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는 사람들
헬레네 알빙 부인, 육군대위이자 시종관인 알빙의 미망인
오스발 알빙, 그녀의 아들, 화가
목사 만데르스
목수 엥스트란
레기네 엥스트란, 알빙 부인의 하녀
사건은 노르웨이 서쪽 어느 커다란 피오르 기슭에 있는 알빙 부인의 시골 저택에서 벌어진다. - P3
제1막
정원이 내다보이는 넓은 거실. 왼쪽 벽에 문이 하나, 오른쪽엔 두 개의 문이 있다. 방가운데에는 원탁과 의자들이 있고 테이블 위에는 책, 잡지, 신문들이 놓여 있다. - P5
목수 엥스트란이 정원으로 통하는 문가에 서 있다. 그의0왼쪽 다리는 약간 휘어져 있으며, 나무로 밑창을 댄 장화를 신고 있다. - P5
레기네 그만 좀 쿵쾅거려요. 위층에 도련님 자고 있어요. 엥스트란 여태 잔다고? 이 대낮에? 레기네 상관할 거 없잖아요. 엥스트란 어젯밤에 술을 좀 펐더니… 레기네 어련하겠어요. - P6
레기네 네, 네, 이제 그만 가 보세요. 여기 이렇게 서서랑데부² 하고 싶지 않아요.
2) rendez-vous. 언젠가 파리에 갈꿈을 꾸고 있는 레기네는 수시로프랑스어를 구사한다. - P7
레기네 아하, 속셈 뻔하지, 뭐! 엥스트란 속셈이라니? 레기네 (그를 쏘아보며) 만데르스 목사님한테 또 무슨 사기를 치려고? - P8
엥스트란 뭐가 어쩌고 어째? 너 애비한테 대드는 거냐, 이 망할 년이? 레기네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중얼거린다.) 나한테 종종 그랬잖아, 난 아버지랑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엥스트란 제기랄, 그게 무슨 상관이야... - P9
레기네 (짧은 침묵 뒤에) 날 왜 도시로 데려가려는 거예요? (중략). 레기네 오, 그렇게 어물쩍 넘어가려 하지 말구요. 내가거길 왜 가야 하냐고. - P11
레기네 그래서 난 뭘...?
엥스트란 네가 좀 도와줬으면 해서 그냥 얼굴마담 노릇한다 생각하면 돼. 힘든 일 같은 건 안 해도 된다고, 얘야.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거야.
레기네 네, 좋네요! - P12
엥스트란 이것저것 합치면, 대략 700~800크로네는 될거다. (중략). 레기네 허접한 옷 쪼가리 한 벌 사줄 생각도 없고? 엥스트란 나랑 도시로 가면 옷 같은 건 실컷 갖게 될 거다. - P13
엥스트란 그럼 뭐 번거롭게 결혼하지 마. 그래도 돈은되니까. (더욱 은밀하게) 그 뭐냐. 영국인 말이야. 그 요트를 타고 온... 그 친구는 300스페시달레르기나 냈었다… 너보다 별로 예쁘지도 않은 여자한테 말이야.
7) speciedaler. 1560년부터 1875년까지 노르웨이에서 사용되었던 주화 단위, 원래 무게 30그램 미만에 함량 87.5퍼센트의 대형 은화였으며, 나중에 1달레르 이상의 액면가를 가진 지폐도 통용되었다. 2019년 기준으로 화폐 가치를 환산하면 1875년 시점의 1스페시달레르는 약 262노르웨이크로네, 우리 돈 약 3만 5000원에 해당한다. - P15
엥스트란 자고 있다 이거지. 너 알빙 도련님 생각을 끔찍이도 하는구나・・・ (은근히) 오호, 너 혹시 그 친구를...? - P16
외투 차림에 우산을 든 만데르스 목사가 작은 여행 가방을 어깨에 메고서 정원 문을 통해 온실로 들어온다. - P16
만데르스 목사 방금 도착했지. (방으로 들어간다.) 요즘비가 정말 지겹게도 오는군. 레기네 (그를 따라가며) 농부한텐 축복받은 날씨죠, 목사님. 만데르스 목사 그렇지, 맞는 말이야. 우리 도시 사람들은 미처 그 생각을 못한단 말씀이야. (외투를 벗기 시작한다.) - P17
만데르스 목사 무척 분주하겠군, 내일 일 준비하느라? 레기네 아 네, 여기 할 일이 많아요. 만데르스 목사 알빙 부인은 집에 계시고? 레기네 네, 그럼요. 도련님 드릴 초콜릿 준비하느라 위층에 계세요. - P18
만데르스 목사 고마워요, 고마워. 아주 편하군. (그녀를바라보며) 그나저나, 엥스트란 양, 지난번 봤을때보다 훨씬 성숙해진 거 같은데. (중략). 만데르스 목사 살이 올랐다? 글쎄, 뭐 약간・・・ 딱 좋은데. - P19
만데르스 목사 아버진 그다지 강한 성격이 못 되셔, 엥스트란 양. 인도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중략). 만데르스 목사 누가 곁에 있어야 돼, 의지할 만하고, 말을 걸어 줄 사람 말이야. 지난번 날 만나러 왔을때 솔직히 인정하시더라. - P20
레기네 그렇다면 기꺼이 시내로 가고 싶을 거예요. 여긴너무 외롭거든요... 목사님도 잘 아시잖아요, 이세상에 혼자라는 게 어떤 건지. 그리고 감히 말씀드리자면, 전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어요. 어디저한테 적합한 자리 아는 데 없으세요, 목사님? 만데르스 목사 나? 아니, 난 모르겠는데. - P21
만데르스 목사 이제 부인을 좀 모셔 올 수 있을까?⁸
8) 원문 표현은 "Vil De kanske være så snil at hente fruen?" 연령과 신분상만데르스 목사는 레기네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지만 상대방을 지칭할 때 경칭 ‘De‘를 사용하고 있으며, 대화 추이에 따라 ‘엥스트란양‘과 ‘레기네‘라는 호칭을 번갈아 구사한다. - P21
만데르스 목사 (방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다가 잠시 뒷짐을 지고 서서 정원을 내다본다. 그런 다음 다시테이블 근처로 와서 책 한 권을 집어 들어 표지의 제목을 보고는 흠칫 놀라더니 다른 책들의 표지도 살펴본다.) 흠... 그것참! - P22
알빙 부인 네, 하지만 여기 집엔 이 엄마가 있잖아요. 오, 기특하고 사랑스러운 녀석・・・ 엄마를 끔찍이 생각한다니까요, 그 애가! 만데르스 목사 집 떠나 예술의 길을 간다고 해서 그런 자연스러운 감정이 둔화된다면 그 또한 슬픈 일이 되겠죠. - P24
알빙 부인 이 책들이요? 제가 읽는 책들인데요. 만데르스 목사 이런 책을 읽으신다고요? - P25
알빙 부인 글쎄요, 전 이 책에서 제가 평소 생각하는 많은 것들에 대한 설명과 확증을 얻게 되거든요. 그런데 참 이상한 점은요, 만데르스 목사님・・・ 사실이 책들엔 딱히 새로운 내용이 없다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거나 믿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걸 깨닫지 못하거나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에요. - P25
알빙 부인 이 책들을 반대하는 진짜 이유가 뭐예요? 만데르스 목사 반대요? 설마하니 제가 이런 물건들이나면밀히 살펴보고 다닌다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 P26
만데르스 목사 이 책들을 반대할 수 있을 만큼은 읽었습니다. (중략). 만데르스 목사 친애하는 부인, 살다보면 다른 사람의 판단에 의지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게 작금의 세상 이치예요. 그리고 그건 좋은 겁니다. 그렇지않다면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 P26
만데르스 목사 시종관 대신 육군대위라는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대위가 좀 더 겸허해 보여서요. (중략). 만데르스 목사 그리고 이건 자금이 예치된 예금 통장입니다. 여기서 발생한 이자로 고아원 운영비를 충당하게 될 겁니다. - P28
만데르스 목사 고아원 건물을 보험에 들 건지 말 건지? 알빙 부인 물론 들어야죠. 만데르스 목사 네, 잠깐만요, 부인. 그 문제는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죠. - P29
만데르스 목사 여기도 유력한 사람들ㆍ 사실상 싫은 소리를 낼 만한 유력한¹² 사람들이 꽤 있죠?
12) 원문 표현은 "meningsberettigede". 사전적 의미는 ‘의견을 피력할 자격이 있는‘, ‘발언권을 가진‘ 등이다. - P30
만데르스 목사 특정 신문과 잡지에서 보나마나 저에 대한 공격이 가해질 게 뻔하고... (중략). 만데르스 목사 그럼 보험은 가입 안 하신다는 건가요? 알빙 부인 네, 그만둬야죠, 뭐. - P32
만데르스 목사 좋습니다. 원하시는대로 (적어 놓는다.)그러니까… 보험 가입은 안 함. 알빙 부인 그런데 참 이상하네요, 하필 오늘 그 문제를꺼내시고... - P33
알빙 부인 오, 그럼요, 술만 안 마신다면... 만데르스 목사 그래요, 슬픈 약점이죠! 본인은 다리가아파서 종종 그러는 거라 하던데. 그 사람 지난번 도시에 왔을 때, 전 정말 감명을 받았습니다. 절 찾아와서는 이곳에 일자리를 구해 줘서 진심으로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덕분에 레기네 곁에 있을 수 있게 됐다고. - P34
만데르스 목사 유혹에 빠지려 할 때, 자신을 붙잡아 줄누군가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모양이에요. 야콥 엥스트란에게 호감이 가는 건 바로 이지점입니다. 무력한 모습으로 다가와 스스로를비난하고 자신의 약점을 고백한다는 거예요. 지난번에 왔을 때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들어 보세요, 알빙 부인, 내심 레기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으면 하던데… - P35
알빙 부인 자, 소감이 어떠세요, 만데르스 목사님? 만데르스 목사 난... 난... 아니, 이게 바로 그…? 오스발 네, 바로 그 방탕한 아들입니다, 목사님. 만데르스 목사 아니 이 젊은 친구가.. - P37
만데르스 목사 인간의 눈엔 위험해 보이는 일들이 너무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악수하며)어쨌든 잘 왔네, 잘 왔어! 친애하는 오스발... 그래, 그냥 이름을 불러도 괜찮겠지? 오스발 그럼요, 달리 뭐라 부르시겠습니까? - P37
알빙 부인 화가도 가끔은 쉬어야지. 만데르스 목사 그럼요. 뭔가 큰일을 준비하려면 힘을 비축해야지. 오스발 네・・・ 어머니, 우리 식사해야죠? - P38
만데르스 목사 아까 오스발이 파이프를 입에 물고 문가로 들어서는데, 생전의 제 아버지를 보는 거 같더라고요. (중략). 알빙 부인 오, 무슨 그런 말씀을! 오스발은 날 닮았어요. - P39
만데르스 목사 거참 희한한 일이네. 알빙 부인 오스발이 그냥 꿈을 꾼 거예요. (중략). 만데르스 목사 젊었을 땐 아주 쾌활한 사람이었지.. - P40
만데르스 목사 거 보세요. 네, 뭐 본인 앞에서 얘기해도 상관없겠네요. 아드님의 경우 결과가 어떻습니까? 나이 스물예닐곱이 되도록 제대로 된 가정¹⁵이 어떤 건지 경험할 기회가 없었잖아요.
15) 이후 만데르스 목사와 오스발의 대화는 단순히 물리적인 ‘집(hos)‘이 아닌 ‘가정(hjem)‘을 화두로 삼고 있다. - P42
만데르스 목사 내 말은, 독신자 가정 말고. 내가 말하는집이란, 가족이 사는 가정을 뜻하는 거지, 남편과 아내와 아이들이 사는 곳 말이야. - P43
만데르스 목사 그러니까 자넨 비합법적인 관계를 말하는 거군! 소위 방종한 결혼¹⁶ 말이야!
16) 원문 표현은 "vilde ægteskaber", 직역하면 ‘야생의 결합‘ 또는 ‘야합(野合)‘, ‘거친 결혼‘을 뜻한다. - P44
만데르스 목사 (개의치 않고) 그러고 보니 당국에서 그런 일을 묵인하는 게로군! 공공연하게 그런 일이벌어지도록 말이야! (알빙 부인에게)이러니 제가 아드님에 대해 심히 우려를 나타낸 것도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드러내 놓고 부도덕이 횡행하는 그런 집단에서... - P45
알빙 부인이 말없이 그를 쳐다본다.
만데르스 목사 (이리저리 서성이며) 스스로 방탕한 아들이라 했던가요. 그렇군요, 안타깝게도... 안타깝게도!
알빙 부인이 여전히 그를 쳐다본다. - P47
만데르스 목사 부인께선 결혼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나락으로 떨어질 뻔했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집과 가정을 버렸던 일, 남편 곁에서 도망친 일이요… 그래요, 알빙 부인, 도망쳤죠, 도망쳤어요, 그리고 그가 아무리 간청해도 한사코 돌아오길 거부하셨잖아요?¹⁸ - P49
만데르스 목사 전 전능하신 분의 뜻에 따라 쓰이는 하찮은 도구일 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부인을 의무와 순종의 길로 인도한 이후 부인의 삶이 큰 축복으로 이어지지 않았던가요? (후략). - P51
(전략). 만데르스 목사 그 결과 부인이 저 아이한테 낯선 사람이돼 버린 겁니다. 알빙 부인 아니, 아니, 그렇지 않아요! 만데르스 목사 아뇨, 그렇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돌아온 아드님이 어떻게 변해 있던가요! (후략). - P52
알빙 부인 (천천히 그리고 자제하며) 이제 말씀하신 거네요, 목사님. 그리고 내일 공식적으로 내 남편을기리는 추모 연설을 하실 거구요. 전 내일 아무말 안 할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목사님이 제게 하셨던 것처럼 저도 목사님께 말 좀 하고 싶네요. - P56
알빙 부인 하지만 이제, 만데르스,²⁰ 이제 제가 진실을말씀드릴게요. 언젠가 스스로 다짐한 적이 있었죠, 언젠가 당신 꼭 알게 될 거라고. 당신만큼은! 만데르스 목사 그 진실이라는 게 뭡니까? 알빙 부인 사실인즉, 제 남편은 평생 그랬듯이 죽는 날까지 방탕했다는 거요.
20)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이름을 거리낌 없이 부르는 걸로 보아 분명 사적으로 더욱 친밀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 P55
만데르스 목사 그보다 더 역겨운 일! 알빙 부인 난 그이가 집 밖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돌아다니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했어요. 하지만 막상 그 일이 우리 집에서 벌어지니까…만데르스 목사 아니 어떻게! 여기서! - P57
(전략). 알빙 부인 난 곧 깨달았어요, 뭘 믿어야 할지. 시종관선 하녀를 마음대로 범하셨고... 그 관계가 결과물을 낳은 거죠, 만데르스 목사님. 만데르스 목사(마치 돌처럼 굳은 듯) 이 집에서 그 모든일들이! 이 집에서! - P58
알빙 부인 어린 아들을 위해 참았죠. 그런데 그 마지막모욕을 겪은 거예요. 내가 부리던 하녀. 그때 난나 자신에게 맹세했어요. 이 일을 끝내야 한다! 그래서 집안의 통제권을 틀어쥐었죠… (후략).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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