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모테산도를 걸으며 나는 환상의 소설을 둘러싼 소설을 생각했다. 친구에게 『열대』 이야기를 하자 그도 호기심을 보였다.
"아깝군. 그 책이 여기 있었으면 ‘침묵 독서회‘에 안성맞춤일텐데." - P28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가니 유리벽 건물 2층에서 미녀들이머리를 손질하거나 노출 콘크리트의 반지하 공간에서 화이트보드를 놓고 수수께끼 같은 회의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비밀스러운 느낌의 뒷골목을 지나 단독주택이 늘어선 조용한 주택가에 들어섰다. - P29

"늘 이곳에서 하는 모양이야. 주인이 독서 모임 주최자거든."
"이상한 나라의 입구 같은 느낌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침묵 독서회에 발을 들였다. - P30

백발 남자가 오카모토 기도의 괴담에 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거기서 아서 매컨의『괴기 클럽 The Three Impostors The GreatReturn』 이야기로 넘어가고, 나아가 햐쿠모노가타리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마침적당한 전개다 싶어 나는 『천일야화』에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유명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 P30

내가 그렇게 벼락치기로 얻은 지식을 선보이자 거기서부터화제가 이어졌다. 가짜 사본에서 연상해 보이니치 사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라고사에서 발견된 원고』라는 기묘한 소설을 소개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 P31

"한 번 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건 싫은데요. 귀꼬리의 정체가 알고 보니 시시한 거면 내 어린 시절 자체가 시들어 버릴 것 같아요. 그건 저한테 소중한 추억이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와서 다시 그 책을 읽어볼 생각은 없고, 이 계단이나 계단참을 제가 어렸을 때 봤던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죠. 수수께끼는 수수께끼인 채로 두는 게 중요한 겁니다."
그제야 나는 주인이 하려는 말을 이해했다.
"아하, 그래서 ‘침묵‘ 독서회군요." - P34

(전략)
‘이거 또 난해한 이야기를 하는군…………….?
나는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다.
그때 소파 안쪽에 앉은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체격이 작고 이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는데,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이 생기 넘쳤다. 분명히 매력적인 외모였지만 그보다 더 내관심을 끈 것은 그녀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책이었다.  - P36

사야마 쇼이치의 『열대』였다.
나는 너무 놀라 말을 걸 수도 없었다. 서둘러 그곳을 벗어나서 원래 자리로 돌아와 친구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큰일 났는데요."
"뭐가? 무슨 말썽이라도 생겼어?"
"『열대』를 발견했습니다." - P36

우리는 그룹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조금 전 그룹으로 다가갔다. 그리스 철학에 관해 이야기하던 남자는 우리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말씀하시는 중에 죄송합니다"라고운을 뗀 뒤 여자에게 말했다.
"그 책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말입니다."
그녀는 경계하듯 『열대』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 P37

그녀는 잠자코 내 얼굴을 쳐다봤다. 그대로 휙 어디론가 가버릴 듯한 낌새에 불안했지만 그녀는 뜻밖에 생긋 웃었다.
"그럼 어떤 책인지 가르쳐 주시겠어요?"
그녀는 도전적으로 말하며 테이블에『열대』를 올려놓았다. - P37

나는 가까이 있던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그건 압니다."
그녀는 엄격한 면접관처럼 매섭게 말했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열대』의 내용을 모두 이야기했다. 그동안 그녀는 테이블 위의 『열대』에 손을 올려놓은 채 보일 듯 말듯 눈썹을 찌푸리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말 듣고 있는지 불안해질 정도였다. - P38

"그게 끝이라고? 모리민!"
"끝까지 못 읽었으니까요. 실물을 읽으면・・・・・・.‘
나는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위의 『열대』를 가리켰다. 그러자그녀는 『열대』를 집어 다시 품에 안았다.
아아, 이렇게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있건만 왜 나를 경계하는 걸까. 내가 그 정도로 수상쩍은 아저씨로 보이는 걸까. - P39

"정말 그렇게 읽고 싶으신가요?" 그녀는 말했다. "실제로 읽어봤더니 당신이 생각하던 것과 전혀 딴판일지도 모르는데요."
그건 확실히 그녀 말이 맞을 것이다. 과거에 걸작이라고 생각했던 책이 세월이 흐르면서 퇴색하는 것은 곧잘 있는 일이다. 과거에는 지루했던 책이 시간이 지나고 다시 읽어보니 재미있더라 하는 일도 있다.  - P39

"사실은 저도 이 책을 다 못 읽었거든요."
"얼마든지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이 다 읽을 때까지."
그녀는 기이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걸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 P40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그녀는 손가락을 쳐들고 조용히 말했다.
"이 책을 끝까지 읽은 사람은 없거든요." - P40

나는 헛기침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말 그대로예요. 이 책은 끝까지 읽을 수 없어요." - P40

그녀는 냉랭하게 그를 바라봤다.
"마지막 페이지만 읽으면 소설을 읽은 게 되나요? 첫 문장부터 소설 속 세계에 들어가서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해야 그 소설을 읽은 거라고 할 수 있지 않나요?"
"으음."

"열대』는 소설입니다." 나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소설은 누가 뭘 해서 어떻게 됐다는 식으로 요약해 봤자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등장인물들과 함께 그 세계에 살면서 푹 빠져 읽는 동안에만 존재한다. 그게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그런데 『열대』는 그런 식으로 읽으면 끝까지 다다를 수 없다는 뜻입니까?" - P41

"당신도 끝까지 못 읽었잖아요?"
99
"그건 제가 『열대』를 분실하는 바람에……….
"우리 말고도 『열대』를 읽은 사람들을 알아요. 하지만 그 사람들 중에도 끝까지 다 읽었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 P41

제2장
학파의 남자

시라이시 씨가 다시 소설을 읽게 된 것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첫 직장을 그만둔 다음이었다. 얼마 동안 고이시카와에 있는 본가에서 울적하게 지내다가 작년 가을경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 P47

그런 하루하루가 두 달쯤 지난 어느 날, 그녀는 문득 ‘오랜만에 소설이라도 읽어볼까‘ 싶어 점심시간에 산세이도 서점으로가서 문고본을 샀다.
아사다 지로의 『프리즌 호텔 1』이었다. - P48

하지만 재미있는 소설이 이루 다 읽을 수없을 만큼 있다는 건 무조건 좋은 일, 근사한 일, 다들 애썼다.
인류 만세! 그런 기분이었어요."
그러다가 11월에 들어선 어느 날이었다.
그녀는 계산대에 턱을 괴고 앉아 『로빈슨 크루소』를 읽고 있었다. - P49

이케우치 씨의 직장은 같은 건물 5층에 있는 수입 가구 회사였다.
아마 서른 살쯤 됐을 것이다. 그는 늘 거무스름한 양복을 입고 큰 검정 노트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시라이시 씨는 초연히 비를 피하는 야윈 새가 생각났다. - P50

철도와 독서가 이케우치 씨의 취미였다.
"기차 여행만큼 멋진게 없어요. 차창을 봐도 즐겁고, 책을읽어도 즐겁고, 온통 즐거운 것투성이입니다."
이케우치 씨는 책을 꽤 많이 읽는 사람인 듯했다. 잡담을 주

이케우치 씨에 관해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더 있었다.
시라이시 씨가 일하는 유라쿠정 건물 지하, 의원과 여행사가 늘어선 구역에 ‘메리‘라는 고풍스러운 찻집이 있다. 그녀는 오후 2시쯤 점심을 먹으러 나가 빵이 버석버석거리는 마른 샌드위치와 미지근한 커피를 음미하며 문고본을 읽곤 했다. - P52

12월에도 이케우치 씨는 꼬박꼬박 모형 상점을 찾았다.
정체불명의 모임에 관한 이야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시라이시 씨는 별별 망상을 다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 P53

. 이케우치 씨는 시간표대로 운행되는 열차고, 이 철도 모형 상점은 열차가 정차하는 역이고, 자신은 역무원이다. 통과하는 열차와 역무원 사이에 로맨스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 주 수요일도 낮이 되자 삼촌이 슬그머니 나가려고 했다.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가게 부탁한다."
"어디 가려고요?"

"늘 그 노트를 가지고 다니시네요."
그녀가 말하자 이케우치 씨는 "네?" 하고 놀라더니 다시 손에 든 노트를 봤다. 자신이 메모하던 것을 그제야 비로소 깨달은 사람 같았다.
"이게 없으면 마음이 불안해서 말이죠."
"업무에 쓰시는 거예요?"
"아뇨, 완전히 사적인 노트입니다. 읽은 책에서 발췌한 문장을 베껴 쓴다든지 생각한 걸 쓰곤 하죠." - P55

"노트가 얼마 남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노트가 다 차면 그때까지 적어놓은 문장을 가지고 다닐 수 없게 되니까요. 소위 거함거포주의라고 할까요."
"하지만 그럼 디디욱 이별이 힘들지 않나요?"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정말이지 딜레마예요. 아주 난감한일입니다." - P56

"웬걸요. 지금도 충분히 자신감 있어 보이시는데요?"
"웬걸요, 속은 정말이지 한심이입니다."
"한심이!"
시라이시 씨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럼 무슨 계기로노트를 쓰게 됐느냐고 물었다.
이케우치 씨는 "그게 좀 묘한 경위랍니다"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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