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보았다. 검게 그을린 철판을 자세히보니 로크 바닥에 지름이 2미터쯤 되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중략) 마샬이 말했다. "그렇네. 저게 갤러허일세. 머더홀(밀폐된 공간에 화력, 무기 등을 쏟아부어 침입자의 절멸을 꾀하는 전술 옮긴이)을 발동할 수밖에 없었네." - P143
"나머지 인원들은 도보로 15분 이내에 보조 로크로 탈출할 준비를 해 두고, 듀건, 놈들의 정체가 무엇이고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려면 실험실에 표본을 마련해야 할 거야." 마샬은 미소 지었지만 행복해 보이기보다는 오싹한 느낌이들었다. "제군들, 이제 사냥이 시작되겠군." - P146
듀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중략)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나도 나름 무장하고 있었지만 추운 날씨를 이겨 내기 위한 방한복만 몇 겹 입고 있었다. 듀건은 양 허리춤의 권총집에 버너 두 개를 차고 있었다. 나는 선형 가속기 하나만 가지고 있었다. - P147
듀건이 말했다. "조언은 고마워. 하지만 그것들이 갤러허 다리에 무슨 짓을 했는지 내 눈으로 봤어. 방한복 말고 그것들을 막을 수 있는 확실한 보호막이 필요할 것 같은데." "갤러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봤지? 메인 로크 바닥에무슨 짓을 했는지도 봤어?" - P148
"이해해. 너한테는 별거 아니겠지. 그래도 이해해 줘. 우리는 죽어도 리셋 버튼을 눌러 다시 살아날 수 없어. 우리한테 죽음은 그냥 끝이야. 그래서 난 전투복이 필요해." 나는 웃음이 났다. "리셋 버튼이라고? 재생 탱크에서 나오는게 그렇게 간단한 일 같아?" - P148
마지막으로 행성 토착 생명체가 착륙을 방해한 것은 거의200년 전, 여기에서 동쪽으로 50광년 떨어진 우주에서였다. - P149
개척지에 착륙한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개척민들은 무언가에 쫓기기 시작했다. 미지의 생명체가 바람에 실려 와 노출된 피부를 파고들었고, 그러면 가려운 발진이 돋다가 고름이 찬 물집이 생기고 결국은 패혈증에 걸려 죽게 되었다. 모래속에 굴을 뚫고 사는, 갑옷도 뚫을 만한 송곳니가 달린 불가사리 같은 생명체도 있었다. - P150
그 행성에 살던 생명체는 대부분 개척지 주민들의 방어를 뚫을 수 있도록 진화한 것 같아 보였고, 로어노크 사령부에서 개척지가 잠식당하기 전 기록을 전송해 둔 덕분에 우리는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정작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 P151
그들은 결국 지상 기지를 단단히 걸어 잠그고 최대한 조심하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연구해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돔 안에서 무언가 번식하기 시작한 뒤였다. 사령부에서는 멸균 프로토콜을 대여섯 차례 시도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들은 어떻게 해도 되살아났고 결국 복제한 익스펜더블이 개척지 전체 인구를 채우게 되었다. 중앙 프로세서는 아미노산이 모자라게 될 때까지 익스펜더블을 찍어 냈다. 마지막까지 살아 있던 익스펜더블 중 하나는 죽기 직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희미하게마나 짐작할 수 있었다. - P151
나는 눈밭으로 걸어 나가며 200번 넘게 고쳐 죽은 로어노크의 익스펜더블 제롤을 생각했다. 로어노크의 토착 생명체들은 개척민들에게 어떤 경고도 하지 않았다. - P152
캣이 물었다. "저기, 가속기를 챙긴 거야? 난 다들 버너를 가져오는 줄 알았는데." (중략) "별 이유는 없어. 그냥 감으로 선택한 거지." 내가 대답했다. - P153
어차피 호흡기에 가려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미소 지었다. "맨날 똑같은 무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놈들한테 두 번이나 당했어. 그래서 이번에는 반대로 해 본 거야." 그녀는 끄덕였다. "알겠어. 굉장히 철학적이네." "뭐, 저승문을 몇 번 두드리다 보니." "그렇네. 극락을 찾아가는 중이겠구나?" 농담하기에 좋은 때는 아니지만 상관없었다. - P154
캣이 말했다. "있잖아, 여태 너랑 대화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아닌가?" 나는 다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듀건을 주시한 채로 손은 버너에 올려 두고 있었다. "없어. 적어도 내 기억으로는." - P155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일이 터지기 전 10분 동안 듀건 옆에서 걷고 있던 다른 경비대원 두 명이 듀건의 다리에 버너를 겨냥했다. 듀건은 처음에는 그들을 부추기는 듯했다. 하지만 갑옷이 벌겋게 달아올라 물렁해지면서 크리퍼의 이빨은 그의 다리에 점점 더 깊이 박혔고, 눈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증기가 올라와 시야에서 크리퍼들이 가려지자 듀건의 고함은 비명으로, 비명은 절규로 바뀌었다. 나는 그를 중심으로 빙 둘러 옆으로 이동했다. 한 30미터쯤 떨어진 곳에 회색 화강암이 눈을 뚫고 올라와 있었다.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 P157
경비대원 둘은 아직 따라오고 있었지만 각각 크리퍼 둘에게 쫓기고 있어서 얼마 못 가 잡힐 것 같았다. (중략) 나는 가속기를 조준한 뒤 발사했다. 가속기 반동 때문에 캣이 있는 곳까지 밀려났다. 그 순간 크리퍼의 앞쪽 세 마디가 산산조각 나며 파편이 되어 날렸다. "젠장, 철학자가 맞았네?" 캣이 말했다. 다른 경비대원들이 아래에 있었지만 눈밭 아래에는 꿀렁이는 움직임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 P158
"샘플 얻었어?" 통신기 너머에서 베르토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체 일부만." 나는 바위 아래로 뛰어내려 크리퍼의 잔해를 집어 들었다. 베르토는 이미 구조용 갈고리를 내리고 있었다. - P158
10장
이쯤 되면 마샬이 왜 시키는 건지 알 수 없는 자살 임무는 일상의 일부가 된 지가 오래였다. (중략) 나는 가끔 젬마가 익스펜더블의 삶이 어던 것인지 내게 ‘제대로‘ 알려 주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중략) 우주선에는 미드가르드가 그간 쌓아 온 상당한 자본이 투입되었고 시스템 설계자는 우주선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폭발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내가 상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처럼 심심풀이로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어 보였다. (중략) 하지만 이 보호막도 티끌 알맹이보다 큰 물체와 충돌할 때의 충격은 견디지 못했다. 드라카를 만든 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태양권 경계를 지나고 나면 티끌 알맹이보다 큰 물질은 거의 없다시피 하며 대형 물체와의 충돌로부터 우주선을 보호할 수 있을 만큼 튼튼한 보호벽은 존재하지 않는다. - P163
다행히도 우리와 부딪힌 물체가 그 정도로 크지는 않았다.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는 모른다. 충돌 후 충격으로 쿼크(양성자, 중성자와 같은 소립자를 구성한다고 여겨지는 기본 입자 옮긴이)와 글루온(쿼크 간의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입자옮긴이)으로 쪼개졌기 때문이다. 질량이 15~20그램 사이인 물체였다는사실은 알아냈다. - P164
매기 링이 내게 할 일을 설명하는 동안 그녀의 부하 직원두 명이 나를 진공 슈트 안에 밀어넣었다. 매기 링이 말했다. "전력 결합 장치가 타격을 입은 것 같아요. 확실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당신이가서 전체 유닛을 교체해요." - P165
"다 끝나면 예전 엔진은 되도록 가져오고요." "되도록이요?" "네. 그 전에 죽지 않는다면 말이에요. 그쪽 구역은 현재 외부에 노출되어 있어요. 이 유닛이 작동할 때까지 3.5초마다 온몸으로 치사량의 방사능을 흡수하게 될 거예요." - P165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큐브 윗면에 주변이 검게 그을린 지름 2~3센티미터쯤 되는 구멍이 나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니천장 쪽에 약간 더 큰 구멍이 나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이 구멍으로 새어 들어와 마치 스포트라이트처럼 망가진 유닛을 비췄다. 그때부터 피부가 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매기와 젬마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의 몸은 경이로울 정도로 급성 방사능 중독에 천천히 반응한다. - P167
이승으로 나를 다시 데려가 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 몸을 덜덜 떨며 공중에 떠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달달 부딪는 이 사이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죽기 전에 반드시 업로드를 하라고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있었다. 젬마도 이야기한 적 있었다. 치명적인 상황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하며, 내 재생본 하나가죽는다고 해서 그 죽음과 함께 사라져서는 안 됐다. 하지만 잊는 편이 더 나은 것들도 분명 있다. - P169
(전략)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은 다음 날 아침 미키3로 재생 탱크에서 나오자마자 슈트 카메라에 찍힌 영상 기록을 보고 들은 뒤에야 알 수 있었다. 내가 에어 로크로 돌아가다 말고 멈추더니 목 부분에 있던 헬멧 밀폐 장치를 풀고 우주에 내 맨얼굴을 드러냈던 것이다. - P171
11장
그가 말했다. "미안. 비난하려던 건 아니었어." "퍽이나 변명 잘 들었어." 이 말했다. 베르토는 리프터 전원을 내리고 비행 종료 체크리스트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중략) "밖에서 일어난 일은 정말로 유감이야. 할 수 있었으면 당연히 경고했을 거야. 그것들이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눈밭 아래로 다니는 게 아닌 것 같아. 마지막으로 너희쪽을 지날 때 레이더에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었는데 1분도 안 돼서 공격이 시작됐어." - P173
"설명이 필요하겠군. 두 시간 만에 대원 세 명을, 갤러허를 포함하면 네 명, 토리첼리까지 포함하면 다섯 명을 잃다니 이해할 수가 없는데 말이야. 정작 자네는 살아 있고." 마샬이 말했다. (중략) 내 말에 마샬이 벌떡 일어섰다. "그따위 태도는 뭔가, 반스! 자네는 익스펜더블이야! 살아남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존재라고!" - P175
마샬은 나를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자네말은, 내가 고메즈의 영상 기록에서 본 자네는 겁을 집어먹고 비굴하게 살려고 도망치는 게 아니라 임무를 완수하고 개척지를 보호하기 위해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이건가?" 나는 캣을 쳐다봤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 그렇습니다만?" - P176
"그럼 가속기를 챙겨 나간 이유는 뭐지?" "가장 큰 이유는 버너보다 가속기 사용하는 법을 더 자세히 배웠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전에 크리퍼를 마주쳤던 두 번의 임무에서 버너를 가지고 있었지만 두 번 다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전략을 바꾸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입니다." 마샬의 눈썹이 미간으로 모였고 잔뜩 오므려진 입술은 거의 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 P177
마샬은 책상에서 몸을 뒤로 젖히고 짧게 자른 희끗희끗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전략) 첸, 지금 상황에서 자네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자네가 반스와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는 의심이 들어 그랬다면 출격 전에 보고했어야 하네. 다음부터는 임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개인적인 사정이 생기면 잊지 말고 사령부에 보고하게나." 캣이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마샬은 한 손을 들어 묵살했다. "듣고 싶지 않네. 앞으로 누구와 어울릴지 결정할 때는 좀더 신중하게." 사령관의 시선이 나에게서 캣으로 옮겨 갔다가 다시 나에게돌아왔다. - P179
"그러니까 마샬은 우리가 잤다고 생각하는 거지?" 캣은 어두운 표정으로 도끼눈을 뜨고 말했다. "엿이나 먹으라 그래" "와우, 말이 좀 심하네. 익스펜더블이랑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는 게 그렇게 싫어?"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중략). 짜증이 났던 건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호르몬 때문에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처럼 말하니까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지. 너한테는 그따위로 말하지 않았잖아. 아냐?" - P180
나는 내 머그잔을 그녀의 잔에 부딪혔고, 우리는 각자 잔에든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가 물을 마시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나는 그녀의 접시에서 토마토 하나를 잽싸게 집어 그녀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내 입속에 쑤셔 넣었다. - P181
"그래서 사령부와는 이야기가 잘 끝났어?" 나샤가 물었다. 나는 나에게 자리를 내주려고 옆으로 물러나 앉았다. 그녀는 벤치를 넘어와 자리에 앉았다. 내가 말했다. "웅, 뭐 적당히 잘 끝난 것 같아. 마샬이 나를시체 구덩이에 빠뜨리겠다고 위협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어." - P182
캣이 대답했다. "고마워. 이미 고메즈에게 물어보기는 했지만………… 혹시 그것들이 우리를 공격하기 전에 낌새가 있었어? 갑자기 공중에서 튀어나올 수는 없는 거잖아, 안 그래?" 나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었어. 가시광선, 적외선, 지표 투과 레이더를 다 돌리고 있었는데, 내가 너희 위를 지날 때는 아무 위협도 감지되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어." - P183
내가 말했다. "아주 좋았지. 다섯 사람이 더 죽어 나갔으니 곧 너도 온전히 네 몫을 할 수 있을지도" "그래? 우리가 항상 소시오패스였던 거야, 아니면 업로드를 거치면서 얻은 기능이야?" 에잇은 태블릿을 책상 서랍에 넣고일어서서 기지개를 켰다. "방금 우리가 소시오패스였던 거냐고 했냐?" - P185
"그래서 말인데, 내가 방금 100킬로칼로리를 먹고 오는 길이야. 오늘 치 남은 배급이 200킬로칼로리밖에 안 남았다는 소리지. 미안"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좋은 놈인 척하려니 힘들었나 보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그러지 마. 네가 낮잠 자는 동안나는 거의 죽을 뻔했어. 그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잖아." "내가 아직 이 말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나는 지금 말그대로 배고파서 죽기 직전이야, 세븐" - P186
에잇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머더홀이라니, 뭣 때문에?" (중략) "말을 좀 제대로 들어. 크리퍼가 바닥을 뚫고 침입했다니까." 침입‘이라면......?" "구멍을 뚫고 들어와서 바닥을 뜯기 시작했다고." "뜯어? 네 말은 놈들이………… 바닥을 가져가려고 했다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것 같아. 이 행성에는 금속이별로 없잖아. 필요했나 보지." - P187
"뭐, 뚫는 장면을 본 건 아니야. 대원들 전투복에 크리퍼가 붙어 있었고, 대원들은 살아남지 못했어. 전투복에 구멍이 뚫렸으리라는 건 내 추측이지." 에잇은 한쪽 팔꿈치에 체중을 실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인채 반쯤 일어났다. "말도 안 돼. 생명체는 환경에 필요 없는 능력을 갖추도록 진화하지 않아. 얼음을 뚫고 사는 벌레가 10그램짜리 선형 가속기 탄환을 방어하라고 설계된 갑옷을 뚫도록 진화했을 리가 없잖아?" - P188
12장
미키2는 가장 짧게 산 재생본이었다. 미키3는 가장 길게 산 재생본이었다. 원에게 일어난 일에 무뎌지기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첫 키스는 평생 기억에 남는 법이니까. 첫 죽음 역시 절대 잊히지 않는다. - P192
드라카 같은 우주선을 타고 여정을 시작할 때 사람들은 여정의 끝에 뭐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반물질 물리학에 따르면 반물질은 충분한 양이 모여야만 동작하고, 생산이 엄청나게 어려울 뿐만 아니라 비용도 많이 든다. - P193
개척지 우주선에서는 데이트하기가 힘들다. 할 수 있는 활동에 선택지가 별로 없다. 같이 밥을 먹을 수는 있지만, 시장통 같은 곳에서 플라스틱 병에 담긴 음식을 빨며 마찬가지로 플라스틱 병에 담긴 음식을 빨고 있는 다른 사람과 부딪히지 않도록 케이블에 묶여 있는 상황에서 로맨틱함은 기대하기가 매우 힘들다. 같이 걸을 수는 있다. - P201
(전략), 만약 필드생성기 유닛에 다시 한번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를 자꾸 생각하게 되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로공황 상태에 빠지는 것도 역시 로맨틱한 분위기와는 거리가멀다. 그래서 보통은 섹스를 했다. 그렇지 않을 때는 대부분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샤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중략). 나샤의 가족은 30년 전 난민 신분으로 잃어버린 희망을 타고 미드가르드에 도착했다. 그들은 새로운 희망이라는, 미드가르드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행성 거주민들끼리 살육전이 일어나 폐허가 된 행성 출신이었다 - P202
정부는 이민자들에게 기본 소득을 배정하고 살 곳을 지정해 주었지만, 이들이 멀쩡한 직업을 찾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착륙한 지 2년이 지나고 스무 명 남짓 되는 이민자들이 농성을 시작했고, 농성은 곧 시위가 되었다가 작은폭동으로 바뀌었다. 그 후에는 이민자 자녀가 일반 학교에 들어가는 것조차 녹록지 않게 되었다. 그즈음 나샤가 태어났다. - P203
13장
꼬박 30분 동안 애를 쓰다가 결국 포기하고 침대를 빠져나와, 카페테리아로 가 책이나 읽으려고 책상에 있던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는 가끔씩 지나다니는 경비대원을 빼면 복도에 아무도 없다. - P207
새로 읽을거리를 찾아 몇 분 동안 자료실을 뒤졌다. 그다지 흥미로워 보이는 자료가 없었고, 결국 호기심으로 새로운 희망 행성과 관련된 파일을 선택했다. 내 삶을 비관하며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한 이후로 새로운 희망 행성에 관한 자료를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 P208
자료를 읽기 시작한 후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상당히 다른관점으로 이야기가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교에서는 전쟁에 여러 이유를 붙였기에, 나는 인종이니, 종교니, 자원이니 정치 철학이니 하는 으레 시민전쟁의 원인이 되는 문제들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으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 P209
마지막 10분을 카운트다운한 끝에 스캐너에 오큘러를 스캔할 수 있었다. 머그잔에 사이클러 페이스트와 함께 같은 양의 기대와 역겨움을 담고 있는데, 인사과에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늘 배정된 임무를 알리는 메시지였다. - P210
[CChen0197]: 안녕 미키, 오늘 근무자 명단에 네 이름이 있더라. 나도 보안 경계선으로 나갈 거야. 파트너 안 필요해? 어제 우리 꽤 잘맞았잖아.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에잇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Mickey8]: 뭐, 저걸로 결정된 거네? 나는 어제 네가 첸이랑 뭘 했는지모르잖아. 5분만 이야기하면 다 들통나지 않겠어? 당연하지. 그러니까난 다시 잘게 알았지? 이따 어땠는지 알려 줘. - P211
이 말했다. "이해가 안 돼, 난 어제 널 봤다고. 너도 우리만큼 죽고 싶어 하지 않았어. 내가 알기로 너는 불멸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사실을 믿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단 말이야." - P212
"너 종이 파쇄기에 손 넣어 본 적 있어?" 캣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라고? 당연히 없지." 나는 벽에서 가속기를 내려 충전이 되어 있는지, 장전이 되어 있는지 확인했다. "왜? 죽지는 않잖아. 그리고 의수가 네 진짜 손보다 더 튼튼하기도 하고, 의료팀에서 몇 시간만 손보면 너는 새것처럼 다시 태어날 텐데." "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 P213
철탑은 보안 경계선을 빙 둘러 100미터 간격으로 서 있었다. 느릿느릿 다음 철탑에 도착했을 때 오큘러에서 알람이 울리더니 다른 두 팀보다 우리 팀의 이동 속도가 더 빨라서 속력을 10퍼센트 늦춰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 P216
오큘러에서 다시 알람이 울렸다. 더 나아가지 말고 12분을 기다리라는 사령부 명령이었다. 캣은 한숨을 쉬면서 철탑에 등을 기대고는 50미터 정도 떨어진 자리에 눈 더미 밖으로 불룩 튀어나온 바위를 향해 가속기를 조준하며 말했다. "미드가르드에서 기초훈련 받을 때 이후로 한 번도 쏴 본 적이 없어. 기억이 나야 할 텐데." 이 말했다. "겨냥하고 쏘면 돼. 타깃팅 소프트웨어가 다 알아서 하니까. 그리고 사출구가 커서 어차피 다 죽어" 내가 말했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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