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심하기까지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나오미는 양손으로 식칼을 움켜쥐고 남자에게 덤벼들었다. - P140
몸싸움이 벌어질 줄 알았다. 뜻밖에도 남자는 저항하지 않았다. 남자는 칼에 찔려 피가 철철 흐르는 배를 손으로 누른 채 고통스러워하며 쓰러졌다. - P140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 P140
제3장
미술 교사의 마지막 그림
미우라 요시하루
교편을 잡은 이후로 미우라 요시하루는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쓴 적이 거의 없었다. (중략). 휴일에는 졸음을 참으며 가족을 데리고 야외로 놀러 나가서 텐트를 치고, 숯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웠다. (중략). 친구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몇 시간이든 이야기를 들어주고, 일자리 소개는 물론 가끔은 돈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 P145
미우라는 호주머니에서 펜을 꺼냈다. 그려야 한다. 그림을 그려야 한다.
녀석을 위해서. - P146
1992년 9월 21일, L현 K산에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됐다. 피해자는 부근에 사는 41세 남성 미우라 요시하루. 고등학교 교사로, 담당 과목은 미술이었다. - P146
-1995년 8월 28일・・・・・・ L현 지방신문사 ‘L일보‘ 본사
두툼한 파일을 앞에 두고 19세 청년 이와타 슌스케는 생을 삼켰다. 파일 표지에는 K산 미술 교사 살인사건(1992) 취재 자료 모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 P149
이와타 슌스케
이와타 슌스케는 올해 L일보에 입사한 신입이다. 3년 전, 어떤 일을 계기로 신문기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L일보의 문을 두드렸다. 면접 때는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한 진실을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다‘라는 마음을 열띠게 표현했다. 면접관의 반응은좋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 P150
L일보의 사원은 300명이 넘지만, 기자의 숫자는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기자로 활동하는 건 회사의 노른자위인 편집국 소속의 엘리트 사원뿐이다. 그들은 전부 대학을 졸업했다. - P150
구마이 이사무
(전략) 구마이는 예전에 편집국 소속 기자로서 수많은 기사를 써냈다. 그 당시 별명은 ‘개코 구마 형사 사건의 특종 냄새를 구마이보다 더 잘 맡는 사람은 없었다. - P151
어떤 사건을 쫓던 도중에 식도암이 발병했음을 알아차리고, 처음으로 장기 휴가를 얻었다. - P152
"구마이. 지금까지 고생 많았어. 알다시피 기자는 목숨을갈아 넣어서 돈으로 바꾸는 직업이지. 병에 걸린 몸으로는 힘들 거야. 오늘부터 총무국으로 옮겨. 이제부터는 몸을 잘 챙기면서 느긋하게 일하도록 해." - P152
(전략). ・・・・・・ 그건 알지만 구마이는 이와타가 너무 가여웠다. 기자로 일하고 싶다. 하지만 할 수 없다.‘ .....현재 자신의상황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는 만큼, 응석을 받아줄 수는없다. 구마이는 호랑이 선배가 되기로 마음먹고 총무국 일을 철저하게 가르쳤다. - P153
"프리랜서 기자가 될 겁니다." "......원래 기자를 지망했댔지." (중략). "3년 전에 K산에서 발생한 미술 교사 살인사건이요." - P154
이와타 슌스케
"좋은 선생님이셨어?" 구마이의 질문에 이와타는 대답을 망설였다. ‘좋은 선생님‘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을 만큼, 미우라는 완벽한 교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P155
"이와타 이거 알아? 역 앞 슈퍼에서 파는 하나야기 도시락‘이라는 건데, 선생님은 이걸 좋아해서 매일 사먹어. 넉넉하게 샀으니까 가져가서 할아버지랑 같이 먹으렴." 미우라는 그렇게 말하고, 매일 ‘하나야기 도시락‘을 두 개들려 보냈다. 덕분에 이와타는 가난해도 배를 곯지는 않았다. - P156
이와타는 사건이 미궁에 빠진 채, 미우라 요시하루라는 인간이 잊혀가는 사태를 참을 수 없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미우라가 살해당해야 했는지 꼭 알고 싶었다. - P157
"그리고 이게 제일 중요한데………… 내가 보기에 넌 기자가 적성에 안 맞아." (중략). 그 한마디에 이와타는 분노가 솟구쳤다. "구마이 씨! 저를 너무 무시하시는 거 아닙니까! 저는 진심으로 기자가 되고 싶다고요!" (중략). "난 3년 전까지 이 회사에서 기자로 일했어. 그건 알지?" (중략). "이건 말하지 않았지만, 난 당시 K산 사건을 취재 중이었어." - P158
"응. 그래서 사건에 관한 정보가 넘쳐나지. 그런 사람이 가까이 있는데도, 넌 지금까지 눈뜬장님처럼 지냈어. 왜 내가 예전에 기자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사건에 관해 물어보지 않았지?" - P159
구마이는 자기 책상 서랍에서 두툼한 파일 하나를 꺼냈다. 표지에는 K산 미술 교사 살인사건(1992) 취재 자료 모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도 이 사건에는 애착이 있어서 기자를 그만둔 후에도 자료를 처분하지 못했어. 간직해두길 잘했군." - P159
솔직히 가능하다면 은사가 얼마나 비참한 최후를 맞았는지는 알고 싶지 않다. 하지만 ‘진상을 밝히겠다‘고 결심한 건 이와타 본인이다. 이와타는 생침을 삼켰다. "이와타, 각오는 됐나?" - P160
7시 50분에 학교 도착, 교무실에는 들르지 않고 바로 미술실에 가서 당시 3학년이었던 여학생 가메이도와 일대일로 수업을 진행했어." "일대일? 미술부 수업인데요?" "듣기로는 미우라 씨가 너무 엄격하게 수업해서 미술부원숫자가 확 줄어들었대." - P162
"덧붙여 미우라 씨는 수업 중에 오후부터 K산에서 캠핑할예정이라는 걸 가메이도에게 말했어." - P163
"도요카와…………? 그건 누군가요?" "미대 시절부터 미우라 씨와 친구였던 남자야. 뭐, ‘친구‘라고는 해도 도요카와는 미우라 씨를 내심 싫어했던 것 같지만." - P164
"미우라 씨는 이렇게 제안했어. 도중까지 같이 산에 오르다가 도요카와만 그날 하산하면 된다고." "도중까지는 무조건 같이 가자는 건가…………. 어쩐지…… 막무가내네요." - P165
"맞아. 나도 취재하러 몇 번 올라갔는데, 경사가 완만해서아주 편하더군. 등산로에는 로프를 쳐놔서 길을 잃을 걱정도 없고 말이야. (중략). 4부 능선과 8부 능선에 ‘광장‘이라고 불리는 휴게소가 있거든. 4부 능선 광장에는 테이블이 몇 개 놓여 있어서 밥을 먹기에 딱 좋아. 한편 8부 능선 광장은 캠핑에 적합하지. (후략). 그 후, 하산하던 사람 몇 명이 등산로를 올라가는 미우라씨를 봤어. 16시경, 6부 능선 부근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됐지. (중략). 즉, 미우라 씨가 8부 능선에 도착한 건 17시 이후로 추정돼." - P166
"...그 남자는 왜 그렇게 아침 일찍 산에 오른 건가요?" "K산을 담당하는 산림 정비사였거든. 8부 능선의 설비가망가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상태를 확인하러 간 거야 (중략). 즉, 일요일 낮에 대학생등산 동아리가 장난으로 걷어차서 부러뜨렸다는군." "난폭한 짓을 했네요." - P168
"산림 정비사는 하산해서 경찰에 신고했어. 정오쯤 현장 검증이 실시됐지. 현장에 남아 있던 배낭에서 미우라 씨의 신분증이 발견됐고, 산기슭 주차장에 미우라 씨의 차가 세워져 있었으므로 시체의 신원은 미우라 씨로 추측됐어." - P169
"(전략). 툭 까놓고 말하자면 간신히 인간 형태를 유지한 뭔가였지." - P169
".......만약 신원 은폐가 목적이라면, 신분증을 현장에 남겨놓는 건 이상해요. 즉・・・・・・ 극심한 원한… 쪽이겠죠." "맞아. 범인은 미우라 씨를 몹시 증오한 거겠지." - P170
"그런데 미우라 선생님은 언제 살해된 걸까요?" "(전략), 다행이랄까 위장에서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이 검출됐지. ‘하나야기 도시락‘의 내용물과 동일했대. (후략)." - P170
"그렇군요....... 어? 잠깐만요. 미우라 선생님이 8부 능선에 도착한 건 17시 이후였잖아요." "응, 요컨대 미우라 씨는 8부 능선에 도착하자마자 살해당한 거야." - P171
"그리고 미우라 선생님이 일요일에 산을 오른다는 걸 알고 있었던 사람.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야기 속에 나온 인물 중 수상한 건.. 미우라 선생님의 부인, 미술부원 가메이도씨, 그리고 도요카와 씨로군요." - P173
"응. 다만 고려해야 할 힌트가 하나 더 있어. 미우라 씨의소지품 중에서 없어진 물건이 있었지. 침낭, 그리고 단팥빵과 돈가스 샌드위치야, (중략). 하지만 먹기 전에 살해당했을 테고, 부검 결과 위장에서는 검출되지 않았어. 즉, 범인이 가지고 갔을 가능성이 커." - P174
"그렇구나. ‘범인은 산에서 밤을 보냈다‘고 경찰이 오해하면 밤부터 아침에 걸쳐 알리바이가 있는 자신은 용의자에서 제외된다・・・・・・ 그런 작전이로군요." - P175
"그럼 범인은...... 도요카와." - P176
"요컨대 도요카와는 산을 내려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커." (중략). "아니, 그런 목격 증언도 없었어. 말하자면 도요카와는 4부 능선에서 느닷없이 사라진 거야. 경찰의 생각은 이랬어. 도요카와는 미우라 씨와 헤어진 후, 등산로를 벗어나 8부 능선까지간게 아닐까." - P177
"B시간에만 알리바이가 있어서・・・・・・ 의혹이 더 커졌다는 건가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범인은 도요카와밖에 없다. 하지만...... - P178
"이렇게 수상한데요?" "수상하기만 해서는 안 돼. 명확한 증거가 딱 하나만 있어도 간단했겠지만, 아쉽게도 지금까지 그런 증거는 발견되지않았어. 그리고 문제가 하나 더 있지. (후략)." - P179
구마이는 파일을 넘기며 중얼거렸다. "뭐, 이뿐이라면 수많은 엽기 살인사건 중 한 건에 불과하겠지. 하지만 이 사건에는 기묘한 점이 하나 더 있었어." - P179
"기묘한 건 이 그림이 아니야. 이다음, 8부 능선 광장에서그린 마지막 그림이지." "마지막 그림?" - P180
"이거・・・・・・ 정말로 미우라 선생님이 그리신 건가요?" "응, 미우라 씨의 그림이 틀림없어. 8부 능선 광장에서 보이는 산줄기의 모습을 그린 거래.
(후략)." - P181
"이상하지? 다른 그림과는 그림체가 전혀 달라. 더구나 이건 영수증 뒷면에 그린 거야." - P182
"(전략). 각 산의 높이, 경사, 위치 관계, 그리고 산 위에 위치한 송신탑까지 충실하게 재현했어. 아주 정확하게 그리고 싶었던 거겠지. 보조선까지 만들었어." "보조선・・・・・・ 이 뭔가요?" "사진을 자세히 봐. 종이에 접힌 자국이 있지?" "......확실히 촘촘하게 접은 듯한 자국이 있네요." - P183
질문을 받고 이와타는 무시무시한 가능성을 하나 떠올렸다. "...... 미우라 선생님은 스케치북을 꺼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 P185
"선생님은 생전에 K산 8부 능선에 여러 번 올라가셨잖아요. 예전에 갔을 때 그린 그림이 지갑에 들어 있었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그건 아니야. 아까도 말했잖아. 그림이 그려진 영수증은그날 낮에 역 앞 슈퍼에서 발행된 거야." - P186
미우라는 범인이 처분하지 않게끔, 쉽게는 풀 수 없는 암호를 남겼다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면 다른 의문이 샘솟는다. 범인은 왜 그림을 현장에 남겨둔 걸까. - P187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에는 선이 그어져 있지 않았다. 즉, 미우라는 평소 보조선을 사용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유형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산줄기 그림을 그릴 때는 일부러꼼꼼하게 보조선을 그었을까. 그렇게 하면서까지 정확하게그려야 할 이유가 있었던 걸까. - P188
다음 날 점심시간, 이와타는 책상에 수첩을 펼쳤다. (중략) 아무리 생각해도 제일 수상한 사람은 도요카와다. - P191
"그렇구나....... 그런데 그건 어쩌기로 했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잖아..…………." (중략). "응....... 그게 좋아. 요즘 같은 세상에 굳이 월급을 포기할건 없어. 프리랜서 기자는 언제든지 될 수 있으니까. 서두를필요 없겠지."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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