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난다.
다른 세상 일이겠지.




조지 워싱턴은 미국의 첫 대통령으로서 국가 체계의 창달을 주관한 인물로 기록되는데, 이것은 소수의 혁명가에게만 허락된 자랑스러운 이력이 아닐 수없다. - P149

워싱턴은 1732년, 성공한 플랜테이션 소유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워싱턴일가는 1600년대 중반에 잉글랜드에서 버지니아로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 P149

워싱턴의 군 경력은 프렌치 인디언 전쟁 (영국과 프랑스 간의 7년 전쟁에서 영국 측에서 싸우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753년 10월, 영국에서 파견한 버지니아 총독은 워싱턴에게 프랑스를 분쟁 지역에서 물러나게 설득하는 임무를 맡겼다.
프랑스는 예상대로 거절했다. 워싱턴의 군대는 프랑스 전초기지를 급습하여 지휘관을 살해했지만 곧 전세가 뒤집혀 포위되고 말았다. - P150

그러나 영국은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많은 빚을 지게 되었고, 식민지에서 세금을 올려 해결해보려 한 정책들로 인해 불가피하게 식민지는 혁명의 기운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워싱턴이 다시 군복을 입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 P151

1775년 5월, 2차 대륙회의가 열릴 때쯤 식민지 민병대는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영국군과 전투를 치른 상태였고, 대륙회의에서는 제대로 전쟁을 수행할수 있도록 식민지 민병대를 대륙군으로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 P151

전쟁 초기인 1776년 3월, 워싱턴 휘하의 군대는 보스턴에서 영국 점령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다른 전투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대륙군은뉴욕에서 윌리엄 하우가 이끄는 영국군에게 연패했고, 11월에 끝내 워싱턴은하우로부터 뉴욕을 사수하지 못했다. - P152

식민지 군과 프랑스군의 연합작전이 시작되었다. 워싱턴이 도시를 포위하고 프랑스 함대가 바다에서 에워싸는 작전이었다. 작전은 효과적이었다. 한덜도 채 못 된 1781년 10월 19일, 콘월리스가 항복을 해왔다. 8천 명이 넘는포로들의 숫자는 영국이 전쟁을 끝내는 협상에 동의할 수밖에 없음을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았다. - P153

준엄한 경고

1796년에 대통령직을 물러나는 고별인사에서 워싱턴은 미국의 장래에 대해 몇 가지선견지명 있는 당부를 했다. 그중에는 지역 파벌주의에 대한 경고가 있었는데,
미국은 이 문제를 풀지 못하고 결국 남북전쟁을 치르게 된다. - P153

미국연합규약에 의해 세워진 허약한 연방정부 운영은 오래가지 않아 실패로 판명되었다. 각 주는 빚에 허덕였고, 의회는 제한된 권력 때문에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새 국가가 오래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 P154

워싱턴은 새 국가의 첫 행정권으로서 선례에 관해 극도로 신경을 썼다. 그가-Thomas Jefferson과하는 모든 행적이 역사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토머스 제퍼슨The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urtilton 같은 정치적 라이벌을 핵심으로 하는 올스타 자문단을 구성해 이들의 의견을 경청함으로써 경쟁자의 생각을 참고한 것도그 일환이었다. - P154

그는 자신의 부통령이었던 존 애덤스가 최초로 치러진 경쟁선거에서 토머스 제퍼슨을 이기고 대통령이 되는 것을 지켜본 후 은퇴하여 마운트돌아갔다. 그러나 워싱턴의 은퇴 생활은 3년도 이어지지 못했다. 1799년 12월 14일, 예순일곱 살에 편도선 감염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 P155

고귀한 로마인

워싱턴이 평생 권력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자 그에게는
‘미국의 킨키나투스(The American Cincinnatus)‘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이 별명은 로마를 우러르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찬사인 셈이었다. - P155

토머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

시기 : 1743 - 1826
지역 : 미합중국
투쟁 대상 : 영국 - P164

토머스 제퍼슨은 독립전쟁에서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었다. 그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행동하게 만드는 훌륭한 연설가도 아니었고, 군중을 움직이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도 아니었다. - P164

 그의 아버지는 농업 외에 버지니아의 전체 지도를 최초로 완성한 측량기사였으며, 당대에 유명한 장서 수집가이기도 했다. 덕분에 토머스 제퍼슨은 아버지의 책으로 혼자서 언어를 익히고(그는 5개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공식적인 교육의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채웠다. - P164

지방정부에서 몇 가지 역할을 연이어 수행한 후 걸출한 젊은 변호사로서입지를 세운 제퍼슨은 스물다섯 살에 불과한 1768년에 버지니아주 의회 하원에 선출되었다. 비록 대중연설은 잘 못 했지만 종이에 옮겨진 그의 발언은누구보다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 P165

제1차 대륙회의가 공고되었을 때, 제퍼슨은 ‘영국령 아메리카의 권리에 대한개관‘이라는 글을 써서 팸플릿으로 만들어 버지니아 대의원단에 나누어주었다. 그의 글은 너무 급진적이어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제퍼슨의 주장은 강력했다.  - P165

이 팸플릿 덕분에 제퍼슨은 혁명의 대변자이자 노련한 문사로 인식되어 제2차 대륙회의의 버지니아 대의원단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1775년 5월에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이미 혁명은 시작된 후였으며, 회의를 통해 조지 3세에게 표한 항의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 P166

1776년 6월, 제퍼슨이 세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혁명 문서 중 하나를 만드는 데는 단 17일이 걸렸다. 무엇보다 이 글에서 그는 미국 민주주의 핵심을 설파하였는데, 바로 이 문단이다. - P166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자로부터 몇 가지 양도할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으니,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가 그것이다." - P166

물론 식민지는 독립전쟁의 승리를 통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해냈다.
그동안 제퍼슨은 버지니아의 정치로 눈을 돌려 역량을 집중했으며, 그 결과 의회 의원을 거쳐 1779년에는 주지사가 되었다. - P168

 중앙정부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영국의 통치하에서 식민지가 부딪혔던 것과 똑같은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또한 대통령이 지명한 관리들은 명칭만 다를 뿐인 실질적인 왕을 만들 수도 있다고 보았다. - P168

그러나 그에게는 결정권이 없었다. 1787년, 제퍼슨이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로 나가있는 동안 제헌협의회가 결성되었다. 1789년 9월에 그가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헌법이 국법으로 작동한지 6개월이 넘은 뒤였다. - P169

제퍼슨은 친구인 조지 워싱턴의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으로 봉직했으며, 워싱턴의 임기가 끝나자 재선에 출마하여 연임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덕분에 워싱턴은 가장 중요한 시기인 건국 초기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대통령으로서 국가적 단합을 이뤄낼 수가 있었다. - P169

연방파는 외교 문제와 관련해 상대국으로서 영국을 선호한 반면, 제퍼슨이이끄는 공화파는 프랑스를 선호했다. 연방파는 권력의 중앙정부 집중을 원했으며, 공화파는 개별 주에게로 권력이 분산되는 쪽을 원했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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