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으십니까?"
경비원이 다가왔습니다.
전시실에 들어온 지 30분 가까이 지난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그동안 저는 내내 그 그림 앞에 서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경비원이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합니다.  - P203

택시를 타고 신신도에 가기로 했습니다.
차 안에서 시라이시 씨에게 전화를 걸어봤습니다. 일요일 정오 지나서 제가 갑자기 전화한 것 기억나시는지요. - P204

제가 아까 겪은 불가사의한 일들을 설명한들 믿어줄 리 없었겠죠.
저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으니까요.
"아뇨, 교토에서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봐서 말입니다."
"전 유리쿠정에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당신은 웃었습니다. - P204

하지만 시라이시 씨는 틀림없이 도쿄에 있었습니다. 구태여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럼 제가 착각한 거군요."
"그럴걸요."
"이거야원, 죄송합니다." - P205

사막의 궁전도 폭풍의 이미지도 모두 시라이시 씨가 인양작업으로 건져낸 것을 되풀이한 것이었습니다. 시라이시 씨의
‘목소리‘가 이야기해 준 것도 제 은밀한 망상에 불과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키 노부오 씨의 <보름달의 마녀>를 발견하고 흥분해서 제 망상이 그런 백일몽을 지어낸 게 아닐까요. - P205

저는 커피를 주문하고 노트를 폈습니다.
보름달의 마녀에게 간다.
지요 씨는 호렌도에서 그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물이 아니라 작품 이야기였을지도 모릅니다. - P206

하지만 그렇게 되면 온갖 것이 서로 연결된다는 말이죠.
이 세계의 온갖 것이 『열대』와 관계있다.
우리는 『열대』 안에 있다. - P206

이마니시 씨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코트를 벗고 제맞은편 자리에 앉았습니다. 커피를 주문하고 나서 그는 "바로 알아보겠더군요"라며 미소 지었습니다. "인상이 지요 씨에게들은 그대로입니다."
"저에 대해 아십니까?"
"당신이 뒤따라 올 거라고 했거든요. 이렇게 금방 따라잡을줄은 몰랐습니다만." - P207

"유감이지만 모릅니다." 그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래서 호렌도에서 이야기를 듣고 당신에게 연락한 겁니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은 주인에게 들었죠? 지요 씨의 행동은 참으로 불가해했습니다." - P208

"약속 시간에 와봤더니 지요 씨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로 근황을 보고한 뒤 지요 씨는 『열대』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 P208

하지만 『열대』라는 책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어젯밤 전화했을 때 먼저 『열대』에 관해 물었던 겁니다. 덕분에 지요 씨 혼자만의 망상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만." - P209

"사야마는 연구와 관련된 책 외에는 곁에 잘 두지 않는 주의라 말이죠, 바로 팔아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곧잘 내 방에 와서 책을 빌려가곤 했습니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던 터라 책은 다양하게 많이 있었죠. 아동문학에서 사회학책까지 말입니다. 소설도 이것저것 있었군요. 나는 현대문학을못 읽는 사람이라 목가적인 작품들이었답니다. 『로빈슨 크루소』, 『해저 2만 리』, 『보물섬』・・・・・ 하지만 사야마도 그런 책을 좋아해서 내 책꽂이를 종종 칭찬하곤 했습니다. 농담조로 나를
‘도서관장‘이라고 불렀지 뭡니까. 읽은 책에 관해 밤새도록 토론한 적도 있고, 둘이 레코드를 틀어놓고 담배를 피우면서 시간을 보낸 적도 있습니다. 불가사의한 시간이었군요. 그런 시간은 이제 두 번 다시 누리지 못할 테죠." - P211

"사야마 씨는 왜 모습을 감췄을까요."
"나는 모르겠군요."
"뭔가 비밀이 있었을까요."
"비밀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특히 사야마 같은 인간은 더 그럴 테죠." - P212

이마니시 씨는 한숨을 쉬더니 저를 응시했습니다.
"그나저나 나는 도무지 모르겠군요. 당신은 지요 씨를 따라 일부러 교토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 전에 모습을 감춘 사람에 관해 알고 싶어 합니다. 전부 열대라는 소설 때문 아닙니까?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가 싶습니다."
"『열대』라는 소설에 관해 알면 알수록 수수께끼 같은 세계가 확장되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뭐랄까. 이렇게 『열대』에 관해 조사하는 행위 자체가 『열대』의 연장 같습니다."
"꼭 그 책에 홀린 것처럼 들리는군요." - P213

그동안 이마니시 씨는 잠자코 듣고 있었습니다만, 그가 동요한 듯한 순간이 한 번 있었습니다. 제가 ‘보름달의 마녀‘라는 단어를 말했을 때입니다. 하지만 곧바로 동요를 감추고 그 뒤로는 표정이 달라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 P214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가는 데마다 참으로 편리하게 단서가 나타난단 말이죠. 어떻게 그렇게 술술 풀립니까.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당신은 단서를 ‘발견‘한 게 아닙니다. 그야말로 ‘창조‘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저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 P214

이마니시 씨는 저를 달래듯 말했습니다.
"인간은 원래 해석이라는 이름의 렌즈를 통해 세계를 봅니다. 그런데 그 렌즈가 어떤 이유로 일그러지거나 흠집이 나면 기묘한 세계가 나타나는 거죠. 그건 음모론의 형태를 띨 수도있고 병적인 망상의 형태를 띨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세계를 보는 당사자에게는 그게 현실 그 자체인 겁니다. 당신은 『열대』라는 일그러진 렌즈를 통해 세계를 보고 있습니다. 십중팔구 지요 씨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을테죠." - P215

"보름달의 마녀."
제가 중얼거리자 이마니시 씨는 눈을 치켜떴습니다.
(중략)
역시 이마니시 씨는 감추는 게 있는 것 같았습니다.
"질문에 답해 주시겠습니까."
"하지만 그건...... 시시한 이야기인데요. 별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꼭 듣고 싶습니다." - P216

사야마 쇼이치가 모습을 감추기 일주일쯤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날 내가 경험한 일은 사야마 쇼이치와도 관계가 없고 『열대』라는 소설과도 관계없습니다. 지요 씨와 나그리고 지요 씨의 아버지인 나가세 에이조 씨와 관련된 이야기죠. 그 점만은 미리 못 박아 두겠습니다. - P217

찾아가보니 부모님은 외출 중이고 지요 씨 혼자 있었습니다.
되레 긴장되더군요.
한 시간 정도 방에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요 씨는 마침책 몇 권을 준비해 놨고, 나도 내 서가에서 책을 골라 가져갔거든요. 도서관장님은 역시 다르네, 라고 하더군요. - P218

서가에는 에이조 씨의 일과 관련된 화학 서적 외에 문학, 철학, 역사 서적 등도 많았습니다. 그런 책들에 관해 한바탕 이야기를 한 다음 지요 씨가 꺼내든 것은 『천일야화』 번역서였습니다. 어렸을 때 서재에 몰래 들어와서 읽었다고 하더군요. 물론 나도 제목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읽어볼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책이었습니다. - P219

서재에 들어갔을 때부터 신경이 쓰였습니다만, 서재 남쪽에묘한 중 2층의 ‘곁방‘이 있었습니다. 넓이는 아마 겨우 한 평정도 될 겁니다. 작은 계단식 사다리를 이용해서 드나들고, 결방밑 공간은 창고처럼 쓰는 듯했습니다. - P220

분명히 죄책감도 있었습니다만, 그때 내 마음에 파고든 건 뭐라 말할 수 없는 느낌이었습니다. 다시금 보니 ‘방 안의 방‘이 영 기묘한 겁니다. - P220

방 안을 들여다보니 지요 씨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데 어쩐지 그 방에 사는 요정 같더군요. 나까지 들어갈 공간은 없어서 사다리 중간에 선 채 상반신만 숙여 방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몇 개 있는 선반에는 낡은 노트며 책, 옛날 물건들이 대충쌓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게 『천일야화』 사본인가?"
지요 씨는 흰 종이로 싼 책을 보여주었습니다. - P221

 지요 씨의 체온과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괜찮을까."
"응, 괜찮아. 열어 봐."
지요 씨가 재촉하듯 말했습니다.
그때 서재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돌아보니 에이조 씨가 서재에 서서 미소 짓고 있는 겁니다. - P222

이윽고 내려온 에이조 씨는 신기하다는 듯이 우리를 보며소파에 앉으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허락 없이 서재에 들어온 것을 사죄했습니다.
"저 때문이에요."
지요 씨가 면목 없다는 듯 중얼거렸습니다.
하지만 에이조 씨는 우리를 탓하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있습니다. "뭐 재미있는 게 나왔나?"라고 하는 겁니다. - P223

이윽고 에이조 씨는 정신이 든 사람처럼 중얼거렸습니다.
"옛날이야기를 하나 할까."
"옛날이야기요?"
"예전에 내가 만주에 있었다는 건 너도 알겠지."
지요 씨는 "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0년쯤 전 일이지." - P224

(전략). 그러는 동안에도 소련군 군용기가 매일 날아와 동정을 살피고 있었으니, 언제 공격이 시작돼서 옥쇄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차츰 마음이 마비돼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약해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패전 소식을 들었다.
나는 동료 몇 명과 함께 귀대했다. 호텔을 향해 만주 벌판을 달려가는 유개화차를 타고 가며 곳곳에 펼쳐지는 수수밭, 그속에 동그마니 자리하는 만주인 촌락, 흙탕물 같은 하천, 지평선에 지는 태양, 저녁 하늘에 먹구름처럼 소용돌이치는 까마귀대군을 봤다. - P226

그렇게 10분쯤 걸었을까.
문득 뒤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회색 옷을입은 소련군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잘 모르겠다. 민가의 산울타리와 담장이 복잡하게 이어지는 뒷골목으로 도망치다가 어느새 동료들과도 헤어지고 말았다.
그 기묘한 남자를 만난 건 바로 그때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이쪽."
옆길에서 태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P227

남자는 "헤헤" 하고 웃었다.
하세가와 겐이치와의 첫 만남이었다.
내가 분칸톤으로 갈 생각이라고 하자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말했다. - P228

하세가와는 벌판을 걸으며 명랑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전에 만테쓰(남만주 철도주식회사)의 직원이었다고 했다. 오지에서 근무하다가 싫어져서 퇴직하고 호텐에서 다다미 상점을 운영하는 친척을 만나러 왔다가 패전을 맞았다고 설명했다. - P228

이윽고 하세가와가 걸으면서 시 같은 것을 읊는 소리가 들렸다.
비밀이 있으면 밝히지 말라.
남에게 말하면 비밀은어느새 비밀의 향기도 없을 것이다.
자기 가슴 속에 감추지 못한비밀을 어찌해서남의 가슴이 지켜주겠는가.
하세가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언덕을 기어 올라갔을때, 그 너머 초지에 더없이 불가사의한 것이 보였다. - P229

망연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하세가와가 속삭였다.
"저게 보이는군요?"
"저게 뭡니까?"
"보름달의 마녀입니다."
"당신은 알고 있었습니까?"
"나를 줄곧 따라왔거든요." 하세가와가 말했다. - P229

그렇게 말없이 어스름 속을 나아갔다. 나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지만 달의 불가사의한 빛이 눈에 아로새겨져 지워지지않았다. ‘보름달의 마녀‘라니, 뭘까. 이 세상 것 같지 않다. 혹시나는 이미 죽은 걸까. - P230

거기까지 이야기한 뒤 이마니시 씨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36년 전 교토를 발판으로 만주로까지 도약한 이야기는 거기에서 갑자기 중단된 겁니다. 느닷없이 허공에 내던져진 기분이었습니다. - P230

그는 이마에 손을 올리며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이마니시 씨?"
"이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서재에 몰래 들어갔던 것도, 에이조 씨가 이야기한 만주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기억조차 떠올려 본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날 만주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나서 에이조 씨는 말했습니다. 그 카드상자에는 마녀가 산다고."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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