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부와 후일담을 보면서 뭔가가 생각나지만, 도입부에서 뭐가 생각났는지는 까먹었다.
후일담에서는 영화 ‘라따뚜이‘가 생각났다.

Prologue

이 이야기는 빛바랜 사진 한 장에서 시작한다. 내가 떠올릴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 중 하나다. (중략) 그 장면 속에는 늘 언니가 있다. - P11

둘째에게 첫째는 주어진 환경이다. 국적, 성, 인종, 피부색, 체형처럼 생후 1일부터 그냥 주어지는 삶의 조건이자 자아의 거푸집 같은 것. - P12

세 살 터울 언니는 두 옥타브 ‘솔‘의 쨍한 목소리로 하루 종일 떠드는 어린이였다. 좋게 표현하면 즉흥 구연동화이고, 실제로는 아무말 대잔치이며, 나쁘게 표현하면 소음이라 할 만한 종알거림을 쉼 없이 이어갔다. 할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입을 여는 게 아니라 일단 입에 시동을 걸고 생각을 굴렸다. - P12

문제는 언니의 즉흥 창작이 의식의 자유 흐름대로 급커브하거나 뚝 끊어지거나 갑자기 솟구치거나 갈피를 잃고 시들해지는일이 다반사였다는 점이다. 도대체 맥락이란 것이 없었다. 줄거리와 요점이 없는 말의 홍수를 두 옥타브 ‘쏠‘로 쏟아내는 7세 어린이 곁에서 4세 어린이는 사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실감했다. - P12

적극적 경청을 조기교육당한 덕분인지 나는 또래보다 말이 빨랐고, 의미 차이에 민감했다. 유치원에 갈 즈음이 되었을 땐 언니 이야기의 전후 관계를 파악해서 정보 공백이나 오류를 감지해 되묻고("아까는 곰이 왕자라고 했잖아. 왜 지금은 왕비야?"), 자기 말에도취되어 반환각 상태에 이른 나의 사랑하는 언니가 길을 잃지않도록 요약해주었으며("그래서 둘이 결혼했다는 거잖아. 그다음엔 어떻게 됐는데?"), 이야기의 신선함과 흥미로운 정도를 평가하는("그게 뭐야? 시시해") 대화 상대가 되었다. - P13

반면 지난 20년간 미디어업계는 단 하루도 고요하지 않았다. - P13

스마트폰과 SNS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2010년대 이후의 변화를 요약하자면 이 두 문장이 아닐까. ‘기업, 개인, 사물. 모든것이 미디어가 되었다.‘ 그래서 ‘볼 게 너무 많다.‘ 2010년대부터 신문과 잡지는 손꼽히는 사양 산업이 되었고, 불안과 무기력이 짙은 안개처럼 업계 전체를 덮쳤다. - P14

예감은 현실이 됐다. 패션 잡지 단골 기사였던 스트리트 리얼룩 콘텐츠는 ‘스타일쉐어‘가 인테리어 집들이 콘텐츠는 ‘오늘의집‘이 코스메틱 품평 콘텐츠는 ‘화해‘가 서비스로 만들었고,
포털 사이트는 아예 조인트벤처로 잡지사를 차렸다. - P14

정확하게는 온 국민이 준 에디터가 된 게 아닌가 싶다. 지금이 순간에도 수많은 이들이 SNS에 올릴 사진과 영상을 고르고 편집하고, 바디 텍스트를 쓰며, 자기만의 해시태그를 정해 콘텐츠를 아카이브한다. 방대한 하이퍼링크 세상에서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스스로 큐레이션해 상황별 추천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고, 영감 수집 부계정을 운영하며, 정기적으로 뉴스레터를 발행한다. - P15

(중략), 런던 테이트 브리튼에서 큐레이터로 재직하기도한 미술비평가 니콜라 부리는 자신의 저서 『포스트프로덕션』에서 이렇게 썼다.

이제 예술적 질문들은 ‘어떤 새로운 것을 우리가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이다.

나는 저 문장이 온 세상이 잡지화되어가는 이유를 설명한다고 믿는다.  - P15

선택과 주목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정보를 비교하고 검증하는 일도 벅차다. 자신의 취향, 호기심, 판단력을 알고리즘에 외주 주거나 타인에 대한 모방으로 때우는 일이 빈번해진 이유다.  - P16

바로 이 지점부터 기존 재료로 인지적 차별점을 만들어내는편집 능력이 중요해진다. 조리의 기본기와 실전 경험을 갖춘 사람이라면 식재료가 발에 차이게 많은 과잉 공급 환경에 놓여도차분하게 비전을 그릴 것이다. 재료의 산만함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만의 계획과 속도대로 식탁을 차려낼 것이다. - P16

나는 에디토리얼 씽킹이 정보 과잉 시대의 조리 기본기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직업적 스킬 차원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두 옥타브 솔의 목소리를 가진 7세 어린이 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썼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소화하기 버거운 사건을 겪을 때마다 편집이 지닌 놀라운 힘을 체험했다. - P16

 니콜라 부리요가『포스트프로덕션』에서 쓴 문장처럼 ‘우리가 리얼리티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의 몽타주‘일 뿐이다. - P17

테드 창이 『숨』에서 쓴 아래 문장처럼.

기억이란 우리가 살아온 모든 순간을 공평하게 축적해놓은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애써 선별한 순간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서사이다. 설령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건들을 경험하더라도 우리가 똑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 P17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작은 실패의 순간을 유독 예민하게 그러모아서 ‘나는 의지박약이야‘라는 자아상을 그리고, 다른 사람은 작은 성취의 순간을 유독 예민하게 그러모아서 ‘나는 마음먹으면해내는 사람이야‘라는 자아상을 그리기도 한다. 객관적 사건의 양상보다는 해석과 의미 부여가 인지적 차별점을 만든다. - P17

지난 20년간 에디터로 일하며 얻은 가장 소중한 삶의 자산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의미의 최종 편집권이 나에게 있다‘는 감각이다. 삶은 언제나 예측 불가하고, 뒤죽박죽 난장판 같은 사건과 사실이 끊임없이 들이닥친다. - P18

스물두 살 이후 인생의 절반을 에디터로 살았다. 무작정 달려들고 대차게 깨지고 한없이 작아지고 이따금 살아나고 끝끝내 버티고 울고 웃고 하면서 온 마음으로 일했다. 그 시간을 한 권의 책으로 갈무리할 수 있어 기쁘다. 업에 대한 자긍심을 지킬 수 있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주었던 동료 에디터들과 힘든 출간 과정을 함께해준 나의 소중한 편집자 김보희 님에게 특히 감사하다. - P18

Epilogue

책을 쓰는 동안 종종 자문했다. ‘이 책은 정체가 뭘까? 일에대한 에세이집인가? 에디토리얼 씽킹 개념을 잡는 이론서인가?
에디팅과 현대미술의 공통점을 서술하는 인문서인가? 도대체 정체가 뭐지?‘ 끈기 있게 마지막 원고까지 읽어주신 독자를 당황시키는 고백일 수 있지만, 솔직히 지금도 서점 분류 체계의 어느 코너에 이 책이 꽂힐지 감이 오지 않는다. - P217

『에디토리얼 씽킹』은 순전히 개인적 동기로 집필했다. 에디터 근속 20주년을 맞아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면서 책을 썼다. 해외여행이나 귀한 물건을 선물하는 것도 좋겠지만, 인생의 절반을 바친일의 의미를 고유한 언어로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남기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은 없겠다 싶었다. - P217

. 20년 동안 몸으로 체득한 에디팅 방법론을 세세하게 단계별로 펼치고 분류하고 재인식해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는 작업은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깜찍한 야심도 있었다. 장르, 산업,
시대를 불문하고 채집한 시각 자료, 논문, 밈, 참고도서를 종횡으로 오가면서 맥락을 만들고 이야기 타래를 풀어가려고 했다. - P218

세상에는 진입 장벽이 높은 직업과 그렇지 않은 직업이 있다.
일을 하기 위한 자격을 얻기 위해 시험이나 검증 과정을 통과하는 직종과 달리 잡지 에디터, 콘텐츠 에디터는 사실상 누구나 될수 있다. 예전에는 미디어사 공채 시험을 통과하거나 경력직으로 입사해 편집부에 소속되면 에디터라고 불렸는데, 세상 모든 것이 미디어가 되는 요즘에는 딱히 그런 경계가 없다. - P218

 이런 에피소드들이 쌓여내 안에서 커다란 질문이 되었다.

에디터는 전문가일까?
에디터의 전문성은 어떻게 정의할까?
전문가로서 에디터는 어떤 가치를 만들어낼까?

위 질문에 답하려 애쓰다보니 이 책이 나왔다. 요리에 빗대어 생각하면 복잡할 것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이 요리를 한다. 그렇다고 셰프의 전문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요리를 꽤 잘하는 일반인과 전문 셰프의 차이가 무엇일까? - P219

 에디팅도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누구나 에디팅 기술을 활용해 상대에게 필요한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 P219

나는 에디터가 원고 편집이나 윤문하는 사람, 혹은 마케팅머티리얼 제작 말단의 업무를 대행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미를 가시화하는 전문가‘, ‘문자 언어로 인식의 틀을 제공하는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 P220

 에디터에 대한 인식이 중구난방인 현실에서 이 책이 에디터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설명하는데에 조금이라도 기여했으면 좋겠다. - P220

글을 쓰는 동안 에디터의 레이더가 언제나 바깥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에디터는 요즘 사람들이 열광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재미를 느끼는지, 유의미한 성과를 내는 이들에겐 어떤 비밀이 있는지, 새로 뜨는 맛집 목록부터 노동요 플레이리스트까지 삶의 구석구석에서 의미 있는 무언가를 찾아내려 안달하고 묻고 취재하고 듣고 다닌다. - P220

"에디터 최혜진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한 지난 20년 동안,
에디터 일은 소심하고 파리했던 나의 자아를 부드럽게 떠밀면서 먼 바깥으로, 조금 더 먼 바깥으로 나아가게 했다. (중략). 더 나은 이야기를 상상하게 했다. 그렇게 내 삶의 의미를 스스로 써내려가는 자리에 설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책은 나에게 오직 좋은 것만 주었던 내 일에 보내는 감사 편지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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