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내게 사인을 해달라고 들이대던 팬들과 이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건 이 사람 또한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사람만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아니다.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하는 인간은 내 주위에 이 사람을 포함해 일곱 명이나 된다. 남자 넷 여자 셋. 실제로 조금 전까지 이 집에 있었던 자도 나를 죽이려다가 실패했다. - P16

오늘 밤 나를 죽일 인간으로 그 일곱 명 중 누구를 선택하든 상관없었다. 내가 이 사람을 최종적인 살인자로 선택한 건 그저 잠깐의 변덕 같은 것이다. - P16

몸을 돌렸지만, 누군가는 내가 쳐다보는 것도 알지 못한 채죽은 물고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윽고 내 눈길을 깨달은 모양이지만 그 후에도 얼굴 대신 스웨터에 눈길이 가 있었다.
물고기와 꼭 닮은 파란색과 흰색의 굵은 줄무늬 스웨터였기 때문이다. 이것도 나의 소소한 계산이다. - P17

머릿속 한 귀퉁이에서는여태껏 자신을 괴롭혀온 여자가 죽는 모습을 상상하고 내게 들키지 않게 은밀한 미소를 지었을 게 틀림없다. 그리고 죄 없는 물고기가 아니라 이 여자가 죽었어야 한다고 아쉬워했을 것이다. - P18

"청산가리는 일반인이라면 쉽게 구할 수 없지만 의사라면다르잖아. 그래도 설마 살해하려고 할 만큼 나를 미워했다니, 전혀 생각도 못 했지 뭐야." - P18

"이미 결론이 났는데도 오늘 저녁에 또 불쑥 찾아온 거야.
얼굴이 음울한 게 뭔가 이상하다 싶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
손톱 끝으로 빈 약봉지를 집어 전등 불에 비췄다. 내 시선은 밀랍 종이를 통해 붉은 어둠과 그 가장자리에 걸린 누군가의왼쪽 눈을 찬찬히 관찰했다.
"어머, 지문이 찍혀 있네? 경찰에 신고해버릴까. 미수에 그쳤어도 살인 사건이 날 뻔했잖아. 이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체포될걸." - P19

"이 술잔을 요만큼만 당겨서 내 입에 넣었다면 나는 벌써죽었겠지? 너무 끔찍해."
생각난 대로 내뱉은 그 두 가지 말에 누군가는 아무 반응도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만 태연한 척하는 것이다. 무표정한 눈의 뒤쪽에서는 분명 변화가 일어났다. - P20

재빨리 그다음 덫을 치기 위해 일부러 진한 한숨을 내쉬
"아무튼 바보 같은 사람이라니까. 의사인 데다 나이가 마흔다섯 살이나 됐으면 조금 더 머리를 썼어야지. 이건 뭐, 길에서충동적으로 생판 타인을 죽이는 열대여섯 살 어린애나 똑같지 뭐야." - P20

"아니, 여기 집 안 곳곳에 그 사람의 지문이 남아 있잖아.
문짝만이 아니야. 이 테이블에도, 유리잔에도, 브랜디 술병에도,
그리고 저쪽 테이블과 재떨이에도 찍혀 있을걸."
나는 조금 떨어진 백목 테이블에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 P21

"알리바이?" 나는 깔깔깔 웃었다. "당신, 그거 몰랐어? 내가내일부터 십오일 일정으로 파리에 가잖아. 이 집에 자유롭게 드나드는 건 가사도우미뿐인데 그 여자는 이달 말에나 올 거야. 십오일 동안 내가 보이지 않아도 설마 살해되었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는 얘기야. 사체는 11월 30일에나 발견되겠지. 그러면 경찰에서도 내가 며칠 몇 시에 살해되었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게돼. 사망 추정 일시가 확실하지 않은 범죄인데 알리바이를 준비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는 거 아닌가? 그 사람도 내가 십오일 동안 여행을 떠난다는 거, 다 알고 있어." - P22

"게다가 그 사람, 오늘이 며칠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어. 나한테 배신당한 충격으로 신경증에 걸린 듯한 기미였거든. 이번 달부터 병원도 쉬고 하루 종일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대."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알리바이라면, 아마 그걸 써먹을 거야."

"맞아, 나를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안성맞춤의 알리바이가 될 만한 게 있어. 간단하지만 틀림없이 잘 먹힐 거야. 하긴그러려면 오늘 밤 안에 내가 살해되어야 해... 어때, 알려줄까?"
(중략)
"싫어, 그걸 알려주면 당신이 정말로 나를 죽일 수도 있잖아. 그 의사만이 아니라 당신도 나를 죽이고 싶어 했지?"
"죽이다니, 말도 안 돼…."
누군가는 다급하게 취소하려고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 P23

"좋아, 그렇다면 알려줄게. 너무 웃기는 방법이거든."
나는 술을 꿀꺽 마시고 취해서 입이 가벼워진 척하며 빠른 말투로 주워섬겼다. 이미 완전히 외워버린 얘기를 연기가 서툰 배우가 입 끝으로만 대사를 읽듯이 줄줄 쏟아내며 나는 오로지 벽시계 소리만 듣고 있었다. - P24

죽음이 초침 소리와 함께 드디어 내게 찾아오려 하고 있었다.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일곱 명 중 누구여도 상관없는 한 명, 그 사람에게 의기양양하게 알리바이 조작 방법을 알려주면서, 지난 오년 사이의 또 하루, 저주스러운 기념일이 생각났다. 어느 날, 쇼가 끝나고 무대 뒤편으로 팬이라면서 한 여자가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단둘이 남았을 때, 웃는 얼굴 그대로 내게말했다.
"너, 성형수술 했지?" - P25

나는 실제로도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아직 나를 죽일 생각은 없겠지. 나한테 그만큼 앙갚음을 당하면서도 당신은 소심해서 그런 짓을 시도할 용기도 없거든. 근데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들으면 달라질걸? 아마 진짜로 죽이고 싶어질 거야."
그리고 다시 변덕이 도진 척하며 문득 웃음을 지워버렸다. - P28

봉투에서 일곱 장의 종이를 꺼내 툭 던져주자 누군가는가로채듯이 집어 들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갈 때마다 눈빛은 경악과 공포의 빛이 진해져 갔다. 덥지도 않은데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 이마에 배어난 진땀을 나는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았다. 이 미소는 다른 어떤 표정보다도 나를 뼛속까지악에 물든 잔인한 여자로 보이게 할 것이다. - P29

봉투에는 매주 160만부의 판매 부수를 자랑하는 주간지의 편집부 주소와 ‘오자와 유지‘라는 기자 이름이 적혀 있다. 신랄한 글솜씨와 스캔들을 낱낱이 파헤치는 기사로 그쪽 업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물이다. 그자의 이름을 물론 이 사람도 알고 있다. - P30

있어?"
"협박이라고? 내가 단 한 번이라도 돈 같은 걸 요구한 적이
"대체 왜...."
왜 이런 지독한 짓을 하는가, 왜 이렇게 나를 증오하는 것인가….
누군가는 지겹지도 않은지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영원히 답을 찾을 수 없는 수수께끼에 오로지 주문呪文처럼 ‘왜‘라는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듯이. - P31

이자는 그리 쉽게 자살할 사람이 아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망설임 없이 타인의 목숨까지 희생시킬 인간이다. 나는 이 사람의 그런 쩨쩨한 이기주의에 내기를 걸었다.
"어떻게 하면 되겠니...."
누군가의 입에서 신음처럼 말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 하면 봐줄 거야? 그 편지만 보내지 않으면 뭐든 다 할게."
돈이 필요하다면 전 재산을 내줄 거고, 뭐든 원하는 대로해줄게... - P33

몇 초의 침묵 끝에 나는 먹이를 던져주었다.
"오늘 밤 안으로 나를 죽이면 돼."
물론 깔깔 웃으며 곧바로 그 말을 취소했다. - P34

이 밤의 정적 속에 언제까지고 길게 꼬리를 끌었다. 이윽고 누군가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나는 사람을 죽이지는 못해. 모든 걸 뻔히 꿰뚫어 보고 있구나."
체념한 듯한 서글픈 눈빛을 슬쩍 내게로 흘렸다. 힘없는 목소리는 내 동정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 P36

"맞아, 포기하는 게 좋아. 당신도 드디어 모든 걸 내려놓기로 결심한 모양이네. 이제 나하고 똑같아졌어. 건배라도 할까?"
누군가가 손에 든 잔에 내 잔을 쟁그랑 맞부딪쳤다. - P36

얼음을 넣자 잔의 술이 부쩍 늘어났다. 마치 유리잔에 눈금이라도 그려진 것처럼 세 번째 잔의 독약 섞인 술의 높이와 똑같았다. 이 사람은 마침내 결심하고 독약이 든 잔과 내 잔을 바꿔치기할 작정인 것이다.
마지막 장난기가 발동해서 나는 한 마디 덧붙였다.
"아니, 가득 따라줘야지." - P37

깍지를 끼고 얌전히 무릎 위에 놓인 누군가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며 지금 내가 몇 마디 던지면 이 사람이 어떤 얼굴을 할지 상상해보았다.
"당신, 나를 죽이려고 하지? 근데 실은 살해당하려고 전부내가 꾸민 거야."
또다시 어설픈 농담을 한다면서 못마땅한 얼굴을 할까. 나는 또한 그 손에 내 손을 얹는 장면을 상상했다. 우리의 관계는 공범과 비슷해서 서로 손도 맞잡곤 했으니까. 하지만 우욱 구토감이 몰려와 목을 비볐다. - P38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대체 누구야, 이런 시간에?"
나는 짜증을 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몇 번이나 휘청거리며사이드보드 옆 전화의 수화기를 들었다.  - P39

그런 말과 함께 수화기를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다시 비틀비틀 돌아와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 의사야. 어쩌면 저렇게 치근덕거리는지 모르겠어. 이런끔찍한 짓을 했으면서 뭘 용서해달래 ? 술에 엄청 취했나 봐. 집에 가서 또 퍼마신 모양이지. 그야 술을 들이켜고 싶은 기분도 이해는 되지만." - P39

누군가는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고개를 저었다. 바보같이아직도 그 의사의 알리바이를 걱정하고 있다. 내 사체가 발견되는건 십오일 뒤라서 부검을 통해서는 정확히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 알아낼 수 없는데도 게다가 내가 이 사람에게 알려준 알리바이 조작 방법은 사망 추정 시각이 확실하지 않다는 조건 아래 비로소 성립하는 것인데도. - P40

조금 더 마시려다가 마음이 바뀐 척하며 술잔을 테이블에내려놓고 나는 말했다.
"어째 써늘하네. 침실에서 담요 한 장만 갖다줄래? 아, 아냐, 내가 갈게. 서랍 안쪽에 있어서."
비틀거리며 침실에 들어가 문을 살짝 닫았다. 2센티미터쯤틈을 남기고, 침실은 썰렁한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 P41

실용적인 목적뿐인 낙타색의 군데군데 얼룩진 담요가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의상이라는 것은 아무도 알지못했다. 이제 곧 나는 조금 더 어울리는 의상을 몸에 두르게 될것이다. 다시 한번 재떨이 이쪽편의 술잔에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연극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진지하게 유리잔 바닥으로 시선이 내달렸다.
흠집이 없었다.
술잔을 바꾼 것이다. - P42

 누군가는 이제 더이상 얼굴빛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줄곧 유지해온 평정심은 완전히 사라지고, 이제 더 이상 못 마신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홍, 내가 입을 댄 것은 못 마시겠다? 그래, 이제 그만 가봐. 나도 이것만 마시고 잘 거니까..."
내뱉듯이 말하고 술잔을 손에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비틀비틀 침실로 향했다.  - P43

일초, 술잔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침실 문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이 초.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를 들으며 복수라는 말을 떠올렸다. 삼초. 정적 속에서 나는 기다렸다. 사초, 오로지 기다리고또 기다렸다. 오초, 뱃속에 흘러든 모래가 돌연 뻘건 용암이 되어 목구멍으로 솟구쳤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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