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예요. 그 무렵에당신이 이번 일을 계획했을 거라고 짐작했으니까요. 이번 일이라는 건 물론 히다카 구니히코 씨를 살해한 사건입니다. - P364

왜냐하면 이 영상은 당신이 만들어낸 거잖아요. 당신이 연출하고 당신이 촬영했죠. 감독 겸 주연인 셈이군요. 그러니 지겹도록 보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밖에요. - P364

예, 그러니까 그것을 증명하려는 거예요. 이 사진을 사용해서 말이죠. 하지만 별로 대단한 건 아니에요. 내가 이 사진을통해 말하고 싶은 건 단 한 가지입니다. 이 비디오 영상은 귀퉁이에 표시된 7년 전의 이 날짜에 촬영된 게 아니라는 것이죠. - P365

아,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습니다. 7년 동안 나무가 많이 자랐다지만 그건 빛이 들어오는 상태 등에 따라서달라지기 때문에 단순히 그림자만 비교해서는 그것이 최근의 벚나무인지 오래전의 벚나무인지 알기는 어렵겠지요. - P365

아직 알아듣지 못한 것 같으니까 내가 답을 알려드리죠. 만일 이 영상이 정말로 7년 전의 정원을 촬영한 것이라면 이곳에는 나무 그림자가 두 개가 있어야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간단한 거예요. 예, 그렇습니다. 7년 전에는 히다카 씨의정원에 벚나무가 두 그루였어요. 사이좋게 나란히 서 있었죠.
반론이 있으십니까? - P366

 왜냐하면 히다카 구니히코 씨는 바깥에 술을 마시러 갈 때는 열쇠를 가져가지 않고 현관 앞 우산대 뒤에 감춰두곤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두어번 바깥에서 열쇠를 잃어버린 뒤로 그렇게 하게 되었답니다. 그걸 노노구치 씨가 알고 있었다면 굳이 열쇠를 복제할 필요도 없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리고 노노구치 씨라면 열쇠를 둔 장소를 알고 있었을 거라고리에 씨는 증언했어요. - P367

이건 틀림없이 위조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부러 수없이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보고, 히다카가의 오래된 정원이 찍힌 몇 장 안 되는 사진을 어렵사리 찾아내면서까지 그 모순점을 발견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째서 이 비디오 테이프는틀림없는 위조품이라고 생각했는가. 그건 다른 증거물에 대한 의심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 P367

이번 사건에서 노노구치 씨를 체포하고 또 고백의 글까지읽고 난 뒤에도 나는 아무래도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의문점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설명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과 이해가 된다는 것은 달라요. 노노구치 씨, 당신의 고백에서는 뭔가 미묘한어긋남이 느껴졌어요. 그 미묘한 어긋남 때문에 당신이 고백한 내용을 나는 아무래도 진실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 P368

노노구치 씨, 오른손을 좀 보여주시죠.
왜 그러십니까, 오른손입니다. 정 뭐하시면 오른손 가운뎃손가락만이라도 좋습니다.
그 가운뎃손가락 끝, 그건 펜으로 글씨를 써서 생긴 굳은살이지요? 정말 큼직하게 굳은살이 박이셨군요. - P368

그렇다면 뭐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나한테는 펜으로 글을 써서 생긴 굳은살로 보였다는 점이니까요. 내 눈에 그렇게 보였기 때문에 나는 다시 이 사건을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워드프로세서만 쓰는 노노구치 씨의 손가락에 어째서 펜으로 인한 굳은살이 생겼는가, 그런 것이 생길 만큼 엄청난 양의 뭔가를 손으로 일일이 써야 했는가, 하고 고민했습니다. - P369

그렇습니다. 나는 다음과 같이 추리했어요. 그 엄청난 양의 작품은 옛날에 쓴 것이 아니라 최근에 노노구치 씨가 급하게 써놓은 게 아닐까………. - P369

쓰지무라 헤이키치 씨라는 분은 바로 그때의 폭죽 장인입니다.
예, 그건 나도 알아요. 이름을 잊어버렸다고 하시는데, 그건그리 큰 문제가 아니죠. 아마 히다카 구니히코 씨에게 물어봤어도 그 노인의 이름은 잊었다고 하지 않았을까요? - P370

당신과 히다카씨의 중학교 때 앨범을 보여드렸는데, 그때 놀러왔던 아이의 얼굴을 한 번 보자마자 금세 이아이라고 집어내셨어요.
바로 히다카 구니히코 씨의 얼굴을요.
노노구치 씨, 당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아이라고 하셨고요. - P371

이미 다 아시겠지요? 나는 고민 끝에 그 비디오테이프를 의심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당신이 살인미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건 그 비디오테이프뿐이니까요. 그때 사용했다는 나이프에는 아무런 증거 능력도 없습니다. 단순히 당신의 지문이 찍혀 있다는 것뿐이니까요. - P371

그러면 당신이 살인미수의 계기였다고 고백했던 히다카 하쓰미 씨와 당신과의 관계는 어떻게 된 것인가. 당신이 말한 그런 불륜 관계가 정말로 있었는가.
여기서 잠깐 복습을 좀 해보죠. 당신과 히다카 하쓰미 씨의 관계를 암시해주는 증거들은 어떤 것이었지요? - P372

 목걸이는 당신이 하쓰미 씨에게 선물하려고 했다는 당신 스스로의 증언뿐이었어요. 그러면 에이프런은 어떤가. 그건 아무래도 하쓰미 씨의 물건이라는 게 틀림이 없습니다. - P372

그날, 당신은 에이프런 외에도 또 한 가지를 더 훔쳐냈을 가능성이 있어요. 바로 사진입니다. 당신이 훔쳐내야 할 사진의조건은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겁니다. 우선 하쓰미씨 혼자 찍은사진, 같은 장소에 구니히코 씨는 나오지 않는 사진, 그리고 또한 가지, 가능하다면 그곳에서 찍은 풍경 사진이 한 장 있으면 좋겠다. - P373

예, 물론 당신이 훔쳤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훔쳐내는 건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이상, 당신이 고백한 하쓰미 씨와의 불륜 관계에 대해서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 P373

그리고 『얼음의 문』에 대해서는 당신이 그 전개를 열심히 생각해내야 했을 겁니다. 그 아이디어 메모를 반드시 형사의 눈에 띄도록 해야 하고 또한 히다카 씨를 살해하던 날의 알리바이 조작용으로 다음 연재분을 당신이 직접 써야 했기 때문입니다. - P375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작업이 남았습니다. 히다카 부부는 캐나다에 보낼 짐을 일주일 동안 꾸렸다고 합니다. 그 일주일 사이에 당신이 딱 한 차례 그 집에 왔었다고 하던데요. 당신이 히다카 씨 집을 찾아간 목적은 두 가지 물건을 이삿짐 속에 슬쩍 넣어두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 P375

아뇨, 그건 결코 충동적인 범행이 아니었어요.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참으로 무섭고도 치밀한 사전 계획에 따른 범행이었지요. - P376

그런데 당신의 범죄 계획은 그것과는 완전히 목적이 달랐습니다. 당신은 체포되는 것을 전혀 피하지 않았어요. 아니, 그러기는커녕 모든 계획이 자신이 체포될 것을 전제로 해서 세워졌던 거예요.
간단히 말하자면 이런 얘기입니다. 노노구치씨, 당신은 오랜 시간과 수고를 들여 범죄의 동기를 만들어냈어요. 히다카 구니히코 씨를 살해하기에 적합한 동기를 말이죠. - P376

비디오테이프도 그렇습니다. 만일 경찰이 일찍부터 의심을품었다면 그 테이프가 위조품이라는 건 훨씬 더 일찌감치 알아냈을 거예요. 하지만 수사진은 전혀 의심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하지요. 그 비디오는 당신의 범행 동기를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인데, 설마 그런 증거를 범인인 당신 스스로 조작했으리라고 어느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 P377

유감스럽게도 우리 경찰은 피의자에게 유리한 증거에는엄격하지만, 불리한 증거 쪽은 허술하게 지나쳐버리는 경향이있습니다. 당신은 그런 약점을 기막히게 뚫고 들어왔어요. - P377

당신이 특히 교묘했던 것안 그 가짜 동기를 직접 나서서 밝힌 게 아니라 수사진 쪽에서 어렵게 알아내게 하는 식으로 유도했던 점입니다. 만일 그 동기를 처음부터 술술 불었더라면아무리 둔감한 형사들이라도 뭔가 이질감을 느꼈을 거예요. - P378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쓰미 씨의 사진을 너무 늦게 찾아내는 바람에 당신은 내심 초조했을 거예요. 언젠가 내게 말했었지요?
그렇게 집 안을 다 휘젓지 마라, 남에게서 맡아둔 중요한 책이있다. 그 말을 힌트 삼아 우리는 국어사전 속에서 히다카 하쓰미 씨의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 P378

세 번째 덫에서도 당신의 교묘한 유도 작전이 있었습니다.
사건 후에 당신은 히다카 리에 씨에게 구니히코 씨의 비디오 테이프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어요. 리에씨가 캐나다로 보낸 이삿짐에 있다고 대답하자 당신은 그 이삿짐이 돌아오면 곧바로 알려달라고 부탁했었죠. - P378

그러고 보니 사건이 일어났던 날 밤에 거의 10년 만에 나를 다시 만난 당신은 히다카 구니히코 씨의 소설 중에서도 가장 먼저 『야광충』을 추천했었지요? 그것 역시 앞을 내다본 유도 작전이었던 것이죠. 참 대단하십니다. - P379

문진이 없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그럴 경우를 대비하여 일단 스스로 흉기를 준비해갔습니다. 그것이 바로 샴페인 돔페리뇽입니다. 혹시라도 문진이 없을 경우, 그 술병을 흉기로 쓸 생각이었던 거예요. - P381

그럴 경우에는, 이사를 축하할 겸 가져갔던 샴페인을 졸지에 흉기로 쓰고 말았다는 식으로 역시 제삼자에게 충동적인 범행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었을 거예요. - P381

하지만 당신은 체포되더라도 진짜 동기는 끝까지 감춰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당신에게는 살인범으로 체포되는 것보다 진짜 동기가 모두에게 알려지는 게 훨씬 더 무서운 일이었으니까요. - P383

이 안에 어떤 데이터가 들어 있는지, 몹시 마음에 걸리실 것같군요. 사실 이 CD 안에는 당신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찾아다녔던 그 내용이 들어 있으니까요. - P384

당신은 그 사진에서 내가 무엇을 봤는지 알고 있겠지요? 나도 막상 사진을 보고 확인하기 전부터 이미 짐작은 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여학생이 꼼짝 못 하도록 붙잡고 후지오 마사야가 성폭행하도록 도운 사람은 노노구치 씨, 바로 당신이었어요. - P385

이제 와서 엉뚱하게 히다카 씨가 그 사진을 구실로 당신을 협박했다는 둥의 거짓말은 하지 말아주시지요. 그런 식으로 대충 둘러대는 거짓말은 금세 들통이 나고, 그보다 이번처럼 완벽한 범죄를 구축해온 당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에요. - P387

나는 그 기록 중에서 이번 사건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부분에 의식을 빼앗겼던 겁니다. 아니, 얼핏 아무것도 아닌 듯한 그 글의 한 부분에 깊은 의미가 담긴 트럭이 숨어 있었던거예요. - P390

당신은 농약으로 경단을 만들고, 히다카 부부가 집에 없는때를 노려 히다카가의 정원에 뿌렸습니다. 그렇게 그 고양이를 죽였어요. 왜 그런 짓을 했는가. 이유는 한 가지, 아까 내가말했던 히다카 씨의 나쁜 이미지를 조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 P391

당신은 거짓으로 점철된 수기를 통해 히다카 구니히코라는 인물의 잔혹성을 묘사해서 일찌감치 독자, 즉 우리에게 나쁜이미지를 심어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준비한 에피소드가 그 ‘고양이 죽이기‘였던 거예요. - P392

즉 당신의 궁극적인 목적은 히다카 씨의 인간성을 깎아내리는 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번 사건의 전체상이 뚜렷하게 잡히지요. - P393

그런 악의는 대체 어디에서 나온 걸까요. 나는 당신과 히다카 씨에 대해 나름대로 상세하게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내가 알아낸 것은 히다카 씨가 당신에게 미움을 살 만한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훌륭한 학생이었고, 당신에게는 오히려 은인이라고 해도 좋을 사람이었어요. 당신이 후지오 마사야와 한패가 되어 그를 심하게 괴롭힌 시절이 있었는데도 그는 당신에게 큰 도움을 주었어요. - P395

하지만 당신의 길은 험난하기만 했습니다. 운이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재능 때문인지, 그건 나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당신은 작가로서 별반 성공하지 못한 채 건강까지 나빠지고 말았습니다. - P396

자, 그러면 수술이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빌겠습니다. 어떻든 건강이 회복되어 살아 있어주셨으면 합니다.
법정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 P397

주의) 본 해설에는 작품의 중요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桐野夏生(기리노 나쓰오), 작가 - P399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돌연 독자를 전율의 세계로 몰아넣는다. 이 책은 범인을 먼저 밝히고 시작하는 이른바 범인찾기가 아니라 동기 찾기라는 신비한 여행으로 독자를 데려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 P403

다만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사건그 자체뿐만이 아니라 이 소설 또한 복잡한 양상을 겹겹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메타픽션인가 했는데 전혀 아니었고, 작가의 솔직한 마음을 토로한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건 거짓말이었고, 그런가 하면 거짓인가 싶더니 정직한 얘기이기도 하고, 도무지 꼬리를 잡기가 쉽지 않다. - P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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