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너에게는 모세5경보다 신약성경이 더온화하고 밝고 마음에 와 닿았다. 신약성경은 언어가 오래되지않아 깊고 풍부한 맛은 덜했지만, 젊고 열정적이며 이상을 꿈꾸는 정신으로 가득했다.
또한 《오디세이아》가 있었다. 그 시구들은 아름답고 격정적인 울림으로 강하고 균형 있게 흘렀다. 시구 속에서 물의 요정의 하얗고 둥글둥글한 팔이 지금은 사라진 견고하고 행복했던 인생들의 소식과 생각을 건져 올려주었다. - P99

원래 한스에게 저녁은 공부에 매진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저녁이면 곧잘 공부에 질린 하일너가 찾아와 책을 빼앗고 함께하기를 원했다. 한스는 친구를 좋아했지만 나중에는 하일너가 저녁마다 찾아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어느 것도놓치지 않기 위해 의무적인 학습 시간에 두 배 더 집중하고 더많이 공부했다. - P100

친구에게는 간혹 착한 한스가 단지 편안한 장난감, 이를테면애완 고양이처럼 여겨졌다. 한스 자신도 그렇게 느낄 때가 있었다. 하지만 하일너는 한스를 진심으로 필요로 했고 그래서 한스에게 매달렸다. 하일너에게는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주며 자신을 칭찬해주는 사람, 믿음직한 친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 P101

한스는 하일너의 이런 병적인 우울함은 단지 과도하고 비이성적인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지, 자신이 신뢰하고 진정 감탄하는 친구의 실제 본성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일너가 자작시를 낭송하거나 시의 이상에 대해 말하거나 실러와 셰익스피어의 독백을 과장된 몸짓과 함께 열정적으로 재현할 때면,
한스는 마치 친구가 자신에게는 없는 마법의 능력으로 허공에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 P103

하일너는 교장의 서재 문 앞까지 와서 간신히 루치우스를 따라잡았다. 루치우스는 이미 노크를 하고 문을 열던 마지막 순간에 예고받은 대로 한 방 걷어채었다. 그리고미처 문을 닫을 새도 없이 권력자의 가장 신성한 공간으로 폭탄처럼 튕겨 들어갔다.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 다음 날 아침 교장은 젊은이의 탈선에 관한 설교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루치우스는 교장의 말뜻을 음미하며 박수갈채를 보냈고, 하일너는독방에 갇히는 무거운 벌을 받게 되었다. - P105

하일너는 창백한 얼굴로 서서 반항의 눈빛으로 교장을 똑바로 쏘아보고 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속으로 그를 대단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연설이 끝나고 복도로 우르르 나갈 때는 무슨 나병 환자라도 되는 양 하일너를 피하고 홀로 내버려 두었다. - P105

한스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결국 친구로서의 의무와 학생으로서의 의무가 벌이는 싸움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한스의 목표는 성공하는 것, 높은 시험 점수를 받는 것, 뛰어난 성과를 올리는 것이지, 낭만적이거나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 P106

하일너는 조용하지만 반항적으로 고개를 높이 쳐들고 거만한 표정을 짓고 다녔다.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공책을 펴고시를 적는 일이 많아졌다. 공책 표지를 감싼 검은색 방수포 위에는 ‘어느 수도사의 노래‘라는 제목이 쓰여 있었다. - P107

연주곡 <고요한 밤>은 루치우스의 손가락을 거쳐 괴로운 탄식 소리로 들렸고, 신음과 고통이 가득한 수난의 노래가 되었다. 루치우스는 두 번이나 다시 시작했다. 멜로디를 사정없이 찢고 쪼개면서 발로 박자를 맞추는 모습이 마치 혹한의 날씨에 일하는 나무꾼 같았다.
교장은 분노로 창백해진 음악 교사를 향해 흐뭇하게 고개를끄덕여 보였다. - P108

"괜찮아요, 루치우스 군." 교장이 입을 열었다. "노력하는 모습에 우리 모두 고맙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계속 노력해주세요.Per aspera ad astra(시련을 거쳐야 성공하리라)!" - P109

하일너만이 혼자 서서 침묵늘 지키고 있었다. 마침내 기차가 오자 하일너는 학우들이 다 탈때까지 기다렸다가 홀로 아무도 없는 칸에 올라탔다. 다음 역에서 기차를 갈아타면서 한스는 하일너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 P110

한스는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제대로 즐겨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노래와 파티의 흥겨움이 없었고, 어머니가 없었으며, 크리스마스 트리도 없었다. 아버지 또한 파티를 즐길 줄 몰랐다. 그러나 아들이 자랑스러웠던 나머지 이번만은 선물을 사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 P110

강은 꽁꽁 얼어붙어서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스는 거의 하루 종일 밖에서 시간을 보냈다. 새 양복에 초록색 신학생 모자를 쓴 그는고향 동창들에게 부러움을 받는 더 높은 세계에 서 있었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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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내게 사인을 해달라고 들이대던 팬들과 이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건 이 사람 또한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사람만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아니다.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하는 인간은 내 주위에 이 사람을 포함해 일곱 명이나 된다. 남자 넷 여자 셋. 실제로 조금 전까지 이 집에 있었던 자도 나를 죽이려다가 실패했다. - P16

오늘 밤 나를 죽일 인간으로 그 일곱 명 중 누구를 선택하든 상관없었다. 내가 이 사람을 최종적인 살인자로 선택한 건 그저 잠깐의 변덕 같은 것이다. - P16

몸을 돌렸지만, 누군가는 내가 쳐다보는 것도 알지 못한 채죽은 물고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윽고 내 눈길을 깨달은 모양이지만 그 후에도 얼굴 대신 스웨터에 눈길이 가 있었다.
물고기와 꼭 닮은 파란색과 흰색의 굵은 줄무늬 스웨터였기 때문이다. 이것도 나의 소소한 계산이다. - P17

머릿속 한 귀퉁이에서는여태껏 자신을 괴롭혀온 여자가 죽는 모습을 상상하고 내게 들키지 않게 은밀한 미소를 지었을 게 틀림없다. 그리고 죄 없는 물고기가 아니라 이 여자가 죽었어야 한다고 아쉬워했을 것이다. - P18

"청산가리는 일반인이라면 쉽게 구할 수 없지만 의사라면다르잖아. 그래도 설마 살해하려고 할 만큼 나를 미워했다니, 전혀 생각도 못 했지 뭐야." - P18

"이미 결론이 났는데도 오늘 저녁에 또 불쑥 찾아온 거야.
얼굴이 음울한 게 뭔가 이상하다 싶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
손톱 끝으로 빈 약봉지를 집어 전등 불에 비췄다. 내 시선은 밀랍 종이를 통해 붉은 어둠과 그 가장자리에 걸린 누군가의왼쪽 눈을 찬찬히 관찰했다.
"어머, 지문이 찍혀 있네? 경찰에 신고해버릴까. 미수에 그쳤어도 살인 사건이 날 뻔했잖아. 이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체포될걸." - P19

"이 술잔을 요만큼만 당겨서 내 입에 넣었다면 나는 벌써죽었겠지? 너무 끔찍해."
생각난 대로 내뱉은 그 두 가지 말에 누군가는 아무 반응도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만 태연한 척하는 것이다. 무표정한 눈의 뒤쪽에서는 분명 변화가 일어났다. - P20

재빨리 그다음 덫을 치기 위해 일부러 진한 한숨을 내쉬
"아무튼 바보 같은 사람이라니까. 의사인 데다 나이가 마흔다섯 살이나 됐으면 조금 더 머리를 썼어야지. 이건 뭐, 길에서충동적으로 생판 타인을 죽이는 열대여섯 살 어린애나 똑같지 뭐야." - P20

"아니, 여기 집 안 곳곳에 그 사람의 지문이 남아 있잖아.
문짝만이 아니야. 이 테이블에도, 유리잔에도, 브랜디 술병에도,
그리고 저쪽 테이블과 재떨이에도 찍혀 있을걸."
나는 조금 떨어진 백목 테이블에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 P21

"알리바이?" 나는 깔깔깔 웃었다. "당신, 그거 몰랐어? 내가내일부터 십오일 일정으로 파리에 가잖아. 이 집에 자유롭게 드나드는 건 가사도우미뿐인데 그 여자는 이달 말에나 올 거야. 십오일 동안 내가 보이지 않아도 설마 살해되었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는 얘기야. 사체는 11월 30일에나 발견되겠지. 그러면 경찰에서도 내가 며칠 몇 시에 살해되었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게돼. 사망 추정 일시가 확실하지 않은 범죄인데 알리바이를 준비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는 거 아닌가? 그 사람도 내가 십오일 동안 여행을 떠난다는 거, 다 알고 있어." - P22

"게다가 그 사람, 오늘이 며칠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어. 나한테 배신당한 충격으로 신경증에 걸린 듯한 기미였거든. 이번 달부터 병원도 쉬고 하루 종일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대."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알리바이라면, 아마 그걸 써먹을 거야."

"맞아, 나를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안성맞춤의 알리바이가 될 만한 게 있어. 간단하지만 틀림없이 잘 먹힐 거야. 하긴그러려면 오늘 밤 안에 내가 살해되어야 해... 어때, 알려줄까?"
(중략)
"싫어, 그걸 알려주면 당신이 정말로 나를 죽일 수도 있잖아. 그 의사만이 아니라 당신도 나를 죽이고 싶어 했지?"
"죽이다니, 말도 안 돼…."
누군가는 다급하게 취소하려고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 P23

"좋아, 그렇다면 알려줄게. 너무 웃기는 방법이거든."
나는 술을 꿀꺽 마시고 취해서 입이 가벼워진 척하며 빠른 말투로 주워섬겼다. 이미 완전히 외워버린 얘기를 연기가 서툰 배우가 입 끝으로만 대사를 읽듯이 줄줄 쏟아내며 나는 오로지 벽시계 소리만 듣고 있었다. - P24

죽음이 초침 소리와 함께 드디어 내게 찾아오려 하고 있었다.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일곱 명 중 누구여도 상관없는 한 명, 그 사람에게 의기양양하게 알리바이 조작 방법을 알려주면서, 지난 오년 사이의 또 하루, 저주스러운 기념일이 생각났다. 어느 날, 쇼가 끝나고 무대 뒤편으로 팬이라면서 한 여자가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단둘이 남았을 때, 웃는 얼굴 그대로 내게말했다.
"너, 성형수술 했지?" - P25

나는 실제로도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아직 나를 죽일 생각은 없겠지. 나한테 그만큼 앙갚음을 당하면서도 당신은 소심해서 그런 짓을 시도할 용기도 없거든. 근데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들으면 달라질걸? 아마 진짜로 죽이고 싶어질 거야."
그리고 다시 변덕이 도진 척하며 문득 웃음을 지워버렸다. - P28

봉투에서 일곱 장의 종이를 꺼내 툭 던져주자 누군가는가로채듯이 집어 들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갈 때마다 눈빛은 경악과 공포의 빛이 진해져 갔다. 덥지도 않은데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 이마에 배어난 진땀을 나는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았다. 이 미소는 다른 어떤 표정보다도 나를 뼛속까지악에 물든 잔인한 여자로 보이게 할 것이다. - P29

봉투에는 매주 160만부의 판매 부수를 자랑하는 주간지의 편집부 주소와 ‘오자와 유지‘라는 기자 이름이 적혀 있다. 신랄한 글솜씨와 스캔들을 낱낱이 파헤치는 기사로 그쪽 업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물이다. 그자의 이름을 물론 이 사람도 알고 있다. - P30

있어?"
"협박이라고? 내가 단 한 번이라도 돈 같은 걸 요구한 적이
"대체 왜...."
왜 이런 지독한 짓을 하는가, 왜 이렇게 나를 증오하는 것인가….
누군가는 지겹지도 않은지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영원히 답을 찾을 수 없는 수수께끼에 오로지 주문呪文처럼 ‘왜‘라는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듯이. - P31

이자는 그리 쉽게 자살할 사람이 아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망설임 없이 타인의 목숨까지 희생시킬 인간이다. 나는 이 사람의 그런 쩨쩨한 이기주의에 내기를 걸었다.
"어떻게 하면 되겠니...."
누군가의 입에서 신음처럼 말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 하면 봐줄 거야? 그 편지만 보내지 않으면 뭐든 다 할게."
돈이 필요하다면 전 재산을 내줄 거고, 뭐든 원하는 대로해줄게... - P33

몇 초의 침묵 끝에 나는 먹이를 던져주었다.
"오늘 밤 안으로 나를 죽이면 돼."
물론 깔깔 웃으며 곧바로 그 말을 취소했다. - P34

이 밤의 정적 속에 언제까지고 길게 꼬리를 끌었다. 이윽고 누군가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나는 사람을 죽이지는 못해. 모든 걸 뻔히 꿰뚫어 보고 있구나."
체념한 듯한 서글픈 눈빛을 슬쩍 내게로 흘렸다. 힘없는 목소리는 내 동정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 P36

"맞아, 포기하는 게 좋아. 당신도 드디어 모든 걸 내려놓기로 결심한 모양이네. 이제 나하고 똑같아졌어. 건배라도 할까?"
누군가가 손에 든 잔에 내 잔을 쟁그랑 맞부딪쳤다. - P36

얼음을 넣자 잔의 술이 부쩍 늘어났다. 마치 유리잔에 눈금이라도 그려진 것처럼 세 번째 잔의 독약 섞인 술의 높이와 똑같았다. 이 사람은 마침내 결심하고 독약이 든 잔과 내 잔을 바꿔치기할 작정인 것이다.
마지막 장난기가 발동해서 나는 한 마디 덧붙였다.
"아니, 가득 따라줘야지." - P37

깍지를 끼고 얌전히 무릎 위에 놓인 누군가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며 지금 내가 몇 마디 던지면 이 사람이 어떤 얼굴을 할지 상상해보았다.
"당신, 나를 죽이려고 하지? 근데 실은 살해당하려고 전부내가 꾸민 거야."
또다시 어설픈 농담을 한다면서 못마땅한 얼굴을 할까. 나는 또한 그 손에 내 손을 얹는 장면을 상상했다. 우리의 관계는 공범과 비슷해서 서로 손도 맞잡곤 했으니까. 하지만 우욱 구토감이 몰려와 목을 비볐다. - P38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대체 누구야, 이런 시간에?"
나는 짜증을 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몇 번이나 휘청거리며사이드보드 옆 전화의 수화기를 들었다.  - P39

그런 말과 함께 수화기를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다시 비틀비틀 돌아와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 의사야. 어쩌면 저렇게 치근덕거리는지 모르겠어. 이런끔찍한 짓을 했으면서 뭘 용서해달래 ? 술에 엄청 취했나 봐. 집에 가서 또 퍼마신 모양이지. 그야 술을 들이켜고 싶은 기분도 이해는 되지만." - P39

누군가는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고개를 저었다. 바보같이아직도 그 의사의 알리바이를 걱정하고 있다. 내 사체가 발견되는건 십오일 뒤라서 부검을 통해서는 정확히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 알아낼 수 없는데도 게다가 내가 이 사람에게 알려준 알리바이 조작 방법은 사망 추정 시각이 확실하지 않다는 조건 아래 비로소 성립하는 것인데도. - P40

조금 더 마시려다가 마음이 바뀐 척하며 술잔을 테이블에내려놓고 나는 말했다.
"어째 써늘하네. 침실에서 담요 한 장만 갖다줄래? 아, 아냐, 내가 갈게. 서랍 안쪽에 있어서."
비틀거리며 침실에 들어가 문을 살짝 닫았다. 2센티미터쯤틈을 남기고, 침실은 썰렁한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 P41

실용적인 목적뿐인 낙타색의 군데군데 얼룩진 담요가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의상이라는 것은 아무도 알지못했다. 이제 곧 나는 조금 더 어울리는 의상을 몸에 두르게 될것이다. 다시 한번 재떨이 이쪽편의 술잔에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연극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진지하게 유리잔 바닥으로 시선이 내달렸다.
흠집이 없었다.
술잔을 바꾼 것이다. - P42

 누군가는 이제 더이상 얼굴빛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줄곧 유지해온 평정심은 완전히 사라지고, 이제 더 이상 못 마신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홍, 내가 입을 댄 것은 못 마시겠다? 그래, 이제 그만 가봐. 나도 이것만 마시고 잘 거니까..."
내뱉듯이 말하고 술잔을 손에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비틀비틀 침실로 향했다.  - P43

일초, 술잔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침실 문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이 초.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를 들으며 복수라는 말을 떠올렸다. 삼초. 정적 속에서 나는 기다렸다. 사초, 오로지 기다리고또 기다렸다. 오초, 뱃속에 흘러든 모래가 돌연 뻘건 용암이 되어 목구멍으로 솟구쳤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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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묘사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가 생각나게 만든다.








마키 씨는 가는 도중에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지요 씨가 찾아온 건 나흘 전이에요."
그날 저물녘에 한 품위 있는 부인이 시조의 야나기 화랑에찾아왔다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이 ‘우미노 지요‘라고 밝히면서 교토 시립 미술관에서 <보름달의 마녀>를 보고 왔다고 했답니다. - P250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이야기가 나오면서야나기 씨가 도서실 이야기를 꺼내신 거예요. 지요 씨는 무척 흥미를 느끼신 것 같았어요. 잠깐 생각하더니 ‘지금 보러 가면안 될까요?‘라고 묻더군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놀랐지만,
시간이 별로 없다고 하시는 데다 야나기 씨도 허락해 주셔서저는 일찍 퇴근해 지요 씨를 작업실로 안내해 드리기로 했어요.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고 말이죠." - P251

작업실로 가는 택시 안에서 지요 씨는 "『열대』라는 소설을아나요?" 하고 마키 씨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사야마 쇼이치라는 사람이 쓴 소설인데요. 할아버님께 들은적 없나요?" - P251

그 말에 마키 씨는 놀랐습니다. <보름달의 마녀>는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작품이었습니다. 당시의 자료는 남아 있지 않았거니와, 그림의 제재와 도서실의 책을 통해 『천일야화』에서 촉발됐을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 P252

"그래요, 거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지요 씨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 합니다.
『열대』는 『천일야화』의 이본이니까." - P252

. 작업 테이블과 이젤이 드문드문 놓여 있을 뿐 다른 가구는 없었고, 벽 가까이 상자와 액자가 쌓여 있었습니다. 화백이 작업했던 당시의 모습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마니시 씨와제가 전기난로를 쬐는 동안 마키 씨는 벽 앞의 상자에서 손전등을 꺼냈습니다.
"가실까요, 할아버지 도서실은 이 뒤에 있어요."
작업실 뒤는 어둠에 잠겨 있었습니다. - P253

마키 씨가 불을 켜자 천장의 전등에 불이 들어왔습니다.
외관과는 달리 아주 편안해 보이는 방이었습니다. 바닥에는페르시아 양탄자를 깔았고 일인용 갈색 소파와 원형 사이드 테이블이 놓여 있고 창가에는 책꽂이와 고풍스러운 레코드플레이어가 있었습니다. 쥘 베른의 『해저 2만리』에 등장하는 잠수함 노틸러스호의 도서실이 생각났습니다. - P254

"이 도서실에 있는 책은 아버지 서재에 있었던 거예요. 아마 마키 선생님이 인수하셨겠죠."
나가세 에이조 씨의 장서.
당연히 마키 씨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계속 마음에 걸렸거든요. 내가 외국에 가 있는 동안 아버지가 장서를 처분하고는 경위를 이야기하지 않은 채로 돌아가셨으니까요…………. 설마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너무 반가워요." - P255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연 순간, 바닷바람 같은 냄새가 나더군요. 왠지 모르게 오싹해서 서둘러 스위치를 켰더니불은 아무 문제 없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지요 씨가 없었어요."
이마니시 씨가 의심스레 중얼거렸습니다.
"잠겨 있던 방에서 사라졌다는 말씀입니까?"
"물론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저도 여우에 홀린기분이었어요. 여기저기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없었으니까요." - P256

"이 도서실엔 마물이 살고 있다."
제가 중얼거리자 이마니시 씨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습니다.
"마물이 지요 씨를 잡아먹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저희는 마물의 정체를 모르니까요."
마키 씨는 소파에 앉아 팔걸이에 턱을 괴었습니다. - P257

우리는 분담해서 도서실 구석구석을 살펴봤습니다. 테이블과 소파를 이동하고 양탄자를 들추고 책꽂이의 책을 빼봤습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비밀의 문 같은 건 없었습니다. 창문에는쇠창살이 있으니 그쪽으로 나가는 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 P257

"......도서실의 문이 닫힌다."
"네?"
"저를 잠깐 여기 혼자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카드에 쓰인 대로 도서실 문을 닫고 지요 씨와 같은 상황을 만들어 보자고 생각한 겁니다. - P258

"마물이 나타나 저를 잡아먹을까 봐 그러십니까?"
제가 농담조로 말하자 이마니시 씨는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런 일은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 P258

조만간 마키 씨도 어딘가에서 『열대』를 만나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건 이마니시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대』의 책장을 넘긴 그들 앞에 어떤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지 그건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그들만의 『열대』인 겁니다.
"당신의 『열대』는 당신만의 것입니다."
저는 마키 씨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도서실 문을 닫았습니다. - P259

쓰여 있던 내용을 다시 한번 읽어봤습니다. 그곳에는 제가 교토에서 경험한 일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마지막 카드의 마지막 줄은 ‘대단원‘. 그게 끝입니다.
대단원은 연극이나 영화, 소설 등의 결말을 의미하고, 특히
‘모든 게 잘 마무리 된다‘라는 해피엔드를 가리킵니다. - P260

『열대』는 『천일야화』의 이본이니까.
지요 씨는 마키 씨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때 소박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천일야화』는 어떻게 끝이 날까. - P260

마치 천일야화』 안에 또 하나의 『천일야화』가 존재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 안의 『천일야화』 안에도 또 하나의 『천일야화』가 존재하고, 또 그 안에도....... 그런 망상이 머릿속에 떠올라 바닥을 알 수 없는 구멍을 들여다본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그때 문득 전등이 깜박였습니다.
저는 숨죽이고 긴장했습니다. - P263

램프 불빛이 흡사 스포트라이트처럼 테이블 위에 있는 노트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지난 이틀 동안 늘 저와 함께 있었던 노트. 거기에는 『열대』와 관련된 온갖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P264

그 순간 저는 제가 무인도 모래사장에 서서 광대한 바다를 앞에 둔 듯한 착각을 맛봤습니다.
"눈을 감아요. 마음속으로 그려봐요."
지요 씨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곳에 펼쳐진 것은 상상의 세계, 『열대』의 세계였습니다. - P264

저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펜을 들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너와 관계없는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
그리하지 않으면 너는 원치 않는 것을 듣게 되리라.

그때 거대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습니다. - P265

제 4장, 눈에 보이지 않는 군도

너와 관계없는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
그리하지 않으면 너는 원치 않는 것을 듣게 되리라.

내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 주위는 어둠에 싸여 있고 파도가밀려왔다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상황을 파악할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 P269

나는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며 일어나서 뺨에 묻은 모래를 털어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여기는 어디지?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실마리를 찾아 입고 있던 옷가지를 살펴봤지만, 입은 것이라곤 가죽점퍼와 셔츠, 바지뿐 주머니에는 지갑조차 없었다.  - P261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멍하니 있는데 앞바다에 기이한것이 나타났다.
소리도 없이 미끄러져 가는 작은 2량 열차였다. 모래사장에서 기껏해야 이백 미터쯤 떨어져 있어 동틀녘의 바다 위에 비치는 차창 불빛이 선명하게 보였다. 왠지 모르게 향수가 느껴지는 정경이었다.  - P271

나는 바다를 왼쪽에 두고 홀로 모래사장을 걸었다.
열차는 대체 뭐였을까. 그 정도로 똑똑히 보였는데 환영일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열차가 보이지 않자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혹시 꿈을 꾸고 있나? - P272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인가.
보이는 곳이라곤 굽이지며 뻗어가는 하얀 모래사장뿐이었다. 왼편은 수평선까지 아무것도 없는 광대한 바다, 오른편은정체를 알 수 없는 열대의 숲이었다.
아무리 모래사장에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해안을 벗어나 숲속에 발을 들여놓을 용기는 없었다. - P272

 나는 안으로 들어가 봤다.
바다를 내다보는 유리창 앞의 작은 나무 책상에 낡은 수첩과공구, 쌍안경이 놓여 있었다.
나는 땀을 닦으며 지저분한 창문으로 밖을 내다봤다.
녹색을 띤 파란 바다와 길게 뻗은 잔교가 보였다. 배가 한 척도 없다는 게 묘하게 느껴졌다. - P273

나는 쌍안경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잔교 끝까지 걸어가 앞바다를 봤다.
작은 섬이 있었다.
그런데 그 섬이 매우 기묘했다.
파도에 삼켜질 것처럼 얄팍해서는 모래사장이 거의 대부분인데 야자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묘한것은 야자나무 그늘에 빨간 콜라 자동판매기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 P274

나는 잔교에 주저앉아 바다를 향해 다리를 늘어뜨렸다. 맑은 바닷물 속에서 바닷말이 흔들리고 물고기가 헤엄쳤다.
"이거야 원. 이제 살았군."
나는 안도하며 남자를 기다렸다.
그게 ‘학파의 남자‘ 사야마 쇼이치와의 첫만남이었다. - P274

그는 잔교에 보트를 매며 물었다.
"댁은 어디서 온 거지?"
"그건......."
(중략)
"말할 수 없나?"
"저도 모르거든요." - P273

"기억나는 게 아무것도 없나?"
"정신이 들었더니 저기 모래사장에 쓰러져 있었는데요." 나는 바위땅 쪽을 가리켰다. "그보다 더 전 일은 아무것도 생각이안 납니다."
"어젯밤에 폭풍이 불었지."
"난파된 걸까요." - P276

"여기는 섬입니까?"
"아, 그것도 모르는군. 여기는 섬이야. 자세한 설명은 ‘관측소‘로 돌아가서 해주기로 하고…………. 그나저나 난 사야마 쇼이치라고 해. 도와주는 대신 댁은 내 조수가 되어 줘야겠어."
"・・・・・・ 조수라고요?" - P276

"네모 군, 설마 마왕의 자객은 아니겠지?"
바닷바람이 그의 뻣뻣한 곱슬머리를 날렸다.
"......마왕? 자객?"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자 사야마는 긴장이 풀린 것처럼 웃었다.
"아니겠지. 자객치곤 너무 얼이 빠졌으니까." - P277

"언제부터 이 섬에 있었죠?"
내가 묻자 사야마는 풀줄기를 씹으며 이야기했다.
"그게 언제였더라. 이젠 모르겠군. 이런 섬에서 혼자 살다 보면 모든 게 모호해지거든. 이 부근은 우기도 없고, 애초에 계절의 변화란 게 거의 없어. 하루하루가 판에 박힌 것처럼 지나가 정말로 오늘 다음엔 ‘내일‘이 오나 혹시 오늘 다음에 ‘어제‘가오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고." - P278

후미에서 산꼭대기의 관측소까지 30분 정도 걸렸다.
"어이구, 겨우 다 왔네."
사야마는 기쁜 듯이 말했다.
숲을 베어 인공적으로 만든 듯한 초지 안쪽에 사야마 쇼이치가 말하는 관측소가 있었다. 꽤 그럴싸한 건물이었다.  - P279

건물 입구에는 좌우로 열리는 커다란 자동문이 있고, 문 위에 박힌 금속 플레이트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너와 관계없는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
그리하지 않으면 너는 원치 않는 것을 듣게 되리라.

"어째 수수께끼 같은 말이군요."
"의미심장하지. 이 관측소가 처음 생겼을 때부터 저기 있었던 거야." - P279

 오래된 탐정 사무소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법한 게 있는가 하면미래의 우주 정거장에 있을 법한 것도 있었다. 전부 제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놓여 있었다.
"왜 의자가 이렇게 많죠?"
"사람에게는 저마다 앉아야 할 의자가 있으니까."
사야마는 로비를 가로질러 계단을 올라갔다. - P280

 아까 사야마를 만난 후미와 잔교가 보였다. 앞바다에는 자동판매기가 있는 작은 섬이떠 있었다. 그 밖에 보이는 것이라곤 울창한 밀림과 섬 하나 없는 바다 그리고 파란 하늘뿐이었다.
작은 섬이지? 두 시간이면 해안을 따라서 한 바퀴 돌 수 있어, 해안선을 조사하는 것도 내 일이라서." - P281

"자기가 어디에 있는 건지 궁금하겠지. 정확한 위치를 알려줄 순 없지만 이 섬은 대략 북위 28도에 위치하고 있어. 적도바로 밑은 아니지만 해류의 영향도 있어서 기후 면에서는 열대라 해도 될 테지. 1년 내내 기온이 섭씨 15도 밑으로 내려가는일은 없어. 아까도 말했다시피 우기다운 우기는 없지만 가끔씩맹렬한 스콜이나 폭풍이 올 때가 있어. 어젯밤 폭풍은 꼭 세계의 종말 같았지. 아주 무시무시했어." 
나는 폭풍을 만난 배를 상상해 봤다. - P282

"자네는 얼마 동안 여기 관측소에서 살게 될 거야. 죄수가 아니니까 일이 없을 땐 마음대로 지내도 돼. 관측소 안을 자유롭게 다녀도 되고. 하지만 밤에는 밖으로 나가지 말아줘. 위험하니까."
"맹수라도 나옵니까?"
"그런 거지."
"주의하죠." - P284

"본 적 있는 여자야?"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실제로 기억에 없었다.
"그런 것치곤 꽤나 열심히 쳐다보던데. 반했군?"
"설마요."
"감출 것 없어. 자네 기분은 잘 아니까."
나는 사진을 돌려주려고 했지만 사야마는 "그냥 갖고 있어"라고 했다. - P285

창가에 작은 책상과 전기스탠드가 있었다.
스탠드를 켜자 어두운 창에 내 얼굴이 비쳤다.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지저분한 셔츠를 입고 수염이 꺼칠하게 자랐다. 이게 정말 나일까. 낯선 타인으로만 보이는데.
너는 대체 누구지?
나는 오랫동안 그 모습을 응시했다.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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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제정된 정신보건법은 실제 정신장애인감금법으로 작동하였다. 이 법은 인권적 절차가 미비한 채 강압적 치료를 합법화함으로써 급격한 정신병상 증가와 감금된 정신장애인의 양산을 가져다주었다. - P3

1995년 정신보건법 제정으로 시작된 대규모 감금은 상당히 견고하게 구조화되어 있어 강제입원제도의 개선만으로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감금의 해소를 위해서는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 P3

실제 정신장애인의 감금을 유인하는 체계는 20~3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강제입원제도 자체뿐만 아니라 관련 제도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어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정신의료기관 감금으로 다른 가족들이 부당한 이익을 가질 수 있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 P4

 실제 장기간 입원생활을 하고 있는 정신장애인이 개정된 법률을 인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사 인지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권익을 구체적으로 옹호할 방법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것이다. - P4

강제입원 요건의 강화는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이 지역사회에 머물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지만 지역사회서비스나 돌봄이 부재한 상태에서는 단지 입원시간 연장에 불과할 수 있으며, 장기 입원자가 퇴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 삶의 조건을 형성하는 복지서비스를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확충하는가 하는 문제가 감금없는 정신보건의 실현에 핵심이 될 수 있다. - P5

 구체적으로 제1장에서는 강압적 치료방식에 의한 몸의 감금문제를 철학적 담론을 통해 검토하고 우리나라의 정신장애인 감금구조 형성과정을 정리하였다. 제2장에서는 감금 없는 정신보건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정책패러다임을 모색하기 위하여 ‘질병‘이면서동시에 ‘장애‘라는 정신장애의 인식론적 문제를 검토하고 인식론적 차이가 가져오는 정책적 접근의 문제를 살펴보았다. - P5

 제4장에서는 정신장애인 감금의 시발점이 되는 정신의료기관 입원제도의 문제점을 인권적 관점에서 검토하였다. 제5장에서는 입원과 관련된 정신장애인의 자기결정권 문제를 검토하고 강제입원자의 권리옹호를 위한 의사결정지원의 발전방안을 모색하였다.  - P6

제8장에서는 정신장애인의 지역사회생활의 권리 실현을 위한 법제와 프로그램의 개혁방안을 권익옹호와 장애인복지법 제15조 폐지 이후 대체입법의 필요성을 중심으로 제안하였다 - P6

아무쪼록 본서가 인권과 당사자의 자유의사를 중심으로 하는 ‘감금 없는 정신보건‘의 이념이나 실천방법을 구상하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서문에 갈음하고자 한다.

위기에 처한 당사자가 병원에 갈 마음이 없다면 병원이 아닌 위기지원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2021. 2. 3.
저자 대표 이용표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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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았는데 무뚝뚝한 대학 건물 사이에는 어스름이 숨어 들어와 있었습니다. 주위는 한층어두워져 흐린 하늘 아래 솟은 시계탑 주위에서 눈송이가 춤추고 있었습니다. 정문 밖으로 길을 따라 노점이 늘어섰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요시다 신사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 P232

"평소와 다른 점은 없었습니까?"
이마니시 씨는 "없었습니다"라며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잠깐 이야기한 다음 우리는 지요 씨의 집에서 나와 요시다산 서쪽으로 내려갔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와는 정반대 방향, 신사 뒤쪽에서 축제 속으로 들어간 셈이죠. 숲의 어스름에서 노점의 불빛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날도 눈이 왔습니다." - P232

이마니시 씨는 멈춰 서서 도리이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산 위의 다이겐궁에서 참배를 드리고 본당으로 내려올 때까지는 같이 있었단 말이죠. 그런데 저 도리이를 향해 이 참배길을 걷다 말고 사야마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도리이 밑에서 기다려 보기로 했습니다. 서로를 잃어버리는 일이 있으면 거기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니까요......" - P234

본궁으로 이어지는 비탈길을 올라가며 이마니시 씨는 말했습니다.
"지요 씨는 나를 의심하는 것 같더군요. 사야마가 모습을 감춘 이유를 숨기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죠. 지금 생각하면 아마사야마에게 배신당한 기분이었을 테죠. 화낼 상대가 없으니까나를 탓한 겁니다. 하지만 나도 나대로 지요 씨가 숨기는 게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실제로 그런 말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 P233

"이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이마니시 씨가 하얀 입김을 불며 말했습니다. "도쿄로 돌아가야 하죠?"
아닌 게 아니라 제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열대』와 사야마 쇼이치를 둘러싼 수수께끼는 감당할 수없을 만큼 커지고 말았습니다. 『천일야화』와의 연관성, <보름달의 마녀>를 그린 화가, 에이조 씨의 카드 상자 그리고 사야마 쇼이치의 실종...…….
"지요 씨는 왜 저를 교토로 불렀을까요."  - P234

"헌책방이랍니다. ‘날뛰는 밤‘이라고 써서 ‘아라비야 책방‘
"이죠."
노점으로 다가가니 주인은 멍하니 저를 쳐다봤습니다. 저를알아본 듯 한바탕 웃었습니다. 이마니시 씨는 신기한 듯 책꽂이를 구경하면서 "헌책방 포장마차는 처음 보는군요"라며 중얼거렸습니다. - P236

저는 『천일야화』를 꺼내 주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거 읽는 중입니다."
"훌륭한데. 하지만 「대단원」까지 읽으려면 여간 일이 아닐걸. 어쨌거나 천 날 밤의 분량이니까."
"셰에라자드는 용케도 이야기를 계속한다 싶군요."
"좌우지간 위대한 사람이야." - P236

추적의 실마리.
저는 생각해 봤습니다.
지요 씨의 그림엽서, 호렌도에서의 기묘한 행동, ‘보름달의 마녀에게 간다‘라는 말. 그건 지요 씨가 남겨준 ‘추적의 실마리‘
인 겁니다. 지요 씨는 어디론가 저를 인도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미궁에 갇힌 채 끝나는 건지요 씨가 의도하는 바가 결코 아닐 테죠. 저는 뭔가 중요한 실마리를 빠뜨린 겁니다. - P237

전주인의 컬렉션이 놓인 선반.
먼지를 쓴 달마 인형들, 석상의 파편, 작은 조개껍데기, 작은 과즙 우유병.
그리고 낡은 카드 상자 - P237

"뭔가 중대한 단서를 놓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카드 상자안을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귀중한 이야기를 들려주셔서감사합니다."
저는 이마니시 씨에게 머리 숙여 정중히 인사했습니다. - P238

"만약 살아 있다면 사야마는 왜 연락을 주지 않는 걸까요."
이마니시 씨는 중얼거렸습니다. "이렇게 오래 우리가 기다리고있는데."
"사야마 씨가 남긴 건 『열대』뿐입니다."
"나도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게 그 친구 꿈의 결정일 테니까요."
이마니시 씨는 차를 마시며 이야기했습니다. - P239

"그런 이야기를 두고 사야마와 여러 번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 친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겠죠. 지금 생각하면 좀 더 순순히 귀 기울여 들어볼 걸 그랬다 싶습니다. 『열대』라는 작품이 그 친구 몽상의 결정이었다면 나 같은 사람에게 읽힌들 의미가 없다고 사야마는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좁은 소견 아닙니까." - P240

저는 선반에 놓인 카드 상자에 관해 물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유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개인적인 물건이라고만 생각했다는 겁니다.
"나가세 에이조 씨의 물건일지도 모릅니다." - P240

호렌도 주인이 걱정스레 소곤거렸습니다.
저는 카드를 계산대 위에 늘어 놓았습니다. 주인과 이마니시씨는 숨죽이고 제 동작을 지켜봤습니다. 저는 카드가 ‘올바른‘
순서로 나열될 때까지 묵묵히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 P241

경이의 방에서
봐야 할 것을 놓치고 지나가다
고물상 주인의 이야기 산다이바나시 마왕
남자를 두고 가다
작은 문을 지나 - P242

커피집에서
두고 간 남자와의 대화
수수께끼의 창조에 대해
방 안의 방 - P243

이치하라역에서
또다시 천일 밤의 여자
마지막 대화
도서실의 문이 닫힌다
대단원 - P244

이 카드는 언제부터 있었습니까?"
제가 묻자 호렌도 주인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옛날부터 여기 계속 있었던 거라………… 뭐가 쓰여 있었는지저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거든요."
저희는 나열된 카드를 보며 침묵했습니다.
"이 모든 게 예언됐다는 겁니까?" 이마니시 씨는 당혹한 듯중얼거렸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그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리 없어요." - P244

"거기 갈 겁니까?"
이마니시 씨의 물음에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지요 씨는 거기에 있을까요."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가야죠."
"그럼 나도 같이 가겠습니다. 괜찮겠죠?" - P246

이마니시 씨는 불안한 듯 차창을 응시하며 말했습니다.
"전부 당신이 꾸민 일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카드는 당신이 사전에 써서 호렌도 카드 상자에 넣어놓았을지도 모릅니다. 지요 씨의 실종도 뒤에서 당신이 조종한 일일지도 모르죠."
"의심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부정하지 않는 겁니까?" - P247

저를 교토로 부른 지요 씨일까요. 하지만 지요 씨도 사야마 쇼이치가 남긴 『열대』라는 소설을 뒤쫓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모두 사야마 쇼이치가 꾸민 일일까요. 하지만 호렌도 주인이나이마니시 씨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돌이켜보면 사야마 쇼이치의 배후에는 지요 씨 아버지, 에이조 씨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거든요. 에이조 씨의 배후에는 커다란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그걸 우리는 ‘보름달의 마녀‘라고 부르는지도 모릅니다. - P247

이윽고 열차가 정차해 우리는 내렸습니다.
눈이 얇게 쌓인 플랫폼이 허옇게 보였습니다. 마키 씨는 플랫폼 끝에 서서 우산을 들고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열차가 떠나고 나자 밤의 밑바닥 같은 정적이 주위를 감쌌습니다. 아주 멀리 여행 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마키 씨, 기억하실까요? 이케우치입니다. 어젯밤에 만났죠."
"물론 기억해요." - P248

"할아버지 도서실을 조사하러 오셨죠?"
"네."
"그럴 것 같았어요."
"우리가 올 줄 아셨습니까?"
이마니시 씨가 놀란 듯 물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조만간 찾아오시리라는 건 알고 있었답니다." - P249

"지요 씨가 작업실에 찾아왔군요?"
제가 묻자 마키 씨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도서실에서 사라진 거예요."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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