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제정된 정신보건법은 실제 정신장애인감금법으로 작동하였다. 이 법은 인권적 절차가 미비한 채 강압적 치료를 합법화함으로써 급격한 정신병상 증가와 감금된 정신장애인의 양산을 가져다주었다. - P3

1995년 정신보건법 제정으로 시작된 대규모 감금은 상당히 견고하게 구조화되어 있어 강제입원제도의 개선만으로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감금의 해소를 위해서는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 P3

실제 정신장애인의 감금을 유인하는 체계는 20~3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강제입원제도 자체뿐만 아니라 관련 제도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어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정신의료기관 감금으로 다른 가족들이 부당한 이익을 가질 수 있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 P4

 실제 장기간 입원생활을 하고 있는 정신장애인이 개정된 법률을 인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사 인지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권익을 구체적으로 옹호할 방법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것이다. - P4

강제입원 요건의 강화는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이 지역사회에 머물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지만 지역사회서비스나 돌봄이 부재한 상태에서는 단지 입원시간 연장에 불과할 수 있으며, 장기 입원자가 퇴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 삶의 조건을 형성하는 복지서비스를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확충하는가 하는 문제가 감금없는 정신보건의 실현에 핵심이 될 수 있다. - P5

 구체적으로 제1장에서는 강압적 치료방식에 의한 몸의 감금문제를 철학적 담론을 통해 검토하고 우리나라의 정신장애인 감금구조 형성과정을 정리하였다. 제2장에서는 감금 없는 정신보건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정책패러다임을 모색하기 위하여 ‘질병‘이면서동시에 ‘장애‘라는 정신장애의 인식론적 문제를 검토하고 인식론적 차이가 가져오는 정책적 접근의 문제를 살펴보았다. - P5

 제4장에서는 정신장애인 감금의 시발점이 되는 정신의료기관 입원제도의 문제점을 인권적 관점에서 검토하였다. 제5장에서는 입원과 관련된 정신장애인의 자기결정권 문제를 검토하고 강제입원자의 권리옹호를 위한 의사결정지원의 발전방안을 모색하였다.  - P6

제8장에서는 정신장애인의 지역사회생활의 권리 실현을 위한 법제와 프로그램의 개혁방안을 권익옹호와 장애인복지법 제15조 폐지 이후 대체입법의 필요성을 중심으로 제안하였다 - P6

아무쪼록 본서가 인권과 당사자의 자유의사를 중심으로 하는 ‘감금 없는 정신보건‘의 이념이나 실천방법을 구상하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서문에 갈음하고자 한다.

위기에 처한 당사자가 병원에 갈 마음이 없다면 병원이 아닌 위기지원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2021. 2. 3.
저자 대표 이용표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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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았는데 무뚝뚝한 대학 건물 사이에는 어스름이 숨어 들어와 있었습니다. 주위는 한층어두워져 흐린 하늘 아래 솟은 시계탑 주위에서 눈송이가 춤추고 있었습니다. 정문 밖으로 길을 따라 노점이 늘어섰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요시다 신사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 P232

"평소와 다른 점은 없었습니까?"
이마니시 씨는 "없었습니다"라며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잠깐 이야기한 다음 우리는 지요 씨의 집에서 나와 요시다산 서쪽으로 내려갔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와는 정반대 방향, 신사 뒤쪽에서 축제 속으로 들어간 셈이죠. 숲의 어스름에서 노점의 불빛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날도 눈이 왔습니다." - P232

이마니시 씨는 멈춰 서서 도리이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산 위의 다이겐궁에서 참배를 드리고 본당으로 내려올 때까지는 같이 있었단 말이죠. 그런데 저 도리이를 향해 이 참배길을 걷다 말고 사야마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도리이 밑에서 기다려 보기로 했습니다. 서로를 잃어버리는 일이 있으면 거기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니까요......" - P234

본궁으로 이어지는 비탈길을 올라가며 이마니시 씨는 말했습니다.
"지요 씨는 나를 의심하는 것 같더군요. 사야마가 모습을 감춘 이유를 숨기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죠. 지금 생각하면 아마사야마에게 배신당한 기분이었을 테죠. 화낼 상대가 없으니까나를 탓한 겁니다. 하지만 나도 나대로 지요 씨가 숨기는 게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실제로 그런 말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 P233

"이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이마니시 씨가 하얀 입김을 불며 말했습니다. "도쿄로 돌아가야 하죠?"
아닌 게 아니라 제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열대』와 사야마 쇼이치를 둘러싼 수수께끼는 감당할 수없을 만큼 커지고 말았습니다. 『천일야화』와의 연관성, <보름달의 마녀>를 그린 화가, 에이조 씨의 카드 상자 그리고 사야마 쇼이치의 실종...…….
"지요 씨는 왜 저를 교토로 불렀을까요."  - P234

"헌책방이랍니다. ‘날뛰는 밤‘이라고 써서 ‘아라비야 책방‘
"이죠."
노점으로 다가가니 주인은 멍하니 저를 쳐다봤습니다. 저를알아본 듯 한바탕 웃었습니다. 이마니시 씨는 신기한 듯 책꽂이를 구경하면서 "헌책방 포장마차는 처음 보는군요"라며 중얼거렸습니다. - P236

저는 『천일야화』를 꺼내 주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거 읽는 중입니다."
"훌륭한데. 하지만 「대단원」까지 읽으려면 여간 일이 아닐걸. 어쨌거나 천 날 밤의 분량이니까."
"셰에라자드는 용케도 이야기를 계속한다 싶군요."
"좌우지간 위대한 사람이야." - P236

추적의 실마리.
저는 생각해 봤습니다.
지요 씨의 그림엽서, 호렌도에서의 기묘한 행동, ‘보름달의 마녀에게 간다‘라는 말. 그건 지요 씨가 남겨준 ‘추적의 실마리‘
인 겁니다. 지요 씨는 어디론가 저를 인도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미궁에 갇힌 채 끝나는 건지요 씨가 의도하는 바가 결코 아닐 테죠. 저는 뭔가 중요한 실마리를 빠뜨린 겁니다. - P237

전주인의 컬렉션이 놓인 선반.
먼지를 쓴 달마 인형들, 석상의 파편, 작은 조개껍데기, 작은 과즙 우유병.
그리고 낡은 카드 상자 - P237

"뭔가 중대한 단서를 놓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카드 상자안을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귀중한 이야기를 들려주셔서감사합니다."
저는 이마니시 씨에게 머리 숙여 정중히 인사했습니다. - P238

"만약 살아 있다면 사야마는 왜 연락을 주지 않는 걸까요."
이마니시 씨는 중얼거렸습니다. "이렇게 오래 우리가 기다리고있는데."
"사야마 씨가 남긴 건 『열대』뿐입니다."
"나도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게 그 친구 꿈의 결정일 테니까요."
이마니시 씨는 차를 마시며 이야기했습니다. - P239

"그런 이야기를 두고 사야마와 여러 번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 친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겠죠. 지금 생각하면 좀 더 순순히 귀 기울여 들어볼 걸 그랬다 싶습니다. 『열대』라는 작품이 그 친구 몽상의 결정이었다면 나 같은 사람에게 읽힌들 의미가 없다고 사야마는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좁은 소견 아닙니까." - P240

저는 선반에 놓인 카드 상자에 관해 물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유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개인적인 물건이라고만 생각했다는 겁니다.
"나가세 에이조 씨의 물건일지도 모릅니다." - P240

호렌도 주인이 걱정스레 소곤거렸습니다.
저는 카드를 계산대 위에 늘어 놓았습니다. 주인과 이마니시씨는 숨죽이고 제 동작을 지켜봤습니다. 저는 카드가 ‘올바른‘
순서로 나열될 때까지 묵묵히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 P241

경이의 방에서
봐야 할 것을 놓치고 지나가다
고물상 주인의 이야기 산다이바나시 마왕
남자를 두고 가다
작은 문을 지나 - P242

커피집에서
두고 간 남자와의 대화
수수께끼의 창조에 대해
방 안의 방 - P243

이치하라역에서
또다시 천일 밤의 여자
마지막 대화
도서실의 문이 닫힌다
대단원 - P244

이 카드는 언제부터 있었습니까?"
제가 묻자 호렌도 주인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옛날부터 여기 계속 있었던 거라………… 뭐가 쓰여 있었는지저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거든요."
저희는 나열된 카드를 보며 침묵했습니다.
"이 모든 게 예언됐다는 겁니까?" 이마니시 씨는 당혹한 듯중얼거렸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그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리 없어요." - P244

"거기 갈 겁니까?"
이마니시 씨의 물음에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지요 씨는 거기에 있을까요."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가야죠."
"그럼 나도 같이 가겠습니다. 괜찮겠죠?" - P246

이마니시 씨는 불안한 듯 차창을 응시하며 말했습니다.
"전부 당신이 꾸민 일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카드는 당신이 사전에 써서 호렌도 카드 상자에 넣어놓았을지도 모릅니다. 지요 씨의 실종도 뒤에서 당신이 조종한 일일지도 모르죠."
"의심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부정하지 않는 겁니까?" - P247

저를 교토로 부른 지요 씨일까요. 하지만 지요 씨도 사야마 쇼이치가 남긴 『열대』라는 소설을 뒤쫓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모두 사야마 쇼이치가 꾸민 일일까요. 하지만 호렌도 주인이나이마니시 씨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돌이켜보면 사야마 쇼이치의 배후에는 지요 씨 아버지, 에이조 씨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거든요. 에이조 씨의 배후에는 커다란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그걸 우리는 ‘보름달의 마녀‘라고 부르는지도 모릅니다. - P247

이윽고 열차가 정차해 우리는 내렸습니다.
눈이 얇게 쌓인 플랫폼이 허옇게 보였습니다. 마키 씨는 플랫폼 끝에 서서 우산을 들고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열차가 떠나고 나자 밤의 밑바닥 같은 정적이 주위를 감쌌습니다. 아주 멀리 여행 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마키 씨, 기억하실까요? 이케우치입니다. 어젯밤에 만났죠."
"물론 기억해요." - P248

"할아버지 도서실을 조사하러 오셨죠?"
"네."
"그럴 것 같았어요."
"우리가 올 줄 아셨습니까?"
이마니시 씨가 놀란 듯 물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조만간 찾아오시리라는 건 알고 있었답니다." - P249

"지요 씨가 작업실에 찾아왔군요?"
제가 묻자 마키 씨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도서실에서 사라진 거예요."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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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십니까?"
경비원이 다가왔습니다.
전시실에 들어온 지 30분 가까이 지난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그동안 저는 내내 그 그림 앞에 서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경비원이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합니다.  - P203

택시를 타고 신신도에 가기로 했습니다.
차 안에서 시라이시 씨에게 전화를 걸어봤습니다. 일요일 정오 지나서 제가 갑자기 전화한 것 기억나시는지요. - P204

제가 아까 겪은 불가사의한 일들을 설명한들 믿어줄 리 없었겠죠.
저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으니까요.
"아뇨, 교토에서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봐서 말입니다."
"전 유리쿠정에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당신은 웃었습니다. - P204

하지만 시라이시 씨는 틀림없이 도쿄에 있었습니다. 구태여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럼 제가 착각한 거군요."
"그럴걸요."
"이거야원, 죄송합니다." - P205

사막의 궁전도 폭풍의 이미지도 모두 시라이시 씨가 인양작업으로 건져낸 것을 되풀이한 것이었습니다. 시라이시 씨의
‘목소리‘가 이야기해 준 것도 제 은밀한 망상에 불과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키 노부오 씨의 <보름달의 마녀>를 발견하고 흥분해서 제 망상이 그런 백일몽을 지어낸 게 아닐까요. - P205

저는 커피를 주문하고 노트를 폈습니다.
보름달의 마녀에게 간다.
지요 씨는 호렌도에서 그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물이 아니라 작품 이야기였을지도 모릅니다. - P206

하지만 그렇게 되면 온갖 것이 서로 연결된다는 말이죠.
이 세계의 온갖 것이 『열대』와 관계있다.
우리는 『열대』 안에 있다. - P206

이마니시 씨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코트를 벗고 제맞은편 자리에 앉았습니다. 커피를 주문하고 나서 그는 "바로 알아보겠더군요"라며 미소 지었습니다. "인상이 지요 씨에게들은 그대로입니다."
"저에 대해 아십니까?"
"당신이 뒤따라 올 거라고 했거든요. 이렇게 금방 따라잡을줄은 몰랐습니다만." - P207

"유감이지만 모릅니다." 그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래서 호렌도에서 이야기를 듣고 당신에게 연락한 겁니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은 주인에게 들었죠? 지요 씨의 행동은 참으로 불가해했습니다." - P208

"약속 시간에 와봤더니 지요 씨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로 근황을 보고한 뒤 지요 씨는 『열대』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 P208

하지만 『열대』라는 책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어젯밤 전화했을 때 먼저 『열대』에 관해 물었던 겁니다. 덕분에 지요 씨 혼자만의 망상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만." - P209

"사야마는 연구와 관련된 책 외에는 곁에 잘 두지 않는 주의라 말이죠, 바로 팔아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곧잘 내 방에 와서 책을 빌려가곤 했습니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던 터라 책은 다양하게 많이 있었죠. 아동문학에서 사회학책까지 말입니다. 소설도 이것저것 있었군요. 나는 현대문학을못 읽는 사람이라 목가적인 작품들이었답니다. 『로빈슨 크루소』, 『해저 2만 리』, 『보물섬』・・・・・ 하지만 사야마도 그런 책을 좋아해서 내 책꽂이를 종종 칭찬하곤 했습니다. 농담조로 나를
‘도서관장‘이라고 불렀지 뭡니까. 읽은 책에 관해 밤새도록 토론한 적도 있고, 둘이 레코드를 틀어놓고 담배를 피우면서 시간을 보낸 적도 있습니다. 불가사의한 시간이었군요. 그런 시간은 이제 두 번 다시 누리지 못할 테죠." - P211

"사야마 씨는 왜 모습을 감췄을까요."
"나는 모르겠군요."
"뭔가 비밀이 있었을까요."
"비밀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특히 사야마 같은 인간은 더 그럴 테죠." - P212

이마니시 씨는 한숨을 쉬더니 저를 응시했습니다.
"그나저나 나는 도무지 모르겠군요. 당신은 지요 씨를 따라 일부러 교토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 전에 모습을 감춘 사람에 관해 알고 싶어 합니다. 전부 열대라는 소설 때문 아닙니까?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가 싶습니다."
"『열대』라는 소설에 관해 알면 알수록 수수께끼 같은 세계가 확장되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뭐랄까. 이렇게 『열대』에 관해 조사하는 행위 자체가 『열대』의 연장 같습니다."
"꼭 그 책에 홀린 것처럼 들리는군요." - P213

그동안 이마니시 씨는 잠자코 듣고 있었습니다만, 그가 동요한 듯한 순간이 한 번 있었습니다. 제가 ‘보름달의 마녀‘라는 단어를 말했을 때입니다. 하지만 곧바로 동요를 감추고 그 뒤로는 표정이 달라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 P214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가는 데마다 참으로 편리하게 단서가 나타난단 말이죠. 어떻게 그렇게 술술 풀립니까.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당신은 단서를 ‘발견‘한 게 아닙니다. 그야말로 ‘창조‘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저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 P214

이마니시 씨는 저를 달래듯 말했습니다.
"인간은 원래 해석이라는 이름의 렌즈를 통해 세계를 봅니다. 그런데 그 렌즈가 어떤 이유로 일그러지거나 흠집이 나면 기묘한 세계가 나타나는 거죠. 그건 음모론의 형태를 띨 수도있고 병적인 망상의 형태를 띨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세계를 보는 당사자에게는 그게 현실 그 자체인 겁니다. 당신은 『열대』라는 일그러진 렌즈를 통해 세계를 보고 있습니다. 십중팔구 지요 씨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을테죠." - P215

"보름달의 마녀."
제가 중얼거리자 이마니시 씨는 눈을 치켜떴습니다.
(중략)
역시 이마니시 씨는 감추는 게 있는 것 같았습니다.
"질문에 답해 주시겠습니까."
"하지만 그건...... 시시한 이야기인데요. 별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꼭 듣고 싶습니다." - P216

사야마 쇼이치가 모습을 감추기 일주일쯤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날 내가 경험한 일은 사야마 쇼이치와도 관계가 없고 『열대』라는 소설과도 관계없습니다. 지요 씨와 나그리고 지요 씨의 아버지인 나가세 에이조 씨와 관련된 이야기죠. 그 점만은 미리 못 박아 두겠습니다. - P217

찾아가보니 부모님은 외출 중이고 지요 씨 혼자 있었습니다.
되레 긴장되더군요.
한 시간 정도 방에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요 씨는 마침책 몇 권을 준비해 놨고, 나도 내 서가에서 책을 골라 가져갔거든요. 도서관장님은 역시 다르네, 라고 하더군요. - P218

서가에는 에이조 씨의 일과 관련된 화학 서적 외에 문학, 철학, 역사 서적 등도 많았습니다. 그런 책들에 관해 한바탕 이야기를 한 다음 지요 씨가 꺼내든 것은 『천일야화』 번역서였습니다. 어렸을 때 서재에 몰래 들어와서 읽었다고 하더군요. 물론 나도 제목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읽어볼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책이었습니다. - P219

서재에 들어갔을 때부터 신경이 쓰였습니다만, 서재 남쪽에묘한 중 2층의 ‘곁방‘이 있었습니다. 넓이는 아마 겨우 한 평정도 될 겁니다. 작은 계단식 사다리를 이용해서 드나들고, 결방밑 공간은 창고처럼 쓰는 듯했습니다. - P220

분명히 죄책감도 있었습니다만, 그때 내 마음에 파고든 건 뭐라 말할 수 없는 느낌이었습니다. 다시금 보니 ‘방 안의 방‘이 영 기묘한 겁니다. - P220

방 안을 들여다보니 지요 씨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데 어쩐지 그 방에 사는 요정 같더군요. 나까지 들어갈 공간은 없어서 사다리 중간에 선 채 상반신만 숙여 방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몇 개 있는 선반에는 낡은 노트며 책, 옛날 물건들이 대충쌓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게 『천일야화』 사본인가?"
지요 씨는 흰 종이로 싼 책을 보여주었습니다. - P221

 지요 씨의 체온과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괜찮을까."
"응, 괜찮아. 열어 봐."
지요 씨가 재촉하듯 말했습니다.
그때 서재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돌아보니 에이조 씨가 서재에 서서 미소 짓고 있는 겁니다. - P222

이윽고 내려온 에이조 씨는 신기하다는 듯이 우리를 보며소파에 앉으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허락 없이 서재에 들어온 것을 사죄했습니다.
"저 때문이에요."
지요 씨가 면목 없다는 듯 중얼거렸습니다.
하지만 에이조 씨는 우리를 탓하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있습니다. "뭐 재미있는 게 나왔나?"라고 하는 겁니다. - P223

이윽고 에이조 씨는 정신이 든 사람처럼 중얼거렸습니다.
"옛날이야기를 하나 할까."
"옛날이야기요?"
"예전에 내가 만주에 있었다는 건 너도 알겠지."
지요 씨는 "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0년쯤 전 일이지." - P224

(전략). 그러는 동안에도 소련군 군용기가 매일 날아와 동정을 살피고 있었으니, 언제 공격이 시작돼서 옥쇄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차츰 마음이 마비돼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약해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패전 소식을 들었다.
나는 동료 몇 명과 함께 귀대했다. 호텔을 향해 만주 벌판을 달려가는 유개화차를 타고 가며 곳곳에 펼쳐지는 수수밭, 그속에 동그마니 자리하는 만주인 촌락, 흙탕물 같은 하천, 지평선에 지는 태양, 저녁 하늘에 먹구름처럼 소용돌이치는 까마귀대군을 봤다. - P226

그렇게 10분쯤 걸었을까.
문득 뒤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회색 옷을입은 소련군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잘 모르겠다. 민가의 산울타리와 담장이 복잡하게 이어지는 뒷골목으로 도망치다가 어느새 동료들과도 헤어지고 말았다.
그 기묘한 남자를 만난 건 바로 그때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이쪽."
옆길에서 태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P227

남자는 "헤헤" 하고 웃었다.
하세가와 겐이치와의 첫 만남이었다.
내가 분칸톤으로 갈 생각이라고 하자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말했다. - P228

하세가와는 벌판을 걸으며 명랑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전에 만테쓰(남만주 철도주식회사)의 직원이었다고 했다. 오지에서 근무하다가 싫어져서 퇴직하고 호텐에서 다다미 상점을 운영하는 친척을 만나러 왔다가 패전을 맞았다고 설명했다. - P228

이윽고 하세가와가 걸으면서 시 같은 것을 읊는 소리가 들렸다.
비밀이 있으면 밝히지 말라.
남에게 말하면 비밀은어느새 비밀의 향기도 없을 것이다.
자기 가슴 속에 감추지 못한비밀을 어찌해서남의 가슴이 지켜주겠는가.
하세가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언덕을 기어 올라갔을때, 그 너머 초지에 더없이 불가사의한 것이 보였다. - P229

망연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하세가와가 속삭였다.
"저게 보이는군요?"
"저게 뭡니까?"
"보름달의 마녀입니다."
"당신은 알고 있었습니까?"
"나를 줄곧 따라왔거든요." 하세가와가 말했다. - P229

그렇게 말없이 어스름 속을 나아갔다. 나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지만 달의 불가사의한 빛이 눈에 아로새겨져 지워지지않았다. ‘보름달의 마녀‘라니, 뭘까. 이 세상 것 같지 않다. 혹시나는 이미 죽은 걸까. - P230

거기까지 이야기한 뒤 이마니시 씨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36년 전 교토를 발판으로 만주로까지 도약한 이야기는 거기에서 갑자기 중단된 겁니다. 느닷없이 허공에 내던져진 기분이었습니다. - P230

그는 이마에 손을 올리며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이마니시 씨?"
"이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서재에 몰래 들어갔던 것도, 에이조 씨가 이야기한 만주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기억조차 떠올려 본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날 만주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나서 에이조 씨는 말했습니다. 그 카드상자에는 마녀가 산다고."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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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안 돌아갈 때면, 못 쓴 책을 읽는다.
말도 안 될 정도의 헛소리도 좋고 하지만 이 책은 겉보기에는 그럴듯 한 논리가 있는데 좀 더 들어가 교차검증을 한다면 이 논리구조의 허술함이 발견된다.

어렸을 적에는 좋은 책만 읽으라고 했지만, 좋은 책은 으레 재미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재미도 있고 또 비판적인 사고를 키우기에 좋은 책이다. 일단 이 책 덕분에 데이비드 버스의 ‘진화심리학‘를 사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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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차고 우아한 십자형 둥근 천장으로 덮인 성직자 식당과 이어서 기도실, 회의실, 평신도 식당, 수도원장 사택이 있고, 사택 옆으로는 두 채의 교회 건물이 웅장하게 서 있었다. 이육중하고 오래된 건축물 주변은 그림 같은 담장과 돌출된 창과 문, 물레방아와 집들이 화환처럼 밝고 아늑하게 둘러싸고있었다. 넓고 고요한 텅 빈 앞마당에는 나무 그림자만 흔들리며 잠을 자고 있었다.  - P72

 구릉과 숲 속에 감춰진 채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이 멋진 수도원에 말이다. 이곳에 모여든 젊은이들은 마음을 휘젓는 도시와 가족의 삶을 떠남으로써 일상의 나쁜 것들과 격리되었다. 그리하여 수년간 다른 과목들과 더불어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공부를 진정한 삶의 목표로 삼고, 젊은 영혼의 욕망들은 가라앉힌 채 이상적인 학문의 즐거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 P72

신학생들의 생활비와 학비를 지원하는 재단은 지원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훗날 언제든 이 학교 출신임을 드러낼 수 있는 특별한 정신을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교묘하고도 확실한 방식의 낙인이었다. - P73

벽장이 이어져 있는 거대한 회랑에 상자와 바구니 들이 이리저리 늘어져 있었다. 공동 침실이라 할 수 있는 이곳에서 부모들과 함께온 소년들이 잡다한 물건을 꺼내고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모두 각자의 번호가 매겨진 옷장을 받았고, 이후 공부하게 될 생활관에도 책장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 P73

아버지들은 미소 띤 얼굴로 짐 정리를 도와주는 것 같다가도 자꾸만 시계를 확인하고 지루해하며 밖으로 빠져나갈 기회를 노렸다. 반면에 어머니들은 자식의 모든 것을 정성껏 챙겨주었다. - P74

"새로 산 셔츠는 특히 조심히 다뤄라. 3마르크 50페니나 주고 샀으니까."
"빨래는 한 달에 한 번씩 기차로 보내렴. 필요하면 우편으로도 부치고, 검은 모자는 일요일에만 쓰도록 해라."
뚱뚱하고 푸근해 보이는 어느 어머니는 높은 상자에 앉아 아들에게 바늘과 실로 단추 다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 P74

대부분의 다른 소년들은 정반대 모습을 보였다. 그저 멀뚱히서서 분주히 움직이는 어머니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쩌면 다시 집으로 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 P75

기벤트도 아들이 짐 푸는 것을 도왔다. 능숙하고 민첩하게 일을 해치워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끝낸 그는 얼마 동안 한스와 기숙사 주변을 돌며 어찌할 줄 모르고 지루해했다. - P75

그때 근처에 있던 목사가 아버지의 말에 웃음 짓자 한스는 부끄러워서 아버지를 한쪽으로 이끌었다.
"그래, 가족의 명예를 높여주겠다고 말해주겠니? 선생님들 말씀도 잘 들을거지?"
"예, 그럼요." 한스가 대답했다.
아버지는 말을 마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곧 다시 지루해하기 시작했다. - P76

한스는 멍하니 미래의 학우들을 살펴보았다. 소년들의 소지품은 모양과 개수가 전부 비슷했지만 시골 출신과 도시 출신, 부잣집 자식과 가난한 집자식을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물론 부유한 가정에서 아들을 신학교에 보내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의 자부심이나깊은 통찰력으로, 또는 아이의 재능에 따라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 P76

학생들 중 5분의 1 정도가 안경을 쓰고 있었다. 가냘프고 귀공자 같은 슈투트가르트 출신 마마보이는 단단하고 질 좋은 중절모를 쓰고 꽤나 고상하게 행동했다. - P77

마울브론 신학교의 건물이나 규율은 겉으로 볼 때 슈바벤적인 느낌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수도원 시절부터 남아 있는 라틴어 명칭이나 새로 써 붙인 고전적인 이름표들을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었다. 학생들에게 배정된 방 이름은 ‘포럼‘, ‘헬라스‘,
‘아테네‘, ‘스파르타‘, ‘아크로폴리스‘였다. 가장 작고 멀리 떨어져 있는 방은 ‘게르마니아‘였는데, 이 이름에는 게르만족이 처한 현실을 가능하면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유토피아처럼 만들고자 하는 뜻이 담긴 것 같았다. - P78

학생들은 천장에 달린 커다란 석유 램프의 붉은빛 아래서 옷을 갈아입었다. 10시 15분이 되자 조교가 불을 껐다. 일렬로 된 잠자리에는 두 침대당 하나씩 침대 사이에 옷을 걸 수 있는 작은 의자가 있었고, 기둥에 매달린 밧줄에 아침 기상을 알리는 종이 걸려 있었다. - P78

한스는 전혀 집이 그립지 않았지만 집에 있는 자신의 작고 조용한 방만큼은 아쉬웠다. 잘 알지 못하는 새로운 것들과 많은 새 친구들이 은근히 두려웠다. 아직 자정이 되지 않았는데 침실에는 아무도 깨어 있지 않았다. - P79

 다음날 작은 예배당에서 엄숙한 입학식이 열렸다. 교사들이 프록코트를 걸치고 서 있었고 교장이 인사말을 했다. 걱정이 가득한학생들은 구부정히 의자에 앉아 틈틈이 뒤쪽 멀리 앉아 있는부모들을 훔쳐보곤 했다. 어머니들은 사려 깊게 미소 지으며 아들들을 바라보았고, 당당한 자세로 교장의 인사말을 듣는 아버지들은 진지하고 단호해 보였다. - P80

학생들에게는 부모와 작별해야 하는 상황이 더 심각하고 현실적인 문제였다. 부모들은 걸어서, 혹은 역마차로,
또는 급히 다른 수단을 마련해 자식들을 남겨두고 떠나갔다. - P80

 호기심 깃든 눈으로 친구들을 바라보다가 말을 걸어 고향이 어디인지, 어느 학교 출신인지 물어보았고, 함께 진땀 흘리며 통과한 주 정부 선발 고사를 주제 삼아 떠들기 시작했다. - P81

알프스 출신으로 소도시 시장 아들인 카를 하멜은 친해지려면 꽤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하멜은 자꾸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고 괜히 무심한 척하는 태도를 유지했다. - P81

 하멜만큼 복잡하진 않았지만 눈에 띄는 인물은 슈바르츠발트의 좋은 가문 출신인 헤르만 하일너였다. 입학 첫날부터 전교생은 그가 시인이며 문예가라는 사실을 알았다.  - P81

헬라스 방에서 가장 유별난 인물은 에밀 루치우스였다. 창백한 금발에 키가 작고 비밀이 많은 이소년은 늙은 농부처럼 집요하고 부지런했으며 감정을 별로 나타내지 않았다. 체구와 생김새는 비교적 어렸지만 아이처럼 보이기는커녕 아무런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 어른의 분위기를 풍겼다.  - P82

이 조용한 괴짜의 속임수가 들통난 것은 한참이 지난 뒤였다. 루치우스가 교활한 구두쇠이자 이기주의자라는 걸 모두가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파렴치한 성격조차 너무 완벽하여 동급생들은 일종의 존경심을 보이거나 모른 척해주기도 했다. - P82

그는 항상 세면장에 가장 일찍 아니면 가장 늦게 나타났다. 다른 학생들의 수건과 비누를 사용해 자기 물건을 아끼려는 수작이었다. 수건은 거의 2주 이상 깨끗한 채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규정상 일주일마다 수건을 바꾸어야 했고, 월요일마다 수석 조교가 이를 검사했다. 그래서 루치우스도 월요일이면 깨끗한 수건을 자신의 번호가 적힌 수건걸이에 걸어놓았다. - P83

젊은 사람들은 여덟 시간을 자고 나면 대개 엄청난 허기를 느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치우스는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는 설탕 조각을 먹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설탕을 원하는 친구에게 1페니를 받고 두 조각을 내주었고, 공책 한 권과설탕 스물다섯 조각을 교환하기도 했다. - P83

 여기서도 그는 현명하게도, 정신적 소유가 오로지 상대적인 가치로 발생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미리 기초를 쌓아두어야 나중에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 과목들에 집중했고, 나머지 과목은 중간 성적에 만족하는 것이었다. - P84

그래서 매일 저녁 다른 아이들이 모두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으며 취미를 즐길 때에도 루치우스는 책상에서 공부를 했다. - P84

. 하지만 지나치게 열정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루치우스도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수도원에서 제공하는 수업은 모두 무료였기 때문에 바이올린을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딱히 전에 배운 적이 있거나 음감이 있거나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닌 데다 음악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면서 말이다! - P84

루치우스가 바이올린을 배우겠다며 찾아오자 음악 교사 하스는 기겁했다. 음악 시간을 통해 이미 루치우스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루치우스의 노래는 학생들에게 큰 재미를 주었지만 교사인 하스에게는 깊은 절망을 안겨주었다. - P85

루치우스는 매주 두 번 바이올린 교습을 받고 매일 30분씩 연습했다. 루치우스가 연습을 시작하자마자 같은 방 친구들은 그에게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무자비하게 긁어대는 그 소리를 다시는 듣고싶지 않다고 말했다. - P85

그럼에도 바이올린 실력이 늘지 않자 지친 음악 교사는 심란한 얼굴로 루치우스에게 심한 말을 해버렸다. 그러자 루치우스는 더 애타게 연습에 매달렸다. 그동안은 자기만족에 빠진 장사꾼이었던 그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주름이 생겨났다. - P85

진전 없는 몇 달 후 결국 루치우스도 지칠 대로 지쳐서 조용히 음악을 포기하고 말았다. - P86

한스 기벤라트는 놀라움의 눈으로 하멜을 지켜보면서도 착하고 말 없는 룸메이트로서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다.
한스는 성실했으며 루치우스만큼이나 열심히 공부했다. 다른룸메이트들은 그런 모습에 감탄했지만 하일너는 예외였다. - P86

. 그들은 자신들을 대하는 교사들의 존대가 어색하면서도 그런 대우에 걸맞도록 올바르게 행동하고 학문적으로 더 진지해지려고 노력했다. - P86

 그러나 때로는 그런 가식을 뚫고 진짜 모습인 어린아이 같은 기질이 튀어나와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럴 때면 기숙사에 쿵쾅대는 발소리와 거친 욕설이 울려 퍼졌다. - P87

첫 만남의 수줍음을 떨쳐내고 서로 탐색하고 어울리면서 마음 맞는 아이들끼리 한데 뭉치는 것이었다. (중략) 고향이 같거나 출신 학교가 같다고 해서 뭉치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부분은 완전히 새로운 친구들과 가까워졌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채우려는 내면의 충동에 따라 도시 아이들은 시골 아이들과 알프스 지역 아이들은 저지대 아이들과 친해졌다.  - P87

한번은 카를 하멜이 분명하고 열정적인 태도로 우정의손길을 건넸는데 한스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를 피하고 말았다. 그 후 하멜은 곧 스파르타 방의 친구와 친해졌기 때문에 한스는 혼자가 되었다. - P88

 카를 하멜은 적당한 친구가 아니었지만, 만일 다른 친구가 다가와 한스를 강하게 끌어당겼더라면 기꺼이 따라갔을 것이다. 한스는 그저 수줍은 소녀처럼 앉아서 자신보다 강하고 용기 있는 누군가가 자신을 데리러와주길, 자신의 마음을 빼앗고 행복하게 해주기만을 기다렸다. - P88

감수성이 남다른 헤르만 하일너도 마음 맞는 친구를 얻으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날마다 외출 시간이면 혼자 숲을 돌아다녔다. 특히 숲 속에 있는 호수를 좋아했다. - P89

한스는 작은 수문의 판자 다리에 앉아 무릎 위에노트를 얹은 채 잘 깎은 연필을 입에 물고 생각에 잠겨 있는 어린 시인을 발견했다. 그의 옆에는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한스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 하일너? 뭐하고 있어?" - P89

"여기 앉아봐!"
한스는 하일너 옆으로 다가가 판자 위에 앉고 두 다리를 수면 위로 흔들었다. - P90

하일녀가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저런 구름이었다면!"
"그럼 어떡할 건데?"
"그러면 우리는 저 하늘에서 숲과 마을과 도시와 주들 위로아름다운 배처럼 항해를 할 텐데. 배를 본 적 있니?"
"아니, 없어. 하일너 너는?" - P90

떠올렸다. 하일너가 이어서 말했다.
"그래, 지금과는 달랐어. 여기서 누가 그런 걸 알겠어? 전부지루한 녀석들, 위선자들뿐이야! 그저 지칠 때까지 공부하고 자신을 혹사시키지. 히브리어 알파벳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있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야. 너도 똑같아."
한스는 침묵했다. 하일너라는 친구는 정말 신기한 녀석이었다. 몽상가에다 시인이었다. - P91

하일너는 계속 비꼬는 투로 말했다. "그런데 《오디세이아》가 무슨 요리책도 아닌데, 한시간 동안 두 구절만 붙들고 앉아서 단어마다 구역질 나도록 되새김질하고 탐구한단 말이야. (후략)." - P92

한스는 오후 내내 하일너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하일너는 대체 어떤 녀석일까? 한스가 아는 고민거리나 소원 같은 것은 하일너에게 찾아볼 수 없었다. - P93

한스가 일 년간 해도못할 만큼의 농담을 하루 동안 하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우울했으며 자신의 슬픔을 마치 제삼자의 일인 양 비범하고 훌륭한 것으로 여기며 즐기곤 했다. 그날 저녁 하일너는 룸메이트들에게 자신의 숨길 수 없는 유별난 본성을 내보이고 말았다. - P93

다른 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빈정거리면서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마침내 하르트너가 하일너 앞에 서서 말했다.
"야, 하일너, 창피하지도 않냐?"
울던 녀석은 방금 막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 천천히 주변을둘러보았다.
"창피하다고? 너희들 앞에서?" 그러고는 큰 소리로 경멸하듯이 말했다. "절대 아니야, 이 자식들아!" - P95

한스가 가까이 다가가 창문 곁에 섰는데도 하일너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잠긴 목소리로 내뱉었다.
"뭔데?"
"나야." 한스가 소심하게 대답했다.
"무슨 일인데?"
"아무 일도 아니야." - P95

"잠깐만." 하일너는 일부러 장난스러운 투로 말했다. "진심이 아니었어."
두 소년은 얼굴을 마주 보았다. 어쩌면 그 순간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상대의 소년다운 고운 얼굴 뒤에 자기만의 고유한 특성을 지닌 인생과 자기만의 방식으로 나타낼 수 있는 영혼이 숨어 있지는 않은지 상상해보았다. - P96

젊은 학생들은 점점 공동생활에 익숙해졌다. 그들은 서로 잘 알게 되었고, 각자에 대해 어느 정도 정보를 가지고 평가도 했으며, 많은 우정 관계가 생겨났다. - P97

홀로 다니는 학생은 몇 명뿐이었다. 그중에는 음악을 향한탐욕스러운 열정에 한창 빠져 있던 루치우스도 있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우정 관계도 있었다. 헤르만 하일너와한스 기벤라트의 관계가 바로 경박한 학생과 성실한 학생, 시인과 공부벌레라는 가장 부조화한 우정이었다. - P97

하지만 학생들은 모두 각자의 우정을 나누며 자기들끼리 지냈기 때문에 이 둘의 우정에 참견하는 사람은 없었다. 학생들은 이러한 개인적인 관심과 경험에 대해서는 물론 학업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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