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 씨는 가는 도중에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지요 씨가 찾아온 건 나흘 전이에요." 그날 저물녘에 한 품위 있는 부인이 시조의 야나기 화랑에찾아왔다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이 ‘우미노 지요‘라고 밝히면서 교토 시립 미술관에서 <보름달의 마녀>를 보고 왔다고 했답니다. - P250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이야기가 나오면서야나기 씨가 도서실 이야기를 꺼내신 거예요. 지요 씨는 무척 흥미를 느끼신 것 같았어요. 잠깐 생각하더니 ‘지금 보러 가면안 될까요?‘라고 묻더군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놀랐지만, 시간이 별로 없다고 하시는 데다 야나기 씨도 허락해 주셔서저는 일찍 퇴근해 지요 씨를 작업실로 안내해 드리기로 했어요.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고 말이죠." - P251
작업실로 가는 택시 안에서 지요 씨는 "『열대』라는 소설을아나요?" 하고 마키 씨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사야마 쇼이치라는 사람이 쓴 소설인데요. 할아버님께 들은적 없나요?" - P251
그 말에 마키 씨는 놀랐습니다. <보름달의 마녀>는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작품이었습니다. 당시의 자료는 남아 있지 않았거니와, 그림의 제재와 도서실의 책을 통해 『천일야화』에서 촉발됐을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 P252
"그래요, 거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지요 씨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 합니다. 『열대』는 『천일야화』의 이본이니까." - P252
. 작업 테이블과 이젤이 드문드문 놓여 있을 뿐 다른 가구는 없었고, 벽 가까이 상자와 액자가 쌓여 있었습니다. 화백이 작업했던 당시의 모습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마니시 씨와제가 전기난로를 쬐는 동안 마키 씨는 벽 앞의 상자에서 손전등을 꺼냈습니다. "가실까요, 할아버지 도서실은 이 뒤에 있어요." 작업실 뒤는 어둠에 잠겨 있었습니다. - P253
마키 씨가 불을 켜자 천장의 전등에 불이 들어왔습니다. 외관과는 달리 아주 편안해 보이는 방이었습니다. 바닥에는페르시아 양탄자를 깔았고 일인용 갈색 소파와 원형 사이드 테이블이 놓여 있고 창가에는 책꽂이와 고풍스러운 레코드플레이어가 있었습니다. 쥘 베른의 『해저 2만리』에 등장하는 잠수함 노틸러스호의 도서실이 생각났습니다. - P254
"이 도서실에 있는 책은 아버지 서재에 있었던 거예요. 아마 마키 선생님이 인수하셨겠죠." 나가세 에이조 씨의 장서. 당연히 마키 씨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계속 마음에 걸렸거든요. 내가 외국에 가 있는 동안 아버지가 장서를 처분하고는 경위를 이야기하지 않은 채로 돌아가셨으니까요…………. 설마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너무 반가워요." - P255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연 순간, 바닷바람 같은 냄새가 나더군요. 왠지 모르게 오싹해서 서둘러 스위치를 켰더니불은 아무 문제 없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지요 씨가 없었어요." 이마니시 씨가 의심스레 중얼거렸습니다. "잠겨 있던 방에서 사라졌다는 말씀입니까?" "물론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저도 여우에 홀린기분이었어요. 여기저기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없었으니까요." - P256
"이 도서실엔 마물이 살고 있다." 제가 중얼거리자 이마니시 씨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습니다. "마물이 지요 씨를 잡아먹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저희는 마물의 정체를 모르니까요." 마키 씨는 소파에 앉아 팔걸이에 턱을 괴었습니다. - P257
우리는 분담해서 도서실 구석구석을 살펴봤습니다. 테이블과 소파를 이동하고 양탄자를 들추고 책꽂이의 책을 빼봤습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비밀의 문 같은 건 없었습니다. 창문에는쇠창살이 있으니 그쪽으로 나가는 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 P257
"......도서실의 문이 닫힌다." "네?" "저를 잠깐 여기 혼자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카드에 쓰인 대로 도서실 문을 닫고 지요 씨와 같은 상황을 만들어 보자고 생각한 겁니다. - P258
"마물이 나타나 저를 잡아먹을까 봐 그러십니까?" 제가 농담조로 말하자 이마니시 씨는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런 일은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 P258
조만간 마키 씨도 어딘가에서 『열대』를 만나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건 이마니시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대』의 책장을 넘긴 그들 앞에 어떤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지 그건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그들만의 『열대』인 겁니다. "당신의 『열대』는 당신만의 것입니다." 저는 마키 씨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도서실 문을 닫았습니다. - P259
쓰여 있던 내용을 다시 한번 읽어봤습니다. 그곳에는 제가 교토에서 경험한 일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마지막 카드의 마지막 줄은 ‘대단원‘. 그게 끝입니다. 대단원은 연극이나 영화, 소설 등의 결말을 의미하고, 특히 ‘모든 게 잘 마무리 된다‘라는 해피엔드를 가리킵니다. - P260
『열대』는 『천일야화』의 이본이니까. 지요 씨는 마키 씨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때 소박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천일야화』는 어떻게 끝이 날까. - P260
마치 천일야화』 안에 또 하나의 『천일야화』가 존재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 안의 『천일야화』 안에도 또 하나의 『천일야화』가 존재하고, 또 그 안에도....... 그런 망상이 머릿속에 떠올라 바닥을 알 수 없는 구멍을 들여다본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그때 문득 전등이 깜박였습니다. 저는 숨죽이고 긴장했습니다. - P263
램프 불빛이 흡사 스포트라이트처럼 테이블 위에 있는 노트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지난 이틀 동안 늘 저와 함께 있었던 노트. 거기에는 『열대』와 관련된 온갖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P264
그 순간 저는 제가 무인도 모래사장에 서서 광대한 바다를 앞에 둔 듯한 착각을 맛봤습니다. "눈을 감아요. 마음속으로 그려봐요." 지요 씨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곳에 펼쳐진 것은 상상의 세계, 『열대』의 세계였습니다. - P264
저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펜을 들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너와 관계없는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 그리하지 않으면 너는 원치 않는 것을 듣게 되리라.
그때 거대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습니다. - P265
제 4장, 눈에 보이지 않는 군도
너와 관계없는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 그리하지 않으면 너는 원치 않는 것을 듣게 되리라.
내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 주위는 어둠에 싸여 있고 파도가밀려왔다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상황을 파악할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 P269
나는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며 일어나서 뺨에 묻은 모래를 털어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여기는 어디지?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실마리를 찾아 입고 있던 옷가지를 살펴봤지만, 입은 것이라곤 가죽점퍼와 셔츠, 바지뿐 주머니에는 지갑조차 없었다. - P261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멍하니 있는데 앞바다에 기이한것이 나타났다. 소리도 없이 미끄러져 가는 작은 2량 열차였다. 모래사장에서 기껏해야 이백 미터쯤 떨어져 있어 동틀녘의 바다 위에 비치는 차창 불빛이 선명하게 보였다. 왠지 모르게 향수가 느껴지는 정경이었다. - P271
나는 바다를 왼쪽에 두고 홀로 모래사장을 걸었다. 열차는 대체 뭐였을까. 그 정도로 똑똑히 보였는데 환영일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열차가 보이지 않자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혹시 꿈을 꾸고 있나? - P272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인가. 보이는 곳이라곤 굽이지며 뻗어가는 하얀 모래사장뿐이었다. 왼편은 수평선까지 아무것도 없는 광대한 바다, 오른편은정체를 알 수 없는 열대의 숲이었다. 아무리 모래사장에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해안을 벗어나 숲속에 발을 들여놓을 용기는 없었다. - P272
나는 안으로 들어가 봤다. 바다를 내다보는 유리창 앞의 작은 나무 책상에 낡은 수첩과공구, 쌍안경이 놓여 있었다. 나는 땀을 닦으며 지저분한 창문으로 밖을 내다봤다. 녹색을 띤 파란 바다와 길게 뻗은 잔교가 보였다. 배가 한 척도 없다는 게 묘하게 느껴졌다. - P273
나는 쌍안경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잔교 끝까지 걸어가 앞바다를 봤다. 작은 섬이 있었다. 그런데 그 섬이 매우 기묘했다. 파도에 삼켜질 것처럼 얄팍해서는 모래사장이 거의 대부분인데 야자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묘한것은 야자나무 그늘에 빨간 콜라 자동판매기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 P274
나는 잔교에 주저앉아 바다를 향해 다리를 늘어뜨렸다. 맑은 바닷물 속에서 바닷말이 흔들리고 물고기가 헤엄쳤다. "이거야 원. 이제 살았군." 나는 안도하며 남자를 기다렸다. 그게 ‘학파의 남자‘ 사야마 쇼이치와의 첫만남이었다. - P274
그는 잔교에 보트를 매며 물었다. "댁은 어디서 온 거지?" "그건......." (중략) "말할 수 없나?" "저도 모르거든요." - P273
"기억나는 게 아무것도 없나?" "정신이 들었더니 저기 모래사장에 쓰러져 있었는데요." 나는 바위땅 쪽을 가리켰다. "그보다 더 전 일은 아무것도 생각이안 납니다." "어젯밤에 폭풍이 불었지." "난파된 걸까요." - P276
"여기는 섬입니까?" "아, 그것도 모르는군. 여기는 섬이야. 자세한 설명은 ‘관측소‘로 돌아가서 해주기로 하고…………. 그나저나 난 사야마 쇼이치라고 해. 도와주는 대신 댁은 내 조수가 되어 줘야겠어." "・・・・・・ 조수라고요?" - P276
"네모 군, 설마 마왕의 자객은 아니겠지?" 바닷바람이 그의 뻣뻣한 곱슬머리를 날렸다. "......마왕? 자객?"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자 사야마는 긴장이 풀린 것처럼 웃었다. "아니겠지. 자객치곤 너무 얼이 빠졌으니까." - P277
"언제부터 이 섬에 있었죠?" 내가 묻자 사야마는 풀줄기를 씹으며 이야기했다. "그게 언제였더라. 이젠 모르겠군. 이런 섬에서 혼자 살다 보면 모든 게 모호해지거든. 이 부근은 우기도 없고, 애초에 계절의 변화란 게 거의 없어. 하루하루가 판에 박힌 것처럼 지나가 정말로 오늘 다음엔 ‘내일‘이 오나 혹시 오늘 다음에 ‘어제‘가오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고." - P278
후미에서 산꼭대기의 관측소까지 30분 정도 걸렸다. "어이구, 겨우 다 왔네." 사야마는 기쁜 듯이 말했다. 숲을 베어 인공적으로 만든 듯한 초지 안쪽에 사야마 쇼이치가 말하는 관측소가 있었다. 꽤 그럴싸한 건물이었다. - P279
건물 입구에는 좌우로 열리는 커다란 자동문이 있고, 문 위에 박힌 금속 플레이트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너와 관계없는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 그리하지 않으면 너는 원치 않는 것을 듣게 되리라.
"어째 수수께끼 같은 말이군요." "의미심장하지. 이 관측소가 처음 생겼을 때부터 저기 있었던 거야." - P279
오래된 탐정 사무소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법한 게 있는가 하면미래의 우주 정거장에 있을 법한 것도 있었다. 전부 제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놓여 있었다. "왜 의자가 이렇게 많죠?" "사람에게는 저마다 앉아야 할 의자가 있으니까." 사야마는 로비를 가로질러 계단을 올라갔다. - P280
아까 사야마를 만난 후미와 잔교가 보였다. 앞바다에는 자동판매기가 있는 작은 섬이떠 있었다. 그 밖에 보이는 것이라곤 울창한 밀림과 섬 하나 없는 바다 그리고 파란 하늘뿐이었다. 작은 섬이지? 두 시간이면 해안을 따라서 한 바퀴 돌 수 있어, 해안선을 조사하는 것도 내 일이라서." - P281
"자기가 어디에 있는 건지 궁금하겠지. 정확한 위치를 알려줄 순 없지만 이 섬은 대략 북위 28도에 위치하고 있어. 적도바로 밑은 아니지만 해류의 영향도 있어서 기후 면에서는 열대라 해도 될 테지. 1년 내내 기온이 섭씨 15도 밑으로 내려가는일은 없어. 아까도 말했다시피 우기다운 우기는 없지만 가끔씩맹렬한 스콜이나 폭풍이 올 때가 있어. 어젯밤 폭풍은 꼭 세계의 종말 같았지. 아주 무시무시했어." 나는 폭풍을 만난 배를 상상해 봤다. - P282
"자네는 얼마 동안 여기 관측소에서 살게 될 거야. 죄수가 아니니까 일이 없을 땐 마음대로 지내도 돼. 관측소 안을 자유롭게 다녀도 되고. 하지만 밤에는 밖으로 나가지 말아줘. 위험하니까." "맹수라도 나옵니까?" "그런 거지." "주의하죠." - P284
"본 적 있는 여자야?"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실제로 기억에 없었다. "그런 것치곤 꽤나 열심히 쳐다보던데. 반했군?" "설마요." "감출 것 없어. 자네 기분은 잘 아니까." 나는 사진을 돌려주려고 했지만 사야마는 "그냥 갖고 있어"라고 했다. - P285
창가에 작은 책상과 전기스탠드가 있었다. 스탠드를 켜자 어두운 창에 내 얼굴이 비쳤다.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지저분한 셔츠를 입고 수염이 꺼칠하게 자랐다. 이게 정말 나일까. 낯선 타인으로만 보이는데. 너는 대체 누구지? 나는 오랫동안 그 모습을 응시했다.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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