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어느 놈을 죽일까요 알아맞혀 보세요

민지형

(전략).
나는 당신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여성이다. 긴 머리카락은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고, 키는 160센티미터 초반. 피부는 하얀 편이고, 얼굴은 갸름한 ‘편‘이다. 화장은 아주 옅게 해서 거의 티 나지않고, 입술 색 정도만 신경 쓴다. - P12

오직 편의점과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배달 음식 전문 가게들만이 살아남은 이곳에서 ‘네일케어‘와 ‘피부관리 전문숍이 영업 중이라는 게 놀라울 것이다. 저런 가게는어떻게 버티는 거지? 장사가 되나? 사람들이 오나? 그런 궁금증을 자아내는 그곳이 바로 나의 가게다. - P13

 하지만 모든 업종이 그렇듯이, 중요한 것은 ‘입소문‘이다. - P13

나는 프로답게 그의 표정과 옷깃, 신발 밑창까지 순식간에 스캔했다. 범상치 않은 사연이 있어 보인다. 어젯밤 맡았던피 냄새가 갑자기 코끝을 스쳤다.
"뭐 해드릴까요?"
내가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 - P14

"꼭 한번 해보고 싶어서 진짜 열심히 길렀는데, 꼭 잘하는 분한테 받고 싶거든요. 이거 손기술이 진짜 중요하잖아요. 엄청 섬세해야 하고."
그쵸, 그것도 손기술이 진짜 중요하긴 해요, 엄청 섬세해야 하고요. 볼멘소리를 혼자 삼키다가 나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 P15

일정한 톤의 ‘감사합니다~‘와 함께 가면 같은 표정으로 첫 손님을 배웅하고서 다시 ‘딸랑‘ 소리로 문을 닫고 나자, 그야말로 온몸의 기력이 다 빠졌다. 어제 늦게까지 고생했으니까 오늘은 이만퇴근해도 되지 않을까.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아직 영업 종료까지는 한 시간 여가 남았지만, 뭐 주인 마음 아닌가. - P16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옷을 입은 50대 초반, 길지 않은머리를 뒤로 묶은 여자였다. (중략).
"앉으시지요."
여자는 내 말대로 했다. 그리고 말없이, 가방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 P17

"우리 가영이는… 분명 명줄이 길다고 했는데..."
내가 보는 사진은 항상 살아있는 사람의 것이다. ‘타깃‘을 설명하기 위해 가져오는 것들이니까. 몰래 찍은 사진, CCTV를 캡처한것, 혹은 수배 전단의 사진들. 보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긴장되는. 하지만 여자가 내민 사진은 죽은 사람의 것이었다. - P17

(전략).
몇 년 동안 눈앞의 여자가 겪었을 마음고생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심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저는 아주 단순한 주문만 수행할 뿐, 놀라운 추리력과 번뜩이는 지능으로 사라진 사람을 찾고 이런 건 못 하는데요, 어머니....
"갑자기 애가 죽었다는 거예요." - P18

"그런데, 그렇게 죽었다는 건 절대 자살은 아니잖아요. 그렇죠?
누군가 죽인 거잖아요. 그렇죠?"
여자가 몇 번이나 힘주어 ‘그렇죠?‘라고 되물었다. 확인을 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 P19

"미덥지 않긴 했지만, 흥신소에 먼저 갔었어요. 그래서 그쪽에서 조사한 내용은 이렇게 받았는데."
(중략).
"마지막에 그 창고에 누구랑 있었는지는 흥신소에서도 결국 못 밝혀냈어요." - P20

"어쩔 수 없으니까... 이 파일 참고하셔서 딱 한 명만 죽여주세요. 제가 가진 돈은 이것뿐이니까, 그 한 명 죽이고 남는 돈은 수고비로 써주시고요."
(중략).
"딸아이의 죽음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 이 중에 제일 죽어마땅한 사람. 전문가시니까 조금만 들여다보면 정확히 판별하실수 있을 거라 믿고 왔어요."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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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사람들

헬레네 알빙 부인, 육군대위이자 시종관인 알빙의 미망인

오스발 알빙, 그녀의 아들, 화가

목사 만데르스

목수 엥스트란

레기네 엥스트란, 알빙 부인의 하녀


사건은 노르웨이 서쪽 어느 커다란 피오르 기슭에 있는 알빙 부인의 시골 저택에서 벌어진다. - P3

제1막

정원이 내다보이는 넓은 거실. 왼쪽 벽에 문이 하나, 오른쪽엔 두 개의 문이 있다. 방가운데에는 원탁과 의자들이 있고 테이블 위에는 책, 잡지, 신문들이 놓여 있다. - P5

목수 엥스트란이 정원으로 통하는 문가에 서 있다. 그의0왼쪽 다리는 약간 휘어져 있으며, 나무로 밑창을 댄 장화를 신고 있다. - P5

레기네 그만 좀 쿵쾅거려요. 위층에 도련님 자고 있어요.
엥스트란 여태 잔다고? 이 대낮에?
레기네 상관할 거 없잖아요.
엥스트란 어젯밤에 술을 좀 펐더니…
레기네 어련하겠어요. - P6

레기네 네, 네, 이제 그만 가 보세요. 여기 이렇게 서서랑데부² 하고 싶지 않아요.


2) rendez-vous. 언젠가 파리에 갈꿈을 꾸고 있는 레기네는 수시로프랑스어를 구사한다. - P7

레기네 아하, 속셈 뻔하지, 뭐!
엥스트란 속셈이라니?
레기네 (그를 쏘아보며) 만데르스 목사님한테 또 무슨 사기를 치려고? - P8

엥스트란 뭐가 어쩌고 어째? 너 애비한테 대드는 거냐,
이 망할 년이?
레기네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중얼거린다.) 나한테 종종 그랬잖아, 난 아버지랑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엥스트란 제기랄, 그게 무슨 상관이야... - P9

레기네 (짧은 침묵 뒤에) 날 왜 도시로 데려가려는 거예요?
(중략).
레기네 오, 그렇게 어물쩍 넘어가려 하지 말구요. 내가거길 왜 가야 하냐고. - P11

레기네 그래서 난 뭘...?

엥스트란 네가 좀 도와줬으면 해서 그냥 얼굴마담 노릇한다 생각하면 돼. 힘든 일 같은 건 안 해도 된다고, 얘야.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거야.

레기네 네, 좋네요! - P12

엥스트란 이것저것 합치면, 대략 700~800크로네는 될거다.
(중략).
레기네 허접한 옷 쪼가리 한 벌 사줄 생각도 없고?
엥스트란 나랑 도시로 가면 옷 같은 건 실컷 갖게 될 거다. - P13

엥스트란 그럼 뭐 번거롭게 결혼하지 마. 그래도 돈은되니까. (더욱 은밀하게) 그 뭐냐. 영국인 말이야. 그 요트를 타고 온... 그 친구는 300스페시달레르기나 냈었다… 너보다 별로 예쁘지도 않은 여자한테 말이야.

7) speciedaler. 1560년부터 1875년까지 노르웨이에서 사용되었던 주화 단위, 원래 무게 30그램 미만에 함량 87.5퍼센트의 대형 은화였으며, 나중에 1달레르 이상의 액면가를 가진 지폐도 통용되었다. 2019년 기준으로 화폐 가치를 환산하면 1875년 시점의 1스페시달레르는 약 262노르웨이크로네, 우리 돈 약 3만 5000원에 해당한다. - P15

엥스트란 자고 있다 이거지. 너 알빙 도련님 생각을 끔찍이도 하는구나・・・ (은근히) 오호, 너 혹시 그 친구를...? - P16

외투 차림에 우산을 든 만데르스 목사가 작은 여행 가방을 어깨에 메고서 정원 문을 통해 온실로 들어온다. - P16

만데르스 목사 방금 도착했지. (방으로 들어간다.) 요즘비가 정말 지겹게도 오는군.
레기네 (그를 따라가며) 농부한텐 축복받은 날씨죠, 목사님.
만데르스 목사 그렇지, 맞는 말이야. 우리 도시 사람들은 미처 그 생각을 못한단 말씀이야. (외투를 벗기 시작한다.) - P17

만데르스 목사 무척 분주하겠군, 내일 일 준비하느라?
레기네 아 네, 여기 할 일이 많아요.
만데르스 목사 알빙 부인은 집에 계시고?
레기네 네, 그럼요. 도련님 드릴 초콜릿 준비하느라 위층에 계세요. - P18

만데르스 목사 고마워요, 고마워. 아주 편하군. (그녀를바라보며) 그나저나, 엥스트란 양, 지난번 봤을때보다 훨씬 성숙해진 거 같은데.
(중략).
만데르스 목사 살이 올랐다? 글쎄, 뭐 약간・・・ 딱 좋은데. - P19

만데르스 목사 아버진 그다지 강한 성격이 못 되셔, 엥스트란 양. 인도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중략).
만데르스 목사 누가 곁에 있어야 돼, 의지할 만하고, 말을 걸어 줄 사람 말이야. 지난번 날 만나러 왔을때 솔직히 인정하시더라. - P20

레기네 그렇다면 기꺼이 시내로 가고 싶을 거예요. 여긴너무 외롭거든요... 목사님도 잘 아시잖아요, 이세상에 혼자라는 게 어떤 건지. 그리고 감히 말씀드리자면, 전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어요. 어디저한테 적합한 자리 아는 데 없으세요, 목사님?
만데르스 목사 나? 아니, 난 모르겠는데. - P21

만데르스 목사 이제 부인을 좀 모셔 올 수 있을까?⁸


8) 원문 표현은 "Vil De kanske være så snil at hente fruen?" 연령과 신분상만데르스 목사는 레기네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지만 상대방을 지칭할 때 경칭 ‘De‘를 사용하고 있으며, 대화 추이에 따라 ‘엥스트란양‘과 ‘레기네‘라는 호칭을 번갈아 구사한다. - P21

만데르스 목사 (방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다가 잠시 뒷짐을 지고 서서 정원을 내다본다. 그런 다음 다시테이블 근처로 와서 책 한 권을 집어 들어 표지의 제목을 보고는 흠칫 놀라더니 다른 책들의 표지도 살펴본다.) 흠... 그것참! - P22

알빙 부인 네, 하지만 여기 집엔 이 엄마가 있잖아요. 오,
기특하고 사랑스러운 녀석・・・ 엄마를 끔찍이 생각한다니까요, 그 애가!
만데르스 목사 집 떠나 예술의 길을 간다고 해서 그런 자연스러운 감정이 둔화된다면 그 또한 슬픈 일이 되겠죠. - P24

알빙 부인 이 책들이요? 제가 읽는 책들인데요.
만데르스 목사 이런 책을 읽으신다고요? - P25

알빙 부인 글쎄요, 전 이 책에서 제가 평소 생각하는 많은 것들에 대한 설명과 확증을 얻게 되거든요. 그런데 참 이상한 점은요, 만데르스 목사님・・・ 사실이 책들엔 딱히 새로운 내용이 없다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거나 믿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걸 깨닫지 못하거나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에요. - P25

알빙 부인 이 책들을 반대하는 진짜 이유가 뭐예요?
만데르스 목사 반대요? 설마하니 제가 이런 물건들이나면밀히 살펴보고 다닌다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 P26

만데르스 목사 이 책들을 반대할 수 있을 만큼은 읽었습니다.
(중략).
만데르스 목사 친애하는 부인, 살다보면 다른 사람의 판단에 의지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게 작금의 세상 이치예요. 그리고 그건 좋은 겁니다. 그렇지않다면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 P26

만데르스 목사 시종관 대신 육군대위라는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대위가 좀 더 겸허해 보여서요.
(중략).
만데르스 목사 그리고 이건 자금이 예치된 예금 통장입니다. 여기서 발생한 이자로 고아원 운영비를 충당하게 될 겁니다. - P28

만데르스 목사 고아원 건물을 보험에 들 건지 말 건지?
알빙 부인 물론 들어야죠.
만데르스 목사 네, 잠깐만요, 부인. 그 문제는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죠. - P29

만데르스 목사 여기도 유력한 사람들ㆍ 사실상 싫은 소리를 낼 만한 유력한¹² 사람들이 꽤 있죠?



12) 원문 표현은 "meningsberettigede". 사전적 의미는 ‘의견을 피력할 자격이 있는‘, ‘발언권을 가진‘ 등이다. - P30

만데르스 목사 특정 신문과 잡지에서 보나마나 저에 대한 공격이 가해질 게 뻔하고...
(중략).
만데르스 목사 그럼 보험은 가입 안 하신다는 건가요?
알빙 부인 네, 그만둬야죠, 뭐. - P32

만데르스 목사 좋습니다. 원하시는대로 (적어 놓는다.)그러니까… 보험 가입은 안 함.
알빙 부인 그런데 참 이상하네요, 하필 오늘 그 문제를꺼내시고... - P33

알빙 부인 오, 그럼요, 술만 안 마신다면...
만데르스 목사 그래요, 슬픈 약점이죠! 본인은 다리가아파서 종종 그러는 거라 하던데. 그 사람 지난번 도시에 왔을 때, 전 정말 감명을 받았습니다. 절 찾아와서는 이곳에 일자리를 구해 줘서 진심으로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덕분에 레기네 곁에 있을 수 있게 됐다고. - P34

만데르스 목사 유혹에 빠지려 할 때, 자신을 붙잡아 줄누군가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모양이에요. 야콥 엥스트란에게 호감이 가는 건 바로 이지점입니다. 무력한 모습으로 다가와 스스로를비난하고 자신의 약점을 고백한다는 거예요. 지난번에 왔을 때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들어 보세요, 알빙 부인, 내심 레기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으면 하던데… - P35

알빙 부인 자, 소감이 어떠세요, 만데르스 목사님?
만데르스 목사 난... 난... 아니, 이게 바로 그…?
오스발 네, 바로 그 방탕한 아들입니다, 목사님.
만데르스 목사 아니 이 젊은 친구가.. - P37

만데르스 목사 인간의 눈엔 위험해 보이는 일들이 너무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악수하며)어쨌든 잘 왔네, 잘 왔어! 친애하는 오스발... 그래, 그냥 이름을 불러도 괜찮겠지?
오스발 그럼요, 달리 뭐라 부르시겠습니까? - P37

알빙 부인 화가도 가끔은 쉬어야지.
만데르스 목사 그럼요. 뭔가 큰일을 준비하려면 힘을 비축해야지.
오스발 네・・・ 어머니, 우리 식사해야죠? - P38

만데르스 목사 아까 오스발이 파이프를 입에 물고 문가로 들어서는데, 생전의 제 아버지를 보는 거 같더라고요.
(중략).
알빙 부인 오, 무슨 그런 말씀을! 오스발은 날 닮았어요. - P39

만데르스 목사 거참 희한한 일이네.
알빙 부인 오스발이 그냥 꿈을 꾼 거예요.
(중략).
만데르스 목사 젊었을 땐 아주 쾌활한 사람이었지.. - P40

만데르스 목사 거 보세요. 네, 뭐 본인 앞에서 얘기해도 상관없겠네요. 아드님의 경우 결과가 어떻습니까? 나이 스물예닐곱이 되도록 제대로 된 가정¹⁵이 어떤 건지 경험할 기회가 없었잖아요.


15) 이후 만데르스 목사와 오스발의 대화는 단순히 물리적인 ‘집(hos)‘이 아닌 ‘가정(hjem)‘을 화두로 삼고 있다. - P42

만데르스 목사 내 말은, 독신자 가정 말고. 내가 말하는집이란, 가족이 사는 가정을 뜻하는 거지, 남편과 아내와 아이들이 사는 곳 말이야. - P43

만데르스 목사 그러니까 자넨 비합법적인 관계를 말하는 거군! 소위 방종한 결혼¹⁶ 말이야!


16) 원문 표현은 "vilde ægteskaber", 직역하면 ‘야생의 결합‘ 또는 ‘야합(野合)‘, ‘거친 결혼‘을 뜻한다. - P44

만데르스 목사 (개의치 않고) 그러고 보니 당국에서 그런 일을 묵인하는 게로군! 공공연하게 그런 일이벌어지도록 말이야! (알빙 부인에게)이러니 제가 아드님에 대해 심히 우려를 나타낸 것도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드러내 놓고 부도덕이 횡행하는 그런 집단에서... - P45

알빙 부인이 말없이 그를 쳐다본다.

만데르스 목사 (이리저리 서성이며) 스스로 방탕한 아들이라 했던가요. 그렇군요, 안타깝게도... 안타깝게도!

알빙 부인이 여전히 그를 쳐다본다. - P47

만데르스 목사 부인께선 결혼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나락으로 떨어질 뻔했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집과 가정을 버렸던 일, 남편 곁에서 도망친 일이요… 그래요, 알빙 부인, 도망쳤죠, 도망쳤어요, 그리고 그가 아무리 간청해도 한사코 돌아오길 거부하셨잖아요?¹⁸ - P49

만데르스 목사 전 전능하신 분의 뜻에 따라 쓰이는 하찮은 도구일 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부인을 의무와 순종의 길로 인도한 이후 부인의 삶이 큰 축복으로 이어지지 않았던가요? (후략). - P51

(전략).
만데르스 목사 그 결과 부인이 저 아이한테 낯선 사람이돼 버린 겁니다.
알빙 부인 아니, 아니, 그렇지 않아요!
만데르스 목사 아뇨, 그렇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돌아온 아드님이 어떻게 변해 있던가요! (후략). - P52

알빙 부인 (천천히 그리고 자제하며) 이제 말씀하신 거네요, 목사님. 그리고 내일 공식적으로 내 남편을기리는 추모 연설을 하실 거구요. 전 내일 아무말 안 할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목사님이 제게 하셨던 것처럼 저도 목사님께 말 좀 하고 싶네요. - P56

알빙 부인 하지만 이제, 만데르스,²⁰ 이제 제가 진실을말씀드릴게요. 언젠가 스스로 다짐한 적이 있었죠, 언젠가 당신 꼭 알게 될 거라고. 당신만큼은!
만데르스 목사 그 진실이라는 게 뭡니까?
알빙 부인 사실인즉, 제 남편은 평생 그랬듯이 죽는 날까지 방탕했다는 거요.


20)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이름을 거리낌 없이 부르는 걸로 보아 분명 사적으로 더욱 친밀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 P55

만데르스 목사 그보다 더 역겨운 일!
알빙 부인 난 그이가 집 밖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돌아다니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했어요. 하지만 막상 그 일이 우리 집에서 벌어지니까…만데르스 목사 아니 어떻게! 여기서! - P57

(전략).
알빙 부인 난 곧 깨달았어요, 뭘 믿어야 할지. 시종관선 하녀를 마음대로 범하셨고... 그 관계가 결과물을 낳은 거죠, 만데르스 목사님.
만데르스 목사(마치 돌처럼 굳은 듯) 이 집에서 그 모든일들이! 이 집에서! - P58

알빙 부인 어린 아들을 위해 참았죠. 그런데 그 마지막모욕을 겪은 거예요. 내가 부리던 하녀. 그때 난나 자신에게 맹세했어요. 이 일을 끝내야 한다! 그래서 집안의 통제권을 틀어쥐었죠… (후략).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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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타・・・・・・ 만약 원하던 대로 편집국에 배치됐다면 정말 우수한 기자로 성장했겠지.‘
이와타가 고작 보름도 걸리지 않아 알아낸 진상에 다다르기까지 구마이는 10년을 허비했다. - P271

그래도 구마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증거를 찾아내면 돼. 그러면 경찰도 움직일 수밖에 없겠지.‘
그것이 미궁으로 들어서는 입구였다. - P272

그로부터 몇 년 후, 흐름이 바뀌었다. 뜻밖의 곳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 P272

이와타는 미우라가 그린 그림을 보고 그 속에 담긴 뜻을 알아내고자 했다.
둘 다 실물을 보지 않고 산줄기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두 사람이 꼭 동튼 후에 살해당했다고 볼수는 없다.  - P273

그리고 나오미가 범인이라면 내내 마음에 걸렸던 의문이풀린다.
범인은 왜 그림을 현장에 남겨두었는가, 라는 근본적인 의문이다. - P274

범인은 일부러 그림을 현장에 남겨둔 것이다. ‘산줄기 그림‘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P275

새로운 실마리를 얻은 것을 계기로, 구마이는 나오미를 집중적으로 조사하기로 했다. 나오미의 내력이 드러날수록 ‘좀더 빨리 조사해야 했다고 후회했다. - P275

하기오는 그리움이 담긴 말투로 이야기해주었다.
"(전략). 나오미는 보호 본능이 강해서 자기보다 약한 존재를 지키고 싶어하는 성격이거든요."

그 이야기를 듣고 구마이의 머릿속에서 모든 것이 제자리에 착착 들어맞았다. - P276

틀림없다. 동기는 ‘아이‘다. - P277

결과적으로 미우라는 아내를 감싼 셈이다. 왜일까. - P277

곤노 나오미

죽기 전에 남편은 뭔가 말하려고 했다. - P277

모든 일을 마치고 산을 떠나기 직전, 나오미는 남편의 바지에서 그림을 발견했다. 엄청난 속도로 머리를 굴린 끝에 ‘이 그림은 여기 남겨두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 P278

이게 끝이 아니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경찰과 취재진에게 거짓말로 일관해야 한다. (중략).
내가 체포되면 다케시는 부모를 잃는다. 외톨이가 된다.  - P278

완벽하게 해냈다는 자신은 없었다. - P278

(전략). 그때 문득 남편의 그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역시 그 그림을 현장에 남겨놓길 잘했다. (중략).
다행이다. 다케시 혼자 남지 않아도 된다....그렇게 생각하다 흠칫했다.

어쩌면 남편도 같은 마음 아니었을까. - P279

남편이 죽은 후, 집은 예전보다 떠들썩해졌다.
도요카와와 남편의 제자인 가메이도 유키가 나오미와 다케시를 걱정해 자주 놀러 왔기 때문이다. 도요카와는 식료품을 가져왔고, 가메이도는 부엌일을 돕고 다케시도 돌봐주었다. - P280

어느 날 밤, 넷이서 전골 요리를 먹은 후 유키와 다케시는근처 가게에 과자를 사러 갔다. 

(중략).
도요카와가 음흉한 얼굴로 나오미의 귀에 속삭였다.
"나, 그날 밤 8부 능선에 있었어." - P280

"그만해... 곧 두 사람이 돌아올 거야…………."
"응, 그러니까 그 전에 이야기를 마무리 짓자."
"무슨 이야기를?"
"시치미 떼지 마. 실은 나도 그날 미우라를 죽이려고 했어." - P281

되는 대로 지껄이는 말은 아니었다. ‘입에 밥을 쑤셔 넣고.‘.......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도요카와는 정말로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 P281

"이만 단념해, 이 망할 년아. 학생 때 나랑 미우라를 저울에 달면서 실컷 가지고 놀다가, 미우라가 청혼하니까 대번에 나를 버린 거………… 안 잊어버렸어. 난 말이야…………. 너희 부부의 행복을 박살내는 꿈만 꾸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이 남자도 죽여버릴까…………. 나오미는 몹시 망설였다. - P282

(전략).
그 이유는 다음 날 아침에 알았다. (중략).
히죽거리던 도요카와의 얼굴이 떠올라서 소름이 끼쳤다. - P283

나오미는 마음속에서 시커먼 살의가 솟구치는 걸 느꼈다.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도요카와가 전근을 갔기 때문이다.  - P283

사건을 저지르고 3년이 지난 1995년 9월 가메이도 유키가오랜만에 집에 놀러 왔다. (중략). 같이 밥을 먹은 후, 가메이도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도요카와 씨가 지금 어디 사는지 아세요?"
(중략).
 사건이 발생한 지 3년이 지나 수사도 거의중단된 상태인데, 왜 이제 와서?
"그 사람, 우리 남편이랑 무슨 관계라도 있나?"
"미우라 선생님의 제자였대요." - P284

구마이 이사무


구마이는 침대에 누워 자기 어머니를 떠올렸다.
몸이 홀쭉했던 아버지와 달리, 나무통처럼 펑퍼짐했던 어머니는 늘 웃는 얼굴에 술을 마실 때도 호쾌했다. (중략).
과연 어머니와 나오미는 뭐가 다를까. - P285

곤노 나오미

나오미는 이와타와 도요카와를 죽일까 말까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중략).
하지만 도요카와를 살려두면 그건 그것대로 위험하다. 그는 살인 현장을 목격했다. - P286

모든 일을 마친 후, 나오미는 다케시를 데리고 도망치듯 도쿄로 이사했다. 집세가 아주 저렴한 맨션 6층에 집을 얻고, 근처 산부인과에 취직했다. - P286

1주일 후, 다케시는 나오미가 시킨 대로 ‘여자친구‘를 집에데려왔다. 그 얼굴을 보고 나오미는 다리가 풀릴 뻔했다.
"유키......?"
다케시의 여자친구는 남편의 옛 제자이자 L현에 살던 시절집에 자주 놀러 온 가메이도 유키였다. - P288

(전략). 유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랐다. 12년 만의재회였다. 유키는 서른세 살, 다케시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 P288

어릴 적부터 흠모했던 사람이 고생한다는 걸 알고 충격을 받은 다케시는 생활비에 보태라며 없는 형편에도 한 장뿐인 1만엔짜리 지폐를 주려고 했다. 하지만 유키는 돈을 받지 않았다. - P289

나오미는 복잡한 심경으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까지 유키와 다케시를 ‘터울이 진 남매처럼 여겨왔다. 그런 두 사람이 사귀다니 아무래도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본인들이 서로 좋아한다면 어쩔 수 없다. - P290

그로부터 1년 후, 두 사람은 결혼하기로 했다. - P290

그러다 유키가 갑자기 표정을 다잡더니 이렇게 말했다.
(중략).
"저・・・・・・ 미우라 선생님을…………… 좋아했어요.‘
".....죽은 내 남편 말이니?" - P291

그런 일은 있었지만, 세 사람의 새로운 생활은 순조로웠다.
유키는 전업주부로서 집안일을 완벽하게 해냈다. 덕분에나오미와 다케시는 퇴근한 후 느긋하게 쉴 수 있었다. - P292

나오미는 두 사람을 축복했다. ……………그랬을 터였다.
하지만 유키의 배가 커질수록 마음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부풀어 오르는 걸 느꼈다. - P293

나오미는 자각했다. 나는 아직 어머니이고 싶은 것이다. 유키가 없는 세상에서, 아기의 어머니가 되고 싶은 것이다. - P293

하지만 나오미가 일하는 산부인과는 보통이 아니었다. (중략). 업무 대부분을 조산사에게 떠맡기고,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병원을 돌아다나는 게 그의 일과였다. - P294

병원에서 나오미에게 참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294

2009년 9월 10일 오전 10시에 진통이 시작됐다.
유키는 오후 6시에 분만실로 들어갔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웠다.
(중략). 조산사 한 명이 소리쳤다.
"뭐야! 혈압이 왜 이렇게 높아?!" - P295

다음 날 아침, 나오미는 유키에게 캡슐 알약을 세 개 주면서 말했다.
"유키, 다케시한테 들었는데 요즘 빈혈이 심하다면서? (중략) 나도 임신했을 때 이걸 매일 먹었어. 효과를 많이 봤단다."

캡슐의 내용물은 소금이었다. - P296

급히 제왕절개를 실시해서 가까스로 아이는 무사히 태어났다. 산모는 구하지 못했다.
유키는 뇌출혈을 일으켰다. (중략). 출산 직전에 기록된 진료 차트만 봐도 유키의 혈압은 정상치였다. - P297

다케시를 구슬리기는 간단했다. 몇 살을 먹어도 나오미의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다. 주변에서 이상하게 쳐다볼 때가많았지만, 유타에게는 꼭 ‘엄마‘라고 부르게 했다. - P298

하지만 유타를 어를 때도, 밥을 먹일 때도, 가족 셋이서 공원에 놀러 갈 때도 늘 죄책감이 나오미를 따라다녔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목을 부러뜨렸을 때, 나오미는 조금도자책감에 시달리지 않았다. - P298

유키에게 소금을 먹였을 때, 어떤 마음이었는가…………나오미는 깨달았다. 이번만큼은………… 자기 자신을 위한 살인이었다.
‘영원히 엄마로 있고 싶다‘, ‘엄마라는 호칭을 잃고 싶지 않다‘ ・・・・・・ 단지 그러한 욕심 때문에 그 착한 아이를, 다케시를 사랑해준 여자를 죽이고 말았다. - P299

그날은 난데없이 찾아왔다.
(중략). 다케시는 자기 방에서 목을 맨 상태로 발견됐다. - P299

다케시가 운영하던 블로그에 자살하기 전날 올린 글이었다.

(중략).

그것은 나오미에게 보낸 메시지였다. - P300

시체에서 아기를 끄집어내는 할머니 그림. 바로 나오미 그자체였다.
유키는 눈치챘던 것이다. 나오미의 살의를 언제부터였을까. - P300

하지만 나오미가 택한 방식은 너무 간접적이었다. ‘캡슐 알약에 소금을 넣어 먹이는 행위는 범죄가 아니다. 발각된다 한들 얼마든지 발뺌할 수 있다. - P301

‘당신을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 당연하다. 사랑하는아내를 빼앗겼으니까.
‘그래도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하지만 다케시는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만큼 다케시에게 나오미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상반되는 두 감정에 괴로워하던 끝에 다케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P302

구마이 이사무

(중략).
하지만 외상이 점점 나아가는 한편으로, 몸은 시시각각 좀 먹히고 있다. - P303

구마이는 그날 현경으로 가서 한 남자를 만났다.
구라타 게이조……………. 기자 시절에 제일 사이좋았던 형사다.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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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이 보름밖에 남지 않았을 즈음,       가족의 골칫덩이 프랭크가 직접 행차했다. 최근에 일이 잘 풀렸다고 했다. 손가락마다 - P58

줄리아는자기도 모르게 예비 신랑보다는 형에 대해점점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형제는 서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 P58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아마도 필연이었을 것이다 - P58

그날 커스티도 집에 와 있었던가? 결혼식 준비를 돕기 위해 방문했을 것이다. 프랭크가 도착한 날에 말이다. - P59

줄리아의 웃음은 프랭크의 열의를 꺾지못했다. 프랭크는 섬세히 유혹하는 단계 따위로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았다. 매끄러워 보이던 겉치장을 던져버리고 거친 본능을드러냈다. - P60

다음 날 프랭크는 떠났다. 방콕인지이스터섬인지, 어떤 빚쟁이한테도 쫓기지않아도 되는 장소로 떠나버렸다고 했다. - P60

지금은? 지금은 집도 새로 꾸미고 로리와새출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도, 우연찮게 모든 상황이 프랭크를 생각나게하고 있었다. - P61

그리고 형제가 나란히 찍은 사진들이나왔다. 유아 시절 눈을 크게 뜬 형제, 학창시절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형제. 체육 시간에 시범을 보이거나 학예회 무대에 오른 순간도담겨 있었다. - P62

줄리아는 한참 만에 그 사진을 치웠다.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그녀는 빨개진 얼굴로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P62

줄리아는 자신의 마음이 처음으로 떨린순간이 언제인지 선명하게 기억했다. 신혼침대에 누워, 프랭크가 그녀의 목에 키스를 퍼붓던 그 순간이었다. - P63

줄리아는 이따금 블라인드가 굳게 내려간 어두운 방으로 올라갔다. - P63

그렇게 머물러 있다 보면 이상한 죄책감이들었다. 로리와 함께할 때는 그 방과 거리를두려고 애썼다. 늘 그러지는 못했다. 때로 줄리아의 두 발이 무의식적으로 그 방으로이끌기도 했다. - P64

"쓸모없어."
줄리아는 아래층에서 일하는 남자를떠올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녀는 로리를 사랑하지 않았다. 로리가 그녀를 사랑하지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 P65

얼룩진 맨바닥이 핏방울로 덮였다.
"어떻게 된 거야?"
줄리아가 물었다.
"어떻게 된 것 같은데?"
로리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다쳤잖아!"
로리의 얼굴과 목이 창틀 석고보드처럼 하얗게 질렸다. - P66

"병원에 가야겠네."
줄리아가 말했다.
"상처 좀 가려줄 수 있어?"
로리가 물었다. 이제는 목소리에서 분노가 빠져 있었다. - P67

줄리아가 안심시켰다.
"괜찮을 거야."
욕실 찬장에 지혈대로 쓸 만한 것이 보이지않아서, 로리의 서랍을 뒤져 깨끗한 손수건 몇장을 꺼낸 뒤 방으로 돌아왔다. 로리는 이제 벽에 기댄 채 땀을 흘리느라 피부가번들거렸다 - P68

병원은 두 사람을 가벼운 찰과상을 입은환자들과 함께 줄 세웠고, 한 시간쯤 기다리자의사가 상처를 봉합해주었다. - P68

줄리아는 6센티미터짜리 상처 따위로죽지는 않을 거라고 조용히 타이르며, 로리의 손바닥을 손수건으로 감싼 뒤 나머지 손수건을 그 위에 묶어 고정했다. - P68

"위층 음습한 방 바닥, 당신이 닦은거야?"
다음 날 줄리아가 로리에게 물었다. 그들은처음 이사 온 일요일 이후로 그 장소를 ‘음습한 방‘이라고 불렀다. - P69

줄리아가 다시 말했다.
"바닥에 피가 묻어 있었잖아. 당신이닦았어?"
로리가 고개를 저었다.
(중략).
"나도 안 치웠는데."
줄리아가 말했다. - P70

반면 줄리아는 머잖아 이 사건을 이해하게 되리라는 기이한 직감을 느꼈다. - P70



커스티는 파티가 싫었다. - P73

로리는 커스티가 꼭 집들이에 와야 한다고 고집했다. 친한 친구 한두 명만 초대할 거라고 약속하면서 커스티는 거절할 경우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너무 잘 알았기에 초대에응했다. - P74

집들이는 생각만큼 괴로운 자리는아니었다. 손님은 아홉 명이 전부였다. 모두 커스터가 어렴풋하게나마 알던 사람이라 부담이 덜했다. - P74

11시 30분이 되자 커스티는 기분 좋게 취해서 무슨 말만 들어도 웃겨서 몸부림치고 키득거렸다. - P75

흠결 없이 아름다운 사람은 늘 흠결 없는행복을 누리지 않던가? 커스티는 언제나 이렇게 생각해왔다. - P75

다음 순간 로리가 일어나 고릴라와 예수회 수사에 관한 농담을던졌다. - P76

저속한 농담을 지껄이고, 초라한 가식을 떠는 저 자식들을 줄리아는그들의 장단에 맞춰 주느라 몇 시간이나낭비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 P76

그때, 방 저편에서 소리가 들렸다.
벽판 뒤를 달리는 바퀴벌레 소리보다도크지 않은 소리였다. 몇 초 뒤, 소리는 멈췄다. 줄리아는 숨을 참았다. 다시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그 소리가 어떤 규칙을 따르는 것같았다. 원시적인 암호처럼. - P77

줄리아는 침을 삼키고 어둠 속에 말을 걸었다.
"소리 들려." - P77

줄리아가 말했다. 왜 이렇게 말했는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 P78

그 순간 줄리아는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고는 어둠과 침묵 속을 헤매었다.
그때 무언가가 그녀의 앞에서 움직였다.
줄리아는 마음속 눈이 일으킨 착시로 여겼다. - P78

벽면이 환해졌다.
아니, 벽 뒤의 무언가가 차가운 광휘로타올랐다. 그 빛이 단단한 벽돌을 실체 없는 물질처럼 투과했다. - P79

점점 더 정교하게 미끄러지는 파편사이에서 줄리아는 급작스레 움직이는 존재를보았다. (아니, 보았다고 생각한 걸까? 그제야줄리아는 이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순간부터 숨을 참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 P79

내면에서 공황이 밀려오며 몸이 떨렸다.
마술 같은 현상은 이제 사그라들었다.  - P80

벽이 펼쳐지는 놀라운 광경은 이제 완전히멈추었다. 벽돌 사이에서 꿈틀거리는 물체가나타났다. 그림자라고 할 만큼 불규칙하지만,
지나치게 실체감이 있는 무언가였다.
줄리아는 그것이 사람임을, 아니, 사람이었음을 알아보았다. - P80

줄리아는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그 존재는 줄리아에 비해 훨씬 약한 상태였다.  - P81

 줄리아의 몸이 죽은 공기를 내뿜고 살아 있는 공기를 빨아들였다. 산소에 굶주렸던 뇌가 황홀해했다.
그 순간 그 존재가 말을 했다. - P81

그 순간 그 존재가 말을 했다.
(중략).
"줄리아." - P81

커스티는 잔을 내려놓고 일어서다비틀거렸다.
"어디 가?"
네빌이 물었다.
"어디 갈 것 같은데?"
커스티는 그렇게 대답했다.  - P82

오늘 밤, 그녀는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화장실을 찾아, 아파 오던 방광을 풀어준 뒤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리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 P83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커스티는 서서히불안해졌다.
"왜 이러실까?"
커스티는 불안을 감추기 위해 익살스럽게굴었다.
"누구실까요?"
"나야."
줄리아였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목이 메인듯 울먹이는 것 같았다. - P84

줄리아가 말을 이었다.
"넌 아래층에서 재밌는 시간을 보낸 것같네."
"우리 때문에 못 잤어?"
"세상에, 아니야."
목소리가 서둘러 튀어나왔다. - P85

줄리아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날 밤도그 이후의 어떤 밤에도.
그녀가 음습한 방에서 보고 듣고, 감각한것은 남은 평생 동안 편안한 수면을 몰아낼만큼 강렬했다. 줄리아는 그렇게 느꼈다. - P86

벽이 다시 닫히기 시작하고 비참한 모습이벽돌과 석고 뒤로 가려지기 전에 그 존재가 한말은 "줄리아"와 "프랭크야."였고,
마지막으로 "피"라는 외마디 단어만 외쳤을뿐이다.
그런 다음 그 존재는 완전히 사라졌고, - P86

물론 현실은 방을 완전히 장악하지는못했다. 프랭크가 여전히 이곳에, 음습한 방의현실 너머에 있을 테니까. - P87

프랭크는 죽은걸까? 그래서일까?
지난여름, 빈 방에서 죽어 이제는 퇴마의식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 P87

로리가 음습한 방 바닥에 피를 흘렸고,
핏자국은 얼마 뒤 사라졌다. 어째서인지 프랭크의 유령은 (정말 유령이라면) 피를먹었다. - P88

줄리아는 프랭크에게 안겼을 때를, 거칠고단단했던 그의 품을 고집스럽게 압박해 오던힘을 생각했다. 그의 힘을 다시 느낄 수있다면, 무엇을 아끼겠는가? - P88

이어진 며칠 동안, 줄리아는 미소를되찾았다. 로리는 줄리아의 기분 변화를 새로운 집에 적응해 행복해하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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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5년간 쓴 짤막한 글들을 다시 보았다.
그간 내게 주어진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자명하다. 글을 쓸 당시에도 그렇게 느꼈지만 다 모아놓고 보니 창피하다는 느낌이 특히 강하다. - P5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칼럼을 쓰기로 했을까궁금할 것이다. 한겨레에서 처음 친절한 제안을 해주셨을 때 나도 당연히 망설였다.  - P5

 나도 약간 기여하는 바가 있었다면, 세상의 사물을 바라보는 수학자의 시각을 설명하려는의도가 섞여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런데 그게 정녕 어떤 기여인지는 의문이다. - P7

또 하나, 내 글의 결점을 그동안 많은 사람이 지적해주었다. 대체로 결론이 없다는 것이다. - P7

어차피 하나의 시도일 뿐이기 때문에 결론이없어도 좋다는 종류의 변명을 나 자신에게 해왔다. 어쨌든 평소에도 가끔 ‘이런 주제로 글을 써보면어떨까‘ 생각하며 아이디어를 짧게 기록해놓는 습관이 있었다.  - P8

글을 쓰는 일은 당연히 누구에게나 좋은 일이다. - P8

이런 ‘시도들의 집합‘이 오래 지속되고 또 책으로 나오기까지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 P9

독자도 이 책의 존재에 감사할 이유가 있다.
나 정도의 미숙한 수필가가 이렇게 책도 낼 수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이 자신감을 얻을 수 있기때문이다.


2025년 9월
김민형 - P9

한국 수학의
한 계단


여러 학술 공동체 중에서도 수학자들은 특히 강한 글로벌 연대 의식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자주 받는다. - P39

이런 이유 때문인지 독일 베를린에 사무국을두고 있는 국제수학연맹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수학 연구자들의 존경을 받는 단체의 위치를 지키고 있고 세계수학 문화의 형성 과정에 강력하고 다양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 P39

약간 특이하게 국제수학연맹은 회원을 다섯 등급으로 분류한다. 등급은 수학 연구 역량과 세계 수학계에 대한 기여도를 기준으로 나뉘는데, 등급에 따라 전체 회의에서 투표할 때 가중치가 부여된다.  - P40

사실 우리나라 수학계의 전반적인 현황을 아는사람에게는 이번 승격이 별로 놀랍지 않다. - P40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인 필즈상 수상자가 나오기를 상당히 기대하는 것 같다. (중략).
그에 비해 수학연맹의 국가 등급 상승은 경제전체의 균형 잡힌 성장을 보여주는 지표와 비교할 수 있다. - P41

물론 상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의 관점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경제적 여건도 어렵고수학연맹의 국가 등급도 1등급으로 최하위인 베트남 출신의 응오바오쩌우가 2010년에 필즈상을 받은 일은 큰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중략). 그는 현재 미국 시카고대학교의 석좌교수다.
베트남 수학연구소장도 겸임하고 있어서 상당 기간을베트남에서 지내며 베트남 사회 교육과 학술 활동의 질적인 향상을 위해 애쓰는 중이다. - P49

그러나 나는 한국 수학 커뮤니티의 전체적인 성숙도에 훨씬 관심이 많다. (후략).

2022. 2.9.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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