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관‘이란 그 이름을 들은 순간부터 가와미나미의 가슴은 이상하게 설레고 있었다. 암흑관・・・・・・ 암흑관? 설마 설마 ・・・・・ 하는 그런속마음을 뻔히 들여다보듯이 작은 외할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도미시게 형님한테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어서 말이야." - P54

"그건 그 나카무라 세이지라고 하는・・・・・…."
"으음, 그런 이름이었냐?"
작은 외할아버지는 또 씩 웃으며 말했다.
"자 한잔 해라. 다카아키."
따라 준 술을 시키는 대로 비우고 나서 가와미나미는 약간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그 암흑관이란 저택도 나카무라 세이지가?" - P55

"도미시게 형님한테 사건 이야기를 들은 순간, 오래 잊고 있던 그 저택 이야기가 생각나서 계속 마음에 걸리더구나. 나카무라 뭐라는이름 때문에도 기억이 나지만, 그 저택-암흑관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고 말이야." - P55

작은 외할아버지는 "그래"라고 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 술잔에 새로 술을 따랐다.
"끔찍한 사건이 몇 번이나 일어났던 집이란 소문이 있었어.-아, 다카아키. 너도 한 잔 더 할래?"
몽롱한 뇌리에 본 적도 없는 저택, 암흑관의 그림자가 떠올라 불규칙하게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계속 출렁거렸다. - P56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가슴에 걸쳐 둔한 통증이 느껴졌다. 안전벨트를 묶은 자리다. 벨트를 벗기려고 들어 올린 왼손에서 다른 아픔을 느꼈다. 눈을 돌려 손을 보고, 저도 모르게 신음을 했다. 빨갛다. 피가나고 있었다. 손등에 꽤 큰 상처가 났다. 깨져 떨어진 유리 파편에 벤것일까? - P57

그런데, 아까 그것은 대체?
살펴보니 타이어는 네 개 모두 무사한 것 같았다. 펑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역시 지진이었을까?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컴컴한 숲의 서늘한 공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조용하다. - P58

다시 한숨을 내쉬며 지갑을 안주머니에 넣고, 가와미나미는 차를 등졌다. 쓰러진 풀과 나무에 난 흔적을 더듬어 원래 달리던 길로 돌아갔다.
이 길을 더 가면 문제의 저택이 나올 것이다. 거기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 - P60

얼마간 걷다가 I** 마을 상점 주인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얼굴 상처 자국을 쓰다듬던 그 손의 움직임. "조심하게"라고 반복하던 그 충고, 그 목소리에 겹쳐져 시시야 가도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 조심해, 코난 군.
이제 ‘걱정할 것 없다. 그냥 구경하러 가는 것일 뿐이니까‘ 라고는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 P61

15분도 채 안 걸었을 때였다. 길가에 낡은 팻말이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쓰러지기 직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혹시 조금 전의 지진 때문에 이렇게 된 걸까? 낡은 사각 나무 팻말에, 붉은색 페인트로 적은 빛바랜 각진 글씨 -.

여기부터는 우라도 가문 사유지
무단출입 금지 - P62

요즘 연락이 뜸하기는 했는데, 어디 멀리 가기라도 한 걸까? 그러고 보니 전에 올 가을에는 오이타에 있는 고향집에 잠깐 다녀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지금 고향에 가 있는 걸까?
한참 뒤에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시시야는 역시 부재중이었다. 어떻게 된 걸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다가 전화를 걸어볼 만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렸다.
구마시로 슌노스케神代舜之介. - P63

근대 건축사를 전공한 구마시로 씨는 세이지를 직접 담당한 지도교수는 아니었지만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세이지와는 ‘왠지 뜻이 맞았던 모양이다. 연구실 출입은 물론 요코하마에 있는 구마시로씨의 집에도 몇 차례 놀러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 P63

가와미나미가 이름을 대자 히로요는 "어머, 오래간만이네요"라며 기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잘 지내세요? 전 이제 곧 입시라 책을 많이 읽을 순 없지만, 그래도 시시야 선생님 작품은 모두 읽고 있어요. 할아버지는 제가 대학에합격하면 가와미나미 씨와 시시야 선생님도 불러서 축하 파티를 하자고 벌써 계획을 세우고 있다니까요.….…." - P64

"아하, 또 나카무라 군 이야긴가?"
"어떻게 아셨습니까?"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하겠지. 그래. 뭘 묻고 싶은 거지?"
"예, 그게 말입니다………."
가와미나미가 구마모토 산속에 있다는 암흑관에 대해 이야기하자. 구마시로 교수는 "으음" 하며 낮게 신음했다. - P65

"글쎄, 어떤 이야기였더라. 원래 있었던 저택의 보수인지 개축인지, 사정이 있어서 그런 일을 도와준 적이 있다고 분명히・・・그 이상은 아무리 물어도 소용이 없었다. 가령 ‘암흑관‘이 구체적으로 어떤 건물인가 주인은 어떤 사람인가, 그 뒤 그 건물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예정에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군"이란 말이었다. - P66

구마모토 산속에 암흑관이라는 ‘나카무라 세이지의 관이 있다. 내일 혼자 찾아갈 생각이다ㅡ라고. - P66

5

마치 그 풍경 자체가 숨을 죽이고 숲 속에 묻혀 있는 것 같았다. 호수가 거기 있었다. 낮게 드리웠던 구름이 어느새 옅어져, 선명한 저넉놀이 펼쳐지기 시작한 하늘 아래, 붉게 물든 호수가 괴이한 빛을내고 있었다.
호수 위에 섬이 떠 있었다. 성벽처럼 돌을 쌓아올린 벽이 둘러쳐져있었다. 그 너머에 있는 저것이-
저것이 암흑관인가? - P67

암갈색 석재를 쌓아올린 벽에 검게 칠한 평평한 지붕. 여기서는 창문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은 뭐랄까, 거인을 위해 주문한 돌로된 관해 같은 느낌이었다. 건물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오두막이라고 부르기에는 꽤 중후한 모습이었다.
길 쪽으로 작은 현관이 있었고, 검게 칠한 문이 보였다.
"실례합니다."
가볍게 노크하면서 가와미나미는 소리쳐 불렀다.
"실례합니다. 계십니까?"
대답이 없었다. - P68

건물이 무너져 있었다.
돌로 쌓은 벽 일부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이건-이것도 조금 전 지진 때문일까? 무너진 상태를 보니 며칠전이나 예전에 무너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도 안 계세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 P69

가와미나미는 잔교로 향했다.
배가 한 척 있었다. 고물 왼쪽에 노가 달린, 손으로 젓는 작은 배가 잔교의 말뚝에 로프로 연결되어 있다. 섬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 배를 이용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잔교는 상당히 낡아 있었다. - P69

해질녘 호수에 뜬 섬의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가와미나미는 문득 의문에 휩싸였다.
대체 나는 무엇을⋯⋯⋯⋯⋯
의문은 불안이 되고, 불안은 두려움이 되어 점점 부풀어올랐다. 온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 P70

6

선착장에서부터 높은 석축 담을 따라 완만한 경사의 돌계단이 놓여있었다. 말하자면, 이 섬 전체의 ‘현관‘으로 이어지는 통로인 모양이었다.
가와미나미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지만, 역시 숨이 차서 발걸음이 무거웠다. 도중에 한 번 벽에 기대어 쉴 수밖에 없었다. - P71

드넓은 집터였다. 얼마나 넓은지는 여기서 봐서는 짐작을 할 수 없다. 문에서 시작되는 오솔길은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정원수 사이를지나 안으로 이어진다. 흔히 저녁놀이 질 무렵 귀신들이 움직이기시작할 때라고 하는데, 그에 어울릴 정도로 괴이한 어두컴컴한 공간에 얼핏얼핏 드러나는 건물의 그림자는 날갸를 펼치고 대지에 엎드린 거대한 박쥐를 연상케 한다. - P71

(전략), 어둠 속에 녹아들듯 서 있는 그 검은 탑 앞으로 뻗어 있었다.
원형도 네모도 아니었다. 그것은 정다각형의 탑이었다. 같은 각도로 꺾어진 같은 폭의 벽이 여러 개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셀 필요도 없이 가와미나미는 그 벽면의 숫자를 금방 눈치챘다. -열 개.
십각형 탑이다. 이것은. - P73

희미하게 스며드는 바깥의 빛에 이끌려 가와미나미는 창문 하나로 걸음을 옮겼다. 창문을 열자 좁은 발코니가 있었다. 당장에라도 그 빛깔을 잃을 것 같은 검붉은 하늘이 보였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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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이런 프랭크는 몸을 뒤로 기댔다. 그러니까 나랑은 맞지않는 여자라는 얘긴가. 그야 알고 있었지. 내가 물은 건 그게아니잖아. 그걸 굳이 떠올리게 해야 하는 이유가 뭐지? 그녀를 만나 사랑했던 일은 아직도 사랑하고 있지만 내겐 끔찍한운명이야. - P30

하지만 원래 무엇보다 더 그를 사로잡은 건 그녀의 별난 표정이었다. 줄리아나는 아무 이유 없이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유별나게 멍청해 보이는 모나리자 같은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곤 했다. - P31

하지만 그 뒤로 두 사람이 수없이 다투며 결혼 생활이 막바지에 이르고 나서도, 프랭크는 줄리아나가 그로서는 평생 가도 모를 이유로 하늘이 내려준 존재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종교적 직관이나 믿음에 가까운 그런 이유 탓에, 그는그녀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도무지 극복할 수가 없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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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모테산도를 걸으며 나는 환상의 소설을 둘러싼 소설을 생각했다. 친구에게 『열대』 이야기를 하자 그도 호기심을 보였다.
"아깝군. 그 책이 여기 있었으면 ‘침묵 독서회‘에 안성맞춤일텐데." - P28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가니 유리벽 건물 2층에서 미녀들이머리를 손질하거나 노출 콘크리트의 반지하 공간에서 화이트보드를 놓고 수수께끼 같은 회의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비밀스러운 느낌의 뒷골목을 지나 단독주택이 늘어선 조용한 주택가에 들어섰다. - P29

"늘 이곳에서 하는 모양이야. 주인이 독서 모임 주최자거든."
"이상한 나라의 입구 같은 느낌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침묵 독서회에 발을 들였다. - P30

백발 남자가 오카모토 기도의 괴담에 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거기서 아서 매컨의『괴기 클럽 The Three Impostors The GreatReturn』 이야기로 넘어가고, 나아가 햐쿠모노가타리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마침적당한 전개다 싶어 나는 『천일야화』에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유명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 P30

내가 그렇게 벼락치기로 얻은 지식을 선보이자 거기서부터화제가 이어졌다. 가짜 사본에서 연상해 보이니치 사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라고사에서 발견된 원고』라는 기묘한 소설을 소개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 P31

"한 번 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건 싫은데요. 귀꼬리의 정체가 알고 보니 시시한 거면 내 어린 시절 자체가 시들어 버릴 것 같아요. 그건 저한테 소중한 추억이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와서 다시 그 책을 읽어볼 생각은 없고, 이 계단이나 계단참을 제가 어렸을 때 봤던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죠. 수수께끼는 수수께끼인 채로 두는 게 중요한 겁니다."
그제야 나는 주인이 하려는 말을 이해했다.
"아하, 그래서 ‘침묵‘ 독서회군요." - P34

(전략)
‘이거 또 난해한 이야기를 하는군…………….?
나는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다.
그때 소파 안쪽에 앉은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체격이 작고 이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는데,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이 생기 넘쳤다. 분명히 매력적인 외모였지만 그보다 더 내관심을 끈 것은 그녀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책이었다.  - P36

사야마 쇼이치의 『열대』였다.
나는 너무 놀라 말을 걸 수도 없었다. 서둘러 그곳을 벗어나서 원래 자리로 돌아와 친구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큰일 났는데요."
"뭐가? 무슨 말썽이라도 생겼어?"
"『열대』를 발견했습니다." - P36

우리는 그룹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조금 전 그룹으로 다가갔다. 그리스 철학에 관해 이야기하던 남자는 우리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말씀하시는 중에 죄송합니다"라고운을 뗀 뒤 여자에게 말했다.
"그 책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말입니다."
그녀는 경계하듯 『열대』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 P37

그녀는 잠자코 내 얼굴을 쳐다봤다. 그대로 휙 어디론가 가버릴 듯한 낌새에 불안했지만 그녀는 뜻밖에 생긋 웃었다.
"그럼 어떤 책인지 가르쳐 주시겠어요?"
그녀는 도전적으로 말하며 테이블에『열대』를 올려놓았다. - P37

나는 가까이 있던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그건 압니다."
그녀는 엄격한 면접관처럼 매섭게 말했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열대』의 내용을 모두 이야기했다. 그동안 그녀는 테이블 위의 『열대』에 손을 올려놓은 채 보일 듯 말듯 눈썹을 찌푸리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말 듣고 있는지 불안해질 정도였다. - P38

"그게 끝이라고? 모리민!"
"끝까지 못 읽었으니까요. 실물을 읽으면・・・・・・.‘
나는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위의 『열대』를 가리켰다. 그러자그녀는 『열대』를 집어 다시 품에 안았다.
아아, 이렇게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있건만 왜 나를 경계하는 걸까. 내가 그 정도로 수상쩍은 아저씨로 보이는 걸까. - P39

"정말 그렇게 읽고 싶으신가요?" 그녀는 말했다. "실제로 읽어봤더니 당신이 생각하던 것과 전혀 딴판일지도 모르는데요."
그건 확실히 그녀 말이 맞을 것이다. 과거에 걸작이라고 생각했던 책이 세월이 흐르면서 퇴색하는 것은 곧잘 있는 일이다. 과거에는 지루했던 책이 시간이 지나고 다시 읽어보니 재미있더라 하는 일도 있다.  - P39

"사실은 저도 이 책을 다 못 읽었거든요."
"얼마든지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이 다 읽을 때까지."
그녀는 기이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걸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 P40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그녀는 손가락을 쳐들고 조용히 말했다.
"이 책을 끝까지 읽은 사람은 없거든요." - P40

나는 헛기침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말 그대로예요. 이 책은 끝까지 읽을 수 없어요." - P40

그녀는 냉랭하게 그를 바라봤다.
"마지막 페이지만 읽으면 소설을 읽은 게 되나요? 첫 문장부터 소설 속 세계에 들어가서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해야 그 소설을 읽은 거라고 할 수 있지 않나요?"
"으음."

"열대』는 소설입니다." 나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소설은 누가 뭘 해서 어떻게 됐다는 식으로 요약해 봤자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등장인물들과 함께 그 세계에 살면서 푹 빠져 읽는 동안에만 존재한다. 그게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그런데 『열대』는 그런 식으로 읽으면 끝까지 다다를 수 없다는 뜻입니까?" - P41

"당신도 끝까지 못 읽었잖아요?"
99
"그건 제가 『열대』를 분실하는 바람에……….
"우리 말고도 『열대』를 읽은 사람들을 알아요. 하지만 그 사람들 중에도 끝까지 다 읽었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 P41

제2장
학파의 남자

시라이시 씨가 다시 소설을 읽게 된 것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첫 직장을 그만둔 다음이었다. 얼마 동안 고이시카와에 있는 본가에서 울적하게 지내다가 작년 가을경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 P47

그런 하루하루가 두 달쯤 지난 어느 날, 그녀는 문득 ‘오랜만에 소설이라도 읽어볼까‘ 싶어 점심시간에 산세이도 서점으로가서 문고본을 샀다.
아사다 지로의 『프리즌 호텔 1』이었다. - P48

하지만 재미있는 소설이 이루 다 읽을 수없을 만큼 있다는 건 무조건 좋은 일, 근사한 일, 다들 애썼다.
인류 만세! 그런 기분이었어요."
그러다가 11월에 들어선 어느 날이었다.
그녀는 계산대에 턱을 괴고 앉아 『로빈슨 크루소』를 읽고 있었다. - P49

이케우치 씨의 직장은 같은 건물 5층에 있는 수입 가구 회사였다.
아마 서른 살쯤 됐을 것이다. 그는 늘 거무스름한 양복을 입고 큰 검정 노트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시라이시 씨는 초연히 비를 피하는 야윈 새가 생각났다. - P50

철도와 독서가 이케우치 씨의 취미였다.
"기차 여행만큼 멋진게 없어요. 차창을 봐도 즐겁고, 책을읽어도 즐겁고, 온통 즐거운 것투성이입니다."
이케우치 씨는 책을 꽤 많이 읽는 사람인 듯했다. 잡담을 주

이케우치 씨에 관해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더 있었다.
시라이시 씨가 일하는 유라쿠정 건물 지하, 의원과 여행사가 늘어선 구역에 ‘메리‘라는 고풍스러운 찻집이 있다. 그녀는 오후 2시쯤 점심을 먹으러 나가 빵이 버석버석거리는 마른 샌드위치와 미지근한 커피를 음미하며 문고본을 읽곤 했다. - P52

12월에도 이케우치 씨는 꼬박꼬박 모형 상점을 찾았다.
정체불명의 모임에 관한 이야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시라이시 씨는 별별 망상을 다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 P53

. 이케우치 씨는 시간표대로 운행되는 열차고, 이 철도 모형 상점은 열차가 정차하는 역이고, 자신은 역무원이다. 통과하는 열차와 역무원 사이에 로맨스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 주 수요일도 낮이 되자 삼촌이 슬그머니 나가려고 했다.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가게 부탁한다."
"어디 가려고요?"

"늘 그 노트를 가지고 다니시네요."
그녀가 말하자 이케우치 씨는 "네?" 하고 놀라더니 다시 손에 든 노트를 봤다. 자신이 메모하던 것을 그제야 비로소 깨달은 사람 같았다.
"이게 없으면 마음이 불안해서 말이죠."
"업무에 쓰시는 거예요?"
"아뇨, 완전히 사적인 노트입니다. 읽은 책에서 발췌한 문장을 베껴 쓴다든지 생각한 걸 쓰곤 하죠." - P55

"노트가 얼마 남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노트가 다 차면 그때까지 적어놓은 문장을 가지고 다닐 수 없게 되니까요. 소위 거함거포주의라고 할까요."
"하지만 그럼 디디욱 이별이 힘들지 않나요?"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정말이지 딜레마예요. 아주 난감한일입니다." - P56

"웬걸요. 지금도 충분히 자신감 있어 보이시는데요?"
"웬걸요, 속은 정말이지 한심이입니다."
"한심이!"
시라이시 씨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럼 무슨 계기로노트를 쓰게 됐느냐고 물었다.
이케우치 씨는 "그게 좀 묘한 경위랍니다"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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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경 마침내 심문을 위해 카타리나 블룸을 아파트에서 연행할 때, 결국 그녀에게 수갑은 채우지 않기로 했다. 바이츠메네는 수갑을 채우라고 고집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플레처여경과 자신의 조수 뫼딩과 함께 잠깐 대화를 나눈 후 그러지않기로 결정했다. - P23

 "내 이름은 카타리나 브레틀로이고, 결혼 전 싱은 블룸입니다. 나는 1947년 3월 2일 쿠이르 지방의 마을 게멜스브로이히에서 태어났습니다. (후략) - P34

"(전략) 1961년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대모인, 쿠이르 출신 엘제 볼터스하임 부인의 도움으로 그곳 게르버 씨의 정육점에서 가정부일자리를 얻었습니다. 거기에선 이따금 판매 일도 도와야 했습니다. 1962년에서 1965년까지는 대모인 볼터스하임 부인의 도움과경제적 후원으로 그녀가 교사로 일하고 있던 쿠이르 생활과학아카데미에 다녔고, 아주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후략)" - P24

"(전략) 페너른 박사님은 나에게 야간 강습 및 평생교육과정을 다니도록 허락해 주었을 뿐 아니라 국가가 공인한 가정관리사 자격증 시험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박사님은 매우친절했고 아주 아량이 넓었습니다. 시험을 치른 후에도 나는 그집에 머물렀습니다. 1969년 말, 페너른 박사님은 회계 업무를 담당했던 대기업들의 엄청난 탈세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습니다. (후략)" - P25

나한테 그동안 저축해 둔 7,000마르크 정도가 있었고, 블로르나 부부가 30,000마르크 신용 대출에 보증을 서 주었기때문에, 1970년 초에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었습니다. 초기에 내가 매달 부담해야 할 최소 금액이 대략 1,100마르크에 달했지만,
블로르나 부부가 월급을 계산할 때 내 식대를 포함시키지 않았고, 심지어 매일 먹고 마실 것을 슬쩍슬쩍 쥐여 주어서, 나는 아주 절약하며 살 수 있었고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대출금을 상환할 수 있었습니다. - P27

세무서에는 자영업자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세금과 보험금은 내가 직접 지불하고, 소득세 신고 등의 일은 전부 블로르나 사무실에서 무료로 처리해 줍니다. 1972년 초부터 나는 1968년형 폴크스바겐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 P27

하흐의 말대로, 그녀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분할수도, 이런 심문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도 없었던 게 분명하다. 바이츠메네가 커피와 빵을 맛있게 먹고 나서 와이셔츠 깃부분의 첫 단추를 끄르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아버지처럼 보이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정말 아버지처럼 행동했을 때, 블룸은자신을 감방으로 호송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 P28

 오전에 아파트 욕실에서 그녀가 옷을 입는 동안 욕실 문 앞에서 감시했던 두경찰 중 한 명이 그녀에게 "한 잔 대접하겠다"고 했음에도, 그녀는 한사코 자신이 돈을 내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이 일로 두 경찰과 플레처 부인은 카타리나 블룸이 유머러스하지는 않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 P29

18

심문이 오래 걸린 까닭은, 카타리나 블룸이 놀랄 정도로 꼼꼼하게 모든 표현을 일일이 검토했고, 조서에 기록된 문장을 하나하나 큰 소리로 읽어 달라고 했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 P30

블로르나 부부를 가리킨 "선량한"이라는 단어를 놓고도 이와 유사한 논쟁이 벌어졌다. 조서에는 "나에게 친절한"이라고 쓰여있었는데, 블룸은 "선량한"이라는 단어를 고집했다. "선량한"이라는 단어가 유행에 뒤진 것처럼 들린다는 이유로, 이 단어 대신 "호의적인"이라는 단어를 제시하자, 그녀는 화를 냈으며, 친절과 호의는 선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자신에게 보여 준 블로르나 부부의 행동을 선함으로 느꼈다고 주장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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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6
신성, 에로티즘, 고독

에로티즘은 우리를 고독 속에 가둔다는 원칙에서 출발하자. 에로티즘은 다루기 까다로운 주제이다. 단지 관례적인 것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도 에로티즘은 은밀하게 정의된다. 그것은 공개적일 수 없다. 물론나는 반대의 예를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에로티즘은 일상적 삶의 바깥에 위치한다. 우리의 체험에 비추어볼 때, 에로티즘은 본질적으로 감정의 정상적 의사소통 구조를 벗어난다. - P294

오늘날에는 금기가 완화되었다. 금기에 관한 완화적인 분위기가 없었다면, 오늘의 이 강연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강연장은 담론의 세계에 속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에로티즘은 결국 여전히 우리에게 외적인 것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 P295

신비 체험은 에로티즘과 매우 유사한 체험이면서 좀 다르다. 신비체험에서 느낀 감동은 담론의 형태로 설명할 수 있으며, 설교의 주제가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에로티즘과 신비 체험은 서로 가까이 있다. - P295

 나는 이제 신비 체험의 감동과 에로티즘의 감동들이 얼마나 강렬한 것들인지를 따로따로 살펴볼 생각이다. 나는 앞서 둘 사이의 차이를 하나는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가깝게 하는 반면 다른 하나는 우리를 사람들로부터 유리시켜 고독 속에 빠뜨리는 데 있다고 지적해 두고 싶었다. - P295

한마디로 그것은 전문가의 체험이다. 감정은 전문가를 빗나가게 만든다. 아주 오래전부터 특별한 한 가지 사실이 나를놀라게 했다. 진정한 철학자는 자신의 생애를 철학에 바쳐야 한다.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하나는 한 분야에서 우월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다른 분야에 무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철학도 다른 모든인식 활동과 마찬가지 처지가 되었다.  - P296

 이제 철학은 더 이상 지식의 총체일 수없으며, 자꾸만 전문성을 띠어 가고 있는 오늘날의 철학적인 특성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더 이상 총체적 체험을 꿈꿀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강렬한 감동을 무시한다면, 자기 자신을 성찰하거나 또는 존재 일반을 성찰하는 행위가 과온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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