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쇼 무대에 두세 번 등장한 것만으로 레이코는 다른 디자이너들의 주목을 받았다. 반년 후 가을 컬렉션에는 벌써 일류 디자이너들이 레이코의 스케줄을 놓고 쟁탈전을 벌였다. 그리고 석 달 뒤에는 일본 패션계의 원로 다지마 신지가 병상의 몸을 이끌고 레이코를 위해 서른 벌의 이브닝 드레스를 디자인했다는 게 알려지면서 큰 화제를 불렀다. - P117

인기를 얻은 것과 함께 레이코에 대한 나쁜 소문이 떠돌았다. 건방지고 변덕스럽다, 제멋대로 군다, 젊은 디자이너의 일 따위는 태연히 펑크를 낸다,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면 일부러 개막직전에야 나타나 관계자들을 힘들게 한다.
그런 소문이 결코 근거 없는 가짜 뉴스가 아니라는 것을 그너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해준 걸 고맙게 생각했는지 그녀 앞에서는 딱히 불만을 토로하는 일도 없었고 그녀가 연락하면 언제라도 스케줄을 조정해 쇼에 나와주었다. 다만 변덕스러운 데가 있는 건 사실이었다.  - P117

데뷔하고 이 년 뒤, 대기업 섬유회사의 텔레비전 광고가 불씨가 되어 모델로서만이 아니라 스타로서도 인기에 불이 붙었다.  - P118

인기가 폭발하는 것과 동시에 레이코는 하라주쿠의 맨션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때까지 매니지먼트를 해준 모델 클럽에서도 독립했다. 그전부터 하기 싫은 일은 태연히 펑크를 내고 반쯤은 이미 독립한 모양새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일했었다. - P118

(전략). 그때 웨딩드레스를 입기로 정해진 모델은 이케지마 리사였다. 레이코의 기분을 풀어주겠다고 톱 모델 리사를 화나게 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달래보려고 했지만 결국 레이코는 쌩하니 대기실을 나가버렸다. (중략).
그래도 레이코를 잃고 싶지 않아서 그런 행동까지 눈감아줬지만, 그 무렵의 오만함에는 아직 어딘가 천진한 데가 있었다.
펄펄 뛰며 화를 내도 다음에 만나면 웃는 얼굴로 죄송하다고 순순히 사과하고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유난히 애교를 떨며 매달렸다. - P119

. 레이코가 문득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쇼 무대처럼 춤을 추면서 물었다.
"생각나요, 이거? 당신이 처음 내게 입혔던 옷인데."
(중략).
"이 옷, 너무 싫어. 옷뿐만이 아니야. 이걸 디자인한 중년 아줌마도 진짜 싫어."
미소와는 다르게 전혀 딴 사람 같은 목소리였지만, 너무도 갑작스러운 말이라서 그녀는 농담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P120

"나는 돌아가신 다지마 선생님이 디자인한 옷이 아니면 좋아하지 않거든요."
"어, 어떻게 그걸 네가 갖고 있어?"
저절로 신음 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 P120

한눈에도 다지마 신지의 손에서 나온 디자인임을 알아볼수 있는 스케치였다.
"어떻게 된 거야, 돌아가신 선생님 그림이잖아?"
"마지막에 병문안을 갔을 때 나한테 주셨어요. 나를 위해병실에서 아무도 몰래 그리셨대요. (중략), 어쩐지 꺼림칙해서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고 그냥 넣어뒀죠. 근데 요즘 당신이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이 옷, 만들어 봐요, 내가 쇼 무대에 입고 나가줄 테니까." - P121

"다지마 선생님 작품이라는 거, 아무도 몰라요. 걱정할 거없어요."
레이코가 그렇게까지 말해줬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다음컬렉션에 그걸 쓰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이런 디자인을 사장시키는 건 너무 아깝다, 라는 것이 타인의 디자인을 도용하는 꺼림칙함에 대항 그녀의 변명이었다. - P121

. 선 하나하나가 온전히 레이코만을 위한 것이어서 레이코가 드레스를 돋보이게 하고 드레스 또한 레이코를 돋보이게 했다. 자신은 이만큼 레이코에게 잘어울리는 드레스는 만들지 못한다고 깨달았다. 다행히 아무도디자인에 의심을 품는 일은 없었다.
레이코가 그걸 들고 왔던 날, 밤을 새워 모조리 자신의 손으로 다시 그리고 다지마의 원화는 불태워버렸다.
그런데 그 그림들이 다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내가 복사해뒀거든요." - P122

레이코는 유리잔의 술을 옷자락에 쏟더니 라이터로 불을붙였다. 검은 레이스가 불꽃이 되어 타올랐다. 진홍색과 검은색의 두 가지 불길이 뒤섞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대로 레이코는 놀라서 멍해져 버린 그녀에게 덮치듯이 안겨들었다.
"철저히 파멸시켜드릴게." - P123

옷에 붙은 불이 꺼지자 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디자인 복사본을 움켜쥐고 라이터를 켰다. 복사본 한 장이 화라락타면서 불꽃의 파편이 허공을 날았다.
"그래봤자 소용없어요." 바닥에 쓰러진 레이코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따로 사진을 찍어뒀거든요. 얼마든지 태워보세요." - P124

나는 다지마의 디자인을 도용한 적도 없고, 그것 때문에 그 아이에게 협박을 받은 적도 없다. 그건 모두 다 거짓이다...
"네, 얼마든지 찢으세요. 태워보시라고요. 또 인화해드릴테니까."
그 아이가 한 달에 두 번은 그녀를 불러내 트럼프 카드처럼사진을 펼쳐놓고 미소를 지어가며 마치 노래하듯이 위협하는 것을 그저 굴욕감을 곱씹으며 꾹꾹 참았던 것도. - P124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그 필름, 나한테 팔아. 내가 돈은 얼마든지 줄게."
그녀가 매달리듯이 애원했던 것도 전부 다 거짓이다.
그때 자신만 화상을 입고 그 아이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그것도 거짓이다. - P125

그녀는 호텔 방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로비와 연결된 행사장은 두툼한 문세 개가 나란히 이어졌다.
(중략)
아나운서의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로즈룸의 문을 열려다가 문득 ‘오늘 오후 4시, 도쿄 세타가야구 세이조에서 월드섬유회사 사장 사와모리 에이지로 씨가 엽총으로 자살했다고 합니다.‘라는 뉴스가 귀에 들어와 그녀의 몸을 돌렸다.
(중략) 레이코가 광고 모델로 출현한 섬유회사 사장이다. - P125

저도 모르게 목까지 튀어나온 비명을 가까스로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프런트 직원이 의아한 듯 이쪽을 쳐다보는 것을깨닫고 그녀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미소를 짓고 텔레비전 앞을 떠났다.
거짓말이야!
그렇게 소리치려고 했던 것이다. - P126

그녀는 천천히 뒷손으로 문을 닫았다. 그날 밤에도 그랬다.
그날 밤에도 그녀는 장갑을 낀 손으로 천천히 침실 문을 뒷손으로 닫았다. 너무 힘을 주는 바람에 오른쪽 손목의 화상 자국이 방금처럼 욱신거렸다. 힘을 주지 않으면 그 아이가 다시 침대에서 일어나 금세라도 거실로 나올 것만 같았다. 
(중략)
그러고는 거실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의사의 물건만남기고 자신의 것은 지문까지 모조리 그 방에서 지워버려야 했다. 하지만 왜 그랬을까. 왜 그런 짓을 했을까. - P127

유서는 거짓말이야! 그 키 작은 젊은 사장이 범인일 리 없어. 바보 같은 중년 의사도 범인이 아니야. 아무도 레이코를 죽이지 않았어....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공간의 너무도 차가운 공기는그녀에게 더 이상 어떤 거짓도 허락하지 않았다. - P128

그렇다, 나는 다지마 선생의 디자인을 훔쳤다. 그것 때문에그 아이에게 협박을 당했다. 팔 개월 동안 고통을 받았다. 그 아이는 정말로 내게서 모든 것을 앗아갈 작정이었다. 팔 개월 후인11월의 어느 날, 그 아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와 그야말로 신이 난 목소리를 냈을 때, 이제 협박 놀음도 끝이라는 것을 알았다.
(중략)
그렇다, 내가 죽인 것이다. - P128

그리고 집을 나와 비상계단을 내려왔다. 이번에도 천천히한 단 한 단 확인하면서, 한 단을 내려올 때마다 거짓말이야, 라고 가슴속으로 중얼거리면서. - P129

그렇건만 오늘 아침에 전화한 사람은 어째서 내가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고 말했을까.
그자도 나와 마찬가지로 거짓말쟁이였을까. 그자는 대체 뭘 원하는 걸까. 키 작은 젊은 사장은 왜 유서에 자신이 그 아이를 죽였다는 거짓말을 남겼을까. - P129

7장, 누군가 誰か

요요기 공원 뒤쪽의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그는 다시 오늘 아침 전화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었다. (중략).
어째서 전화 목소리는 그런 말을 했는가. 어째서 사와모리는 유서에 미오리 레이코 살해를 고백했는가. - P132

오 년 전부터 사고라는단어를 들을 때마다 조건반사처럼 머릿속에 그런 차가운 회오리바람이 덮쳐들었다.
회오리 속에서 항상 그렇듯이 한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얼굴은 반절 넘게 찌그러졌다. 어렸을 때 점토로 엄마 얼굴을 만들다가 실패해서 바닥에 내던진 적이 있었다. - P132

오 년 전까지 그의 인생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스포츠카로고속도로를 쌩쌩 내달리는 식이었다. (중략). 그의 인생과 80킬로미터로 신나게 내달리던 차에 돌연 한 여자가 뛰어들었던 것이다.
급브레이크를 밟고 곧바로 차에서 내렸다. 길바닥을 껴안듯이 쓰러진 여자를 발견하고 삼 초쯤 망설였다.  - P133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리는 곧 낫겠지만 얼굴은 도저히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어."
"어떻게든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는 몰아붙이듯이 물었다. 방법만 있다면 돈은 얼마든지댈 생각이었다. - P133

"현재 국내 의료 기술로는 도저히 어렵지만, 이 의사라면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독일인인 듯한 이름을 알려주었다. 뉴욕의 유명한미용성형 외과의라고 했지만, 물론 그는 알지 못했다.
"할리우드 여배우 중 몇 명은 그의 손이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들었어. (중략). 성형수술을 했다는걸 아무도 모를 정도야. (중략)." - P134

다행스럽다고 할까, 여자는 가족이 없었다. 아마 망가진 얼굴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지, 친척과 친구는 몇 명 있지만 어디에도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뉴욕에서 수술을 받게 해줄 테니까 이번 일은 경찰에 비밀로 할 수 있을까?"
그의 말에도 여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P134

독일인 의사는 예전에 브라질인지 어딘지에서 체포되었다는 나치 장교를 닮은 풍모였지만 선량한 미소를 지으며말했다.
"나는 반드시 비밀을 지킬 테니 걱정할 거 없다고 말해주시오. 사고를 당하기 전의 얼굴 사진은 가져왔습니까?"
도쿄의 성형외과 원장이 뉴욕에 보낸 편지에는 곧바로 답장이 왔고, 거기에도 예전 얼굴 사진을 최대한 많이 가져오라는 지시 사항이 적혀 있었다. - P135

여자는 가방에서 그때 도쿄에서 그린 다섯 장의 자화상을꺼내 독일인 의사에게 내밀었다.
"이게 예전 얼굴이에요."
(중략).
"이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로 만들고 싶지 않습니까?"
여자는 잠시 생각해본 뒤에 대답했다.
"가능하면 더 아름답게 해주시면 좋겠어요."
의사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 지우개와 연필을들더니 그림 속 여자의 코를 약간 높이고 눈은 살짝 크게 하고 뺨을 깎아낸 뒤에 여자 쪽으로 내밀었다. - P136

삼일 동안 뉴욕을 구경하고 도쿄로 돌아왔다. 밤늦게 두사람은 도쿄의 한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한 뒤에 헤어졌다.
일본에 돌아가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는 여자에게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직 2백만 엔쯤 남았는데, 원한다면 줄게."
하지만 여자는 자기도 저금해둔 게 좀 있다면서 거절했다. - P137

"새로 방 구하면 연락해줄래? 그리고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여자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뿐, 그 뒤로 이 년동안 아무 연락도 없었다.
이 년 동안 여자가 어떻게 지내는지 그가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사고에 대해서는 얼른 잊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여자에 대한 것도 지워버리고 싶었다.  - P138

유일한 구원은 여자 쪽에서도 사고에 대한 기억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지 그에게 아무 연락도 안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미모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서 여자쪽에서도 그를 피하고 싶을 터였다. 미오리 레이코는 성형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 P139

순간, 이 년 전 뉴욕의 의사가 여자에게 해준 것은 시술이아니라 마술이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잡지 사진에서 이미 여러번 봤지만 처음으로 직접 마주한 미소는 눈과 코와 입술을 악기삼아 완벽하게 조화로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 같았다.  - P139

"오랜만이네요."
(중략)
그는 상당히 술에 취한 여자를 집으로 데려갔다.
"크게 성공했던데? 멀리서나마 응원했어."
"그렇지도 않아요. 이 세계라는 게 별로 행복하지 않거든요." 여자는 미소의 그늘이 짙어지더니 그 표정 그대로 중얼거렸다. "외로울 때가 더 많답니다." - P140

"이방, 좋아요. 죽고 싶을 만큼 외로워지면 또 와도 돼요?"
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
"차로 데려다줄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밤거리 걷는 걸 좋아하니까 걸어서 갈래요."
그리고 계단에 의지하는 듯한 발소리를 울리며 돌아갔다. 차 조심해, 라는 인사를 하려다가 그는 급히 그 말을 꿀꺽 삼켰다. - P141

"괜찮아요, 돈은 남아돌 만큼 많으니까. 당신도 좋은 직장에 다니니까 경제적으로 힘들지는 않겠지만, 혹시라도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말해요. 수술비 천만 엔도 갚아줄까 했거든요." - P141

새 얼굴은 그녀가 그린 자화상의 선이 모두 없어진 건 아니었다. 친척이나 친구라면 예전에 자신들이 알던 아이와 미오리레이코가 많이 닮았다는 느낌은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평범한 얼굴이 이토록 아름답게 변하는 건 기젇 같은 일이라서 결국 딴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P142

"이 얼굴이 성형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당신뿐이에요."
술에 취해 그렇게 말한 것도 그날 밤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미오리 레이코의 얼굴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아는 사람은 그녀 자신과 그, 그리고 뉴욕의 의사뿐이었다. - P143

"하지만……." 그녀는 문득 생각난 듯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실은 한 명 더 있어요, 금세 알아본 사람이. 근데그 사람이 나를 협박하고 있답니다."
그런 위험한 얘기를 그냥 흘려 넘길 수는 없었다.  - P143

"하지만 친지들이 예전의 너와 닮았다고는 생각해도 설마동일 인물인 줄은 모를 텐데? 레이코도 그렇게 말했잖아."
"하지만 그 사람은…." 그녀는 하려던 말을 담배 연기로 얼버무렸다. "아이, 됐어요. 잊어버려요, 방금 한 얘기는." - P144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그녀가 ‘협박‘이라는 말을 내뱉은 것은 그때로부터 일 년 반이 지난 올해 3월이었다.
일년반 사이에 그와 미오리 레이코의 관계는 부쩍 친밀해졌다. 어느 날, 두 달 만에 찾아온 레이코는 그의 침대에 나란히누웠다.
(중략)
먼저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은 그녀 쪽이었다. 그는 그 손을 미처 거절하지 못했다. - P145

벌거벗은 왼쪽젖가슴에 새겨진 검은 나비 문신이 같이 흔들렸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왜 그런 문신을 했어?"
"글쎄 왜 그랬을까. 이케지마 리사라는 모델, 알아요? 그여자가 자기는 빨간 나비 문신을 했는데 똑같이 해보는 게 어떠냐고 가슴을 보여줬을 때, 이 어리석은 여자와 똑같은 곳까지 나를 떨어뜨리면 의외로 이 세계에서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마음이 들더라고요. 네, 맞아요, 그거예요." - P145

물론 그건 마음속 깊이 숨겨두었다. 하지만 작년 여름에 실수를 하고 말았다. 술기운에 취한 눈에 문득 그 흉물이 떠올라 저절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급히 아무 일도 아닌 척하며 다시 시선을 맞췄지만 이미 그녀의 차가운 옆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얼굴이 생각났군요. 당신도 역시 그런 거였어."
레이코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P146

그렇게 한참 동안 옆얼굴의 시선을 멍하니 발치에 떨구고있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되풀이하는 그의 변명이 통했는지 한참만에야 이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나, 정말 배배 꼬였나 봐."
그 뒤에도 그녀는 한 달에 한 번은 찾아와 그의 품에 안겼고 두 사람의 관계는 전과 다름없이 다시 반년 동안 이어졌다. - P147

"당신, 사람을 죽인 적은 없어요?"
있어, 라고 그는 대답했다. 술에 취했고 그녀가 평소보다더 기분 좋게 웃고 떠들었기 때문에 가벼운 농담쯤으로 털어놓은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농담은 아니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그건 살인이라고 할 수 없었다. 작은 과실이었다. - P147

 차 안 가득 울리던 비발디 음악을 갑자기 꺼버리더니 그녀는 핸드백에서 다른 카세트테이프를 꺼내 스테레오에 넣고 한껏 볼륨을 높였다. 그와 동시에 남자 목소리가 엄청난 음량으로 터져 나왔다. 너무도 큰 소리였기 때문에 가까스로 알아들은 것은 "살인이라기보다 사고", "칠년 전"이라는 말뿐이었다. 테이프가 끝날 때까지 그게 자신의 목소리라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중략).
"왜 이런 걸…"
그때까지도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그는 물었다.
மய - P148

"내가 핸드백 속에 녹음기를 감춰뒀거든요. 당신이 뭔가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근데 사람을 죽인 것까지 털어놓을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탐정에게 조사를 의뢰했더니 당신이 고백한 대로 칠 년 전 4월에 한 사람이 죽었더라고요. 오키 쇼지라는 한창나이의 회사원이라던데?"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담겼지만 룸미러 속의 두 눈은 번뜩이면서 운전석에 앉은 한 마리 사냥감을 노려보고 있었다.
"더 빨리 달려요. 나를 쳤을 때와 똑같은 속도로!"
그녀는 외치듯이 말하고 테이프를 되감더니 다시 스위치를 눌렀다. 이번에는 더욱더 볼륨을 높여서⋯⋯ - P149

 그녀가 죽었는데도 여전히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아니, 어차피 그녀가 살아 있을 때도 이건 헛수고였다. 아무리 밤늦게 집에 돌아가도 그녀는 그가 받을 때까지 계속해서 전화벨을 울려댔으니까. - P149

 그리고 이번 11월 중순, 한밤중의 드라이브와 테이프 목소리와 협박의 말도 이제는 단조롭게 느껴질 만큼 지쳐버린어느 날 밤, 그녀는 전화를 걸어 노래라도 하듯이 말했다.
"파리로 떠나기 전에 당신 일도 깨끗이 정리할 거야."
그는 걸음을 옮기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그런 건 떠올리지 말자. 그보다 오늘 아침 전화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오늘아침의 그 기묘한 전화의 의미를..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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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부와 후일담을 보면서 뭔가가 생각나지만, 도입부에서 뭐가 생각났는지는 까먹었다.
후일담에서는 영화 ‘라따뚜이‘가 생각났다.

Prologue

이 이야기는 빛바랜 사진 한 장에서 시작한다. 내가 떠올릴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 중 하나다. (중략) 그 장면 속에는 늘 언니가 있다. - P11

둘째에게 첫째는 주어진 환경이다. 국적, 성, 인종, 피부색, 체형처럼 생후 1일부터 그냥 주어지는 삶의 조건이자 자아의 거푸집 같은 것. - P12

세 살 터울 언니는 두 옥타브 ‘솔‘의 쨍한 목소리로 하루 종일 떠드는 어린이였다. 좋게 표현하면 즉흥 구연동화이고, 실제로는 아무말 대잔치이며, 나쁘게 표현하면 소음이라 할 만한 종알거림을 쉼 없이 이어갔다. 할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입을 여는 게 아니라 일단 입에 시동을 걸고 생각을 굴렸다. - P12

문제는 언니의 즉흥 창작이 의식의 자유 흐름대로 급커브하거나 뚝 끊어지거나 갑자기 솟구치거나 갈피를 잃고 시들해지는일이 다반사였다는 점이다. 도대체 맥락이란 것이 없었다. 줄거리와 요점이 없는 말의 홍수를 두 옥타브 ‘쏠‘로 쏟아내는 7세 어린이 곁에서 4세 어린이는 사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실감했다. - P12

적극적 경청을 조기교육당한 덕분인지 나는 또래보다 말이 빨랐고, 의미 차이에 민감했다. 유치원에 갈 즈음이 되었을 땐 언니 이야기의 전후 관계를 파악해서 정보 공백이나 오류를 감지해 되묻고("아까는 곰이 왕자라고 했잖아. 왜 지금은 왕비야?"), 자기 말에도취되어 반환각 상태에 이른 나의 사랑하는 언니가 길을 잃지않도록 요약해주었으며("그래서 둘이 결혼했다는 거잖아. 그다음엔 어떻게 됐는데?"), 이야기의 신선함과 흥미로운 정도를 평가하는("그게 뭐야? 시시해") 대화 상대가 되었다. - P13

반면 지난 20년간 미디어업계는 단 하루도 고요하지 않았다. - P13

스마트폰과 SNS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2010년대 이후의 변화를 요약하자면 이 두 문장이 아닐까. ‘기업, 개인, 사물. 모든것이 미디어가 되었다.‘ 그래서 ‘볼 게 너무 많다.‘ 2010년대부터 신문과 잡지는 손꼽히는 사양 산업이 되었고, 불안과 무기력이 짙은 안개처럼 업계 전체를 덮쳤다. - P14

예감은 현실이 됐다. 패션 잡지 단골 기사였던 스트리트 리얼룩 콘텐츠는 ‘스타일쉐어‘가 인테리어 집들이 콘텐츠는 ‘오늘의집‘이 코스메틱 품평 콘텐츠는 ‘화해‘가 서비스로 만들었고,
포털 사이트는 아예 조인트벤처로 잡지사를 차렸다. - P14

정확하게는 온 국민이 준 에디터가 된 게 아닌가 싶다. 지금이 순간에도 수많은 이들이 SNS에 올릴 사진과 영상을 고르고 편집하고, 바디 텍스트를 쓰며, 자기만의 해시태그를 정해 콘텐츠를 아카이브한다. 방대한 하이퍼링크 세상에서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스스로 큐레이션해 상황별 추천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고, 영감 수집 부계정을 운영하며, 정기적으로 뉴스레터를 발행한다. - P15

(중략), 런던 테이트 브리튼에서 큐레이터로 재직하기도한 미술비평가 니콜라 부리는 자신의 저서 『포스트프로덕션』에서 이렇게 썼다.

이제 예술적 질문들은 ‘어떤 새로운 것을 우리가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이다.

나는 저 문장이 온 세상이 잡지화되어가는 이유를 설명한다고 믿는다.  - P15

선택과 주목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정보를 비교하고 검증하는 일도 벅차다. 자신의 취향, 호기심, 판단력을 알고리즘에 외주 주거나 타인에 대한 모방으로 때우는 일이 빈번해진 이유다.  - P16

바로 이 지점부터 기존 재료로 인지적 차별점을 만들어내는편집 능력이 중요해진다. 조리의 기본기와 실전 경험을 갖춘 사람이라면 식재료가 발에 차이게 많은 과잉 공급 환경에 놓여도차분하게 비전을 그릴 것이다. 재료의 산만함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만의 계획과 속도대로 식탁을 차려낼 것이다. - P16

나는 에디토리얼 씽킹이 정보 과잉 시대의 조리 기본기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직업적 스킬 차원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두 옥타브 솔의 목소리를 가진 7세 어린이 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썼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소화하기 버거운 사건을 겪을 때마다 편집이 지닌 놀라운 힘을 체험했다. - P16

 니콜라 부리요가『포스트프로덕션』에서 쓴 문장처럼 ‘우리가 리얼리티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의 몽타주‘일 뿐이다. - P17

테드 창이 『숨』에서 쓴 아래 문장처럼.

기억이란 우리가 살아온 모든 순간을 공평하게 축적해놓은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애써 선별한 순간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서사이다. 설령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건들을 경험하더라도 우리가 똑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 P17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작은 실패의 순간을 유독 예민하게 그러모아서 ‘나는 의지박약이야‘라는 자아상을 그리고, 다른 사람은 작은 성취의 순간을 유독 예민하게 그러모아서 ‘나는 마음먹으면해내는 사람이야‘라는 자아상을 그리기도 한다. 객관적 사건의 양상보다는 해석과 의미 부여가 인지적 차별점을 만든다. - P17

지난 20년간 에디터로 일하며 얻은 가장 소중한 삶의 자산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의미의 최종 편집권이 나에게 있다‘는 감각이다. 삶은 언제나 예측 불가하고, 뒤죽박죽 난장판 같은 사건과 사실이 끊임없이 들이닥친다. - P18

스물두 살 이후 인생의 절반을 에디터로 살았다. 무작정 달려들고 대차게 깨지고 한없이 작아지고 이따금 살아나고 끝끝내 버티고 울고 웃고 하면서 온 마음으로 일했다. 그 시간을 한 권의 책으로 갈무리할 수 있어 기쁘다. 업에 대한 자긍심을 지킬 수 있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주었던 동료 에디터들과 힘든 출간 과정을 함께해준 나의 소중한 편집자 김보희 님에게 특히 감사하다. - P18

Epilogue

책을 쓰는 동안 종종 자문했다. ‘이 책은 정체가 뭘까? 일에대한 에세이집인가? 에디토리얼 씽킹 개념을 잡는 이론서인가?
에디팅과 현대미술의 공통점을 서술하는 인문서인가? 도대체 정체가 뭐지?‘ 끈기 있게 마지막 원고까지 읽어주신 독자를 당황시키는 고백일 수 있지만, 솔직히 지금도 서점 분류 체계의 어느 코너에 이 책이 꽂힐지 감이 오지 않는다. - P217

『에디토리얼 씽킹』은 순전히 개인적 동기로 집필했다. 에디터 근속 20주년을 맞아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면서 책을 썼다. 해외여행이나 귀한 물건을 선물하는 것도 좋겠지만, 인생의 절반을 바친일의 의미를 고유한 언어로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남기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은 없겠다 싶었다. - P217

. 20년 동안 몸으로 체득한 에디팅 방법론을 세세하게 단계별로 펼치고 분류하고 재인식해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는 작업은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깜찍한 야심도 있었다. 장르, 산업,
시대를 불문하고 채집한 시각 자료, 논문, 밈, 참고도서를 종횡으로 오가면서 맥락을 만들고 이야기 타래를 풀어가려고 했다. - P218

세상에는 진입 장벽이 높은 직업과 그렇지 않은 직업이 있다.
일을 하기 위한 자격을 얻기 위해 시험이나 검증 과정을 통과하는 직종과 달리 잡지 에디터, 콘텐츠 에디터는 사실상 누구나 될수 있다. 예전에는 미디어사 공채 시험을 통과하거나 경력직으로 입사해 편집부에 소속되면 에디터라고 불렸는데, 세상 모든 것이 미디어가 되는 요즘에는 딱히 그런 경계가 없다. - P218

 이런 에피소드들이 쌓여내 안에서 커다란 질문이 되었다.

에디터는 전문가일까?
에디터의 전문성은 어떻게 정의할까?
전문가로서 에디터는 어떤 가치를 만들어낼까?

위 질문에 답하려 애쓰다보니 이 책이 나왔다. 요리에 빗대어 생각하면 복잡할 것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이 요리를 한다. 그렇다고 셰프의 전문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요리를 꽤 잘하는 일반인과 전문 셰프의 차이가 무엇일까? - P219

 에디팅도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누구나 에디팅 기술을 활용해 상대에게 필요한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 P219

나는 에디터가 원고 편집이나 윤문하는 사람, 혹은 마케팅머티리얼 제작 말단의 업무를 대행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미를 가시화하는 전문가‘, ‘문자 언어로 인식의 틀을 제공하는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 P220

 에디터에 대한 인식이 중구난방인 현실에서 이 책이 에디터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설명하는데에 조금이라도 기여했으면 좋겠다. - P220

글을 쓰는 동안 에디터의 레이더가 언제나 바깥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에디터는 요즘 사람들이 열광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재미를 느끼는지, 유의미한 성과를 내는 이들에겐 어떤 비밀이 있는지, 새로 뜨는 맛집 목록부터 노동요 플레이리스트까지 삶의 구석구석에서 의미 있는 무언가를 찾아내려 안달하고 묻고 취재하고 듣고 다닌다. - P220

"에디터 최혜진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한 지난 20년 동안,
에디터 일은 소심하고 파리했던 나의 자아를 부드럽게 떠밀면서 먼 바깥으로, 조금 더 먼 바깥으로 나아가게 했다. (중략). 더 나은 이야기를 상상하게 했다. 그렇게 내 삶의 의미를 스스로 써내려가는 자리에 설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책은 나에게 오직 좋은 것만 주었던 내 일에 보내는 감사 편지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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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고르는
세 가지 방법

사실 저는 닥치는 대로, 무턱대고, 끌리는 대로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책을 그렇게 읽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읽다 보면 어느새 좋은 책을 잘 선택하게 됩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죠. - P81

우선 서문을 읽어보는 겁니다. 의외로 서문을 읽는 사람이 드문데 저는 짧은 서문에 저자의 모든 생각이 농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 전체는 잘 썼는데 서문이 별로인 책은 없습니다. 훌륭한 책은 반드시 서문이 좋습니다. - P81

 소설도 그렇고 인문교양서도 그렇습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 서문은 본문 전체의 맥락을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면서, 그 자체로 힘 있는 멋진 글입니다. - P81

수 클리볼드의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의 맨 앞에 붙어서 서문의 역할을 하는 어느 의사의 글은 이복잡 미묘한 이야기를 좀 더 넓고 깊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있게 해줍니다. - P82

훌륭한 책은 당연하게도 모든 페이지가 훌륭합니다. 어느페이지를 펼쳐 읽어도 좋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을 고를 때마지막으로 3분의 2쯤 되는 페이지를 펼쳐봅니다. 그리고 오른쪽 페이지를 읽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시선이 왼쪽보다 오른쪽이 더 잘 읽히거든요. 집중력도 높아지고요. - P82

물리학에 프랙털fractal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부분이 전체를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나뭇잎의 모양, 눈(雪)의 결정 이런 것이 그 예인데,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분으로 전체를 상당 부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P83

 바로 그래서 3분의 2쯤을 읽으면 저자의 약한 급소를 볼 수 있는것입니다. 그 부분마저 훌륭하다면 그 책은 정말 훌륭하니까 그 책을 읽으시면 됩니다. - P83

느리게 읽어도
상관없다

 중학교에 가니까 세상에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런데 공부도 해야 하고 숙제도 많고 시간이 없었죠. 읽고 싶은 책을 다 읽어야겠다는 강박이 있어서속독법을 배우고 싶어졌습니다. 당시에는 동네마다 속독학원이 있을 정도였는데 저는 사정상 학원은 못 다녔고 그 대신 속독법 책을 사서 혼자 익혔어요. - P62

그렇게 그 책을 빨리 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책을 읽으면서 책 진도가 빨리 안 나간다고 초조해하기도 하는데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도가 빠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좋은 책일수록 진도가 빠르게 나가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 P63

 책을 읽는 목적은 책의 마지막까지 내달려서 그 끝에 있는 무언가를 얻어내는 데 있지않습니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데 걸리는 시간, 그 과정에 있는 겁니다. - P63

세상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빠르게 완료하지 못할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들은 대부분 오래 걸리는 시간 자체가 그 핵심입니다. - P64

다시 한번 무엇을 위해서 책을 읽는가 생각해봅니다. 독서행위의 목적은 결국 그 책을 읽는 바로 그 시간을 위한 것이아닐까요. 그 책을 다 읽고 난 순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독서를 할 때 우리가 선택한 것은 바로 그 책을 읽고 있는 그 긴시간인 것입니다. - P64

책을
숭배하지
말아요

책을 잘 안 읽는 사람일수록 책을 모셔둡니다.
저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책을 ‘하대‘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인쇄된 종이를 묶은 그 자체가 책이 아닙니다. 책 안의 활자에 담긴 의미들 그리고 그 사이의 침묵들이 바로 책입니다. - P66

메모하기에 정말 좋죠. 밑줄도막 그으면서 읽는 겁니다. 저도 예전에는 밑줄이나 메모를 잘 안 했고 하더라도 나중에 지울 수 있는 연필만 썼는데지금은 안 그래요. 책을 깨끗하게 읽는 것이 결코 좋은 독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 P66

저는 책을 읽으면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나 좋은문장에 동그라미를 많이 칩니다. 그 행위 자체는 읽는 순간에 내 기억을 강화해주는 효과가 있어요. 시간이 지난 후 혹시 그 책을 어떤 이유로 다시 읽어야 할 때, 내가 동그라미 쳐놓은 부분만 읽으면 됩니다. - P67

무엇을 숭배한다면, 그것을 온전히 즐기기 어렵습니다. 책이란 정말 대단해, 하면서 우러러본다면 책 읽기를 어떻게즐길 수 있을까요. 저는 책이란, 늘 가까이 두고 언제나 펴보고 아끼지 않고 읽고 그러다가 읽기 싫으면 집어 던져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 P67

2
대화
읽었고, 읽어, 읽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책 읽기

이다해: 교육으로서의 독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요, 부모들이자녀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들을 권하거든요. 그런데성인이 되어서 책 읽기를 계속 좋아하는 사람들은 성장 과정에서 세계 명작만 읽은 건 아니거든요. 또래의이야기를 읽는 게 중요한 것 같은데, 이동진 작가님 역시 그랬던 것 같습니다. - P99

이동진: 본인의 독서만큼이나 아이들에게 어떻게 책을 읽게 할것인가에 관심 있는 사람 많잖아요. 제 경우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지금도 마찬가지고 예전에도 그랬고, 재미가 최고예요. 책에 재미를 붙여서 습관이 되는 단계, 그게 최고고요. 재미있어서 본인이 반복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본인이 책을 골라야 하는 것 같아요.  - P100

이다혜: 책을 읽을 때 많은 사람들은 책 안에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문학 열풍이라는 것도 ‘책에서 혼란스러운세상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겠지‘ 하는 기대가 있는 것같아요.  - P100

이동진: 경험해보면, 목적 독서는 지쳐요. 왜냐하면 책을 읽는행위 자체에서는 쾌락을 못 느끼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 얻어지는 부산물, 결과를 겨냥하고 책을 읽게 되면독서를 ‘견디게 되거든요. 힘든데, 다 읽고 나면 ‘한권읽었다‘에 그치는 거죠. 책이라는 것은 우회로일 수도있는데 말이죠. - P101

굳이 이야기하면 우리에게 질문을 주는 책들이 더 좋은 책들이죠. 그렇지만 뒤집어 얘기하면 제대로 질문하기 위해 책을 읽는 것도 아니에요. - P101

영화도 마찬가지인데,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영화가 하려는 이야기가 뭐예요?‘ 묻는다고요. 이런 질문을 굉장히 많이 하는데, 제가 알기로는 99퍼센트의 창작자는 어떤 주제를 말하기 위해영화를 찍지 않아요. - P102

일단 책이라는 것 자체가 삶의 일부가 되도록 끌어안는 게 중요해요. 그러다 보면 책이 우리에게질문을 하게 해준다는 거죠. 아주 세세한 질문이기도하고, 아주 큰 질문이기도 한데, 이 길이 옳은가‘ ‘나는왜 사는가‘에 대해 책이 답을 주지는 않지만, 일종의 방향성이나 지향성 같은 걸 주는 거죠.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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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범주화: 유사성과 연관성 찾기

연상을 통해 재료의 가능성을 두루 살핀 이후에 해야 할 작업은 ‘정리‘다. 정리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쓰면서도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한 적은 드물 것이다. 정리란 정확히 뭘까? - P71

 예를 들어 책꽂이 정리만 해도 저자 이름 가나다순, 책 제목 가나다순, 책 크기순, 구입 연도순, 책등 색깔순, 만족도 별점순 등 선택할 수 있는 분류 기준이 많다. 이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개별 책의 배치 순서를 정할수 있다. 에디터가 하는 일도 비슷하다. - P71

손 안에 든 재료를 특정 기준을 세워 정리하고, 그로부터도출할 수 있는 의미나 시사점을 찾아내기 위해 습관처럼 질문한다.

"이걸 뭐랑 묶지?"
"묶어서 어떤 이름을 붙이지?" - P72

(전략), 마케팅에는 얼마나 도움이 되나 등등 다양한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질문을 마구 펼친 다음분류해서 상위개념화한다. "이걸 뭐랑 뭐지?", "묶어서 어떤 이름을 붙이지?" 이것이 목차 혹은 개요가 되는 셈이다. - P74

범주화는 우리 뇌가 정보와 세상을 인지하는 핵심 프로세스다. 이에 대해 촘촘하게 설명한 『사고의 본질』이라는 책을 매우 즐겁게 읽었는데, 책의 공동 저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와 에마뉘엘 상데는 유사성을 인식하고 라벨을 붙여 머릿속 서랍에 정리하는 범주화가 지성의 연료이자 불길, 원천이자 결과물이라고설명한다.  - P75

범주는 여러 현상을 통해 그것을 머릿속에 구축한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 가령 대상과 행동 그리고 상황의 보이지 않는 측면을 ‘보이게‘
만든다. 범주화는 명확한 관점을 제시하고, 숨겨진 항목이나 속성을 감지하게 하고, 미래의 사건을 예측하게 하며, 행동의 결과를 예견하게 하여 자신이 속한 상황을 이해한다는 느낌을 준다. - P75

다른 놀이도 해보자. 이번에도 역시 괄호를 채우면 된다.

ㅇ 내가 만약 과자라면 나는 ()일 것이다.
ㅇ 내가 만약 자동차라면 나는 () 브랜드일 것이다.
ㅇ 내가 만약 동물이라면 나는 ()일 것이다.


이 질문은 기업 브랜드 컨설팅을 할 때 실제로 종종 사용하는 문장이다. ‘우리 브랜드가 과자 브랜드라면 무엇에 가장 가까울까?‘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자사 브랜드의 본질을 규정하는 자기만의 설명이 먼저 나와야 한다. - P77

편집은 무질서한 재료를 분류하고 조합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에디터는 정보 사이의 거리와 관계를 다각도에서 파악한뒤 순서를 부여해 매력적인 스토리 혹은 메시지로 빚어내는 일을 한다. - P78

IBM의 프로덕트 디자이너 베티 퀸 Betty Quinn이 인스타그램에서 진행하는 사이드 프로젝트 ‘Art History Fashion‘ 사례를 보자.
디자인과 미술사학을 전공한 그는 2017년부터 미술 작품과 패션 사진을 매칭하는 게시물을 올린다.  - P78

 시각 문화사의 창고에 쌓여 있던 재료들이 베티 퀸만의편집을 거친 뒤 동시대 문화계의 의미망 안에서 새로운 지위를얻었다. 유사성을 알아차리고 연결하는 편집의 가치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 P79

반면 숨어 있던 구조적 유사성을 파악하고 새롭게 재해석한 창작 앞에선 보통 이런 감탄사가 터진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을까?" 감탄의 이유가 발상의 독창성에 있다. 예를 들어 기원전 1세기경 로마에서 건축가로 활동한 비트루비우스는 특별한 음향장비 없이 소리가 멀리까지 잘 전달되는 원형 극장을 설계했다.  - P81

 유추는 ‘같은 종류의 것 또는 비슷한 것에 기초하여 다른 사물을 미루어 추측하는 일‘이다. 이것은 문학가나 과학자들에게만 필요한 사고력이 아니다.
A의 구조를 빌려서 그와 유사하다고 여겨지는 B에 적용하는 능력은 기존의 정보를 새롭게 조합하는 모든 이에게 유의미하다.
친숙함에서 새로움으로 도약하는 강력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 P82

서울시립미술관 《그리드 아일랜드》 전에서 만난 백정기 작가의 <자연사박물관>은 먼저 어마어마한 물성으로 인상 깊게 다가온 작품이다. 물이 담긴 수백 개의 유리병과 유리잔이 선반에차곡차곡 놓여 있는데, 각 선반은 유대류, 소목류 등 하나의 생물 분류 체계를 상징한다.  - P82

이 작품에서 배울 수 있는 에디터적 사고력은 무엇일까? 백정기 작가는 동물(생명체)과 유리병이라는 멀리 떨어진 두 대상사이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구조를 찾았다. 바로 물을 몸에 지니고 산다는 점이었다. - P84

작가가 부여한 메시지/의미

1. 물 자체는 형태가 없고, 컨테이너 형태에 따라 일시적인모양으로 살아간다.
2. 인간, 동물, 미물도 결국 하나의 물을 공유한다. 고로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 P84

현대미술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 이런 식의 사유는 얼핏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A에서 발견한 내용을 B에 적용시킴으로써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인식을 만들어내는 작업은 우리 모두가 매일 밥 먹듯 한다. - P84

블로그 포스팅에 단골로 등장하는 카피부터 우아한 미술관전시 작품, 수억 원의 투자금이 걸린 비즈니스 모델 발굴에 이르기까지, 유사성을 지렛대 삼아 도약하는 아이디어는 어디에나 있다. 제임스 웹 영은 『아이디어 생산법』에서 이렇게 썼다. "오래된요소들을 가지고 새로운 조합을 만드는 능력은 관계를 알아보는 능력에 크게 의존한다." - P87

11. 질문: 좋은 질문 만드는 법

나는 인터뷰라는 독특한 형식의 대화를 사랑한다. 사랑이라는 거대한 단어를 주저 없이 붙일 만큼. 만약 인터뷰가 에디터의 주된 업무가 아니었다면 이 일을 20년이나 하지 못했을 것이다. - P195

학위가 있거나 명성이 높은 사람만이 현인인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언제나 배울 점이 있다. 나를 당황스럽게 하거나 인터뷰가 잘못 흘러간다는 느낌을 주는 인터뷰이조차 다른 주파수를 이용해 내게 지혜를 전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 믿음은 ‘about a father‘ 프로젝트를 하면서 단단해졌다. - P196

이런 취재는 예술가나 명사 인터뷰보다 열 배 정도 긴장된다. 인터뷰이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처음 만난 취재원이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고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순식간에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마음을 열고 자기 이야기를 해줄지, 어떤 맥락으로 대화가 흘러갈지, 그렇게 나눈 대화가원고로 남길 만큼 유의미할지, 아무것도 담보되지 않은 상황으로 뛰어드는 취재인 것이다. - P196

소맷단이 닳은 작업복을 입고, 담배 한 갑 정도를 연달아 피운것 같은 걸걸한 목소리의 60대 어르신이 말했다. ‘쉽고 편리한게 늘 좋은 건 아니야‘ 간결하지만 깊고 아름다운 지혜. 길거리에서 오래 서성이며 차곡차곡 쌓아간 인터뷰가 100명을 향해갈 무렵, 이제는 누구를 만나도 고유한 이야기를 발견하고 언어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배울 점이 있다는 믿음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 P198

직업적으로 질문을 달고 사니 역으로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좋은 질문 만드는 법을 알려주세요." - P198

그때마다 이오덕 선생이글쓰기, 이 좋은 공부에 쓴 아래의 문장을 떠올린다.

글감은 단순한 객관 사물로서 글의 재료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물과 경험 가운데 특별히 글 쓰는 이의 마음에 들어온 그 무엇이다. 쓰는 이의 마음에 특별히 들어왔다는 것은 쓰는 이의 삶 속에서 그 무엇이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말한다.

인터뷰는 일차적으로 인터뷰이의 생각을 옮기는 글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설명하면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벌어진 상호작용을 인터뷰어 관점으로 기록한 글이다.  - P199

초심을 기억하라.
→ 초심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왜요?

시간은 금이다.
→시간은 금이라고 생각하세요? 왜요?

상대방이 전제하고 있는 믿음을 가시화해서 되묻는 것이다. - P200

 이렇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전제부터 질문하면서 검사대에 올린다. 이런 검증 과정 끝에 원래의 전제가 강화될 수도 있다. ‘요모조모 생각해봐도 역시 꿈은 찾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 P201

셋째, 사안을 바라보는 위치와 상황적 맥락을 바꾸는 질문을 즐겨 한다. (중략). 왜냐하면 우리는 개인이지만 동시에 관계의산물이기도 하니까. 상대의 오늘을 만드는 데에 영향을 미친 수많은 사회적 가닥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려고 한다. - P201

넷째, ‘무엇을 했나요?‘보다는 ‘어떻게 했나요?‘를 궁금해하고, ‘어떻게 했나요?‘보다는 ‘왜 했나요?‘를 궁금해한다. 인터뷰는 묻는 자말하는 자, 단둘의 대화다. 인터뷰이의 경험과 생애는 그 누구의 것과도 같지 않다. 하지만 인터뷰 결과를 담은 콘텐츠는 세상으로 나아가 다양한 사람들에게 두루 읽히면서 공감을 얻어야 한다. - P202

반면 ‘왜 했나요?‘라고 물으면 인터뷰이는 감정과 동기를 회고하게 된다. 사회적 조건과 경험은 천차만별일 수 있지만,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정과 동기는 부유하든 가난하든 나이가 많든 적든 별반 다르지 않다. - P202

마지막 다섯째, ‘내가 그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상상하고 묻는다. 그다음 ‘내가 독자라면 무엇이 궁금할까?‘ 상상하고 묻는다. 취재원과 독자 모두에게로 건너가보는 상상을 하면서 중간에서 둘을 어떻게든 이어주려고 안간힘을 쓴다.  - P203

어쩌면 처음엔 에디터로서 직업적으로 좋은 결과물을 내기위해 훈련한 감정이입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질문이라는 형식으로 타인에게 악수를 청하고, 에고라는 단단한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경험이 쌓일수록 뾰족하게 긴장하고 살던 인간 최혜진이 천천히 유연해지고 편안해졌다.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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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에잇은 침대에 털썩 누워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못 해먹겠어. 나는 재생 탱크에서 나와서 제대로 쉬지도 못했어. 내몸은 아직 씹는 음식을 한 입도 못 먹은 거 알지?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기 전까지 온종일 음식 생각만 한다고. 이제 남은 배급이 대체 얼마야? 한 사람당 720킬로칼로리쯤 되려나? 이렇게는 못 살아. 절대 못 살아." - P244

에잇은 끙 소리로 답을 대신했다.
"들어 봐. 나는 앞으로 서른여섯 시간 동안 540킬로칼로리로 버텨야 하고 오늘 베르토가 소란을 피우는 통에 저녁 식사를 끝내지도 못했어. 네가 죽을 만큼 힘든 건 알지만 나한테도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니야."
에잇은 한숨을 쉬며 털썩 등을 대고 눕더니 천장에 대고 중얼거렸다. - P245

[Mickey8]: 응, 오늘 밤에 비행 있는 줄 알았는데?
[BlackHornet]: 그랬는데 이젠 아니야. 무슨 이유인지 앞으로 며칠동안 내 근무 시간까지 베르토가 맡게 됐어. 새 공지가 있을 때까지 난자유야 만날까?
[Mickey8]: 당연하지! - P246

"아니, 세븐, 꿈도 꾸지 마. 나한테 이게 필요해서 그래. 정말 필요하다고. 네가 잘 때 목을 조르겠다고 한 건 농담이지만, 이문제를 놓고 싸우려고 들면 진짜 널 죽일지도 몰라."
별것 아닌 말에 가슴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분노가 과하다는 사실을 나도 알았다. - P246

에잇은 족히 5초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입을 달싹거리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잠깐만. 뭐야? 내 말을 섹스가 하고 싶단 뜻으로 알아들었어?"
그 말에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음...... 아니야?"
에잇은 끙 소리를 내고는 일어나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 P247

굶주림에 관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첫 개척지 이름이 에덴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략). 하지만 에덴의 상륙거점 개척지가 실제로 두 번의 시도 만에 건설되었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많다. - P248

그들은 식물이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될 때까지 12년을 버텼다. 통신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읽은 기록 중에서 가장 사실과 가까웠던 추측은 방사능으로 인한 손상이 여러 세대에걸쳐 누적되면서 유기체가 더 이상 번식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돌연변이가 많아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 P249

하지만 어느 쪽이든 매우 치명적일 수있다. 칭시는 천천히 죽어 갔다. 고맙게도 그들은 전혀 희망이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음 개척지 건설 임무에서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모든 과정을 문서로 정리해 두었다. - P249

. 마지막까지 남은 승무원 열두 명이 우주선 엔진을 끄고 속옷만 입은채로 메인 에어 로크 밖으로 몸을 던졌을 때, 에덴까지의 여정은 아직도 4년이나 남아 있었다.
칭시는 아직도 우주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며 진공 상태인 우주를 광속의 약 0.6배 정도로 떠다니고 있을 것이다. 개척민이 될 예정이었던 최후까지 남은 열두명의 시신도 같이 있겠지.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중략). - P250

더 나은 선택지가 없어서 결국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저녁을 먹기에 늦은 시간이라 사람이 많을 것 같지 않았지만, 문으로 들어서니 생각한 것보다 더 한산했다. 뒤쪽 테이블에는 네 명이 감자를 담은 쟁반 두 개를 놓고 앉아 있고, 반대편 구석에는 얼굴만 아는 정도인 생명공학부 남자가 페이스트 스무디로 보이는 음식을 앞에 높고 태블릿에 시선을 고정한 채 혼자 앉아 있었다.  - P251

그 생각을 하다 에잇이 떠올랐다. 침대에 누워 소화액에 간까지 녹아내릴 것 같다며 툴툴거리고 있겠지, 즐거운 시간을 기대하며 내 방으로 올라갔을 나샤에게 나인 척하며 먹을 것을 사달라고 조르고 있겠지.
먹을 것.
먹을 것을 사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 P252

어쩌면 10초도 안 걸릴 수도 있다.
괜찮다. 시간 여유가 있다. 뛸 필요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갈림길에서 방향을 꺾었다. 그러고 나서 벽에 등을기대고 숨을 깊이 들이쉰 뒤 천천히 내뱉었다. 만약 뇌가 제때 돌아가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나샤와 에잇이 카페테리아로 들어와 내가 태블릿을 보고 있는 모습을 봤다면 어땠을까? - P253

생각을 안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제 어디로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방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에잇이 배를 채우자마자 두 사람이 다시 방으로 올라간다고 가정하는 게 안전할 테니. - P253

하지만 나샤가 돌아왔을 때 자기 방에 내가 먼저 도착해 있으면 어리둥절해할 것이고, 대체 내가 자기 방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도 궁금해할 게 뻔했다.
역시 불가능했다.
돔에 공용 공간이 하나 더 있기는 했다. 다행히 거의 항상텅텅 비어 있을 공간이었다. - P254

체력 단련실은 상륙거점 개척지마다 보편적으로 있는 시설은 아니다. 이곳의 체력 단련실은 도덕성과 윤리성을 단련하는데 체력 단련이 중요한 구성 요소라는 예로니모 마샬의 오랜 믿음 덕분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체력 단련실은 돔에서 유일하게 낮이나 밤이나 항상비어 있어서, 예로니모 마샬의 생각이 어떻든 배고픈 이들이제일 하기 싫어하는 활동이 운동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 줄뿐이었다. - P254

 카페테리아로 가는 사람들이나 농업부 교대 시간에 맞춰 출근하는 사람들과 최대한 덜 마주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대여섯 명과 마주쳤고 다들 나를 의심의눈초리로 보는 것만 같았다. 이런 게 피해망상일까? 그럴 수도있다. - P255

방은 체력 단련실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내 방보다 고작 두세 배 정도 넓은 방에 한 줄로 놓인 러닝머신 몇 대, 턱걸이용 철봉 하나, 아령 대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텅 비어 있지 않았다.
러닝머신에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 P255

우리는 서로를 빤히 보았다. 그녀는 러닝머신을 멈추고 바닥으로 내려와 가슴팍 앞으로 팔짱을 꼈다.
"여기서 뭐 해?" 내가 간신히 한 마디를 뱉었다.
그녀는 눈을 굴리며 말했다. "지금 네가 그 질문을 하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해?"
나는 눈을 감고 맥박이 거의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심호흡했다.  - P256

운동을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는지 땀을 별로 흘리지않았다.
"아, 장난치지 말고. 너 여기서 뭐해? 지금 식량 부족 상태인 건 알지?" 내가 물었다.
"응, 알아" 캣이 말했다.
"그런데?"
캣이 한숨을 쉬었다.  - P257

캣의 표정이 누그러져서 나는 손을 내렸다.
"그래, 이해해 몰랐겠지만 니플하임에서 몽고주름이 있는 여자는 매기 링과 나뿐이야. 네 기분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것 같아." 그녀가 슬쩍 웃더니 제안했다. "이렇게 하자. 네가 나를 신기한 대상 취급 하지 않으면 나도 너를 신기한 대상 취급하지 않을게."
나는 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좋아."
우리는 악수했다. 그녀의 미소가 잠깐 환하게 빛났다가 그녀가 손을 놓는 순간 사라졌다. - P258

그녀는 목이 멘 채 웃음을 터뜨리더니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어느새 웃음은 흐느낌으로 변했다.
"이제 혼자 방을 쓰게 되어서 좋아할 거라 생각했니?"
나는 캣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다가 내가 앉은 러닝머신 쪽으로 다가와 내 옆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았다.  - P259

"이런 말을 한 걸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알다시피 나는 이제 방을 혼자 써."
나는 고개를 돌리고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채 그녀를 보았다. "이제 나를 신기한 대상으로 생각하기로 한 거야?"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거든. 빈 침대 하나를 노숙자에게 빌려주려는 것뿐이야. 하지만 너랑 나샤가 그렇게 개방적인 관계라니 좀 놀랐어. 어제는 전혀 그런 사이로 보이지 않았거든." - P260

16장

. 캣의 침대와 그녀의 전 룸메이트의 침대를나란히 붙여 두었지만, 결국 우리 둘 다 캣의 침대에서 잠이들었다. 캣에게는 습관이겠지만 나는 어쩐지 세상을 떠난 지얼마 안 된 사람의 침대를 마음대로 사용하는 게 무례하다는생각이 들었다.  - P261

"거의 9시야 갈 데 있어?"
좋은 질문이었다. 근무자 명단을 보려고 눈을 깜빡였다. 수경재배 팀으로 가서 반쯤 죽은 줄기들을 살피고 토마토 한두개를 수확할 예정이었다. 일정대로라면 한 시간 전에 도착해야했다. 하지만 결근 알람이 오지 않은 것을 보니 에잇이 이미 내려가서 잎을 솎아내고 산성도를 확인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 P262

"오늘 쉬는 날이야. 너는?" 내가 말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지난 이틀 동안 임무 수행 중에두 번이나 죽을 뻔했어. 보통 이럴 때 경비대에서는 임무를 반나절만 줘. 12시까지는 출근할 필요 없어."
나는 아직 부어 있는 왼쪽 손목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몸을 뒤척여 그녀의 팔 밑에서 빠져나와 일어나 앉았다. - P263

"모르겠어. 쉬는 날을 가져 본 지가 오래돼서 내가 말했다.
또 다른 내가 농업부에서 스포이트로 아기 토마토에 양분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아는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길 바라며돔을 어슬렁거리려고 했지만, 사실 그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캣은 바지를 입고 침대에 다시 앉아 부츠를 신었다. - P263

 나는 착륙 이후로는 더더욱 혼자서 일해 왔다. 내가 영혼 없는 괴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끊임없이 사형 선고를 받는 나와는 왠지 어울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만은 모른 척해 줘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 P264

미드가르드의 많은 것들이 그리웠지만 뜨거운 물로 하는 샤워야말로 목록 첫머리에 있었다. 짜증스럽게도 돔 밖에는물이 넘쳐났다. 하지만 돔 안쪽 시스템은 드라카와 완전히 같아서, 여전히 항성 사이 우주 공간에 있을 때처럼 물을 보관하고 있었다.  - P265

 나는 카운터로 가서 오큘러를 스캐너에 가져다 댔다.
삑 소리가 나고 오늘 치 배급량이 내 시야 왼쪽에 표시되었다.
배급이 600킬로칼로리 남았다고 표시되었다. 에잇이 아침을거하게 먹은 모양이었다.
화를 내고 싶었지만 비난할 수 없었다. - P265

 페이스트는 돌아서기도 전에입속에서 사라졌다. 오늘 내 몫은 300킬로칼로리니, 이제 잠들기 전까지 페이스트를 반 컵 정도 더 먹을 수 있다.
"그걸 대체 어떻게 먹는지 모르겠어." 카운터 끝에 있는 배식구에서 음식이 미끄러져 나오는 동안 캣이 말했다.
나는 그녀를 흘긋 보고 한마디 쏘아붙이려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고개를 저었다.
"농업부에 있는 친구들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 P266

그녀는 두 입째 먹으며 대답했다. "뭐, 아문센이 크리퍼 문제로 꽤 화가 나 있어. 교대를 열두 시간 간격으로 하라는데 엄청 힘들 것 같아. 게다가 임무 중에 항상 선형 가속기를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는데, 역시 반길 일은 아니지. 낯선 무기이기도 하고, 너무 무거워서 근무 끝날 때쯤 되면 어깨가 빠질 것처럼 아파지니까 좋은 점이 있다면 지난 이틀 동안 일어난 일때문에 돔에서만 머무르게 됐어. 밖을 돌아다니면서 동상 걸릴 일은 없어졌지." - P267

"어쨌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너는 어때? 오늘 뭐 할지 생각해 봤어?" 그녀가 말했다.
"아, 말했잖아. 그냥 쉬는 거지 뭐. 사이클러 페이스트나 빨면서 다음번에는 마샬이 뭐라고 날 협박할지 기다리고 있어. 천국에서의 하루를 즐기는 수밖에."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지막한 웃음도 아니었다. 빙판에 넘어지는 누군가를 보고 터뜨릴 만한 폭소에 가까웠다. - P268

"아니, 다 아니야. 나는 범죄자가 아니야. 만약 그랬다면 미드가르드의 첫 번째 개척지 임무에 내가 낄 수 있었을 거라생각해?"
"익스펜더블로서? 응, 어쩌면 훈련받는 동안 누군가를 징발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그래, 나도 들은 적 있어. 네 말대로라면 네 판단력에 대해 고민을 좀 해 봐야 하는 거 아니냐? 어제 강도 살인을 저지른 성범죄자와 밤을 보낸 거잖아." - P269

그웬의 사무실로 가게 된 이유를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도있었다.
말할 수 있지만 말하지 않기로 했다. 나 좋자고 하는 거짓말도 때로는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알겠어? 내가 이상주의자인가 보지, 유니언 시민으로서 내 몫을 하고 싶었는지도." - P270

캣이 말했다. "내 말은, 이런 곳에서 살고 있으면 죽일 수 없는 몸이 확실히 장점이 많겠다고."
"죽일 수 없는 몸이 아니야. 나는 계속 죽어. 익스펜더블이되는 건 그런 거라고."
"그래도 넌 여기 이렇게 있을 수 있잖아. 하지만 질리언은?"
그 질문에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이 얼굴을 찡그리며 모자란 영양소를 보충하기 위해 담아 온 사이클러 페이스트를한입에 털어 넣는 동안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 P271

"저기, 오늘 밤 근무 일정이 어떻게 돼?"
나는 망설였지만 거짓말할 이유가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일이 없을 텐데, 왜?"
캣은 다시 앞으로 몸을 숙였다가 테이블을 밀며 일어나 쟁반을 집어 들었다. "그래? 오늘 쉬는 날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밤에도 쉬어?" - P272

캣이 사라진 다음 나는 태블릿을 꺼내 개척지 탐사에 참여한 익스펜더블에 대한 기록을 검색했다. 개척지에서 항상 익스펜더블을 활용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된 지는 불과 2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다.  - P272

하지만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당연히 종교적인 반발이 있었다. 끊임없이 죽는 조건으로 감방에 수용된 사람을 풀어 주는 것도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 P273

자료를 다 읽고 나니 거의 12시가 다 되어 있었고 카페테리아는 다시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배는 이미 꺼진 지 오래되어 요동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접시에 음식을 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욱 배가 고파졌다.  - P273

사람을 고민하게 만드는 ‘만일이었다.
만일 내가 오늘 치 배급을 몽땅 써 버릴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무엇일까? 어차피 에잇은 사령부에 가서 불만을 이야기할 수 없는데.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 P274

아직 150킬로칼로리를 사용할 수 있지만 지금 당장 질척한페이스트를 한 잔 더 삼키려니 도저히 내키지 않았다. 그냥 방으로 돌아가 낮잠이나 자며 에너지를 아끼기로 했다. - P274

"근무 중 아니야? 어디 가?"
(중략)
남자는 얼굴을 찌푸렸다. "3분 안에 와 오늘 오후에 토마토에 새로운 파지를 테스트한다고 위험할 수도 있어서 파지를바를 때 네가 있어야 해."
"그럴게. 얼른 갈게." - P275

에잇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즐거운 기색은 전혀 없었다. "곧그렇게 될 것 같은데, 친구, 오늘 아침에 내 몫의 3분의 2를 먹어 치웠는데 지금 내 팔도 뜯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배가 고파." 그러고는 침대로 쓰러졌다. "옆으로 좀 비키지?"
그는 부츠를 벗고 한숨을 쉬며 자리에 누웠다. - P276

에잇은 내가 배에 올려놓은 왼손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손목에 붕대를 꽉 감아 두었지만, 엄지손가락이 시작되는 자리에 아직 보라색 멍이 삐져나와 있었다.
에잇이 감았던 붕대는 책상 의자 등받이에 아무렇게나 걸쳐있었다.
"아, 맞다. 그랬지. 미안"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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