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 요짱이 혹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촌동생인가요?
가타후치 :  맞아요. 저보다 세 살 아래로, 본명은 ‘요이치‘예요. - P132

가타후치 : 실은 당시 큰엄마 배속에 아기가 있었거든요. 많이커서 언제 태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어요.
필자 : 기미히코 씨가 남기고 간 아이라는 말씀이시군요.
가타후치 : 네, 임신 중에 남편을 잃어서 큰엄마도 많이 힘드셨을 거예요. 그런데 요짱까지 그렇게 되다니…………. - P133

구리하라 : ‘창문 없는 방‘ 하니, 아무래도 그 두 집이 연상되네요. 뭔가 관계가 있을까요?
가타후치 : 제 생각도 그랬어요. 하지만 아무리 돌이켜 봐도 창문이 없다는 것 말고 이상한 점은………… 비밀 구멍도,
열리지 않는 공간도, 물론 누군가 갇혀 있는 듯한기척도 없었어요. 다만……….
구리하라 : 다만..…...?
가타후치 : 붙박이 장지문이 하나 있었어요. - P135

가타후치 : 네. 다만 ②번 방에 들어가려면 ③번 방과 ④번 방을 경유해야 했죠. 그러기가 불편해서인지 ②번 방은 쭉 사용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구리하라 :  ‘쭉‘이라면 이 장지문은 옛날부터 열리지 않았다는말씀인가요? - P136

필자 : 그러고 보니 이 집, 언제쯤 지은 건가요?
가타후치 : 쇼와*시대 초엽이라고 들었어요.

*일본 연호, 1926년 - 1989년 - P137

가타후치 : 할아버지께 들은 이야기인데요. 가타후치 가문은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여러 사업으로 재산을 쌓았고, 최전성기에는 거대한 저택에다 수많은 고용인을 부릴 만큼 번창했대요.
그런데 어떤 당주가 느닷없이 사업 운영권을 남에게양도하더니만, 집터 구석에 별채를 짓고 틀어박혔다고 해요. 그때부터 집안이 서서히 기울다가 쇼와 시대 중엽에는 저택도 거의 다 부서졌다나 봐요.
그 후로 가타후치 가문의 자손은 유일하게 남은 별채를 개축해 조촐하게 살아왔다고 들었어요. - P138

가타후치 : 실은 요짱이 이 불단 앞에서 죽었어요. - P141

필자 : 정황상 요짱은불단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그렇게 봐야겠죠? - P141

가타후치 : 역시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가족들도 그런 식으로 말했어요. 장난으로 불단에 올라가려다가 발을헛디뎌 떨어졌을 거라고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웠어요.
이 불단은 어린애가 혼자 올라갈 수 있을 만한 높이가 아니었거든요. - P142

가타후치 : 더구나 요짱은 불단을 몹시 무서워했어요. 저도 그랬지만, 요짱은 조금 과하게 겁냈죠. 복도에 나갈 때도 불단을 보지 않으려고 했을 정도에요.
(후략) - P142

구리하라 : 그럼 경찰은요?
가타후치 : 안 왔어요. 큰엄마가 경찰을 불러서 조사해 보는 게좋지 않겠느냐고 한번 제안했지만, 다들 반대해서 결국 포기한 것 같아요. (후략) - P144

셋 다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그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고사가 아니라면 자살, 또는 살인. 가타후치 씨의 이야기를 듣건대 가족의 반응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누군가를 감싸는 걸까. 그럼 대체 누구를, 뭣 때문에………? - P144

구리하라 : 그동안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나요? 예를 들면 누군가 방에 들어왔다든가.
가타후치 : 아니요, 제가 깨어 있는 동안은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 P146

구리하라 : 그럼 요짱이 복도로 나가려면 가타후치 씨가 있는방을 지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가타후치 씨가 깨어있는 동안, 아무도 방에 들어오지 않았죠. 즉, 요짱이 죽은건 가타후치 씨가 잠든 새벽 4시 이후인 셈이에요. 시신은 5시에 발견됐으니, 사망 추정 시각은 4시에서 5시 사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 P148

필자 : 예전에 외과의를 취재할 때 들었는데요. 인간이 사망하고 몸이 차갑게 식기까지는 일정한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출혈이 심하지 않은 한, 대개 두 시간 정도는 온기가 남아 있다고 들었어요. 요짱은 피를 얼마나 흘렸나요? - P148

구리하라 : …… 딱 하나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타후치 : 네? 그게 뭔데요?
구리하라 : 요짱이 불단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생각하면 시간적으로 모순이 생겨요. 하지만 요짱이 방에서 죽었다면 어떨까요? - P149

필자 :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만………… 누가 뭐 때문에 그런짓을?
구리하라 : 분명 범인이 사인을 위장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겁니다. - P150

구리하라 : 제 입으로 말해 놓고 이런 말씀을 드리려니 민망하지만, 방금 제 추리는 완벽하지 않아요. 구멍이 두 개 있거든요. 하나는 범인. 이 논리로 따지면 범인은 요짱과 같은 방에 있었던 큰어머님 미사키 씨입니다. 어머니니까 범인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경찰을 부르려 했던 큰어머님이 범인일 가능성은 낮겠죠. - P151

구리하라 : 요짱은 방에서 죽은 게 아니라는 뜻이죠. 제 추리의절반은 오답이에요. 하지만 범인이 사인을 위장하기 위해 시신을 불단 앞에 놓아뒀다는 부분은 틀리지 않았을 겁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범인은 요짱을 방에서 데리고 나가서 집 어딘가에서 살해한 후 시신을 불단 앞에 놓아뒀다. 문제는 어떻게 방에서 데리고 나갔는가, 그리고 어디서 살해했는가예요. - P152

필자 : 저기, 할머님은 왜 거실에 가는데 굳이 복도로 나오셨을까요?
가타후치 : 네? - P154

가타후치 : 듣고 보니…………. 그럼 혹시 ‘옆방‘이란 복도 오른편방이었던 걸까요?
필자 : 그렇다면 ①번 방, 즉 아버님이 주무시던 방이네요.
그럼 할머님 말씀을 듣고 아버님이 뭔가 말씀하실 법도 한데요. - P155

가타후치 : 하지만 그 외에 ‘옆방‘이라고 할 만한 방은 이 집에…………구리하라 : 이 평면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은 방 아니었을까요?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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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언니가 처음으로 보낸 편지를 실마리 삼아 집을 찾기로 했어요.
주소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소인에 우체국 이름이 있었거든요. 집이 그 부근에 있다는 뜻이죠.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언니가 예전 집을 매물로 내놨다고 했어요. 알아보니 그 지역에서 최근에 매물로 나온 집은 하나뿐이더군요. - P120

그리고 기사 말미에 적혀 있던 ‘시신의 왼손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구절, 예전에 어디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났어요.
미야에 교이치 씨 사건이에요. 인터넷 뉴스로 한 번 봤을뿐이지만 ‘왼손이 절단됐다‘는 내용이 묘하게 으스스해서 인상에 남았죠. - P121

혹시 기사를 쓴 사람에게 사이타마에 있는 집의 평면도를보여 주면 뭔가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연락드린 거예요.
하지만 ‘그 집에 살던 사람의 여동생‘이라고 하면 분명 경계해서 만나 주시지 않을 것 같았어요. - P121

호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확인해보니 구리하라씨가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무사하세요? 끝나면 이야기 들려주세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P123

카페를 나서자 구리하라 씨에게 전화를 걸어 가타후치 씨와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뜻을 전했다. 구리하라 씨는 흔쾌히 승낙했지만, 지저분한 자기 집에 여자 손님을 들일 수는 없다며 만날 장소를 지정했다. 나와 가타후치씨는 그곳으로 향했다. - P124

구리하라 씨는 가타후치 씨를 약간 경계하는 것 같았다. 구리하라 씨는 아직 가타후치 씨가 거짓말한 이유를 모른다. 불안해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기에 집으로 부르기를 꺼린 것이리라. - P125

구리하라 : 과연 ・・・・・…. 그런 거였군요.
가타후치 : 속여서 정말 죄송합니다.
구리하라 : 아니요, 아니요. 하지만 이제야 겨우 안심했습니다.
‘미야에 씨‘가 아니라 ‘가타후치 씨‘로군요?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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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길사 세계문학전집의 짙은 푸른색 표지가 아직도 기억에 선연하다. 하인리히 테오도르 뵐(HeinrichTheodor Böll)의 또 다른 소설 『신변보호』와 한 권으로 묶여 있었다. 이번에 다시 읽은 것은 독문학자 김연수 박사가 번역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번이다. 주인공 카타리나 블룸이 신문기자를 총으로 쏴 죽이기 직전 주고받는 대화가 내 기억과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소설이 주는 강렬한 충격은 이번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 P277

그래서 웬만한 것은 다 누가 특별히 허위라는 문제 제기를 하고 분명하게 입증하지 않는 한, 대충 어느 정도는 사실이려니 여기게 된다.
이것이 평범한 사람들이 언론 보도를 대하는 기본자세이며, 우리네 삶의 어찌할 수 없는 한계다. - P278

그 왜곡 보도 또는 허위 보도 때문에 이익을 보거나 피해를 입는사건 관련자나 당사자가 아니라면, 내가 거기에 왜곡과 거짓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어렵다. 따라서 그 보도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진실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 P278

이론적으로 보면 누구나 왜곡 보도와 허위 보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피해자가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위험에 대해 별로 깊게생각하거나 고민하지 않는다. - P279

그리 길지 않은 이 소설에는 부제가 있으며 다음과 같은 ‘모토‘까지 딸려 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Bild)>와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 - P279

이 소설에서는 신문의 ‘헤드라인‘이 살인 사건을 부른다. 사건 개요는 무척 단순하다. 1974년 2월 20일 수요일 저녁, 스물일곱 살 먹은 젊은 여자 카타리나 블룸은 아는 사람이 주최하는 댄스파티에 참석하기위해 집을 나섰다. 블룸은 한 번 이혼한 경력이 있는, 아주 착실하고 평범한 전문 가사관리인이다.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2월 24일 일요일 저녁, 블룸이 경찰관의 집 초인종을 누른다. 그녀는 경찰관에게, 낮 12시15분경 자기 아파트에서 <차이퉁> 기자 베르너 퇴트게스를 총으로 쏴죽였다고 말한다. - P280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숨이 막혔다. <차이퉁이 카타리나 블룸의 명예를 짓밟은 방식이 너무나도 ‘리얼‘했기 때문이다. - P284

<차이퉁>은 주로 두 가지 방법을 썼다. 첫째는 검찰청 조사실에서 오간 이야기를 악의적으로 왜곡해 중계방송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문명국가의 형법이 금지하는 불법적인 ‘피의 사실 유포‘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다. - P284

국가기관과 언론기관이 한통속이 되어 저지르는 이러한 불법행위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중략)
 <차이퉁>이 내밀한 사생활 관련 정보를 왜곡 보도해 자신을 모욕하는 데 대해, 그리고 그런 일을 바로잡을 방법이 사실상 전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카타리나 블룸은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을 느낀다. 작가는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 P284

<차이퉁>이 카타리나 블룸의 명예를 짓밟은 또 하나의 수법은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한 말을 교묘하게 왜곡하는 것이었다. <차이퉁>은 카타리나 블룸을 아는 모든 사람들을 찾아내 인터뷰했고, 그녀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목적으로 그들이 한 말을 왜곡 인용했다.  - P285

소설 속에서 모든 신문이 이렇게 했던 것은 아니다. 수많은 다른 신문들은 카타리나 블룸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고 사건을 보도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차이퉁> 보도의 위력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차이퉁>은 가장 널리 읽히는 신문이기 때문이다. - P286

<차이퉁>의 왜곡 보도에 대해보도하고 비판하는 신문은 없었기 때문이다. 신문이 다른 신문을, 기자가 다른 기자를 비판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소위 동업자들끼리 서로 비판을 자제하는 ‘침묵의 카르텔‘이 있기 때문이다. - P286

카타리나 블룸은 경찰에 쫓기는 범죄자를 도망가게 했지만 실제로 수사에 장애를 조성하지는 않았다. 범죄로 처벌받을 만한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의명예는 진흙 발에 짓이겨졌고 삶은 막다른 골목에 봉착했다. - P287

소설의 부제를 다시 보자.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여기서 ‘폭력‘은 신문 헤드라인의 폭력 또는 언론의폭력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고, 카타리나 블룸의 살인을 가리키는말일 수도 있다. 뵐은 후기에서 폭력이 ‘무지‘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다. -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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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스 제임스 맥도널드 Maurice JamesMcDonald (1909~1998)와 리처드 제임스 맥도널드(1902~1971) Richard JamesMcDonald 형제의 이야기다. 무성 영화 스튜디오에서 세트를 만들며주급을 25달러씩 받던 맥도널드 형제는 이 돈을 차곡차곡 모았다.
(중략)
하지만 1929년에 시작된 경제대공황은 백만장자를 향한 형제의 야심 찬 꿈을 무참히 짓밟았다. - P83

그런데 이렇게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잘되는 장사가 있었다. 바로 핫도그 가게였다. 맥도널드 형제는 캘리포니아주 몬로비아의 한 경마장 인근에서 핫도그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그런데 경마장 인근 장사는 시즌이아닐 때 손님들이 오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었다. - P84

둘은 가게를 이전하면서 운영 방식도 개편했다. 자동차 보급률이 늘어가는 당시 분위기에 맞춰 운전자들이 쉽게 음식을 구매할수 있게끔 한 것이었다. 그렇게 1940년 맥도널드 형제는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서 5,000달러를 대출받아 ‘드라이브 인 Drive-in‘ 형태의 레스토랑인 맥도날드 페이머스 바비큐McDonald‘s Famous BBQ를 오픈했다. - P85

문제는 맥도날드 드라이브 인 레스토랑의 종업원들이 대부분 젊은 여성이라, 이들과 대화하면서 놀고 싶은 젊은 남성들이죽치고 있는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주차할 곳이 없다고 불평하는 고객들이 많아지고, 주문받으러 간 여성 종업원들도 한참씩 돌아오지 않자 결국 1948년 대대적인 식당 개편을 단행한다. - P85

먼저 인기 없는 메뉴들은 과감히 없애고 햄버거, 치즈버거, 밀크셰이크 등 9개의 메뉴만 남겼다. 어차피 레스토랑 매출의 87%가 햄버거와 감자튀김, 청량음료였다. - P86

형제는 빠른 조립으로 자동차의 대중화를 이끈 포드 FORD 자동차의 조립 라인을 떠올렸다. 동생인 리처드는 원래 발명가적인 성향이 있었는데, 효율적이고 빠르게 햄버거를 만들 수 있도록 직접 부엌 구조도 설계했다. - P86

아주 커다란 그릴로 직원 한 명이 여러 햄버거를 동시에 조리하면서 동일한소스를 바르는 장비로 모든 햄버거가 비슷하게 맛있을 수 있도록했다.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 Speedee Service System의 탄생이었다. - P86

장사가 꾸준히 잘되자 형제는 인기 음료인 밀크셰이크를 더 빨리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던 중 밀크셰이크 5잔을 동시에 만들 수있는 멀티 믹서를 발견하고 무려 8대나 주문했다.  - P87

레이는 대체 어떤 곳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주문을 했는지 궁금했다. (중략)
영업을 하면서 그동안 수천 개의 식당을 가보았으나맥도널드 형제의 레스토랑처럼 깨끗하고 전문적이며 체계적인곳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P87

레이는 직접 맥도널드 형제에게 스피드 서비스 시스템에대한 이야기를 듣고 프랜차이즈 사업을 제안했다. 사실 맥도널드형제는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이 프랜차이즈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이미 사업을 시도해본 상황이었다 - P87

회사가 급성장하면서 맥도널드 형제와 레이 사이의 갈등이 심해졌다. 맥도널드 형제는 철저하게 품질 관리가 가능한 소수 정예가맹점만 유지하기를 원했는데, 레이는 미국 전역에 세워진 교회의 십자가들처럼 맥도날드의 황금 아치를 전국에 세우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 P88

맥도널드 형제가 당시 요구한 금액은 270만 달러였다. 약 15년간 받을로열티의 총액이었다. 엄청난 금액이라 당시 레이의 변호사들은너무 비싼 금액이라며 반대했음에도, 레이는 맥도날드의 가능성을 생각하며 거래를 진행했다. - P89

1955년 레스토랑 박람회에서 레이와 만난 마이클 제임스델리게티 Michael James Delligatti (1918~2016)는 1967년 펜실베이니아주의피츠버그 지역에서 무려 12개의 맥도날드 매장을 관리하게 되었다. - P89

당시 피츠버그는 제철 산업의 중심지로 철강공장이 여럿 있었고, 하루 종일 철강공장에서 고되게 일한 근로자들은 아주 배고픈상태로 매장을 찾아왔다. 마이클은 패티가 달랑 1장만 들어간 기존의 햄버거로는 그들을 절대로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주 풍성한 햄버거를 만들어보기로 결심했다. - P90

당시 기존의 햄버거는 하나에 20 센트로, 마이클은 이 대형 햄버거에 45센트의 가격을 책정하고본사와 출시를 의논했다. 본사에서는 새로운 햄버거가 다른 제품들에 비해 너무 비싸다며 부정적이었지만, 마이클의 눈물겨운 설득으로 유니언타운 매장에서만 시험 판매하도록 허락했다. - P90

1969년에는 맥도날드 총 매출의 19%가 빅맥의 매출이었다. 현재 빅맥은 매년 전 세계에서 13억 개 이상 팔린다. 이제 빅맥은 맥도날드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빅백을 발명한 마이클은 맥도날드로부터 로열티 대신 감사패를 하나 받았다고 한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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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들어도 달콤해지는 120년 전통의 초콜릿 명가 허쉬 허쉬는 초콜릿 업계에서 처음 대량 생산 기법을 도입해 밀크 초콜릿을 더 많은사람이 즐길 수 있게 만든 기업으로 유명하다.
브랜드 철학이 ‘행복‘이라 말하는 허쉬는 원래 초콜릿 가게가 아니라 사탕 가게로 시작했다. - P32

1886년 밀턴 허시 Milton Hershey (1857~1945)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에서 캐러멜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 P33

밀턴은 어린 시절 가난했던 가정환경 탓에 제대로 정규 교육을 받지는 못했어도 평소 사탕 만들기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아들을 유심히 지켜보던 어머니가 밀틴을 제과사의 제자로 보내면서 다양한 과자 제조법을 익히게 된다. - P33

얼마나 큰 거래였는지 밀턴이 네 번째 가게를 열기 위해 빌린 은행 대출을 다 갚고도 남을 정도였다. 이후 밀턴의 캐러멜 가게는 1890년대 초 1,400명의 직원을 거느린 큰 기업으로 성장한다.
그러던 1893년 시카고에서 만국 박람회가 열렸다. - P34

밀턴이 겨우 자리잡은 사업을 팔아버린 이유는 꼭 개발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밀크초콜릿! 당시 밀크 초콜릿은 스위스에서만 유일하게 만들어지는 아주 값비싼 고급 간식으로 사치품에 해당했다. 우유와 설탕, 카카오를 적절한 비율로섞어야만 밀크 초콜릿을 만들 수 있었는데, 스위스에서는 밀크 초콜릿의 황금 비율을 철저히 비밀로 했기 때문이다. - P35

3년의 연구 끝에 자신만의 밀크 초콜릿 레시피 개발에 성공한 밀턴은세계에서 가장 큰 초콜릿공장을 짓겠다고 다짐하며 고향인 데리타운십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밀턴은 가장 먼저 새로운 공장을 짓기 위해 땅부터 인수했다. - P35

밀턴의 초대형 최신식 초콜릿 공장은 2년 만에 완공되었다. 그곳에서 처음 생산된 제품이 바로 허쉬 밀크 초콜릿이다. - P356

밀턴의 초콜릿 사업이 초대박을 낸비결에는 ‘대량 생산으로 가격을 저렴하게‘ 라는 전략이 있었던셈이다.
허쉬사는 초콜릿 대량 생산을 위해 컨베이어 벨트와 노즐로 제조 기계도 만들었다. 노즐에서 컨베이어 벨트로 원물을 떨어뜨리면 눈물방울 모양 초콜릿이 만들어졌다. - P37

‘키세스‘라는 이름의 어원은 허쉬사에서도 제대로 밝히고 있지않기 때문에 아직까지 미스터리다. 노즐에서 초콜릿이 나올 때 마치 키스하듯 ‘쪽쪽‘ 소리가 나서 그렇게 지어졌다는 소문이 있지만, 전문가들은 그보다 당시 한입 크기의 캔디 조각을 ‘키스Kiss‘라고 부르던 것이 유래가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 P38

사실 키세스가 눈물방울 모양을 한 최초의 초콜릿은 아니다. 당시 펜실베이니아에는 윌버 Wilbur라는 또 다른 초콜릿 공장이 있었다. 윌버에서는 1894년부터 윌버 버드라는 눈물방울 모양의 초콜릿을 생산했는데, 특수 제작한 몰드에 녹인 초콜릿을 일일이 짜내굳히는 방식으로 제조된 수제 초콜릿이었다. - P38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24시간 연중무휴로 제조되던 허쉬 키세스의 생산이 잠시 중단되었다. 초콜릿으로 만든 비상용 전투 식량 디-레이션D-ration 생산을 위해서였다 - P39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레이션은 훌륭한 전투 식량이었다. 이후 미군의 추가 의뢰로 디-레이션을 조금 더 맛있게 만든 허쉬 트로피칼 초콜릿 바가 개발되었다. - P40

우유만 부으면 맛있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간편식의 대명사, 시리얼 전 세계인의든든한 아침 식사를 책임지고 있는 시리얼을 처음 개발한 브랜드는 어디일까? 켈로그?
포스트?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시리얼 회사 두 곳은 사실 모두 하나의 요양원에서 탄생했다. 성욕 억제를 위한 건강식을 개발하던 중 우연히 시리얼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 P43

1850년대 미국 미시간주의 한 마을 배틀크릭에는 제임스 화이트 앨런 화이트 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 부부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이하 안식교)를 창립했는데, 존 프레스톤 켈로그와앤 재닛 스탠리 켈로그 부부도 창립 멤버였다. - P43

 자연스럽게 존 하비도 앨런 화이트가 주장하는 안식교의 종교적 의무인 건강한 삶에 관심을 갖고 자연요법과 예방 의학, 채식주의 등 건강 관련 연구를 시작했다. - P44

1872년 안식교는 전통 의학을 비판하며 자신들의 교리에맞는 전문 의사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안식교 지도자들은 존 하비를 포함해 똑똑한 몇 사람을 뽑아 뉴저지에서 물 치료, 자연 위생, 채식주의 등의 대체의학을 가르치던 러셀 트랄Russell Tral의 5개월짜리 의학 교육 과정을 이수하게 했다. 이때의 경험으로존 하비는 의학과 건강 개혁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P44

1877년 배틀크릭 요양소에 아픈 이모를 보살피기 위해 엘라 이튼이란 여성이 찾아왔다. 배틀크릭 연구소에 머무르면서 엘라는위생이란 개념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위생 학교에 입학하여 위생학, 해부학, 생리학 등 치료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했다. - P45

존 하비는 자신들뿐만 아니라 요양소 환자들의 식욕과성욕을 억제하기 위해 아내 엘라와 함께 양념이 강하고 자극적인음식 대신 채식 위주의 건강식을 연구했다. - P45

존 하비는 이뿐만 아니라 치아가 약한 환자들도 견과류를 먹을 수 있게 땅콩버터를 만들고, 고기 대신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는 음식 등을 개발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건강한 채식 식단은 요양소 환자들에게 그저 맛없는 음식일 뿐이었다. - P46

 요양소에 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에 존 하비는 반죽만 남겨둔 채 긴급하게 회의에 참석했다. 그사이 반죽은 점점 말라갔고, 돌아왔을때는 이미 단단히 굳은 상태였다.
존 하비는 이대로 요양소 예산을 낭비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어떻게든 반죽을 살려보기 위해 단단하게 굳은 옥수수 반죽을 롤러압착기에 강제로 밀어 넣었다. - P46

존 하비는 이 부서진 옥수수 반죽 조각들을 익히기 위해 일단 구워봤다. 그 결과 바삭바삭한 옥수수 시리얼이 만들어졌다. - P46

 동생 월 케이트는 콘플레이크를 상품화하여 시리얼 사업을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형인 존 하비는 요양소 환자들의 건강과 성욕 억제를 위해 만든 음식을 상품화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에 콘플레이크는 곧바로 상품으로 제조되지 못했다. - P47

형제가 갈등하는 사이 배틀크릭 지역에서만 20개 이상의 시리얼 회사가 생겨났다. 이 회사들 중에 켈로그의 최대 라이벌 회사인 포스트 컨슈머 브랜드 Post Consumer Brands가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포스트의 설립자 찰스 윌리엄 포스트가 형제가 운영하던 배틀크릭 요양소의 환자였다는 것이다. - P47

윌 케이트는 대중의 입맛에 맞춘 더 맛있는 콘플레이크를 출시하기위해 설탕을 첨가한 뒤 ‘그라노스Granose‘라는 이름을 붙였다. 건강식으로 개발한 콘플레이크에 설탕을 넣는 일은 존 하비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두 형제의 관계는 더욱 나빠졌다. - P48

윌 케이트는 콘플레이크 판매를 더욱 촉진시키기 위해 재미있는 이벤트를 기획했다. 식료품점에서 윙크하는 모든 여성에게 콘플레이크 한 상자를 무료로 나눠준 것이다. 이 이벤트로 콘플레이크를 처음 접한 이들도 콘플레이크가 아주 편리한 아침 식사 대용임을 금세 알아차렸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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