 애였다.  - P199

. 그렇듯 동정심을 보여주었던 그 애가 설마 사 년 뒤에 협박자로 표변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네가 신문 기사며 흥신소 조사 보고서를 진짜로 주간지기자에게 보내겠다면 나도 지난 팔 개월 동안 네가 나를 협박했다는 거, 세상에 까발려줄게." - P199

"너도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곤란한 일이 있을 텐데?"
4월이었던가, 내가 그렇게 쏘아붙인 적이 있었다.
(중략)
"내일까지 백만 엔 준비해. 내가 입 다물어줬잖아, 싫다고는 못할걸? 돈을 못 주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 얘기, 주간지에 알릴 거야."
혼자 주워섬기더니 뭔가 이상했는지 갑자기 말투가 달라졌다. - P200

게다가 사람들에게 알리고싶지 않은 과거의 비밀일 터였다.
"그 전화만이 아니야. 언젠가 톱 모델 둘이 똑같이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과거가 있는 게 너무 우습다고 했지? 하지만 가족이 모두 화재로 죽었다는 얘기라면 굳이 숨길 필요가없잖아, 다들 가엾게 생각해서 오히려 인기가 올라갈 텐데, 너,
뭔가 더 큰 비밀이 있지? 나보다 훨씬 더, 사람들에게 알려지면곤란한 과거가 있지?"
"그래, 협박당했어. 하지만 그 여자가 원하는 건 돈뿐이니까 나는 전혀 두렵지 않아." - P201

"내가 원하는 건 돈이 아냐. 너의 파멸이지."
그 말과 함께 다른 때보다 더 거친 손길로 20만 엔의 돈을찢어발겼다.
"너를 파멸시킬 거야. 나는 모두 다 잃었어. 그러니까 너한테서도 모든 걸 빼앗을 거야." - P201

"나를 죽여. 나를 죽여…."
그 아이도 똑같은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를 죽여..."
두 개의 술잔을 바꿔놓으면서 내 귀는 단지 인형의 목소리만 듣고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인형은 머리칼을 쥐어뜯기고 한쪽 눈이 일그러지고 얼굴이 뭉개진 채 침대 위에 내던져져 있었다. 아니, 인형이 아니라 그 애였다. - P202

돌연 차임벨이 울렸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베갯머리의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경찰입니다. 밤늦게 죄송하지만, 잠깐 물어볼게 있어서..."
경찰이라고? 조금 전 전화한 남자가 경찰에 신고한 걸까.
하지만 괜찮다. 그런 어이없는 얘기, 당연히 거짓말이다. - P203

추운 듯 싸구려 코트 깃을 세우고 어깨를 웅크린 것이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본 형사를 그대로 닮았다.
"이케지마 리사 씨지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두 형사는 현관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실은 오늘 저녁에 이상한 편지가 경찰서에 도착했어요."
그렇게 말을 꺼냈다.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는 편지에 미오리 레이코를 살해한 자는 이케지마 리사라고 적혀 있었다, (후략). - P203

"하지만 편지에 당신이 미오리 레이코에게 협박을 당했다고 적혀 있던데요."
"주간지마다 내가 레이코와 항상 경쟁하고 시샘한다는 기사가 실렸지만, 실은 진짜 친한 사이였어요. 왜 협박이니 뭐니 하는 말이 나오는지 모르겠군요" - P204

"알리바이 조사인가요?"
그녀는 번거롭다는 듯이 되묻고 집 안에서 스케줄 수첩을가져왔다.
"어디 보자, 12일부터 14일까지는 일이 없어서 여기 집에서 뒹굴뒹굴하며 보냈네요. 15일과 16일에는 규슈 여행을 했어요. 15일 점심때 비행기로 도쿄를 떠났다가 16일 밤늦게 돌아왔죠. 사진작가 기타가와 준 선생님과 동행했으니까 그 쪽에 물어보시면 알 거예요." - P204

(전략), 12일과 13일 이틀 동안에도 그랬다고 대답했다.
"근데 왜 그 이틀 동안이죠? 신문에는 사망 추정 일시가 언제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나왔어요. 그러면 15일이나 16일밤일 수도 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미오리 레이코는 15일 아침에 파리로 떠날 예정이었기 때문에..." - P205

문을 닫아걸면서 대체 누가 그런 밀고 편지를 경찰에 보냈을지 생각해보았다. 아까 전화했던 그 남자인가. 하지만 어떻게 레이코가 나를 협박한 것을 알고 있을까. 2월 말부터 둘이 만날 때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특히 주의했던 것이다. - P206

 경찰에서는 자살한 사와모리 에이지로를 진범이라고 단정했다. 그녀가 레이코를 죽인 것은 경찰에서는 결코알 수 없다. 그녀의 소녀 시절을 빨갛게 불태웠던 옛날 얘기도주간지 기자가 알아낼 일은 영원히 없다……

. 그런데 그 이유를 이제야 겨우 알 것 같았다. 나비가 아니라 불꽃 모양을 평생의 낙인으로 가슴에 남겨두고 싶었던 것이다.
레이코를 사랑했기 때문에 죽였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레이코의 협박이 두려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 P207

아버지가 범죄자라는 것 따위, 알려져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애의 목소리는 항상 그다음 말을 거침없이 내뱉을 것만 같았다.
"불을 지른 건 너희 아버지가 아니야! 너희 아버지는 진짜범인을 감춰준 것뿐이었어!"
거울에 비친 오른편 젖가슴의 나비 모양 불꽃은 금세라도활활 타올라 그녀의 몸을 삼켜버릴 것 같았다. - P208

11장 경찰 警察

12월 2일 밤, 사와모리 에이지로의 자살 현장에서 돌아온지세 시간 만에 아사이는 책상 위에서 한 통의 봉투를 발견했다.
겉에 경찰서 이름과 ‘형사과장님께‘라고 적혀 있었다. 아침 일찍배달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세이조 경찰서 관할의 자살 사건 현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아사이는 다시 사사하라를 취조했다.  - P210

언론사 기자들에게는 "사와모리 에이지로의 유서 내용은신빙성이 높다. 따라서 사건을 재검토하고자 한다"라는 설명으로 대충 둘러댔다. 하지만 경찰 윗선에는 사사하라 노부오를 체포한 건 잘못이었다고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210

그리고 여섯 명의 남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케지마 리사, 사와모리 에이지로, 마가키 기미코, 기타가와 준, 이나키 요헤이, 다카기 후미코.
편지를 단순한 장난으로 묵살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그중한 명인 젊은 사장 사와모리 에이지로의 유서에는 미오리 레이코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저 어림짐작으로 넘겨짚었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 P211

경찰에 편지를 보낸 뒤에 오늘 아침에는 직접 사와모리에게 전화했다, 라는 가능성도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유서 내용만 봐서는 사와모리에게 전화한 인물은 사건 당일 밤에 우연히 현장 부근에 있었던 것뿐일 거예요. 이 편지를 보낸 자는 조금 더 사건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 같네요. 피해자가 사와모리를 협박했다는 건 장본인 외에는 알 수 없잖아요.
근데 그걸 알고 있어요.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 P211

"다만 이 여섯 명의 이름을 보니 생각나는군요. 약혼한 무렵에 레이코가 내게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을 죽이고 싶을만큼 미워하는 사람이 일곱 명이라고 했어요. 그중 여섯 명이 이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면 일곱 번째 사람은?"
"실은 일곱 번째 사람에 대해서는 레이코가 입을 딱 다물었어요. 아마 남자인 것 같긴 한데. 어쩌면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이 그 일곱 번째 남자인지도 모르겠네요." - P212

편지에는 ‘진범은 여섯 명 중 한 명이다‘라고 분명하게 단정하고 여섯 명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 제7의 인물이 있다면 그자가 자신을 지키려고 이런 밀고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 P212

아니, 사사하라도 실제로 뭔가를 알고서 이런 말을 하는 게아닐지도 모른다.
사와모리가 레이코 살해를 고백하고 자살했다는 소식을전했을 때, 사사하라는 뜻밖에도 한순간 못 믿겠다는 표정을 보였다. 부정하듯이 머리까지 가로저었다. 사와모리가 그런 고백을 하고 죽은 게 그에게는 예상 밖의 일이었던 것이다. - P213

어요?"
았다.
"당신, 혹시 사와모리가 범인이 아니라는 확증이라도 있그러자 그는 당황한 기색으로 어물어물 말끝을 흐렸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그러더니 갑자기 홱 바뀌어 유서를 긍정하는 말을 늘어놓
"네, 범인은 역시 사와모리겠네요. 레이코가 생전에 그에대해 자주 얘기했습니다. 자신의 사업을 위해서라면 태연히 살인도 저지를 사람이라고." - P214

세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 의문이 머릿속 한 귀퉁이에서 계속 맴돌았다. 사와모리의 자살 소식에 사사하라가 크게 동요하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사건에는 조금 더 깊은 속사정이 있는지도 모른다.  - P214

"내일 아침에 다시 한번 취조한 다음에 고려해보겠습니다.
사와모리가 진범이라고 해도 그가 사용한 독약은 당신이 가져간 것이었어요. 미오리 레이코의 맨션에서 자살할 생각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하셨지만, 그게 거짓이고 조금이라도 살의가 있었다면 실제로 일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법률적으로 문제가 됩니다."
"그보다 미오리 레이코의 사체는 어떻게 되지요?" - P215

"아뇨, 아무도 없을 겁니다. 혈육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어서 자신은 죽을 때도 혼자라고 레이코가 자주 말했으니까요. 그너에게 큰 배신을 당하긴 했지만 그렇게 딱하게 죽었으니 최소한 내 손으로 장례식은 치러주고 싶군요. (중략)." - P215

전원이 탐문 수사를 나간 뒤, 아사이는 혼자 창가에 앉아컴컴한 겨울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징계처분보다사건 자체의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중 하나는 미오리 레이코라는 여자의 신원이었다. 계속수사를 진행했지만 아직까지 오 년 전 데뷔하기 이전에 대한 것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얼굴의 미세한 부분까지 성형을 했다는 건 알아냈지만, 그녀의 과거는 원래 얼굴과 마찬가지로 수수께끼에 감싸여 있었다. - P216

또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정확한날짜와 시각이다. 사와모리 에이지로의 유서에도 ‘11월의 그날 밤‘이라고만 적혀 있고, 사사하라도 13일인지 14일인지 정확하게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더욱더 마음에 걸리는 건 그 두 가지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 발동해온 형사의 직감에 뭔가가 몹시 거치적거리는것이다. 용의자 체포와 그것을 뒤엎는 진범의 자살... 그러나 사와모리가 스스로 방아쇠를 당긴 엽총의 폭발음만으로는 사건이 해결되지 않는다. - P216

예상은 했었지만, 네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미오리 레이코에게서 협박당한 사실이 없다고 부정했다. 허식의 세계에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부정했다고 해도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다. - P217

밀고장에 이름이 적힌 여섯 명 중에 다카기 후미코라는 인물만은 경찰서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연예 주간지에 전화해보니 그녀는 인기 가수 여러 명이 소속된 전국 톱클래스의 레코드회사에서 디렉터로 일하는 여자라고 알려주었다.  - P217

"밀고장에 나온 대로 미오리 레이코가 여섯 명 전부를 협박했을 수도 있어요."
오니시의 의견이었다. 아사이는 사사하라가 얘기했던 일곱 번째의 남자가 다시 어두운 그림자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금까지 별다른 말 없이 다른 형사들의 보고며 의견을 듣고 있던오카베가 문득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째서 네 명 모두 가장 중요한 13일과 14일 밤의 알리바이는 없고, 오히려 15일 밤만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는 걸까요..." - P218

"맞아, 내가 만난 사진작가 기타가와 준도 13일 밤에는 신주쿠 뒤쪽의 처음 들어간 바에서 술을 마셨다는 불확실한 얘기뿐이고 14일 밤의 알리바이는 아예 없었어요. 혼자 암실에 틀어박혀 일했다는데 그건 증인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15일 밤에 대해서는 이케지마 리사와 규슈에 갔고 나가사키 호텔 바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고 확실한 알리바이를 대더라고요."
15일 아침 일찍 갑작스럽게 이케지마 리사가 전화로 규슈에 가자고 했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운젠에서 나가사키까지 돌아보자는 그녀의 제안에 기타가와는 망설임 없이 응했다고 한다. - P219

"13일과 14일 밤의 행적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더니 15일밤에 나가사키 호텔에 숙박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갑자기 태도가 바뀌어서 세세하게 얘기해주더라고요. 호텔 직원과 바텐더 중에 자신과 이케지마 리사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이 있으니까 그쪽에 물어보면 안다고까지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레이코 씨가 15일아침에 파리로 떠날 예정이었으니까 사건이 일어난 건 그 이전,
즉 13일이나 14일 밤인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죠. 그랬더니 그때까지 냉정하던 기타가와가 약간 안색이 달라지면서 그걸 어떻게 아느냐, 레이코는 변덕이 심해서 그 전에도 여러 번 외국 여행을 당일에 취소한 적이 있다. 이번에도 갑작스레 마음이 바뀌어15일 밤에도 도쿄에 있었을지 모른다, 라고 하는 거예요."
"이케지마 리사도 완전히 똑같은 진술을 했어." - P220

이나키는 13일 밤에는 9시까지 파티에 참석했지만, 그다음 날인 14일은 종일 제삼자가 증언해줄 만한 알리바이가 없었다. 그런데 15일 얘기가 나오자 저녁때부터 다음 날 아침 10시까지 모델 세 명,
조수 다섯 명과 함께 철야로 작업을 했다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다카기 후미코도 마찬가지여서 13일과 14일 밤의 알리바이는 애매한데 15일 밤에는 5시에 회사를 나와 마치다 시에사는 고등학교 동창을 찾아가 밤새 얘기를 나눴다고 했다. 협박이라는 말에 얼굴이 새파래졌던 다카기 후미코도 15일 밤의 알리바이에는 자신감을 되찾은 듯 열을 내어 얘기했다는 것이다. - P220

그리고 다음 날, 사사하라 노부오는 석방되었다.
사와모리의 유서는 이제 결정적인 것이 되어서 경찰은 그를 범인으로 단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사하라가 레이코의 맨션에 청산가리를 지니고 간 것에 대해 살의가 있었는지 아닌지 확실하게 밝혀내지 못한 채, 자살을 위해서였다는 그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분위기였다. - P221

아사이의 마지막 임무는 그날 4시, 정문 앞에 몰려든 보도진을 피해 뒷문으로 몰래 사사하라를 차에 태워 내보내는 것이었다. 차가 떠나기 직전, 사사하라는 지난 이틀 동안 부쩍 핼쑥해진 얼굴을 묘하게 무표정으로 유지한 채 아사이를 향해 목례를 건넸다. - P222

사사하라는 자택이 아니라 아사이가 예약해준 긴자 뒤편의 작은 비즈니스호텔에 은신하기로 했다. 그는 우선 지난 삼일간의 신문을 구해달라고 프런트에 부탁했다.  - P222

7시가 되자 그는 요요기에 있는 하마노의 오피스텔에 연락했지만 아직 집에 오지 않았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음성을 바꿔 병원에도 연락해봤는데 교환 여직원이 하마노는어제부터 삼일 동안 휴가를 냈다고 알려주었다.
그로부터 세 시간을 계속 시도한 끝에 10시에 드디어 콜 사인이 통화 중으로 넘어가서 하마노가 집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귀가하자마자 어딘가에 전화를 한 것이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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