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예요. 그 무렵에당신이 이번 일을 계획했을 거라고 짐작했으니까요. 이번 일이라는 건 물론 히다카 구니히코 씨를 살해한 사건입니다. - P364

왜냐하면 이 영상은 당신이 만들어낸 거잖아요. 당신이 연출하고 당신이 촬영했죠. 감독 겸 주연인 셈이군요. 그러니 지겹도록 보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밖에요. - P364

예, 그러니까 그것을 증명하려는 거예요. 이 사진을 사용해서 말이죠. 하지만 별로 대단한 건 아니에요. 내가 이 사진을통해 말하고 싶은 건 단 한 가지입니다. 이 비디오 영상은 귀퉁이에 표시된 7년 전의 이 날짜에 촬영된 게 아니라는 것이죠. - P365

아,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습니다. 7년 동안 나무가 많이 자랐다지만 그건 빛이 들어오는 상태 등에 따라서달라지기 때문에 단순히 그림자만 비교해서는 그것이 최근의 벚나무인지 오래전의 벚나무인지 알기는 어렵겠지요. - P365

아직 알아듣지 못한 것 같으니까 내가 답을 알려드리죠. 만일 이 영상이 정말로 7년 전의 정원을 촬영한 것이라면 이곳에는 나무 그림자가 두 개가 있어야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간단한 거예요. 예, 그렇습니다. 7년 전에는 히다카 씨의정원에 벚나무가 두 그루였어요. 사이좋게 나란히 서 있었죠.
반론이 있으십니까? - P366

 왜냐하면 히다카 구니히코 씨는 바깥에 술을 마시러 갈 때는 열쇠를 가져가지 않고 현관 앞 우산대 뒤에 감춰두곤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두어번 바깥에서 열쇠를 잃어버린 뒤로 그렇게 하게 되었답니다. 그걸 노노구치 씨가 알고 있었다면 굳이 열쇠를 복제할 필요도 없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리고 노노구치 씨라면 열쇠를 둔 장소를 알고 있었을 거라고리에 씨는 증언했어요. - P367

이건 틀림없이 위조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부러 수없이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보고, 히다카가의 오래된 정원이 찍힌 몇 장 안 되는 사진을 어렵사리 찾아내면서까지 그 모순점을 발견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째서 이 비디오 테이프는틀림없는 위조품이라고 생각했는가. 그건 다른 증거물에 대한 의심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 P367

이번 사건에서 노노구치 씨를 체포하고 또 고백의 글까지읽고 난 뒤에도 나는 아무래도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의문점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설명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과 이해가 된다는 것은 달라요. 노노구치 씨, 당신의 고백에서는 뭔가 미묘한어긋남이 느껴졌어요. 그 미묘한 어긋남 때문에 당신이 고백한 내용을 나는 아무래도 진실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 P368

노노구치 씨, 오른손을 좀 보여주시죠.
왜 그러십니까, 오른손입니다. 정 뭐하시면 오른손 가운뎃손가락만이라도 좋습니다.
그 가운뎃손가락 끝, 그건 펜으로 글씨를 써서 생긴 굳은살이지요? 정말 큼직하게 굳은살이 박이셨군요. - P368

그렇다면 뭐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나한테는 펜으로 글을 써서 생긴 굳은살로 보였다는 점이니까요. 내 눈에 그렇게 보였기 때문에 나는 다시 이 사건을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워드프로세서만 쓰는 노노구치 씨의 손가락에 어째서 펜으로 인한 굳은살이 생겼는가, 그런 것이 생길 만큼 엄청난 양의 뭔가를 손으로 일일이 써야 했는가, 하고 고민했습니다. - P369

그렇습니다. 나는 다음과 같이 추리했어요. 그 엄청난 양의 작품은 옛날에 쓴 것이 아니라 최근에 노노구치 씨가 급하게 써놓은 게 아닐까………. - P369

쓰지무라 헤이키치 씨라는 분은 바로 그때의 폭죽 장인입니다.
예, 그건 나도 알아요. 이름을 잊어버렸다고 하시는데, 그건그리 큰 문제가 아니죠. 아마 히다카 구니히코 씨에게 물어봤어도 그 노인의 이름은 잊었다고 하지 않았을까요? - P370

당신과 히다카씨의 중학교 때 앨범을 보여드렸는데, 그때 놀러왔던 아이의 얼굴을 한 번 보자마자 금세 이아이라고 집어내셨어요.
바로 히다카 구니히코 씨의 얼굴을요.
노노구치 씨, 당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아이라고 하셨고요. - P371

이미 다 아시겠지요? 나는 고민 끝에 그 비디오테이프를 의심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당신이 살인미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건 그 비디오테이프뿐이니까요. 그때 사용했다는 나이프에는 아무런 증거 능력도 없습니다. 단순히 당신의 지문이 찍혀 있다는 것뿐이니까요. - P371

그러면 당신이 살인미수의 계기였다고 고백했던 히다카 하쓰미 씨와 당신과의 관계는 어떻게 된 것인가. 당신이 말한 그런 불륜 관계가 정말로 있었는가.
여기서 잠깐 복습을 좀 해보죠. 당신과 히다카 하쓰미 씨의 관계를 암시해주는 증거들은 어떤 것이었지요? - P372

 목걸이는 당신이 하쓰미 씨에게 선물하려고 했다는 당신 스스로의 증언뿐이었어요. 그러면 에이프런은 어떤가. 그건 아무래도 하쓰미 씨의 물건이라는 게 틀림이 없습니다. - P372

그날, 당신은 에이프런 외에도 또 한 가지를 더 훔쳐냈을 가능성이 있어요. 바로 사진입니다. 당신이 훔쳐내야 할 사진의조건은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겁니다. 우선 하쓰미씨 혼자 찍은사진, 같은 장소에 구니히코 씨는 나오지 않는 사진, 그리고 또한 가지, 가능하다면 그곳에서 찍은 풍경 사진이 한 장 있으면 좋겠다. - P373

예, 물론 당신이 훔쳤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훔쳐내는 건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이상, 당신이 고백한 하쓰미 씨와의 불륜 관계에 대해서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 P373

그리고 『얼음의 문』에 대해서는 당신이 그 전개를 열심히 생각해내야 했을 겁니다. 그 아이디어 메모를 반드시 형사의 눈에 띄도록 해야 하고 또한 히다카 씨를 살해하던 날의 알리바이 조작용으로 다음 연재분을 당신이 직접 써야 했기 때문입니다. - P375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작업이 남았습니다. 히다카 부부는 캐나다에 보낼 짐을 일주일 동안 꾸렸다고 합니다. 그 일주일 사이에 당신이 딱 한 차례 그 집에 왔었다고 하던데요. 당신이 히다카 씨 집을 찾아간 목적은 두 가지 물건을 이삿짐 속에 슬쩍 넣어두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 P375

아뇨, 그건 결코 충동적인 범행이 아니었어요.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참으로 무섭고도 치밀한 사전 계획에 따른 범행이었지요. - P376

그런데 당신의 범죄 계획은 그것과는 완전히 목적이 달랐습니다. 당신은 체포되는 것을 전혀 피하지 않았어요. 아니, 그러기는커녕 모든 계획이 자신이 체포될 것을 전제로 해서 세워졌던 거예요.
간단히 말하자면 이런 얘기입니다. 노노구치씨, 당신은 오랜 시간과 수고를 들여 범죄의 동기를 만들어냈어요. 히다카 구니히코 씨를 살해하기에 적합한 동기를 말이죠. - P376

비디오테이프도 그렇습니다. 만일 경찰이 일찍부터 의심을품었다면 그 테이프가 위조품이라는 건 훨씬 더 일찌감치 알아냈을 거예요. 하지만 수사진은 전혀 의심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하지요. 그 비디오는 당신의 범행 동기를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인데, 설마 그런 증거를 범인인 당신 스스로 조작했으리라고 어느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 P377

유감스럽게도 우리 경찰은 피의자에게 유리한 증거에는엄격하지만, 불리한 증거 쪽은 허술하게 지나쳐버리는 경향이있습니다. 당신은 그런 약점을 기막히게 뚫고 들어왔어요. - P377

당신이 특히 교묘했던 것안 그 가짜 동기를 직접 나서서 밝힌 게 아니라 수사진 쪽에서 어렵게 알아내게 하는 식으로 유도했던 점입니다. 만일 그 동기를 처음부터 술술 불었더라면아무리 둔감한 형사들이라도 뭔가 이질감을 느꼈을 거예요. - P378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쓰미 씨의 사진을 너무 늦게 찾아내는 바람에 당신은 내심 초조했을 거예요. 언젠가 내게 말했었지요?
그렇게 집 안을 다 휘젓지 마라, 남에게서 맡아둔 중요한 책이있다. 그 말을 힌트 삼아 우리는 국어사전 속에서 히다카 하쓰미 씨의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 P378

세 번째 덫에서도 당신의 교묘한 유도 작전이 있었습니다.
사건 후에 당신은 히다카 리에 씨에게 구니히코 씨의 비디오 테이프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어요. 리에씨가 캐나다로 보낸 이삿짐에 있다고 대답하자 당신은 그 이삿짐이 돌아오면 곧바로 알려달라고 부탁했었죠. - P378

그러고 보니 사건이 일어났던 날 밤에 거의 10년 만에 나를 다시 만난 당신은 히다카 구니히코 씨의 소설 중에서도 가장 먼저 『야광충』을 추천했었지요? 그것 역시 앞을 내다본 유도 작전이었던 것이죠. 참 대단하십니다. - P379

문진이 없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그럴 경우를 대비하여 일단 스스로 흉기를 준비해갔습니다. 그것이 바로 샴페인 돔페리뇽입니다. 혹시라도 문진이 없을 경우, 그 술병을 흉기로 쓸 생각이었던 거예요. - P381

그럴 경우에는, 이사를 축하할 겸 가져갔던 샴페인을 졸지에 흉기로 쓰고 말았다는 식으로 역시 제삼자에게 충동적인 범행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었을 거예요. - P381

하지만 당신은 체포되더라도 진짜 동기는 끝까지 감춰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당신에게는 살인범으로 체포되는 것보다 진짜 동기가 모두에게 알려지는 게 훨씬 더 무서운 일이었으니까요. - P383

이 안에 어떤 데이터가 들어 있는지, 몹시 마음에 걸리실 것같군요. 사실 이 CD 안에는 당신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찾아다녔던 그 내용이 들어 있으니까요. - P384

당신은 그 사진에서 내가 무엇을 봤는지 알고 있겠지요? 나도 막상 사진을 보고 확인하기 전부터 이미 짐작은 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여학생이 꼼짝 못 하도록 붙잡고 후지오 마사야가 성폭행하도록 도운 사람은 노노구치 씨, 바로 당신이었어요. - P385

이제 와서 엉뚱하게 히다카 씨가 그 사진을 구실로 당신을 협박했다는 둥의 거짓말은 하지 말아주시지요. 그런 식으로 대충 둘러대는 거짓말은 금세 들통이 나고, 그보다 이번처럼 완벽한 범죄를 구축해온 당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에요. - P387

나는 그 기록 중에서 이번 사건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부분에 의식을 빼앗겼던 겁니다. 아니, 얼핏 아무것도 아닌 듯한 그 글의 한 부분에 깊은 의미가 담긴 트럭이 숨어 있었던거예요. - P390

당신은 농약으로 경단을 만들고, 히다카 부부가 집에 없는때를 노려 히다카가의 정원에 뿌렸습니다. 그렇게 그 고양이를 죽였어요. 왜 그런 짓을 했는가. 이유는 한 가지, 아까 내가말했던 히다카 씨의 나쁜 이미지를 조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 P391

당신은 거짓으로 점철된 수기를 통해 히다카 구니히코라는 인물의 잔혹성을 묘사해서 일찌감치 독자, 즉 우리에게 나쁜이미지를 심어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준비한 에피소드가 그 ‘고양이 죽이기‘였던 거예요. - P392

즉 당신의 궁극적인 목적은 히다카 씨의 인간성을 깎아내리는 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번 사건의 전체상이 뚜렷하게 잡히지요. - P393

그런 악의는 대체 어디에서 나온 걸까요. 나는 당신과 히다카 씨에 대해 나름대로 상세하게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내가 알아낸 것은 히다카 씨가 당신에게 미움을 살 만한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훌륭한 학생이었고, 당신에게는 오히려 은인이라고 해도 좋을 사람이었어요. 당신이 후지오 마사야와 한패가 되어 그를 심하게 괴롭힌 시절이 있었는데도 그는 당신에게 큰 도움을 주었어요. - P395

하지만 당신의 길은 험난하기만 했습니다. 운이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재능 때문인지, 그건 나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당신은 작가로서 별반 성공하지 못한 채 건강까지 나빠지고 말았습니다. - P396

자, 그러면 수술이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빌겠습니다. 어떻든 건강이 회복되어 살아 있어주셨으면 합니다.
법정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 P397

주의) 본 해설에는 작품의 중요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桐野夏生(기리노 나쓰오), 작가 - P399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돌연 독자를 전율의 세계로 몰아넣는다. 이 책은 범인을 먼저 밝히고 시작하는 이른바 범인찾기가 아니라 동기 찾기라는 신비한 여행으로 독자를 데려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 P403

다만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사건그 자체뿐만이 아니라 이 소설 또한 복잡한 양상을 겹겹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메타픽션인가 했는데 전혀 아니었고, 작가의 솔직한 마음을 토로한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건 거짓말이었고, 그런가 하면 거짓인가 싶더니 정직한 얘기이기도 하고, 도무지 꼬리를 잡기가 쉽지 않다. - P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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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가상 재화가 돈이 된다는 점을 노린 해킹이나 사기문제도 종종 발생한다. 가장 흔한 경우가 계정 도용이다. 다른사람의 게임 계정 비밀번호를 몰래 탈취한 후 해당 캐릭터가 가진 재화를 다른 캐릭터에게 모조리 아이템 현금 거래를 통해 넘기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해킹당한 계정도 피해를 볼 뿐만 아니라 장물을 구매한 사용자 역시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본의아니게 피해를 본다. - P153

이런 구조의 네트워크가 갖는 장점은 다수를 형성하는원이 제거되더라도 전체 조직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잔챙이가 몇 명 잡힌다고 해도 조직 전체가 받는 피해는 미미했다. 반면 이런 구조의 단점은 네트워크의 중심이되는 소수가 제거되면 네트워크 전체가 해체된다는 것이다. - P160

어쨌든 가상 세계의 불법 조직이 현실 세계의 불법 조직과 유사한 구조임을 실제 데이터를 통해 보여줬다는 점에서 키건의 연구는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게임과 현실은 네트워크 측면에서도 서로 닮아 있었다. 어쩌면 작업장 조직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현실 세계 범죄 조직의 관리 방식을 참고한 것인지도모르겠다. - P161

내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작업장 조직은 대체로 <그림 13>과 같은 네트워크 구조를 갖고 있었다. 즉, 다수의 일꾼 캐릭터가 획득한 가상 재화를 소수의 캐릭터에게 전달해 관리하는방식이다. 이는 키건 교수나 권혁민 연구원이 분석한 바와 일치하는 결과다. - P162

더 나아가 나는 이런 특징을 활용해 전체적으로 아이템 현금 거래가 얼마나 발생하는지 규모를 추정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어떤 두 캐릭터가 서로 가상 재화를 주고받는 기록은 게임에 남는 로그를 이용해 정확히 알 수 있지만, 이 거래의 목적이아이템 현금 거래인지 아니면 단순히 두 캐릭터간에 친화의목적으로 주고받는 것인지 의도를 파악하기는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아이템 현금 거래에서는 가상 세계의 거래와 현실 세계의 거래가 동시에 이뤄지는데, 이 두 거래를 동시에 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 P165

이때 한 캐릭터는 작업장 조직의 네트워크 구조를 갖고 있고 다른 캐릭터는 일반적인 캐릭터들이 형성하는 척도 없는 네트워크 구조를 갖고 있다면, 이 거래를 작업장 조직원이 일반 사용자에게 가상 재화를 판매하는 목적의 거래라고추정하는 것이다. 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나는 게임에서 발생한 전체 가상 재화의 거래 기록에 대해 네트워크 분석을 수행했고, 그 결과 아이템 현금 거래 규모를 상당히 높은 정확도로 파악할 수 있었다. - P166

이보다 거래량이 더 감소한 시점이 있는데, 그래프에서 왼쪽에 있는 동그라미다. 이 기간에는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2014년 4월 16일이 포함되어 있다. 다소 무리한 추측일 수도있지만, 하필 그 전후 기간에 비해 유독 큰 폭의 하락이 있어서이 그래프를 처음 봤을 때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우스갯소리로 <리니지> 사용자들은 전 세계가 열광하는 월드컵기간에도 게임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리니지>사용자들도 아이템 현금 거래를 중지할 만큼 그날은 우리에게충격을 준 사건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은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한 경험이었다. - P168

나는 계정들의 유료 아이템 구매명세와 이렇게 구매한 아이템을 다른 캐릭터에게 넘겨주는 기록을 추출한 후 앞서 소개한 네트워크 분석 기법을 이용해 이동 흐름을 분석했다. 그랬더니 이들이 구매한 아이템을 몇 단게에 걸쳐 소수의 몇몇 계정에 넘겨주고, 이렇게 아이템을 취합한 계정은 다시 여러 계정에 아이템 현금 거래를 통해 판매한 정황이 발견되었다. 전자금융사기로 획득한 돈을 가상 세계를 통해 세탁한 것이다. <그림 17>은 이를 도식화한 자료다. - P169

그래서 이들이 돈세탁의 도구로 최근 활용하는 것이 가상재화다. 현재의 수사 제도로는 현실 세계에서 가상 재화를 구매하고 나면 이후 거래 내용을 추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상 세계의 데이터를 관리하는 게임 회사 또한 현실세계의 재화 흐름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알 수 없다. 여기 소개한 사례처럼 특별한 사건이 발생해 사이버수사대의 공식 요청을 받을 때 단편적인 분석이 진행되지만, 아직 체계적인 연계가 이뤄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런 허점을 노린 금융 범죄가 발생하는 것이다. - P170

아이템 현금 거래는 탈세의 수단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
2020년《전자신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일부 자산관리 업제에서 증여 및 상속의 수단으로 아이템 현금 거래를 활용하는 방법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세법에 따르면 부모가 자식에게 증여나 상속을 할 때는 최대 50%의 세금이 부과된다. 하지만 아이템을 구매하거나 판매할 때는 이보다 훨씬 낮은 비율의 부가가치세 및 소득세만 부과된다. 가령 아이템현금 거래를 하면 6개월 단위 매출에 따라 판매자에게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세금을 매긴다.

•600만 원 이하 : 면제
•600-1,200만 원 : 사업자 등록 및 매출 신고는 필요하지만 부과되는 세금은 없음
•1,200만 원 이상 : 매출의 10% 부가가치세 부과, 소듯 금액에 따른 소득세 별도 납부 - P171

아무래도 가상 세계 재화의 양도나 증여를 제도적으로 인정하면 아이템에 대한 재산권을 인정하는 셈인데, 이럴 때 생길수 있는 문제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게임회사에서 게임을 업데이트했는데 이 때문에 특정 아이템의 가치가 하락하면이 아이템을 보유한 사람은 재산상 손실을 볼 것이고,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게임 회사에 소송을 걸지도 모른다. - P172

지금까지 언급한 사례들은 현실 세계의 범죄와 직간접으로 연관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가상 세계 안에서 발생한 범죄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이를테면 가상 세계 속 캐릭터에게 모욕을 가하거나 원치 않은 폭력을 행사한 캐릭터가 있다면 이에대해 어떤 처분을 해야 할 것인가?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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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핑크맨‘이 생각난다.
작 중에 악역으로 보이는 인물 중 하나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그 애에게 최대한 자유를 줄 거에요. 그래야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을테니까.˝
그 작품은 용두사미였다. 좀 더 쉬고 했으면, 정말 좋았을 것이라 믿는다.






그 나이프가 과연 증거로 통할까, 하고 나는 의아했습니다.
분명 내 지문이 찍혀 있기는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꿰뚫어본 것처럼 히다카는 말했습니다.
"잊지 마. 증거는 이것뿐만이 아니야. 또한가지, 절대로 변명할 수 없는 증거가 있어. 나중에 너한테도 보여주지." - P239

그때만은 하쓰미 씨도 나에게 건넬 위로의 말이 떠오르지않는 것 같았습니다. 히다카의 눈을 피해 이따금 전화를 해줬지만 어색한 침묵 이외에 전화선에 실리는 대화라고는 서글플만큼 음울하고 무의미한 말뿐이었습니다. - P242

우스꽝스럽게도 『타오르지 않는 불꽃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책에 대해 잡지며 신문 등에서 다뤄지는 것을 볼 때마다 내 가슴속은 쥐어뜯기는 듯한 심정이었습니다. 작품이 칭찬을 받는 것 자체는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는 현실로 돌아오고 맙니다. 절찬을 받는 건 내 작품이 아니라 히다카의 작품인 것입니다. - P243

나도 모르게 등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히다카의 입에서 다음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우연히 네 소설과 비슷하게 나온 것에 대해 일단 양해를 구하는 게 좋겠지. 제목이 뭐였더라, 네가 준 그 소설? 아, 그래,
「둥근 불꽃」………. 어때, 그런 제목이었지?"
- P245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긴 단순히 우연이라고 할 수 없는 부분도 있기는 해. 왜냐하면 내가 『타오르지 않는 불꽃』을 집필하던 중에 네 작품을 읽는 바람에 약간 그 영향을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으니까. 저절로 잠재의식에 심어져서 그게 내 소설에 드러났는지도 모르겠어. 작곡가의 경우에도 그런 일이 자주 있다더라. 스스로 의식한 적이 없는데도 결과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곡과 비슷한 것을 만들어내는 거지." - P246

그가 하고 싶다는 말이 바로 이것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섣불리 시끄럽게 굴지 않은 건 잘한 짓이다. 앞으로도 이건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어라, 그러면 나 역시 살인미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주마. - P246

"또다시 도작을 하겠다고?" 나는 말했습니다.
히다카가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도작이라니, 네가 그 단어를 쓸 줄은 몰랐는데."
"여기는 내 집이고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으니 괜찮잖아?
네가 아무리 빙빙 돌려서 말해도 도작은 도작이야." - P247

"그렇게 시비 걸듯이 말하지 마. 그날 밤의 일은 내가 그냥넘어가주겠다고 했잖아. 내가 말하는 거래는 좀 더 긍정적인이야기야."
이런 일에 긍정적이고 부정적이고가 어디 있는가 하고 생각했지만, 우선 나는 말없이 그의 입만 쳐다보았습니다. - P248

"타오르지 않는 불꽃이 큰 인기를 얻으니까 너는 당연히내용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겠지. 물론 그건 부정하지않겠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돼. 좀 더 극적인 예를 들어볼까? 그 책을 출판한 게 내가 아니라 너였다면 어땠을까? 작가이름으로 히다카가 아니라 노노구치라고 인쇄되었다면 어땠겠느냐고. 너는 어떻게 생각해?" - P249

"그걸 알고 있다면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도 알아듣겠지?
말하자면 이런 거야. 앞으로 너는 히다카 구니히코라는 작가가 되어야 해."
"뭐라고?"
"그렇게 놀라지 마라,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물론 나 역시히다카 구니히코야. 이런 경우, 히다카 구니히코는 특정인의이름이 아니라 책을 팔기 위한 상표 정도로 생각하면 돼." - P250

"아, 더 들어봐. 나를 위해 작품을 제공해준다면 그게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을 때, 인세의 4분의 1은 너한테 가도록 하겠어. 어때, 그래도 손해나는 이야기야?"
"4분의 1이라고? 실제로 글을 쓴 사람이 반도 못 받는다는거야? 그건 참 가상한 조건이구나."
"그럼 하나만 물어보자. 네 이름으로 책을 내면 얼마나 팔릴거 같아? 히다카 구니히코의 이름으로 냈을 때의 4분의 1보다많이 팔릴 줄 알아?" - P251

가가 형사라면 이미 알겠지요. 모니터 화면에 떠오른 영상은 히다카가의 정원을 촬영한 것입니다. 화면 아래쪽 귀퉁이에 표시된 날짜를 보고 나는 가슴이 일시에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내가 히다카를 죽이려고했던 날이었습니다. - P252

비디오에 나온 건 그것뿐입니다. 하지만 충분한 증거라고할 수 있겠지요. 설령 살인미수는 부정한다 해도, 그렇다면 왜히다카가에 숨어들었느냐고 캐묻는다면 나는 어떻게도 대답할 도리가 없습니다. - P253

"어떻게 네가 나를 죽이러 온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겠냐?
그런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하지만・・・・・…."
"아, 그게 아니면." 그가 내 말을 가로막으며 내뱉었습니다.
"너, 그 일을 누군가에게 말했던 거야? 그날 그 시간에 나를 죽이러 간다고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얘기했었어? 뭐, 그렇다면벽에도 귀가 있다고, 그 말이 우연히 내 귀에 들어올 수도 있었겠지." - P254

내가 아무 대꾸도 못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카메라를 설치해둔건 그즈음에 뭔가가 우리집 정원을 마구 헤집고 다녔기 때문이야. 그 범인을 잡으려고 내가 설치해둔 거라고 설마 그런 영상을 잡아낼 줄은 꿈에도 몰랐어. 이제카메라는 떼어버렸지." - P255

그 히다카의 수상 후 첫 작품도 얼마 뒤에 단행본으로 출간되고 순조롭게 팔리는 모양이었습니다. 베스트셀러 순위에 들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복잡한 심정이 되곤 했습니다.
죽도록 억울한 가운데서도 조금쯤은 자랑스러운 마음도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현상을 객관적으로 보자면, 분명 내 이름으로 냈다면 이렇게 많이 팔리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냉정하게 분석하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 P257

"너도 명색이 작가니까 잘 알겠지? 내가 지금 이런 정신상태에서 소설 스토리를 생각해낼 수 있겠어? 네가 지금 나한테 강요하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야."
하지만 그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내가 생각조차 못 한 뜻밖의 말을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 새 소설을 써내라고 해봤자 그건 어렵겠지.
하지만 이미 완성된 작품을 다시 살려내는 것쯤은 별로 어렵지 않잖아?" - P259

나는 당황했습니다. 그가 말한 대로 습작을 써둔 대학노트가 책장에 꽂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 잠깐."
"어때, 순순히 내놓을래?"
"....…… 그런 건 아무 도움도 안 돼. 기껏해야 학생 때 쓴 글이야. 문장도 형편없고 스토리 구성도 거칠어. 도저히 어른의 소설이라고 할 수 없는 원고야." - P260

"괜한 잔꾀를 부리시는군." 그는 느물느물 말했습니다. "네가 꺼낸 노트에는 「둥근 불꽃」의 원본뿐이잖아. 이 노트만 나한테 내주고 대충 넘어가려고?"
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뭐, 됐어. 아무튼 이 노트는 전부 내가 빌려갈게."
"이봐, 히다카." 나는 얼굴을 들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런짓을 하고도 부끄럽지 않아? 남이 학창 시절에 쓴 것을 빌려가야 할 만큼 재능이 고갈되어버렸어?" - P261

그로부터 두세 달쯤 지났을 무렵, 어느 문예지에서 히다카의 연재가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읽고, 지난번 가져간 노트 속의 소설 한 편을 바탕으로 썼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세념이라고 할까, 어느 정도 각오를 했기때문에 그다지 충격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작가가 되는건 단념해버렸고, 어떤 형태로든 내가 창조한 작품이 세상 사람들에게 읽혀진다면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다는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입니다. - P262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다 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하쓰미씨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 악몽 같은 날의 일은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교통사고가 났다는 소식은 신문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그녀가 베스트셀러 작가의 아내였기 때문에 그 기사는 다른 교통사고 때보다 크게 실렸습니다. - P264

처음에는 단순한 소설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읽어나가는사이에 엄청난 글이라는 게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하쓰미 씨의 일기와 히다카 본인의 독백을 얼기설기 짜맞춘 이야기였던것입니다. 일기 부분에서는 하쓰미 씨가 N이라는 남자(나를가리키는 것입니다)와 특별한 관계에 빠져드는 과정이며 마침내 공모하여 남편을 살해하려는 것 등이 극명하게 그려졌습니다. 한편 히다카의 독백부분에서는 아내의 마음이 멀어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남편의 슬픔이 담담히 묘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살인미수 사건이 일어납니다. 여기까지는 거의사실에 가깝다고 해야겠지만 그 뒤부터는 명백히 히다카에 의한 창작이었습니다. 하쓰미 씨는 자신의 실수를 후회하고 남편에게 용서를 청한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풀려나가는 것입니다. 히다카는 긴 시간을 들여 그녀와 대화하고 다시 한번 결혼 생활을 해나가자는 결심을 합니다. - P265

오히려 내가 멈칫했습니다. 내 대학노트를 히다카에게 빼앗긴 이상, 그의 도작을 증명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나는그제야 깨달았습니다. 하쓰미 씨의 죽음은 유일한 증인의 죽음이기도 했다는 것을.
"아, 그런데 말이지." 히다카는 말했습니다. "이 수기를 꼭 지금 발표해야 하는 건 아니야.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당분간 보류해줄 수도 있어." - P267

가가 형사라면 이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군요. 어떻게든 저항할 방법이 없었느냐고 의문을 품겠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히다카와의 심리전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상태였습니다. 그가 하라는 대로 소설을 써주기만 하면 아무튼 나와 하쓰미 씨의 과오가 폭로되는 일 없이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그게 편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참으로 기묘한 일이지만, 그렇게 2, 3년이 지나자 나와 히다카는 제법 호흡이 잘 맞는 합작자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 P268

그날 나는 『얼음의 문』원고의 플로피디스크를 들고 히다카의 집에 갔습니다. 그에게 플로피디스크를 건네는 것은 그게 마지막이 될 터였습니다. 그가 캐나다로 떠난 뒤에는 팩스로 원고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나는 컴퓨터 통신이 가능한 기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얼음의 문』의 연재가 끝나면 우리의 관계는 소멸될 예정이었습니다. - P269

"아, 근데 내가 생각해봤는데, 그 노트에 무슨 의미가 있지?"
"의미? 그야 있고말고. 네가 발표한 소설 몇 편의 원형은 내가 쓴 거라는 증거가 될 거야."
"흥, 그럴까? 하지만 그 반대의 해석도 성립하지. 즉 그 노트의 내용은 내 작품을 본 뒤에 쓴 거라고 해석할 수도 있단 말이야." - P270

"히다카!" 나는 그를 노려보았습니다. "나는 더 이상 고스트라이터 노릇은 못 해. 너를 위해 소설을 쓰는 건.………."
"이 『얼음의 문』이 마지막이라는 거지? 나도 알아, 그건."
"그럼 왜 그런 말을 하는 거냐고!"
"딱히 이유는 없어. 우리의 관계는 변함이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뿐이야." - P271

현관을 나서자 나는 정원 쪽으로 돌아 들어가 히다카의 작업실 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창문 아래 숨어서 히다카와 후지오 미야코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예상했던대로 히다카는건성건성 대꾸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문제로 삼은 『수렵 금지구역』이라는 소설은 모두 내가 쓴 것이기 때문에 히다카로서는 확실한 대답을 하려야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 P272

그다음의 일은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요 나는 그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뒤에서 힘껏 머리를 내리셨습니다. 그는 한순간에 쓰러졌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죽었는지 확실히 알 수없었습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매듭을 짓자는 생각에 전화로 - P273

내가 고백해야 할 것은 이상입니다. 나로서는 하쓰미 씨와의 관계만은 어떻게든 비밀로 하고 싶었고, 그러자면 동기는결로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수사 관계자 여러분께 큰 폐를 끼치고 말았지만, 조금이라도 내 심정을 이해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 P274

내가 말했지만 그다지 위로가 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답답한 듯 호소했다.
"이번 일이 형사사건이고 피해자는 우리 쪽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는 건가요? 마치 연예인 스캔들처럼 여기저기서 떠들어대고, 게다가 우리쪽이 나쁘다는 식으로 말하더라고요." - P281

"이래저래 일이 많았죠. 욕설 전화며 편지가 쏟아지고 있어요. 게다가 어떻게 알아냈는지 우리친정집에까지 그런 편지를 보냈어요. 내가 남편의 집에 없다는 소식이 매스컴을 통해낱낱이 알려졌기 때문이겠죠."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 P282

"그것도 역시 각양각색이에요. 지금까지 지불했던 인세를돌려달라는 것도 있고, 그동안 열심히 응원해온 독자를 배신했다는 편지와 함께 남편의 책들을 상자에 넣어서 보낸 사람도 있었어요. 아, 그리고 문학상을 반납하라고 요구하는 편지도 많더군요." - P282

"진짜 웃기는 건, 요즘 남편책이 아주 잘 팔린다는 거예요.
그것도 일종의 관음증 같은 거겠죠?" - P283

"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문제는 돈이 아니에요. 남편이 살해된 것이 마치 자업자득이라는 식으로 여기저기서 떠들어대는 게 너무나 비통한 거예요. 노노구치 씨의 외삼촌이라는 분도 전혀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더군요." - P284

"그리고 이건 전에도 부인께 질문했던 것이지만, 노노구치가 댁을 나올 때의 상황이 사실과는 다르게 묘사되었죠? 실제로 부인은 그를 현관까지 배웅했는데 이 수기에는 대문 밖까지 배웅한 것처럼 적혀 있어요."
"네, 맞아요." - P287

"전혀 관계가 없를지도 모르는데요."
"괜찮습니다."
"그날 노노구치 씨는 돌아가는 길에 선물이라면서 내게 샴페인 한 병을 줬어요. 그것이 이 수기에는 적혀 있지 않군요."
"샴페인을? 그날이 틀림없습니까?"
"네, 틀림없어요." - P288

"전에는 선물을 가져왔었는지도 모르지만 내가 아는 한에서는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원래 노노구치 씨 본인이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거든요."
"아, 그렇군요." - P289

나는 그 샴페인은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았다. 호텔맨은잠시 머뭇거리던 끝에 자신이 집에 가져갔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이어서 그 술을 마셨느냐고 물었다. 2주일쯤 전에 다마셨다고 그는 대답했다. 병도 이미 버렸다고 했다.
"뭔가 문제가 있습니까?"
호텔맨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뇨,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에요. 근데 그 샴페인은 맛이 괜찮았어요?" - P290

집에 돌아온 뒤에는 비디오테이프를 보았다. 노노구치 오사무가 히다카의 집에 숨어들었을 때의 그 테이프였다. 감식과에 부탁해서 특별히 복제해달라고 한 것이었다.
되풀이해서 들여다봤지만, 수확 없음. 따분한 화면이 눈꺼풀에 낙인으로 찍혔을 뿐이다. - P291

"히다카 씨와 대화할 때, 그를 『수렵 금지구역』의 작가라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말 같은 것을 들은 적은없었던 거군요?"
"그런 건 없었어요. 하지만 이번 일이 터지고 보니 그것도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네요. 그때만 해도 히다카 씨가 진짜작가가 아니라는 건 상상도 못했으니까요."
그건 그야말로 당연한 말이라고 할 수 있었다. - P292

"어째서 그 남학생이 히다카 씨 본인이라고 생각했죠?"
"소설은 하마오카라는 남학생이 옛날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돼요. 게다가 내용을 보면 소설이라기보다 다큐멘터리라고 하는 게 적당할 만큼 사실적이어서 나는 그 남학생은 틀림없이 히다카 씨일 거라고만 생각했죠."
"그렇군요. 그런 거라면 이해가 되는군요." - P294

히다카 구니히코 씨라고 하면 수렵 금지구역에 등장하는하마오카라는 인물과 이미지가 잘 맞아요? 당신의 주관에 따라 대답해주셔도 좋습니다."
"나로서는 히다카 씨하고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은데, 어쩌면 그건 선입견 때문인지도 모르죠. 왜냐하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나는 사실 히다카 씨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니까요." - P296

그러던 중에 내 마음속에 불쑥 의심이 싹튼 것은 병실에서 노노구치의 조서를 작성하던 때였다. 무심코 그의 손가락 끝에 시선이 갔을 때, 돌연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무시하기로 했다. 그 상상은 너무도 기괴하고 비현실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 P297

결과적으로 노노구치는히다카 하쓰미에게 피해가 가는 것만은 막아보겠다는 일념으로 자수는 하지 않았지만, 히다카 구니히코로서는 노노구치가 절대로 자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만한 근거는 없었다. - P298

나는 노노구치 오사무와 히다카구니히코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만일 우리 수사팀이 처음부터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라면 우선 맨 처음 지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 P301

중학교 3학년에 올라온 하마오카는 몇 차례나 생명이 위급할 정도의 폭력을 당한다. 옷을 벗기고 온몸에 투명 랩을 감아꼼짝도 못 하게 한 상태에서 체육관 구석에 버려두고, 교실 창문 아래를 걸어갈 때 갑자기 위에서 염산을 뿌리기도 한다. 물론 단순하게 때리고 걷어차는 공격은 수없이 당한다. 위협적인 말이나 짓궂은 장난 수준의 폭력도 거의 날마다 이어진다.
그런 폭력의 묘사가 상세한 데다 리얼리티가 뛰어나서 그야말로 실감나게 다가왔다. 후지오 미야코가 그건 소설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라고 했던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 P302

하지만 하마오카를 작가, 즉 노노구치 오사무의 분신이라고했을 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히다카 구니히코에 해당되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작가를 히다카 구니히코라고 생각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경우에는 노노구치에 해당하는 인물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 P305

이 점에 매달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노노구치 본인이 수차례에 걸쳐 히다카 구니히코와는 친한 친구 사이였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 P306

똑같은 모순이 노노구치 오사무의 고백의 글에도 있었다.
친한 친구라면 상대의 아내를 빼앗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친구의 아내와 공모하여 그를 죽이려는 생각 따위는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정말로 친한 친구였다면 상대를 협박해 고스트라이터가 될 것을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노노구치는 히다카 구니히코를 ‘친한 친구‘라고 수차에 걸쳐 밝혔던 것일까.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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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치료적 처분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단골손님 중 대표적인 부류가 도벽이 있는 절도범이다. 월경 주기마다 필요 없는 물건을 훔쳐서 집안에 쌓아놓는 여성 범죄자나, 무가치한 물건을 상습적으로 훔치는 병적 도벽을 지닌 남성 범죄자 중에는 심리 치료뿐만아니라 약물 치료까지 필요한 경우가 많다. - P187

O는 1심에서 상습 절도로 6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그는 절도 충동을 참을 수 없는 심신미약 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며 형량이무겁다고 항소했다. 그동안 에게 정신 병력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재판부는 정신감정을 보내기 전에, 그의 주장이 설득력 있는지아니면 꾀병인지 가리기 위해 전문 심리위원인 필자에게 감정 의뢰를했다. - P189

부모 없이 지내는 손자가 안쓰러워 늘 감싸주는 조부모 밑에서 자란O는 훔치는 것이 범죄라는 개념이 전혀 없었다. 이렇게 성장해온 O는초등학생 때 처음으로 경찰서에 갔다고 했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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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나는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다. 미끼를 이용해서 상대방이접근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미끼란, 아까 모든 사람 앞에서 보여줬던 기리유 에리코의 유서다. - P87

"아까 말씀하신 유서 말인데요." 유카가 약간 굳은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뭐라고 쓰여 있는지 전혀 짐작이 안가세요?"
"전혀요." - P88

"그건 터무니없는 상상일 뿐이야." 나보다 먼저 다케히코가 입을 열었다. "특히 고모는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어서 즐기는 것 같았어." - P89

"놀란 정도가 아니에요. 저는 완전히 잠에 빠져 있었는데,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나서 벌떡 일어났어요. 그때 전 ‘D‘동에서 자고 있었는데 화재가 난방하곤 떨어져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엄마는 많이 놀랐을 거예요. 복도를 사이에 두고바로 옆방이었으니까요. 게다가 혼자셨고." - P90

"유카 언니 방도 화재가 난 곳에서 떨어져 있었지, 아마?"
"응, 지금 묵고 있는 ‘C-3‘ 이었으니까."
"자고 있었어?"
"응. 나도 누군가의 고함을 듣고 깨어난 것 같아."
"어머, 그래? 그런 것에 비하면 방에서 굉장히 빨리 나온거네." 가나에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 P91

다케히코가 내 질문을 비웃었다. "모두 자고 있었는걸요.
게다가 ‘A-1‘ 방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해도 그걸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바로 옆방에 묵은 요코 고모뿐인걸요."
"하지만 ‘A-1‘ 방에서만 소리가 났을 거라고 단정할 수는없지 않나?" - P92

"목욕을 했더니 기분이 산뜻하네요. 기쿠요 부인도 탕에들어가는 게 어떠세요?"
"아니에요. 난 식사 전에 했답니다."
"나도 목욕할래."
가나에가 불쾌한 얼굴로 일어섰다. 그러자 그 자리에 나오유키가 앉았다. - P93

"외삼촌은 그날 밤 무슨 소리 같은거 못 들었어요?"
나오유키의 표정을 못 봤는지 가나에가 물었다. 유카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짝거렸지만 그 전에 나오유키가대답했다.
"아니, 전혀 기억이 없어. 그날 밤에는 잠이 깊이 들었거든.
"그럼 나오유키 씨도 소스케 씨의 고함을 듣고 깨어났나요?"
내가 묻자 그는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목소리가 아주 커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어디에 묵으셨어요?"
"오늘과 같은 ‘C-1‘이었습니다만." - P94

"마에바시는 아직 춥죠?" 그가 물었다.
"예. 하지만 얼마 전 드디어 정원수들도 겨울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답니다."
마에바시에는 혼마 부부의 집이 있다. 목조로 된 자그마한 2층집이다.
"가족분이 없다고 들었는데."
"예, 남편이 떠난 뒤로는 줄곧 혼자서 지내왔죠." - P95

"사실 혼자인 게 편할 때가 더 많답니다."
"이웃들과의 왕래는 어떻습니까?"
"요즘에는 소원하죠. 요즘 젊은 사람들이 어디 그런 것을좋아하나요?"
"그렇긴 하지만 ・・・・・…."
나오유키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았다. 그렇게 되면 노인들이 자택에서 쓰러질 경우, 이웃이 전혀 눈치를 못 채는게 아니냐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 P96

나오유키의 재촉이 효력을 발휘했는지 곧 마실 것이 나왔다. 그는 미즈와리(술에 물이나 얼음을 넣어 묽게 만든 것 - 옮긴이)를 마시면서 미국에서의 직장생활과 일상생활에 대해 빠른어조로 말했다. 나는 기쿠요 부인이 그랬던 것처럼 약간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지은 채, 상대방이 편하게 말할 수 있게 가끔 맞장구를 쳐주기도 하고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 말참견도했다. - P97

"큰오빠의 활동력은 굉장했잖아. 그래서 이치하라 집안의 재산을 엄청나게 불릴 수 있었겠지만 죽으면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무덤까지 가져갈 수도 없는데." - P98

"오히려 잘됐어. 만약 유언장이 없었으면 한바탕 난리가났을 거야."
"그야 그렇지만 썩 기분 좋은 상황은 아냐. 유산 배분을 보면 큰오빠가 마음에 들어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확연하게 드러날 테니까." - P99

"넌 좋겠다. 실질적으로 오빠의 회사를 물려받은 셈이고이미 나름대로 구축해 놓은 것도 있잖아. 그 정도면 유산을충분히 받은 거 아닌가?" - P99

"속물적인 얘기를 들려드려서 죄송합니다. 집안의 치부를드러낸 것 같아 창피하네요."
"아니에요." 나는 손을 내저었다. "나 같은 사람한텐 너무먼 얘기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습니다. 만약 선거에 나가게되면 당선됐으면 좋겠네요." - P100

"따님이 미인이라 쫓아다니는 남자가 너무 많아서 고민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나는 입에 발린 소리를 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해서 아직 어린애랍니다. 남편도 가나에가 서른살쯤은 돼야 제 몫을 해낼 것 같다고 하거든요." - P101

"작은오빠는 단순한 사람이야. 오히려 올케가 보통이 아니지. 올케는 유카를 정재계 쪽으로 시집보내고 싶어 하니까만약 오빠가 당선이라도 된다면 마음이 움직일지도 몰라. 다만.…………." 요코는 몸을 앞으로 내밀더니 호기심 어린 눈으로말했다. "가나에 말로는 유카한테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다케히코가 아닌 것만은 확실한 모양이야." - P102

나는 화제를 동반자살 사건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요코의 얘기를 좀 더 듣고 싶었지만 나오유키 앞에서는 왠지 조심스러웠다. - P103

연못가에 벤치가 있었다. 깨끗한 것을 확인하고 벤치에 앉았다. 연못 수면에 회랑정이 거꾸로 비쳤다. 고개를 들자 바로 정면에 ‘A‘동이 있었다. - P104

"밤경치도 꽤 멋지죠?" 고바야시 마호는 이내 지배인다운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 실컷 만끽하고 있답니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고바야시 씨도 산책 나오셨어요?"
"아뇨, 한번 둘러보는 거예요. 항상 그러는 건 아니지만 오늘 밤은 손님들이 계시니까요."
"수고하시네요." - P105

"이 료칸에 오신 지 얼마나 되셨나요?"
"글쎄요, 벌써 그럭저럭 20년쯤 된 것 같아요."
고바야시 마호는 연못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줄곧 혼자셨나요?"
"예, 혼자였어요. 다카아키 씨한테는 결혼하게 되면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결국 그러지 못했지요."
"좋은 사람이 없었나 보네요." - P106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모두 마호 씨를 높이 평가하고있는걸요. 누가 경영을 하든지 계속 이곳을 맡아달라고 할 거예요. 틀림없이."
"감사합니다." 마호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좀 지쳤어요. 이제 물러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무슨 그런 말씀을………. 단골손님들이 실망하겠어요" - P107

"예, 고맙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고바야시 마호와 헤어진 뒤 복도를 지나 내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문을 잠근 뒤 휴우, 한숨을 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 P108

시계를 보았다. 아직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다. 그러나일흔을 눈앞에 둔 노파라는 걸 감안하면 잠자리에 드는 게 당연한 시각이기도 하다. 나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맡에 봉투를 두었다. 기리유 에리코의 유서다. - P108

이번엔 가방을 열고 안에서 소형 비디오카메라를 꺼냈다.
8 밀리미터 비디오카메라여서 최대 두 시간까지 녹화가 가능하다. 전원 코드를 콘센트에 꽂고 본체를 다시 가방에 넣은뒤, 렌즈부분을 밖으로 내놓고 방 입구 쪽을 찍을 수 있도록위치를 조절했다. 그 상태에서 녹화 스위치를 켜고 렌즈를 가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가방 위에 타월을 걸쳐놓았다. 코드 위에는 방석을 놓아 위장했다. - P109

무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서 눈을 떴다.
이런 멍청한 짓을 하다니. 잠깐 눈만 붙일 생각이었는데 신경을 쓰느라 피로했던 모양이다. - P115

누구일까? 이 사람은 누구일까?
차라리 지금 일어나서 상대방을 덮칠까 하는 생각이 불쑥들었다. 아니, 그러면 안 된다. 잘된다는 보장이 없다. 자칫하다가는 내가 상대방에게 당하고, 요란한 소리를 듣고 다른 사람들이 달려오기라도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것이다. 지금은 꾹 참는 수밖에 없다. - P116

나는 벌떡 일어났다. 머리맡에 두었던 봉투가 안 보였다.
시계를 보자 새벽 1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불 속으로 들어간지 거의 두 시간이 흘렀다. - P116

아, 이 사람은 ・・・・・..
그랬구나. 그런 거였구나.
이 사람이 그때의 범인이란 말인가. 거기에 찍혀 있는 여자는 이치가하라 유카였다. - P118

그 이유를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일인지 모른다. 나는 동반자살 사건을 꾸민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기리유 에리코의 유서를 미끼로 상대방을 유인하려 했다. 그 결과 유카가 덫에 걸려들었고 당연히 유카가 범인일 것이다. - P119

손발을 묶기 위해 허리끈 두 개를 품에 넣었다. 그리고 열쇠를 가방에서 꺼냈다. 이 료칸의 마스터키와 똑같은 것이다.
원래 다카아키 씨가 갖고 있던 것인데 몇 년 전에 내가 맡았다가 그대로 보관하게 되었다. - P120

유카가 어느 방에 묵는지는 알고 있다. 화재가 일어났을 때와 같은 ‘C-3‘이라고 식사를 마친 뒤 이야기를 나눌 때 말했다.
긴 복도를 걸어간 뒤, 유카의 방 앞에 섰다. 인기척이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고 열쇠 구멍에 키를 집어넣었다. - P121

먼저 얼굴을 확인해야 했다. 틀림없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이불 끝을 잡고 천천히 들춰 보았다.
이치하라 유카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유카는 눈을 뜨고 있었다. 엎드린 자세로 목을 틀어 얼굴만이쪽을 향하고 있다. - P122

유카는 죽어 있었다.
내가 죽인 게 아니다. 목을 조를 때 이미 죽어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이불을 걷어낸 나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유카의 복부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옆구리에 나이프 같은것이 꽂혀 있는 게 보였다. 살해당한 것이다. - P123

맨 먼저 떠오른 생각은 유서를 회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여행가방 안, 옷 주머니, 세면대등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봉투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방안은 잔뜩 어지럽혀져 있었다. 나보다 먼저 누군가가 방안을 뒤진 흔적이었다. - P123

이불을 다시 덮으려다 바닥에 유카의 피가 묻어 있는 걸 보았다. 자세히 보니 유카가 왼손으로 쓴 글자 같았다. 알파벳
‘N‘을 거꾸로 뒤집은 ‘(문자오류)‘처럼 보였다. - P124

이로써 나만이 유카의 메시지를 알게 된 것이다.
방을 나오려고 출입문손잡이를 잡았을 때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맞은편 방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맞은편은 ‘C-1‘
로 나오유키가 묵고 있는 방이다. - P124

이렇게 망설이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방안으로 돌아와 툇마루의 유리창을 조용히 열었다. 게다(일본 사람들이 신는 나막신-옮긴이)가 놓여 있었지만 그걸 신을 수는 없다. 양말만 신은 발로 땅에 내려섰다. 생각보다 차갑지는 않았다. - P125

중간에 연못을 만났다. 다리를 건너려면 많이 돌아가야 하고 상야등 불빛에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연못 한쪽엔 군데군데 잘록한 부분이 있었는데 가장 좁은 곳은 폭이 대략 2미터쯤 되어 보였다. - P125

"그런데 어젯밤 여기에 묵은 사람들은 피해자의 친척뿐인것 같은데, 다른 손님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저기, 그건 말이죠…………."
소스케가 고바야시 마호를 대신해 현재 이 료칸은 휴업 중이라고 설명했다. 야자키 경감은 다른 종업원의 모습이 안 보이는 것도 그 설명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낮에 불쑥 찾아와서 묵게 해달라는손님이 있었어요. 휴업 중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모양이에요.
사정을 설명하고 돌려보내긴 했지만."
"그 사람의 인상착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 P132

"저기요." 아주 조심스럽게 요코가 입을 열었다. "유카가자살했다고 볼 수는 없는 건가요?"
"자살은 아닙니다." 경감은 일언지하에 부정했다. "흉기로보이는 나이프에 유카 씨의 지문이 묻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나이프는 유카씨가죽은 뒤 몸에서 빼낸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이건 이상한 부분입니다만, 유카씨 목을 누군가가 조른 흔적이 있습니다. 이 또한 죽은 뒤에 그런 것 같습니다." - P133

"유카씨 복부를 찌른 나이프입니다. 등산 나이프 같은데혹시 본 적이 있는 분 안계십니까?"
모두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일회용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는 파란색 손잡이가 달린 나이프가 찍혀 있었다. 칼에 묻어있는 검붉은 피가 선명했다.
"안 계십니까?" 야자키 경감이 다시 한번 물었다.
"처음 보는데." 나오유키가 말했다. - P135

"우리 중에 등산 다니는 사람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큰형님이 예전에 잠깐 다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소스케도 대답했다. - P136

"아지사와 히로미라고 합니다. 후루키 선생님 일을 도와주고있습니다." 히로미라는 조수가 시원시원한 말투로 대답했다.
단정한 얼굴, 탱탱한 피부.
옆에서 가나에가 남자인 그에게 예쁘다,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P138

중요한 것은 유카가 기리유 에리코의 유서를 훔쳤다는 사실이다. 그 일과 살인사건이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강도사건이 아니다. - P140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유카를 살해한 범인 또한 그 유서를훔치기 위해 벼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유카가 먼저 훔치는 것을 목격하고 당황해서 유카를 죽인 뒤 유서를 빼앗은것은 아닐까? - P140

유산이 많으면 많을수록 다툼도 많아지는 법이죠."
"아니, 다툼이랄 것까지는....…."소스케는 말을 우물거렸다.
"유산 다툼 같은 게 아니에요. 올케 언니가 이성을 잃고 멋대로 생각하는 거라고요."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요코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내가 그런 짓을 할 리 없잖아."
그만 진정하세요, 야자키 경감은 요코를 달래는 손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 P145

"다행히 알리바이는 증명되었습니다. 어제는 밤늦게까지사무실에서 일을 했으니까요. 다른 직원들에게 물어보면 저희 두 사람이 한밤중에 이곳으로 오는 게 불가능했다는 것을알겁니다."
아무튼 후루키 변호사와 아지사와 히로미는 유카를 살해한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 P147

"설마, 상속 몇 푼 더 받겠다고 살인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 정도는 경찰도 알고 있을 거야." 나오유키가 말했다.
유카의 죽음으로 법정상속분이 3분의 1에서 2분의 1로 늘어난 소스케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과연 그럴까? 어쨌든 상속액이 엄청나잖아." - P149

그때 검은색 넥타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넥타이가 떨어졌네요."
내가 넥타이를 주워주었다. 넥타이에는 진주로 된 타이택이 부착되어 있었다. 구입한지 얼마 안 된 듯 백금으로 된 받침 부분에 흠집 하나 없었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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