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너에게는 모세5경보다 신약성경이 더온화하고 밝고 마음에 와 닿았다. 신약성경은 언어가 오래되지않아 깊고 풍부한 맛은 덜했지만, 젊고 열정적이며 이상을 꿈꾸는 정신으로 가득했다. 또한 《오디세이아》가 있었다. 그 시구들은 아름답고 격정적인 울림으로 강하고 균형 있게 흘렀다. 시구 속에서 물의 요정의 하얗고 둥글둥글한 팔이 지금은 사라진 견고하고 행복했던 인생들의 소식과 생각을 건져 올려주었다. - P99
원래 한스에게 저녁은 공부에 매진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저녁이면 곧잘 공부에 질린 하일너가 찾아와 책을 빼앗고 함께하기를 원했다. 한스는 친구를 좋아했지만 나중에는 하일너가 저녁마다 찾아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어느 것도놓치지 않기 위해 의무적인 학습 시간에 두 배 더 집중하고 더많이 공부했다. - P100
친구에게는 간혹 착한 한스가 단지 편안한 장난감, 이를테면애완 고양이처럼 여겨졌다. 한스 자신도 그렇게 느낄 때가 있었다. 하지만 하일너는 한스를 진심으로 필요로 했고 그래서 한스에게 매달렸다. 하일너에게는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주며 자신을 칭찬해주는 사람, 믿음직한 친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 P101
한스는 하일너의 이런 병적인 우울함은 단지 과도하고 비이성적인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지, 자신이 신뢰하고 진정 감탄하는 친구의 실제 본성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일너가 자작시를 낭송하거나 시의 이상에 대해 말하거나 실러와 셰익스피어의 독백을 과장된 몸짓과 함께 열정적으로 재현할 때면, 한스는 마치 친구가 자신에게는 없는 마법의 능력으로 허공에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 P103
하일너는 교장의 서재 문 앞까지 와서 간신히 루치우스를 따라잡았다. 루치우스는 이미 노크를 하고 문을 열던 마지막 순간에 예고받은 대로 한 방 걷어채었다. 그리고미처 문을 닫을 새도 없이 권력자의 가장 신성한 공간으로 폭탄처럼 튕겨 들어갔다.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 다음 날 아침 교장은 젊은이의 탈선에 관한 설교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루치우스는 교장의 말뜻을 음미하며 박수갈채를 보냈고, 하일너는독방에 갇히는 무거운 벌을 받게 되었다. - P105
하일너는 창백한 얼굴로 서서 반항의 눈빛으로 교장을 똑바로 쏘아보고 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속으로 그를 대단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연설이 끝나고 복도로 우르르 나갈 때는 무슨 나병 환자라도 되는 양 하일너를 피하고 홀로 내버려 두었다. - P105
한스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결국 친구로서의 의무와 학생으로서의 의무가 벌이는 싸움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한스의 목표는 성공하는 것, 높은 시험 점수를 받는 것, 뛰어난 성과를 올리는 것이지, 낭만적이거나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 P106
하일너는 조용하지만 반항적으로 고개를 높이 쳐들고 거만한 표정을 짓고 다녔다.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공책을 펴고시를 적는 일이 많아졌다. 공책 표지를 감싼 검은색 방수포 위에는 ‘어느 수도사의 노래‘라는 제목이 쓰여 있었다. - P107
연주곡 <고요한 밤>은 루치우스의 손가락을 거쳐 괴로운 탄식 소리로 들렸고, 신음과 고통이 가득한 수난의 노래가 되었다. 루치우스는 두 번이나 다시 시작했다. 멜로디를 사정없이 찢고 쪼개면서 발로 박자를 맞추는 모습이 마치 혹한의 날씨에 일하는 나무꾼 같았다. 교장은 분노로 창백해진 음악 교사를 향해 흐뭇하게 고개를끄덕여 보였다. - P108
"괜찮아요, 루치우스 군." 교장이 입을 열었다. "노력하는 모습에 우리 모두 고맙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계속 노력해주세요.Per aspera ad astra(시련을 거쳐야 성공하리라)!" - P109
하일너만이 혼자 서서 침묵늘 지키고 있었다. 마침내 기차가 오자 하일너는 학우들이 다 탈때까지 기다렸다가 홀로 아무도 없는 칸에 올라탔다. 다음 역에서 기차를 갈아타면서 한스는 하일너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 P110
한스는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제대로 즐겨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노래와 파티의 흥겨움이 없었고, 어머니가 없었으며, 크리스마스 트리도 없었다. 아버지 또한 파티를 즐길 줄 몰랐다. 그러나 아들이 자랑스러웠던 나머지 이번만은 선물을 사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 P110
강은 꽁꽁 얼어붙어서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스는 거의 하루 종일 밖에서 시간을 보냈다. 새 양복에 초록색 신학생 모자를 쓴 그는고향 동창들에게 부러움을 받는 더 높은 세계에 서 있었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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