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사 세계문학전집의 짙은 푸른색 표지가 아직도 기억에 선연하다. 하인리히 테오도르 뵐(HeinrichTheodor Böll)의 또 다른 소설 『신변보호』와 한 권으로 묶여 있었다. 이번에 다시 읽은 것은 독문학자 김연수 박사가 번역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번이다. 주인공 카타리나 블룸이 신문기자를 총으로 쏴 죽이기 직전 주고받는 대화가 내 기억과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소설이 주는 강렬한 충격은 이번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 P277
그래서 웬만한 것은 다 누가 특별히 허위라는 문제 제기를 하고 분명하게 입증하지 않는 한, 대충 어느 정도는 사실이려니 여기게 된다. 이것이 평범한 사람들이 언론 보도를 대하는 기본자세이며, 우리네 삶의 어찌할 수 없는 한계다. - P278
그 왜곡 보도 또는 허위 보도 때문에 이익을 보거나 피해를 입는사건 관련자나 당사자가 아니라면, 내가 거기에 왜곡과 거짓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어렵다. 따라서 그 보도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진실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 P278
이론적으로 보면 누구나 왜곡 보도와 허위 보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피해자가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위험에 대해 별로 깊게생각하거나 고민하지 않는다. - P279
그리 길지 않은 이 소설에는 부제가 있으며 다음과 같은 ‘모토‘까지 딸려 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Bild)>와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 - P279
이 소설에서는 신문의 ‘헤드라인‘이 살인 사건을 부른다. 사건 개요는 무척 단순하다. 1974년 2월 20일 수요일 저녁, 스물일곱 살 먹은 젊은 여자 카타리나 블룸은 아는 사람이 주최하는 댄스파티에 참석하기위해 집을 나섰다. 블룸은 한 번 이혼한 경력이 있는, 아주 착실하고 평범한 전문 가사관리인이다.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2월 24일 일요일 저녁, 블룸이 경찰관의 집 초인종을 누른다. 그녀는 경찰관에게, 낮 12시15분경 자기 아파트에서 <차이퉁> 기자 베르너 퇴트게스를 총으로 쏴죽였다고 말한다. - P280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숨이 막혔다. <차이퉁이 카타리나 블룸의 명예를 짓밟은 방식이 너무나도 ‘리얼‘했기 때문이다. - P284
<차이퉁>은 주로 두 가지 방법을 썼다. 첫째는 검찰청 조사실에서 오간 이야기를 악의적으로 왜곡해 중계방송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문명국가의 형법이 금지하는 불법적인 ‘피의 사실 유포‘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다. - P284
국가기관과 언론기관이 한통속이 되어 저지르는 이러한 불법행위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중략) <차이퉁>이 내밀한 사생활 관련 정보를 왜곡 보도해 자신을 모욕하는 데 대해, 그리고 그런 일을 바로잡을 방법이 사실상 전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카타리나 블룸은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을 느낀다. 작가는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 P284
<차이퉁>이 카타리나 블룸의 명예를 짓밟은 또 하나의 수법은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한 말을 교묘하게 왜곡하는 것이었다. <차이퉁>은 카타리나 블룸을 아는 모든 사람들을 찾아내 인터뷰했고, 그녀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목적으로 그들이 한 말을 왜곡 인용했다. - P285
소설 속에서 모든 신문이 이렇게 했던 것은 아니다. 수많은 다른 신문들은 카타리나 블룸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고 사건을 보도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차이퉁> 보도의 위력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차이퉁>은 가장 널리 읽히는 신문이기 때문이다. - P286
<차이퉁>의 왜곡 보도에 대해보도하고 비판하는 신문은 없었기 때문이다. 신문이 다른 신문을, 기자가 다른 기자를 비판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소위 동업자들끼리 서로 비판을 자제하는 ‘침묵의 카르텔‘이 있기 때문이다. - P286
카타리나 블룸은 경찰에 쫓기는 범죄자를 도망가게 했지만 실제로 수사에 장애를 조성하지는 않았다. 범죄로 처벌받을 만한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의명예는 진흙 발에 짓이겨졌고 삶은 막다른 골목에 봉착했다. - P287
소설의 부제를 다시 보자.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여기서 ‘폭력‘은 신문 헤드라인의 폭력 또는 언론의폭력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고, 카타리나 블룸의 살인을 가리키는말일 수도 있다. 뵐은 후기에서 폭력이 ‘무지‘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다. -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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