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여기 온다는 걸 가메이도 유키에게 말했다. - P230

이와타는 묶인 온몸을 버둥거려서 최대한 저항했다. 그러자 여자가 몸을 깔고 앉았다. 그리고 돌로 다리를 마구 내리쳤다. - P231

공포와 절망을 맛보면서도 이와타는 묘하게 납득했다.
가녀린 소녀가 어떻게 미우라를 죽일 수 있었는가를 미우라가 침낭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 P232

동시에 수수께끼가 하나 더 풀렸다. 미우라는 이 상태로 그림을 그렸다. 묶인 상태에서도 겨우 움직이는 손으로, 침낭 속에서 필사적으로 펜을 놀려 그림을 완성한 것이다. - P233

 산줄기가 보이지 않는데 미우라가 그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리 없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갑자기 불안해졌다.


정말로 그럴까? 실물을 보지 않으면 그림을 못 그릴까. - P234

가령 그렇더라도 미우라는 왜 그런 걸까. 왜 죽음을 앞두고 보이지 않는 산줄기를 그린 걸까. - P234

갑자기 여자의 손가락이 이와타의 입술에 닿았다. 그리고윗니와 아랫니를 억지로 벌렸다.

"자...... 밥...... 먹어......." - P235

틀림없다. 이 여자는 이번에도 미우라 때와 똑같은 방법을쓰려고 한다.

"........・・・・・ 안 먹으면 ...... 죽어.."

여자가 다른 손으로 이와타의 코를 틀어쥐었다. 입과 코가막혀서 숨이 안 쉬어졌다 - P236

이번에는 아까보다 순순히 삼켰다. 포기한 건 아니다.
일단은 순종적으로 굴면서 호흡을 가다듬고 체력을 보존했다가, 빈틈을 노려 도망칠 생각이었다. 남자와 여자다. 체격으로 보아도 이와타가 유리하다. 승산은 있다. - P237

설령 살해당하더라도 기자로서 정보를 남겨야 한다.
이와타는 침낭 속의 손목을 부러질 만큼 힘껏 뒤틀어서 호주머니에 든 연필과 영수증을 꺼냈다. - P237

미우라만큼 잘 그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그려야 한다.
이 그림을 본 누군가에게 범인의 정체를 알리기 위해…………….

1995년 9월 21일, L현 K산 8부 능선 광장에서 회사원 이와타 슌스케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현장에는 산줄기를 그린 그림이 남아 있었다. - P238

1995년 9월 26일.

후쿠이현의 한 맨션에서 남자 시체가 발견됐다. 시체의 신원은 그 집의 거주인인 도요카와 노부오(43)로 판명됐다. 도요카와의 체내에서 수면제가 다량 검출돼 경찰은 자살로 단정했다.
집에서는 유서로 추정되는 편지도 발견됐다. - P238

-2015년 4월 24일 도쿄 도내의 맨션 6층 602호실


현관에 쓰러진 정체불명의 남자를 곤노 나오미는 의아한기분으로 내려다보았다.

(중략).

"당신・・・・・・ 누구야?" - P239

"......구마이 씨..... 왜…………… 당신이...………?"
"......예전에 내 부하가 당신한테 신세를 졌거든. 기억 안나・・・・・・? 이와타라는 녀석인데."

그 순간 나오미의 머릿속에 영상이 떠올랐다.
어둠 속에 누워 있는 너덜너덜한 고깃덩이・・・・・・・ - P240

그때 문이 열리고 다른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나오미에게 외쳤다.

"곤노 나오미! 경찰이다! 당신을 상해죄 현행범으로 체포한다!" - P241

제4장


문조를 보호하는
나무 그림



콘노 나오미

써늘한 구치소에서 나오미는 무표정하게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이나 지났을까. 그 남자………… 구마이가 나타나 나오미와 유타의 작은 행복을 빼앗은 후로,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계속 빼앗겨왔다. 행복해지려고 하면 반드시 누군가가 방해했다. - P245

나오미는 자신이 복받은 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집은 도쿄에서 땅값이 제일 비싼 곳에 있었고, 상냥한 아버지는 나오미를 사랑해주었다.  - P245

"밥 먹고 생일 선물을 사러 갈 건데, 갖고 싶은 거 있니?"
나오미는 망설였다. 그걸 부탁해야 할까.

(중략).

"있지....., 아빠……… 문조를 키우고 싶어." - P246

아버지가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간청하듯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판단에 달렸다는 뜻이다. 어머니는 단념했다 - P247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자기 방으로 간다. 그러면 아버지가 사준 새장 속에 문조가 새침하게 앉아 있다.
"쪼꼬삐! 다녀왔어!" - P247

어머니는 "새를 그렇게 위해줄 일이야?" 하고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즐거워하는 딸과 남편을 정답게 바라보았다. (중략).
하지만 비극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 P248

쪼꼬삐가 집에 온 지 1년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가 죽었다.
자살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아직 일반적인 말이 아니었지만 분명 우울증이었으리라. - P248

아버지가 죽은 후로 어머니는 변했다. 나오미는 그렇게 느졌다.
식사는 만날 통조림뿐. 청소와 빨래도 하지 않아서 집은 순식간에 쓰레기로 넘쳐났다. - P248

안 그래도 이웃들과 데면데면했던 어머니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250

‘꾹 참고 착하게 지내면 엄마는 언젠가 원래 엄마로 돌아올거야.‘
나오미는 멍든 손으로 쪼꼬삐를 쓰다듬으며 몇 번이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 P250

"아빠 말고 네가 죽었으면 좋았을걸."

그 순간 깨달았다.
어머니는 변한 게 아니다. 원래 이런 인간이었다. 원래부터 나오미를 사랑하지 않았다. - P251

동시에 나오미는 자기 마음이 어떤지도 깨달았다. 나오미는 어머니를 ‘예쁜 엄마‘라고 자랑스럽게 여긴 적은 있어도, 애정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P251

언젠가 터질 만한 사건이 터졌다. 
(중략). 기르면서 처음으로 들어보는 위협적인 울음소리였다. - P252

"엄마………… 미안해. 이제 괜찮으니까, 시끄럽게 안 울 테니까 그만 놔줘."
"입 다물어. 새 한 마리도 제대로 간수 못 하는 주제에."
"아니야. 쪼꼬삐는 내가 없으니까 외로워서⋯⋯⋯⋯⋯"
"아니야? 조그만 게 어디 엄마한테 말대답이야? 건방지게." - P253

"엄마...... 부탁이야∙∙∙∙∙∙. 쪼꼬삐가∙∙∙∙∙∙ 죽겠어......"
"죽이려고 그런 거야!!!" - P253

‘이대로 있다가는..…………. 쪼꼬삐가 죽을 거야…………. 어떻게 하면…
그때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방구석에 있는 나무집. 예전에 아버지와 함께 만든 쪼꼬삐의 별장이다. 나오미는 쏜살같이 그쪽으로 달려가서 나무집을 어머니의 얼굴에 내던졌다. - P254

나오미는 왼발에 체중을 잔뜩 실어서 어머니의 목을 꽉 밟았다.
‘뿌득‘ 하고 흐릿한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어머니가 눈을 까뒤집고 입을 쩍 벌렸다. ・・・・・・승부가 났다.
나오미는 부랴부랴 쪼꼬삐를 구해냈다. - P255

그 후 나오미는 아동자립지원시설에서 6년을 보냈다. 시설의 직원실에서 기르기로 한 쪼꼬삐는 나오미가 도맡아 돌보았다. - P255

시설에 들어오고 6년째 가을, 쪼꼬삐는 나오미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고마워....... 쪼꼬삐 덕분에 난 강해졌어." - P257

어머니를 죽인 인간이 조산사가 되겠다니 조금 얄궂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건실한 민간기업에 취직할 수 있을것 같지는 않았고, 또한 당시 일본에는 여자가 취업과 관련해 활용할 만한 기술 자격이 별로 없었기에 마지못해 조산사의 길을 선택했다. - P257

(전략). 미술대학 부근에 자리한카페라서 단골손님은 대부분 미대생이었다. 미우라 요시하루는 단골손님 가운데 한 명이었다. - P258

나오미는 거울 앞에 설 때마다 확신했다.
‘난 어머니를 닮았어.‘ ・・・・・・‘ 뽀얀 피부 윤기가 흐르는 긴머리, 아름다웠던 어머니와 판박이였다. - P258

어느 여름날 오후, 결판이 났다. 단둘이 무더운 방에 있을때 미우라가 나오미에게 말했다.
"난 내년에 졸업하면 고향으로 돌아가서 선생님이 될 거야. 나오미,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 P259

과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이듬해 봄, 미우라와 나오미는 각자 다니던 학교를 졸업했다. 취직과 이사가 겹쳐서 정신없었던 탓에, L현으로 이사한지 1년 후에야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에는 도요카와도 참석했다. - P259

몇 년 후, 드디어 나오미도 임신했다. 하지만 아이를 낳아야 할지 고민됐다. 제일 큰 걱정은 어머니라는 존재였다. - P260

(전략).
어머니 시체 옆에서 쪼꼬삐를 끌어안았을 때와 똑같은 기분이었다.
어쩐지 섬뜩했다. 불길한 운명의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한 기분이었다. - P261

아이 이름은 다케시‘로 정했다. 남편이 지은 이름이었다.
(중략). 나오미는 다케시가 정말 사랑스러웠다. - P261

하지만 성장할수록 다케시가 여느 아이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략). 하지만 다케시의 소극적인 성격은 도를 넘었다. - P261

조정 이혼을 하면 어지간한 결격 사유가 없는 한 친권은 어머니가 가진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오미에게는 지울 수 없는 과거가 있다.
남편은 그 사실을 모른다. 어머니는 ‘병으로 죽었다‘고 둘러댔지만 조사하면 금방 밝혀지리라. - P264

구바이 이사무

2015년 5월 8일 도쿄 도내의 병원

"많이 아물었네요. 고름도 안 나오는 것 같으니 이 정도면다음 주에 퇴원하실 수 있겠어요." - P265

"아참, 구마이 씨. 오늘 옆 침대에 환자가 새로 들어올 예정이니까 사이좋게 지내세요! 그럼."
간호사는 그렇게 말하고 스텝을 밟듯 병실에서 나갔다.

‘사이좋게 지내라니 ・・・・・・ 무슨 유치원생도 아니고.‘
구마이는 질릴 만큼 많이 본 흰색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 P266

이와타가 사망한 상황은 미우라 요시하루 사건 때와 완전히 일치했다. 경찰은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에 나섰다. - P267

(전략).

확실히 앞뒤는 맞는다. 구마이도 예전부터 도요카와가 범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점이 하나 있었다.

왜 도요카와는 워드프로세서 전용기로 유서를 쓴 걸까.

경찰에 따르면 도요카와의 집에서 새 워드프로세서 전용기가 발견됐다고 한다. 즉, 유서를 쓰기 위해 일부러 구입했다는 뜻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 P268

도요카와가 살해당한 곳은 후쿠이현이다. 미우라 및 이와타 사건이 발생한 현과는 거리가 제법 멀다. 이럴 때는각 현경이 호흡을 잘 맞추지 못해서 수사가 소홀해지는 경우가 가끔 있다. - P269

이와타의 호주머니에 들어 있던 영수증 뒷면에는 산줄기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8부 능선 광장에서 보이는 경치 접어서 보조선까지 만들었다.
미우라의 행동을 따라 했다는 뜻이다. 이와타는 왜 그랬을까 이 그림으로 뭘 전하고 싶었을까.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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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의 기본은 대화야. 일단 대화부터 시작해봐." - P194

(전략).
하지만 교무실에 들어가자 이와타는 환영받았다. 예전에 이와타를 가르친 교사 몇 명이 모여들었다.
"이와타!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신문사에 들어갔다면서? 그럼 기자야?"
"어? 그럼 기자회견장에도 가고 그래?" - P195

"마루오카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작년까지 미술 수업을 들었던 이와타 슌스케예요."
(중략).
"이야, 대단한걸.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 P196

"도요카와 씨는 왜 그만두셨나요?"
"전근이 결정돼서 이사가야 한댔어."
"어디로 이사갔는지는 모르시고요?"
"음…………. 잊어버렸네. …………아참, 가메 양은 알지도 모르겠다." - P196

예상치 못한 우연이었다. (중략). 이와타는 마루오카를 따라 미술실로 향했다. 마침 동아리 활동이 끝났는지 미술부원들이 줄줄이 나왔다.  - P197

마루오카가 그 여자에게 말했다.
"가메 양! 신문기자 양반이 가메 양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있대!" - P197

"가메이도 씨,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저는 이와타 슌스케라고 합니다. 이 학교 졸업생이에요."
"졸업생......?"
"네. 신문사에 다니기는 하지만, 취재하러 나온 건 아니고요.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가메이도 씨께 물어보고 싶은 게있어요. 잠시 시간 괜찮을까요?" - P198

"네・・・・・・ 도요카와 씨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혹시 미우라 선생님 일인가요?" - P199

가메이도는 주변을 신경 쓰듯 작게 말했다.
"저는………… 도요카와 씨가 미우라 선생님을 죽였다고 생각해요." - P200

"......어째서요?"
"도요카와 씨 ..・・・ 미우라 선생님을 지독하게 싫어했던 것같더라고요." - P200

"아주 뿌리 깊은 사연이 있어요. 도요카와 씨는 어릴 적부터 그림 실력이 뛰어나서 미대에 수석 합격했고, 입학식 때 신입생 대표로 연설을 할 만큼 우수한 인재였대요. (후략)." - P201

"하지만 사회에 나온 후에 관계가 역전됐죠. (중략). 그리고 재취업하느라 고생할 때 도와준 사람이 미우라 선생님이었고요. (후략)." - P201

이와타는 의아했다. 가메이도가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담당 교사 미우라에게 도움을 받기는 했겠지만, 그렇다고 학생이 죽은 교사의 유족을 위해 그렇게까지 할까. 더구나 가메이도는 미우라를 싫어했을 텐데.... - P202

"이야. 미우라 선생님을 험담하면서도 가족은 챙겨준 거군요"
(중략).
"도요카와 씨가 음흉한 눈빛으로 미우라 선생님의 부인에게 추근거리는 걸 몇 번 봤거든요." - P202

도요카와의 천박한 본성이 점점 드러났다. - P203

"(전략). 분명 저는 미우라 선생님께 좋아하는 것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었을 거예요."
"......사랑했다는 말씀이세요?" - P204

돌이켜보면 미우라가 죽었을 때 우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중략).
"툭하면 잔소리를 늘어놓는 놈이 사라져서 속이 시원하네."
・・・・ 대놓고 동조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학생들이 대부분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 P204

"아참. 실은 이번 달 20일에 K산에 오를 계획이에요. 미우라 선생님 기일에 위령 행사로 등산을 하는 거죠. 혹시 시간있으면 같이 안 가실래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날은 꼭 들어야 하는 강의가 있*......." - P205

"네, 물론이죠. ・・・・・・ 그렇지. 일단 제 명함을 드릴게요. 무슨일 있으면 연락 주세요."
(중략).
"어? 학생인데 명함이 있나요?" - P205

색색의 꽃 일러스트 옆에 한자와 알파벳으로 이름이 적혀있었다.

亀戸由紀(가메이도 유키)
YUKI KAMEIDO - P206

(전략).
"가메이도 씨. 저 그림은 뭔가요?"
"아아! 구멍 때문에 그러시는 거군요. 저건 눈이 보이지 않아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캔버스예요."
"눈이 보이지 않아도?" - P206

"(전략),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수작업하기는 아주 힘들어요. (중략). 하지만 캔버스에 구멍을 뚫어놓으면 손가락으로 위치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 구멍 위치를 참고하며 선을 그을 수 있어요. - P207

그때 이와타의 뇌리에 섬광이 번쩍였다.
내내 마음에 걸렸던 의문과 ‘구멍 뚫린 캔버스가 맞물렸다.
미우라의 그림에 남아 있었던 접힌 자국. 그건 ‘구멍‘과 똑같은 역할 아니었을까. - P208

이 생각이 맞는다면 미우라는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그 그림을 그렸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상하다. - P209

(전략).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어쩌면 양손이 뒤로 묶인 상태 아니었을까. - P209

과연 손이 묶인 채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가능하더라도 어떻게 범인에게 들키지 않고 끝까지 그릴수 있었을까.
애당초 그런 상태로 그림을 그린 미우라의 목적은 뭐였을까. - P210

9월 20일 아침. 이와타는 새 텐트와 침낭, 그리고 스케치북을 배낭에 넣고 기숙사를 나섰다. (중략). 그때 이와타는 한 가지 목표를 세웠다.
바로 사건 당일의 완벽한 재현... - P210

일단 나무 밑동에 핀 꽃을 그려보았다. 하지만 생각처럼 잘 그려지지 않았다. 30분 넘게 낑낑댄 끝에, 지지리도 형편 없는 그림이 완성되었다.
"역시 예술은 적성이 아니네⋯⋯⋯⋯⋯" 이와타는 작게 중얼거리고 스케치북을 덮었다. - P212

 어쩌면 17시까지 목적지인 8부 능선에 다다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만약을 위해 여유 있게 출발해야하지 않을까. - P213

이와타의 판단은 옳았다.
6부 능선에 도착했을 때 이미 16시가 지났다. 시간에 맞춰 출발했다면 분명 늦어졌으리라. 역시 미우라와 비교하면 걸음이 느리다. - P213

이와타는 좌절할 것 같은 기분을 추스르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한 시간쯤 지나자 드디어 ‘8부 능선 광장‘ 간판이 보였다. 진심으로 안도했다. 17시 조금 전. 서두른 보람이 있어서간신히 예정대로 도착했다. - P214

캠핑에는 적격이지만, 이와타 말고 다른 캠핑객은 없었다. 그럴 만도 하다. 여기는 몇 년 전에 살인사건이 발생한 곳이니까. - P214

이와타는 연필을 꺼내고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제 미우라가 사랑했던 아름다운 산줄기의 경치가 보일 터였다.
하지만 이와타의 눈앞에는 믿기 어려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 그림과・・・・・・ 달라.‘ - P215

저녁놀이 진 하늘 아래, 산줄기는 시커먼 덩어리로 변했다.
이와타는 한순간 혼란스러웠지만, 이유를 바로 알아차렸다. 역광이다. - P217

이와타는 미우라가 그린 그림을 떠올렸다.
그 그림에는 각 산의 능선뿐만 아니라 산 위에 위치한 송신탑 두 개도 그려져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간대에 그렇게까지 선명하게 보일 리 없다. - P217

‘혹시 선생님은 좀 더 일찍………… 아직 밝은 시간대에 8부 능선에 도착한 걸까?

한순간 번쩍 떠오른 생각을 바로 떨쳐냈다. 그럴 리 없다.
(중략).
역시 미우라가 여기 도착한 건 지금 시간대이거나, 더 나중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그림을 그린 걸까. - P218

물통의 물을 벌컥벌컥 마시면서 돈가스 샌드위치도 같이삼켰다.

그때였다.

이와타의 머릿속에서 불꽃이 파박 튀었다.

"설마・・・・・・ 그런 거였나......?!" - P219

미우라는 아침 햇살에 비친 산줄기를 그린 것이다.

미우라가 그 그림을 그린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은 아침까지 살아 있었다.......그 사실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 P220

부검 결과 미우라는 9월 20일 17시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됐다. 가령 미우라가 다음 날 동틀 녘까지 살아 있었다면, 경찰은 사망추정시각을 열 시간도 넘게 오판한 셈이다. 우수한 일본 경찰이 그런 실수를 저지를 리 없다. - P220

범인이 현장에 나타난 건 다음 날 동이 튼 후, 잠에 취한 미우라를 텐트 밖으로 끌어내 침낭을 벗기고 양손을 뒤로 묶었다. 그 다음 가져온 ‘하나야기 도시락을 억지로 입에 넣고 물과 함께 삼키게 했다. 그리고 두 시간 30분 후 살해했다. - P222

단순한 트릭이다. 사실 이와타는 이 트릭을 알고 있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읽은 적이 있었다.
‘피해자에게 억지로 음식물을 먹여서 사망추정시각을 속인다."
·수많은 추리소설에서 사용된 고전적인 트릭이다. - P223

그래서 범인은 미우라의 시체를 끔찍하게 훼손한 것이다.


"시체 손상이 심해서 부검에 난항을 겪긴 했는데, 다행이랄까 위장에서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이 검출됐지." - P224

그리고 이 시나리오대로라면 침낭을 도둑맞은 진짜 이유도알 수 있다.
미우라는 20일 밤, 텐트를 치고 침낭에 들어가서 하룻밤을보냈다. 침낭과 텐트를 현장에 남겨두면 미우라가 밤을 보냈다는 사실이 들통나므로 트럭은 무용지물이 된다. - P224

하지만 현장에서 돈가스 샌드위치만 사라지면 ‘미우라는저녁으로 돈가스 샌드위치를 먹었다‘=‘현장에서 밤을 보낸 것 아닐까‘라는 가능성이 부각된다. 그래서 단팥빵을 훔쳤다. 식료품이 전부 없어지면 경찰은 범인이 훔쳤다‘고 받아들인다. - P225

미우라는 고심했을 것이다. 대체 뭐라고 써야 할까. 범인의이름을 쓰거나 트릭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메모가 범인의눈에 띄었을 때 처분될 우려가 있다. - P225

나는 아침까지 살아 있었다.‘ …………… 미우라는 그 사실을 알리고 싶었으리라.
(중략).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림은 경찰의 손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무도 그림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 P226

(전략). 그렇다면・・・・・・ 남은사람은 하나뿐이다.

가메이도 유키.

이와타는 등골이 오싹했다. - P227

살이 에일 듯한 찬 바람이 불어왔다. 산속의 밤은 춥다. 밤 사이에 기온이 더 떨어지리라. 이와타는 텐트에 들어가서 배낭 속 침낭을 꺼내 몸을 푹 감쌌다. - P228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어느덧 잠들었던 모양이다.
(중략).
그때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두 팔이 ‘차렷 자세로 굳어버렸다. - P228

이와타는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했다.

끈 같은 물건을 사용해 침낭 위로 몸을 꽁꽁 동여맨 것이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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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하기까지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나오미는 양손으로 식칼을 움켜쥐고 남자에게 덤벼들었다. - P140

몸싸움이 벌어질 줄 알았다.
뜻밖에도 남자는 저항하지 않았다. 남자는 칼에 찔려 피가 철철 흐르는 배를 손으로 누른 채 고통스러워하며 쓰러졌다. - P140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 P140

제3장

미술 교사의
마지막 그림


미우라 요시하루


교편을 잡은 이후로 미우라 요시하루는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쓴 적이 거의 없었다. (중략).
휴일에는 졸음을 참으며 가족을 데리고 야외로 놀러 나가서 텐트를 치고, 숯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웠다.
(중략).
친구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몇 시간이든 이야기를 들어주고, 일자리 소개는 물론 가끔은 돈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 P145

미우라는 호주머니에서 펜을 꺼냈다.
그려야 한다.
그림을 그려야 한다.

녀석을 위해서. - P146

1992년 9월 21일, L현 K산에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됐다. 피해자는 부근에 사는 41세 남성 미우라 요시하루. 고등학교 교사로, 담당 과목은 미술이었다. - P146

-1995년 8월 28일・・・・・・ L현 지방신문사 ‘L일보‘ 본사


두툼한 파일을 앞에 두고 19세 청년 이와타 슌스케는 생을 삼켰다.
파일 표지에는 K산 미술 교사 살인사건(1992) 취재 자료 모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 P149

이와타 슌스케


이와타 슌스케는 올해 L일보에 입사한 신입이다. 3년 전,
어떤 일을 계기로 신문기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L일보의 문을 두드렸다.
면접 때는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한 진실을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다‘라는 마음을 열띠게 표현했다. 면접관의 반응은좋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 P150

L일보의 사원은 300명이 넘지만, 기자의 숫자는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기자로 활동하는 건 회사의 노른자위인 편집국 소속의 엘리트 사원뿐이다. 그들은 전부 대학을 졸업했다. - P150

구마이 이사무

(전략) 구마이는 예전에 편집국 소속 기자로서 수많은 기사를 써냈다.
그 당시 별명은 ‘개코 구마 형사 사건의 특종 냄새를 구마이보다 더 잘 맡는 사람은 없었다. - P151

어떤 사건을 쫓던 도중에 식도암이 발병했음을 알아차리고, 처음으로 장기 휴가를 얻었다. - P152

"구마이. 지금까지 고생 많았어. 알다시피 기자는 목숨을갈아 넣어서 돈으로 바꾸는 직업이지. 병에 걸린 몸으로는 힘들 거야. 오늘부터 총무국으로 옮겨. 이제부터는 몸을 잘 챙기면서 느긋하게 일하도록 해." - P152

(전략). ・・・・・・ 그건 알지만 구마이는 이와타가 너무 가여웠다.
기자로 일하고 싶다. 하지만 할 수 없다.‘ .....현재 자신의상황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는 만큼, 응석을 받아줄 수는없다. 구마이는 호랑이 선배가 되기로 마음먹고 총무국 일을 철저하게 가르쳤다. - P153

"프리랜서 기자가 될 겁니다."
"......원래 기자를 지망했댔지."
(중략).
"3년 전에 K산에서 발생한 미술 교사 살인사건이요." - P154

이와타 슌스케


"좋은 선생님이셨어?"
구마이의 질문에 이와타는 대답을 망설였다. ‘좋은 선생님‘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을 만큼, 미우라는 완벽한 교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P155

"이와타 이거 알아? 역 앞 슈퍼에서 파는 하나야기 도시락‘이라는 건데, 선생님은 이걸 좋아해서 매일 사먹어. 넉넉하게 샀으니까 가져가서 할아버지랑 같이 먹으렴."
미우라는 그렇게 말하고, 매일 ‘하나야기 도시락‘을 두 개들려 보냈다. 덕분에 이와타는 가난해도 배를 곯지는 않았다. - P156

이와타는 사건이 미궁에 빠진 채, 미우라 요시하루라는 인간이 잊혀가는 사태를 참을 수 없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미우라가 살해당해야 했는지 꼭 알고 싶었다. - P157

"그리고 이게 제일 중요한데………… 내가 보기에 넌 기자가 적성에 안 맞아."
(중략).
그 한마디에 이와타는 분노가 솟구쳤다.
"구마이 씨! 저를 너무 무시하시는 거 아닙니까! 저는 진심으로 기자가 되고 싶다고요!"
(중략).
"난 3년 전까지 이 회사에서 기자로 일했어. 그건 알지?"
(중략).
"이건 말하지 않았지만, 난 당시 K산 사건을 취재 중이었어." - P158

"응. 그래서 사건에 관한 정보가 넘쳐나지. 그런 사람이 가까이 있는데도, 넌 지금까지 눈뜬장님처럼 지냈어. 왜 내가 예전에 기자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사건에 관해 물어보지 않았지?" - P159

구마이는 자기 책상 서랍에서 두툼한 파일 하나를 꺼냈다.
표지에는 K산 미술 교사 살인사건(1992) 취재 자료 모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도 이 사건에는 애착이 있어서 기자를 그만둔 후에도 자료를 처분하지 못했어. 간직해두길 잘했군." - P159

솔직히 가능하다면 은사가 얼마나 비참한 최후를 맞았는지는 알고 싶지 않다. 하지만 ‘진상을 밝히겠다‘고 결심한 건 이와타 본인이다.
이와타는 생침을 삼켰다.
"이와타, 각오는 됐나?" - P160

7시 50분에 학교 도착, 교무실에는 들르지 않고 바로 미술실에 가서 당시 3학년이었던 여학생 가메이도와 일대일로 수업을 진행했어."
"일대일? 미술부 수업인데요?"
"듣기로는 미우라 씨가 너무 엄격하게 수업해서 미술부원숫자가 확 줄어들었대." - P162

"덧붙여 미우라 씨는 수업 중에 오후부터 K산에서 캠핑할예정이라는 걸 가메이도에게 말했어." - P163

"도요카와…………? 그건 누군가요?"
"미대 시절부터 미우라 씨와 친구였던 남자야. 뭐, ‘친구‘라고는 해도 도요카와는 미우라 씨를 내심 싫어했던 것 같지만." - P164

"미우라 씨는 이렇게 제안했어. 도중까지 같이 산에 오르다가 도요카와만 그날 하산하면 된다고."
"도중까지는 무조건 같이 가자는 건가…………. 어쩐지…… 막무가내네요." - P165

"맞아. 나도 취재하러 몇 번 올라갔는데, 경사가 완만해서아주 편하더군. 등산로에는 로프를 쳐놔서 길을 잃을 걱정도 없고 말이야. (중략).
4부 능선과 8부 능선에 ‘광장‘이라고 불리는 휴게소가 있거든. 4부 능선 광장에는 테이블이 몇 개 놓여 있어서 밥을 먹기에 딱 좋아. 한편 8부 능선 광장은 캠핑에 적합하지.
(후략).
그 후, 하산하던 사람 몇 명이 등산로를 올라가는 미우라씨를 봤어. 16시경, 6부 능선 부근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됐지. (중략). 즉, 미우라 씨가 8부 능선에 도착한 건 17시 이후로 추정돼." - P166

"...그 남자는 왜 그렇게 아침 일찍 산에 오른 건가요?"
"K산을 담당하는 산림 정비사였거든. 8부 능선의 설비가망가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상태를 확인하러 간 거야
(중략). 즉, 일요일 낮에 대학생등산 동아리가 장난으로 걷어차서 부러뜨렸다는군."
"난폭한 짓을 했네요." - P168

"산림 정비사는 하산해서 경찰에 신고했어. 정오쯤 현장 검증이 실시됐지. 현장에 남아 있던 배낭에서 미우라 씨의 신분증이 발견됐고, 산기슭 주차장에 미우라 씨의 차가 세워져 있었으므로 시체의 신원은 미우라 씨로 추측됐어." - P169

"(전략). 툭 까놓고 말하자면 간신히 인간 형태를 유지한 뭔가였지." - P169

".......만약 신원 은폐가 목적이라면, 신분증을 현장에 남겨놓는 건 이상해요. 즉・・・・・・ 극심한 원한… 쪽이겠죠."
"맞아. 범인은 미우라 씨를 몹시 증오한 거겠지." - P170

"그런데 미우라 선생님은 언제 살해된 걸까요?"
"(전략), 다행이랄까 위장에서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이 검출됐지. ‘하나야기 도시락‘의 내용물과 동일했대. (후략)." - P170

"그렇군요....... 어? 잠깐만요. 미우라 선생님이 8부 능선에 도착한 건 17시 이후였잖아요."
"응, 요컨대 미우라 씨는 8부 능선에 도착하자마자 살해당한 거야." - P171

"그리고 미우라 선생님이 일요일에 산을 오른다는 걸 알고 있었던 사람.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야기 속에 나온 인물 중 수상한 건.. 미우라 선생님의 부인, 미술부원 가메이도씨, 그리고 도요카와 씨로군요." - P173

"응. 다만 고려해야 할 힌트가 하나 더 있어. 미우라 씨의소지품 중에서 없어진 물건이 있었지. 침낭, 그리고 단팥빵과 돈가스 샌드위치야, (중략). 하지만 먹기 전에 살해당했을 테고, 부검 결과 위장에서는 검출되지 않았어. 즉, 범인이 가지고 갔을 가능성이 커." - P174

"그렇구나. ‘범인은 산에서 밤을 보냈다‘고 경찰이 오해하면 밤부터 아침에 걸쳐 알리바이가 있는 자신은 용의자에서 제외된다・・・・・・ 그런 작전이로군요." - P175

"그럼 범인은...... 도요카와." - P176

"요컨대 도요카와는 산을 내려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커."
(중략).
"아니, 그런 목격 증언도 없었어. 말하자면 도요카와는 4부 능선에서 느닷없이 사라진 거야. 경찰의 생각은 이랬어. 도요카와는 미우라 씨와 헤어진 후, 등산로를 벗어나 8부 능선까지간게 아닐까." - P177

"B시간에만 알리바이가 있어서・・・・・・ 의혹이 더 커졌다는 건가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범인은 도요카와밖에 없다. 하지만...... - P178

"이렇게 수상한데요?"
"수상하기만 해서는 안 돼. 명확한 증거가 딱 하나만 있어도 간단했겠지만, 아쉽게도 지금까지 그런 증거는 발견되지않았어. 그리고 문제가 하나 더 있지. (후략)." - P179

구마이는 파일을 넘기며 중얼거렸다.
"뭐, 이뿐이라면 수많은 엽기 살인사건 중 한 건에 불과하겠지. 하지만 이 사건에는 기묘한 점이 하나 더 있었어." - P179

"기묘한 건 이 그림이 아니야. 이다음, 8부 능선 광장에서그린 마지막 그림이지."
"마지막 그림?" - P180

"이거・・・・・・ 정말로 미우라 선생님이 그리신 건가요?"
"응, 미우라 씨의 그림이 틀림없어. 8부 능선 광장에서 보이는 산줄기의 모습을 그린 거래.

(후략)." - P181

"이상하지? 다른 그림과는 그림체가 전혀 달라. 더구나 이건 영수증 뒷면에 그린 거야." - P182

"(전략). 각 산의 높이, 경사, 위치 관계, 그리고 산 위에 위치한 송신탑까지 충실하게 재현했어. 아주 정확하게 그리고 싶었던 거겠지. 보조선까지 만들었어."
"보조선・・・・・・ 이 뭔가요?"
"사진을 자세히 봐. 종이에 접힌 자국이 있지?"
"......확실히 촘촘하게 접은 듯한 자국이 있네요." - P183

질문을 받고 이와타는 무시무시한 가능성을 하나 떠올렸다.
"...... 미우라 선생님은 스케치북을 꺼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 P185

"선생님은 생전에 K산 8부 능선에 여러 번 올라가셨잖아요. 예전에 갔을 때 그린 그림이 지갑에 들어 있었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그건 아니야. 아까도 말했잖아. 그림이 그려진 영수증은그날 낮에 역 앞 슈퍼에서 발행된 거야." - P186

미우라는 범인이 처분하지 않게끔, 쉽게는 풀 수 없는 암호를 남겼다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면 다른 의문이 샘솟는다. 범인은 왜 그림을 현장에 남겨둔 걸까.  - P187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에는 선이 그어져 있지 않았다. 즉,
미우라는 평소 보조선을 사용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유형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산줄기 그림을 그릴 때는 일부러꼼꼼하게 보조선을 그었을까. 그렇게 하면서까지 정확하게그려야 할 이유가 있었던 걸까. - P188

다음 날 점심시간, 이와타는 책상에 수첩을 펼쳤다. (중략) 아무리 생각해도 제일 수상한 사람은 도요카와다. - P191

"그렇구나.......
그런데 그건 어쩌기로 했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잖아..…………."
(중략).
"응....... 그게 좋아. 요즘 같은 세상에 굳이 월급을 포기할건 없어. 프리랜서 기자는 언제든지 될 수 있으니까. 서두를필요 없겠지."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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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자연철학


하나의 학문 분야로서 자연철학은 실제로 대학의 연구 활동에서 사라져 버렸다. - P11

우선 자연에 대한 철학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철학이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 자체가 철학의 중요한 주제이다.¹

1 이 책이 포함된 Darmstadt 과학 총서 중에서 H. Noack이 쓴 입문서, AllgemeineEinführung in die Philosophie』 참고. - P11

철학은 "계속적인 물음(Weitefragen)"을 제도적 특징으로 삼는다. (중략). 반면 철학은 고유한 과제 설정에 그치지 않고, 어떤 것도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확히 특징지어진다. - P12

철학은 당대의 이론들에 대한 기초 보강작업(Unterfangen)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역사적-비판적 해석"이다. - P12

 자연철학의 형태를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 자연과학의 전제들을 연구하는 다른두 학문 분야와 구별할 필요가 있다. - P14

1. 과학학(Wissenschaftswissenschaft, science of science): (중략). 원래 "자연과학사"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이러한 종류의 매력적인 연구는 자연과학에 대한 체계적인 고찰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참고 Kuhn 또는 van den Daele 등).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자연철학이라고 부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 P14

2. 과학론(Wissenschaftstheorie, philosophy of science): 논리적 분석과 경험주의를 하나로 결합한 분석철학의 토대 위에서 자연과학의 ‘방법‘에만 치중하는 철학의 연구 경향이 폭넓게 발전했다. (후략).⁴


4 이것에 대한 설명은 무엇보다 참고문헌에 나오는 책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더 자세한 참고 자료는본 총서 중 E. Ströker가 쓴 입문서와 『W. Stegmüller 1969』에 있다. - P15

(전략). 오히려 우리는 자연과학의 ‘내용‘에 의존하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내용이 과학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제한을 두어야 할 것이다. (중략).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오늘날까지 주로 수리물리학의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 P15

2장

무엇이 실재인가?


우리는 잡다한 현상의 배후에 숨어 있는 실재 "자체"라고 하는 고전물리학적 관념에 젖어 성장했다. 수많은 지각 가능한 속성(Eigenschaft)과 변화는 모두 물리학의 근본 법칙에 따른 극소 미립자의 운동에 환원된다. - P19

오늘날의 자연과학은, 그것이 설명하는 바가 플라톤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수리적인 과학이다. "바탕에 깔려 있는 실재(zugrundeliegende Wirklichkeit)"라는 것도근대 물리학에 의해 완전히 추상화되었으며 수학적 형식 체계를 통해서만 서술할 수 있다. - P21

근대 물리학에 대해서는 다음 장들에서 논할것이다. 그것은 여기서 시사한 것과는 세부적인 면에서 크게 다르고 더욱더 복잡하다. - P22

칸트는 실재를 또 다른 측면, 즉 인식하는 주관의 측면에서 고찰했다. 칸트의 사상을 다소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무엇보다 오늘날의 경험주의적 발상들을 고려할 때 유익한 일이다.³

3 C.F.v.Weizsäcker 1977 a참고 - P22

흄은 인간의 인식 영역에는 두 가지, 즉 "사실에 대한(on matters offact)" 영역과 "관념의 관계에 대한(on relations of ideas)" 영역이 있다고 말했다. - P22

 즉, 과거의 사건에서 논리적으로 미래의 사건을 추론하는 일은 절대 가능하지 않다. - P22

그러나 흄은 이러한 귀납 원리의 증명이 이미 귀납 원리를 전제하고있다는 점을 정당하게 지적했다. 즉 우리가 과거로부터 미래를 추론할수 없다면, 과거에서 거둔 귀납 원리의 대성공도 미래에서 그 타당성에대한 추론을 불허할 것이다.⁵

5 오늘날의 논의에서 이에 대한 증인으로 불려 다니는, 칼 포퍼(K. Popper, 1935)의 정식은 이와 전적으로 일치한다. 일반적 법칙은 실증 사례들로 이루어진 자료에 의해 ‘검증(verifiziert)‘ 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법칙의 타당 범위가 수없이 많은 사례, 특히 미래의 사례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포퍼의 타개책은, 법칙 가설(Gesetzeshypothesen)은 최소한 단 하나의 반례(Gegenbeispiel)에 의해 반증 가능(falsifizierbar)하며, 그것이 반증을 견뎌 낼수록 더욱더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퍼는 하나의 가설을 반증하는, 측정장치(Mäßgerät)에 대한 또 다른 가설은 이미 참인 것으로 가정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솔직히 시인했다. - P23

(전략).
이것을 또다시 동어반복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만큼만 경험할 수 있다. 칸트는 경험이 성립하기 위한 모든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고, 따라서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하면서 흄의 습관과 믿음으로부터의 설명을 강화했다. - P24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그가 사물을 그 자체(an sich selbst)로만 바라보려 했던 것이 아니라 - 왜냐하면 그럴 경우 그것은 인간의경험 외부에 존재하게 되므로 - ‘우리에 대한(für uns)‘ 경험이 가능해지기 위한 제반 조건을 고찰했다는 데 있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실재는 실재 자체라기보다는 경험을 수행하는 우리의 능력에 의해 미리 각인된(vorgeprägt) 실재인 것이다. 지각하는(wahrnehmend) 생물의 "주관적" 조건이 지각 과정에서 결정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생물학적 사이버네틱스⁶의 인식은 이것과 같은 방향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6 K. Lorenz 1973, H.v.Ditfurth 1976, C.F.v. Weizsäcker 1977b - P25

앞서 말한 대로 칸트는 만약 우리가 사물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 그대로 우리에게 나타난다고 인정한다면, 객관성에 대한 인간의 능력을 과도하게 요구하게 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 P26

우리는 우리 능력의 본질을 실재의 분석에 포함하는 또 다른 이론을 마흐(Ernst Mach, 1838~1916)에게서 볼 수 있다.⁷



7 예를 들어 E. Mach 1933 IV4와 그곳에서 인용된 논문들. - P26

물리학은 마흐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원자나 소립자의 특성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근대에 이르러 오히려 플라톤보다 더 순진하게 실재의 단순 요소를 탐구하려 했다. 흥미롭게도, 마흐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원자 가설을 자신의 감각 요소와 비교하며 터무니없이 위험한 사고라며 단호히 거부했다.  - P28

(전략). 이 논증은 물질의 어떤 부분들은 분명인간이 더 나눌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인간이 결코 ‘배제‘할 수도 없다는 것, 인간이 그 시대에 그 부분들의 어떤 것도 인식할 수 없을 때조차 그러한 부분이 여전히 그것의 부분들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심장하게 말하고 있다.  - P30

내가 보기에 이러한 결론은 부분들을 전체와 같은 종류로 여기는 한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 P30

근대 물리학은 부분과 전체의 동질성을 지양하며, 이율배반의 또 다른 해결책을 제시했다. (중략). 여기서는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가분성의 명제(These zur Teilbarkeit)를 설명하고자 한다.  - P31

(전략), 원자는 핵과 전자껍질로 이루어지고, 그 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된 것이라고 묘사할 수 있다. 그러나 양성자, 중성자, 전자 그리고 약 200가지 이상의 소립자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일까?⁸®



8 Particle Data Group 참고.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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