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의 기본은 대화야. 일단 대화부터 시작해봐." - P194
(전략). 하지만 교무실에 들어가자 이와타는 환영받았다. 예전에 이와타를 가르친 교사 몇 명이 모여들었다. "이와타!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신문사에 들어갔다면서? 그럼 기자야?" "어? 그럼 기자회견장에도 가고 그래?" - P195
"마루오카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작년까지 미술 수업을 들었던 이와타 슌스케예요." (중략). "이야, 대단한걸.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 P196
"도요카와 씨는 왜 그만두셨나요?" "전근이 결정돼서 이사가야 한댔어." "어디로 이사갔는지는 모르시고요?" "음…………. 잊어버렸네. …………아참, 가메 양은 알지도 모르겠다." - P196
예상치 못한 우연이었다. (중략). 이와타는 마루오카를 따라 미술실로 향했다. 마침 동아리 활동이 끝났는지 미술부원들이 줄줄이 나왔다. - P197
마루오카가 그 여자에게 말했다. "가메 양! 신문기자 양반이 가메 양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있대!" - P197
"가메이도 씨,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저는 이와타 슌스케라고 합니다. 이 학교 졸업생이에요." "졸업생......?" "네. 신문사에 다니기는 하지만, 취재하러 나온 건 아니고요.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가메이도 씨께 물어보고 싶은 게있어요. 잠시 시간 괜찮을까요?" - P198
"네・・・・・・ 도요카와 씨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혹시 미우라 선생님 일인가요?" - P199
가메이도는 주변을 신경 쓰듯 작게 말했다. "저는………… 도요카와 씨가 미우라 선생님을 죽였다고 생각해요." - P200
"......어째서요?" "도요카와 씨 ..・・・ 미우라 선생님을 지독하게 싫어했던 것같더라고요." - P200
"아주 뿌리 깊은 사연이 있어요. 도요카와 씨는 어릴 적부터 그림 실력이 뛰어나서 미대에 수석 합격했고, 입학식 때 신입생 대표로 연설을 할 만큼 우수한 인재였대요. (후략)." - P201
"하지만 사회에 나온 후에 관계가 역전됐죠. (중략). 그리고 재취업하느라 고생할 때 도와준 사람이 미우라 선생님이었고요. (후략)." - P201
이와타는 의아했다. 가메이도가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담당 교사 미우라에게 도움을 받기는 했겠지만, 그렇다고 학생이 죽은 교사의 유족을 위해 그렇게까지 할까. 더구나 가메이도는 미우라를 싫어했을 텐데.... - P202
"이야. 미우라 선생님을 험담하면서도 가족은 챙겨준 거군요" (중략). "도요카와 씨가 음흉한 눈빛으로 미우라 선생님의 부인에게 추근거리는 걸 몇 번 봤거든요." - P202
도요카와의 천박한 본성이 점점 드러났다. - P203
"(전략). 분명 저는 미우라 선생님께 좋아하는 것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었을 거예요." "......사랑했다는 말씀이세요?" - P204
돌이켜보면 미우라가 죽었을 때 우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중략). "툭하면 잔소리를 늘어놓는 놈이 사라져서 속이 시원하네." ・・・・ 대놓고 동조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학생들이 대부분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 P204
"아참. 실은 이번 달 20일에 K산에 오를 계획이에요. 미우라 선생님 기일에 위령 행사로 등산을 하는 거죠. 혹시 시간있으면 같이 안 가실래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날은 꼭 들어야 하는 강의가 있*......." - P205
"네, 물론이죠. ・・・・・・ 그렇지. 일단 제 명함을 드릴게요. 무슨일 있으면 연락 주세요." (중략). "어? 학생인데 명함이 있나요?" - P205
색색의 꽃 일러스트 옆에 한자와 알파벳으로 이름이 적혀있었다.
亀戸由紀(가메이도 유키) YUKI KAMEIDO - P206
(전략). "가메이도 씨. 저 그림은 뭔가요?" "아아! 구멍 때문에 그러시는 거군요. 저건 눈이 보이지 않아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캔버스예요." "눈이 보이지 않아도?" - P206
"(전략),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수작업하기는 아주 힘들어요. (중략). 하지만 캔버스에 구멍을 뚫어놓으면 손가락으로 위치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 구멍 위치를 참고하며 선을 그을 수 있어요. - P207
그때 이와타의 뇌리에 섬광이 번쩍였다. 내내 마음에 걸렸던 의문과 ‘구멍 뚫린 캔버스가 맞물렸다. 미우라의 그림에 남아 있었던 접힌 자국. 그건 ‘구멍‘과 똑같은 역할 아니었을까. - P208
이 생각이 맞는다면 미우라는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그 그림을 그렸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상하다. - P209
(전략).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어쩌면 양손이 뒤로 묶인 상태 아니었을까. - P209
과연 손이 묶인 채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가능하더라도 어떻게 범인에게 들키지 않고 끝까지 그릴수 있었을까. 애당초 그런 상태로 그림을 그린 미우라의 목적은 뭐였을까. - P210
9월 20일 아침. 이와타는 새 텐트와 침낭, 그리고 스케치북을 배낭에 넣고 기숙사를 나섰다. (중략). 그때 이와타는 한 가지 목표를 세웠다. 바로 사건 당일의 완벽한 재현... - P210
일단 나무 밑동에 핀 꽃을 그려보았다. 하지만 생각처럼 잘 그려지지 않았다. 30분 넘게 낑낑댄 끝에, 지지리도 형편 없는 그림이 완성되었다. "역시 예술은 적성이 아니네⋯⋯⋯⋯⋯" 이와타는 작게 중얼거리고 스케치북을 덮었다. - P212
어쩌면 17시까지 목적지인 8부 능선에 다다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만약을 위해 여유 있게 출발해야하지 않을까. - P213
이와타의 판단은 옳았다. 6부 능선에 도착했을 때 이미 16시가 지났다. 시간에 맞춰 출발했다면 분명 늦어졌으리라. 역시 미우라와 비교하면 걸음이 느리다. - P213
이와타는 좌절할 것 같은 기분을 추스르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한 시간쯤 지나자 드디어 ‘8부 능선 광장‘ 간판이 보였다. 진심으로 안도했다. 17시 조금 전. 서두른 보람이 있어서간신히 예정대로 도착했다. - P214
캠핑에는 적격이지만, 이와타 말고 다른 캠핑객은 없었다. 그럴 만도 하다. 여기는 몇 년 전에 살인사건이 발생한 곳이니까. - P214
이와타는 연필을 꺼내고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제 미우라가 사랑했던 아름다운 산줄기의 경치가 보일 터였다. 하지만 이와타의 눈앞에는 믿기 어려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 그림과・・・・・・ 달라.‘ - P215
저녁놀이 진 하늘 아래, 산줄기는 시커먼 덩어리로 변했다. 이와타는 한순간 혼란스러웠지만, 이유를 바로 알아차렸다. 역광이다. - P217
이와타는 미우라가 그린 그림을 떠올렸다. 그 그림에는 각 산의 능선뿐만 아니라 산 위에 위치한 송신탑 두 개도 그려져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간대에 그렇게까지 선명하게 보일 리 없다. - P217
‘혹시 선생님은 좀 더 일찍………… 아직 밝은 시간대에 8부 능선에 도착한 걸까?
한순간 번쩍 떠오른 생각을 바로 떨쳐냈다. 그럴 리 없다. (중략). 역시 미우라가 여기 도착한 건 지금 시간대이거나, 더 나중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그림을 그린 걸까. - P218
물통의 물을 벌컥벌컥 마시면서 돈가스 샌드위치도 같이삼켰다.
그때였다.
이와타의 머릿속에서 불꽃이 파박 튀었다.
"설마・・・・・・ 그런 거였나......?!" - P219
미우라는 아침 햇살에 비친 산줄기를 그린 것이다.
미우라가 그 그림을 그린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은 아침까지 살아 있었다.......그 사실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 P220
부검 결과 미우라는 9월 20일 17시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됐다. 가령 미우라가 다음 날 동틀 녘까지 살아 있었다면, 경찰은 사망추정시각을 열 시간도 넘게 오판한 셈이다. 우수한 일본 경찰이 그런 실수를 저지를 리 없다. - P220
범인이 현장에 나타난 건 다음 날 동이 튼 후, 잠에 취한 미우라를 텐트 밖으로 끌어내 침낭을 벗기고 양손을 뒤로 묶었다. 그 다음 가져온 ‘하나야기 도시락을 억지로 입에 넣고 물과 함께 삼키게 했다. 그리고 두 시간 30분 후 살해했다. - P222
단순한 트릭이다. 사실 이와타는 이 트릭을 알고 있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읽은 적이 있었다. ‘피해자에게 억지로 음식물을 먹여서 사망추정시각을 속인다." ·수많은 추리소설에서 사용된 고전적인 트릭이다. - P223
그래서 범인은 미우라의 시체를 끔찍하게 훼손한 것이다.
"시체 손상이 심해서 부검에 난항을 겪긴 했는데, 다행이랄까 위장에서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이 검출됐지." - P224
그리고 이 시나리오대로라면 침낭을 도둑맞은 진짜 이유도알 수 있다. 미우라는 20일 밤, 텐트를 치고 침낭에 들어가서 하룻밤을보냈다. 침낭과 텐트를 현장에 남겨두면 미우라가 밤을 보냈다는 사실이 들통나므로 트럭은 무용지물이 된다. - P224
하지만 현장에서 돈가스 샌드위치만 사라지면 ‘미우라는저녁으로 돈가스 샌드위치를 먹었다‘=‘현장에서 밤을 보낸 것 아닐까‘라는 가능성이 부각된다. 그래서 단팥빵을 훔쳤다. 식료품이 전부 없어지면 경찰은 범인이 훔쳤다‘고 받아들인다. - P225
미우라는 고심했을 것이다. 대체 뭐라고 써야 할까. 범인의이름을 쓰거나 트릭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메모가 범인의눈에 띄었을 때 처분될 우려가 있다. - P225
나는 아침까지 살아 있었다.‘ …………… 미우라는 그 사실을 알리고 싶었으리라. (중략).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림은 경찰의 손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무도 그림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 P226
(전략). 그렇다면・・・・・・ 남은사람은 하나뿐이다.
가메이도 유키.
이와타는 등골이 오싹했다. - P227
살이 에일 듯한 찬 바람이 불어왔다. 산속의 밤은 춥다. 밤 사이에 기온이 더 떨어지리라. 이와타는 텐트에 들어가서 배낭 속 침낭을 꺼내 몸을 푹 감쌌다. - P228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어느덧 잠들었던 모양이다. (중략). 그때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두 팔이 ‘차렷 자세로 굳어버렸다. - P228
이와타는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했다.
끈 같은 물건을 사용해 침낭 위로 몸을 꽁꽁 동여맨 것이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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