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핑크맨‘이 생각난다.
작 중에 악역으로 보이는 인물 중 하나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그 애에게 최대한 자유를 줄 거에요. 그래야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을테니까.˝
그 작품은 용두사미였다. 좀 더 쉬고 했으면, 정말 좋았을 것이라 믿는다.






그 나이프가 과연 증거로 통할까, 하고 나는 의아했습니다.
분명 내 지문이 찍혀 있기는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꿰뚫어본 것처럼 히다카는 말했습니다.
"잊지 마. 증거는 이것뿐만이 아니야. 또한가지, 절대로 변명할 수 없는 증거가 있어. 나중에 너한테도 보여주지." - P239

그때만은 하쓰미 씨도 나에게 건넬 위로의 말이 떠오르지않는 것 같았습니다. 히다카의 눈을 피해 이따금 전화를 해줬지만 어색한 침묵 이외에 전화선에 실리는 대화라고는 서글플만큼 음울하고 무의미한 말뿐이었습니다. - P242

우스꽝스럽게도 『타오르지 않는 불꽃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책에 대해 잡지며 신문 등에서 다뤄지는 것을 볼 때마다 내 가슴속은 쥐어뜯기는 듯한 심정이었습니다. 작품이 칭찬을 받는 것 자체는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는 현실로 돌아오고 맙니다. 절찬을 받는 건 내 작품이 아니라 히다카의 작품인 것입니다. - P243

나도 모르게 등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히다카의 입에서 다음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우연히 네 소설과 비슷하게 나온 것에 대해 일단 양해를 구하는 게 좋겠지. 제목이 뭐였더라, 네가 준 그 소설? 아, 그래,
「둥근 불꽃」………. 어때, 그런 제목이었지?"
- P245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긴 단순히 우연이라고 할 수 없는 부분도 있기는 해. 왜냐하면 내가 『타오르지 않는 불꽃』을 집필하던 중에 네 작품을 읽는 바람에 약간 그 영향을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으니까. 저절로 잠재의식에 심어져서 그게 내 소설에 드러났는지도 모르겠어. 작곡가의 경우에도 그런 일이 자주 있다더라. 스스로 의식한 적이 없는데도 결과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곡과 비슷한 것을 만들어내는 거지." - P246

그가 하고 싶다는 말이 바로 이것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섣불리 시끄럽게 굴지 않은 건 잘한 짓이다. 앞으로도 이건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어라, 그러면 나 역시 살인미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주마. - P246

"또다시 도작을 하겠다고?" 나는 말했습니다.
히다카가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도작이라니, 네가 그 단어를 쓸 줄은 몰랐는데."
"여기는 내 집이고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으니 괜찮잖아?
네가 아무리 빙빙 돌려서 말해도 도작은 도작이야." - P247

"그렇게 시비 걸듯이 말하지 마. 그날 밤의 일은 내가 그냥넘어가주겠다고 했잖아. 내가 말하는 거래는 좀 더 긍정적인이야기야."
이런 일에 긍정적이고 부정적이고가 어디 있는가 하고 생각했지만, 우선 나는 말없이 그의 입만 쳐다보았습니다. - P248

"타오르지 않는 불꽃이 큰 인기를 얻으니까 너는 당연히내용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겠지. 물론 그건 부정하지않겠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돼. 좀 더 극적인 예를 들어볼까? 그 책을 출판한 게 내가 아니라 너였다면 어땠을까? 작가이름으로 히다카가 아니라 노노구치라고 인쇄되었다면 어땠겠느냐고. 너는 어떻게 생각해?" - P249

"그걸 알고 있다면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도 알아듣겠지?
말하자면 이런 거야. 앞으로 너는 히다카 구니히코라는 작가가 되어야 해."
"뭐라고?"
"그렇게 놀라지 마라,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물론 나 역시히다카 구니히코야. 이런 경우, 히다카 구니히코는 특정인의이름이 아니라 책을 팔기 위한 상표 정도로 생각하면 돼." - P250

"아, 더 들어봐. 나를 위해 작품을 제공해준다면 그게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을 때, 인세의 4분의 1은 너한테 가도록 하겠어. 어때, 그래도 손해나는 이야기야?"
"4분의 1이라고? 실제로 글을 쓴 사람이 반도 못 받는다는거야? 그건 참 가상한 조건이구나."
"그럼 하나만 물어보자. 네 이름으로 책을 내면 얼마나 팔릴거 같아? 히다카 구니히코의 이름으로 냈을 때의 4분의 1보다많이 팔릴 줄 알아?" - P251

가가 형사라면 이미 알겠지요. 모니터 화면에 떠오른 영상은 히다카가의 정원을 촬영한 것입니다. 화면 아래쪽 귀퉁이에 표시된 날짜를 보고 나는 가슴이 일시에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내가 히다카를 죽이려고했던 날이었습니다. - P252

비디오에 나온 건 그것뿐입니다. 하지만 충분한 증거라고할 수 있겠지요. 설령 살인미수는 부정한다 해도, 그렇다면 왜히다카가에 숨어들었느냐고 캐묻는다면 나는 어떻게도 대답할 도리가 없습니다. - P253

"어떻게 네가 나를 죽이러 온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겠냐?
그런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하지만・・・・・…."
"아, 그게 아니면." 그가 내 말을 가로막으며 내뱉었습니다.
"너, 그 일을 누군가에게 말했던 거야? 그날 그 시간에 나를 죽이러 간다고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얘기했었어? 뭐, 그렇다면벽에도 귀가 있다고, 그 말이 우연히 내 귀에 들어올 수도 있었겠지." - P254

내가 아무 대꾸도 못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카메라를 설치해둔건 그즈음에 뭔가가 우리집 정원을 마구 헤집고 다녔기 때문이야. 그 범인을 잡으려고 내가 설치해둔 거라고 설마 그런 영상을 잡아낼 줄은 꿈에도 몰랐어. 이제카메라는 떼어버렸지." - P255

그 히다카의 수상 후 첫 작품도 얼마 뒤에 단행본으로 출간되고 순조롭게 팔리는 모양이었습니다. 베스트셀러 순위에 들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복잡한 심정이 되곤 했습니다.
죽도록 억울한 가운데서도 조금쯤은 자랑스러운 마음도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현상을 객관적으로 보자면, 분명 내 이름으로 냈다면 이렇게 많이 팔리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냉정하게 분석하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 P257

"너도 명색이 작가니까 잘 알겠지? 내가 지금 이런 정신상태에서 소설 스토리를 생각해낼 수 있겠어? 네가 지금 나한테 강요하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야."
하지만 그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내가 생각조차 못 한 뜻밖의 말을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 새 소설을 써내라고 해봤자 그건 어렵겠지.
하지만 이미 완성된 작품을 다시 살려내는 것쯤은 별로 어렵지 않잖아?" - P259

나는 당황했습니다. 그가 말한 대로 습작을 써둔 대학노트가 책장에 꽂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 잠깐."
"어때, 순순히 내놓을래?"
"....…… 그런 건 아무 도움도 안 돼. 기껏해야 학생 때 쓴 글이야. 문장도 형편없고 스토리 구성도 거칠어. 도저히 어른의 소설이라고 할 수 없는 원고야." - P260

"괜한 잔꾀를 부리시는군." 그는 느물느물 말했습니다. "네가 꺼낸 노트에는 「둥근 불꽃」의 원본뿐이잖아. 이 노트만 나한테 내주고 대충 넘어가려고?"
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뭐, 됐어. 아무튼 이 노트는 전부 내가 빌려갈게."
"이봐, 히다카." 나는 얼굴을 들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런짓을 하고도 부끄럽지 않아? 남이 학창 시절에 쓴 것을 빌려가야 할 만큼 재능이 고갈되어버렸어?" - P261

그로부터 두세 달쯤 지났을 무렵, 어느 문예지에서 히다카의 연재가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읽고, 지난번 가져간 노트 속의 소설 한 편을 바탕으로 썼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세념이라고 할까, 어느 정도 각오를 했기때문에 그다지 충격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작가가 되는건 단념해버렸고, 어떤 형태로든 내가 창조한 작품이 세상 사람들에게 읽혀진다면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다는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입니다. - P262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다 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하쓰미씨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 악몽 같은 날의 일은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교통사고가 났다는 소식은 신문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그녀가 베스트셀러 작가의 아내였기 때문에 그 기사는 다른 교통사고 때보다 크게 실렸습니다. - P264

처음에는 단순한 소설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읽어나가는사이에 엄청난 글이라는 게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하쓰미 씨의 일기와 히다카 본인의 독백을 얼기설기 짜맞춘 이야기였던것입니다. 일기 부분에서는 하쓰미 씨가 N이라는 남자(나를가리키는 것입니다)와 특별한 관계에 빠져드는 과정이며 마침내 공모하여 남편을 살해하려는 것 등이 극명하게 그려졌습니다. 한편 히다카의 독백부분에서는 아내의 마음이 멀어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남편의 슬픔이 담담히 묘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살인미수 사건이 일어납니다. 여기까지는 거의사실에 가깝다고 해야겠지만 그 뒤부터는 명백히 히다카에 의한 창작이었습니다. 하쓰미 씨는 자신의 실수를 후회하고 남편에게 용서를 청한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풀려나가는 것입니다. 히다카는 긴 시간을 들여 그녀와 대화하고 다시 한번 결혼 생활을 해나가자는 결심을 합니다. - P265

오히려 내가 멈칫했습니다. 내 대학노트를 히다카에게 빼앗긴 이상, 그의 도작을 증명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나는그제야 깨달았습니다. 하쓰미 씨의 죽음은 유일한 증인의 죽음이기도 했다는 것을.
"아, 그런데 말이지." 히다카는 말했습니다. "이 수기를 꼭 지금 발표해야 하는 건 아니야.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당분간 보류해줄 수도 있어." - P267

가가 형사라면 이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군요. 어떻게든 저항할 방법이 없었느냐고 의문을 품겠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히다카와의 심리전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상태였습니다. 그가 하라는 대로 소설을 써주기만 하면 아무튼 나와 하쓰미 씨의 과오가 폭로되는 일 없이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그게 편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참으로 기묘한 일이지만, 그렇게 2, 3년이 지나자 나와 히다카는 제법 호흡이 잘 맞는 합작자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 P268

그날 나는 『얼음의 문』원고의 플로피디스크를 들고 히다카의 집에 갔습니다. 그에게 플로피디스크를 건네는 것은 그게 마지막이 될 터였습니다. 그가 캐나다로 떠난 뒤에는 팩스로 원고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나는 컴퓨터 통신이 가능한 기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얼음의 문』의 연재가 끝나면 우리의 관계는 소멸될 예정이었습니다. - P269

"아, 근데 내가 생각해봤는데, 그 노트에 무슨 의미가 있지?"
"의미? 그야 있고말고. 네가 발표한 소설 몇 편의 원형은 내가 쓴 거라는 증거가 될 거야."
"흥, 그럴까? 하지만 그 반대의 해석도 성립하지. 즉 그 노트의 내용은 내 작품을 본 뒤에 쓴 거라고 해석할 수도 있단 말이야." - P270

"히다카!" 나는 그를 노려보았습니다. "나는 더 이상 고스트라이터 노릇은 못 해. 너를 위해 소설을 쓰는 건.………."
"이 『얼음의 문』이 마지막이라는 거지? 나도 알아, 그건."
"그럼 왜 그런 말을 하는 거냐고!"
"딱히 이유는 없어. 우리의 관계는 변함이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뿐이야." - P271

현관을 나서자 나는 정원 쪽으로 돌아 들어가 히다카의 작업실 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창문 아래 숨어서 히다카와 후지오 미야코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예상했던대로 히다카는건성건성 대꾸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문제로 삼은 『수렵 금지구역』이라는 소설은 모두 내가 쓴 것이기 때문에 히다카로서는 확실한 대답을 하려야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 P272

그다음의 일은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요 나는 그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뒤에서 힘껏 머리를 내리셨습니다. 그는 한순간에 쓰러졌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죽었는지 확실히 알 수없었습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매듭을 짓자는 생각에 전화로 - P273

내가 고백해야 할 것은 이상입니다. 나로서는 하쓰미 씨와의 관계만은 어떻게든 비밀로 하고 싶었고, 그러자면 동기는결로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수사 관계자 여러분께 큰 폐를 끼치고 말았지만, 조금이라도 내 심정을 이해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 P274

내가 말했지만 그다지 위로가 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답답한 듯 호소했다.
"이번 일이 형사사건이고 피해자는 우리 쪽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는 건가요? 마치 연예인 스캔들처럼 여기저기서 떠들어대고, 게다가 우리쪽이 나쁘다는 식으로 말하더라고요." - P281

"이래저래 일이 많았죠. 욕설 전화며 편지가 쏟아지고 있어요. 게다가 어떻게 알아냈는지 우리친정집에까지 그런 편지를 보냈어요. 내가 남편의 집에 없다는 소식이 매스컴을 통해낱낱이 알려졌기 때문이겠죠."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 P282

"그것도 역시 각양각색이에요. 지금까지 지불했던 인세를돌려달라는 것도 있고, 그동안 열심히 응원해온 독자를 배신했다는 편지와 함께 남편의 책들을 상자에 넣어서 보낸 사람도 있었어요. 아, 그리고 문학상을 반납하라고 요구하는 편지도 많더군요." - P282

"진짜 웃기는 건, 요즘 남편책이 아주 잘 팔린다는 거예요.
그것도 일종의 관음증 같은 거겠죠?" - P283

"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문제는 돈이 아니에요. 남편이 살해된 것이 마치 자업자득이라는 식으로 여기저기서 떠들어대는 게 너무나 비통한 거예요. 노노구치 씨의 외삼촌이라는 분도 전혀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더군요." - P284

"그리고 이건 전에도 부인께 질문했던 것이지만, 노노구치가 댁을 나올 때의 상황이 사실과는 다르게 묘사되었죠? 실제로 부인은 그를 현관까지 배웅했는데 이 수기에는 대문 밖까지 배웅한 것처럼 적혀 있어요."
"네, 맞아요." - P287

"전혀 관계가 없를지도 모르는데요."
"괜찮습니다."
"그날 노노구치 씨는 돌아가는 길에 선물이라면서 내게 샴페인 한 병을 줬어요. 그것이 이 수기에는 적혀 있지 않군요."
"샴페인을? 그날이 틀림없습니까?"
"네, 틀림없어요." - P288

"전에는 선물을 가져왔었는지도 모르지만 내가 아는 한에서는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원래 노노구치 씨 본인이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거든요."
"아, 그렇군요." - P289

나는 그 샴페인은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았다. 호텔맨은잠시 머뭇거리던 끝에 자신이 집에 가져갔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이어서 그 술을 마셨느냐고 물었다. 2주일쯤 전에 다마셨다고 그는 대답했다. 병도 이미 버렸다고 했다.
"뭔가 문제가 있습니까?"
호텔맨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뇨,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에요. 근데 그 샴페인은 맛이 괜찮았어요?" - P290

집에 돌아온 뒤에는 비디오테이프를 보았다. 노노구치 오사무가 히다카의 집에 숨어들었을 때의 그 테이프였다. 감식과에 부탁해서 특별히 복제해달라고 한 것이었다.
되풀이해서 들여다봤지만, 수확 없음. 따분한 화면이 눈꺼풀에 낙인으로 찍혔을 뿐이다. - P291

"히다카 씨와 대화할 때, 그를 『수렵 금지구역』의 작가라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말 같은 것을 들은 적은없었던 거군요?"
"그런 건 없었어요. 하지만 이번 일이 터지고 보니 그것도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네요. 그때만 해도 히다카 씨가 진짜작가가 아니라는 건 상상도 못했으니까요."
그건 그야말로 당연한 말이라고 할 수 있었다. - P292

"어째서 그 남학생이 히다카 씨 본인이라고 생각했죠?"
"소설은 하마오카라는 남학생이 옛날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돼요. 게다가 내용을 보면 소설이라기보다 다큐멘터리라고 하는 게 적당할 만큼 사실적이어서 나는 그 남학생은 틀림없이 히다카 씨일 거라고만 생각했죠."
"그렇군요. 그런 거라면 이해가 되는군요." - P294

히다카 구니히코 씨라고 하면 수렵 금지구역에 등장하는하마오카라는 인물과 이미지가 잘 맞아요? 당신의 주관에 따라 대답해주셔도 좋습니다."
"나로서는 히다카 씨하고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은데, 어쩌면 그건 선입견 때문인지도 모르죠. 왜냐하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나는 사실 히다카 씨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니까요." - P296

그러던 중에 내 마음속에 불쑥 의심이 싹튼 것은 병실에서 노노구치의 조서를 작성하던 때였다. 무심코 그의 손가락 끝에 시선이 갔을 때, 돌연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무시하기로 했다. 그 상상은 너무도 기괴하고 비현실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 P297

결과적으로 노노구치는히다카 하쓰미에게 피해가 가는 것만은 막아보겠다는 일념으로 자수는 하지 않았지만, 히다카 구니히코로서는 노노구치가 절대로 자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만한 근거는 없었다. - P298

나는 노노구치 오사무와 히다카구니히코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만일 우리 수사팀이 처음부터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라면 우선 맨 처음 지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 P301

중학교 3학년에 올라온 하마오카는 몇 차례나 생명이 위급할 정도의 폭력을 당한다. 옷을 벗기고 온몸에 투명 랩을 감아꼼짝도 못 하게 한 상태에서 체육관 구석에 버려두고, 교실 창문 아래를 걸어갈 때 갑자기 위에서 염산을 뿌리기도 한다. 물론 단순하게 때리고 걷어차는 공격은 수없이 당한다. 위협적인 말이나 짓궂은 장난 수준의 폭력도 거의 날마다 이어진다.
그런 폭력의 묘사가 상세한 데다 리얼리티가 뛰어나서 그야말로 실감나게 다가왔다. 후지오 미야코가 그건 소설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라고 했던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 P302

하지만 하마오카를 작가, 즉 노노구치 오사무의 분신이라고했을 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히다카 구니히코에 해당되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작가를 히다카 구니히코라고 생각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경우에는 노노구치에 해당하는 인물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 P305

이 점에 매달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노노구치 본인이 수차례에 걸쳐 히다카 구니히코와는 친한 친구 사이였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 P306

똑같은 모순이 노노구치 오사무의 고백의 글에도 있었다.
친한 친구라면 상대의 아내를 빼앗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친구의 아내와 공모하여 그를 죽이려는 생각 따위는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정말로 친한 친구였다면 상대를 협박해 고스트라이터가 될 것을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노노구치는 히다카 구니히코를 ‘친한 친구‘라고 수차에 걸쳐 밝혔던 것일까.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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