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범주화: 유사성과 연관성 찾기
연상을 통해 재료의 가능성을 두루 살핀 이후에 해야 할 작업은 ‘정리‘다. 정리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쓰면서도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한 적은 드물 것이다. 정리란 정확히 뭘까? - P71
예를 들어 책꽂이 정리만 해도 저자 이름 가나다순, 책 제목 가나다순, 책 크기순, 구입 연도순, 책등 색깔순, 만족도 별점순 등 선택할 수 있는 분류 기준이 많다. 이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개별 책의 배치 순서를 정할수 있다. 에디터가 하는 일도 비슷하다. - P71
손 안에 든 재료를 특정 기준을 세워 정리하고, 그로부터도출할 수 있는 의미나 시사점을 찾아내기 위해 습관처럼 질문한다.
"이걸 뭐랑 묶지?" "묶어서 어떤 이름을 붙이지?" - P72
(전략), 마케팅에는 얼마나 도움이 되나 등등 다양한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질문을 마구 펼친 다음분류해서 상위개념화한다. "이걸 뭐랑 뭐지?", "묶어서 어떤 이름을 붙이지?" 이것이 목차 혹은 개요가 되는 셈이다. - P74
범주화는 우리 뇌가 정보와 세상을 인지하는 핵심 프로세스다. 이에 대해 촘촘하게 설명한 『사고의 본질』이라는 책을 매우 즐겁게 읽었는데, 책의 공동 저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와 에마뉘엘 상데는 유사성을 인식하고 라벨을 붙여 머릿속 서랍에 정리하는 범주화가 지성의 연료이자 불길, 원천이자 결과물이라고설명한다. - P75
범주는 여러 현상을 통해 그것을 머릿속에 구축한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 가령 대상과 행동 그리고 상황의 보이지 않는 측면을 ‘보이게‘ 만든다. 범주화는 명확한 관점을 제시하고, 숨겨진 항목이나 속성을 감지하게 하고, 미래의 사건을 예측하게 하며, 행동의 결과를 예견하게 하여 자신이 속한 상황을 이해한다는 느낌을 준다. - P75
다른 놀이도 해보자. 이번에도 역시 괄호를 채우면 된다.
ㅇ 내가 만약 과자라면 나는 ()일 것이다. ㅇ 내가 만약 자동차라면 나는 () 브랜드일 것이다. ㅇ 내가 만약 동물이라면 나는 ()일 것이다.
이 질문은 기업 브랜드 컨설팅을 할 때 실제로 종종 사용하는 문장이다. ‘우리 브랜드가 과자 브랜드라면 무엇에 가장 가까울까?‘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자사 브랜드의 본질을 규정하는 자기만의 설명이 먼저 나와야 한다. - P77
편집은 무질서한 재료를 분류하고 조합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에디터는 정보 사이의 거리와 관계를 다각도에서 파악한뒤 순서를 부여해 매력적인 스토리 혹은 메시지로 빚어내는 일을 한다. - P78
IBM의 프로덕트 디자이너 베티 퀸 Betty Quinn이 인스타그램에서 진행하는 사이드 프로젝트 ‘Art History Fashion‘ 사례를 보자. 디자인과 미술사학을 전공한 그는 2017년부터 미술 작품과 패션 사진을 매칭하는 게시물을 올린다. - P78
시각 문화사의 창고에 쌓여 있던 재료들이 베티 퀸만의편집을 거친 뒤 동시대 문화계의 의미망 안에서 새로운 지위를얻었다. 유사성을 알아차리고 연결하는 편집의 가치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 P79
반면 숨어 있던 구조적 유사성을 파악하고 새롭게 재해석한 창작 앞에선 보통 이런 감탄사가 터진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을까?" 감탄의 이유가 발상의 독창성에 있다. 예를 들어 기원전 1세기경 로마에서 건축가로 활동한 비트루비우스는 특별한 음향장비 없이 소리가 멀리까지 잘 전달되는 원형 극장을 설계했다. - P81
유추는 ‘같은 종류의 것 또는 비슷한 것에 기초하여 다른 사물을 미루어 추측하는 일‘이다. 이것은 문학가나 과학자들에게만 필요한 사고력이 아니다. A의 구조를 빌려서 그와 유사하다고 여겨지는 B에 적용하는 능력은 기존의 정보를 새롭게 조합하는 모든 이에게 유의미하다. 친숙함에서 새로움으로 도약하는 강력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 P82
서울시립미술관 《그리드 아일랜드》 전에서 만난 백정기 작가의 <자연사박물관>은 먼저 어마어마한 물성으로 인상 깊게 다가온 작품이다. 물이 담긴 수백 개의 유리병과 유리잔이 선반에차곡차곡 놓여 있는데, 각 선반은 유대류, 소목류 등 하나의 생물 분류 체계를 상징한다. - P82
이 작품에서 배울 수 있는 에디터적 사고력은 무엇일까? 백정기 작가는 동물(생명체)과 유리병이라는 멀리 떨어진 두 대상사이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구조를 찾았다. 바로 물을 몸에 지니고 산다는 점이었다. - P84
작가가 부여한 메시지/의미
1. 물 자체는 형태가 없고, 컨테이너 형태에 따라 일시적인모양으로 살아간다. 2. 인간, 동물, 미물도 결국 하나의 물을 공유한다. 고로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 P84
현대미술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 이런 식의 사유는 얼핏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A에서 발견한 내용을 B에 적용시킴으로써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인식을 만들어내는 작업은 우리 모두가 매일 밥 먹듯 한다. - P84
블로그 포스팅에 단골로 등장하는 카피부터 우아한 미술관전시 작품, 수억 원의 투자금이 걸린 비즈니스 모델 발굴에 이르기까지, 유사성을 지렛대 삼아 도약하는 아이디어는 어디에나 있다. 제임스 웹 영은 『아이디어 생산법』에서 이렇게 썼다. "오래된요소들을 가지고 새로운 조합을 만드는 능력은 관계를 알아보는 능력에 크게 의존한다." - P87
11. 질문: 좋은 질문 만드는 법
나는 인터뷰라는 독특한 형식의 대화를 사랑한다. 사랑이라는 거대한 단어를 주저 없이 붙일 만큼. 만약 인터뷰가 에디터의 주된 업무가 아니었다면 이 일을 20년이나 하지 못했을 것이다. - P195
학위가 있거나 명성이 높은 사람만이 현인인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언제나 배울 점이 있다. 나를 당황스럽게 하거나 인터뷰가 잘못 흘러간다는 느낌을 주는 인터뷰이조차 다른 주파수를 이용해 내게 지혜를 전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 믿음은 ‘about a father‘ 프로젝트를 하면서 단단해졌다. - P196
이런 취재는 예술가나 명사 인터뷰보다 열 배 정도 긴장된다. 인터뷰이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처음 만난 취재원이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고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순식간에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마음을 열고 자기 이야기를 해줄지, 어떤 맥락으로 대화가 흘러갈지, 그렇게 나눈 대화가원고로 남길 만큼 유의미할지, 아무것도 담보되지 않은 상황으로 뛰어드는 취재인 것이다. - P196
소맷단이 닳은 작업복을 입고, 담배 한 갑 정도를 연달아 피운것 같은 걸걸한 목소리의 60대 어르신이 말했다. ‘쉽고 편리한게 늘 좋은 건 아니야‘ 간결하지만 깊고 아름다운 지혜. 길거리에서 오래 서성이며 차곡차곡 쌓아간 인터뷰가 100명을 향해갈 무렵, 이제는 누구를 만나도 고유한 이야기를 발견하고 언어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배울 점이 있다는 믿음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 P198
직업적으로 질문을 달고 사니 역으로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좋은 질문 만드는 법을 알려주세요." - P198
그때마다 이오덕 선생이글쓰기, 이 좋은 공부에 쓴 아래의 문장을 떠올린다.
글감은 단순한 객관 사물로서 글의 재료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물과 경험 가운데 특별히 글 쓰는 이의 마음에 들어온 그 무엇이다. 쓰는 이의 마음에 특별히 들어왔다는 것은 쓰는 이의 삶 속에서 그 무엇이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말한다.
인터뷰는 일차적으로 인터뷰이의 생각을 옮기는 글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설명하면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벌어진 상호작용을 인터뷰어 관점으로 기록한 글이다. - P199
초심을 기억하라. → 초심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왜요?
시간은 금이다. →시간은 금이라고 생각하세요? 왜요?
상대방이 전제하고 있는 믿음을 가시화해서 되묻는 것이다. - P200
이렇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전제부터 질문하면서 검사대에 올린다. 이런 검증 과정 끝에 원래의 전제가 강화될 수도 있다. ‘요모조모 생각해봐도 역시 꿈은 찾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 P201
셋째, 사안을 바라보는 위치와 상황적 맥락을 바꾸는 질문을 즐겨 한다. (중략). 왜냐하면 우리는 개인이지만 동시에 관계의산물이기도 하니까. 상대의 오늘을 만드는 데에 영향을 미친 수많은 사회적 가닥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려고 한다. - P201
넷째, ‘무엇을 했나요?‘보다는 ‘어떻게 했나요?‘를 궁금해하고, ‘어떻게 했나요?‘보다는 ‘왜 했나요?‘를 궁금해한다. 인터뷰는 묻는 자말하는 자, 단둘의 대화다. 인터뷰이의 경험과 생애는 그 누구의 것과도 같지 않다. 하지만 인터뷰 결과를 담은 콘텐츠는 세상으로 나아가 다양한 사람들에게 두루 읽히면서 공감을 얻어야 한다. - P202
반면 ‘왜 했나요?‘라고 물으면 인터뷰이는 감정과 동기를 회고하게 된다. 사회적 조건과 경험은 천차만별일 수 있지만,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정과 동기는 부유하든 가난하든 나이가 많든 적든 별반 다르지 않다. - P202
마지막 다섯째, ‘내가 그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상상하고 묻는다. 그다음 ‘내가 독자라면 무엇이 궁금할까?‘ 상상하고 묻는다. 취재원과 독자 모두에게로 건너가보는 상상을 하면서 중간에서 둘을 어떻게든 이어주려고 안간힘을 쓴다. - P203
어쩌면 처음엔 에디터로서 직업적으로 좋은 결과물을 내기위해 훈련한 감정이입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질문이라는 형식으로 타인에게 악수를 청하고, 에고라는 단단한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경험이 쌓일수록 뾰족하게 긴장하고 살던 인간 최혜진이 천천히 유연해지고 편안해졌다.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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