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난다.
다른 세상 일이겠지.




조지 워싱턴은 미국의 첫 대통령으로서 국가 체계의 창달을 주관한 인물로 기록되는데, 이것은 소수의 혁명가에게만 허락된 자랑스러운 이력이 아닐 수없다. - P149

워싱턴은 1732년, 성공한 플랜테이션 소유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워싱턴일가는 1600년대 중반에 잉글랜드에서 버지니아로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 P149

워싱턴의 군 경력은 프렌치 인디언 전쟁 (영국과 프랑스 간의 7년 전쟁에서 영국 측에서 싸우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753년 10월, 영국에서 파견한 버지니아 총독은 워싱턴에게 프랑스를 분쟁 지역에서 물러나게 설득하는 임무를 맡겼다.
프랑스는 예상대로 거절했다. 워싱턴의 군대는 프랑스 전초기지를 급습하여 지휘관을 살해했지만 곧 전세가 뒤집혀 포위되고 말았다. - P150

그러나 영국은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많은 빚을 지게 되었고, 식민지에서 세금을 올려 해결해보려 한 정책들로 인해 불가피하게 식민지는 혁명의 기운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워싱턴이 다시 군복을 입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 P151

1775년 5월, 2차 대륙회의가 열릴 때쯤 식민지 민병대는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영국군과 전투를 치른 상태였고, 대륙회의에서는 제대로 전쟁을 수행할수 있도록 식민지 민병대를 대륙군으로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 P151

전쟁 초기인 1776년 3월, 워싱턴 휘하의 군대는 보스턴에서 영국 점령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다른 전투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대륙군은뉴욕에서 윌리엄 하우가 이끄는 영국군에게 연패했고, 11월에 끝내 워싱턴은하우로부터 뉴욕을 사수하지 못했다. - P152

식민지 군과 프랑스군의 연합작전이 시작되었다. 워싱턴이 도시를 포위하고 프랑스 함대가 바다에서 에워싸는 작전이었다. 작전은 효과적이었다. 한덜도 채 못 된 1781년 10월 19일, 콘월리스가 항복을 해왔다. 8천 명이 넘는포로들의 숫자는 영국이 전쟁을 끝내는 협상에 동의할 수밖에 없음을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았다. - P153

준엄한 경고

1796년에 대통령직을 물러나는 고별인사에서 워싱턴은 미국의 장래에 대해 몇 가지선견지명 있는 당부를 했다. 그중에는 지역 파벌주의에 대한 경고가 있었는데,
미국은 이 문제를 풀지 못하고 결국 남북전쟁을 치르게 된다. - P153

미국연합규약에 의해 세워진 허약한 연방정부 운영은 오래가지 않아 실패로 판명되었다. 각 주는 빚에 허덕였고, 의회는 제한된 권력 때문에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새 국가가 오래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 P154

워싱턴은 새 국가의 첫 행정권으로서 선례에 관해 극도로 신경을 썼다. 그가-Thomas Jefferson과하는 모든 행적이 역사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토머스 제퍼슨The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urtilton 같은 정치적 라이벌을 핵심으로 하는 올스타 자문단을 구성해 이들의 의견을 경청함으로써 경쟁자의 생각을 참고한 것도그 일환이었다. - P154

그는 자신의 부통령이었던 존 애덤스가 최초로 치러진 경쟁선거에서 토머스 제퍼슨을 이기고 대통령이 되는 것을 지켜본 후 은퇴하여 마운트돌아갔다. 그러나 워싱턴의 은퇴 생활은 3년도 이어지지 못했다. 1799년 12월 14일, 예순일곱 살에 편도선 감염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 P155

고귀한 로마인

워싱턴이 평생 권력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자 그에게는
‘미국의 킨키나투스(The American Cincinnatus)‘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이 별명은 로마를 우러르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찬사인 셈이었다. - P155

토머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

시기 : 1743 - 1826
지역 : 미합중국
투쟁 대상 : 영국 - P164

토머스 제퍼슨은 독립전쟁에서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었다. 그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행동하게 만드는 훌륭한 연설가도 아니었고, 군중을 움직이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도 아니었다. - P164

 그의 아버지는 농업 외에 버지니아의 전체 지도를 최초로 완성한 측량기사였으며, 당대에 유명한 장서 수집가이기도 했다. 덕분에 토머스 제퍼슨은 아버지의 책으로 혼자서 언어를 익히고(그는 5개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공식적인 교육의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채웠다. - P164

지방정부에서 몇 가지 역할을 연이어 수행한 후 걸출한 젊은 변호사로서입지를 세운 제퍼슨은 스물다섯 살에 불과한 1768년에 버지니아주 의회 하원에 선출되었다. 비록 대중연설은 잘 못 했지만 종이에 옮겨진 그의 발언은누구보다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 P165

제1차 대륙회의가 공고되었을 때, 제퍼슨은 ‘영국령 아메리카의 권리에 대한개관‘이라는 글을 써서 팸플릿으로 만들어 버지니아 대의원단에 나누어주었다. 그의 글은 너무 급진적이어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제퍼슨의 주장은 강력했다.  - P165

이 팸플릿 덕분에 제퍼슨은 혁명의 대변자이자 노련한 문사로 인식되어 제2차 대륙회의의 버지니아 대의원단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1775년 5월에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이미 혁명은 시작된 후였으며, 회의를 통해 조지 3세에게 표한 항의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 P166

1776년 6월, 제퍼슨이 세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혁명 문서 중 하나를 만드는 데는 단 17일이 걸렸다. 무엇보다 이 글에서 그는 미국 민주주의 핵심을 설파하였는데, 바로 이 문단이다. - P166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자로부터 몇 가지 양도할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으니,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가 그것이다." - P166

물론 식민지는 독립전쟁의 승리를 통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해냈다.
그동안 제퍼슨은 버지니아의 정치로 눈을 돌려 역량을 집중했으며, 그 결과 의회 의원을 거쳐 1779년에는 주지사가 되었다. - P168

 중앙정부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영국의 통치하에서 식민지가 부딪혔던 것과 똑같은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또한 대통령이 지명한 관리들은 명칭만 다를 뿐인 실질적인 왕을 만들 수도 있다고 보았다. - P168

그러나 그에게는 결정권이 없었다. 1787년, 제퍼슨이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로 나가있는 동안 제헌협의회가 결성되었다. 1789년 9월에 그가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헌법이 국법으로 작동한지 6개월이 넘은 뒤였다. - P169

제퍼슨은 친구인 조지 워싱턴의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으로 봉직했으며, 워싱턴의 임기가 끝나자 재선에 출마하여 연임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덕분에 워싱턴은 가장 중요한 시기인 건국 초기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대통령으로서 국가적 단합을 이뤄낼 수가 있었다. - P169

연방파는 외교 문제와 관련해 상대국으로서 영국을 선호한 반면, 제퍼슨이이끄는 공화파는 프랑스를 선호했다. 연방파는 권력의 중앙정부 집중을 원했으며, 공화파는 개별 주에게로 권력이 분산되는 쪽을 원했다. - P16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 하기 싫다.
다른 친구가 여행갔다는 말을 들었다. 바빠서 이야기를 못 들었는데, 결국 갔구나.

이자야는 그 웃을 수 없는 웃음을 유지한 채 조금 전과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왜? 대체 뭐가 심하다는 걸까. 이해가 안 되는걸."
"왜라니…."
"너희들은 "
그는 여자의 말을 자르고 강하게 다그쳤다. - P119

"몰라. 하나도 몰라. 너는 저세상에는 무(無)밖에는 없다고 했지. 그 부분이 잘못됐단 말이야.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도로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죽는다는 건 없어진다는 뜻이야. 사라지는 건 고통이 아니야. 존재라고." - P120

사실 이자야가 하는 말은 구멍투성이 의견이었으며 얼마든지반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두 여자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허나 어떠한 반론을 하든 상대에게 과연 통할까.
의문이아니라 공포가 두 여자의 내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 그건 당신 생각일 뿐이잖아?!" - P121

"하지만 너희들은 다르잖아. 저세상도 어중간하게밖에 안 믿어, 아니면 네가 믿는 종교는 자살을 긍정하면서 ‘취직과 연애에 실패하면 죽어도 좋다고 가르치기라도 하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트집 잡지 않을 테고 멋지다는 생각도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냥 닥쳐." - P121

공기가 흐르기 시작한 가운데, 여전히 굳어 있는 두 사람에게 그는 조금 전까지와는 180도 다른 종류의 말을 걸었다.
"이야, 하하하, 아까 ‘죽은 후에는 어쩔 거냐‘ 라고 물은 건실은 한마디로 돈 문제였어. - P122

"난 낭비를 싫어하거든. 보험 같은 건 최근엔 따지는 게 많아서 무리지만 돈 같은 걸 되도록 여러 군데에서 빌려서는 나에게 넘긴 뒤에 죽어주면 안 될까? 너희들의 죽음은 헛되어도 너희들의 돈은 헛되지 않게끔 말이야. 너희들의 호적이나 몸 같은것도 남김없이 팔아치우면 상당한 액수가 될 테고, 그럴 수 있는 루트도 알고 있거든." - P122

여자들이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이번에도 역시 가로막듯 이자야가 큰 소리로 말한다.
"그럼 문제입니다. 첫번째 질문. 나는 왜 입구에 가장 가까운자리에 앉아 있을까요?" - P123

"힌트 1. 이 슈트케이스 알맹이는 비었습니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여자들 사이에 기분 나쁜 예감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처음 만난 두 사람이지만 이자야에 대한 감정은 감탄스러울 만큼 호흡이 잘 맞았다.
" 2. 이 슈트케이스 사이즈는 너희들에게 맞추었습니다." - P123

"세 번째 질문. 너희들이 힘을 합쳐나에게 덤볐다면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왜 그러질 못했을까요. 힌트, 음료수를 가져왔을때 내가 컵을 돌렸습니다."
세계가 돈다. 돈다. 돈다.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두 여자는 이자야의 목소리를 들었다. 마치 자장가처럼 상냥한 목소리가 어두워지는 세계 안으로 스며든다. - P124

『그래서 이놈들을 공원 벤치에 앉혀놓고 끝인가?』세르티가 진화한 전자수첩-키보드 달린 PDA에 써넣은 문장을 보고 이자야는 즐거운 표정으로 "응"이라고 짧게 말했다.
새까만 그림자를 앞에 놓고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돈다발을 세었다. - P125

싱겁게 끝난 일. 이번은 그나마 뒤끝이 찝찝하지 않은 편이다. 결코 좋다고도 할 수 없지만.
『경찰이 관련될 만한 일인가? 괜한 불똥은 사양하겠어.』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니까. 무슨 시체를 옮긴 것도 아니고 만취한 여자 둘을 벤치로 옮긴 것뿐인데 뭘."
『슈트케이스에 넣어서 말인가?』 - P126

당연한 의문에 이자야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이 표정만 보고있자면 도저히 어둠의 세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담근 인간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어차피 죽으면 없어질 건데 그 전에 하고픈 걸 실컷 안 하면 손해잖아?" - P127

오리하야 이자야는 평범한 인간이다.
악인으로서 두드러진 폭력 성향을 가진 것도 아니고, 특별히 냉정하다거나 살인에 아무런 느낌도 받지 않는 타입도 아니다.
다만 평범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욕망이나 혈기를 주체 못하고 범하는 금기, 이러한 모두를 동시에 갖추고 있을 뿐이다. 악의 카리스마 따위가 아니라 그저 순수하게 자신이 흥미 있는 것에 탐욕스러운 생물일 뿐이다. - P127

그는 세르티에게 뒷일을 맡기고 몇 주일 만의 이케부쿠로를만끽한 다음 돌아가기로 했다. - P128

또 하나는 -최근 들어 이케부쿠로에서 입에 오르내리는 ‘다라즈‘ 라는 조직이었다.
"재밌어. 재밌어. 정말 재밌어. 이 거리는 정보통인 나조차 모르는 것들로 가득 넘치고 또 생겼다가는 사라지지. 이래서 내가인간이 모이는 거리를 못 떠난다니까. 인간, 러브! 나는 인간이좋아! 사랑해! 그렇기 때문에 인간도 나를 사랑해야만 한다고."
그는 가슴 주머니에서 자신의 PDA를 꺼냈다. - P1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화 ‘플라워 킬링 문‘을 보러가고 싶다.


이 책에 소개된 인물들 모두가 만델라만큼 훌륭한가에 대해서는 이견이있을 수 있지만, 그들 모두가 자신의 시대에 중요한 혁명가였던 것은 분명하다. - P4

짐작하겠지만 딱 50명의 혁명가를 추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4천여년 전, 세계 최초로 강력한 제국을 이루었던 아시리아만 해도 쉴 새 없이 봉기가 일어났는데, 이 한 나라에서 일어난 혁명적 사건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으니 말이다. - P5

인물들을 한 권에 담아내는 이 재미있는 작업을 통해, 나는 이 모든 이야기들을 다시 훑어볼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짐작하듯이 어린 시절부터 나는 역사에 빠져 지냈다. 책을 쓰기에 앞서 대학 강의 노트에서부터 백과사전까지 잡히는 대로 읽어댔으며, 그리스의 역사가 리비가 쓴 포에니 전쟁의 역사나 노예제에 대항해 봉기한 냇 터너 Naturner의 구술 자서전 등을 읽고 또 읽었다. - P6

최종 50인을 선택한 데에는 다양성도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이들 중에는누가봐도 ‘선한 사람들‘이 있다(간디 같은 사람에게서 결점을 찾기는 어렵다. 또 꽤나 악당같은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대개의 인물들은 선함과 악함의 중간쯤에 있다.
사실 선과 악이란 것은 이야기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자유를 위해 싸우는 투사도 반대쪽에서 보면 테러리스트일 따름이라는이야기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 P7

잔다르크에서부터 블라디미르 레닌에 이르기까지 쉰 명의 매력적인 인물들이 지닌 공통점은, 각자 한 명의 위대한 약자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지지자들의 힘으로 투쟁을 해나갈 수 있었다는 점이다. - P7

티컴세
TECUMSEH

시기 : 1768~1813
지역 : 쇼니족
투쟁 대상 : 미국 - P187

1800년대 초반의 미국인들은 매니페스트 데스티니(Manifest Destiny, ‘명백한 운명‘
이라는 뜻으로 미국이 북미 전체를 지배할 운명을 갖고 있다는 주장-역주)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이쪽바다로부터 반대쪽의 빛나는 바다에 이를 때까지 식민지를 확장해 나간다는 관념이었다. - P187

쇼니족과밍고 족 연합 전사들은 침략해 들어오는 식민지 군대를 습격하여 몇 시간에 걸친 끔찍한 백병전을 벌였다. 그러나 부족원들의 사상자가 너무많아서 결국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티컴세의 아버지 퍽신도 이 습격에서 전사했다. 이것이 뒷날 포인트플레전트 전투라고 불리게 된 전투였다. - P188

 동맹 부족들은 대개 쇼니 족보다 전사들의 수도 많고 무기도 더 많았지만, 티컴세는 습격을 이끄는 전술 능력과추종자들을 독려하는 웅변술로 금세 이름이 알려졌다. - P188

 1780년대에 미국중서부에서 몇몇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이 동맹을 맺었을 때 티컴세가 기꺼이 합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동맹 부족들은 대개 쇼니 족보다 전사들의 수도 많고 무기도 더 많았지만, 티컴세는 습격을 이끄는 전술 능력과 추종자들을 독려하는 웅변술로 금세 이름이 알려졌다. - P188

이러한 티컴세의 능력은 1794년, 독립전쟁의 역전의 용사 ‘미친‘ 앤서니 웨Anthony Wayne 이 이끄는 미국 군대가 법 인디언 군대를 폴런 팀버스 전투에서패배시킨 후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게 되었다. - P188

 티컴세가 보기에 협정에 서명하여 백인들의 방법을 받아들인 부족들은 단지 정복을 늦추는 것일 뿐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그는 치카소 족과 촉토 족에게 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한 가지 공통된 목적으로 뭉치지 않으면 우리의 혈통은 곧 소멸하고 말 것입니다." - P189

텐스크와타와는 인디언 부족들과 백인들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하면서 이방인들이 가져온 어떤 음식이나 풍습, 생활방식도 완강히 거부했다. - P189

친구들은 물론 적들도 이곳을 프로페츠타운 Prophetstown, 즉 ‘선지자의 마을‘이라고 불렀다. 형제의 카리스마가 합쳐진 덕분에 수많은 부족에서 따르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중 많은 수가 동생의 종교적 가르침때문에 온 것이기는 했지만, 티컴세는 이들을 범 인디언 정착민들이라는 기치 아래 단결시키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 P190

특히 선지자는 긴장을 증폭시키며 해리슨을 향해 죽음이 오고 있다는 협박을 되풀이해댔다. 전투가 머지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티컴세는 점점 규모가 커지는 자신의 연합군에 합류할 부족들을 더 충원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 P190

해리슨이건 혹은 텐스크와타와이건 아니면 둘 다이건 그러나 확실한 것은 프로페츠타운에서 온 전사 무리가 밤을 틈타 해리슨의 군대를 급습했으며, 미국인들은 이에 대한 맞대응으로써 선지자의 군대를 축출하고 프로페츠타운을 불태웠다는 것이다. - P192

 최후까지 전사였던 티컴세는 1813년 10월 15일, 테임즈 전투에서 해리슨의 군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정확히 누가 그를 죽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시신도 찾지 못했다. - P193

프로페츠타운에서 승리한 해리슨은 1840년 대통령 선거 유세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결국 대통령이 되었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에 파멸을 가져다 준 잔인하고 유능한 북부 연합군의 총사령관 윌리엄 티컴세 셔먼 William Tecumsech Sherman은 티컴세의 이름을 따서 스스로를 명명했다. - P19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전에 읽었던 책, 소시적에.






17세기 후반부터 유능한 수학자와 과학자를 많이 배출한 스위스의 베르누이 가문은 수학과 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가문이다. 베르누이 가문의 사람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은 두 형제 야곱 베르누이(Jakob Bernoulli, 1654-1705)와 요한 베르누이(Johann Bernoulli, 1667-1748)였다.  - P217

요한 베르누이는 반사와 굴절에 관련된 광학적 현상, 곡선 족의 수직궤적들의 결정, 급수에 의한 곡선의 길이 구하기와 면적 구하기, 해석적 삼각법, 지수함수의 미분법, 최단강하선(brachystochrone) 문제, 등시곡선(tautochrone)등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 P217

요한의 형인 야곱은 극좌표를 최초로 사용하였으며, 직교좌표와 극좌표 모두에서 평면곡선의 곡률 반경을 구하는 공식유도, 현수선 연구, 고차 평면곡선 연구, 물체가 균일한 연직속도로 떨어질 때 생기는 등속강하곡선에 관한 연구를 했으며최대 넓이를 가지는 고정된 둘레의 평면 폐곡선 문제를 제시하고 고찰하였다.  - P218

오일러는 1707년 스위스의 바젤에서 태어났다. 칼뱅파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신학을 공부했지만 자신의 재능이 수학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스승은 당시 유명한 요한 베르누이였다. - P219

또한 그는 미분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데 적분인수 개념을 사용하였고, 상수계수를 가지는 선형미분방정식의 체계적인 해법을 제시하였다. 이밖에 동차와 비동차선형미분방정식을 구분하였으며, 미분기하, 유한차분법, 변분법등에 상당한 공헌을 하는가 하면 정수론을 크게 발전시키기도했다. - P222

 오일러는 이 문제를그림과 같은 연결된 그래프에서 한 점을 출발하여 그래프의 모든 선을 단 한 번만 지나서 제자리로 돌아오는 문제로 바꾸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한붓그리기‘의 시초인데현재는 그래프(Graph) 이론으로 발전하여 컴퓨터의 네트워크구성 등에 아주 유용하게 응용되고 있다. - P223

그는 나머지 17년의 생애를 그곳에서 보내고 1783년 9월7일 76세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 날에도 손자들과 함께 최근에 발견된 정리와 천왕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놀다가 죽었다고 전해진다. - P2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 읽었지만 필요에 따라 부활한다.




세계4대 미스터리

첫 번째 미스터리는 물리학 법칙의 성격이다. 한점에서 출발한 방사상 구조를 생각해보자. 우리가 알 수 있는 출발점의 유일한 특징은 절대적 대칭이라는 것이다. - P172

두 번째 미스터리는 생명이다. 물리적 물질의 대칭 구조는 분산되면서 다른 형태의 구조로 진화한다.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가진 현실의 작은 섬들로 응축된 구조다.
세 번째 미스터리는 뇌의 역할이다. 우연히 발달한 무정형의 유기물 덩어리는 물리학의 은하수를따라가며 더욱 많은 가능성 (상상일까?) 속에서 알맞은 답을 선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 P17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