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쇼 무대에 두세 번 등장한 것만으로 레이코는 다른 디자이너들의 주목을 받았다. 반년 후 가을 컬렉션에는 벌써 일류 디자이너들이 레이코의 스케줄을 놓고 쟁탈전을 벌였다. 그리고 석 달 뒤에는 일본 패션계의 원로 다지마 신지가 병상의 몸을 이끌고 레이코를 위해 서른 벌의 이브닝 드레스를 디자인했다는 게 알려지면서 큰 화제를 불렀다. - P117
인기를 얻은 것과 함께 레이코에 대한 나쁜 소문이 떠돌았다. 건방지고 변덕스럽다, 제멋대로 군다, 젊은 디자이너의 일 따위는 태연히 펑크를 낸다,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면 일부러 개막직전에야 나타나 관계자들을 힘들게 한다. 그런 소문이 결코 근거 없는 가짜 뉴스가 아니라는 것을 그너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해준 걸 고맙게 생각했는지 그녀 앞에서는 딱히 불만을 토로하는 일도 없었고 그녀가 연락하면 언제라도 스케줄을 조정해 쇼에 나와주었다. 다만 변덕스러운 데가 있는 건 사실이었다. - P117
데뷔하고 이 년 뒤, 대기업 섬유회사의 텔레비전 광고가 불씨가 되어 모델로서만이 아니라 스타로서도 인기에 불이 붙었다. - P118
인기가 폭발하는 것과 동시에 레이코는 하라주쿠의 맨션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때까지 매니지먼트를 해준 모델 클럽에서도 독립했다. 그전부터 하기 싫은 일은 태연히 펑크를 내고 반쯤은 이미 독립한 모양새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일했었다. - P118
(전략). 그때 웨딩드레스를 입기로 정해진 모델은 이케지마 리사였다. 레이코의 기분을 풀어주겠다고 톱 모델 리사를 화나게 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달래보려고 했지만 결국 레이코는 쌩하니 대기실을 나가버렸다. (중략). 그래도 레이코를 잃고 싶지 않아서 그런 행동까지 눈감아줬지만, 그 무렵의 오만함에는 아직 어딘가 천진한 데가 있었다. 펄펄 뛰며 화를 내도 다음에 만나면 웃는 얼굴로 죄송하다고 순순히 사과하고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유난히 애교를 떨며 매달렸다. - P119
. 레이코가 문득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쇼 무대처럼 춤을 추면서 물었다. "생각나요, 이거? 당신이 처음 내게 입혔던 옷인데." (중략). "이 옷, 너무 싫어. 옷뿐만이 아니야. 이걸 디자인한 중년 아줌마도 진짜 싫어." 미소와는 다르게 전혀 딴 사람 같은 목소리였지만, 너무도 갑작스러운 말이라서 그녀는 농담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P120
"나는 돌아가신 다지마 선생님이 디자인한 옷이 아니면 좋아하지 않거든요." "어, 어떻게 그걸 네가 갖고 있어?" 저절로 신음 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 P120
한눈에도 다지마 신지의 손에서 나온 디자인임을 알아볼수 있는 스케치였다. "어떻게 된 거야, 돌아가신 선생님 그림이잖아?" "마지막에 병문안을 갔을 때 나한테 주셨어요. 나를 위해병실에서 아무도 몰래 그리셨대요. (중략), 어쩐지 꺼림칙해서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고 그냥 넣어뒀죠. 근데 요즘 당신이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이 옷, 만들어 봐요, 내가 쇼 무대에 입고 나가줄 테니까." - P121
"다지마 선생님 작품이라는 거, 아무도 몰라요. 걱정할 거없어요." 레이코가 그렇게까지 말해줬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다음컬렉션에 그걸 쓰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이런 디자인을 사장시키는 건 너무 아깝다, 라는 것이 타인의 디자인을 도용하는 꺼림칙함에 대항 그녀의 변명이었다. - P121
. 선 하나하나가 온전히 레이코만을 위한 것이어서 레이코가 드레스를 돋보이게 하고 드레스 또한 레이코를 돋보이게 했다. 자신은 이만큼 레이코에게 잘어울리는 드레스는 만들지 못한다고 깨달았다. 다행히 아무도디자인에 의심을 품는 일은 없었다. 레이코가 그걸 들고 왔던 날, 밤을 새워 모조리 자신의 손으로 다시 그리고 다지마의 원화는 불태워버렸다. 그런데 그 그림들이 다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내가 복사해뒀거든요." - P122
레이코는 유리잔의 술을 옷자락에 쏟더니 라이터로 불을붙였다. 검은 레이스가 불꽃이 되어 타올랐다. 진홍색과 검은색의 두 가지 불길이 뒤섞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대로 레이코는 놀라서 멍해져 버린 그녀에게 덮치듯이 안겨들었다. "철저히 파멸시켜드릴게." - P123
옷에 붙은 불이 꺼지자 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디자인 복사본을 움켜쥐고 라이터를 켰다. 복사본 한 장이 화라락타면서 불꽃의 파편이 허공을 날았다. "그래봤자 소용없어요." 바닥에 쓰러진 레이코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따로 사진을 찍어뒀거든요. 얼마든지 태워보세요." - P124
나는 다지마의 디자인을 도용한 적도 없고, 그것 때문에 그 아이에게 협박을 받은 적도 없다. 그건 모두 다 거짓이다... "네, 얼마든지 찢으세요. 태워보시라고요. 또 인화해드릴테니까." 그 아이가 한 달에 두 번은 그녀를 불러내 트럼프 카드처럼사진을 펼쳐놓고 미소를 지어가며 마치 노래하듯이 위협하는 것을 그저 굴욕감을 곱씹으며 꾹꾹 참았던 것도. - P124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그 필름, 나한테 팔아. 내가 돈은 얼마든지 줄게." 그녀가 매달리듯이 애원했던 것도 전부 다 거짓이다. 그때 자신만 화상을 입고 그 아이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그것도 거짓이다. - P125
그녀는 호텔 방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로비와 연결된 행사장은 두툼한 문세 개가 나란히 이어졌다. (중략) 아나운서의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로즈룸의 문을 열려다가 문득 ‘오늘 오후 4시, 도쿄 세타가야구 세이조에서 월드섬유회사 사장 사와모리 에이지로 씨가 엽총으로 자살했다고 합니다.‘라는 뉴스가 귀에 들어와 그녀의 몸을 돌렸다. (중략) 레이코가 광고 모델로 출현한 섬유회사 사장이다. - P125
저도 모르게 목까지 튀어나온 비명을 가까스로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프런트 직원이 의아한 듯 이쪽을 쳐다보는 것을깨닫고 그녀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미소를 짓고 텔레비전 앞을 떠났다. 거짓말이야! 그렇게 소리치려고 했던 것이다. - P126
그녀는 천천히 뒷손으로 문을 닫았다. 그날 밤에도 그랬다. 그날 밤에도 그녀는 장갑을 낀 손으로 천천히 침실 문을 뒷손으로 닫았다. 너무 힘을 주는 바람에 오른쪽 손목의 화상 자국이 방금처럼 욱신거렸다. 힘을 주지 않으면 그 아이가 다시 침대에서 일어나 금세라도 거실로 나올 것만 같았다. (중략) 그러고는 거실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의사의 물건만남기고 자신의 것은 지문까지 모조리 그 방에서 지워버려야 했다. 하지만 왜 그랬을까. 왜 그런 짓을 했을까. - P127
유서는 거짓말이야! 그 키 작은 젊은 사장이 범인일 리 없어. 바보 같은 중년 의사도 범인이 아니야. 아무도 레이코를 죽이지 않았어....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공간의 너무도 차가운 공기는그녀에게 더 이상 어떤 거짓도 허락하지 않았다. - P128
그렇다, 나는 다지마 선생의 디자인을 훔쳤다. 그것 때문에그 아이에게 협박을 당했다. 팔 개월 동안 고통을 받았다. 그 아이는 정말로 내게서 모든 것을 앗아갈 작정이었다. 팔 개월 후인11월의 어느 날, 그 아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와 그야말로 신이 난 목소리를 냈을 때, 이제 협박 놀음도 끝이라는 것을 알았다. (중략) 그렇다, 내가 죽인 것이다. - P128
그리고 집을 나와 비상계단을 내려왔다. 이번에도 천천히한 단 한 단 확인하면서, 한 단을 내려올 때마다 거짓말이야, 라고 가슴속으로 중얼거리면서. - P129
그렇건만 오늘 아침에 전화한 사람은 어째서 내가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고 말했을까. 그자도 나와 마찬가지로 거짓말쟁이였을까. 그자는 대체 뭘 원하는 걸까. 키 작은 젊은 사장은 왜 유서에 자신이 그 아이를 죽였다는 거짓말을 남겼을까. - P129
7장, 누군가 誰か
요요기 공원 뒤쪽의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그는 다시 오늘 아침 전화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었다. (중략). 어째서 전화 목소리는 그런 말을 했는가. 어째서 사와모리는 유서에 미오리 레이코 살해를 고백했는가. - P132
오 년 전부터 사고라는단어를 들을 때마다 조건반사처럼 머릿속에 그런 차가운 회오리바람이 덮쳐들었다. 회오리 속에서 항상 그렇듯이 한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얼굴은 반절 넘게 찌그러졌다. 어렸을 때 점토로 엄마 얼굴을 만들다가 실패해서 바닥에 내던진 적이 있었다. - P132
오 년 전까지 그의 인생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스포츠카로고속도로를 쌩쌩 내달리는 식이었다. (중략). 그의 인생과 80킬로미터로 신나게 내달리던 차에 돌연 한 여자가 뛰어들었던 것이다. 급브레이크를 밟고 곧바로 차에서 내렸다. 길바닥을 껴안듯이 쓰러진 여자를 발견하고 삼 초쯤 망설였다. - P133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리는 곧 낫겠지만 얼굴은 도저히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어." "어떻게든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는 몰아붙이듯이 물었다. 방법만 있다면 돈은 얼마든지댈 생각이었다. - P133
"현재 국내 의료 기술로는 도저히 어렵지만, 이 의사라면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독일인인 듯한 이름을 알려주었다. 뉴욕의 유명한미용성형 외과의라고 했지만, 물론 그는 알지 못했다. "할리우드 여배우 중 몇 명은 그의 손이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들었어. (중략). 성형수술을 했다는걸 아무도 모를 정도야. (중략)." - P134
다행스럽다고 할까, 여자는 가족이 없었다. 아마 망가진 얼굴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지, 친척과 친구는 몇 명 있지만 어디에도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뉴욕에서 수술을 받게 해줄 테니까 이번 일은 경찰에 비밀로 할 수 있을까?" 그의 말에도 여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P134
독일인 의사는 예전에 브라질인지 어딘지에서 체포되었다는 나치 장교를 닮은 풍모였지만 선량한 미소를 지으며말했다. "나는 반드시 비밀을 지킬 테니 걱정할 거 없다고 말해주시오. 사고를 당하기 전의 얼굴 사진은 가져왔습니까?" 도쿄의 성형외과 원장이 뉴욕에 보낸 편지에는 곧바로 답장이 왔고, 거기에도 예전 얼굴 사진을 최대한 많이 가져오라는 지시 사항이 적혀 있었다. - P135
여자는 가방에서 그때 도쿄에서 그린 다섯 장의 자화상을꺼내 독일인 의사에게 내밀었다. "이게 예전 얼굴이에요." (중략). "이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로 만들고 싶지 않습니까?" 여자는 잠시 생각해본 뒤에 대답했다. "가능하면 더 아름답게 해주시면 좋겠어요." 의사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 지우개와 연필을들더니 그림 속 여자의 코를 약간 높이고 눈은 살짝 크게 하고 뺨을 깎아낸 뒤에 여자 쪽으로 내밀었다. - P136
삼일 동안 뉴욕을 구경하고 도쿄로 돌아왔다. 밤늦게 두사람은 도쿄의 한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한 뒤에 헤어졌다. 일본에 돌아가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는 여자에게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직 2백만 엔쯤 남았는데, 원한다면 줄게." 하지만 여자는 자기도 저금해둔 게 좀 있다면서 거절했다. - P137
"새로 방 구하면 연락해줄래? 그리고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여자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뿐, 그 뒤로 이 년동안 아무 연락도 없었다. 이 년 동안 여자가 어떻게 지내는지 그가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사고에 대해서는 얼른 잊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여자에 대한 것도 지워버리고 싶었다. - P138
유일한 구원은 여자 쪽에서도 사고에 대한 기억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지 그에게 아무 연락도 안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미모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서 여자쪽에서도 그를 피하고 싶을 터였다. 미오리 레이코는 성형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 P139
순간, 이 년 전 뉴욕의 의사가 여자에게 해준 것은 시술이아니라 마술이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잡지 사진에서 이미 여러번 봤지만 처음으로 직접 마주한 미소는 눈과 코와 입술을 악기삼아 완벽하게 조화로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 같았다. - P139
"오랜만이네요." (중략) 그는 상당히 술에 취한 여자를 집으로 데려갔다. "크게 성공했던데? 멀리서나마 응원했어." "그렇지도 않아요. 이 세계라는 게 별로 행복하지 않거든요." 여자는 미소의 그늘이 짙어지더니 그 표정 그대로 중얼거렸다. "외로울 때가 더 많답니다." - P140
"이방, 좋아요. 죽고 싶을 만큼 외로워지면 또 와도 돼요?" 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 "차로 데려다줄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밤거리 걷는 걸 좋아하니까 걸어서 갈래요." 그리고 계단에 의지하는 듯한 발소리를 울리며 돌아갔다. 차 조심해, 라는 인사를 하려다가 그는 급히 그 말을 꿀꺽 삼켰다. - P141
"괜찮아요, 돈은 남아돌 만큼 많으니까. 당신도 좋은 직장에 다니니까 경제적으로 힘들지는 않겠지만, 혹시라도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말해요. 수술비 천만 엔도 갚아줄까 했거든요." - P141
새 얼굴은 그녀가 그린 자화상의 선이 모두 없어진 건 아니었다. 친척이나 친구라면 예전에 자신들이 알던 아이와 미오리레이코가 많이 닮았다는 느낌은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평범한 얼굴이 이토록 아름답게 변하는 건 기젇 같은 일이라서 결국 딴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P142
"이 얼굴이 성형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당신뿐이에요." 술에 취해 그렇게 말한 것도 그날 밤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미오리 레이코의 얼굴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아는 사람은 그녀 자신과 그, 그리고 뉴욕의 의사뿐이었다. - P143
"하지만……." 그녀는 문득 생각난 듯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실은 한 명 더 있어요, 금세 알아본 사람이. 근데그 사람이 나를 협박하고 있답니다." 그런 위험한 얘기를 그냥 흘려 넘길 수는 없었다. - P143
"하지만 친지들이 예전의 너와 닮았다고는 생각해도 설마동일 인물인 줄은 모를 텐데? 레이코도 그렇게 말했잖아." "하지만 그 사람은…." 그녀는 하려던 말을 담배 연기로 얼버무렸다. "아이, 됐어요. 잊어버려요, 방금 한 얘기는." - P144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그녀가 ‘협박‘이라는 말을 내뱉은 것은 그때로부터 일 년 반이 지난 올해 3월이었다. 일년반 사이에 그와 미오리 레이코의 관계는 부쩍 친밀해졌다. 어느 날, 두 달 만에 찾아온 레이코는 그의 침대에 나란히누웠다. (중략) 먼저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은 그녀 쪽이었다. 그는 그 손을 미처 거절하지 못했다. - P145
벌거벗은 왼쪽젖가슴에 새겨진 검은 나비 문신이 같이 흔들렸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왜 그런 문신을 했어?" "글쎄 왜 그랬을까. 이케지마 리사라는 모델, 알아요? 그여자가 자기는 빨간 나비 문신을 했는데 똑같이 해보는 게 어떠냐고 가슴을 보여줬을 때, 이 어리석은 여자와 똑같은 곳까지 나를 떨어뜨리면 의외로 이 세계에서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마음이 들더라고요. 네, 맞아요, 그거예요." - P145
물론 그건 마음속 깊이 숨겨두었다. 하지만 작년 여름에 실수를 하고 말았다. 술기운에 취한 눈에 문득 그 흉물이 떠올라 저절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급히 아무 일도 아닌 척하며 다시 시선을 맞췄지만 이미 그녀의 차가운 옆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얼굴이 생각났군요. 당신도 역시 그런 거였어." 레이코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P146
그렇게 한참 동안 옆얼굴의 시선을 멍하니 발치에 떨구고있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되풀이하는 그의 변명이 통했는지 한참만에야 이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나, 정말 배배 꼬였나 봐." 그 뒤에도 그녀는 한 달에 한 번은 찾아와 그의 품에 안겼고 두 사람의 관계는 전과 다름없이 다시 반년 동안 이어졌다. - P147
"당신, 사람을 죽인 적은 없어요?" 있어, 라고 그는 대답했다. 술에 취했고 그녀가 평소보다더 기분 좋게 웃고 떠들었기 때문에 가벼운 농담쯤으로 털어놓은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농담은 아니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그건 살인이라고 할 수 없었다. 작은 과실이었다. - P147
차 안 가득 울리던 비발디 음악을 갑자기 꺼버리더니 그녀는 핸드백에서 다른 카세트테이프를 꺼내 스테레오에 넣고 한껏 볼륨을 높였다. 그와 동시에 남자 목소리가 엄청난 음량으로 터져 나왔다. 너무도 큰 소리였기 때문에 가까스로 알아들은 것은 "살인이라기보다 사고", "칠년 전"이라는 말뿐이었다. 테이프가 끝날 때까지 그게 자신의 목소리라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중략). "왜 이런 걸…" 그때까지도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그는 물었다. மய - P148
"내가 핸드백 속에 녹음기를 감춰뒀거든요. 당신이 뭔가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근데 사람을 죽인 것까지 털어놓을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탐정에게 조사를 의뢰했더니 당신이 고백한 대로 칠 년 전 4월에 한 사람이 죽었더라고요. 오키 쇼지라는 한창나이의 회사원이라던데?"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담겼지만 룸미러 속의 두 눈은 번뜩이면서 운전석에 앉은 한 마리 사냥감을 노려보고 있었다. "더 빨리 달려요. 나를 쳤을 때와 똑같은 속도로!" 그녀는 외치듯이 말하고 테이프를 되감더니 다시 스위치를 눌렀다. 이번에는 더욱더 볼륨을 높여서⋯⋯ - P149
그녀가 죽었는데도 여전히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아니, 어차피 그녀가 살아 있을 때도 이건 헛수고였다. 아무리 밤늦게 집에 돌아가도 그녀는 그가 받을 때까지 계속해서 전화벨을 울려댔으니까. - P149
그리고 이번 11월 중순, 한밤중의 드라이브와 테이프 목소리와 협박의 말도 이제는 단조롭게 느껴질 만큼 지쳐버린어느 날 밤, 그녀는 전화를 걸어 노래라도 하듯이 말했다. "파리로 떠나기 전에 당신 일도 깨끗이 정리할 거야." 그는 걸음을 옮기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그런 건 떠올리지 말자. 그보다 오늘 아침 전화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오늘아침의 그 기묘한 전화의 의미를..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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