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서문
(전략). 예술을 드러내고 예술가를 숨기는 것이 예술의 목표다. (중략). 비평의 최고이자 최악의 형태는 자서전이다. - P41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책은 잘썼든지, 잘못 썼든지 둘 중 하나다. 단지 그뿐이다. - P41
어떠한 예술가도 병적인 존재는 아니다. 예술가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다. 사상과 언어는 예술가에게 예술의 도구다. 악덕과 미덕은 예술가에게 예술의 소재다. 모든 예술의 전형은 형식적인 면에서 음악가의 예술을 따르며, 정서적인 면에서 배우의 연기를 따른다. - P42
1장
화실은 풍성한 장미향이 가득했고, 가벼운 여름 바람이 정원의 나무들 사이를 휘젓자 라일락의 짙은 향기, 혹은 분홍 꽃이 핀 가시나무의 더욱 미묘한 향내가 열어놓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다. - P43
"난 이 작품을 어디에도 출품할 것 같지 않아." 화가는 옥스퍼드에 다니던 시절 그의 친구들에게서 비웃음을 샀던 자신만의 특이한 방식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며 대답했다. "아니, 절대로 난 어디에도 내놓지 않을 거야." - P44
"자네가 나를 놀릴 줄 알았어." 그가 대답했다. "그렇지만난 정말 이 그림을 전시할 수가 없어. 이 속에 나 자신을 너무 많이 집어넣었거든." 헨리 경은 소파에서 몸을 쭉 뻗으며 웃었다. - P45
"자넨 나를 이해하지 못해, 해리." 화가가 대답했다. "물론나는 그를 닮지 않았어. 그 사실은 나도 확실하게 알아. 내가그와 닮아 보인다면 나로선 정말 유감일 거야. 이해가 안 되겠지? 난 자네에게 진실을 말하는 거라네. (후략)." - P46
"도리언 그레이라고? 그의 이름인가 보군" 헨리 경이 화실을 가로질러 바질 홀워드를 향해 걸으며 물었다. - P47
"오, 나로선 설명할 수가 없어. 난 어떤 사람을 무한히 좋아하게 되면 그들의 이름을 남들에게 절대 밝히지 않아. (중략). 혹시라도 그 말을 입 밖에 냈다간 나의 기쁨이 모두 사라져버릴 거야. 감히 말하지만 이건 어리석은 습성인데, 어쨌거나 개인의 삶에 크나큰 낭만을 주는 것 같단 말이지. 아마 자넨 나를 끔찍이 어리석다고 생각하겠지만." - P47
"자연스러운 척하는 것이야말로 허식일세. 그건 내가 아는 가장 짜증나는 허식이라네." 헨리 경은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 P48
바질 홀워드는 친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감정을 품고 그린 모든 초상화는 말이야, 그 대상의 초상이라기보다 화가 자신의 초상이라네. 대상은 단순히 우발적으로 그곳에 놓인 대상일 뿐이지. 화가가 그림으로드러내는 것은 그 대상이 아니란 말이야. 오히려 채색된 캔버스에는 화가 자신이 드러난다는 걸세. (후략)." - P49
"간단히 말하자면 사실은 이렇다네." 화가가 약간 뜸을 들인 뒤 입을 열었다. "두 달 전에 브랜든 부인의 집을 불쑥 찾아갔었지.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같은 가난한 예술가들은 가끔씩이라도 사교계에 모습을 보여야 하거든. (중략). 자네도 한번 말한 적이 있지만, 연미복을 입고 흰 타이를 매면 누구든지 심지어 주식 중매인조차도 교양 있다는 평을 들을 수 있지. (후략)." - P50
"(전략). 난 언제나 나 자신의 주인이었고, 적어도 도리언 그레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늘 그랬어. (중략). 나를 그렇게 행동하게 만든 건 양심이 아니었어. 그건 일종의 소심함 때문이지. 그곳을 빠져나가기로 결심한 나자신을 칭찬해 줄 수는 없었으니까." - P51
"그렇지. 그녀는 모든 면에서 공작을 닮았지. 예쁘지 않다는 점만 빼고 말일세." 헨리 경은 길고 예민한 손가락으로 데이지 꽃을 뜯어내며 말했다. - P51
"그래서 브랜든 부인은 그 훌륭한 청년에 대해 뭐라고 소개하던가? 친구가 물었다. "내가 알기로 그녀는 자신의 모든 손님들을 재빠르게 요약하길 좋아하지. (후략)." - P52
"아, 대충 이런 식이었어. ‘매력적인 청년이랍니다. 가난하고 소중했던 그의 어머니와 나는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였답니다. (후략). 우린 둘 다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지. 그리고 즉시 친구가 되었다네." - P53
홀워드는 고개를 저었다. (중략). "혹은 반목에 대해서도, 물론 그런 일은 드물겠지만. 자넨 모든 사람을 좋아하지, 그 말은 곧 자네가 모두에게 무관심하단 걸세." - P53
"정말이야, 자넨 끔찍하게 부당하군. 난 사람들을 넓게 구분한다네. 외모가 훌륭한 이들은 벗으로 선택하지. 성격이 좋은 이들은 지인으로 삼고, 지성이뛰어난 이들은 적으로 삼는다네. 적을 선택할 때는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아. 그러니 어리석은 자들은 나의 적이 될수 없다네. 나의 적들은 모두 웬만큼 지성을 갖춘 이들인데, 그래서 그들은 결국 나를 높이 평가하게 되지. 이런 걸 두고 허영이라고 해야 할까? 글쎄, 이건 단순한 허영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 P53
"오, 형제라니! 난 형제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네. 내 형은 결코 죽을 것 같지 않아. 내 동생은 다른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고" - P54
"대단하군! 난 자네가 자네의 예술 말고는 어떤 것도 신경쓰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 P55
"해리, 난 가끔 세계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가 단 두 차례 있었다고 생각한다네. 그 첫 번째는 예술의 새로운 수단이 나타났을 때고, 두 번째는 역시 예술에서 새로운 개성이 탄생했을 때지. 베니스에서 유화가 처음 발명된 것과, 말기 그리스 조각에안티노오스의 얼굴이 처음 등장했을 때. (후략)." - P55
"(전략). 그의 아름다움이 예술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도 아니라네. 예술이 표현할 수 없는 것이란 없지. 그리고 내가 도리언 그레이를 만난 이후 해온 작품은 훌륭하고 내 평생 최고의 작품이 될 거라는 걸 나도 알아. (후략)." - P56
"바질, 그건 정말 특별한 일이군! 나도 도리언 그레이를 만나봐야겠어." - P57
"그렇다면 어째서 그의 초상화를 출품하지 않으려는 건가?" 헨리 경이 물었다. - P57
"왜냐하면,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난 그 속에 이 모든 유별난 예술적인 맹목적 숭배를 웬만큼 표현하고 말았으니까. 물론 이 점에 관해서는 그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아. 그는 아무것도 모르지. 앞으로도 그 점에 관해서는 전혀 모를 거야. (후략)." - P57
"난 자네가 틀렸다고 생각하네, 바질. 그렇지만 자네와 말싸움을 벌일 생각은 없군. 논쟁은 지성을 잃게 만들지. 자, 말해보게. 도리언 그레이도 자넬 그렇게 좋아하나?" 화가는 잠시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나를 좋아하지." 그는 약간 뜸을 들이며 말했다. - P58
"해리,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게. 내가 살아 있는 한 도리언 그레이의 개성은 나를 지배할 테니까. 자넨 내가 느끼는 것을 느끼지 못해. 자넨 변덕이 심하니까." - P59
"뭐가 생각났다는 건가, 해리?" "도리언 그레이의 이름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중략). "화내지 말게, 바질, 내 애거사 고모님의 집에서 들었다네. 그분이 아주 훌륭한 청년을 찾아냈다고 말씀하셨거든. 이스트엔드에서 고모님을 도와주기로 했다던데 그의 이름이 도리언 그레이였어. 고모님은 그의 용모가 훌륭하다는 말은 하지 않으셨다는 점을 지적해야겠군. (중략). 고모님은 그가 진지하다고 말씀하셨다네. 또 천성이 아름답다고도. (중략). 그가 자네 친구라는 걸 내가 진작 알았으면 좋았으련만." - P61
"해리, 자네가 몰랐으니 다행이네." "어째서?" "난 자네가 그를 만나는 걸 원치 않아." "내가 그를 만나는 걸 원치 않는다고?" "그렇다네." - P61
화가는 다시 헨리 경에게 고개를 돌렸다. "도리언 그레이는내 가장 소중한 친구야." 그가 말했다. "그는 단순하고 아름다운 본성을 지녔지. 자네 고모님이 그에 관해 하신 말씀은 패 정확하다네. 그를 망치지 말게. 그에게 영향을 주려 하지 말라고. (후략)." - P61
2장
그들은 집 안에 들어가 도리언 그레이를 보았다. 그는 피아노 앞에 등을 돌린 채 앉아서 슈만의 「숲 속의 정경」 악보를 뒤적거렸다. "이 책을 꼭 빌려줘요, 바질." 그가 크게 말했다. - P63
"아, 전 정말 자세를 잡고 있는 게 지겨워요. 더구나 실물 크기의 초상화를 원하지도 않는다고요." 청년은 까다롭게 고집을 피우며 피아노 의자에서 몸을 빙그르 돌렸다. - P63
"당장은 애거사 부인의 미움을 받고 있답니다." 도리언이 뉘우치는 듯이 우스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 P64
"저런, 내가 고모님께 당신 안부를 전하죠. 그분은 당신을아주 좋게 보셨어요. 그리고 내 생각엔 당신이 그곳에 참석하지 않은 게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닐 것 같소. (후략)." - P64
화가는 물감을 섞고 붓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으며, 헨리 경이 마지막에 한 말을 듣고는 그를 쳐다보더니 잠시 주저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해리, 난 오늘이 그림을 끝마치려 하네. 이제 그만 돌아가 달라고 요청한다면 혹시라도 무례하게 느낄 텐가?" - P65
홀워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도리언이 그렇게 원한다면, 물론 자녠 그대로 있어야 하지. 도리언의 변덕은 누구에게나 법과 같으니까, 그 자신에게만 빼고." - P65
"가지 말게, 해리. 도리언을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홀워드가 자신의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말이 옳아. 난 작업을 할 때는 절대 말을 하지 않거든. 그리고 듣지도 않지. 내 불운한 모델은 끔찍하리만큼 따분할 수밖에 없어. 난 자네가 그냥 있어주기를 바라네." - P66
"왜냐하면 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그에게 자신의 고유한 영혼을 강요하는 것이니까. 결국 그는 자기 본래의 사고를 하지 못하게 되든지, 자기 본래의 열정을 불태우지 못하게 되죠. (중략). 그의 죄악조차, 만약 죄악이란 것이 있다고 한다면, 빌려온 것이 되는 셈이지요. (중략). 인생의 목적은 자기계발이거든요. (중략). 오늘날 사람들은 본래의 자기 자신을 겁내고 있어요. (중략). 사회의 공포는 도덕의 기초인데 그건 신에 대한 공포가 종교의 비밀인 것과 같죠. 그 두 가지는 우리를 다스리는 원리인 셈이라오. 그렇지만...." - P67
헨리 경이 낮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자신만의 독특하고 우아한 손짓을 곁들였는데, 그 습관은이튼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있던 것이었다. "난 세상 누군가가자신의 삶을 충만하고 온전하게 살려고 한다면, 자신의 모든 감정에 형태를 부여하고, 모든 생각을 표현하고, 모든 꿈꾸는 것을 실현해야 한다고 믿어요. 세상이 중세 시대 동안 잊었던기쁨의 신선한 충동을 되찾아야 한다는 거죠. (후략)." - P67
도리언 그레이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만해요! 당신은 나를 당황하게 하는군요.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당신에게 해줄 대답이 있지만, 지금은 그걸 찾아낼 수 없어요. 말하지 말아요. 생각해 볼게요. 혹은 생각하지 않아 보죠" - P68
도리언 그레이는 아무런 움직임 없이 입술을 약간 벌리고 눈을 이상하게 빛내면서 거의 10분 동안 그곳에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전혀 새로운 영향이 작용하는 것을 어렴풋이 의식했다. - P69
음악도 그의 마음을 휘젓는 것이었다. 음악 때문에 그는 여러 차례 심란해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음악은 명확한 것이 아니었다. - P69
(전략). "그러지, 해리, 벨만 누르게. 파커가 오면 자네가 원하는 걸가져오도록 하지. 난 이 배경을 조금 더 작업해야겠어, 그러니 잠시 뒤에 보게나. 도리언을 너무 오래 잡고 있지 말게. 오늘만큼 그림의 형체가 잘 잡힌 적이 없어. 이 작품은 지금 상태로도 걸작이야." - P71
도리언 그레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키가 크고 우아한 젊은 남자를 좋아하지 않을수 없었다. - P71
(전략). "그레이 씨, 그건 당신에게 대단히 중대한 문제요." "어째서요?" "왜냐하면 당신에겐 가장 멋진 젊음이 있으니까. 젊음이란간직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 중 하나라오." "난 그렇게 느끼지 않아요, 헨리 경." - P72
"물론, 지금은 느끼지 못할 거요. 장차 나이가 더 들어 주름이 지고 추해지면, 당신의 생각이 이마에 선을 그어놓고, 당신의 열정이 추악한 불길로 입술에 낙인을 찍어놓으면 느끼게 될거요. 끔찍하게 절감하게 될 테지. 지금은 당신이 어디를 가든세상을 매료시킬 수 있을 거요. 그게 언제까지 계속될까?... (후략)." - P73
"(전략). 우리가 그토록 겁냈던 열정에 대한 기억, 우리가 굴복할 용기를낼 수 없었던 격렬한 유혹에 사로잡힌 채로 말이오. 젊음! 젊음! 세상에서 젊음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단연코 없다오!" - P74
도리언 그레이는 눈을 크게 뜨고 감탄하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손에 있던 라일락 가지가 자갈 바닥에 떨어졌다. - P75
약 15분 정도가 지났을 때 홀워드는 그림 그리기를 멈추고 한참 동안 도리언 그레이를 바라보았으며, 다시 한참 동안 그림을 들여다본 후 자신의 커다란 붓의 끝을 깨물며 인상을 찡그렸다. "거의 완성이야." 그는 마침내 탄성을 질렀으며 몸을 굽히더니 캔버스의 왼쪽 구석에 주홍빛으로 자신의 서명을 길게 써나갔다. - P76
청년은 마치 꿈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깜짝 놀랐다. "정말 끝난 거예요?" 그는 단상에서 내려오며 낮게 중얼거렸다. "거의 완성이네." 화가가 말했다. "그리고 자넨 오늘 자세를 아주 잘 잡아주었어. 자네에게 어떻게 감사를 표시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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