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진상/심판은 누가?

병실에 나 혼자 있었다. 시트를 걷고 내 몸과 대면했다. 얇은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옆구리를 만져보자 붕대와 거즈의 감촉이 느껴졌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상처가 욱신거려서 가슴으로숨을 쉬었다. - P315

"저기." 간호사 등에 대고 말했다. "제 아내와 아들은요?"
"부인은 밤새 계시다가 방금 전 갈아입을 옷을 챙기러 집에 돌아가셨어요. 아드님도 함께 있었을 거예요."
"그렇군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즈미와 얼굴을 마주하기까지 아직 시간이 있다. 서로 마음의 준비를 할 짬이 있다는뜻이다. - P316

"화농만 안 생기면 내일 오후에라도 가능합니다. 이후로는 통원 치료만 받으셔도 됩니다." 볼펜을 가슴주머니에 찔러넣으며 의사는 문 쪽으로 힐끔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지금 밖에 사람들이 와 있는데 만날 수 있겠습니까?" - P316

구노가 두 손을 바지 옆선에 붙이고 깊이 머리를 숙였다.
"같이 있으면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해 정말 면목없습니다. 순식간에 일이 벌어져 대응이 늦고 말았습니다.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뻔했어요. 중상이 아니라 정말 다행입니다. 다시 사과드립니다." - P317

"미치코 씨 남편은요?" 화제를 바꿨다. "자백을 했나요?"
내가 묻자 둘은 서로를 쳐다봤다. 노리즈키가 고개를 돌려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망설이는 표정이 살짝 떠올랐다.
"실은 그 일로 야마쿠라 씨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죠?"
노리즈키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리더니 문밖을 향해 불렀다. - P318

"도미사와 씨와 짜고 연극을 했습니다." 노리즈키가 말했다.
"도미사와 씨는 시게루와 미우라 야스시를 죽인 범인이 아닙니다. 어젯밤에 제가 한 말은 아무 근거도 없는 거짓말이었습니다." - P319

"물론 다카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흥분한 미치코 씨가 들이대는 감정의 비수를 야마쿠라 씨에게서 돌려야만했으니까요. 그래서 사채를 빌렸다느니 삼천만 엔의 보험금을 받는다느니 하는 말을 했어요. 모두 그 자리에서 떠오르는 대로한 말이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기는커녕 도미사와 씨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갖고 있죠. 무슨 수를 쓰더라도 시게루를 죽이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미우라도 마찬가지고요. 그때 도미사와 씨가 범행을 인정한 건 사전에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떤 엉뚱한 소리를 하더라도 부인 앞에서는 무조건 인정해달라고 부탁드렸죠." - P319

도미사와 고이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마 그렇겠죠." 담담한 어조였다. "하지만 야마쿠라 씨, 이제 와서 야마쿠라 씨에게 미치코에 관해 이렇다 저렇다 들을 입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에 대한 질투와 분노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 P320

불편한 침묵을 깨고 노리즈키가 말했다.
"도미사와 씨, 실은 전부터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시게루의 친아버지가 누군지 말입니다."
"무슨 소리죠?" 도미사와 고이치가 단호하게 말했다. "시게루는 제 아들입니다."
어디까지가 진심일까. 헤아릴 수 없는 어조였다. 그러고는 획돌아서서 인사도 없이 병실에서 나가버렸다. - P321

"그나저나 진범의 윤곽은 잡혔습니까?" 거북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물어봤다.
역효과였다. 구노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처음부터 시게루를 노렸다는 점에 착안해서 도미사와 가족 주변을 조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실마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이를 죽인 동기를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거의 두 손든 상황입니다." - P321

"나카노 뉴하임의 밀실은 어떻게 됐죠? 해결의 실마리가 잡혔나요?"
노리즈키의 얼굴에 생기가 되살아났다.
"아, 그것과 관련해서는 생각이 정리됐습니다. 야마쿠라 씨에게는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그곳은 사전적인 의미의 밀실이 아니었을 겁니다." - P322

"하지만 범인이 다른 이유로 여벌 열쇠를 갖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요? 우연히 제가 기절한 걸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이용할 생각을 떠올렸다면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노리즈키가 딱 잘라 말했다. (중략)
"(전략). 즉 범인이 야마쿠라 씨를 방치하고 사라졌다는 사실은 그 밀실이 범인의 의도로 구성된 것이 아님을 시사합니다.
범인이 아니라면 누굴까요? 물론 야마쿠라 씨는 아니죠. 그렇다면 남는 인물은 단 한 사람, 즉 피해자 자신입니다." - P323

"다잉 메시지. 죽는 순간에 남기는 메시지를 말합니다. 요컨대 피해자가 살인범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사력을 다해 실마리를 남긴 결과가 그 밀실이 아닌가 합니다."
"살인범의 이름?"
"혹은 열쇠나 자물쇠와 관계가 있는 인물일지도 모르죠. 현재까지 떠올릴 수 있는 건 그 정도입니다." - P324

내가 먼저 꺼내야 한다. 아내를 똑바로 바라보며 용기내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다시는 안 올 줄 알았어."
"으응." 가즈미가 어물쩍 대답한다.
"어제 한 얘기는 모두 사실이야." 침대 위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 P329

나는 고개를 들었다. 가즈미는 얼굴을 돌리더니 손수건으로 눈가를 눌렀다. 그러고는 내 눈을 보지 않고 말했다.
"아버지가 당신에게 할 말씀이 있대."
"지금 와 계셔?"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인다.
"만날 거야? 몸이 불편하면 나중에 봐도 돼."
"만날게." - P327

"그렇게 시간 걸릴 이야기는 아니네."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두 번 접은 하얀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를 펼쳐봤다. 이혼 서류였다. 가즈미는 이미 서류에 필요사항을 적고 날인까지 해놓은 상태였다. 물론 본인의 필적이었다.
"이게 뭡니까?"
"여기 오면서 쓰게 했네. 서명하고, 인감을 주게 빠를수록 좋아."
나는 자세를 고쳐앉고 장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 P328

2

혼자 소지품을 정리하고 로비 창구에서 퇴원 수속을 마쳤다. 그때 장인이 치료비와 이틀치 입원비를 냈다는 걸알았다. 위자료 대신인가. 콜택시를 불러달라고 해서 타고 돌아왔다.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았지만 벨을 누르고 싶은 유혹을 이길 수 없었다. 당연히 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 P329

가즈미가 서 있었다. 살짝 몸을 숙여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있었다.
(중략)
"꿈 아니야." 꿈속의 가즈미가 말했다.
"꿈인 주제에 꿈이 아니라니, 시건방진 꿈이네."
그렇게 중얼거렸다가 번뜩 눈을 떴다.  - P330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아버지 몰래 빠져나왔어." 살짝 늘어지는, 평소 가즈미의 말투다. "실은 병원에도 가고 싶었는데 시간이 안 맞아서 못 갔어."
"하지만 왜?"
"당신은 늘 왜라고 묻네." - P331

아내는 말없이 내 쪽으로 그 종이를 펼쳐 보였다. 어제 장인이 내민 이혼 서류다. 가즈미는 다시 보지도 않고 손가락으로 종이 양끝을 잡고 힘차게 반으로 찢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그야말로 번개 같은 행동이었다. 그러고는 나를 보며 확인하듯 말했다.
"이게 내 마음이야." - P331

가즈미의 목이 흐느끼듯 떨렸다. 입술이 말을 토해내기 전에나는 한없는 애정을 담아 가즈미를 껴안았다.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 말로 들으면 진정한 마음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 같았다. "용서해주지 않아도 돼. 내 곁에만 있어줘."
가즈미의 눈물이 내 뺨에 느껴졌다. - P332

현관에 나갈 때까지 벨이 끈질기게 울렸다. 발끈하며 문을 열었다. 그런데 밖에 서 있는 사람은 장인이 아니었다.
"실례합니다." 구노가 말했다.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불길한 예감이 압도했다.
"무슨 일이죠?"
"몇 가지 여쭤볼 일이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경시청까지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긴박하고 딱딱한 말투였다. - P333

. "어쨌든 아들은 아들이고 전 저죠. 인사는 이 정도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왜 갑자기 불려왔는지 알고 있습니까. 야마쿠라 씨?"
"모릅니다."
"당연히 얼마 전에 일어난 유괴와 두 건의 살인과 관련해서 묻고자 해서죠." - P335

"네. 도미사와 시게루가 유괴된 아침 말입니다."
(중략)
"똑같았습니다." 발끈해서 대답했다. "일곱시 삼십분에 집에서 나와 한 시간 후에 회사에 도착했죠."
"틀림없습니까?"
"의심되면 회사 근무 기록을 확인해보십시오."
"이미 조사했습니다." 딱하다는 투로 그는 말했다. "9일 아침 야마쿠라 씨의 출근 기록은 없었습니다. 누군가 조작한 흔적이 있었어요." - P336

"잠깐만요." 여기서 질 순 없었다. "그럼 제 부하직원들에게 물어보세요. 지난주 금요일이라면 제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시간에 회사에 왔다는 걸 대부분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 P337

"SP국 직원 전원에게 진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홉시 이전인지 아닌지 모두가 기억이 없다고 발언했습니다. 사실 기억이 없다기보다 당신이 지각한 걸 감추기 위해 모두가 입을 맞췄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구노가 말을 마치고는 입술 한끝을 일그러뜨린다. - P337

"그럴 리가 틀림없이 날짜를 착각했을 겁니다."
"당신의 부하직원 전원이 말입니까?" 노리즈키 경시는 혀를차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야마쿠라 씨, 여기까지 와서 보기 딱한 변명은 그만두는 게 어떨까요. 금요일 아침 회사에 지각한걸 인정하시죠." - P338

.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구노가 앞질러 문 앞을 가로막았다.
"자리로 돌아가주십시오."
"체포된 기억은 없습니다. 언제든 여기서 나갈 권리가 있을텐데요."
구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 P338

"난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아니라고 대답하면 그만이죠.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 죄를 인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거야말로 고양이가 쥐 생각해주는 격이다. 나는 오기가 발동해서 자리로 돌아갔다. 이들의 수에 놀아나는 꼴일지 몰라도그런 말까지 들은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 - P339

"(전략). 최소한 아홉시 무렵에는 회사에 도착해야 했을 테니 아지트는 구가야마 역에서 걸어서 오분 이내에 갈 수 있는 곳으로 했을 겁니다. 지금 스기나미 서 수사원들이 해당 구역을 샅샅이 뒤지고있습니다."
경시는 혼자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일일이 반론할 의욕조차 생기지 않았다.
"뒤져봐야 시간 낭비입니다."
"당신 입으로 장소를 말해주면 수고를 덜 수 있을 텐데요."
"그런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화가 치밀어서 버럭 소리쳤다. - P340

"당신이 시게루의 존재를 최대 위협으로 간주한 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치코 씨에 대해서는 무의식적인 죄책감이 있었을 테니 무조건 증오할 수만도 없었겠죠. 그 결과 굴절된 딜레마의 배출구가 시게루를 향하게 됐을 겁니다. (중략)"
일부러 흘려들었다. 마지막 결론만 빼면 노리즈키 경시의 지적은 정확했다. 반박하기가 쉽지 않았다. - P342

"가장 교묘한 점은 미우라 야스시 씨를 공범으로 택한 겁니다. 과거에 다카시를 두고 싸웠던 두 사람이 실은 뒤에서 손을잡고 있었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그토록 증오하던 두 사람의 모습이 실제로는 연극에 불과했다니 말입니다. 광고업계에서 그런 수련을 쌓은 겁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구노 경부 눈앞에서 무시무시한 폭력 장면을 연출한 것도 형사에게 선입관을 심어놓기 위한 퍼포먼스였습니다. 그보다 무슨 수를 썼길래 미우라씨의 협력을 얻어낸 겁니까? (중략)"
경시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너무도 교묘했다. 유일한 결점은,
완전히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안타깝게도 노리즈키 경시 - P345

"(전략). 전 시게루를 죽일 수 없습니다. 시게루가 살해당하던 시각에 전 저희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건 스기나미 서형사들이 증명할 수 있습니다. 제게는 알리바이가 있습니다. 집에서 나가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감금된 아이를 죽일 수 있다는거죠?"
"방법은 얼마든지 있죠." 노리즈키 경시가 대수롭지 않다는듯이 말했다. "현대는 하이테크 시대입니다. 간단한 기계장치와 타이머를 조합하면 원격 살인 같은 건 일도 아닙니다." - P344

"그럼 그 장치를 보여주시죠."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억지처럼 튀어나온 허세였다. 제정신인 인간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역시 멋쩍었는지 노리즈키 경시가 뚱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취조실에서 몰아세우면 바로 자백하리라 만만하게 봤다면 여간 잘못 본 게 아니다. - P345

"납득할 수 없는 쪽은 접니다.‘
"하지만 금요일 밤 알리바이와 관련해서도 야마쿠라 씨 언동에는 의문점이 많습니다. 이를테면 근무 기록이 그렇죠. 죄송하지만 조금만 더 계십시오."
그런 말을 했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지기 싫어하는 근성이 얼굴을 내밀었다.  - P345

3

밤 열시, 드디어 취조실에서 해방됐다.
(중략)
나는 범인의 정체를 알아차렸지만 잠자코 있었다.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본인을 만나 직접 묻고 싶었다. 내 추리가 옳다면 자수를 권할 생각이었다.
우치보리 길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행선지를 말했다. - P346

"아버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이 몇시인 줄 아나. 내일 하게." 장인은 거칠게 내뱉고바로 외면하려고 했다.
"왜 직원들에게 거짓 증언을 시키셨습니까?"
장인의 어깨가 파도처럼 움찔거렸다. 얼굴의 반만 나를 향한채 장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제 근무 기록을 조작한 것도 아버님이 하신 일이죠?" 연이어말했다. - P347

"방금 전까지 경찰에게 취조를 받았습니다. 제게 살인 누명을 씌우려고 하셨더군요."
"모르는 일이야." 장인은 경련하듯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난 전혀 모르는 일이야."
"이제 와서 모른다고 끝날 일이 아니죠. 전 압니다. 아버님이 두 사람을 죽였다는 걸." - P348

"아니네. 자넨, 그래, 오해하고 있어." 장인은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긍지는 간데없고 추태를 보이고 있다. 귓등으로도 들을 가치가 없는 말이었다. - P349

"동기도 있었죠. 빈틈없는 아버님이 미치코와 제 관계를 모를리가 없었습니다. 시게루 일도 알았을 테고요. 미우라의 신상 보고서 밑에는 제 이름이 적힌 파일도 틀림없이 있었겠죠? (전략). 아버님의 유일한 목적은 딸을 지키는 것뿡이었으니까요." - P350

 장인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꽉 감고 있다. 신음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미동도 없었다.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다.
"그제 혼마 마호라는 여자를 만났습니다. 아시죠? 아버님이미우라를 조사하라고 의뢰한 ‘쇼와 종합 리서치‘에서 일하는 여대생 말입니다. (중략). 혼마 마호는 아버님이 사건의 재후에 있다는 것을 알았디만, (후략). 아니면 그 여자도 처음부터 아버님과 한패였습니까?" - P351

장인은 만감이 교차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자넨 모르네."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 정도로 체념이 느린 남자였다니. 깔끔한 성품인 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다다랐는데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건가. - P352

"자넨 크게 오해하고 있더." 장인운 비장한 표정으로 호소했다. 애절한 만큼 유난히 더 꼴사나웠다. "그 애에게는 아직도 내가 필요하네."
언제까지 노추老醜를 드러낼 작정인가. 더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할 말도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대사가남아 있었다.
"아직 이 이야기는 경찰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일까지 딱 하루만 기다리겠습니다. 자수하세요." - P353

다카시의 손을 끌고 현관으로 향했다. 장모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서 있었다. 장인은 없었다.
"짐은 나중에 가지러 오겠습니다. 밤늦게 실례했습니다."
그렇게만 말하고 머리를 숙였다. 아무 죄가 없는 장모에게 무거운 슬픔을 짊어지게 한 것 같아 괴로웠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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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부 제 3장 광기의 형상들

광기에 대한 추론적 (推論的) 인식은 이러한 모순(矛盾)에 의해 제한되고 확정된 공간에서 펼쳐진다. 의학적 분석의 정돈된 형상 아래까다로운 관계가 작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광기의 최종적 의미로서의
‘비이성‘과 광기의 진실이 표현되는 형식으로서의 ‘합리성‘ 사이의 관계로서, 역사의 변전은 이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 P415

이 장에서 문제되는 것은 정신의학의 갖가지 개념을 같은 시대에 탄생하는 의학적 지식, 이론, 관찰사항 전체와 관련시키면서 개념들의 역사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정기(精氣)의 의학이나 고체의 생리학을 고려하면서 정신의학에 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전주의 시대를 따라 지속되어 온 주요한 광기의 형상들을 차례차례 다시 다룸으로써, 어떻게 그것들이 비이성의 경험 내부에 자리잡았을까.
어떻게 그것들이 거기에서 제각기 고유한 일관성을 획득했을까,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이 광기의 ‘부정성‘을 ‘실증적‘ 방식으로 나타내기에이르렀을까를 보여주려고 애쓸 생각이다. - P416

 가령 ‘정신장애‘ 개념의 경우에 실증성은 가느다랗고 얇고 투명하며 여전히 부정성에 아주 가깝고, 이미지들의 체계를 가로질러 ‘조광증‘과 ‘우울증‘에 의해 획득된 실증성은 벌써 좀더치밀해진 것이며, 가장 견고하고 비이성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비이성에 대해 가장 위험한 실증성은 도덕과 의학의 경계에서 행해진 성찰을 통해, 유기적인 만큼이나 윤리적인 일종의 육체적 공간에 관한 착상 (想)을 통해, ‘히스테리‘와 ‘심기증‘이라는 개념에, 그리고 곧바로 ‘신경질환‘이라고 불리게 될 것에 내용을 부여하는 실증성인데, 이 실증성은 비이성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에서 그토록멀리 떨어져 있고 비이성의 구조에 그토록 통합되어 있지 않아서, 결국에는 비이성을 다시 문제삼게 만들고 고전주의 시대의 말기에 비이성을 전적으로 뒤흔들어 놓게 된다. - P416

1. 정신장애의 계열

 어떤 점에서 정신장애는 모든 정신질환 중에서 계속해서 광기의 본질과 가장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의 광기는 일반적 견지에서 이해된 광기,
광기가 지닐 수 있는 부정적인 것 전체, 예컨대 무질서, 사유의 붕괴,
오류, 환각, 비이성, 비진실을 통해 경험된 것이다. - P417

그러므로 정신장애는 정신 속에서 극단적 우연성이자 동시에 완전한 결정론이고, 온갖 원인이 정신장애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정신장애에서는 온갖 결과가 산출될 수 있다. 사유(思惟)의 기관(器官)에서 발생하는 장애는 어떤 것이건 정신장애의 양상들 가운데 하나를 야기할 수 있다. - P417

 합리적 정신에서 육체까지, 넓이를 갖고 동시에 절(點)으로 나타나며 육체적이고 동시에 이미 사고력을 갖춘 혼합적 공간 안에서, 상상력과 기억력을 매개하고 중재하는 힘을 갖는 그 ‘감각적이거나 육체적인 아니마가 펼쳐지는데, 바로 이 힘은 상상력과기억력을 형성하도록 해주는 관념 또는 적어도 요소를 정신에 제공하는 것이며, 관념이나 요소의 작용, 육체적 작용이 흐트러질 때, ‘날카로운 지성‘⁶은 "마치 눈이 가려지는 듯이,대개의 경우 둔해지거나 적어도 흐려지게 된다."⁷

6) *intellectus acies.
7) Ibid., p. 265. - P418

 대뇌만이 질병의 유일한 원인이라면, 대뇌물질이 적합하게 기능하기에는 너무 작건, 반대로 대뇌물질이 너무 많고 이로 인해 덜 단단하며 대뇌물질의 질이 더 낮건 상관없이, 우선 ‘정신의 날카로움에 덜 적합한⁸ 대뇌물질의 차원에서 질병의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때때로 대뇌의 형태를 의심해볼 필요도 있는데, 대뇌가 이른바 ‘둥근‘⁹ 형태를 갖지 않으면, 비정상적인 침하(下)나 팽창이 일어났다면, 그때 정기는 불규칙적 방향으로 되돌려 보내지고, 순탄한 경로를 통해 사물들의 진정으로 충실한 이미지를 더 이상 전달할 수 없으며, 진실의 지각가능한 성상(聖)을 합리적 정신에 맡길 수도 없다.

8) *mentis acumini minus accomodum.
9) *globosa. 원래는 "둥근 형태가 많은"의 뜻이다. - P419

처음에 정기의 장애와 대뇌의 장애는 분리될 수 있지만 결코 계속해서 분리되지는 않고, 결함 있는 대뇌물질의 영향으로 정기의 질이 변하건,반대로 대뇌물질이 정기의 결함으로 인해 변모되건 교란현상들은 어김없이 서로 결합된다. 정기가 무겁고 정기의 움직임이 너무 느릴 때, 또는 정기가 너무 불안정하면, 대뇌의 미세공(微細孔)과 정기가 통과하는 도관(導管)은 막히거나 이상한 형태를 띠기에 이르고, 반대로 대뇌 자체에 결함이 있으면, 정기는 대뇌의 여기저기를 정상적으로 통과할 수 없으며, 따라서 결함의 소질(素質)을 생겨나게 한다.
윌리스의 이러한 분석 전체에서 정신장애의 정확한 모습, 정신장애에 고유한 증후 또는 특별한 원인의 윤곽을 찾는 것은 헛수고일 것이다. 이는 서술(敍述)에 정확성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정신장애가 ‘신경계통의 어느 하나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변질을 포괄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 P420

 《백과전서》의 ‘정신장애‘ 항목 첫머리에서 오몽은 지각할 수 있는 인상들의 변형에 자연상태의 이성이 있다고 설명하는데, 그것들은 신경섬유에 의해 전달되어 대뇌로 이르고, 대뇌는 그것들을 정기의 내부 주향로(走向路)에 따라 관념으로 변화시킨다. 비이성, 더 정확히 말해서 광기는 이러한 변화가 통상적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과도해지거나 비정상적이게 되거나 더 나아가 일어나지않게 되자마자 발생하기 시작한다. 기능의 정지(停止)는 순수상태의광기, 가장 강렬한 진실의 지점에 이른 듯한 절정상태의 광기, 즉 정신장애이다.  - P421

 정기 자체는 고갈되고무력하며 활기가 없기 때문에, 또는 탁해지고 장액 (漿液)과다로 끈적끈적해졌기 때문에 정신장애의 원인일 수 있다. 그러나 정신장애의 가장 빈번한 원인은 인상들을 더 이상 감당할 수도, 인상들을 전달할 수도 없는 신경섬유의 상태에 있다. 감각에 의해 시발(始發) 되게 마련인 진동(動)은 일어나지 않고, 신경섬유는 아마 너무 이완되어 있거나너무 팽팽하기 때문에, 또는 완전히 경직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미동도하지 않으며 어떤 경우에는 너무 경결 (硬結) 되어 더 이상 감각에 호응하지 않는다. 어쨌든 ‘탄성‘이 상실되었다. - P422

소바주가 체계적 질병 분류학》의 아멘티아¹² 항목을 기술하고자할 때, 증후학(症候學)의 맥락은 그의 역량을 벗어나게 되고, 그는 자신의 저서를 주재(主宰)하게 되어 있는 이른바 ‘식물학자의 정신‘에 더이상 충실할 수 없게 되며, 정신장애의 형태들을 원인에 따라서만 구별할 수 있을 뿐이다.

12) *amentia. 이성의 부재, 미망(迷妄)을 의미하는 라틴어. - P422

 정신장애의 진실은 병치 (竝置)로 형성될 뿐이다. 한편에는 축적된 불확정 원인들이 있는데, 이것들의 층위, 순서, 성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각양각색이고, 다른 한편에는 일련의 결과들이 있는데, 이것들의 공통된 특성은 오로지 이성의부재 또는 이성의 미미한 작동, 사물의 현실성과 관념의 진실에 대한이성의 접근 불가능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 P424

언제나 스스로에게서 벗어나는 이 현존을 뒤푸르는 《인간 오성론》에서 가장 엄밀하게 파악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정신장애에 관해 원용될 수 있었던 부분적 결정론들을끌어들임으로써, 보네가 내세우고자 한 신경섬유의 경직, 대뇌의 메마름, 힐다누스가 가리킨 뇌의 물렁물렁함과 장액성(漿液性), 사리풀이나 흰독말풀 또는 아편이나 사프란 가루의 복용(復用) (레,²⁸  보탱,
바레르의 관찰), 종양이나 뇌의 벌레, 두개골의 기형(畸形) 등 있을수 있는 원인들의 다수성을 강조한다. 그만큼 많은 실증적 원인이 제시되지만, 이것들은 오로지 동일한 부정적 결과, 이를테면 외부 세계와 진실에 대한 정신의 단절로만 귀착할 뿐이다.  - P424

이처럼 자연의 단편적 실증성과 비이성의 일반적 부정성은 서로 중첩되지만, 이 양자사이에 실질적 통일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장애는 광기의 형태로서, 오직 외부로부터만, 즉 접근 불가능한 부재 속으로 이성이 사라지는 한계로부터만 체험되고 사유되며, 이 선험적 개념은 서술의 일관성에도 불구하고 통합력을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연의 존재와 비이성의 비존재는 거기에서 통일성을 발견하지못한다. - P425

그렇지만 정신장애라는 선험적 개념은 완전한 무관심 속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 두 계열의 인접개념들에 의해 한정되는데,
그 중의 하나는 아주 먼 옛날부터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고전주의 시대에 분리되어 정의되기 시작한다.
정신장애와 광란의 구별은 전통적이다. 정신장애는 무열성(無熱性)질환인 반면에, 광란은 언제나 열을 수반하므로, 징후의 차원에서 확정하기가 쉬운 구별. 광란을 특징짓는 열은 광란의 가까운 원인과 본질을 지정할 수 있게 해준다. - P425

두 가지 주요한 문제는 광란이 대뇌 자체에서 생겨날수 있는가, 아니면 대뇌로 전달된 특성일 뿐인가, 그리고 광란이 오히려 피의 지나친 흐름 때문에 유발되는가, 아니면 피의 정체(停滯) 때문에 유발되는가를 아는 것이다. - P426

 펨의 학위논문은 언급할 만한 예외로 생각해야 하는데, 그의견해에 따르면 광란은 너무 많은 것이 들어찬 내장의 체증滯),
리고 "내장의 혼란이 신경을 통해 대뇌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기인한다.³³ 18세기의 저자들 대다수에 의하면, 광란의 중추와 원인은 열의중추들 가운데 하나가 된 대뇌 자체에 있다. 가령 제임스의 《사전》은광란의 원인을 정확히 ‘대뇌의 막‘에서 찾고,³⁴ 컬렌은 목 부위의 물질도 인화(引火)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의하면 광란은 "드러나지않은 부위들의 발화이고, 대뇌의 막이나 아니면 대뇌의 물질 자체에해를 끼칠 수 있다."³⁵ - P426

33) Fem, De la nature et du siège de la phrénésie et de la paraphrénésie.
씨의 주재(主宰) 아래 괴팅겐에서 심사된 학위논문. Gazette salutaire, 27mars 1766, nº 13.
34) James, Dictionnaire de médecine, traduction française, t. V, p. 547.
35) Cullen, loc. cit.,.p. 142 - P427

정신장애와 연관되는 두 번째 계열의 개념들은 ‘어리석음‘, ‘저능‘(低能), ‘백치‘, ‘우둔(愚鈍) 등이다. 일상적으로 정신장애와 저능은 동의어로 취급된다.³⁸ ‘(중략). 이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문제되는 것은 기억력, 상상력, 판단력과 동시적으로 관련되는 손상이다.³⁹

38) 예컨대 "나는 다르델이라는 자가 처해 있는 저능과 정신장애의 상태에 관해 당신이 영광스럽게도 나에게 말한 바를 오를레앙 공각하에게 설명했습니다." 바스티유 고문서 (Arsenal 10808, f⁰ 137) 참조.
39) Willis, loc. cit., II, p. 265. - P428

소바주가 《질병 분류학》에서 거의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구분인데, 그의 견해에 따르면 "정신장애에 걸린 사람들은 얼간이와는 달리 대상의 인상을 완벽하게 느낀다는 점에서", 정신장애는 "무감각 상태와 다르지만, 그들은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대상에 관해 염려하지 않으며 완전히 무관심하게 대상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대상으로 인해 초래될 여파(餘波)를 무시하며 대상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다."⁴³

43) Sauvages, loc. cit., VII, pp. 334-335. - P429

그리고 18세기 말에 이르면, 더 이상 저능과 정신장애의 대립이 시기상조라는점 때문이 아니라, 심지어는 훼손된 능력 때문라는이 아니라, 저능과 정신장애에 속하게 되고 저능과 정신장애의 발현현상들 전체를 은밀하게 요구하게 될 고유한 특성 때문에 저능과 정신장애가 구별되기에 이른다. - P430

백치의 경우에 "오성의 모든 기능과 심적 감정"은 마비되거나 무기력 상태로 떨어지고, 그의 정신은 일종의 혼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와 반대로 정신장애에서는 정신의 핵심적 기능이 사유활동으로 이어지긴 하지만, 사유는 헛되이, 따라서 극단적인 다변 속에서 이루어진다. - P431

 정신장애는 정신이상의 의학적 개념들 중에서 가장 단순한것, 이를테면 신화, 도덕적 가치평가, 상상적 꿈으로 가장 덜 빠져드는 것이다. 그래도 역시 정신장애의 개념은 그런 식으로 사로잡힐 모든 위험에서 벗어남에 따라 가장 은밀하게 일관성 없는 것이며, 이 개념 속에서 본성과 비이성은 조광증과 우울증이라는 선험적 개념이 활기를 띠는 상상계의 심층에서 구성되기에 이르지 못하고 여전히 추상적 일반성의 표면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 P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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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보았다. 검게 그을린 철판을 자세히보니 로크 바닥에 지름이 2미터쯤 되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중략)
마샬이 말했다. "그렇네. 저게 갤러허일세. 머더홀(밀폐된 공간에 화력, 무기 등을 쏟아부어 침입자의 절멸을 꾀하는 전술 옮긴이)을 발동할 수밖에 없었네." - P143

"나머지 인원들은 도보로 15분 이내에 보조 로크로 탈출할 준비를 해 두고, 듀건, 놈들의 정체가 무엇이고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려면 실험실에 표본을 마련해야 할 거야."
마샬은 미소 지었지만 행복해 보이기보다는 오싹한 느낌이들었다.
"제군들, 이제 사냥이 시작되겠군." - P146

듀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중략)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나도 나름 무장하고 있었지만 추운 날씨를 이겨 내기 위한 방한복만 몇 겹 입고 있었다. 듀건은 양 허리춤의 권총집에 버너 두 개를 차고 있었다. 나는 선형 가속기 하나만 가지고 있었다.  - P147

듀건이 말했다. "조언은 고마워. 하지만 그것들이 갤러허 다리에 무슨 짓을 했는지 내 눈으로 봤어. 방한복 말고 그것들을 막을 수 있는 확실한 보호막이 필요할 것 같은데."
"갤러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봤지? 메인 로크 바닥에무슨 짓을 했는지도 봤어?" - P148

 "이해해. 너한테는 별거 아니겠지. 그래도 이해해 줘.
우리는 죽어도 리셋 버튼을 눌러 다시 살아날 수 없어. 우리한테 죽음은 그냥 끝이야. 그래서 난 전투복이 필요해."
나는 웃음이 났다. "리셋 버튼이라고? 재생 탱크에서 나오는게 그렇게 간단한 일 같아?" - P148

마지막으로 행성 토착 생명체가 착륙을 방해한 것은 거의200년 전, 여기에서 동쪽으로 50광년 떨어진 우주에서였다. - P149

개척지에 착륙한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개척민들은 무언가에 쫓기기 시작했다. 미지의 생명체가 바람에 실려 와 노출된 피부를 파고들었고, 그러면 가려운 발진이 돋다가 고름이 찬 물집이 생기고 결국은 패혈증에 걸려 죽게 되었다. 모래속에 굴을 뚫고 사는, 갑옷도 뚫을 만한 송곳니가 달린 불가사리 같은 생명체도 있었다. - P150

 그 행성에 살던 생명체는 대부분 개척지 주민들의 방어를 뚫을 수 있도록 진화한 것 같아 보였고, 로어노크 사령부에서 개척지가 잠식당하기 전 기록을 전송해 둔 덕분에 우리는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정작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 P151

그들은 결국 지상 기지를 단단히 걸어 잠그고 최대한 조심하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연구해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돔 안에서 무언가 번식하기 시작한 뒤였다. 사령부에서는 멸균 프로토콜을 대여섯 차례 시도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들은 어떻게 해도 되살아났고 결국 복제한 익스펜더블이 개척지 전체 인구를 채우게 되었다. 중앙 프로세서는 아미노산이 모자라게 될 때까지 익스펜더블을 찍어 냈다.
마지막까지 살아 있던 익스펜더블 중 하나는 죽기 직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희미하게마나 짐작할 수 있었다. - P151

나는 눈밭으로 걸어 나가며 200번 넘게 고쳐 죽은 로어노크의 익스펜더블 제롤을 생각했다. 로어노크의 토착 생명체들은 개척민들에게 어떤 경고도 하지 않았다. - P152

캣이 물었다. "저기, 가속기를 챙긴 거야? 난 다들 버너를 가져오는 줄 알았는데."
(중략)
"별 이유는 없어. 그냥 감으로 선택한 거지." 내가 대답했다. - P153

어차피 호흡기에 가려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미소 지었다. "맨날 똑같은 무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놈들한테 두 번이나 당했어. 그래서 이번에는 반대로 해 본 거야."
그녀는 끄덕였다. "알겠어. 굉장히 철학적이네."
"뭐, 저승문을 몇 번 두드리다 보니."
"그렇네. 극락을 찾아가는 중이겠구나?"
농담하기에 좋은 때는 아니지만 상관없었다. - P154

캣이 말했다. "있잖아, 여태 너랑 대화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아닌가?"
나는 다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듀건을 주시한 채로 손은 버너에 올려 두고 있었다.
"없어. 적어도 내 기억으로는." - P155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일이 터지기 전 10분 동안 듀건 옆에서 걷고 있던 다른 경비대원 두 명이 듀건의 다리에 버너를 겨냥했다. 듀건은 처음에는 그들을 부추기는 듯했다. 하지만 갑옷이 벌겋게 달아올라 물렁해지면서 크리퍼의 이빨은 그의 다리에 점점 더 깊이 박혔고, 눈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증기가 올라와 시야에서 크리퍼들이 가려지자 듀건의 고함은 비명으로, 비명은 절규로 바뀌었다. 나는 그를 중심으로 빙 둘러 옆으로 이동했다. 한 30미터쯤 떨어진 곳에 회색 화강암이 눈을 뚫고 올라와 있었다.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 P157

 경비대원 둘은 아직 따라오고 있었지만 각각 크리퍼 둘에게 쫓기고 있어서 얼마 못 가 잡힐 것 같았다.
(중략) 나는 가속기를 조준한 뒤 발사했다.
가속기 반동 때문에 캣이 있는 곳까지 밀려났다. 그 순간 크리퍼의 앞쪽 세 마디가 산산조각 나며 파편이 되어 날렸다.
"젠장, 철학자가 맞았네?" 캣이 말했다.
다른 경비대원들이 아래에 있었지만 눈밭 아래에는 꿀렁이는 움직임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 P158

"샘플 얻었어?" 통신기 너머에서 베르토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체 일부만."
나는 바위 아래로 뛰어내려 크리퍼의 잔해를 집어 들었다. 베르토는 이미 구조용 갈고리를 내리고 있었다. - P158

10장

이쯤 되면 마샬이 왜 시키는 건지 알 수 없는 자살 임무는 일상의 일부가 된 지가 오래였다.
(중략)
나는 가끔 젬마가 익스펜더블의 삶이 어던 것인지 내게 ‘제대로‘ 알려 주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중략)
우주선에는 미드가르드가 그간 쌓아 온 상당한 자본이 투입되었고 시스템 설계자는 우주선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폭발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내가 상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처럼 심심풀이로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어 보였다.
(중략)
하지만 이 보호막도 티끌 알맹이보다 큰 물체와 충돌할 때의 충격은 견디지 못했다.
드라카를 만든 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태양권 경계를 지나고 나면 티끌 알맹이보다 큰 물질은 거의 없다시피 하며 대형 물체와의 충돌로부터 우주선을 보호할 수 있을 만큼 튼튼한 보호벽은 존재하지 않는다. - P163

다행히도 우리와 부딪힌 물체가 그 정도로 크지는 않았다.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는 모른다. 충돌 후 충격으로 쿼크(양성자, 중성자와 같은 소립자를 구성한다고 여겨지는 기본 입자 옮긴이)와 글루온(쿼크 간의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입자옮긴이)으로 쪼개졌기 때문이다. 질량이 15~20그램 사이인 물체였다는사실은 알아냈다. - P164

 매기 링이 내게 할 일을 설명하는 동안 그녀의 부하 직원두 명이 나를 진공 슈트 안에 밀어넣었다.
매기 링이 말했다. "전력 결합 장치가 타격을 입은 것 같아요. 확실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당신이가서 전체 유닛을 교체해요." - P165

"다 끝나면 예전 엔진은 되도록 가져오고요."
"되도록이요?"
"네. 그 전에 죽지 않는다면 말이에요. 그쪽 구역은 현재 외부에 노출되어 있어요. 이 유닛이 작동할 때까지 3.5초마다 온몸으로 치사량의 방사능을 흡수하게 될 거예요." - P165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큐브 윗면에 주변이 검게 그을린 지름 2~3센티미터쯤 되는 구멍이 나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니천장 쪽에 약간 더 큰 구멍이 나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이 구멍으로 새어 들어와 마치 스포트라이트처럼 망가진 유닛을 비췄다.
그때부터 피부가 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매기와 젬마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의 몸은 경이로울 정도로 급성 방사능 중독에 천천히 반응한다. - P167

 이승으로 나를 다시 데려가 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 몸을 덜덜 떨며 공중에 떠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달달 부딪는 이 사이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죽기 전에 반드시 업로드를 하라고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있었다. 젬마도 이야기한 적 있었다. 치명적인 상황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하며, 내 재생본 하나가죽는다고 해서 그 죽음과 함께 사라져서는 안 됐다.
하지만 잊는 편이 더 나은 것들도 분명 있다. - P169

(전략)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은 다음 날 아침 미키3로 재생 탱크에서 나오자마자 슈트 카메라에 찍힌 영상 기록을 보고 들은 뒤에야 알 수 있었다. 내가 에어 로크로 돌아가다 말고 멈추더니 목 부분에 있던 헬멧 밀폐 장치를 풀고 우주에 내 맨얼굴을 드러냈던 것이다. - P171

11장

그가 말했다. "미안. 비난하려던 건 아니었어."
"퍽이나 변명 잘 들었어." 이 말했다.
베르토는 리프터 전원을 내리고 비행 종료 체크리스트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중략)
"밖에서 일어난 일은 정말로 유감이야. 할 수 있었으면 당연히 경고했을 거야. 그것들이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눈밭 아래로 다니는 게 아닌 것 같아. 마지막으로 너희쪽을 지날 때 레이더에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었는데 1분도 안 돼서 공격이 시작됐어." - P173

"설명이 필요하겠군. 두 시간 만에 대원 세 명을, 갤러허를 포함하면 네 명, 토리첼리까지 포함하면 다섯 명을 잃다니 이해할 수가 없는데 말이야. 정작 자네는 살아 있고." 마샬이 말했다.
(중략)
내 말에 마샬이 벌떡 일어섰다. "그따위 태도는 뭔가, 반스! 자네는 익스펜더블이야! 살아남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존재라고!" - P175

마샬은 나를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자네말은, 내가 고메즈의 영상 기록에서 본 자네는 겁을 집어먹고 비굴하게 살려고 도망치는 게 아니라 임무를 완수하고 개척지를 보호하기 위해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이건가?"
나는 캣을 쳐다봤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 그렇습니다만?" - P176

"그럼 가속기를 챙겨 나간 이유는 뭐지?"
"가장 큰 이유는 버너보다 가속기 사용하는 법을 더 자세히 배웠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전에 크리퍼를 마주쳤던 두 번의 임무에서 버너를 가지고 있었지만 두 번 다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전략을 바꾸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입니다."
마샬의 눈썹이 미간으로 모였고 잔뜩 오므려진 입술은 거의 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 P177

마샬은 책상에서 몸을 뒤로 젖히고 짧게 자른 희끗희끗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전략)
첸, 지금 상황에서 자네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자네가 반스와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는 의심이 들어 그랬다면 출격 전에 보고했어야 하네. 다음부터는 임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개인적인 사정이 생기면 잊지 말고 사령부에 보고하게나."
캣이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마샬은 한 손을 들어 묵살했다.
"듣고 싶지 않네. 앞으로 누구와 어울릴지 결정할 때는 좀더 신중하게."
사령관의 시선이 나에게서 캣으로 옮겨 갔다가 다시 나에게돌아왔다. - P179

"그러니까 마샬은 우리가 잤다고 생각하는 거지?"
캣은 어두운 표정으로 도끼눈을 뜨고 말했다. "엿이나 먹으라 그래"
"와우, 말이 좀 심하네. 익스펜더블이랑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는 게 그렇게 싫어?"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중략). 짜증이 났던 건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호르몬 때문에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처럼 말하니까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지. 너한테는 그따위로 말하지 않았잖아. 아냐?" - P180

나는 내 머그잔을 그녀의 잔에 부딪혔고, 우리는 각자 잔에든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가 물을 마시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나는 그녀의 접시에서 토마토 하나를 잽싸게 집어 그녀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내 입속에 쑤셔 넣었다. - P181

"그래서 사령부와는 이야기가 잘 끝났어?" 나샤가 물었다.
나는 나에게 자리를 내주려고 옆으로 물러나 앉았다. 그녀는 벤치를 넘어와 자리에 앉았다.
내가 말했다. "웅, 뭐 적당히 잘 끝난 것 같아. 마샬이 나를시체 구덩이에 빠뜨리겠다고 위협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어." - P182

캣이 대답했다. "고마워. 이미 고메즈에게 물어보기는 했지만………… 혹시 그것들이 우리를 공격하기 전에 낌새가 있었어?
갑자기 공중에서 튀어나올 수는 없는 거잖아, 안 그래?"
나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었어. 가시광선, 적외선, 지표 투과 레이더를 다 돌리고 있었는데, 내가 너희 위를 지날 때는 아무 위협도 감지되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어." - P183

내가 말했다. "아주 좋았지. 다섯 사람이 더 죽어 나갔으니 곧 너도 온전히 네 몫을 할 수 있을지도"
"그래? 우리가 항상 소시오패스였던 거야, 아니면 업로드를 거치면서 얻은 기능이야?" 에잇은 태블릿을 책상 서랍에 넣고일어서서 기지개를 켰다.
"방금 우리가 소시오패스였던 거냐고 했냐?" - P185

"그래서 말인데, 내가 방금 100킬로칼로리를 먹고 오는 길이야. 오늘 치 남은 배급이 200킬로칼로리밖에 안 남았다는 소리지. 미안"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좋은 놈인 척하려니 힘들었나 보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그러지 마. 네가 낮잠 자는 동안나는 거의 죽을 뻔했어. 그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잖아."
"내가 아직 이 말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나는 지금 말그대로 배고파서 죽기 직전이야, 세븐" - P186

에잇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머더홀이라니, 뭣 때문에?"
(중략)
"말을 좀 제대로 들어. 크리퍼가 바닥을 뚫고 침입했다니까."
침입‘이라면......?"
"구멍을 뚫고 들어와서 바닥을 뜯기 시작했다고."
"뜯어? 네 말은 놈들이………… 바닥을 가져가려고 했다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것 같아. 이 행성에는 금속이별로 없잖아. 필요했나 보지." - P187

"뭐, 뚫는 장면을 본 건 아니야. 대원들 전투복에 크리퍼가 붙어 있었고, 대원들은 살아남지 못했어. 전투복에 구멍이 뚫렸으리라는 건 내 추측이지."
에잇은 한쪽 팔꿈치에 체중을 실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인채 반쯤 일어났다. "말도 안 돼. 생명체는 환경에 필요 없는 능력을 갖추도록 진화하지 않아. 얼음을 뚫고 사는 벌레가 10그램짜리 선형 가속기 탄환을 방어하라고 설계된 갑옷을 뚫도록 진화했을 리가 없잖아?" - P188

12장

미키2는 가장 짧게 산 재생본이었다.
미키3는 가장 길게 산 재생본이었다.
원에게 일어난 일에 무뎌지기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첫 키스는 평생 기억에 남는 법이니까. 첫 죽음 역시 절대 잊히지 않는다. - P192

드라카 같은 우주선을 타고 여정을 시작할 때 사람들은 여정의 끝에 뭐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반물질 물리학에 따르면 반물질은 충분한 양이 모여야만 동작하고, 생산이 엄청나게 어려울 뿐만 아니라 비용도 많이 든다. - P193

개척지 우주선에서는 데이트하기가 힘들다. 할 수 있는 활동에 선택지가 별로 없다. 같이 밥을 먹을 수는 있지만, 시장통 같은 곳에서 플라스틱 병에 담긴 음식을 빨며 마찬가지로 플라스틱 병에 담긴 음식을 빨고 있는 다른 사람과 부딪히지 않도록 케이블에 묶여 있는 상황에서 로맨틱함은 기대하기가 매우 힘들다. 같이 걸을 수는 있다.  - P201

(전략), 만약 필드생성기 유닛에 다시 한번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를 자꾸 생각하게 되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로공황 상태에 빠지는 것도 역시 로맨틱한 분위기와는 거리가멀다.
그래서 보통은 섹스를 했다.
그렇지 않을 때는 대부분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샤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중략). 나샤의 가족은 30년 전 난민 신분으로 잃어버린 희망을 타고 미드가르드에 도착했다. 그들은 새로운 희망이라는, 미드가르드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행성 거주민들끼리 살육전이 일어나 폐허가 된 행성 출신이었다 - P202

정부는 이민자들에게 기본 소득을 배정하고 살 곳을 지정해 주었지만, 이들이 멀쩡한 직업을 찾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착륙한 지 2년이 지나고 스무 명 남짓 되는 이민자들이 농성을 시작했고, 농성은 곧 시위가 되었다가 작은폭동으로 바뀌었다. 그 후에는 이민자 자녀가 일반 학교에 들어가는 것조차 녹록지 않게 되었다.
그즈음 나샤가 태어났다. - P203

13장

 꼬박 30분 동안 애를 쓰다가 결국 포기하고 침대를 빠져나와, 카페테리아로 가 책이나 읽으려고 책상에 있던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는 가끔씩 지나다니는 경비대원을 빼면 복도에 아무도 없다.  - P207

새로 읽을거리를 찾아 몇 분 동안 자료실을 뒤졌다. 그다지 흥미로워 보이는 자료가 없었고, 결국 호기심으로 새로운 희망 행성과 관련된 파일을 선택했다. 내 삶을 비관하며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한 이후로 새로운 희망 행성에 관한 자료를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 P208

자료를 읽기 시작한 후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상당히 다른관점으로 이야기가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교에서는 전쟁에 여러 이유를 붙였기에, 나는 인종이니, 종교니, 자원이니 정치 철학이니 하는 으레 시민전쟁의 원인이 되는 문제들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으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 P209

마지막 10분을 카운트다운한 끝에 스캐너에 오큘러를 스캔할 수 있었다. 머그잔에 사이클러 페이스트와 함께 같은 양의 기대와 역겨움을 담고 있는데, 인사과에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늘 배정된 임무를 알리는 메시지였다.  - P210

[CChen0197]: 안녕 미키, 오늘 근무자 명단에 네 이름이 있더라.
나도 보안 경계선으로 나갈 거야. 파트너 안 필요해? 어제 우리 꽤 잘맞았잖아.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에잇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Mickey8]: 뭐, 저걸로 결정된 거네? 나는 어제 네가 첸이랑 뭘 했는지모르잖아. 5분만 이야기하면 다 들통나지 않겠어? 당연하지. 그러니까난 다시 잘게 알았지? 이따 어땠는지 알려 줘. - P211

이 말했다. "이해가 안 돼, 난 어제 널 봤다고. 너도 우리만큼 죽고 싶어 하지 않았어. 내가 알기로 너는 불멸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사실을 믿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단 말이야." - P212

 "너 종이 파쇄기에 손 넣어 본 적 있어?"
캣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라고? 당연히 없지."
나는 벽에서 가속기를 내려 충전이 되어 있는지, 장전이 되어 있는지 확인했다. "왜? 죽지는 않잖아. 그리고 의수가 네 진짜 손보다 더 튼튼하기도 하고, 의료팀에서 몇 시간만 손보면 너는 새것처럼 다시 태어날 텐데."
"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 P213

철탑은 보안 경계선을 빙 둘러 100미터 간격으로 서 있었다. 느릿느릿 다음 철탑에 도착했을 때 오큘러에서 알람이 울리더니 다른 두 팀보다 우리 팀의 이동 속도가 더 빨라서 속력을 10퍼센트 늦춰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 P216

오큘러에서 다시 알람이 울렸다. 더 나아가지 말고 12분을 기다리라는 사령부 명령이었다. 캣은 한숨을 쉬면서 철탑에 등을 기대고는 50미터 정도 떨어진 자리에 눈 더미 밖으로 불룩 튀어나온 바위를 향해 가속기를 조준하며 말했다.
"미드가르드에서 기초훈련 받을 때 이후로 한 번도 쏴 본 적이 없어. 기억이 나야 할 텐데." 이 말했다.
"겨냥하고 쏘면 돼. 타깃팅 소프트웨어가 다 알아서 하니까. 그리고 사출구가 커서 어차피 다 죽어" 내가 말했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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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가 전제정에 대한 매디슨의 명시적인 개념 정의를 받아들이고 전제정을 피해야 한다고 가정하게 되면, 조건 1은 단순히 정의상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① 전제정은 모든 권력의 집중 등을 의미한다(개념 정의). ② 전제는 바람직하지 않다(공리). ③ 따라서 모든 권력의 집중 등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개념 정의를 통해 이문제를 해결해 버리면 많은 중대한 문제점들이 미해결 상태로 남게 된다. - P26

매디슨주의 논리 체계를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두기 위해 나는 임의로 그 결과란 바로 "자연권에 대한 심대한 박탈"²¹임이 분명하다고 명시한 바 있다. - P27

하지만 만약 이제 이 내포적 가설들과 개념 정의들을 추가해서 매디슨주의 논리 체계를 별 의미가 없는 주장이 되지 않도록 되살려 내려고 시도할 때, 우리는 어떤 딜레마에 빠진다. 만약 우리가 "권력"을 헌법에 규정된 권한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면, 조건 1은 명백하게 오류다. - P27

예를 들어, 선거 과정은 어떤 개인들이 다른 이들을 통제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즉 분명히 이는 지도자가 아닌 이들이 지도자들을 통제하는 데 기여한다. 따라서 입법, 행정, 사법 권력이 단순히 집중되었다고 해서 권리의 심대한 박탈이라는 의미에서의 전제정이 반드시 등장할 것인지는 명백하지 않다. - P27

가설 6: 빈번하게 치러지는 보통선거는 전제정을 방지할 만큼 충분한 외부 견제를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이 가설을 입증해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가설이 오류이고, 빈번하게 치러지는 보통선거가 전제정을 막을 만큼 충분한 외부 견제를 제공한다고 해보자. 그렇게 되면 전제정을 방지하기 위해 헌법을 통해서다른 방법을 통해서건 입법, 행정, 사법 권력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는 매디슨의 주장 역시 명백히 오류가 되기 때문이다. - P28

21 비록 이 개념 정의가 매디슨의 저술에서 명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내가 찾을수 있는 한에서 볼 때, 이는 분명히 암시되어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정의롭고자유로운 정부......"에서 "...... 재산권과 인권은 모두 효과적으로 수호되어야한다."라고 여러 곳에서 주장한다. 그러나 만약 보통선거권은 주어졌는데 시민 다수가재산을 갖고 있지 않으면, 그때에는 재산권이 보호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정부는재산권이 다수에 의해 침해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계되어야한다(Padover, 앞의 책, pp. 37-38). 그렇지 않다면 정부는 "정의롭고 자유롭지 않을것이다. 나는 단순히 "정의롭고 자유로운"을 "비전제적인"에 상응하는 것으로, 그리고
"전제정"을 "정의롭고 자유롭지 않음에, 즉 자연권의 박탈에 상응하는 것으로만들었을 뿐이다. 만약 매디슨의 "다수의 전제" 개념이 이와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 P277

분명히 『페더럴리스트』 49번²²은 선거 과정이 제공하는 견제만으로는 입법, 행정, 사법의 모든 권력이 동일한 세력에 집중되는 것을 막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시도한다.  - P28

 이 주장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① 민중에게 자주 지지를 호소하는 것은 정부에 결함이 있음을 의미하게될 것이며 결국 정치 안정에 필요한 경외심을 약화시킬 것이다. ② 공공영역에서의 열정을 너무 강하게 고취시키는 것은 이 공공 영역의 평화로운 상태를 위험하리만치 흔들어 놓게 될 것이다. ③ 수적으로 극소수이다보니 행정부와 사법부의 구성원들은 유권자들의 아주 일부에게만 알려진다. - P29

이상에서 보듯, 유감스럽게도 조건 1의 타당성은 확립되지 않는다.
하지만 비전제적인 공화정을 위해서는 이 조건이 필수적이라는 것이 미국의 정치적 신조 가운데 하나다.  - P29

이런 조치들은, 대법원의 위헌법률심사권, 지방분권적인 정당들, 상원에서의 의사 진행 방해filibuster, [대통령이 자신이 임명한자에 관해 해당 주의 상원의원에게 미리 인준에 대한 승인을 요청하는 관례를 말하는] 상원 "예우"courtesy, 의회 상임위원장들의 막대한 권한, 그리고 이외에도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외부 견제로 기능하도록 고안된 거의 모든 조직 내부 구조상의 장치를 포함한다. - P30

VII

개념 정의 4: 파벌은 "다른 시민들의 권리나 공동체의 영속적이고 집합적인 이익에 반하는 어떤 정념이나 이해관계 등과 같은 공통의 욕구에의해 결합해 행동하는, 상당수의 시민들²⁵이다. - P31

22 한때는 이 논문의 진짜 저자에 대해 논란이 있었지만, 해밀턴이 아니라 매디슨이저자라는 것이 이제는 분명히 밝혀졌다(Irving Brant, James Madison, Vol. III: Father ofthe Constitution, 1787-1800 [New York: Bobbs-Merrill Co., 1950], p.184). - P278

25 The Federalist, No. 10, p. 54.; E, 80. - P278

즉 그 원인은, 인간 이성이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생겨나기 마련인 의견의 차이. 서로 다른 지도자들에 대한 애착심, "인간 재능의 다양성에서 생겨나는 재산상의 차이로부터 유래한다. 사람들이 똑같아질 수 없다면, 오직 사람들의 자유를 없애야만 파벌의 원인을 통제할 수 있다-하지만 이는 분명 비전제적인 공화정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취할 수 없는 해결 방안이다. - P31

가설 7: 만약 파벌을 통제하고 전제정을 피하고자 한다면, 이는 파벌의 폐해를 통제함으로써 성취되어야 한다.

전제정을 피할 수 있도록 파벌의 폐해가 통제될 수 있는가? 다음의 두 가지 추가 조건이 충족된다는 가정하에, 매디슨은 그렇다고 답한다.

가설 8: 만약 파벌이 수적으로 다수에 미치지 않으면, 입법기관에서 투표의 "공화주의 원칙", 즉 다수는 소수를 투표로 제압할 수 있다는 원칙에 따라 파벌을 통제할 수 있다.
가설 9: 전체 유권자의 수가 아주 많고, 널리 퍼져 있고, 이해관계가 다양해지면, 다수 파벌majority faction의 발달은 제한될 수 있다.

가설 8을 증명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매디슨은 이 가설의 타당성은 자명하다고 보았음이 분명하다.  - P32

매디슨은 다수 파벌의 폐해는 오직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만 통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다수가 동일한열정이나 이익을 동시에 갖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다수 파벌이 애초부터 형성되지 않을 것인데, 그렇다면 매디슨은 파벌의 원인들을 통제할 수 없다고 했던 자신의 이전 주장을 여기에서는 뒤집은 것으로 보인다. 둘째, 혹시라도 다수 파벌이 존재한다면, 그 구성원들이 효과적으로 함께 행동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 P32

그런 다음 매디슨은 너무나도 중요한마지막 명제를 제시한다. "범위를 확대하면 엄청나게 다양한 당파들과집단들이 들어오게 되고, 다른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려는 동기를 전체 중의 다수파가 공통으로 갖게 될 개연성은 아주 희박해질 것이다. 또는 만일 그런 공통의 동기가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자신들의 힘을 발견하고 서로 일치단결해 행동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다."²⁶ - P33

26 The Federalist, No. 10, p. 61. 또한 The Federalist, No.51, pp. 339 ff의 마지막 문단을참조할 것. 「페더럴리스트」 10번, 87쪽. - P278

가설 10: 전체 유권자의 수가 아주 많고 널리 퍼져 있으며, 다양한 이해관계를 갖는 한, 다수 파벌이 존재할 가능성은 낮고, 그리고 설사 존재하더라도 하나의 통일체로 행동할 가능성이 낮다. - P33

가설 1: 외부의 견제를 받지 않는 한, 어떤 개인이든 집단이든 타인들이게 전제적으로 행동할 것이다.

(중략)
가설 1은 특히 다음의 주장들을 함축하고 있다.

1. 정부의 통치 과정을 통해 타인들을 통제하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표다. 즉 그런 통제는 그것을 행사하는 이들에게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는 보람 있는 일로 여겨진다.
2. 정치 지도자들이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전제정으로의 충동을 억제할만큼 충분한 자기 절제력을 갖게 되기란, 사회적 훈련으로는 불가능하다. 실제로 매디슨은 이렇게까지 얘기한다. "양심 - 유일하게 남아 있는 연결고리-은 개인들에게서 별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큰 무리를 이루고 있을 때, 양심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²⁷
3. 한 개인이 또 다른 개인에게 공감하고 자신과 동일시하는 범위는 너무 좁아서 결코 전제점으로의 충동을 제거할 수 없다. - P34

 "내부의 견제"-양심(초자아), 태도, 기본 성향 - 가 어떤 특정한 개인이타인들에 대해 전제적으로 행동할지의 여부를 정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이다. 그리고 이런 내부 견제는 개인에 따라, 사회집단에 따라, 때에 따라달라진다. - P35

27 Elliot‘s Debates, V, 162. - P278

 미국 독립 이전 시기의 저술가들은이미 공화정의 필요조건이 시민들의 덕성moral virtue이라는 점을 강조했었다. 시민들의 덕성은 다시 "사람들을 고양시키는 종교, 건전한 교육,
정직한 정부, 단순한 구조의 경제"²⁹를 필요로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매디슨의 명시적인 주장을 살펴보면, 그는 자신의 시대에 분명히 공유되었던 이런 가정을 무시하거나 경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 P36

29 Rossiter, Seedtime of the Republic (New York: Harcourt, Brace & Co., 1953), pp. 429-32. - P278

가설 1‘ : 어떤 개인이든 집단이든 외부의 견제를 받지 않는 한 타인들에 대해 전제적으로 행동할 확률이 아주 높다. 따라서 전제정을 오랜 기간 동안 피하고자 한다면, 어느 정부에서든 헌법에 규정된 장치들이 모든 공직자에 대해 어느 정도는 외부 견제를 가하는 역할을 계속 담당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다음과 같은 제안은 합당해 보인다. 설사 내부의 견제가 전제정으로의 충동을 자주 막아낼 수 있을지라도, 전제적이 될 수 있는 위치의 개인들 모두에게 항상 작동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 P36

IX

인간은 자신의 사회화된 욕구들에 부과될 수 있는 보상 및 처벌과 관련해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예측을 하는데, 행위란 바로 그런 예측의 산물이라고 가정해 보자.³⁰  매디슨주의자들은 전제정을 억제하는 장치로서 어떤 종류의 외부 견제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가? - P37

30 심리에 관한 용어로 표현할 때, 행위에 대한 내부 통제와 외부 통제의 구분이 다소 흐릿해진다는 점에 주목하자. 양심에 의한 내부 통제의 경우에도, 고통스런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을 예상하게 만드는 계기가 외부 대상이나 행동일 수도있다. 더 나아가, 예를 들어, 수입이나 존경의 경우처럼 심지어 그 특정 개인 외부의 근원에 의해 보상과 처벌이 제어될 때조차, 통제를 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만족감이나 박탈감에 대한 내적 예측 또는 실제 느낌이다. 여기서 다시 강조하자면, 매디슨주의 이론은, 이 책에서 "매디슨주의적"이라고 이름 붙인 사고방식과 더 이상 일치하지 않을 정도로 대대적으로 뜯어 고치지 않는 한, 십중팔구 현대 정치학으로 만족스럽게 변형될 수 없다. - P278

그렇다고 보상과 처벌이 정부 재정과 관련되어 있는 것 또한 아닌데, 왜냐하면 입법부가 지나치게 강해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헌법은 이 통제 수단을 제약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상과 처벌은 물리적인 강압의 위협을 의미하는가? 탄핵과 유죄판결, 무력의 사용이 아마도 이 범주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경우 공화정은 항상 언제라도 폭력과 내전으로 치달을 수 있는 상태가 될것이다. 왜냐하면 물리적인 강압이 전제정을 막는 중요한 수단이고, 매디슨의 주장이 가정하듯이 전제정이 근본적인 위협이라면, 물리적 강압의 위협과 이로 인한 폭력의 위협은 정치에서 결코 제거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P39

 분명 매디슨은 기본적인 개념, 즉 지도자들끼리의 상호 통제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매디슨주의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부족해 보인다.
1. 지도자들 간의 상호 통제가 전제정을 막을 만큼 충분하려면, 미국헌법이 그렇게 하듯이, 권력분립이 반드시 헌법에 규정되어 있어야 한다.
고 매디슨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그런 목적으로 매디슨주의를 이용할 수도 없다.
2. 매디슨주의의 주장은, 외부 견제로서 헌법상의 규정이 갖는 중요성을 과장하거나, 행위에 대한 견제나 통제라는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인간 심리 차원의 요인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 행위에 관한 명제들에 대한 것이건 비전제적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에 대한것이건 부정확한 전제로부터 추론된 주장은 오류다.
3. 매디슨주의의 주장은, 제정을 방지하는 데 있어, 어떤 정부 공직자들에 대해 다른 특정 정부 공직자들이 가하는 구체적인 견제 장치들의 중요성을 과장하고 있다. 결국 이는 모든 다원주의적 사회에 존재하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견제와 균형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한다. 사회적인 견제와 균형 없이도 공직자들에 대한 정부 내부의 견제가 실제로 작동하여 제정을 방지할 것인지 의문스럽다. 반대로 이런 사회적인 견제와균형이 존재한다면, 미국에서 실제 운영되고 있는 정부 내부 견제 장치들 즉 매디슨주의 논리 체계의 견제 장치들 모두가 전제정을 방지하는데 필요할지 의문스럽다. - P40

X

전제정은 자연권에 대한 모든 종류의 심대한 박탈을 의미한다고 했던정의가 기억날 것이다. 왜 이런 개념 정의가 필요해 보이는지에 관해서는이미 설명한 바 있다. 사실 다수의 전제라는 개념은 매디슨주의 논리 체계가 세워진 핵심 이유인데, 그것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의미는, 다수가 선거와 입법, 다수 지배라는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행동함에도 불구하고 소수에게서 자연권을 박탈해 버리는 식으로 행동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 P41

그렇다 하더라도 매디슨이 "제정"을 "자연권에 대한 모든 종류의 심대한 박탈을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고 보는 내 입장이 옳다면, 자연권 개념을 검토하지 않고 이 개념 정의의 유용성을 제대로 평가할 수는 없다. - P41

 우리에게 오직 필요한 것은, 내가 제시했던 전제의 개념 정의(이에 대한 유일한 대안[인 매디슨의 명시적인 개념정의]을 따르게 되면, 결국 매디슨에게 핵심적이었던 조건 1에 대한 부질없는변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였다)와 대략이라도 유사한 어떤 개이건, 그것이 매디슨주의 논리 체계에 유용한지의 여부다. - P42

다소 터무니없지만 만약 자연권을 모든 개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있는 권리를 의미한다고 정의하면, 모든 형태의 정부는 전제적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어떤 정부는 최소한 일부 개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억제하기 때문이다. - P42

 한가지 가능성은 공동체의 모든 개인(혹은 모든 성인)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믿는 그런 종류의 행위만을 제약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 행위에 대한 만장일치가 필요할 것이고 결국 통치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 P43

그래서 그런 다툼은 통치 과정을 통해 해결된다. 그런데 개인들의 의견이 다를 때, 일부 구체적인 행동을 처벌하는 것이 전제적인지의 여부를 결정하려면 어떤 규칙을 사용해야 하는가? 한 가지 가능성은 다수가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규칙이 갖는 몇 가지 문제점은 2장에서 검토하겠다. 그런데 이런 결정 방식이 바로 매디슨이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고, 게다가 다수의 전제라는 개념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거부해야 한다. - P43

XI

파벌에 대한 매디슨의 명시적 개념으로 돌아가 보면, 이 역시 전제정에 대한 [앞절에서 설명한] 내포적 개념과 똑같은 문제점들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다수"³⁴에 대항하는 견제 장치들이 헌법에 규정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옹호하려는 많은 다른 시도 속에 파벌에 대한 매디슨의 명시적 개념과 유사한 어떤 인식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이 개념도 어느 정도 검토해 볼 가치가 있다. - P44

34 그 어떤 국가에서건 그 어떤 사회조직에서건 그 언제이건, 일반적인 의미에서,
다수는 좀처럼 지배하지 않는다고 나는 믿는데, 이런 나의 입장을 보여 주기 위해서인용부호를 붙였다. 따라서 다수 지배에 대한 옹호뿐만 아니라 다수 지배에 대한두려움 역시 정치적 현실에서 실제 가능할 상황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기초를두고 있다. 이 점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5장을 볼 것. - P279

파벌에 대한 이 개념 정의가 갖는 문제는 "전제"에서 우리가 마주쳤던 것과 유사하다. 이 개념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 - P45

(전략)
이런 어려움에 처할 때 좀 다른 접근 방식을 시도해 볼 수도 있다. 파벌을 정의하는 특징들을 찾으려고 하는 대신, 파벌을 규정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어떤 정치적 과정을 통해 그렇게 할 수 있는지를 그려 보는 것이다. 이는 매디슨이 염두에 두었던 방식이 아니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 자신이 우리에게 어떤 길잡이도 남겨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길을 따라가 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 P45

그러나 만장일치가 필요하지 않다면 그보다는 덜 엄격한 다수결로 충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무엇이 파벌이라 할 수 있는지를 다수에게 결정하게 하고, 그 파벌에 대항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고 하자. 이 경우 현실적으로 다수는 결코 파벌일 수가 없다. - P46

만장일치와 다수결에 의한 결정 모두를 배제하고 나면, 유일하게 남는 대안은 어떤 소수가 이 문제를 결정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하지만 이런 힘을 다수에게 부여하는 것에 반대하는 앞서의 논지는 분명 그 어떤 소수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 P47

XII

지금까지 보았듯이 "파벌"과 "전제정"이라는 용어가 그 어떤 구체적인 의미도 갖지 않기 때문에, (중략) 결국 이들은 그저 검증 불가능한 주장에 머문다.
하지만 이 가설들을 이런 식으로 매몰차게 대해 버리는 것은 나도 그렇지만 독자들도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 P48

다음과 같은 방식이라면 어려움을 피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선 자유의 박탈은 최소화되어야 한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외부의 제약 없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개인의 자유"라고 정의하자. - P48

(전략), 예를 들어, 설령 범죄자들이 상당한 크기의 집단이라 하더라도 그들에게 거부권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예외가 허용되면, 여러 개인들이 예외로 치부될 것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전제정과 파벌에 관한 앞서의 논의들에서 보았던 그 딜레마의 미로에 갇힌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이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서 매디슨주의 원칙들과 모순되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따라서 모든 소수가 아니라 일부 소수에게만 효과적인 거부권을 부여할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 P49

다수는 정책 결정 단계에서 쟁점들에 관해 정치적으로 소극적이라할 수 있는데,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일단 제쳐 두면, 아주 좁게해석하는 한 가설 8은 타당하다. 여기서 좁게 해석한다는 의미는, 이 가설이 다수는 소수보다 단 한 사람이라도 많으면 충분하다고 명확하게 밝혀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 P49

그런데 다수의 자유를 증대할 목적으로 제안된 그 조치를 거부권을 가진 소수가 싫어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소수는 이 거부권을 사용해 다수의 자유에 대한박탈을 온존시킬 수 있고, 결국 다수에 대해 전제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³⁵ 
아동노동, 저임금, 열악한 주거 상황, 게다가 제대로 된 노동조합이나 사회보장정책, 빈민가 재개발사업 등의 부재 등, 이 모든 문제는 자신들의 자유가 심각하게 박탈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다수는 믿을지도 모른다.
(중략)
그렇다면 가설 8은 오류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공화주의 원칙"이, 소수가 다수를 박탈하는 것을 방지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P50

XIII

 하지만 매디슨 자신이이 가설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사용했던 주장을 검토해 보면, 분명히이 가설(가설 9)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즉, 전체 유권자가 아주 많고, 널리 퍼져 있고, 다양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면, 어떤 다수이건 그효력은 크게 제한된다. 이런 제약은 그 다수가 파벌적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동일하게 적용된다. - P51

XIV

헌법 제정 당시에 매디슨주의의 주장은, 자신들의 첨예한 적대자들-즉, 부지위·권력에서 열등하지만 스스로 "민중의 다수"를 구성한다고 생각했던 기능공과 농부들을 불신하고 두려워하고 있던, 부지위·권력을 가진 소수에게 만족스럽고 설득력 있고 보호해 줄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역사적으로 납득이 가는 이유들때문에) 정치적으로 적극적인 압도적 숫자의 미국인들이 적어도 어떤 시기에는 자신들도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소수 - 더욱이 헌법상 보장된다수의 권위가 법률적으로 제한되지 않으면 자신들의 목표가 위협받을 수도 있는 소수에 속하게 된다고 믿고 있을 개연성이 크다. - P52

 한편에서 보면, 매디슨은 공화정의 모든 성인 시민들은 정부 정책의 일반적인 방향을 결정하는 권리를 포함해, 동등한 권리를 부여 받아야 한다는 개념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의미에서 다수 지배는 "공화주의 원칙"이다. 다른 한편으로 매디슨은 헌법상 제약되지 않는 다수는 아마도 지위·권력·부에서 갖는 특정 소수의 우위를무기한 허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 소수의 자유를 보장할 정치체제를 세우고 싶어 했다. 따라서 다수는 헌법상 억제되어야 했다. - P53

두 번째 대안은 정치적 평등을, 극대화할 목표로 삼는 것, 즉 공화정의 모든 성인 시민이 정부 정책을 결정하는 데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부가 결정을 내리려면 어떤기본 조건들이 존재해야 하는가? 이것이 이제 우리가 살펴볼 대안이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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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절 정의의 질서 안에서는 노동은 소유를 파괴한다.

고립된 인간은 자신의 욕구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만족시킬 수있을 뿐이다. 그의 모든 힘은 사회 안에 있으며 모든 사람들의 노력의 현명한 결합 속에 있다. 노동의 분업과 협업은 생산물의 양과 종류를 증대시키며, 기능의 전문화는 소비재의 질을 높인다.
따라서 수천의 여러 생산자들의 생산품으로 살지 않는 자는 한명도 없다. - P223

 농사꾼의 수확은, 다른 이들이 그를 위해 헛간, 수레, 쟁기, 의복 따위를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학자에게 서적상이 없었다면, 출판업자에게 주물공과 기계공이 없었다면, 그리고 이들 모두에게 또 다른 많은 일꾼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진부한 말을 늘어놓는다고 핀잔할 터이니 더 이상 길게 명단을 나열하지않겠다. 나열하기란 너무 쉬운 일이니 말이다. - P224

생산자 자신은 자기가 만든 생산물의 아주 작은 부분에 대해서만 권리를 가지며, 그 전체 분모는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수와 맞먹는다. 반면에 이 생산자는 자기의 것이 아닌 모든 다른 생산물에 대해 권리를 가지며, 따라서 모든 다른 이들에 맞서 일종의 저당권을 갖는 셈이다. - P224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을 다 쓰지 않고 절약할 경우 누가 감히 그와 다툴 것이냐라고. 노동자는자기 노동의 값어치에 대한 소유자조차 아닐뿐더러 그것을 결코마음대로 처분할 수도 없다. 잘못된 정의(正義)에 속아 넘어가지말자. 자신의 생산물에 대한 대가로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가 행한 노동에 대한 보수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노동에 대한 지급이자 선불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 P225

결론을 맺자.
일하는 자는 누구나 사회에 대하여 필연적으로 지불불능 상태로 죽어 가는 채무자이다. 소유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수탁을 부인하고 일수, 월수, 연수로 보관료를 받기를 원하는 불성실한 보관자이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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