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힘차고 우아한 십자형 둥근 천장으로 덮인 성직자 식당과 이어서 기도실, 회의실, 평신도 식당, 수도원장 사택이 있고, 사택 옆으로는 두 채의 교회 건물이 웅장하게 서 있었다. 이육중하고 오래된 건축물 주변은 그림 같은 담장과 돌출된 창과 문, 물레방아와 집들이 화환처럼 밝고 아늑하게 둘러싸고있었다. 넓고 고요한 텅 빈 앞마당에는 나무 그림자만 흔들리며 잠을 자고 있었다. - P72
구릉과 숲 속에 감춰진 채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이 멋진 수도원에 말이다. 이곳에 모여든 젊은이들은 마음을 휘젓는 도시와 가족의 삶을 떠남으로써 일상의 나쁜 것들과 격리되었다. 그리하여 수년간 다른 과목들과 더불어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공부를 진정한 삶의 목표로 삼고, 젊은 영혼의 욕망들은 가라앉힌 채 이상적인 학문의 즐거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 P72
신학생들의 생활비와 학비를 지원하는 재단은 지원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훗날 언제든 이 학교 출신임을 드러낼 수 있는 특별한 정신을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교묘하고도 확실한 방식의 낙인이었다. - P73
벽장이 이어져 있는 거대한 회랑에 상자와 바구니 들이 이리저리 늘어져 있었다. 공동 침실이라 할 수 있는 이곳에서 부모들과 함께온 소년들이 잡다한 물건을 꺼내고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모두 각자의 번호가 매겨진 옷장을 받았고, 이후 공부하게 될 생활관에도 책장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 P73
아버지들은 미소 띤 얼굴로 짐 정리를 도와주는 것 같다가도 자꾸만 시계를 확인하고 지루해하며 밖으로 빠져나갈 기회를 노렸다. 반면에 어머니들은 자식의 모든 것을 정성껏 챙겨주었다. - P74
"새로 산 셔츠는 특히 조심히 다뤄라. 3마르크 50페니나 주고 샀으니까." "빨래는 한 달에 한 번씩 기차로 보내렴. 필요하면 우편으로도 부치고, 검은 모자는 일요일에만 쓰도록 해라." 뚱뚱하고 푸근해 보이는 어느 어머니는 높은 상자에 앉아 아들에게 바늘과 실로 단추 다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 P74
대부분의 다른 소년들은 정반대 모습을 보였다. 그저 멀뚱히서서 분주히 움직이는 어머니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쩌면 다시 집으로 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 P75
기벤트도 아들이 짐 푸는 것을 도왔다. 능숙하고 민첩하게 일을 해치워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끝낸 그는 얼마 동안 한스와 기숙사 주변을 돌며 어찌할 줄 모르고 지루해했다. - P75
그때 근처에 있던 목사가 아버지의 말에 웃음 짓자 한스는 부끄러워서 아버지를 한쪽으로 이끌었다. "그래, 가족의 명예를 높여주겠다고 말해주겠니? 선생님들 말씀도 잘 들을거지?" "예, 그럼요." 한스가 대답했다. 아버지는 말을 마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곧 다시 지루해하기 시작했다. - P76
한스는 멍하니 미래의 학우들을 살펴보았다. 소년들의 소지품은 모양과 개수가 전부 비슷했지만 시골 출신과 도시 출신, 부잣집 자식과 가난한 집자식을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물론 부유한 가정에서 아들을 신학교에 보내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의 자부심이나깊은 통찰력으로, 또는 아이의 재능에 따라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 P76
학생들 중 5분의 1 정도가 안경을 쓰고 있었다. 가냘프고 귀공자 같은 슈투트가르트 출신 마마보이는 단단하고 질 좋은 중절모를 쓰고 꽤나 고상하게 행동했다. - P77
마울브론 신학교의 건물이나 규율은 겉으로 볼 때 슈바벤적인 느낌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수도원 시절부터 남아 있는 라틴어 명칭이나 새로 써 붙인 고전적인 이름표들을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었다. 학생들에게 배정된 방 이름은 ‘포럼‘, ‘헬라스‘, ‘아테네‘, ‘스파르타‘, ‘아크로폴리스‘였다. 가장 작고 멀리 떨어져 있는 방은 ‘게르마니아‘였는데, 이 이름에는 게르만족이 처한 현실을 가능하면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유토피아처럼 만들고자 하는 뜻이 담긴 것 같았다. - P78
학생들은 천장에 달린 커다란 석유 램프의 붉은빛 아래서 옷을 갈아입었다. 10시 15분이 되자 조교가 불을 껐다. 일렬로 된 잠자리에는 두 침대당 하나씩 침대 사이에 옷을 걸 수 있는 작은 의자가 있었고, 기둥에 매달린 밧줄에 아침 기상을 알리는 종이 걸려 있었다. - P78
한스는 전혀 집이 그립지 않았지만 집에 있는 자신의 작고 조용한 방만큼은 아쉬웠다. 잘 알지 못하는 새로운 것들과 많은 새 친구들이 은근히 두려웠다. 아직 자정이 되지 않았는데 침실에는 아무도 깨어 있지 않았다. - P79
다음날 작은 예배당에서 엄숙한 입학식이 열렸다. 교사들이 프록코트를 걸치고 서 있었고 교장이 인사말을 했다. 걱정이 가득한학생들은 구부정히 의자에 앉아 틈틈이 뒤쪽 멀리 앉아 있는부모들을 훔쳐보곤 했다. 어머니들은 사려 깊게 미소 지으며 아들들을 바라보았고, 당당한 자세로 교장의 인사말을 듣는 아버지들은 진지하고 단호해 보였다. - P80
학생들에게는 부모와 작별해야 하는 상황이 더 심각하고 현실적인 문제였다. 부모들은 걸어서, 혹은 역마차로, 또는 급히 다른 수단을 마련해 자식들을 남겨두고 떠나갔다. - P80
호기심 깃든 눈으로 친구들을 바라보다가 말을 걸어 고향이 어디인지, 어느 학교 출신인지 물어보았고, 함께 진땀 흘리며 통과한 주 정부 선발 고사를 주제 삼아 떠들기 시작했다. - P81
알프스 출신으로 소도시 시장 아들인 카를 하멜은 친해지려면 꽤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하멜은 자꾸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고 괜히 무심한 척하는 태도를 유지했다. - P81
하멜만큼 복잡하진 않았지만 눈에 띄는 인물은 슈바르츠발트의 좋은 가문 출신인 헤르만 하일너였다. 입학 첫날부터 전교생은 그가 시인이며 문예가라는 사실을 알았다. - P81
헬라스 방에서 가장 유별난 인물은 에밀 루치우스였다. 창백한 금발에 키가 작고 비밀이 많은 이소년은 늙은 농부처럼 집요하고 부지런했으며 감정을 별로 나타내지 않았다. 체구와 생김새는 비교적 어렸지만 아이처럼 보이기는커녕 아무런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 어른의 분위기를 풍겼다. - P82
이 조용한 괴짜의 속임수가 들통난 것은 한참이 지난 뒤였다. 루치우스가 교활한 구두쇠이자 이기주의자라는 걸 모두가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파렴치한 성격조차 너무 완벽하여 동급생들은 일종의 존경심을 보이거나 모른 척해주기도 했다. - P82
그는 항상 세면장에 가장 일찍 아니면 가장 늦게 나타났다. 다른 학생들의 수건과 비누를 사용해 자기 물건을 아끼려는 수작이었다. 수건은 거의 2주 이상 깨끗한 채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규정상 일주일마다 수건을 바꾸어야 했고, 월요일마다 수석 조교가 이를 검사했다. 그래서 루치우스도 월요일이면 깨끗한 수건을 자신의 번호가 적힌 수건걸이에 걸어놓았다. - P83
젊은 사람들은 여덟 시간을 자고 나면 대개 엄청난 허기를 느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치우스는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는 설탕 조각을 먹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설탕을 원하는 친구에게 1페니를 받고 두 조각을 내주었고, 공책 한 권과설탕 스물다섯 조각을 교환하기도 했다. - P83
여기서도 그는 현명하게도, 정신적 소유가 오로지 상대적인 가치로 발생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미리 기초를 쌓아두어야 나중에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 과목들에 집중했고, 나머지 과목은 중간 성적에 만족하는 것이었다. - P84
그래서 매일 저녁 다른 아이들이 모두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으며 취미를 즐길 때에도 루치우스는 책상에서 공부를 했다. - P84
. 하지만 지나치게 열정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루치우스도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수도원에서 제공하는 수업은 모두 무료였기 때문에 바이올린을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딱히 전에 배운 적이 있거나 음감이 있거나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닌 데다 음악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면서 말이다! - P84
루치우스가 바이올린을 배우겠다며 찾아오자 음악 교사 하스는 기겁했다. 음악 시간을 통해 이미 루치우스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루치우스의 노래는 학생들에게 큰 재미를 주었지만 교사인 하스에게는 깊은 절망을 안겨주었다. - P85
루치우스는 매주 두 번 바이올린 교습을 받고 매일 30분씩 연습했다. 루치우스가 연습을 시작하자마자 같은 방 친구들은 그에게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무자비하게 긁어대는 그 소리를 다시는 듣고싶지 않다고 말했다. - P85
그럼에도 바이올린 실력이 늘지 않자 지친 음악 교사는 심란한 얼굴로 루치우스에게 심한 말을 해버렸다. 그러자 루치우스는 더 애타게 연습에 매달렸다. 그동안은 자기만족에 빠진 장사꾼이었던 그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주름이 생겨났다. - P85
진전 없는 몇 달 후 결국 루치우스도 지칠 대로 지쳐서 조용히 음악을 포기하고 말았다. - P86
한스 기벤라트는 놀라움의 눈으로 하멜을 지켜보면서도 착하고 말 없는 룸메이트로서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다. 한스는 성실했으며 루치우스만큼이나 열심히 공부했다. 다른룸메이트들은 그런 모습에 감탄했지만 하일너는 예외였다. - P86
. 그들은 자신들을 대하는 교사들의 존대가 어색하면서도 그런 대우에 걸맞도록 올바르게 행동하고 학문적으로 더 진지해지려고 노력했다. - P86
그러나 때로는 그런 가식을 뚫고 진짜 모습인 어린아이 같은 기질이 튀어나와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럴 때면 기숙사에 쿵쾅대는 발소리와 거친 욕설이 울려 퍼졌다. - P87
첫 만남의 수줍음을 떨쳐내고 서로 탐색하고 어울리면서 마음 맞는 아이들끼리 한데 뭉치는 것이었다. (중략) 고향이 같거나 출신 학교가 같다고 해서 뭉치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부분은 완전히 새로운 친구들과 가까워졌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채우려는 내면의 충동에 따라 도시 아이들은 시골 아이들과 알프스 지역 아이들은 저지대 아이들과 친해졌다. - P87
한번은 카를 하멜이 분명하고 열정적인 태도로 우정의손길을 건넸는데 한스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를 피하고 말았다. 그 후 하멜은 곧 스파르타 방의 친구와 친해졌기 때문에 한스는 혼자가 되었다. - P88
카를 하멜은 적당한 친구가 아니었지만, 만일 다른 친구가 다가와 한스를 강하게 끌어당겼더라면 기꺼이 따라갔을 것이다. 한스는 그저 수줍은 소녀처럼 앉아서 자신보다 강하고 용기 있는 누군가가 자신을 데리러와주길, 자신의 마음을 빼앗고 행복하게 해주기만을 기다렸다. - P88
감수성이 남다른 헤르만 하일너도 마음 맞는 친구를 얻으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날마다 외출 시간이면 혼자 숲을 돌아다녔다. 특히 숲 속에 있는 호수를 좋아했다. - P89
한스는 작은 수문의 판자 다리에 앉아 무릎 위에노트를 얹은 채 잘 깎은 연필을 입에 물고 생각에 잠겨 있는 어린 시인을 발견했다. 그의 옆에는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한스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 하일너? 뭐하고 있어?" - P89
"여기 앉아봐!" 한스는 하일너 옆으로 다가가 판자 위에 앉고 두 다리를 수면 위로 흔들었다. - P90
하일녀가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저런 구름이었다면!" "그럼 어떡할 건데?" "그러면 우리는 저 하늘에서 숲과 마을과 도시와 주들 위로아름다운 배처럼 항해를 할 텐데. 배를 본 적 있니?" "아니, 없어. 하일너 너는?" - P90
떠올렸다. 하일너가 이어서 말했다. "그래, 지금과는 달랐어. 여기서 누가 그런 걸 알겠어? 전부지루한 녀석들, 위선자들뿐이야! 그저 지칠 때까지 공부하고 자신을 혹사시키지. 히브리어 알파벳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있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야. 너도 똑같아." 한스는 침묵했다. 하일너라는 친구는 정말 신기한 녀석이었다. 몽상가에다 시인이었다. - P91
하일너는 계속 비꼬는 투로 말했다. "그런데 《오디세이아》가 무슨 요리책도 아닌데, 한시간 동안 두 구절만 붙들고 앉아서 단어마다 구역질 나도록 되새김질하고 탐구한단 말이야. (후략)." - P92
한스는 오후 내내 하일너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하일너는 대체 어떤 녀석일까? 한스가 아는 고민거리나 소원 같은 것은 하일너에게 찾아볼 수 없었다. - P93
한스가 일 년간 해도못할 만큼의 농담을 하루 동안 하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우울했으며 자신의 슬픔을 마치 제삼자의 일인 양 비범하고 훌륭한 것으로 여기며 즐기곤 했다. 그날 저녁 하일너는 룸메이트들에게 자신의 숨길 수 없는 유별난 본성을 내보이고 말았다. - P93
다른 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빈정거리면서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마침내 하르트너가 하일너 앞에 서서 말했다. "야, 하일너, 창피하지도 않냐?" 울던 녀석은 방금 막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 천천히 주변을둘러보았다. "창피하다고? 너희들 앞에서?" 그러고는 큰 소리로 경멸하듯이 말했다. "절대 아니야, 이 자식들아!" - P95
한스가 가까이 다가가 창문 곁에 섰는데도 하일너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잠긴 목소리로 내뱉었다. "뭔데?" "나야." 한스가 소심하게 대답했다. "무슨 일인데?" "아무 일도 아니야." - P95
"잠깐만." 하일너는 일부러 장난스러운 투로 말했다. "진심이 아니었어." 두 소년은 얼굴을 마주 보았다. 어쩌면 그 순간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상대의 소년다운 고운 얼굴 뒤에 자기만의 고유한 특성을 지닌 인생과 자기만의 방식으로 나타낼 수 있는 영혼이 숨어 있지는 않은지 상상해보았다. - P96
젊은 학생들은 점점 공동생활에 익숙해졌다. 그들은 서로 잘 알게 되었고, 각자에 대해 어느 정도 정보를 가지고 평가도 했으며, 많은 우정 관계가 생겨났다. - P97
홀로 다니는 학생은 몇 명뿐이었다. 그중에는 음악을 향한탐욕스러운 열정에 한창 빠져 있던 루치우스도 있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우정 관계도 있었다. 헤르만 하일너와한스 기벤라트의 관계가 바로 경박한 학생과 성실한 학생, 시인과 공부벌레라는 가장 부조화한 우정이었다. - P97
하지만 학생들은 모두 각자의 우정을 나누며 자기들끼리 지냈기 때문에 이 둘의 우정에 참견하는 사람은 없었다. 학생들은 이러한 개인적인 관심과 경험에 대해서는 물론 학업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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